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사회가 대학을 위해 존재하나

기사입력 오후 2:09:58

커닝하는 교수

1류 연주자로 이름 있는 음악 교수 P 씨는 동료들에게 놀림 받는 일이 한 가지 있다. 입학시험 때마다 커닝을 한다는 것이다. P 교수는 수험생의 연주를 자기가 정확히 평가했는지 자신이 없다. 그래서 옆 칸의 동료에게 대충 어느 정도인지 사인을 보내달라고 염치없이 부탁하곤 하는 것이다.

채점자가 소신껏 자기 평가를 내리지 않고 동료의 평가를 따라가려는 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러나 동료들은 P 씨를 '커닝 교수'라고 놀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의 성실성에 경의를 품는다. P 교수에게 남들만한 평가 능력이 없겠는가. 그가 커닝을 하는 까닭은 자신의 평가가 학생들의 운명에 부당한 영향을 끼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P 교수는 자신의 행위가 커닝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입학한 학생에게 수시로 평가를 내릴 때도 필요하면 동료들과 언제든지 의논하는 법인데, 입학 시험이라고 안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수험생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인데, 더더욱 동료들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입학 시험은 P 씨뿐 아니라 예술계 교수들에게 늘 골치 아픈 문제다. 대부분 교수들은 학업 성적보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원한다. 그런데 전형은 학과와 실기를 합산한 성적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많은 교수들은 실기 평가를 극단화한다. 수준이 웬만하면 90점 이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40점 이하로 깔아버리는 것이다. 재능 없는 학생이 학과 성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최대한 막겠다는 뜻이다.

이런 추세가 P씨처럼 소심한 교수들을 더욱 안절부절하게 만든다. 듣는 느낌이 좋고 나쁜 데 따라 5점을 더 주고 덜 주는 문제라면 괜찮다. 그런데 90점을 주느냐 40점을 주느냐 하는 일을 놓고 자신의 평가에 확고부동한 자신감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쪽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예능 분야의 고액 과외가 극성을 부리는 까닭의 상당 부분도 이와 같은 평가의 극단화에 있다는 지적이 있다.

종래의 '백화점식' 전형 방법은 예술 분야뿐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나 실효성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영역 저 영역의 성적을 합산해 한 줄로 세워놓고 자르는 식으로는 특정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설 땅이 없다. 특히 우수 학생이 몰리는 일류대학일수록 '뛰어난' 학생보다 '흠 없는' 학생만이 들어가게 된다는 불만이 있어 왔다. 몇 개 대학에서 추진하고 있는 다단계 전형 방법에 거는 기대가 크다.

▲ 미술 실기고사 채점 광경. 예술을 가르치고자 하는 이들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맺어주는 과정이 이처럼 초현실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은 예술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비예술적인 평가 방법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뿐 아니라 평가를 행하는 사람들까지도 강박에 몰아넣는다. ⓒ연합뉴스

홍익대학이 미술대학 입시에서 실기고사를 폐지할 방침을 발표했다.

놀라운 발표다. 미술 전공 학생을 뽑는 과정에서 작품 활동의 적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측정하는 심사 방법을 배제한다는 것이 우선 놀라운 일이다.

미술 전공 학생 모두에게 실기 능력을 요구한다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미술을 전공하고 나아가 미술에 종사한다 해서 어느 수준 이상의 실기 능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평론과 교육을 비롯해 미술계에 필요한 역할 중에는 작품을 만드는 능력보다 미술에 대해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 더 중요한 것도 많이 있다.

따라서 입학생 일부에게 실기 아닌 다른 전형 방법을 적용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입학생 전체에게? 미술 전공의 적성을 측정할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실기고사의 효력을 대치할 만한 것이 있을까?

사실 더 놀라운 것은 미술 사교육 '업계'에 대한 충격이다. 주택가마다 널려 있는 미술학원 중에는 "홍대 출신"을 간판에 표시해 놓은 집이 많다. 어느 대학 어느 과에 들어가려면 그 과에서 점수 따는 데 필요한 요령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상식이다. 홍익대 미대 실기고사는 수많은 졸업생들의 밥줄 노릇도 해 온 것이다.

실기고사는 예술 교수들의 권위를 권력 차원까지 키워놓기도 했다. 홍익대의 이번 조치가 근년 거듭 드러나 온 실기고사 관계 비리로 인해 촉발된 것 아닌가 하는 관측도 있거니와, 드러난 비리는 저질러진 비리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 수험생들이 레슨 받으러 비행기 타고 다닐 정도의 비상한 경쟁 상황은 비리를 키우는 온상이 아닐 수 없다.

실기고사를 대신할 대안은 아직 분명치 않다. 홍익대 관계자가 "예컨대 면접 과정에서 그릇이라는 소재를 주고 평화를 어떻게 구현할 것이냐고 묻는 방식이 될 것"이라 했단다. "간략한 미술 테스트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자세히 알려질 경우 또 다른 사교육을 유발할 수 있다"며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고도 한다.

이런 언급을 보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평화에 대한 의견을 듣는 것이 예술관 파악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실기고사를 대신할 만한 효과가 있을 수 있을까? 테스트 방법을 "사교육 유발"을 피하기 위해 시험 날까지 비밀로 묶어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대책은 없는 채로 비리의 충격을 덮어버리기 위해 개혁의 충격을 불러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비리에 몰려 충분한 대책 없이 취해진 조치라 하더라도 홍익대학의 결정은 용기도 있고 의미도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실기고사를 유지하되 운용 방법을 개선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대책일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합리적 노력은 지금까지 꾸준히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두텁게 쌓여 있는 관습과 이해관계가 그런 합리적 노력을 좌절시켰기에 이처럼 '혁명적'인 방침이 나오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자율 전공'이란 이름으로 정원 일부에 적용시키려는 전형 기준을 입학생 전원에게 기계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썩 바람직한 일 같지 않다. 학생부 40%, 수능 50%, 면접 10%라는(정시 전형의 경우) 이 기준은 아무래도 전공 적성을 측정하는 최소한의 효과를 확보하기 힘들 것 같다. 실기고사 대신 이 효과를 얻을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데 창의적 노력이 많이 모이기 바란다.

차제에 입학생 선발의 원리를 한번 살펴보자. 대학들이 어떤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가 하는 것은 스스로 베푸는 교육의 의미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는 일이다. 고려대학이 특수목적고(특목고) 졸업생을 우대하려 애쓴 정황이 뚜렷이 드러나 있는데도 대학교육협의회는 감싸주려고만 든다. 학생 선발에 관한 대학 경영자들의 어떤 공감대를 보여주는 일이다.

더 잘 '준비된 학생'들을 받고 싶은 것이 대학 경영자들 사이의 폭넓은 공감대다. 그리고 그 준비 수준을 보여주는 첫 번째 지표가 투입된 교육비다. 많은 교육비를 투입할 수 있었던 학생일수록 자기네 대학을 거쳐 간 뒤에도 사회에서 성공해 '훌륭한 졸업생'으로 학교를 빛내줄 가능성이 크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대학이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대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대학교육협의회의 자세에는 후자의 관점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홍익대학의 '충격적' 결정이 '혁명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 이 관점을 뒤집는 노력이 이어지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사탕을 먹지 말거라"

기사입력 오전 8:43:19

"사탕을 먹지 말거라"

"이 아이의 사탕 먹는 버릇을 아무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이라면 아이가 들을 겁니다. 사탕 먹지 말라고 아이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이를 데리고 중년의 간디를 찾아온 어머니가 간절히 부탁했다.

아이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며 입을 뗄듯하던 간디가 눈길을 어머니에게 돌리고 말했다. "보름 후에 아이를 다시 데려오세요. 그때 말해 주겠습니다."

"저희는 먼 곳에 살기 때문에 보름씩 여기 머물기도 어렵고 보름 후에 다시 오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간디는 다시 한 번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또 말했다. "아무래도 보름 후라야 말해줄 수 있겠습니다."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갔던 어머니가 보름 후 다시 찾아왔다. 간디는 아이의 눈을 한동안 그윽이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얘야, 사탕을 먹지 말거라." 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고 고마워하며 어머니가 물었다. 왜 그 말씀을 보름 전에는 해주실 수 없었느냐고. 간디가 대답했다. "그때는 저도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간디는 인도의 예속상태가 영국의 욕심보다 인도의 도덕적 무기력에 근본원인을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제창한 사티야그라하(비협조-불복종)운동은 압제자에 대한 저항에 앞서 인도인의 도덕성 함양 과업에 치중했다.

1931년 영국과의 협상에서도 간디는 인도인의 자치 권한 확대보다 소외계층 대책에만 주력해 민족주의 진영에 실망감을 주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천민층의 참정권 제한 방침에 항의해 옥중단식을 하는 등 인도 내부의 문제를 영국과의 관계보다 늘 앞세웠다.

성실한 도덕적 실천만이 진정한 인도 독립의 길임을 간디는 몸으로 보여주었다. 배타적 권리의 주장보다 인류에게 책임질 줄 아는 능력이 인도 독립의 열쇠라고 한 그의 가르침은 수미일관(首尾一貫)한 그의 실천으로 인해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청문회 증인들에게 호통치고 설교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보며 간디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마치 완전무결한 인간인 듯 증인들을 질타하는 그들이 증인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도덕성을 가졌다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사탕 먹지 말라는 한 마디를 위해 스스로 가다듬기를 마지않는, 그런 지도자가 아쉽다. (1997년 4월 11일)

▲ 물레가 간디의 상징처럼 온 세상에 통하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왜곡된 산업화로 식민지를 착취하는 구조적 문제를 직시한 통찰력, 그리고 검소하고 근면한 기풍을 통해 인도인 내부의 억압 체제를 극복하려는 도덕적 의지를 압축해 보여주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차원 높은 간디의 독립 사상을 방직공업 발전의 걸림돌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인 모양이다. 코끼리의 큰 뜻을 쥐새끼가 어찌 알랴. ⓒ프레시안

  영국의 인도 정복은 1761년 프랑스의 경쟁을 따돌리고서부터 1858년 이른바 세포이 반란 진압까지 한 세기에 걸쳐 이뤄졌다. 이 정복은 근세 이전의 정복과 다른, 새로운 성격의 정복이었다. 대규모 이주를 위해 땅을 빼앗기 위한 정복도 아니고,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정복도 아니었다.

이 정복의 기본 성격은 산업혁명에 발맞춰 진행된 경제체제의 확장에 있었으며, 이것이 이후 근대 제국주의의 일반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피정복 사회를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군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맹목적으로 파괴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본국 경제에 유리한 형태로 피정복 사회를 개편하는 것이 정복의 목적이었다.

피정복 사회의 개편은 새로 형성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하부구조에 맞추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정복에나 피정복 사회 출신의 협조자(피정복 사회 관점에서는 배반자)가 맡는 역할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런 종류 정복에서는 특히 그 역할이 컸다. 종속적인 산업화라도 산업화가 일어나면서 식민지 사회의 경제 규모는 성장했고, 그 안에서 정복자에게 협조하는 엘리트 계층이 사회의 상층부를 형성했다. 이 상층부와 기층민 사이의 불평등 관계가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불평등 관계와 맞물려 서로 지탱해주는 구조를 이뤘다.

한국의 식민지 시대를 놓고도 이 상층부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계속된다. 그 역할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몽땅 친일로 몰아붙이는 것은 비현실적 순결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식민 통치건 민주 정치건 어떤 정치라도 효과적 시행을 위해서는 대다수 인민의 반응 양식을 감안하여 정책 노선을 결정한다. 당연히 예상될 만한 범위의 행동을 놓고 친일이건 항일이건 딱지를 붙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이 범위를 벗어나는 소수의 행동 중에 밑으로는 저열한 친일 행위가 있었고 위쪽으로는 자기 희생적인 항일 활동이 있었던 것이다.

인도에도 한국에도 적지 않은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힘으로 싸우러 나선 무장 투쟁가들도 있고 독립의 사상을 키워낸 사상가들도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당연히 예상되는 범위를 뛰어넘는 운동을 많은 보통사람들로부터 이끌어냄으로써 독립 사상가들 중 최고의 명망을 세운 인물이다.

독립 사상가로서 간디의 탁월성은 두 가지 방향의 통찰력을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데 있었다. 한 가지는 식민 통치의 구조적 문제를 꿰뚫어본 사회과학적 통찰력이고, 또 한 가지는 인도인이 독립의 자격을 얻기 위해 추구할 실천의 길을 제시한 도덕적 통찰력이다.

이 결합이 빚어낸 가장 두드러진 강령이 '비폭력'이었다. 식민 지배자들은 물질적 이익을 당근으로 활용했고 폭력을 채찍으로 휘둘렀다. 이에 대항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채찍에 맞서면서 당근은 챙기려 했다. 그런데 간디는 채찍을 거부하는 것보다 당근을 거부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저항임을 꿰뚫어보았다. 그래서 산업화의 물질적 혜택을 거부하며 금욕적 자세를 추구하는 그의 노선이 인도 독립 운동의 뼈대가 된 것이다.

간디가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인 1918년 간디에 대해 이렇게 쓴 영국인 교수가 있었다. "쾌락도, 재물도, 안락도, 명예도, 출세도, 어느 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 그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데만 마음을 쏟는 사람을 다루는 것이 권력자에게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런 사람이 위험하고도 불편한 적이 될 수 있는 것은 권력자가 쉽게 정복할 수 있는 그의 육체가 그의 정신을 옭아매는 미끼 노릇을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비서관 이상목이란 자가 지난 주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자 청와대가 그를 '질책'하고 '경고'했다고 밝혔다. 그 발언 중 간디가 방직공업 확장에 반대한 일을 들먹이며 "(일제 때) 일부 독립운동 지도자가 이런 유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근대화가 늦어졌다"는 대목도 있었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의 인도에서나 한국에서나 중요한 과제는 독립과 근대화였다.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근대화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관점이다. 그 근대화가 종속적 구조를 가진 것이어서 본국과 식민지 사이, 그리고 식민지의 사회계층 사이에 불평등과 억압이 유발되는 문제는 개의치 않는다. 약육강식의 원리만을, 그것도 아주 좁은 범위에서만 생각할 뿐, 인간의 존엄성이나 민족주의적 가치를 완전히 배제하는 관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간디가 제창한 저항 운동에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간디가 영국인에 대한 저항보다 인도인 내부의 억압체제를 해소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에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인도인을 독립의 자격을 갖춘 도덕적 주체로 키워내기 위해 간디가 이끈 실천운동에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 청와대에 앉아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위 칼럼에 나온 아이의 어머니를 보자. 그는 간디가 자기 아이에게 훈계 베풀어주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수고를 무릅쓰고 보름 후에 아이를 다시 데려왔다. 우리 국민 중에 그런 훈계 하나를 위해 그런 수고를 무릅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일화는 간디가 전국적 명성을 얻기 전의 일이다.) 그 아이가 버릇을 고쳤다면 그것은 간디의 정성만이 아니라 그 어머니의 정성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무한경쟁의 시험제도

기사입력 2009-02-27 오전 10:42:24

무한경쟁의 시험제도

중국의 발명품으로 서양의 근대화에 큰 공헌을 한 것들이 있다. 나침반과 화약, 그리고 제지술(製紙術)이다. 이것들 없이는 대항해시대도, 근대 전쟁의 발달도, 정보화시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교섭사가들은 또 하나 중요한 중국 발명품을 지목한다. 과거(科擧) 제도다. 18세기 이래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공무원 임용 시험 제도를 만들어 중앙 집권적 관료체계를 형성한 것 역시 중국에서 배워갔다는 것이다.

과거제는 6세기말 수(隋)나라 때 만들어져 1905년까지 1300여 년간 시행됐다. 유교국가의 관료·집단 내지 지배계층을 유지-관리하는 데 핵심적인 제도였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초, 즉 10세기 중엽에 도입되어 차츰 시행이 확대된 결과 고려말까지는 국가 구조의 뼈대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학술과 교육의 기본 메커니즘으로 계속 작용했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과거제의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폐단은 시험의 부정(不正)이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너무 많은 지망생이 과거 준비에 매달리는 인력 낭비였다. 정약용의 과거제 개혁안에 이 문제가 비쳐져 보인다.

정약용은 각 고을 수령이 지역 유지들의 의견을 들어 과거 응시자를 선발하도록 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3년을 주기로 전국에서 2880명을 뽑고, 여러 단계의 시험으로 합격자를 줄여나간다는 것이었다. 수만 명의 전국 선비들이 과거에만 매달려 있는 현실을 타파하려는 의지였다.

응시자의 범위는 과거제의 원죄(原罪)와도 같은 문제였다. 양반층에 의지하는 국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문호를 좁힐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정기적인 식년시(式年試) 외에 이따금 증광시(增廣試)를 행하는 정도였지만, 양반층 확대에 따라 알성시(謁聖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 요행이 많이 따르는 약식의 별시(別試)가 늘어나 실력 없는 선비들까지 유혹했다.

엄청난 사교육비 문제를 소비자보호원도 지적했다. 그러나 수능시험의 난이도 따위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문제의 본질 같지 않다. 전국 학생의 대다수가 하나의 길에만 몰려있다는 것이 근본 문제다. 아무리 시험을 쉽게 한들 한 점 더 따기 위한 무한경쟁이 식을 리 없다. (1997년 5월 30일)

▲ 학생과 학부모의 일제고사 거부 의사를 존중했다는 이유로 학교를 떠나야 했던 김윤주 교사가 아이들과 헤어지는 장면. 운동부원과 학습지진아 등 일부 학생의 응시 기회를 가로막는 것은 학습권 침해가 아니라고 판정하면서 자발적 거부를 극한 징계하는 교육당국은 이 나라 교육계에서 일체의 양심을 말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일까? 그렇게 하면 이 나라 모든 국민을 '이기적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프레시안

  고대에도 중세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는 종교와 사상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계급과 신분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영향력이 극히 미미했다. 완전한 평등권을 주장하는 '만민평등' 사상의 확산은 근대적 현상이다.

평등이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그것을 가로막아 온 야만의 질곡을 벗어나 평등을 '되찾는' 것이 문명의 발전이라고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믿었다. 아직도 그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만민평등이 사회 조직의 보편적 원리로 널리 시도되면서 그것이 저절로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쌓여 왔다. 평등을 바람직한 이념으로 받드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자연법'의 뒷받침을 받는다는 믿음은 지키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근대사회에서 평등 이념이 확산된 원인을 유동성의 증가로 설명하기도 한다. 산업화된 근대사회에서는 그 전의 농업 사회에 비해 노동력의 많은 이동이 필요하다. 지역 간 이동만이 아니라 계층 간 이동도 필요하다. 그래서 신분 구속의 철폐가 산업화의 심도에 발맞춰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평등 이념을 제창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사심 없이 다수 민중의 행복만을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념이 일세를 풍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유동성 증가를 요구하는 산업 구조의 변화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봉건적 질서를 깨뜨리는 데 필요한 수준의 자유와 평등은 쉽게 이뤄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조직이 그렇게 이뤄진 후, 그를 넘어서는 자유와 평등의 발전은 현실 조건의 벽에 부딪쳤다.

평등 이념은 조선 건국에서도 중요한 원리였고, 이 원리를 구현한 것이 과거제였다. 고려의 귀족층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중소 지주층이 양반 계층을 형성하여 국가 운영의 주체가 되었다. 과거 합격을 통해 신분을 획득하는 '계층'으로서 양반이 혈통에 따른 '계급'으로서 귀족을 대치한 것은 평등의 확장이었다. 고려 말기 농업 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산 주체가 대지주로부터 중소지주로 비중을 옮긴 산업 구조의 변화가 그 배경이었다.

과거제는 고려 초기부터 시행되었지만 관직 등용의 통로로서 그 기능은 고려 말기까지 음서(蔭敍)에 뒤지는 것이었고, 체제의 주축이 된 것은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조선 초기에 과거제는 지배계층의 재편을 가져왔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연구에(<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따르면 조선조를 통틀어 문과 급제자 1만4333명 중 본관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451명인데, 그중 229명이 국초 100년간의 급제자 1470명 중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내세울 본관조차 없던 서민이 국초에는 급제자의 15%를 점했다는 것이다. 이 비율이 19세기에는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초기에 생산적 변화를 몰고 온 과거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로섬게임으로, 그리고 마이너스섬게임으로 전락해 간 것은 무엇보다, 산업 구조의 변화에 발맞추는 개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에 발전한 노동집약적 농법이 중소 지주층의 번영을 가져와 양반 계층 중심의 국가 구조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농법 변화와 산업 다각화 추세로 인해 양반 계층의 사회경제적 근거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도 과거제로 대표되는 국가체제는 이 변화에 충분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이 과거제 개혁안을 제기한 것이다. 그 골자는 응시 자격을 단계적으로 통제해 과거 준비에 매달리는 사람 수를 줄이는 것이다. 관직의 문호를 널리 개방한다는 '평등'의 원리를 지키되 그 원리에 따르는 현실적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평등에 비해 대한민국의 평등은 훨씬 더 보편적인 원리다. 그리고 이 원리가 적용되는 가장 중요한 분야의 하나가 교육이다.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한국의 교육은 큰 양적 팽창을 이뤘고, 근년의 민주화에 따라 질적으로도 발전해 왔다.

교육의 목적은 복합적인 것이지만, 크게 보아 공급자 측면과 수요자 측면으로 갈라진다. 근대 국민교육 초창기에는 공급자 측면이 중시되었다. 국가가 교육을 시행하는 목적이 효과적인 국민 동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 이념과 복지 이념의 발달에 따라 피교육자의 행복 증진을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왔다.

교육의 한 요소로서 '시험' 제도가 원래 공급자 측면을 대표하는 경향을 가진 것인데, '일제고사'란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형태다. 공급자 측면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지나쳐 수요자 측면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궁리해 낸 것이 표집시험이다. 민주주의가 겨우 자리 잡고 복지의 중요성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이 사회에서 일제고사 부활 시도는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정권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정책이다.

반동적인 정책이라고 하는 것도 과찬이다. 반동적 효과도 가져오지 못할 멍텅구리 정책이다. 피교육자의 행복 증진 기회를 빼앗더라도 체제 운용에 도움이 된다면 반동적 정책이라는 평가나마 가능하겠지만, 사회적 비용만 증폭시킬 뿐, 현실적 효과를 바라볼 것이 없다. 교육을 시장판으로 만들어 장사꾼들 벌이를 키워주는 것이 어떻게 국가 사회의 교육 기능 훼손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겠는가?

정책 추진 방법부터 멍텅구리 정책답다.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시험 거부 기회를 줬다는 이유로 파면, 해임의 칼을 휘두르면서 운동부원 등 평균점수 떨어뜨릴 학생들에게서 시험 칠 기회를 박탈하는 행태는 용인한다. 그리고 시험 결과 조작이 드러난 관계자들에게도 직위해제라는 솜방망이다. 행정 운용의 ABC조차 모르는 당국자들 상대로 교육의 이념까지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겠다.

10년 전 위의 글을 쓸 때나 지금이나 과도한 사교육비는 우리 사회의 큰 짐이다. 과도한 경쟁 원리가 불필요한 비용의 유발을 넘어 실질적 평등을 해치는 지경에 이른 현상이다. 한국 교육정책은 지난 수십 년간 실효성에 한계가 있을지언정 이 문제의 완화를 지향해 왔다. 그런데 이제 난 데 없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현 정권이 달려 나가니, 담당자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