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정운찬 총리 후보자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기사입력 오후 4:02:47

  지난 연말 귀국하시기 전까지 이메일로 소식을 전하다가 귀국 후에는 언젠가 찾아뵈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중에 총리 임명 수락 소식을 들었습니다. 첫 느낌은 당연히 어리둥절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얼굴 뵌 지가 참 오래네요. 연전 대권 물망에 오르셨을 때 메일로 간간이 제 의견을 알려드렸는데, 이번에도 신상에 큰 변화가 있으시니 묻지 않으셔도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다만 이번에는 공개 편지를 드리겠습니다. 형님이 이미 결정을 내린 마당에, 형님 사람됨을 어느 만큼 아는 제 생각을 털어놓는 것이 저와 같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되는 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뜻입니다.

왜 어리둥절해 하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죠. 총리로 임명하고 그 임명을 수락하는 것도 하나의 거래 행위죠. 그것도 일회성 거래가 아니라 연속적 거래 관계의 출발점을 만드는 일입니다. 당장의 수지만 따질 일이 아니라 이어질 거래 관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MB가 과연 신뢰를 줄 만한 거래 상대인지?

MB의 신뢰성을 의심할 만한 많은 사례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정말 기막힌 것은 오바마가 당선됐을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 온 오바마의 입장을 놓고 "선거 때 무슨 소리는 못하냐"던 한 마디였습니다. 누구나 상황에 몰려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보통사람들은 그것을 어느 만큼씩 괴로워합니다. 불편한 마음이라도 느낍니다. 남의 나라 대통령 당선자 공약을 놓고 자신 있게 "그거 거짓말일 거야." 말할 수 있는 수준의 거짓말 불감증은 요즘 세상이 아무리 험해졌다 해도 흔한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형님의 '야망' 운운 하는 얘기들이야 뭐 눈에 뭐만 보이는 격이겠지만, 그런 얘기들이 횡행하는 것은 형님의 이번 결정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겠죠. 형님의 케인스주의 경제관이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노선과 어울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많이들 떠올리는데, 그 정도 문제에는 형님이 당당하게 임할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서지 않는 것보다 나섬으로써 사회에 더 공헌할 수 있다는 양심의 기준을 얼마든지 세울 수 있을 테니까요.

▲ 정운찬 총리 후보자. ⓒ프레시안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은 형님이 뭘 믿고 MB와 거래 관계를 맺느냐는 겁니다. 거래 상대방은 "나는 상황에 따라 무슨 소리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공언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 권리와 책임이 함께 엮이는 것이 좋은 결과를 바라볼 수 있는 일이라고 어떻게 판단하실 수 있었는지?

언론에선 '투항'이란 말도 나오더군요. 형님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소신을 버리고 MB 밑에 기어들어가는 것 아니냐고. 형님 사람됨을 어느 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얘기죠. 무엇이 '되기'보다 무엇을 '하기'만을 바라는 형님 체질로는 야망 때문에 소신을 버린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형님이 총장 하신 것도 말 그대로 떠밀려 한 것 아닙니까? 형님이 어떤어떤 일을 잘 할 거라고 열심히 밀어준 분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형님처럼 합리적이고 겸손한 사람이라면 어떤어떤 짓은 할 염려가 없다고 믿어준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잖아요?

국민의 정부 시절이던가? 한국은행 총재 하마평이 나돌 때, 형님은 언제고 금융통화위원을 맡아보는 게 교수직을 넘어서는 유일한 꿈이라고 하셨죠. 총장이 되었을 때, 나 같은 촌놈이 서울대 교수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총장까지 해보다니, 출세는 이제 더 생각할 필요 없이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셨죠. 형님이 촌에서 막 올라왔을 때부터 봐온 제 귀에는 형님의 진심이 가감 없이 담긴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니 '투항'이란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게도 됩니다. 형님이 대표하는 합리적 보수 세력에게 MB 정부가 투항하는 건 아닐까 하고. 2년 가까이 제멋대로 놀아 보니 그런 식으론 끝내 좋은 꼴 못 보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원만한 수습 방법을 찾아달라고 합리주의자들에게 매달리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렇게도 역시 이해가 가지 않아요. 현 집권 세력의 문제는 도덕성의 결핍보다도 상황 판단 능력의 결함이 더 심각한 것 아닙니까? '삽질'이라고들 흔히 말하죠. 신자유주의와 공안 통치 노선의 모순과 한계를 지금 단계에서 자각할 것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형님? 뭘 믿고 범의 굴에 뛰어드시는 겁니까? YS야 모든 것 버려서라도 대통령 꿈 이룬 걸로 만족했지만, 형님은 인격을 희생시켜서까지 이뤄야겠다는 꿈 같은 것 안 가진 분이잖아요?

거래 상대를 압박할 무슨 자신 있는 카드라도 쥐고 계신 거예요? 얼른 떠오르는 건 파탄에 대한 부담입니다. 형님 붙잡은 걸로 MB가 점수 많이 땄다고들 얘기하는데, 관계가 파탄날 경우 따놓았던 점수보다 몇 배를 까먹게 되겠죠. 다수 국민이 수긍할 만한 선에서 형님의 기준을 지켜 나간다면 꼭지가 아주 돌아버리지 않는 한 그 기준을 함부로 묵살하지 못할 이유가 그쪽에 있을 겁니다.

이번에 총리 물망에 오른 이들을 봐도 별 부담 없이 쓰다가 별 부담 없이 버릴 수 있는 '1회용' 총리감들이 있죠. 그런데 형님처럼 약점 없는 인물을 쓰면 본인이 일할 만큼 하고 만족해서 물러나기 전에 저쪽에서 불편하다고 멋대로 치워버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죠. 그런 강점을 가진 이상 '실세' 총리니 뭐니 형식적 보장을 따로 챙길 필요도 없죠. 원래 실세니까.

'4대강'이나 '행정복합도시'를 놓고 형님이 소신을 굽혔다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형님이 타협적인 표현을 쓴 것이야말로 소신을 관철하기 위해 웅크린 자세라고 저는 짐작합니다. 원론적으로 배척하기보다 기술적, 실제적 기준에 따라 시행을 통제하는 편이 더 효과적인 대응책이 될 수 있죠. 뭐니뭐니 해도 선거로 뽑힌 대통령의 권한으로 선택한 정책인데, 정치 차원보다 행정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더 적절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형님의 사람됨과 이번 결정을 양립시킬 수 있는 관점으로 제딴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이 정도입니다. 아주 석연치는 못해요. 큰 긴장과 압박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길인데, 형님처럼 건강한 생활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이 이런 길을 왜 택해야 하는지. 이 사회가 더 망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한 걱정이 드신 건가요?

절박한 걱정을 하면 사명감을 느끼게 되죠. 사명감을 느끼면 겸손한 마음을 잃기 쉽습니다. 사람을 아무리 잘 속이는 사람이라도 현명한 형님을 속이기 힘들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형님께 "절대 속지 마세요!" 말씀드리는 것은 형님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절박한 생각을 하고 험한 길로 나서시는 것인지.

마음 편하게 잡수세요. 너무 절박한 생각 하지 마세요. 생활의 행복을 아끼세요. 타협에는 긴장이 따르죠. 긴장의 수위를 너무 높이지 마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파탄의 기회가 조금이라도 보일 때, 놓치지 마세요. 그런 기회는 한 번 놓칠 때마다 기회 자체에 둔감해지는 겁니다. 어느 정도 이상 둔감해지면 길은커녕 내 위치조차 잃어버릴 수 있고요. 형님,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마세요. 형님의 여러 미덕 중에 가장 소중한 미덕이 그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민족의 '분단'과 민족의 '분산'

기사입력 오전 9:23:59

이남이 할머니, 반가워요

'훈' 할머니가 드디어 국적을 회복하며 이남이(李南伊)라는 이름도 되찾았다. 반세기 전 일제(日帝)에 끌려가 비참한 시절도 겪고 기나긴 간난(艱難)의 세월을 지낸 끝에 이제 고국의 품에 안긴 것이다. 지난 6월 13일 <프놈펜 포스트>의 보도로 알려진 뒤 4개월간의 곡절을 끝맺는 해피엔딩이다.

훈 할머니의 신원이 8월말 유전자 감식으로 확인되자 법무부는 할머니의 국적 회복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할머니가 9월 10일에 국적을 신청하자 최대한 서둘러서 엊그제 처리를 끝낸 것이다. 만리절역(萬里絶域)에서 반세기 넘어 지내는 동안 가족은 물론 우리말까지도 잊어버린 할머니,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아리랑 가락과 고향 마을의 풍경을 따라 고향과 가족, 그리고 이름을 찾은 할머니에게 국적을 찾아주려는 정부의 노력은 지당한 것이다.

50여 년 만에 고국을 찾은 남이 할머니를 보며, 얼마 전 죽은 한 일본인 병사가 생각난다. 요코이라는 이름의 이 병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당시 괌에 주둔해 있다가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27년간 지키며 숨어 있다가 1972년에 발견됐다. 사수 명령을 내렸던 당시 중대장을 찾아 보내 겨우 항복 명령을 전하고 무장을 해제시킬 수 있었다.

요코이의 귀환은 물질적 풍요에 젖어 있던 당시의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져 '요코이 신드롬'을 일으켰다. "천황 폐하께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부끄럽다"는 그의 말은 그 2년 전 자위대 청사에서 할복한 미시마 유키오의 절규보다 더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의 존재는 극우파의 상징이 되고 그가 숨어있던 토굴은 괌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요코이보다 갑절의 세월을 이역만리 한 마을에 파묻혀 살다가 돌아온 남이 할머니, 부모님의 산소를 끌어안고 우는 그 모습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요코이의 독기(毒氣)와 전혀 다른 숙연한 기운이다. 전쟁의 피해자로서 비참한 세월을 과거에 묻어둔 채 남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열심히 살아 온 할머니의 얼굴은 바로 우리 민족의 근대사로 그려진 것 아니겠는가.

나라가 나라 노릇 못하는 바람에 온 민족이 올바른 국적을 가지지 못한 채 35년을 지냈고, 해방을 맞고도 조국의 광복에 동참하지 못한 동포가 수없이 많다. 근현대사의 비극 속에 찢어진 겨레의 마음을 아물리는, 정말 통일다운 통일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남이 할머니를 부둥켜안은 우리의 마음을 모든 겨레에게 넓혀야 할 것이다. (1997년 10월)

▲ 해방 후 60여 년 동안 우리 모두 많이 변했다. 남한 사람들, 북한 사람들, 조선족, 고려인, 재일동포…, 모두. 누가 더 많이 변하고 적게 변하고 따질 일도 아니다. 각자 주어진 처지에 따라 변할 만큼 변해 왔다.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서로 인정하면서 공통분모를 챙길 뿐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거울로 삼을 줄 알아야겠다. ⓒ연합뉴스

  지금부터 150년 전, 고종이 즉위할 무렵 조선 왕국 밖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수가 얼마나 되었을까? 여기서 '한국인'이라 함은 한민족의 후예일 뿐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생활 속에 지키고 있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무렵에 일본과 중국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으로서 현지에 동화된 사람들은 제외한다.

몇 백 명 수준이나 되었을까? 관헌의 눈을 피해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에 황무지를 개간하던 한 줌의 사람들 외에는 조선 왕국 밖에 한국인의 사회가 자리 잡는 길이 없었다. 당시 조선 인구 천여만 명의 0.01% 수준이었을 것이다. 유학, 무역, 외교 등의 목적으로 국외에 체류하는 사람의 숫자도 얼마 안 되었다. 당시의 서양인들에게 "은둔의 나라(hermit nation)"로 보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어떤가? 한반도 밖의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진 교민 수가 700만 명에 이른다. 한민족 인구의 10%에 달하는 숫자다. 그중에는 현지 사정이나 본인의 선택에 따라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벗어난 사람들도 있지만 압도적인 대다수는 한민족 후예로서 상당 수준의 민족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민족의 '분단'을 얘기할 때 우리는 흔히 남북 간의 분단만을 의식한다. 하나여야 할 것이 둘로 쪼개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10%에 달하는 교민 사회의 존재를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교민 사회에도 분단의 주체로 생각할 측면이 있다.

한민족의 교민 사회가 세계 여러 나라에 존재하는 것은 현상적으로 볼 때 '분산'이다. 그런데 그 사회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구성원들이 어떤 이유로 한반도를 떠나게 되었는지 따져보면 그 분산 현상에서 폭력적인 분단의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 안에서 살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이민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분단의 의미가 없는 단순한 분산일 뿐이다. 그러나 이남이 할머니처럼 상황에 몰려 고향과 조국을 억지로 떠나 산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겪은 것은 분단이다.

미국의 교민 사회는 대개 자발적 이민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주자 개개인에게는 상황에 몰려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이민의 길에 오른 측면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국가의 국권이 쇠미하거나 단절된 시기에 조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에 비하면 본인의 자유 의지가 전체적으로 훨씬 크게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미국 외의 큰 교민 사회는 중국, 일본과 러시아에 존재하는데 이들은 모두 해방 전 이주자들의 자손을 주축으로 하는 집단들이다. 따라서 형성 과정에서 폭력적 분단의 경험을 많이 가진 사회들이다. 그중 민족 정체성을 가장 뚜렷이 보존하고 있으며 반도 내의 민족 사회와 꾸준한 접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국 조선족 사회다. 200만 명에 이르는 중국 조선족은 한민족의 분단 극복 노력에 동참할 큰 의미를 가진 존재다.

요하 유역을 동쪽으로 벗어난 만주의 대부분 지역은 근세까지 집약 농업의 발달이 늦어진 인구 희박 지대였다. 이 지역 출신의 만주족이 천하를 제패한(1644년) 후 황실의 발상지라 하여 조선인 뿐 아니라 중국인의 이주까지 금하는 봉금(封禁) 정책을 폄에 따라 이 지역의 개발은 더욱 늦어졌다.

조선 중기까지 한반도 농업 사회가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농토 부족으로 대다수 농민들이 곤경에 처했으나 청나라의 봉금 정책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이 사정이 1860년대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제2차 중영전쟁(1856~60)에 패하면서 지방 통제력이 약해졌고, 연해주에 러시아 세력이 진출했다. 조선 북방민의 월경이 1860년의 기근을 계기로 두드러지게 되기 시작했다가 1869~70년의 연이은 흉년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청나라 관헌은 러시아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이 불법 월경을 전에 비해 묵인하는 자세를 취하다가 1880년대에 들어서는 조정 차원에서 실변(實邊) 정책을 채택, 이 지역으로의 이주를 권장하면서 조선인의 이주도 양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섰다.

조선인의 대거 이주가 진행됨에 따라 조선 문화를 그대로 옮겨온 조선족 마을들이 생기고 조선족 인구가 압도적인 조선족 집거 지역이 만들어졌다. 압록강 중·상류 건너편과 두만강 건너편의 큰 집거 지역이 '서간도'와 '북간도'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간도(間島)'라 함은 두만강과 압록강 강 속의 섬을 말하는 것인데, 월경이 금지된 시절 강 건너편에 소규모 개간을 행하던 사람들이 월경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강중의 샛섬에 밭을 만들었다고 둘러댄 데서 이 이름이 유래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1910년 합방 당시까지 서간도에 약 5만, 북간도에 약 16만 명의 조선인이 정착했다는 집계가 있다. (김택 등, <길림조선족>, 1995년, 10, 16쪽)

을사조약과 합방을 겪으면서 이주 양상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 이전의 이주는 영세민의 '생계형 월경'이 위주였는데, 국권 상실을 계기로 일제의 지배를 피하려는 '망명형 이민'이 늘어난 것이다. 이로써 간도의 조선인 이주민 사회는 양적 팽창만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입체적 구조를 그대로 옮겨놓는 질적 변화를 겪게 되고, 그 결과 일제 식민지 시대를 통해 독립군 활동 등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1922년까지 만주 지역의 조선인 인구는 약 65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위 책 17쪽)

1930년대에 일본이 만주 지역에 세력을 뻗치고 만주국을 세우면서 조선인의 만주 이주에 또 한 차례 양상 변화가 있었다. 일본 당국은 만주 개발을 위해 조선인의 이주를 권장, 많은 영세민들이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 결과 해방 때까지 만주의 조선족 인구는 200만 명에 육박하게 된다.

일본의 만주 진출은 남쪽 지방 영세민의 만주 이주를 확대시켰을 뿐 아니라 만주의 조선인 사회에 친일파의 계보를 만들어주었다. 만주국에서 내세운 오족협화(五族協和 : 만주족, 한족, 몽골족, 일본인, 조선인) 슬로건 뒤에서 조선인은 일본인 다음의 2등 국민 지위를 부여받았다. 만주국의 조선인 우대 정책은 친일파 조선인의 새로운 활동 무대를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영세민들까지도 일본의 힘에 기대어 현지 중국인들에게 대항하는 풍조를 불러일으켰다. 1931년의 만보산 사건은 이런 풍조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일본의 만주 경영과 중국 침략으로 인해 조선인은 중국인에게 두 얼굴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일본 침략에 함께 맞서는 동지로서 독립운동 세력이 있는가 하면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는 친일 세력이 있었고, 이주 조선인 사회에는 두 세력이 엇갈려 있었다.

해방을 맞아 많은 이주 조선인들이 진퇴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에게서 되찾은 조국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함께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의 일반적 반감도 중국을 떠나고 싶은 동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해방 후 국내의 혼란스러운 상황, 지금까지 쌓아놓은 생활 근거를 버리고 돌아가 새로 근거를 쌓기 어려우리라는 전망이 귀국을 꺼리게 했다. 그 결과 200만 이주민 중 대략 절반이 귀국하고 절반이 중국에 남았다.

조선 이주민들과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현지 토호 세력을 포섭하려는 중국 국민당의 정책이 잔류 조선인들을 더욱 곤경에 몰아넣었다. 그 때문에 조선인 사회는 민족 모순의 극복과 민생 안정을 제창하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고, 실제로 공산당이 동북(만주) 지역에 거점을 만들어 국민당 세력을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는 과정에서 인민해방군에 대거 참여하는 등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우는 소수민족이 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족은 '일본의 주구'란 오명을 벗어던지고 중국 인민의 확고한 일부가 되었다.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다민족 국가 중 뛰어나게 포용적인 민족 정책을 펴 온 나라다. 한 예로, 만주족은 소수 민족 중 세 번째로 큰 1300만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언어와 문화가 한족에 동화되어 민족 정체성이 약하다. 소수 민족 등록의 기준과 절차에 따르면 이들은 한족으로 등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이들이 소수 민족으로 등록하는 것은 소수 민족에 대한 혜택이 탄압보다 크기 때문이다. 조선족 지식층 중에는 해방전쟁에서 조선인의 공로가 소수 민족 우대 정책을 이끌어내는 데 공헌했다는 자부심을 가진 이들도 있다.

1949년 이후 조선족은 자치구 설정, 공항 건설(연길), 민족대학 설립(연변대) 등 소수 민족 정책에서 특별 우대까지는 아니라도 충분한 존중을 받아 왔다. 시국에 따라(예컨대 문혁 절정기) '박해' 비슷한 상황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 중국의 일반적 상황에 비해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지금의 조선족은 '중국 공민'이란 국가 정체성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학철 선생과 함께 조선족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는 정판룡 교수의 '며느리 론'이 조선족 정체성의 표준으로 널리 인정받아 왔다. 조선족에게 조선(한국)은 친정이고 중국은 시댁이란 것이다. 일상적인 일과 생활은 중국인으로서 하되, 모국을 아끼는 마음을 마음에서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 조선족 사회는 북한과 많이 교류했고, 1990년대 이후로는 남한과 관계를 늘려 왔다. 그 관계와 교류의 표면에는 경제적 이익이 덮여 있지만, 그 밑에는 조선족의 민족심(민족의식)이 깔려 있다.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먼저 나섰던 일본보다 더 큰 성과를 이뤄 온 데는 조선족의 역할이 작지 않다.

근년 조선족 사회에서는 '정체성의 위기'가 거론되고 있다. 자치 구역에서는 조선어가 한어와 함께 공용어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자진해서 한어 교육을 선택하는 추세가 단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개혁·개방에 따라 사회 유동성이 커지면서 활동 영역을 자치 구역 밖으로 넓히기 위해서는 한족 사회와의 경계선을 뛰어넘어야겠다는 판단으로, 엘리트 계층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는 추세다.

언어는 민족 정체성의 가장 큰 지표다. 민족어 포기는 민족 정체성 상실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로 가로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어만이 공용어로 통하는 남한에서 한국어 자체가 어떻게 약화돼 왔는가? 또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자발적 선택을 통해 미국 사회로 넘어가 왔는가? 민족 정체성의 약화는 세계화 시대의 어쩔 수 없는 추세다. 본국민과 중국 조선족, 그리고 어느 교민 사회에서나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그를 받아들이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할 일이다. 정체성 약화의 한 가지 결과는 민족 공동체의 입체화다. 민족 구성원의 99.99%가 하나의 정치체제 아래 일정한 생활방식에 따라 살아가고 있던 150년 전과 달리 지금은 한민족 구성원들이 여러 정치체제 아래 여러 형태, 여러 층위의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21세기의 민족주의자는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의식을 가진 어느 위치의 구성원에게도 나름대로 공동체에 공헌하는 길을 열어주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과거를 표준으로 한 순혈주의 잣대로 나보다 민족의식이 약한 사람들을 모두 배신자, 변절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세다. 잔에 물이 "절반 밖에 없네!" 불평하기보다 "절반이나 있네!" 고마워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와 있다.

150년 전에 비해 한민족 인구는 7배로 늘어나 있고 그 정체성은 크게 약화되어 있다. 정체성 약화의 원인으로는 '분단'과 '분산'이 함께 작용해 왔다. 두 요소를 구분해 볼 줄 아는 것이 해외 교민사회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바로잡는 데 요긴한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북한 주민들을 대하는 태도를 정하는 데도 또한 필요할 것이다.

분단은 극복의 대상이고 분산은 적응의 대상이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민족주의 후진국

기사입력 오전 11:55:53

민족주의 후진국

지난 가을 경쟁적 핵실험으로 세계를 불안하게 한 인도와 파키스탄이 이번에는 미사일 경쟁에 다시 열을 올리고 있다. 국민소득이 몇 백 달러 수준인 이 나라들이 이처럼 과도한 군비 지출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인도사 연구자 이옥순 씨의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는 식민지 시대의 역사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을 이끌어내 주는 책이다. 서양 정복 세력의 공격성 앞에서 동양의 피정복자들이 느낀 열등의식을 남성의 지배에 복종하는 여성의 체념적 굴욕감에 비유한 것이다.

조직력과 용맹, 근면을 자랑하는 영국인은 이런 특성을 보이지 않는 인도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았다. 인도인 엘리트계층은 이들에게 교육받으며 이 관점을 그대로 배워 민족주의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대규모 조직 없이 다양한 형태로 펼쳐져 있던 민간신앙을 묶어 민족종교 힌두교를 만들어낸 것이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주류가 됐다.

힌두교로 뭉친 인도인에게 경쟁의 대상자는 무슬림이었다. 무슬림은 13세기부터 인도에 진출, 유럽인이 올 때까지 지배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찬란하던 인도 문명이 무슬림 지배 때문에 타락했다고 주장하며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을 통해 인도인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들었다. 영국인들이 종교적 조직성을 가진 무슬림을 비(非)무슬림보다 높이 평가하고 등용한 것도 질투심을 촉발하는 이유가 됐다.

유럽인의 남성적 공격성을 무슬림보다 더 많이 닮겠다는 것이 결국 힌두 민족주의 운동의 큰 목표가 됐다.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말대로다. 마하트마 간디의 평화주의는 시대적 투쟁 정신을 벗어나 인도 문명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노력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밀려나고 말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그래서 분리 독립을 했다. 백여만 코소보인의 강제 이주 정책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우리는 발칸에서 보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 당시에는 수천만 명이 종교적 대립 의식 때문에 삶의 근거를 옮겨야 했다. 이 대립 의식은 아직도 군비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배타적 민족주의는 16세기 이래 유럽이 근대로 이행하는 흐름에서 하나의 큰 줄기였다. 19세기 유럽인의 세계 정복을 계기로 이 민족주의는 온 세계에 수출됐다. 원래의 민족주의 주역들이 유럽 통합의 흐름 속에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극복해 가고 있는 지금 늦게 배운 나라들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폐단에 빠져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다. 가장 가까운 나라를 가장 격렬히 미워하는 것이 민족주의 후진성의 첫 번째 증상 같다. (1999년 5월)
▲ 뉴라이트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추수 세력이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도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없이 정략적 목적을 위해 취하는 태도일 뿐이다. 이 사회의 21세기를 열어가는 작업에 민족주의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없다면 크나큰 혼란과 손해를 피할 수 없다. ⓒ연합뉴스

  오랫동안 나는 과잉민족주의(hyper-nationalism)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한국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현대 유럽 지식층의 사고방식을 표준으로 한 생각이었다. 나는 모든 학업을 국내에서 이수한 사람이지만 독서를 통해, 그리고 1985년에서 1991년 사이 몇 차례 유럽 체류와 여행을 통해 유럽 지식층의 사고방식에 많은 공감을 키워 왔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라 외친 임지현 한양대 교수도 이 배경을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과잉민족주의를 벗어나는 역사관을 시도한 것이 작년 봄 낸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였다. 그 책을 위해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는 임 교수의 "국사 해체" 주장과 다른 길을 찾았다. 과잉민족주의는 극복되어야 하지만, 민족주의 자체는 지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진부한 표현으로, 목욕통의 물을 버리면서 목욕시킨 아기까지 한꺼번에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사의 구조조정"을 주장했다.

그 후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작업을 하면서 민족주의를 과장하는 풍조보다 무시하는 풍조를 더 경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민족주의가 정의로운 것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민족주의는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하나의 구성 요소이며, 가까운 장래에 사라질 존재도 아니다. 국가의 대외 정책이나 남북 정책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생활 태도에서도 이 엄연한 존재가 무시될 경우, 큰 혼란과 손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학에서 고찰하는 민족주의는 유럽 식 '근대 민족주의'다. 유럽은 원래 민족의식의 발달이 늦은 곳이었다. 근세 초까지 유럽인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정체성의 기준은 '기독교인'이었다. 지역과 종족에 대한 소속감은 강력한 표준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국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도 "같은 기독교인 사이에"라는 명분에 쉽게 억눌리곤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진행에 따라 '기독교인' 사이의 투쟁이 일상화됨에 따라 민족의식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성서 번역으로 시작된 '국어 운동'은 민족의식의 대표적 표현이었다. 중상주의 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며 국가 간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민족의식이 정치적 중요성을 키우면서 근대 민족주의가 모습을 나타냈다. 유럽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확산은 산업화의 뒤를 따라 일어난 현상이었다.

서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화와 민족주의가 19세기 후반 중부 유럽까지 확산되면서 산업화의 모순과 민족주의 모순이 함께 한계점에 도달했다. 식민지 쟁탈전은 두 모순이 결합해 나타난 결과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러시아 공산혁명은 이 모순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데서 온 파탄이었다. 이 파탄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결과가 또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20세기 초반의 세계적 비극과 파탄은 산업혁명이 가져온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파국의 진행 과정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맡은 것이 민족주의 모순이었다. 그래서 유럽 지식인들은 민족주의를 죄악시하게 되었고, 이후 유럽 정치계에서 민족주의는 극우세력의 독점물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유럽인의 침략을 받으면서 민족주의를 배운 세계 각지의 인민은 유럽인을 따라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위 글에 보이는 인도인처럼 독립국이 된 새로운 상황에서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한 것은 과거의 모든 식민지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 온 현상이다.

과거의 피침략 지역 중 동아시아 지역은 안정된 국가체제를 수백 년 이상 누려 왔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가진 곳이었다. 중국의 경우는 1000년 이상 다민족국가로 존재해 왔다는 점에서 그중에서도 특수한 경우고,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은 '민족국가'라 할 수 있는 국가로 오랫동안 존재해 온 나라들이다.

그중 민족국가의 전통이 가장 오랜 한국의 경우, 적어도 고려 초기 이후로는 하나의 국가체제 아래 통합된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1000년 가까이 민족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면서도 근대 민족주의와 같은 민족주의를 빚어내지 않고 있었던 것은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 천하체제는 19세기 중엽 유럽인이 도입한 만국공법 체제의 도전 앞에 무너졌다. 만국공법이 구성원들의 배타적 독립성을 바탕으로 원자론적 구조를 제창한 것과 달리 천하체제는 구성원 간의 위계적 상호관계를 강조하는 유기론적 구조였다. 근대 민족주의는 구성원 간의 경쟁관계를 앞세우는 만국공법 체제와 맞물려 나타난 것이었다. 개항기 이전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 개념에 넣어서 본다면, 경쟁보다 협력의 측면을 강조하는 '화이부동' 원리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에 비해 민족국가의 전통이 얕은 만큼 역사적 현상으로서 민족주의가 가지는 의미도 좁다. 산업혁명의 진원지라는 이유 때문에 근대 민족주의를 빠른 시간 내에 고도로 발전시켰지만, 그 한계도 금세 닥쳐왔다. 반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민족주의가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유럽인에 의해 주어진 근대 민족주의의 모델을 벗어나더라도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발전시킬 여지가 있다.

21세기는 세계화의 시대라고 한다. 국가의 의미와 역할이 축소되는 세계화의 시대에는 민족주의가 극복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이뤄진 인민의 정체성과 소속감이 수십 년간의 세계화 과정을 통해 해소될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19세기 유럽의 민족국가 시대가 근대 민족주의를 빚어낸 것처럼 21세기 세계화 시대가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빚어낼 전망이 더 그럴싸하다.

민족주의를 '민족의식의 정치적 발현'이라 정의한다면 근대 민족주의는 19세기 유럽의 상황에 따라 아주 특이한 형태로 나타난 민족주의였다. 무엇보다 뚜렷한 특이성이 그 철저한 배타성이다. 19세기 유럽 민족국가들의 경쟁 대상은 같은 유럽의 민족국가들이었다. 그래서 타자를 소외시키는 편협성이 근대 민족주의의 기조가 된 것이다.

뉴라이트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추수 세력이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도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없이 정략적 목적을 위해 취하는 태도일 뿐이다. 이 사회의 21세기를 열어가는 작업에 민족주의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없다면 크나큰 혼란과 손해를 피할 수 없다. 민족주의를 놓고도 '제3의 길'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