[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刀筆吏의 시대

기사입력 오후 3:31:38

刀筆吏의 시대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가운데 정치 사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유가(儒家)와 법가(法家)였다. 전체적으로는 유가가 더 널리 퍼져 있었지만 진(秦)나라는 법가를 채택해 부국강병을 이룸으로써 천하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가는 진나라가 오래 가지 못하고 망하게 된 원흉으로도 꼽힌다. 시황제가 죽은 뒤 환관 조고(趙高)가 권력을 장악해 유능한 인재를 멋대로 죽이고 나라를 망친 것은 법가에 의거한 맹목적 통치체제 덕분이었다고 지적된다. 그리고 형식적 법률체계에 매달려 백성을 편하게 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민심이 반란군 쪽으로 휩쓸리게 되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뒤를 이은 한(漢)나라가 법가를 기피한 것은 이런 나쁜 평판 때문이었다. 그러나 효율적 통치 방법으로 법가의 매력을 황제들은 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한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되는 무제는 법가 전통을 이어받은 혹리(酷吏)들을 많이 등용했다.

<사기> '혹리열전'의 가장 대표적 인물은 장탕(張湯)이다. 장탕이 미천한 출신으로부터 3공의 하나인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신분에 오른 것은 법체제의 정비와 집행을 엄혹하게 한 공로 덕분이었다. 너그러운 정치를 주장하던 순리(循吏)의 대표적 인물 급암(汲黯)은 혹리들의 득세가 민심을 각박하게 만든다고 탄식하여 "도필리(刀筆吏: 기능직 관리)에게 정치를 맡기면 안 된다는 말이 맞음을 장탕을 보면 알 수 있다. 천하 사람들이 외발로 서 있는 듯 불안하고 서로를 곁눈질로 쳐다보게 되었다"고 했다.

장탕이 후에 모함에 걸려들어 엄혹한 법집행의 대상이 되었을 때 결백함을 밝히려고 발버둥을 치자 오랜 동료 조우(趙禹)가 타일렀다. "자네의 고발로 신세를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자네가 쓰던 법망에 이제 자네가 걸려들었는데 이 법망을 어떻게 무너뜨리겠단 말인가?" 이에 장탕은 체념하고 자살하였으며 덕분에 그의 명예와 자손은 보전되었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은 '혹리열전' 서문에서 정(政)과 형(刑)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이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므로 덕(德)과 예(禮)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물리적 규제보다 심리적 감화가 질서의 중요한 원천임을 지적하며 법치의 한계를 말한 것이다.

요즘 정치권에서 걸핏하면 '법적 대응'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정치'의 실종을 걱정하게 된다. '법적 대응'은 의혹을 푸는 유일한 길도 완전한 길도 아니며 정치의 사회 지도 기능을 없애는 길일 뿐이다. 무제 때 혹리들은 법치의 명분으로 공포 정치를 도입, 황제의 통치를 쉽게 만들어줬지만 정치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자기들 신세도 망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계할 일이다.

▲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깨뜨렸다고 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품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퇴임 후 1년 동안 털어서 찾아낸 '떡'이 왕년의 '떡고물'보다 초라한 것으로 드러나면 이 국론 분열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해먹어도 치사하게 해먹었다"고 하는 노까들과 "드셔도 참 서민답게 드셨다"고 하는 노빠들 사이에? ⓒ프레시안

  지난 1월 23일 이 자리에 올린 10년 전 칼럼 "황제의 꿈"은 진시황 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법치 원칙 회복과 함께 지도력 육성과 도덕성 강화를 위한 꾸준한 노력을 우리 사회는 필요로 한다"고 결론 맺은 것이었다. (☞관련 기사 : 황제의 꿈)

며칠 전 '박동천 칼럼' "'진시황 식 법치'로 가는가?"를 보니 법치를 "법으로 다스림"과 "법이 다스림"으로 구분한 것이 눈에 띈다. 중국 고대에 형성된 법가 사상과 서양 근대에 만들어진 법치 관념을 멋지게 대비한 시각이다. 20세기 초까지 지속된 중국의 황제 제도의 전제적 성격이 이 시각에 잘 포착된다. (☞관련 기사 : '진시황식 법치'로 가는가?)

그러나 현실은 관념처럼 산뜻하게 재단되지 않는 구석이 많다. 중국의 경우 "법으로" 다스린다 하지만,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법이" 다스리는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었다.

당 태종(627~649)은 가장 강력한 전제권력을 누린 중국 황제의 하나다. 태자였던 형을 제거하고 그가 황제가 되는 과정에는 목숨을 걸고 보필한 심복들이 있었다. 그가 제위에 오른 10여 년 후 심복의 하나인 당인홍(黨仁弘)이 비리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태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법이란 하늘이 임금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사사로운 정으로 당인홍을 풀어주고자 하니,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남교(南郊)에 멍석을 깔아 하늘에 죄를 고하고 거친 밥을 먹으며 사흘 동안 근신하여 이 죄를 풀고자 한다."

현대의 법치에서도 용인되는 국가 원수의 사면권 행사를 위해 막강한 전제군주 태종이 이런 요란을 떤 것을 한낱 제스처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제스처에도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스처라도 이 제스처는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판결에 이르는 과정에 은밀히 개입하지 않고 판결을 존중하는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태종의 처남이자 중신이던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봉칙 편찬한 <당률소의(唐律疏議)>가 태종 사후 반행된(653) 사실에 이 에피소드를 비쳐볼 수 있다. 당시의 당나라에서는 법치의 확립이 절실한 과제였던 것이다. 제도적으로 볼 때 당시의 법은 의회 아닌 천자가 정하는 것이었으니, 법이 통치의 주체가 아닌 도구였다고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천자 자신의 노력에 따라 법을 통치의 주체에 가깝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법을 만드는 것이 천자 아닌 의회라 하여 통치의 주체로서 법의 위상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천자가 만들더라도 천자 자신이 지키면 법이 통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요, 의회가 만들더라도 의회 스스로 법을 잘 지키지 않으면 통치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과정 역시 천자의 이름으로 만들더라도 엄정한 절차를 밟을 수 있는 반면 의회에서 만들더라도 날치기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법이' 다스리게 하기보다 '법으로' 다스리고 싶은 유혹을 권력자는 느낀다. 진나라에 법치의 뿌리를 심었던 상앙(商鞅)이 권력을 잃고 법망에 걸려 탄식한 이래 법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집행하는가 하는 것은 중국사 전개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중세 유럽이 로마제국의 법체계를 잃어버리고 약육강식의 정글에 빠져 있는 동안 수당(隋唐) 제국은 고대 제국의 법질서를 회복하고 발전시켰다. 법의 과용과 남용이 이후 중국사에서 거듭 문제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법치의 원리는 중세를 통해 유럽 문명보다 중국 문명에서 더 큰 비중을 지켰다.

1748년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을 들고 나올 때는 인간을 초월하는 자연 법칙을 과학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에 뒤따라 인간 세상에서도 불변의 법칙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유럽 사상계에 떠돌고 있었다. 이 불변의 법칙을 법률로 제도화한다면 '법이'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근대적 법치 정신의 출발점이었다.

법치의 전통이 약하던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는 이상적 법치에 대한 환상을 억제하는 경험이 적었다. 중국에는 진시황 이후 그런 환상이 사회를 지배한 일이 없다. 사마천이 <사기>에 '혹리열전'을 두고 형정(刑政)보다 예덕(禮德)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런 환상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그 태도는 중국 문명의 꾸준한 전통의 하나가 되었다.

예덕이 경시되고 형정만이 힘을 쓰는 '도필리의 세상'에서 법은 과용되고 남용된다. 현 정권에서 현행법을 확대 해석하여 국민의 헌법상 권리를 제한하고 정략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도필리의 세상을 만드는 길이다. 그러던 끝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돈 문제로 검찰의 조사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청렴과 도덕성을 내세우던 노무현 씨의 일이기에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된 사안이 전임자들의 권력형 비자금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경미한 것으로 보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갑남을녀 수준의 돈 문제로 그토록 중요한 상징성을 지켜내지 못하다니. 무제 때 장탕이 걸려든 일의 내용을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경미한 것이었기에 그토록 억울해 했으리라.

평소 "구시대의 마지막 인물"이 되고자 하던 노 씨의 염원이 이런 고통을 통해서라도 이뤄지기 바란다. 청렴의 상징성이 깨어지더라도 도덕적 상징성은 살아남을 여지가 있다. 이제부터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일이다. 진정한 도덕은 세속과 등진 성인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고민과 고통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도필리의 세상을 막는 길이 여기에 있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解寃相生의 섬, 제주도

기사입력 오전 11:36:37

동백꽃 지는 계절

지금은 제주에서 동백꽃 지는 철이다. 50년 전의 4월 초에도 그랬다.

강요배 화백의 4·3 역사화전이 '동백꽃 지다'라는 제목으로 열린다. 전시회의 타이틀 작 '동백은 지다'는 꽃잎이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통째로 '툭' 떨어져버리는 동백꽃의 낙화 속에 50년 전 제주민의 수난을 그린 것이다. 민중의 수난으로 4·3의 본질을 보는 그의 시각은 6년 만의 전시회에 보태는 신작 몇 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한 지역의 특정한 사건으로보다 역사 전반의 비극성으로 눈길이 옮겨진 것이다.

역시 제주 출신의 작가 현길언 씨는 4·3을 '미친 시대의 광기(狂氣)'라 부른다. 광기는 합리적 이해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학술적 접근과 정치적 해법은 4·3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도, 그 상처를 아물리는 데도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문학과 예술의 직관적 접근과 정서적 카타르시스에서 그는 더 긴요한 몫을 기대한다.

그러나 학술에도, 정치에도 그 나름의 몫은 있다. 수십 년간 4·3의 비극성을 떠올리지도 못하도록 봉쇄해 온 '공산 폭동'론은 독재정권 시절의 유물이 되었지만 아직도 사법적으로는 그 그림자를 치우지 않고 있다. 국회의 진상조사위 구성도 의원 과반수의 발의서명을 받아놓은 채 해를 넘기며 서랍 속에서 잠만 자고 있었고, 학술적 규명도 아직 본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50년 전의 4월 3일 새벽 500명 가량의 무장대가 5·10 선거 반대와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추방을 내걸고 제주 각지의 경찰지서를 습격한 것은 공산 폭동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간 2만여 인명을 앗아간 내전 내지 학살 사태 전체를 그렇게 규정할 수는 없다. 어떻게 지역 주민의 10분의 1이 폭도로 소탕될 수 있었단 말인가.

1년간의 유혈 사태도 비극이었지만, 그 슬픔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지낸 40여 년의 세월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슬픔과 억울함을 펼쳐내기는커녕 연좌제의 피해까지 겹쳐서 겪어야 했던 세월이었다. 아마 이것이 더 먼저 풀어야 할 비극일지도 모른다.

발발 50주년 기념행사 중 '해원상생(解寃相生)굿'이 특히 눈길을 끈다. 4·3은 폭동이고 항쟁이고를 떠나 하나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시비곡직보다 비극성을 더 질실히 음미할 사건은 4·3 외에도 우리 현대사에 숱하게 많다.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굿판을 바란다.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꽃잎이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통째로 '툭' 떨어져버리는 동백꽃의 낙화 속에 60년 전 제주민의 수난을 그린 이 작품에서 화가는 역사의 비극을 자연에 대비시킨다. 특이한 자연 조건 속에 특이한 비극적 역사를 겪어 온 제주가 한국의 일부분으로 편안한 자리를 누릴 때 한국 사회도 21세기를 향한 올바른 자세를 갖출 것이다. ⓒ보리출판사

제주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 변방이었다. "삼수 갑산을 가더라도" 하고 북방의 오지를 들먹이는 관용어도 있지만, 산으로 막힌 삼수 갑산보다도 더 두터운 격절성을 바다로 막힌 제주는 가지고 있었다. 제주는 삼국시대부한국사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그 역사가 한국사에 통합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105년 탐라'국(國)'이 탐라'군(郡)'으로 바뀌면서 왕제(王制)를 없앴다는 기사, 그리고 1211년 제주로 이름을 바꾸면서 고려 조정에서 부사와 판관을 두었다는 기사를 통해 제주가 고려 영토로 편입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주의 역사와 본토의 역사 사이에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

1260년대부터 한 세기 동안 지속된 몽골 지배가 제주의 특이한 위치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마지막 저항 세력 삼별초를 1273년 제주에서 진압한 뒤 원나라는 제주를 고려 본국과 별도로 관리했다. 탐라총관부를 두고 일본 정벌의 기지로 삼았다가 후에는 목마장으로 경영했다. 1295년 이후 고려 행정체계에 회복된 뒤에도 원나라는 목호(牧胡)를 통해 제주에 대한 실질적 관리를 계속했다.

1370년대에 원나라가 쇠퇴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난 명나라를 가까이 하는 정책을 취할 때 제주의 목호들이 이에 저항해 난을 일으킨 것은 한 세기 동안 원나라가 제주에 쌓아놓은 체제가 강고했음을 보여준다.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 조정은 최영을 필두로 하는 2만5000명의 군대를 보냈다 한다. 당시 제주 인구가 5만 이하로 추정됨을 감안하면 '목호의 난'은 일부 친원 세력의 책동이라기보다 제주민의 전면적 저항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서서는 제주에 안정된 통치가 행해졌다. 1416년 섬 북쪽에 제주 목(牧)을, 남쪽에 정의와 대정의 두 현(縣)을 설치한 것이 50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안정된 통치는 제주민을 본토에 비해 열악한 조건에 묶어놓았다. 조선조 후기 내내 시행된 '출륙(出陸) 금지령'이 대표적인 제약이었다. 인적·물적 차단을 통해 제주는 마치 조선의 식민지처럼 관리되었다. 500년 동안 제주인은 조선 왕조의 정규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파견된 목사와 현령들의 통치를 받았을 뿐이다.

19세기 말 개항 이후의 상황이 제주에 변화의 물결을 몰고 왔다. 일본 상인들을 통해 제주 해산물에 수출의 길이 열리면서 경제 발전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일본의 공헌을 중시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는 통상 지나치게 극단화하는 경향 때문에 문제가 있지만 현상적으로 타당한 면이 있다. 제주의 경우는 이 타당한 면이 비교적 큰 편이다.

조선시대에 제주의 수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수출의 길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영향력과 통치 덕분에 제주 수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수산물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마음껏 밖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재일동포 사회의 향우회가 제주 출신은 마을 단위로까지 조직되어 있다. 다른 지역 출신 향우회가 군 단위나 도 단위로 조직된 것과 대비된다. 제주 사람들이 워낙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제주의 청년들이 일본과 조선의 여러 고등교육기관으로 유학함으로써 제주의 인적 자원도 개발되었다. 조선조 내내 제주 사람이 성균관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던 상황과 비교해 보라.

이런 배경 위에서 일본의 패망은 제주에 민족 해방이라는 기쁨에 앞서 엄혹한 현실 문제를 가져왔다. 해방 당시 제주도에는 약 15만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후 몇 달 동안 외지에 나가 살던 제주인 10여만 명이 귀환했다. 인구는 곱절 가까이 급격히 늘어났는데 산업과 교역이 침체하고 마비되어 극심한 생활고가 만연하고 그 위에 외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정치의식도 활발하게 작용해 제주도는 미군정의 치안 취약 지대가 되었다.

제주도의 치안 문제가 경찰과 반공단체의 개입을 불러오고, 이 개입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 끝에 1948년 4월 3일 대규모 민중봉기가 터져 나왔다. 이후 1년간 치열하게 벌어진 이 항쟁을 반공 독재정권이 '공산 폭동'으로 규정함에 따라 제주인들의 질곡은 수십 년간 더 계속되었다.

질곡을 무릅쓰고 제주는 다시 일어섰다. 한국의 경제 발전과 소비수준 향상으로 제주의 관광 자원과 특산물이 시장을 찾음으로써 경제적 흥기가 가능하게 된 것이지만 제주의 흥기는 경제적 흥기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가 반공 독재 분위기에서 겨우 빠져나올 때 <제민일보>를 앞세운 제주인들의 4·3 바로보기 운동은 민주화시대 한국 사회의 과거사 정리 사업에 선구가 되었다. 제주의 정신적 흥기가 한국 사회를 선도한 것이다.

▲ <동백꽃 지다>(강요배 그림, 김종민 증언 정리, 보리출판사 펴냄). ⓒ프레시안
제주는 그 특이한 위치 때문에 한국의 역사 속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 왔다. 바다 속의 섬이 반도국가에 귀속된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말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제주의 지리적 조건은 모처럼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한국 자체가 세계화의 흐름에 휩쓸린 이제, 그 개방적 자세의 첨단에 제주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자치가 일반 지방자치와 다른 차원의 '특별 자치'가 되어야 할 필요는 제주인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합의를 모아가고 있다.

'제주올레'란 이름의 특이한 움직임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걸어 다닐 길을 확보하자는 소박하다면 소박한 운동이지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자는 큰 뜻이 담긴 운동이기도 하다. 제주가 있음으로 해서, 육지와 다르다는 지리적 특이성 때문에 고통 받아 온 제주가 있음으로 해서 한국이 어떤 혜택을 받아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이 운동의 정신과 함께 제주를 제대로 아끼는 마음이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지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값비싼 국적

기사입력 오전 10:22:34

값비싼 國籍

외국인의 아이라도 한국 땅에서 출생하면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을 속지권(屬地權)이라 한다. 한편 한국인의 아이는 외국 땅에서 태어나더라도 역시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을 속인권(屬人權)이라 한다. 이 두 가지는 국적 취득 요건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또 하나 중요한 요건은 귀화(歸化)다. 속지권과 속인권이 출생 때 정해지는 조건인 데 반해 귀화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현대사회에서 점점 비중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귀화를 통해 떠나는 사람이 들어오는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지만, 근래에는 '독일제 한국인' 이한우 씨를 비롯해 귀화 입국자도 늘어나고 있으며 해외동포의 국적 취득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50여 년 만에 크메르에서 돌아온 이남이(훈) 할머니는 귀화가 아니라 '국적 회복' 절차를 통해 한국인이 됐다. 우리나라 귀화 기준은 너무 까다롭다. 5년 이상 합법적 체류를 한 뒤에야 귀화 신청이 된다. 李 할머니처럼 원래 한국인인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국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귀화보다 손쉬운 방법으로 국적 회복을 시켜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국적 회복의 길은 넓고 쉬워야 한다. 해외동포 중에는 좋아서 떠나간 것이 아니라 나라가 나라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떠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많다. 이들 중에 국적회복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회-경제적으로 웬만큼 부담이 되더라도 최대한 받아들여야 한다. 해외동포의 포용은 민족통일의 첫 발짝이기도 하다.

해외동포 정책을 보면 우리 정부는 통일의 자세가 돼 있지 않다. 법무부는 내규를 통해 독립유공자의 자손이나 직계 존비속이 생존해 있는 경우 등 극히 제한된 경우에만 국적 회복 신청을 받아주고 있다. 이남이 할머니도 원칙대로라면 신청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분 못지않게 고국을 그리는 동포들을 우리 정부와 우리 사회는 외면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이중국적 허용을 얘기하고 있다. 이중국적은 국제법상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국적 부여에 관대한 나라라도 다른 나라 국적을 얻는 사람에게는 국적을 정지시켰다가 그 국적을 포기할 때 자동적으로 회복시켜주는 것이 통례다. '우수한' 사람들에게는 외국 국적 위에 한국 국적을 보태 주려 하면서 한국인이 되고 싶어 하는 동포들은 못 본 체하다니, 시민권을 골프장 회원권 같은 것으로 아는 모양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미국 비자 받는 사람들은 줄을 섰다. 필자는 꼭 한 번, 1986년 이 줄에 서 봤고, 그 끝의 인터뷰는 군대 제대 후 최악의 치욕감을 느낀 경험이었다. 이태 후 미국에서 다시 초청이 있을 때 이 줄 서기 싫어 안 가려고 했더니 마침 그 때 만난 대구 미국문화원장이 비자를 대신 받아주었다. 개인의 치욕 대신 국가의 치욕을 느낀 경험이었다. ⓒ연합뉴스

  10년 전 나오던 이중국적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있다. 정부가 해외 우수 인력 유치를 위해 이중국적을 허용할 방침이라는 것이다.

"해외 우수 인력"이라 하지만 진짜 외국인 얘기가 아니다. 외국 국적을 딴 한국인과 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의 자손, 즉 해외 한민족을 염두에 두고 추진하는 정책이다. 그리고 해외 한민족이 많이 분포한 나라 중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미국뿐이다. 이중국적은 양쪽 나라에서 인정해야 성립하는 것이니, 이 정책은 한국산 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해외 한민족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바로 6자회담 참여국들이다. 그런데 중국, 일본, 러시아의 세 나라에는 해방 전부터 많은 한민족이 거주하고 있었고, 지금 거주하는 한민족의 대다수가 그 후손들이다. 미국에는 이와 달리 해방 후 한국인 이주가 시작되어 새로 만들어진 교민사회가 자리 잡았다.

해방 전 한민족의 이주는 영세민 위주였다. 농토 개간할 곳을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몰래 넘은 사람들, 막노동이라도 나은 임금을 받고자 현해탄을 건넌 사람들, 만척(滿拓)의 모집에 응해 가재도구를 이고 지고 만주 땅 곳곳으로 퍼져 나간 사람들이 식민지시대 한민족 해외이민의 주축이었다. 그들의 이주가 나라를 못 가진 설움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해방에 임해 절반이 넘는 200여만 명이 귀국한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다. 국내 형편도 막막한 시절이었지만 그들은 일본 통치가 종식되었다는 사실에만 의지해 그 동안 현지에 내렸던 뿌리를 거두고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미국으로의 길은 유학생들이 열었다. 초기 유학생들의 고생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접시닦이를 비롯한 그 고생담은 차원 높은 고생담이었다. 괜찮게 사는 집의 1류 대학 나온 자제들이 좋은 직장 들어가는 대신 미국까지 가서 궂은 일 하는 것이 중류 이상의 국내 가족들에겐 눈물겨운 일이었지만, 당시 한국의 대다수 인구가 처해 있던 상황에 비겨 보면 배부른 투정이었다. 귀국한 유학생이 시내 나갔다가 볼일이 급하자 택시를 집어타고 반도호텔 화장실로 달려가더란 이야기도 나돌던 시절이었다.

미국으로의 대거 이주는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 이민은 해방 전의 이민과 성격이 크게 다른 것이었다. 미국은 땅 없는 농민도 막벌이 노동자도 한국으로부터 이민을 허용하지 않았다. 세탁소 하나라도 경영할 자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이민을 허락했고, 한국에서는 제법 사는 편의 사람들이 이민 길에 올랐다. 그들은 한국에서 살아갈 길이 없어 미국으로 내몰린 것이 아니었다. 더 나은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나은 자녀 교육을 위해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1~2세대로 구성된 재미 한민족은 보통 이주 후 4세대가 넘는 일본, 중국, 러시아의 동포사회에 비해 재산과 교육의 평균 수준이 비교가 안 될 만큼 높다. 거기에 미국의 뛰어난 학술과 기술 수준, 그리고 한국을 최근에 떠났기 때문에 한국과의 연결이 튼튼하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우수 인력"으로 활용할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개연성의 차이가 기본권에 있어서의 배타적 특권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일까? 똑같은 활용 가치를 가진 조선족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면서 미국 귀화인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특권이다.

21세기 초 한민족의 과제는 '통일'이다. 더 실질적인 표현으로는 '통합'이다. '통일'이란 민족이 막 분단되던 시점에서 이에 저항하는 표현으로 나온 것인데, 분단이 60년간 엄연한 현실로 계속되어 온 이제 이 말에서는 현실을 뒤집어엎는다는 폭력성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보다는 민족정체성을 자연스럽게 키워낸다는 '통합'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고, 통일은 통합이 어느 수준 이상 이뤄질 때 기회가 저절로 생길 것을 바라봐야겠다.

남북의 주민 집단만이 아니라 해외 한민족도 뭉쳐질 주체에 포함된다고 생각할 때 '통합'이란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통일'은 두 개 주민 집단만을 염두에 두고 써 온 말이다. 그런데 두 집단 사이에는 많은 모순이 쌓여 있고, 양자 간의 절충으로 이 모순들을 극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두 집단에게 제삼자라 할 수 있는 해외 한민족이 '통합'의 흐름을 함께 만들어줄 때 모순의 해소도 훨씬 쉽게 될 것이다.

해외 한민족을 민족 통합의 흐름으로 불러들여야 할 지금, 정부의 이중국적 정책은 해외 한민족 집단들을 서열화함으로써 모순과 갈등을 키우는 짓이다. 지금 국내에 수십만 명의 조선족이 들어와 있고, 그 대부분이 밑바닥 일자리를 맡고 있다. 한국 국적을 가지지 못한 설움을 일상적으로 느끼며 지낸다. 고급 직종이 아니라서 "우수 인력" 대접을 못 받는 그들 중 소수의 전문기술 인력조차 국적 정책에서 미국 국적자들에게 차별을 당한다면 그들은 한국을 어떤 나라로 볼 것인가?

현 정권의 미국과 일본에 대한 짝사랑 정책의 문제점은 여러 각도에서 비판을 받아 왔다. 이중국적 정책은 두 가지 이유로 그중에서도 특히 엄혹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첫째 이유는 국적 부여의 기준이 바로 국가 정체성의 근거라는 사실에 있고, 둘째 이유는 민족 통합의 과제를 등지는 정책이라는 데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