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7월의 7-7선언을 나는 ‘북방정책’의 출발점으로 본다. 사실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나 남북대화의 발전을 위한 한국 정부의 움직임은 그 몇 해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굳이 7-7선언에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두는 것은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남한 정부의 자세가 이를 계기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앞 회에서 말했다. 그 전에는 북한을 적대와 이용의 대상으로만 여겨 왔다는 것이다.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는 기본적으로 경제발전의 결과였거니와 1980년대 들어 서울올림픽 추진이 직접적 계기를 만들어줬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의 득표활동을 위해, 그리고 공산권의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보이콧이 재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재계의 도움을 받아 공산권과 제3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전례 없는 구애작전에 나섰다. 이 노력이 마침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 조짐과 맞물려 애초의 목표를 넘어서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런 망외의 성과가 쌓이고 쌓여 어느 수준에 이르고 보니 공산국가와의 수교라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상상도 못해온 사태가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자 여태까지 눈앞의 목표만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꾸려오던 대 공산권 정책을 새로운 차원에서 정비할 필요가 떠올랐다. 이렇게 북방정책이 형성되면서 공산권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분명히 세우기 위해 7-7선언이 나온 것이다.

 

공산권 국가들은 한국과의 관계 발전을 놓고 그들의 오랜 수교국인 북한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7-7선언 당시 헝가리와의 국교 수립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한국이 북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헝가리 입장에서, 그리고 이후 수교를 시도할 모든 공산국가의 입장에서 국교 수립의 필요조건이었다.

 

1983년 10월 아웅산 폭파사건이 있었다. 전쟁 이후 최악의 적대행위 중 하나였던 이 사건을 당하고도 한국 정부는 북한과 적십자회담과 체육회담을 계속했다. 그리고 1984년 9월에는 남한의 수재에 대한 북한의 구호물품 제공 제안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서울올림픽 성공을 위해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 것으로 풀이된다. 예컨대 남북 체육회담에 관해 강준만은 이렇게 적었다.

 

85년 10월 8일~9일 사이에 처음 열린 남북체육회담을 포함하여 모두 4차례에 걸쳐 남북간의 체육회담은 열렸지만, 아무런 실질적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당시 올림픽조직위원장이었던 박세직과 IOC위원장 사마란치는 애초부터 북한과의 공동개최가 성사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체육회담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북한이 공산권 국가들의 올림픽 참가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해 북한의 돌출행동을 통제하고자 체육회담을 진행했을 뿐이었다. 체육회담이 완전하게 실패로 돌아간 후, 박세직은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 (...) 우리나라와 IOC는 3년에 걸친 인내심과 상호협조, 신중한 계획으로 북한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보여주었으므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서울올림픽 참가여부를 자유롭게 결정할 명분을 얻었다.”(<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2권 308-309쪽)

 

전두환 정권의 남북 정상회담 추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일이다. 그 추진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하나는 손장래의 회고담 “84년 전두환-김일성 정상회담 했으면 95년 통일됐다”(<말> 1999년 1월)인데 나는 찾아보지 않았다. 강준만이 이 글을 참고해 위 책 301-306쪽에 서술한 것을 보면 주미대사관 공사를 지낸 손장래와 장면 정부 때 유엔대사를 지낸 임창영이 나섰다는 이 사업은 정부의 정식 위임 없이 안기부 차원에서 추진한 하나의 ‘공작’ 수준이었던 것 같다.(손장래는 1985년에 안기부에서 대북 문제를 담당하는 2차장이었다.)

 

또 하나의 기록은 2005년에 나온 박철언의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2책, 랜덤하우스중앙 펴냄)이다. 1985년 초 안기부장을 맡은 장세동이 추진한 남북접촉은 장세동과 허담(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특사의 교차방문과 김일성-전두환의 친서 교환 등 1972년 7-4공동성명을 앞둔 이후락 정보부장과 박성철 북한 부주석의 특사활동과 맞먹는 깊이에 이르렀다. 안기부장 특보로 이 사업을 담당했던 박철언의 ‘증언’에는 그의 정치적 입장에 따른 굴절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접촉 내용을 깊이 드러낸 자료로서 큰 가치를 가진 것에 틀림없다.

 

장세동이 청와대 경호실장에서 안기부장으로 옮길 때 ‘특보’ 자리를 만들어 청와대 비서관이던 박철언을 앉히면서 남북 간 비밀접촉 시도가 시작되었다. 그해 5월 한상일 안기부장 비서실장이 적십자회담 대표단 일원으로 서울에 온 림춘길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부부장에게 접근, 통로 개설 의사를 타진하면서 접촉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7월 11일 판문점에서 박철언과 한시해를 수석대표로 하는 첫 실무회의가 열렸다.

 

박철언의 회고로는 남쪽에서 접근해 간 것이고 첫 회의에서 정상회담을 제안했다고 하는데, 그 후 진행에서는 북쪽의 의지가 앞서 나간다. 7월 26일 2차 회의에서 북측이 특사 교환을 제안하고 8월 9일 3차 회의에서 합의가 이뤄지자 바로 9월 4일 북측 특사단의 서울 방문이 진행되었다. 반면 남측 특사단의 평양 방문은 9월 22일로 예정되었다가 늦춰져 10월 16일에야 이뤄졌다. 특사와 친서 교환 수준 접촉의 준비가 북측에서 먼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전두환 측은 정상회담을 통해 어떤 합의를 이끌어내느냐 하는 구체적 목표 없이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었던 감이 든다. 박철언의 첫 회의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이날 회담에서는 정상 회담을 바라보는 남과 북의 현격한 시각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북한은 정상 회담 이전에 정상 회담에서 양 정상이 논의할 의제와 정상 회담의 결과, 발표할 합의 선언 내용을 미리 구체적으로 정해놓자는 입장이었다.

 

물론 정상적인 국가 간의 정상 회담이라면 북한의 주장이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적개심으로 40년을 보내왔던 남과 북이 실무 차원에서 사전에 구체적 의제를 조정하고 세부적인 합의문 내용을 조율하다 보면, 대립과 갈등은 더 깊어지고 정상 회담은 무산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남측의 전두환 대통령이나 북측의 김일성 주석이나 각자 자기 진영에서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결국 두 정상의 만남 그 자체가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알파이자 오메가일 수밖에 없었다.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 156쪽)

 

박철언의 ‘증언’은 더러 스스로 뜻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증거능력을 보여준다. 당시 남한 권력집단이 전두환을 김일성과 대등한 수준의 카리스마 소유자로 여겨, 남북관계도 국가기관의 공식적 작용 없이 양쪽 두목의 회동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본 사실이다. 박철언에게 보고받는 전두환의 태도에서도 이 생각이 그대로 나타난다.

 

두 시간에 걸친 대화 내용을 비교적 소상히 보고하자, 전 대통령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우리의 최고위급 회담 제의에 북한이 선뜻 응하지 못하는 배경을 나름대로 분석해서 길게 설명했다.

 

전 대통령은 “김일성이가 선뜻 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가 혜성처럼 나타나 여러 나라와 성공하기 어려운 정상 회담을 계속 성공시키니까 불안해하는 것이다. 박정희와 카터 간의 회담은 완전히 실패했었다. 또 다른 나라 정상들이 만나는 경우도 내막적으로는 완전히 실패하는 경우가 대다수가. 그런데 우리는 성공한 경우가 다수이니 내 능력과 수완에 당황하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겪어보고 비교하여 나를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 나를 해치우려고 미얀마 사태를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작년에 수해 물자를 보내준다고 했을 때, 모두들 반대하는데 실무자 의견과 달리 내가 이를 받는 걸 보며 ‘인물이구나!’ 생각하고 얘기할 만하니 정상 회담을 주선하라고 지시한 것일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같은 책 157-158쪽)

 

첫 회의를 연 그 날 보고 장면을 그린 이 이야기에서는 정상 회담 지시가 김일성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으니, 남측에서 정상 회담을 제안했다는 박철언의 주장도 분명치 않다. 아무튼 전두환은 자기가 ‘인물’이기 때문에 정상회담도 잘 할 수 있는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름 후의 두 번째 회의에서 북측이 특사 교환을 제의한 것은 정상회담의 의제를 조율하는 과정을 갖고자 한 것이었다. 이 회의의 보고를 받는 전두환의 반응에서 역시 준비의 필요성을 경시하고 정상회담 자체에서 ‘한탕’을 기대하는 심리를 읽을 수 있다.

 

또 특사의 교환 방문에 대해서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전 대통령은 “특사들이 왕래하기 전에 정상 회담과 관련해 사전에 최소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접근시켜야 한다. 그리고 완전 합의를 위해 노력해야 발전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 그것이 특사 파견을 앞둔 예의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두 정상이 만나 서로 자유롭게 토의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무조건 남북 정상의 만남 자체가 중요하다는 기존의 지침이 조금 변경된 듯했다. (같은 책 161쪽)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예의’이긴 하지만 준비가 잘 안 되더라도 만날 수는 있다는 정도의 생각이 ‘기존의 지침’에서 조금 변경된 것이라면 ‘기존의 지침’이란 무엇이었겠는가? 특사고 뭐고 관계없이, 남북의 ‘인물’끼리 무릎을 맞대기만 하면 된다는 것 아니었겠는가.

 

당시의 남한 집권세력에게는 서울올림픽이 하나의 전쟁과도 같은 거대한 사업이었다. 이 사업에 대한 북한의 방해공작을 피하기 위해 대화 시늉을 하는 것이 대북정책의 기조였다. 정상회담 제안은 이 기조 위에 펼쳐진 하나의 ‘작전’이었다. 회담 준비를 하는 동안 북한이 적대행위를 삼가게 할 수 있으면 됐지, 회담을 통해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목표가 없었다.

 

이쪽에서 정상회담 추진을 하나의 작전으로 여기니 상대방 의도에도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은 북한 특사단 접견을 앞두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만년필 모양의 호신용 무기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같은 책 164쪽) 007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장세동과 박철언이 이끄는 남한 특사단이 10월 16~18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 전두환이 정상회담의 뜻을 접었다고 박철언은 적었다. 10월 20일 부산 청사포 앞바다에서 침투하던 무장간첩선 한 척이 격침되었는데, 이것이 북측에 회담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회담 반대파가 빌미를 잡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철언이 적은 사실만 보더라도 정상회담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특사단 귀환 전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특사단의 귀환 보고를 10월 30일에야 받았다. 앞서 판문점의 실무회의 때 회의 당일에 박철언의 보고를 받던 것과 대조가 된다. 특사단 귀환 보고는 이미 급한 일이 아니었고, 귀환 보고 전에 공교롭게 청사포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아웅산사건에 구애받지 않고 추진되던 정상회담을 청사포사건 정도 때문에 포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한 시간 동안의 보고 장면의 일부를 박철언은 이렇게 그렸다.

 

(...) 이어 전 대통령은 “이번 사건도 변명과 발뺌만 한다면 김일성이 나를 평양으로 초청한 후 정치적으로 활용할 의도만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며 속으로 ‘아하, 우리가 평양에 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교전 상태에서도 평화를 위해 밀사 왕래나 정상 회담이 열리고, 동-서독도 통일 직전까지 서로 간첩활동을 해왔다. 침투 중이던 간첩선 한 척을 바다에서 격침시킨 사건을 두고 그렇게 엄청난 정책 변화를 해야 하는가.

 

북한 특사 일행이 서울을 방문할 때, 또 우리가 평양을 방문하기에 앞서, 국무총리를 비롯한 핵심적인 관계 장관들과의 회의 때마다 느꼈던 우리 집권 세력 내부의 친미 일변도, 극우적 흐름이 전 대통령에게 강하게 전달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신영 국무총리, 이원경 외무장관, 이규호 대통령 비서실장, 허문도 정무1수석은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성향이었고, 심지어 안기부 내에서 대북 문제를 담당해온 손장래 2차장의 경우도 개성 출신의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 5년간이나 주미 대사관 공사를 지낸 경력을 갖고 있었다.

 

전 대통령의 말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미 목표를 달성하였다. 전쟁의 위험을 충분히 강조했다. 전쟁이 나면 핵전쟁으로 이어지고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남침 야욕을 저지했다. 회담을 하기 위해 질질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나로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불과 열흘 남짓 만에 대통령의 태도가 180도 바뀌어 있었다.(같은 책 203-204쪽)

 

집권세력 내부의 “친미 일변도, 극우적 흐름”이라고 했는데, 박철언은 이 책에서 자신과 ‘친미 수구세력’을 몇 차례 대비시킨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를 자임하는 모습이다. 이 점은 장세동 안기부장이 자신과 공유한 것으로 박철언은 생각한 모양이다.

 

(1987년) 3월 24일, 장세동 부장은 전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장 부장은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노신영 총리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보고를 했다는 것이었다.

 

장 부장은 정부-여권의 분열 조짐에 대비할 것을 전 대통령에게 건의하면서 “당내 민주주의의 명분 아래 경선 형식을 빌려 노신영, 이종찬, 남재희, 권정달 등이 기회를 포착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대미 관계의 혼선을 야기하고, 내각제를 이원집정부제로 (야당과) 타협하려 할 수 있습니다. 주요 정책의 누설,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처사를 경계해야 합니다. 여권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후계 구도를 조속히 가시화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고 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같은 책 250쪽)

 

“주요 정책의 누설”이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처사” 바로 앞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대북정책이 미국 측으로 누설되는 문제를 가리킨 것으로 생각된다. 1985년 9-10월의 특사 교환을 둘러싸고 미국 측과의 협의나 조율 과정에 대한 언급이 없고, 그해 12월 23일 ‘88계획 관계 한미 협의회’가 열린 이야기가 있다.(같은 책 207쪽) ‘88계획’이란 대북접촉 사업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측에서 워커 대사, 던롭 참사관, 디레이니 CIA 거점장과 브레드너 8군사령관 보좌관이, 한국 측에서 이상옥 외무부 차관과 안기부 3국장, 정보문화국장, 그리고 박철언이 참석한 회의였다고 하는데, 한국 측에서 단독으로 추진한 88계획을 미국 측에서 따지는 자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88계획의 초점인 정상회담 추진은 두 달 전에 이미 꺾여 있었으니, 이 회의는 ‘사후 부검’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상회담 추진이 좌절된 후에도 박철언과 한시해 사이의 판문점 실무회의는 계속되었다. 박철언의 기록 중에 1987년 3월 12일의 제24차 접촉과 전두환 퇴임 직전인 1988년 2월 초의 제 33차 접촉이 언급되어 있다. 정부 간 접촉이라기보다 정보기관 간의 특별한 목적 없는 접촉 수준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제 24차 접촉에서 “총리 회담을 제의”했다고 박철언은 적었지만, 정부 내의 논의에 따른 정식 제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혼자 생각했거나 장세동과 의논해 본 정도의 ‘아이디어’였을 것 같다.

 

이 비밀접촉이 유지되는 동안 남한 집권세력의 북한에 대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1986년 가을의 ‘금강산댐 소동’이었다. 박철언의 비밀접촉은 이 소동을 막는 데 아무 역할도 못했다. 이 소동에 관해 잘 정리된 글 하나를 소개한다.

 

1986년 10월 30일 당시 이규효 건설부 장관은 “2백억 톤의 물을 담은 북한 금강산댐이 붕괴할 경우 화천 등 다섯 개 댐이 순식간에 파괴되고 한강 하류 전역을 급류가 강타해 강원-경기-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황폐화시키는,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내용의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이런 날벼락이 있는가? 북한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물폭탄을 준비하고 있다는 엄청난 재난 경보였다.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금강산댐을 무너뜨리면 서울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보도했다. 어떤 신문은 ‘63빌딩의 절반 가까이가 물에 잠긴다’고 했고, ‘남산도 거의 잠길 것’이라는 전문가의 분석도 있었다. 텔레비전에 나와 국민을 겁주던 유명 대학의 토목공학 교수들, 그분들은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 아닐 수 없다.

 

금강산댐은 북한에서는 임남댐이라고 부른다. 1980년대 초반부터 공사를 시작한 이 댐의 목적은 수력발전이었고, 농업-공업용수-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기부의 초기 분석도 이 점을 주목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수공’ 가능성을 부각시켰다. 당시 안기부가 어떻게 정보를 왜곡하고 과장했는지에 대해서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5공 청산’ 과정에서 속속들이 드러났다. 1993년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르면, 안기부는 금강산댐의 저수량을 부풀렸다. 미국의 공병 수로국이 37억 톤으로 계산한 저수량을 안기부는 최소 70억 톤에서 최대 2백억 톤으로 과장해서 홍보했다.

 

얼마나 급했던지 당시 금강산댐의 규모는 한국전력 직원 1명이 위치를 추정해 8시간 만에 계산했다고 한다. 장세동 안기부장은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최대치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서울이 물에 잠긴다는데, 어떤 국민이 불안하지 않겠는가? 평화의 댐을 하루라도 빨리 건설하라는 보수 언론의 나팔 소리도 높았다. 전국에서 규탄 시위가 줄을 이었고, 신문과 방송은 어린이 저금통까지 털어 성금에 참여하자는 선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아진 국민 성금이 661억 원이었다.

 

올림픽 이전에 대응 댐을 건설하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는 절박성, 그것은 거짓이었고,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감사원 감사에서 밝혀졌지만, 금강산댐의 저수량이 겨우 9억 톤 정도가 되는 시기는 빨라도 1989년 10월이었다. 올림픽 이전이 아니라, 올림픽이 끝난 이후였다. 감사원은 북한이 그 정도 규모를 일시에 남쪽으로 흘려보낸다 하더라도, 화천댐에 비상 배수구를 설치하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김연철 <냉전의 추억-선을 넘어 길을 만들다>(후마니타스 펴냄) 108-109쪽)

 

독자들에게 각별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작업을 처음 구상할 때 이 책에 담긴 것과 같은 내용을 많이 담고 싶었다. 이 책이 나와 있는 것을 나중에 알고 겹치지 않도록 내 작업 계획을 조정했다. 이 책 덕분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만 노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맙기 한량없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