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황장엽 회고록>을 들여다본 것은 공산권 붕괴를 향한 세계정세 변화가 진행되고 있던 1980년대 상황에 북한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 시기에 조선로동당 국제 비서 등 요직을 맡고 있던 인물의 증언이라면 당시 북한 지도부의 상황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회고록에서 얻은 것은 많지 않았다. 정직한 증언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소득이라면 북한에서 출세나 권력 획득을 위해 어떤 행태가 만연했는지 하나의 사례를 보면서 한국전쟁 이후 가장 중대한 정세변화를 앞두고 북한 지도부가 내부 문제에만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정도다.

 

북한 내부의 시각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이처럼 제한되어 있다. 지금으로서는 외부 시각을 정리해 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책으로 김성보의 <북한의 역사 1>과 이종석의 <북한의 역사 2>가 눈에 띈다. <20세기 한국사> 시리즈(역사비평사 펴냄)의 일환인데, 일반인이 북한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편리한 책들이다. “냉전 이후”에 관심 가진 독자들에게 두 권 다 강력히 추천한다.

 

<북한의 역사 1>의 마지막 장 “글을 맺으며-북한의 역사에서 찾아본 열린 가능성”에 세 개의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어 있다. (1)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가였는가?” (2) “북한은 어떻게 초기 경쟁에서 남한에 우위를 점령했는가?” (3) “북한 체제는 왜 경직되기 시작했는가?”

 

질문(1)에 대해 김성보는 북한 정권이 애초부터 동유럽 위성국들에 비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고 소련의 통제 의지도 약했다고 본다. 소련은 ‘종주국’보다 ‘후원국’ 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 중국을 상대로 등거리 외교를 펼치게 된 것을 “상대적 자율성에서 절대적 자율성으로 자율성을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질문(2)에서 김성보는 1950년대 말까지 북한이 자주성, 개혁성, 안정성 등 모든 분야에서 남한을 압도하게 된 이유 세 가지를 제시한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점, 외부 원조를 체계적으로 활용한 점, 그리고 강력한 권력구조를 창출한 점이다. 다만 이 조건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유용성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 질문(3)으로 이어진다.

 

질문(3)에 대한 김성보의 대답은 “다양성의 상실”이다. 건국과정과 전쟁, 그리고 1955년을 전후한 대숙청 등 세 단계에서 이질적 요소를 배척하고 권력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민족통일전선과 인민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역사에 비약이란 것이 있을 수 있지만, 비약은 반드시 후유증을 낳는다는 문제를 그는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공산권’에 속한 모든 국가를 ‘공산국가’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자유진영’에 속한 국가 모두가 ‘자유국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공산권 국가들의 실제 모습에도 큰 편차가 있었다. 김성보는 초기 북한 정권이 추구한 인민민주주의가 원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뛰어넘는 ‘제3의 길’이었는데, 냉전 심화에 따라 공산권에서는 공산주의로 진행하는 하나의 중간단계로 인식된 것이라고 본다.

 

북한은 노동자 계급의 반자본주의 세계혁명이 아니라 반제국주의 반봉건 근대 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서 자신의 체제를 구축했다. 북한의 집권층은 애초에 인민민주주의 제도가 과도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 사회주의를 건설하기에는 사회경제적 토대가 취약하며, 북한에 남한과 전혀 이질적인 제도를 만들 경우 통일에 걸림돌이 되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냉전이 심화되어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이분법적 대립이 명확해지면서, 제3의 유형으로서의 인민민주주의의 존속 의미는 점차 퇴색되었다. 사회경제적 토대가 취약하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이는 밖으로 소련 등 공산권의 지원을 받고, 안으로 인민의 역량을 총동원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사회주의 이행 급진화의 논리가 점진적 이행의 논리를 압도했다. 이웃 중국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개조 정책은 북한을 더욱 자극했다. 체제 경쟁에서 남한에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까지 더해지면서, 195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사회주의 개조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그 과정에서 저항과 마찰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런 갈등은 지도력을 더욱 강화하고 체제를 경직화하는 반작용을 낳았다. (<북한의 역사 1> 242-243쪽)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조선이 일본 지배로부터 해방될 때 조선 인민의 최대 염원은 민족국가 건설이었고, 압도적 다수가 그 방향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원했다. 당시 식민지배에서 해방되는 지역 대부분의 민심이 같은 방향이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선택은 그들에게 실제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냉전은 이들 지역에 양자택일을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일부 지역만이 ‘비동맹’으로 남았다. 조선은 양쪽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곳이었다.

 

공산권에 들어간 국가들도 공산주의혁명이 당장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과도기를 설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해진 정책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위 글에서 “이웃 중국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개조 정책”이 북한을 자극했다고 하지만, 원톄쥔은 <백년의 급진>(김진공 옮김, 돌베개 펴냄) 70-72쪽에서 “1950년대는 극좌가 아니라, 공업화와 친자본을 추구한 시기”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이종석은 1980년대 북한 지도부가 스스로의 발전 단계를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단계”로 설정한 점을 중시한다. 무계급사회가 실현되어 사회주의라는 과도기가 끝나고 진정한 공산사회가 완성되기 직전의 마지막 고비로 보았다는 것이다. 개혁개방 노선에 나선 중국과의 차이를 이렇게 비교한다. (<북한의 역사 2> 127-128쪽)

 

사회주의 완전 승리 테제에 기초한 북한의 사회 발전 구상은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을 내세우며 경제 발전을 위해 개혁개방을 추진한 중국의 태도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지도부는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하면서 드러난 생산력의 저발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과감하게 자기 사회의 발전 단계를 사회주의 초급 단계로 규정하고, 그 극복을 위하여 서방의 선진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구사했다. 그들은 사회 성격 차원에서는 사회주의 제도가 확립되었으나 경제의 저발달로 인해 인민이 사회주의 제도에 걸맞는 경제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기아에 허덕이는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생산력 발전을 사회주의 건설의 표준으로 내세운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을 표방했다. 반면 북한 지도부는 낮은 생산력 수준에도 불구하고 무계급사회의 실현을 위해 나아가자고 주장했다. 중국 지도부가 볼 때, 북한의 사회주의 완전 승리 테제는 비현실적인 구호였다.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은 1987년 11월 자신을 예방한 이근모 북한 정무원 총리에게 중국공산당 13차 대회에 대해 보고하면서 건국 100년까지의 경제 발전 전략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1세기 중반 중국은 중등 발달 국가의 수준에 달할 것이며, 이때까지는 아직 62년이 남았다고 설명했다. 이는 사회주의 완전 승리 테제를 주장하며 조급한 성과를 추구하는 북한에게, 그들보다 경제 발전이 앞선 중국조차 사회주의 초급 단계 기간으로 백 년을 상정했음을 강조함으로써 올바른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한 것으로 해석된다.

 

1980년 10월의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는 10년 만에 열린 당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이 정치국 위원 및 비서국 비서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뽑혔다. 후계체제 확립을 위한 ‘수령-후계자 공동통치’ 시대가 이로부터 시작되었고, 김정일은 경제를 비롯한 내정을 맡게 되었다. 후계자의 권위 상승을 위해서도 경제발전의 성과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현실경제는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속도창조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한 점을 <황장엽 회고록> 277쪽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김정일은 1970년대에 실권을 잡으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70일 전투’라는 유명한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경제적인 고려 없이 무작정 속도전이나 전격전의 구호를 내걸고 인민들을 무리하게 내몰았다. 그래서 설비를 혹사하고 원가를 무시하여 각종 자재와 노력을 엄청나게 낭비했으며, 경제학의 초보적 이론마저 무시하여 국가 경제발전에 치명적인 차질을 초래했다.

 

예컨대 석탄을 캐기 위해서는 굴진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저 높이 세운 목표의 달성만 요구하다 보니 굴진을 선행시키는 원칙을 무시하고 이미 굴진하여 확보된 탄맥의 탄만 긁어내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생산계획을 달성한 사람들은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굴진은 하지 않고 계속 채탄만 하다 보니 결국 석탄생산이 중지되다시피 했다. 그래도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자기 공로를 과장하여 보고하기 일쑤였다.

 

1950년대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대한 비판과 너무 판박이라서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문제의 성격은 제대로 나타낸 것으로 받아들인다. 1980년대 북한의 경제발전계획이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의 권위를 지키고 높이기 위해 얄팍한 수법을 동원할 개연성은 분명히 있었다.

 

6차 당 대회에서는 김정일의 전면 등장과 함께 당 지도부에서 혁명 1세대가 물러나고 혁명 2세대와 실무형 지도자들이 들어서는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새 지도부는 이념보다 현실 측면에서 역량을 발휘할 책임을 갖고 있었으니, 1980년대의 경제발전은 후계자의 권위만이 아니라 당 지도부의 신뢰가 걸린 절박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경제상황은 신통치 않았다. 1978~1984년간 2차 7개년 계획의 성과는 계획기간이 끝난 지 2년 이상 지난 뒤 애초의 목적을 대충 달성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미국과 한국의 정보기관은 그 절반 수준으로 추정했다. 서방 정보기관의 성격과 능력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북한 공식 발표보다 크게 낮은 수준의 실적으로 보인다. 1987년 3차 7개년계획에 돌입하기까지 2년간의 조정기간을 둔 것이 실패를 자인하는 조치였다.(이종석 위 책 122-123쪽)

 

3차 7개년 계획이 끝날 무렵인 1993년 12월 강성산 정무원 총리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보고에서 공업생산량 성장이 1.9배 목표에 못 이르는 1.5배에 그쳤다고 실패를 인정했다고 하나 이종석은 그보다 훨씬 더 참혹한 실패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주민과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왜곡과 과장을 행했으리라는 것이다.(이종석 위 책 125쪽) 소련 해체와 공산권 붕괴가 진행된 시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참혹한 실패가 당연한 일이다.

 

경제 부진에 겹쳐 서울올림픽 진행과 공산권의 전반적 침체에 따라 북한의 대외관계도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었다. 대내외적 위기의 심화 속에 북한의 통일정책도 변화를 겪는다.

 

북한의 통일정책은 분단건국 당시부터 ‘남조선혁명론’을 기조로 하고 있었다. 정당한 건국이 북쪽에서만 이뤄지고 남쪽을 미제의 괴뢰정권이 장악했으니 인민의 저항이 마땅히 괴뢰정권을 무너뜨릴 것이므로 이 저항을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국제적으로는 ‘두 개의 한국’을 부정하는 원칙 아래 남한을 고립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1980년대에 이르게 되면 남한의 순조로운 경제발전 앞에 더 이상 내부 봉기를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이종석은 1980년 6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 방안을 북한 통일정책의 큰 변화의 출발점으로 본다. 북한의 연방제 제안은 1960년에 시작된 것이고 1973년에는 ‘고려연방공화국’이란 이름도 나왔다.(그래서 남한 반공정권은 일체의 점진적 평화적 통일방안이 북한의 연방제 주장을 따라가는 것이라 하여 탄압하기도 했다.) 그런데 1980년에 나온 방안은 종래의 연방제가 통일에 이르는 과도기 체제로서 제시된 것이었음에 반해 연방제를 최종적 통일 형태로 제시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는 것이었다.(이종석 위 책 136-143쪽)

 

연방제가 과도기 체제라면 그 다음의 최종적 선택이 과제로 남아있다. 1960년대 북한의 제안은 “연방제를 시행하기만 하면 인민이 우리 체제를 선택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바탕에 깔고 있는 공세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1980년에 와서 김일성이 내놓은 방안은 체제경쟁의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접어놓은 것이었다. ‘두 개의 한국’을 부정하는 원칙은 지키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사회로서 남한의 존재를 항구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남조선혁명론’을 포기하는 의미가 있는 방안이었다. 이종석은 이 방향 전환이 이후 남한의 체제경쟁 승리 양상 속에서 북한 입장을 방어하는 이론적 방파제가 된 역설을 지적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 방안이 198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 속에서, 대남 분야에서 위기에 처한 북한 체제를 지키는 이론적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의 고려연방제가 남북한의 빠른 통일과 그것을 위한 여러 조치들을 상징하고 있었다면, 고려민주연방제는 오히려 남북한이 실질적으로 분단된 두 개의 국가임을 인정하고 장기적으로 평화공존하자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이 방안은 남북이 서로 상대방의 제도를 실질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통일 방안은 애초에 공세적 차원에서 남한 당국에 제안된 것이었음에도, 동독 붕괴로 인해 한반도에서 남한 주도의 흡수통일론이 나돈 1990년대 이후의 위기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북한 체제를 보호-유지하는 이론적 수비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종석 위 책 142쪽)

 

 

Posted by 문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장엽” 기사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되어 있다.

 

황장엽이 한국으로의 망명 전까지 김일성-김정일 부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자신의 신변불안과 위협 때문에 정치적 망명을 택한 후 비록 말년(末年)에 한국에서 반 김정일 활동에 진력했다고 하나, 오늘날 북한주민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족벌체제하에서 온갖 고통을 감내(堪耐)해야 하는 근인(根因) 중 하나인 주체사상을 정립하는데 적극 기여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 김정일 체제의 잔혹상을 고발하고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북한 인권상황 개선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던 공과를 결코 폄하(貶下)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다.

 

1997년 2월 베이징 한국대사관으로 망명한 황장엽(1923~2010)은 김일성대학 총장, 조선로동당 국제비서와 총비서장,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낸 최고위급 인사일 뿐 아니라 북한의 통치이념이던 주체사상의 핵심이론가였다. 권력 측면에서나 사상 측면에서나 북한 지도부 중심에 오랫동안 있던 74세 노인의 망명은 누구에게나 놀라운 일이었다.

 

70세가 되어 “마음이 바라는 곳으로 따라가도 경계선을 넘지 않게” 되었다고 한 성인이 아니라도,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얕은 욕심이 잦아드는 것이 정상이다. 고희가 지난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새로 바라겠는가? 사람들이 그의 망명에서 순수한 동기를 기대한 것은 오랫동안 고위직을 지낸 경력 위에 그의 나이가 겹쳐진 때문이었다.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은 북한의 실상에 대해 그가 많은 중요한 사실을 정직하게 알려줄 것을 사람들은 기대했다.

 

남한에 와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회고록 집필이었던 것은 그런 기대에 부응한 일이었다. 1999년에 나온 회고록의 머리말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나의 삶을 마무리지으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진실을 밝히려고 했다. 내가 미워하고 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실보다 나쁘게 평가하려 하지 않았으며,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원칙하게 미화하려 하지 않았다. 역사는 결국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갖다놓기 마련이며 역사를 왜곡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

 

나는 나의 견해를 절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읽어주기 바란다. 사회공동의 이익과 관계 없는 개인의 사생활이라든가 다른 나라의 내정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될수록 언급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황장엽 회고록-“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시대정신 펴냄) 7-8쪽)

 

나는 북한 사정이 궁금하면서도 이 책을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직한 기록이 아닐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 느낌이 든 까닭은 여러 가지이거니와, 무엇보다 부제에 쓰인 ‘진리’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진리란 믿음의 대상이다. 진리의 주장에는 그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그러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을 조장하는 의미가 있다. 남북 간의 경계선을 뛰어넘은 그의 망명이 대립의 초월이 아니라 새로운 대립구조로의 전환일 뿐이라는 의심이 이 말에서 굳어졌다.

 

결국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1980년대 공산권 붕괴를 앞둔 북한 상황을 살펴보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한 사정을 많이 전해준 인물로 박병엽(1922~1998,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선인 펴냄)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선인 펴냄) 등을 남김)이 있지만 그는 1980년대 초에 북한을 떠났고, 초기 북한에 대한 증언을 집중적으로 남긴 사람이다. 좀 미심쩍더라도 황장엽의 책을 “사실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책을 펼치자마자 정말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자신의 인격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너무 ‘초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능력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고매한 인격, 성실한 인품, 투철한 책임감, 순수한 이상주의... 정말로 그런 특성을 다 갖춘 사람의 현실에 대한 기록이라면 참고 가치를 바랄 수 없다. 그런 깨끗한 인격자가 어떻게 더러운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참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은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을 할 동기가 있는 것이다. 그 동기를 이해한다면 그 거짓말이 가진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예컨대 황장엽은 자기와 맞선 사람들을 비판할 때 예외 없이 ‘아첨꾼’이나 ‘모략꾼’으로 매도한다. 사상투쟁이든 권력투쟁이든 아첨과 모략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보는 그의 인식이 여기에 비쳐져 있다. 그 스스로 어떤 자세로 투쟁에 임해 왔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의 기록을 읽으면 투쟁의 양상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황장엽의 거짓말이 없는 사실을 지어낸 것으로 보이는 대목은 별로 없다. 사실의 해석에서 황당하게 치우치는 문제 정도로 생각된다. 그런 해석을 그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것이라면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반대자들을 아첨꾼으로 몰아붙이는 그가 자기 자신의 행동을 스스럼없이 적은 것을 볼 때, 자신은 아첨꾼이 아니었다고 진심으로 그가 믿었다면 도저히 정상적 정신상태로 볼 수 없다.

 

당시[1970년대 중엽] 나는 김일성의 아들과 딸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반이 확고하지는 않더라고[도] 불안해 할 정도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자식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경진 등을 위해 자주 특강을 해주었다. 또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를 위해서는 아내가 그 집에 가서 살다시피하면서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나도 이따금 중앙당에 근무하는 김경희를 찾아가 강의를 해주었다. (<황장엽 회고록> 212쪽)

 

김경희-장성택 부부는 황장엽의 후원자로 여러 번 책에 나온다. 김일성과 김정일 이하 모든 중요 인물에게 잘 보이려고 그가 기울인 노력을 행간에서 끊임없이 알아볼 수 있는데 그 노력이 가장 큰 성과를 보인 상대가 김경희였고,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아내가 그 집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고 적었을 것이다. 김정일-김경희 남매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1980년대 초반인 듯.

 

하루는 김정일이 오랜만에 나를 술자리에 불렀다. 한창 연회가 무르익는데 김정일이 나더러 들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황 비서가 술을 한 잔 쭉 마시는 걸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그러자 동료들이 내 양쪽으로 달라붙어 강제로 술을 먹이려고 난리였다. 나는 입을 꼭 다물고 그들이 붓는 술을 절대로 입에 넣지 않았다. 그러자 술이 흘러 옷이 젖고 말았다. 동료들이 질려 물러나자 이번에는 김경희가 나섰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도 있고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무안해 하지 않게 하려고 조금 마시는 척했다. 그걸 본 김정일이 직접 나섰다.

 

“모두 그만두시오. 내가 책임지고 마시게 할 테니.”

 

김정일은 자기 자리에 있는 술병을 들어 따라 주면서 덧붙였다.

 

“버티려면 끝까지 버텨야지, 경희가 먹인다고 드시면 됩니까.”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아 그가 따라준 술을 눈 딱 감고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술은 맹물이었다. 아마도 김정일은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어서, 색깔만 술과 같은 맹물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위 책 260쪽)

 

김경희가 나선 것은 왜였을까. “황장엽은 김경희 사람”이라는 평판이 파다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몸싸움 수준의 권주에 목숨 걸고 저항하던 그가 김경희의 잔만은 마시는 척이라도 하는 걸 보며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을까. 그걸 빤히 알면서도 김경희의 잔을 물리치지 못하는 황장엽. 그리고 김정일이 손수 나서자 목숨 걸고 그 잔을 털어 넣는 황장엽.

 

김정일과의 관계에 대한 황장엽의 인식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김정일은 김영주가 부총리에 있는 것도 껄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김영주를 자강도의 어느 산골로 보내 연금시켜 버렸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93년, 김일성은 자기 동생의 처리문제로 평판이 좋지 않고, 또 이제는 김정일의 경쟁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계산하여 김영주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형식상의 부주석을 시켰다. 그러나 김영주는 여전히 연금상태나 마찬가지였고, 업무에서도 철저하게 제외되었다.

 

김영주는 유배지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은 지지해도 정일이는 지지할 수 없다. 정일이를 망친 것은 황장엽이다.”

 

김영주는 내가 김정일을 망친 것으로 오해할 만큼 현실파악이 어두운 편이었다. (위 책 208쪽)

 

김정일을 ‘망친’ 사람이라면 어찌 보면 김정일을 ‘만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황장엽이 김정일을 극렬하게 비판하면서도 그 지도자를 자기가 만든 면이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 자부심이 김영주의 말 인용을 통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대학총장, 당 비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 당당한 자리에 앉아 있을 때도 그가 제일 공을 들인 일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연설문 대필이었다. 의욕적으로 쓴 연설문이 윗분에게 채택되는 장면을 그릴 때마다 그가 느꼈던 희열은 남한에 와서 쓴 회고록에서도 생생하게 나타난다. 인민이 받아들이는 지도자의 모습이 실은 자기가 써준 연설문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 것 같다.

 

황장엽은 1980년대에 대한 회고를 담은 제6장 제목을 “권력의 중심에서”로 했다. 그에게 득의의 시절이었고, 1979년 10월에 세워진 주체사상연구소가 그만의 권력기반이 되었다. 1980년대에 그는 당 과학교육비서와 국제비서란 요직을 지냈으나 연구소를 잠시도 자기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87년 주체과학원 청사를 용악산국립공원 밑의 좋은 부지에 지을 때의 회고에는 기쁨이 넘쳐난다. 그 무렵 김정일로부터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이 땅에서 가장 수재라고 소문난 사람들만 뽑아 황 박사 직속으로 두고 이론을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듣고 기뻐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선전부의 지원을 받는 사회과학원 학자들이 계속 나와서 주체사상연구소를 집요하게 중상비방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사회과학원에서 이론적으로 잘 무장된 학자들만을 뽑아 그들의 사상개조를 실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사회과학원에서 가장 실력 있고 주체과학원을 반대하는 데 앞장서 온 7~8명의 학자들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그러자 원장인 양형섭이 조직부를 찾아와서 이렇게 하면 사회과학원은 망한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하지만 조직부 간부과에서는 이 지시는 황 비서의 지시가 아니라 김정일 동지의 지시이기 때문에 반대했다가는 큰 문제가 된다고 위협하여 양형섭을 쫓아버리듯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학위를 받은 20여 명의 수재들을 엄선하여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오직 국제비서인 나에게만 소속된 집단을 만들어, 비밀유지를 위해 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이라고 명명하고 철학, 경제학, 정치학의 3개 분실을 두었다. 그들에게는 당 중앙위원회 직원으로서 온갖 혜택을 누리게 하는 한편, 학자로서의 특별대우를 받도록 하면서 노력동원에도 면제되는 특권을 주었다.

 

사회과학원에서 주체과학원으로 온 학자들은 한 달도 안 되어 자신들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러자 사회과학원에서는 그들을 변절자라고 비방하기 시작했다. 자료연구실 학자들의 실력은 급격히 향상되었으며, 이들은 비단 김정일이 요구하는 일만을 하는 게 아니라 주체과학원 학자들의 이론수준을 높이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위 책 265-266쪽)

 

주체과학원을 만들면서 경쟁기관인 사회과학원의 알짜 인재들을 빼 오다니, 그것도 주체과학원 반대에 앞장선 사람들에게 “소환장”을 보내다니, 정말 악랄한 수법이다. 사회과학원장 양형섭이 누구인가. 김일성의 고종사촌 매부다. 김정일 후계구도가 확정되기 전까지 가장 강력한 김일성의 측근 중 하나였다. 김정일을 등에 업고 사회과학원을 초토화하면서 왕년의 권력자 양형섭을 물 먹이는 장면이다. 어찌 신이 나지 않겠는가.

 

제6장에서 황장엽은 주체사상연구소를 발판으로 얼마나 자기 활동이 신나게 펼쳐졌는지 적기 바빠서 당시의 정세 변화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중국의 개혁 개방”이란 제목의 절이 하나 있는데(261-267쪽), 진짜 중국에 관한 이야기는 두 쪽도 안 되고 주체사상연구소 이야기만 잔뜩 들어있다. “나는 북한도 하루빨리 개혁 개방으로 나가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받았다.”느니, “나는 틈틈이 국제부 요원들과 주체사상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변화하는 중국의 실상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정신을 일깨워졌다.”느니 하는 말은 회고록 쓸 때 생각나서 끼워 넣은 듯 뜬금없이 들린다. 아무 알맹이가 없다.

 

<황장엽 회고록>에서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1980년대 북한의 최고위급 인사 한 사람이(그것도 조선로동당 국제비서라는 사람이!) 세계정세 변화에는 별 관심 없이 주체사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실을 더 중시한 다른 정치인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황장엽 같은 인물이 득의의 시절을 보낸 것을 보면 당시 북한에서는 지배체제 정립에 바빠 현실 정책 생산이 뒷전이었던 것 같다.

 

 

Posted by 문천

 

남북한은 오랫동안 서로를 ‘괴뢰’라 불렀다. 국민의 주권을 대표하는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라 종주국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란 말이다. 1972년 7-4공동선언을 계기로 최소한의 권위를 상대방에게 인정하는 단계가 시작되었지만, 서로를 준중하지 않는 ‘괴뢰’관은 그 후에도 양측 지도부의 마음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한을 괴뢰로 본다면 그 종주국은 의문의 여지없이 미국이다. 1945년 9월의 남조선 점령 이래 반세기 이상 남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21세기 들어와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은 아직까지도 압도적인 수준을 지키고 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역할과 비슷한 역할을 북한에 대해 소련이 맡았다는 것이 한국인의 통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역할이다. 미국 다음으로 남한과 큰 관계를 가졌던 일본의 역할이 미국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한국인은 없었다. 반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역할은 소련의 역할과 분명한 경쟁관계에 있었다.

 

중국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 한국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맡아온 나라다. 개항기 이후 혼란에 빠지고 국력이 약해졌으나, 식민지시대 조선 독립운동의 최대 후원국 역할을 계속했다. 우익 임시정부는 국민당정부의 후원을 받았고 좌익 항일운동은 중국공산당에 의지했다.

 

해방 후 중국의 역할은 한국을 점령한 양대 맹주 미국과 소련에 밀려나 있었지만 항일투쟁의 전우관계를 배경으로 한국에 영향력을 키울 기반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국민당정부가 대륙을 잃고 한국에서 임시정부 세력이 몰락했기 때문에 남한과의 관계는 발전하지 못한 반면 함께 공산블록에 들어간 북한과의 관계는 밀접해졌다.

 

한국전쟁을 통해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최대한 가까워졌다. 전쟁에 대한 소련의 ‘후원’은 막대한 인명을 바친 중국의 ‘참전’과 큰 거리가 있었다. 미국과의 정면대결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받아들인 중국에게 한국전쟁은 남의 전쟁일 수 없었다. 인접국으로서 운명을 공유하는 관계가 전쟁으로 확인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몇 해 후 중-소 관계가 갈라지자 북한은 두 나라와의 관계를 서로 비슷하게 두는 등거리외교를 기조로 삼았다. 정세 변화에 따라 때로는 소련을, 때로는 중국을 더 가까이 했다. 수시로 비중이 옮겨지는 상태를 오래 겪는 동안 북한 지도부는 어느 쪽에도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세를 키웠고, 이 자세 위에 ‘주체’ 노선을 세웠다.

 

냉전기를 통해 소련과 중국에 대한 북한의 의존도가 미국에 대한 남한의 의존도보다 훨씬 덜했다. 의존 대상이 두 나라였다는 것도 이유의 일부지만, 소-중 두 나라 모두 스스로 체제 위기에 몰린 일이 많았다는 데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투자만큼 큰 투자를 북한에 꾸준히 할 여유가 소련에게도 중국에게도 없었다.

 

1970년대 초까지 북한 경제가 남한보다 잘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에릭 홉스봄은 <극단의 시대>(Vintage Books, 1994) 257-287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73년까지의 세계적 호황기에 ‘황금시대’(Golden Years)란 이름을 붙였는데, 자본주의 세계에서 좁은 범위의 선진국으로 부의 집중이 이뤄진 시기다. 제3세계 착취가 가혹하던 이 시기에는 자본주의권 후진국보다 사회주의권 후진국이 더 나은 발전 여건을 누렸고, 북한은 이 여건을 잘 활용했던 것이다. 경제 자립도가 남한보다 높았기 때문에 종주국에 대한 의존도 역시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홉스봄이 같은 책 403-433쪽에서 ‘위기시대’(Crisis Decades)라고 이름붙인 1973년 이후의 20년간 일어난 세계적 경제구조의 변화 속에서 한반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남한은 이 시기에 가장 큰 발전을 이룬 신흥산업국(NICs)의 하나로서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위치에 접근한 반면 사회주의권은 전면적 침체와 혼란에 빠져들었다. 소련과 중국 모두 북한에 대한 후견국 내지 종주국 역할의 수행이 갈수록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북한이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이란 극도의 경제난을 겪고 그 직후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급격히 강화되면서 북한에 대한 중국의 후견국 역할이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북한은 이웃 두 대국의 도움이 크게 줄어드는 상황을 겪어야 했다. 건국 후 최악의 고립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냉전 해소의 기운 속에서 남한이 ‘북방정책’을 채용할 때 북한의 대응 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중-소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당시 어떤 상태였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김계동 <북한의 외교정책과 대외관계>(명인문화사, 2012) 제3부 “핵심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본다.)

 

공산진영의 맹주 소련은 자신을 유럽국으로 간주하고 아시아보다 유럽에 먼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북한의 소련에 대한 의존도는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이라고 교육받아 온 우리의 통념에 비해 높지 않았다. 1953~1956년간 북한이 받은 원조 중 34.9%가 소련 것이고 35.4%가 중국 것이었다고 하는데(위 책 325쪽), 당시 두 나라의 경제수준 차이를 감안한다면 소련 원조의 비중이 생각보다 작았다.

 

1956년 흐루시초프가 서방과의 평화공존 노선에 나서면서 북한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후 중-소 분쟁이 펼쳐지자 북한은 두 나라의 원조를 모두 받기 위해 중립노선을 취했으나 중국 쪽으로 많이 기울어지는 편이었다. 1962년 북한의 소련 정책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군사원조 중단 등 소련과 북한의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1964년 흐루시초프 실각 후 브레즈네프-코시긴 지도부가 대 서방 강경노선을 취하면서 소-북 관계가 다시 긴밀해졌다. 반면 중국의 문화혁명에서 홍위병의 북한 지도부 비판이 나옴에 따라 중-북 관계는 소원해졌다. 북한의 대 소련 교역액이 1966년 1억7000만 달러에서 1970년 3억7300만 달러로 늘어나는 동안 대 중국 교역액은 2억300만 달러에서 1억500만 달러로 줄어들었다. 이후 소련과의 교역은 북한의 대외교역에서 계속 50% 이상을 점하면서 1985년 17억6600만 달러(62.5%)에 이르렀다.(위 책 326-327쪽)

 

북-소 관계는 소련의 대 서방 정책이 유화노선일 때 약화되고 강경노선일 때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동서간의 데탕트가 진행된 1970년대에 한-미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서 대결의 첨병으로서의 위치 때문이다.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소련이 개혁-개방 정책에 나설 때 북한의 반응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에는 북-소 관계가 원만했다. 당시 북한은 1984년 9월의 합영법 제정과 대남 수해원조 등 온건한 개혁노선을 추진하고 있었다. 1985년의 해방 40주년 기념식에는 알리예프 제1부수상 등 소련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고, 몇 주일 후에는 고르바초프의 오른팔로 알려진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방문했다. 그 해 연말 원자력 기술을 포함한 경제기술협력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하기도 했다.(와다 하루키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서동만-남기정 옮김, 돌베개 펴냄) 170-171쪽)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태평양 경제협력체 참가 의사와 동아시아 핵무기감축 제의 등을 포함한 1986년 7월의 블라디보스토크 선언과 이를 더욱 강화하면서 한국과의 경제협력 가능성을 밝힌 1988년 9월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을 내놓는 데 따라 북한 지도부는 불신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소련을 비롯한 대다수 공산국가의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도 북한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1990년 9월 한-소 국교정상화가 이뤄지자 북한은 “사회주의 대국으로서의 존엄과 체면, 동맹국의 리익과 신의를 팔아먹은 행위”라며 극렬한 비난을 퍼붓기에 이른다.(김계동 위 책 327쪽)

 

1991년 12월 소련 해체를 전후해 러시아가 시장경제 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면서 북한과의 경제관계에서 시혜적 성격을 제거함에 따라 교역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1990년 25억7천만 달러로 북한 대외교역의 53.3%를 점하던 것이 1991년 4억6천만 달러, 1993년 2억3천만 달러, 1995년 8천만 달러로 곤두박질했다.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는 동맹조약인 북-러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의 개정을 제안하고 이를 북한이 거부하자 동맹관계를 무시한 채로 1996년 9월의 조약기간 만료를 기다렸다.(위 책 328-329쪽)

 

중국 역시 1980년대 들어 개혁개방 정책의 전개에 따라 한국과의 관계를 열어가는 등 북한 지도부를 불안하게 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었으나 동맹관계의 신뢰는 잘 유지되었다. 소련과의 관계가 불안해지는 만큼 중국과의 관계에 더욱 집착하는 추세도 보인다. 한-소 수교를 전후해 1990년 3월 장쩌민 총서기, 1991년 5월 리펑 총리, 1992년 4월 양상쿤 국가주석 등 중국 최고위 인사들의 방북과 김일성의 1989년 11월, 1990년 9월, 1991년 11월 연이은 방중이 두드러진다. 1992년 8월의 한-중 수교 이후 2000년 5월 김정일의 방중까지 8년간 이런 수준의 고위급 교환방문이 끊어지는 상황과 대비된다.(위 책 246쪽)

 

한-중 수교를 전후해 중국도 북한 무역에 경화결제를 요구해 시혜적 성격을 약화시킴으로써 북한 경제난을 방관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원칙 고수를 표방하는 중국의 북한 후원 입장은 1993년 유엔에서 확인되었다. 북한의 NPT 탈퇴에 대한 제재 움직임을 안보리에서의 거부권 행사를 명언하며 가로막은 것이다. 중국은 북한과의 동맹관계를 지켰고, 자국 경제사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북한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위 책 246-247쪽) 그러다가 경제 발전과 국제적 위상 제고에 따라 북한의 후원국 역할이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1981년 9월 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되면서부터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과 소련이 연이어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면서 동맹관계를 전보다 경시하는 변화를 일으킴에 따라 북한의 고립 위험이 계속 자라났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대외정책 변화 요구에 따라 남한과의 대화 등 나름의 개혁개방 정책을 채용하기도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단계에서 두 차례 극도의 호전성을 보인 사건에서 북한이 상황 적응에 어떤 어려움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1983년 10월의 아웅산사건과 1987년 11월의 KAL기 폭파사건이다. 당시의 세계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 호전성을 보인 이 두 사건은 아직까지도 북한의 국가 성격에 대한 국제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씻어내기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1980년대 북한의 위기의식 위에서 빚어진 사건으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위기의식이 왜 그런 극단적 방식으로 표출되었는지는 아직도 해명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들은 지금 시점에서도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을 위해 북한이 해명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