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24일 오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중앙청 앞마당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이승만의 취임사에는 참 좋은 말씀이 많이 들어 있었다. 사심 없는 노 애국자의 입장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말씀 가운데 이따금 숨은 가시처럼 그의 정치관이 드러난다. 두 대목만 짚어본다.

 

“그 결과로 국회 성립이 또한 완전무결한 민주제도로 조직되어 2·3정당이 그 안에 대표가 되었고 무소속과 좌익 색태로 지목받은 대의원이 또한 여럿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왕 경험으로 추측하면 이 많은 국회원 중에서 사상충돌로 분쟁 분열을 염려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종종 극열한 쟁론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의사를 표시하여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 제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대로 종다수 통과된 후에는 아무 이의 없이 다 일심으로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 내에 원만히 처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니 국회원 일동과 전문위원 여러분의 애국성심을 우리가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북동포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사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하여 국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의 선동을 받아 제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의 행동을 버리고 남북의 정신통일로 우리 강토를 회복해서 조상의 유업을 완전히 보호하여 가지고 우리끼리 합하여 공산이나 무엇이나 민의를 따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므로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절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 개과해서 우리와 같이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하루바삐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복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기를 바라며 부탁합니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25일)

 

위 대목은 국회 내의 반대세력에 대한 그의 시각을, 아래 대목은 이북 정권에 대한 그의 시각을 보여준다. 좋은 말씀을 열심히 엮어 내놓는 취임사에서도 감출 수 없는 반대세력에 대한 그의 적개심이 장차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자세를 예고해 준다.

 

이승만이 어떤 인물인지는 그 동안 질릴 정도로 많이 봐 왔고, 부통령에 취임한 이시영(1869~1953년)에게 한 차례 주의를 돌려 본다. 이승만과 김구보다 6-7세 연상인 그는 임정 최고 원로였다. 나이로만 원로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공로가 엄청나게 큰 인물이었다. 합방 전 평안도 관찰사와 한성재판소장 등 대한제국 고관을 지냈고, 합방 후 이회영 등 6형제가 함께 망명해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재중 항일운동의 종갓집 노릇을 했다.

 

탁월한 경력과 지대한 공헌에 걸맞는 자리를 임정에서 차지한 일이 없고 어떤 분규에도 두드러지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로 보아 특출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리를 탐내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주견을 내세움에 있어서도 겸양의 자세를 지킨 분 같다. 주견이 약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당당히 내세우되 남에게 강제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귀국한 뒤의 행적도 그렇다. 1947년 9월 26일자 일기에 그가 세 차례 ‘퇴진’ 성명을 발표한 일을 적었다. 1946년 8월 독촉국민회 위원장직 사퇴, 1947년 9월 국민의회 국무위원직과 의정원 의원직 사퇴, 그리고 1951년 5월의 부통령직 사퇴다.

 

이시영은 사퇴할 때마다 사퇴 이유를 얼버무린 일이 없다. 완곡하면서도 분명하게 이유를 밝혔다. 1946년 8월 독촉국민회 위원장직 사퇴 때의 성명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 민족적 중대위기에 임하여 민주주의국가 건설이란 동일한 정치이념에도 불구하고 각 지도자들의 파지(把持)하고 있는 그 구구한 정견과 방략의 사곡 고집을 볼 때에 끝없는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아울러 합류불능을 통감하는 바이다. 특히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앙간부로 말하면 다 당시 준초인물(俊楚人物)이라 한다. (...)그러나 가끔 그들의 동작이 법규나 조리에 맞지 못하는 표현이 있을 때에는 물의가 훤등하여 나로 하여금 극도 불안을 느끼게 할 뿐이요 광정할 도리가 없으므로 결연히 일절 공직을 탈리 사퇴하고 동시에 3천만 형제자매에게 사과하여 마지않는다.” (<서울신문> 1946년 08월 18일)

 

독촉국민회는 이승만의 사조직이었지만 명분은 그럴싸하게 내걸고 있었다. 그 잘못된 행태가 드러날 때 자기로서는 “광정할 도리가 없으므로” 물러난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9월 국민의회와 의정원으로부터 물러날 때의 성명서에서도 그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해방 후 정부책임자들은 국제의 무리 압박으로 부득이 사인 자격이라는 수치스러운 걸음으로 귀국하여 떳떳치 못한 형편도 불무하였으나 지켜온 법통 정신만은 그다지 손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금회에 소위 43차 회의가 진정한 혁명자의 집단으로 개편치도 않았고 특히 국무위원회의 결재와 지시도 없이 상임위원회에서 권리를 남용하여 몇 개인이 자의자상(自意自想)대로 제반 사항을 결정하였다.

 

이는 30년 전래의 신성한 법통을 유린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임정의 위신을 잃게 한 일대 유감사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하자와 부당성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의 망행은 용서할 수 없는 위헌행동이다. 30여 년간 법통과 고절(苦節)을 지켜온 본인의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은인 묵과할 수 없는 바이다. 이에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의정원의원을 다 탈리하는 바이다. 다만 직무의 불충실한 과오를 일반 동포 앞에 사과할 뿐이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26일)

 

독촉국민회와 달리 국민의회와 의정원은 임정의 연속선상에 있는 기구들이었다. 이로부터의 탈퇴는 모든 공적 활동으로부터의 완전한 은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때 이시영의 나이는 79세였고, 공로만 있고 허물은 없는 깨끗한 은퇴였다.

 

그렇게 은거한 80세 노인이 왜 부통령으로 나서게 된 것일까? 이승만의 뜻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떤 반대도 없을 만한 훌륭한 후보이면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위험이 없는 인물.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권위가 김구에게 떨어지지 않는 인물. 김구가 단정 반대에 나선 것이 이승만에게는 큰 정치적 부담이었다. 자기 노선을 김구가 지지해 주지 않는다면 김구에 못지않은 권위를 가진 인물의 존재가 필요했다.

 

이승만의 뜻이 그렇다면 이시영은 왜 호응했을까. 나는 진퇴에 대한 선비의 자세로 이해한다. 주어진 역할이 대의에 맞는 것이라면 취향이나 의심 때문에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의가 지속하는 한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투가 욕심나서 나섰다고 볼 만한 꼬투리는 그의 일생을 통해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1947년 9월 이후 이시영의 은거는 철저했다. 기념행사나 유엔위원단 환영 등 의전적인 일 빼고는 그의 이름 석 자가 신문지상에 나타나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정부 수립을 눈앞에 둔 1948년 7월 들어 그의 존재가 언론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침묵을 깨뜨린 노 혁명가 이시영 옹 담 - 이 박사 김구 씨 타협 곤란”

 

재작년 가을 국민의회 한독당 등 임정 계통의 모든 정치단체와 관계를 끊는 비장한 성명을 발표하고 초야에 나려 묵묵히 새로운 독자적 건국 구상에 잠기고 있던 성재 이시영 옹의 최근 동향은 정계의 변화와 함께 크게 주목받고 있거니와 정부 수립을 앞두고 이 박사와 이 옹 간은 물론 기타 정계 요인들의 내왕이 빈번한데 정부가 수립되면 이 옹이 부통령으로 출마하리라는 설이 유포되고 있는 때인 만큼 옹의 거취는 더욱 일반의 시선을 끌고 있다. 옹은 그 동안 경춘선 마석 향촌에 가서 일삭이나 정양을 하다가 지난 30일 귀경하였는데 옹은 3일 왕방한 기자와 옹과 이 박사와의 관계, 김구 씨와 김 박사의 태도 및 서 박사 추대운동 등 제반 시사문제에 대하여 80 노령에 정정한 기력으로 대요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였다.

 

문: 이 박사가 대통령으로 피선된다면 옹은 부통령으로 입각하게 되리라는 설이 있는데?

답: 나로선 금시초문이다. 나보다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있는데 나 같은 노후한 인물이 나가서 뭣하겠는가. 그러나 일생을 조국 광복에 바쳐 이 몸이 이렇듯 늙어빠진 만큼 앞으로도 건국에 여생을 바칠 각오이다.

 

문: 이 박사 개인에 대한 옹의 기대와 요망은?

답: 이 박사는 좀 양보성이 있어 주길 바란다. 정부가 서더라도 태산과 같은 중임을 지고 나가는 데는 좀 벅찰 것이다.

 

문: 이 박사와 김구 씨는 합작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답: 합작? 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박사는 조각(組閣) 일보 전에 듣고 아니 듣고 간에 김구 씨에게 최후로 협조를 요청하게 될 것인데 글쎄... 김구 씨가 들을라구?

 

문: 선거 국회는 물론 정부수립까지 보이콧하는 김구 씨의 태도를 어찌 보는가?

답: 나는 여러 번 김구 씨더러 그러지 말고 마음을 돌려 반쪽 정부나마 세우는 데 협력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해 보았으나 결국 도로(徒勞)였다.

 

문: 그러면 김규식 박사는?

답: 물론 김구 씨와 함께 훌륭한 분이나 좀 더 견고한 의지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 서(재필) 박사의 신당설에 대한 소감은?

답: 서 씨는 늦게 귀국하여 현재 군정청 최고의정관 자리에 앉아있는 만큼 해방 이래 3년 가까이 남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뒤에 참섭(參涉)하여 뭣이니 뭣이니 한다는 것은 자미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또 새로운 파당을 짓는다는 것은 불찬성이다.

 

문: 38선은 언제나 터질 것이며 남북통일은 가능한가?

답: 38선이 터지는 것이라든가 또는 남북통일 등의 문제는 국제간에 해결할 성질의 것이요, 우리 독력으로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애는 써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4일)

 

보름 후에 있을 부통령 출마설을 “금시초문”이라는 것이 웬만해서는 곧이듣기 어려운 이야기인데, 워낙 어떤 일에든 원칙에 투철한 인물이라서 이것까지 곧이들릴 지경이다. 이 기자회견 중에도 이승만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데, 정치적 입장이 표현에 영향을 끼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좀 양보성이 있어 주길” 바란다며, “태산과 같은 중임을 지고 나가는 데는 좀 벅찰 것”이라고, 직격탄이다. 김구에 대해서는 드러내 악평을 하지는 않지만 김구의 고집이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을 분명히 한다. 김규식에 대해 “좀 더 견고한 의지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은 김규식의 노선에 찬성하면서 추진력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재필에 대해서는 그 위치부터가 마땅치 않다고 한다.

 

기자가 서재필에 관한 질문을 한 것은 얼마 전의 ‘서재필 추대 운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재필의 귀국은 그를 이승만의 대항마로 삼으려는 하지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는데,(1947년 4월 27일자 일기) 서재필 본인은 권력투쟁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조선사람이 될 생각도 없이 미국인으로만 행세했다. 그런데 정부 수립과 이승만의 권력 장악이 목전에 닥쳐오자 이승만 반대자들이 서재필에게 매달린 모양이었다.

 

“2차 회의에 벌써 파란 - 문제의 ‘독립협회’”

 

방금 국회가 소집되어 국가 백년대계를 세울 헌법을 신중 기초 중에 있는 이때 지난 총선거에 낙선된 일부 인사들이 정일형 박사를 회장으로 서재필 박사를 정계 최고지도자로 추대하여 독립협회를 확대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하려는 기색이 농후하여 오던 바 지난 11일 제1차, 또 17일 하오 2시 제2차로 시내 남대문로5가 명신백화점 3층에서 최능진 백인제 안동원 김붕준 이용고 노진설 여행열 정인과 윤석진 등 30여 인이 회합하여 동회의 사옥 문제 재정 문제와 서재필 박사에게 보낼 간원문을 토의하였다 하는데 (...) 서 박사에게 보내려던 간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애하는 서재필 박사, 조국과 그 인민은 선생을 지도자로 부릅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아서 이를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 한 분이 있으니 그는 서 박사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명 등은 선생께서 정계의 최고지도자로 출마하시기를 간청하기로 결심하였사오니 선생은 우리 한족의 건국 초두에 그른 길에 끌지 않고 참된 민주주의의 직로를 걷도록 노에 응하여 주시기를 간원하나이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9일)

 

그러나 이 움직임이 허황한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튿날 신문에 밝혀진다.

 

“정계 혼란을 초래할 뿐 - ‘독협’ 간원(懇願)을 서 박사 거절”

 

서재필박사를 최고 정치지도자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하려는 흥사단계 독립협회에서는 서 박사에게 간원문을 보냈으나 서 박사는 조국의 독립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위기에 서 있는 이때 이러한 정당조직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더욱 혼란케 할 뿐이오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이를 거절하였다 하며, 한편 정일형·백인제·장도빈·이용고·안동원 제씨는 이 독립협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런 단체에 아무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각각 작일 표명한 바 있었고 이분들의 이름을 남용하여 모략을 하려는 것이 판명되었는데 이 회합에 참석하였던 백영엽은 회합 내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독립협회의 책임자는 정인과 씨와 최모이며 나는 여러 번 간청을 받아 2차나 출석하였으나 정일형·장도빈·안동원·노진설·백인제는 본 일이 없다. 그리고 후 이러한 책동은 하등의 성과도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20일)

 

인용된 백영엽의 발언 중 “최모”란 최능진을 가리킨 것이다.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있다가 1947년 12월 조병옥-장택상과 충돌하고 파면당한 최능진은 5-10선거에서 이승만의 지역구에 도전하다가 등록을 취소당했다. 그는 김구 노선 추종자로 알려졌고 여순사건에도 연루될 사람이다. 미군정 지도자들과도 상당한 교분을 갖고 있어서 이승만에 대한 하지의 적개심과 결탁해 이승만의 권력 장악을 저지하려고 온갖 방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조병옥-장택상에게 대항할 때는 투철한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생각되었는데, 미군정을 업고 계략을 꾸미는 모습에는 수단방법을 가리는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서재필 추대운동은 큰 힘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서재필 자신도 시종일관 추대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독촉국민회에서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결의하고 나서는 것을 보면 이승만에 대한 ‘충성 경쟁’이 이미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27일 “서 박사 추대운동에 대항 - 독촉 산하 전적 반대운동”) 서재필은 7월 4일 ‘피맆 졔이손’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 “나는 미국 시민이며 미국 시민으로 머무를 작정”이라고 선언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6일 “서 박사 추대 거부 성명”)

 

7월 20일 오전의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를 얻어 바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그밖에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 1표가 나왔는데, 서재필은 미국인이므로 무효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표결로 무효처리했다. 오후의 부통령선거에서는 이시영이 1차투표에서 최다득표를 했으나 3분지 2 지지에 미달하여 2차투표에서 133표로 당선되었다. 김구에게 1차투표에서 65표, 2차투표에서 62표가 나온 것은 무소속구락부의 투표로 보인다.

 

한민당과 독촉계열은 부통령선거까지 보조를 맞췄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이 첫 번째로 할 일인 국무총리 임명을 둘러싸고 한민당은 이승만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다. 이익으로 뭉친 사이는 이익을 함께 하는 동안 꿀처럼 달콤하다. 그러나 이익은 언젠가 갈라지게 되어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