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중국의 ‘전통시대 천하체제 복원’ 가능성을 언급했다. 원고를 보내면서도 너무 앞서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만큼 살펴본 뒤에나 주관적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냉전 이후 상황 전개를 윤곽도 그려놓지 않은 단계에서 내 해석을 내세운다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런 해석의 가능성만 일단 제시해 놓고 상황 전개로 돌아갔다가 연재 끄트머리에 가서 집중적으로 해석을 시도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해석의 큰 줄기를 먼저 내놓고, 그런 해석의 가능성을 상황 전개에 비추어 함께 검토해 나가자고 읽는 분들에게 청하는 편이 나은 점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업을 저 사람이 왜 하고 있는 건지 더 잘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선 ‘전통시대 천하체제 복원’이란 말에 내가 무슨 뜻을 담은 것인지부터 설명해야겠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말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없다면 독자들은 조공과 책봉으로 맺어진 중화제국의 ‘패권’체제를 떠올리기 쉬울 것 같다.

 

‘천하체제’란 말에서 내가 초점을 두는 의미는 유기론적 관계다. 근대 세계체제의 원자론적 관계와 대비시키는 뜻이다. 이 차이를 1860년대 동아시아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56~1860년의 제2차 중영전쟁에 패퇴한 중국은 열강의 ‘개방’ 압력에 직면했다. 개방의 원리로 제시된 것이 ‘만국공법’이었다. 선교사 윌리엄 마틴이 번역한 헨리 휘튼의 국제법 이론서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가 1864년 <만국공법>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제목이 동아시아에서 ‘근대적 국제질서’의 대명사로 통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듬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었고, 1868년에는 일본어 번역판도 나와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중국인이 이 책을 받아들인 태도를 이삼성은 이렇게 설명했다.

 

<만국공법>의 출간은 청나라 조정이 나서서 서양 국제법을 학습했음을 증거한다. 청조는 초판 300부를 각 지방 관아에 배포토록 하였다. 당시 중국 관료집단은 서양 국제법 학습에 소극적이거나 저항적인 태도를 보여 제대로 배포되거나 보급되지 않았다. 이것은 <만국공법>이 발간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까지도 서양제도를 옹호하는 저술의 도입이나 유포에도 중국 관료층이 저항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그만큼 아편전쟁 후 중국 지도층 일반이 서양의 규범과 제도를 인식하는 태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1880년 일본을 방문한 윌리엄 마틴의 발언은 유의할 만하다. “중국인은 서양 국가들을 보고 익히지만 서양제국의 정치제도를 채택하여 자국의 체제를 바꾸는 것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 중국의 개항은 일본보다 십 년 정도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문화의 흡수가 일본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다.”(<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한길사 펴냄) 306-307쪽)

 

전쟁의 패배로 인해 강요된 질서이기 때문에 반감을 느낀 면도 있고, 천하체제의 기득권을 위협받기 때문에 반발한 면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를 넘어 천하체제와 만국공법체제 사이의 이론적 타당성을 비교할 수 있을까?

 

이삼성은 위 책 308쪽에 “서양제국의 정치행동이 ‘도리(道理)’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무력이 유일의 법이 아니라는 것을 이 번역을 통해 중국인이 이해하길 바란다.”는 말을 마틴의 회고록에서 인용했다. 번역자인 마틴은 만국공법만이 ‘도리’, 즉 일반적 원리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를 수긍한 중국인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마틴의 믿음은 계몽주의적 믿음이었고, 그 내용은 원자론적 세계관이었다. 19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존 돌턴이 발표한 원자론은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던 당시의 계몽주의 사조와 딱 맞아떨어졌다. 모든 물질이 독립적 원자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원자론에 맞춰 모든 사회가 독립적 개인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힘을 얻었다. 이 관점은 19세기를 풍미하면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뒷받침해 주었고, 사회과학의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뒤쪽에는 물리학계에서 원자론이 사라졌지만 그 영향을 받은 사상과 제도는 살아남았다. 국제사회가 독립적 국가로 구성된다고 하는 ‘만국공법’ 사상도 그중 하나였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천하체제는 이에 비해 유기론적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어느 구성원도 절대적 독립체가 아니었다. 큰 나라에게는 ‘자소(字小)’의 책임이, 작은 나라에게는 ‘사대(事大)’의 책임이 있었다. 크고 작은 나라들이 지속적인 상호책임 관계로 얽혀 있었다. 각 나라의 내부도 원자화된 개인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본분에 따라 역할을 맡는(군군신신(君君臣臣)) 유기적 조직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봉건적’이라고 하는 사회체제다.

 

하급자의 충성과 상급자의 승인(및 보호)을 교환하는 봉건관계를 근대인은 ‘인신 예속’이라 하여 미개한 제도, 심지어는 사악한 제도로까지 여겨 왔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절대시하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천하체제의 해체는 ‘만국평등’ 이념의 자랑스러운 승리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만인평등’ 이념이 구호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해 왔다. 오히려 이 구호는 현실의 불평등을 가려놓음으로써 강자를 견제하고 약자를 보호할 필요를 부정하여 세상을 정글상태로 만드는 데 이용되어 왔다. ‘만국평등’도 마찬가지였다. 개항기 조선이 겪은 상황을 돌아보자.

 

1876년 일본의 강요로 맺은 강화도조약의 제1조가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막 배워온 만국공법 원리를 구사하고 나선 것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의 제1조로 내세운 것도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 독립’을 위해 전쟁을 치른 것인가?

 

일본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주장한 것은 천하체제에서 떼어내 마음대로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개항기 조선의 ‘독립’에는 중국과 떨어져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간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이완용이 독립협회 간부를 지내고 독립문 현판을 쓴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삼성의 위 책 310-311쪽에는 “백 권의 만국공법은 많은 대포만 못하고, 몇 장의 화친조약은 한 광주리의 탄약만 못하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만국공법의 ‘만국평등’이 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대 조선 정책에 이것을 들고 나온 것은 일본의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만국공법 원리는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의 제국주의 논리에 활용된 것이다. 원래는 좋은 원리였는데 시대 상황 때문에 악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실의 국가들 사이에는 강약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부정하면 무한경쟁의 길이 열린다. 무한경쟁의 폐해는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의 고통에 그치지 않고 국제사회 전체의 손해를 가져온다. 무한경쟁의 구조적 문제점을 한국사회의 여러 현상에 비추어 논술한 좋은 책을 지나는 길에 소개한다. <무한경쟁이 대한민국을 잠식한다>(서상철 지음, 지호 펴냄). 개인 사이에도 강약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개인주의가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무한경쟁으로 흘러가기 쉽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세동점의 위세 앞에 동아시아 천하체제가 무너진 후(이슬람세계의 전통적 국제관계도 비슷한 형편으로 무너졌다.) 전 세계를 만국공법 원리가 휩쓸었다. 수많은 새 국가가 그 틀에 맞춰 세워져 자주독립의 실질적인 조건에 관계없이 형식적 주권을 갖게 되었다. 한반도에도 두 개 국가가 그 틀에 맞춰 만들어졌다.

 

원자폭탄의 기본원리를 발견했던 아인슈타인이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에 충격을 받고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말했다.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을 조정해주는 세계정부 없이는 인류가 자기 파괴의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세계정부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1945년 당시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아인슈타인만이 아니었고, 그 노력이 유엔으로 모였다. 그러나 유엔은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 유의미한 세계정부로 발전하지 못했고, 세계는 패권이 횡행하는 무정부상태에 머물렀다.

 

1990년을 전후한 냉전 해소를 계기로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그 세계화는 경제적 세계화일 뿐, 정치적 세계화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이 경제적 세계화는 세계적 질서의 강화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능의 약화를 통해 무정부상태를 더욱 심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계기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바닥이 드러났다. 재정적자를 동력으로 패권을 유지해온 미국이 그 역할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패권체제의 구조조정을 겪거나 패권체제를 세계정부체제로 바꿀 지점에 와 있다.

 

지난 150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만국공법’이란 이름의 패권체제에 지금의 세계인은 익숙해져 있다. 세계정부체제로의 전환보다는 패권체제의 구조조정이 더 쉽게 떠오르는 대안이다. 그러나 1945년에 비해서도 지금 세계정부의 필요성이 더 절박하게 되어 있다. 자원과 환경의 벽이 코앞에 닥쳐 있기 때문이다.

 

이런 판국에 ‘초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유기론적 세계질서라 할 수 있는 천하체제를 2천 년간 운용해 온 나라다. 중국의 득세가 유기론적 세계질서로의 전환을 가져올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 근대 이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유기론적 사회질서가 보편적인 것이었다. 원자론적 질서란 것이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예외적 현상이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원자론보다는 유기론으로 더 잘 설명되는 존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인류사회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기술 발달로 인해 일시적으로 환원주의적 원자론이 풍미하는 과도적 단계 하나를 거친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산업혁명 이후의 3백년 기간을 ‘근대’라기보다 ‘가(假)근대’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안정된 농업사회 단계를 ‘중세’로 보고 안정된 산업사회 단계를 ‘근대’로 본다면, 지난 3백년(동아시아에서는 150년) 기간을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패권체제 시대에는 ‘문명 전통’을 적게 가진 나라들이 패권을 누리기 쉬운 조건이 작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영국과 독일은 근대 이전에 유럽문명의 주변부에 있던 나라들이다. 미국과 소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류문명의 일반 원리와 어긋나는 방향으로 소위 근대문명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문명의 관성이 약한 지역이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근대의 역사관은 진보주의,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기조로 삼아 왔다. 고대보다 중세가, 중세보다 근대가 더 나은 시대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근대화’란 말에 담겨있었다. 나쁘던 시대에서 좋은 시대로 진입하는 것이 근대화이므로 어느 사회에나 주어진 절대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이 믿음 위에서 근대 이전의 유기론적 질서가 ‘봉건의 잔재’로 타기되었다.

 

근대적 세계관과 가치기준을 의심하는 ‘탈근대’ 담론이 몇 십 년 전부터 자라나 왔다. 이것 역시 근대체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근대문명을 지고지상의 문명으로 보는 주장은 뉴라이트처럼 신자유주의에 집착하는 세력에서나 나오고 있다. ‘근대화’는 세계정세의 변화에 발맞추기 위한 하나의 상대적 과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에게나 자존심은 있다. 중국의 ‘대중화주의’는 중국인의 자존심 표출인데, 그중에는 패권체제 시대의 관념에 얽매여 중국의 패권을 추구하는 경향도 있지만, 영국, 독일이나 미국, 소련의 패권과 다른 차원의 ‘문명 전통’에 대한 자부심도 크게 잠재해 있다고 본다. 후자가 크게 나타날 경우 진행 중인 중국의 변화가 유기론적 세계질서의 형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본다.

 

 

Posted by 문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리면서부터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중국의 역할은 계속 커졌다. 남북한, 미국과 함께 중국이 주연 자리를 굳히면서 일본과 러시아는 조연 위치로 물러선 느낌이다.

 

중국의 역할 성장은 남북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계기로 중국은 미국과 함께 세계의 변화를 좌우하는 양대 축, G-2의 자리에 올라섰다. 역동적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보다도 훨씬 큰 임팩트를 가질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은 경제발전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중국의 존재와 변화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중국은 건국 이래 60여 년간 북한과 가장 꾸준히 가까운 관계를 지켜온 나라다. 중국의 국가 성격과 진행 방향이 한반도에 끼칠 영향은 전 방위에 걸치겠지만, 그 영향이 다른 영역에 앞서 남북관계에서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 예상된다. 그러므로 남북관계에 대한 중국의 입장과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 사회의 과제다.

 

제일 먼저 검토하고 싶은 것이 북-중 관계의 성격이다.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 많은 피를 쏟은 ‘혈맹(血盟)’이었고, 지금까지 북한에게 최대의 후원국이다. 북한이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중국이 왜 제재하지 않느냐고 쳐다보고, 심지어 북한의 행동이 중국의 양해 아래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하곤 하는 것이 이 관계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관점을 갖는 것은 우리의 한-미 관계 경험 때문이다. 남한이 북한처럼 도발을 행한다면 미국의 제재를 받을 것이고, 그런데도 도발을 행한다면 미국의 사주 또는 양해가 있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6자회담 개시 이후의 상황에서는 북-중 관계의 성격이 한-미 관계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 차이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냉전기에도 우리가 미국 받든 것처럼 북한이 소련이나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은 두 후원국과 등거리 외교를 기조로 지나칠 정도로 ‘자주성’을 내세워 왔다. 국가이데올로기로 ‘주체사상’을 내세울 정도였다. 그리고 소련도 마찬가지지만, 냉전기의 중국은 미국이 한국에 대해 행사한 것과 같은 압도적인 힘을 갖지도 않고 있었다.

 

또 하나의 원인은 21세기 들어와 중국의 위상이 상승, 강화하면서 ‘동맹’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 쪽으로 국제정책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6자회담 개시 직후인 2003년 10월 ‘화평굴기(和平崛起)’란 말이 나타났다. 원로학자 정비젠이 개인적으로 쓴 말이었는데, 뒤이어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가 이 말을 쓰면서 내외의 관심을 모으는 화두가 되었다. 이 점에 대한 생각을 좀 길게 적겠다.

 

‘굴기’란 무엇인가. 꿈틀대고 일어선다는 말이다. 19세기 중엽 이래 치욕과 고난의 역사를 헤치고 대국으로 일어서는 중국의 모습을 개천에서 날아오르는 용의 모습으로 그린 말이다. 그런데 이 굴기가 경쟁 상대를 타도하고 패배자에게 고통을 주는 투쟁의 방식이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발전을 이루는 방식이라는 뜻에서 ‘화평’을 붙인 것이다.

 

‘굴기’란 말에는 강한 호소력이 있다. 2천여 년간 천하를 호령해 온 제국이 원래의 자리를 찾는다는 선언이다. 실제로 중화제국의 역사 중에는 제국 질서가 무너지고 오랑캐의 침략을 당한 치욕과 고난의 시대가 여러 번 있었다. 19세기 이후 ‘서세동점’의 역사를 또 한 차례 그런 시대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화평굴기’란 말이 나온 지 반년이 안 되어 중국 지도부는 ‘화평발전’이란 말로 이것을 대신했다. ‘굴기’라면 세계질서의 구조를 바꾼다는 야심적인 뜻을 풍기기 때문에 외부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쓰기는 ‘화평발전’이라 써도 읽기는 모두 ‘화평굴기’라고 읽게 되었다.

 

‘화평’이란 말에 진심이 담겨 있는지도 의심의 대상이다. 가장 가까운 동맹국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이 의심을 판별하는 리트머스시험지가 될 수 있다. 이런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도 중국은 6자회담에서 북한을 일방적으로 비호할 수 없었다.

 

2008년 1월 베이징대학교 광화관리학원 신년포럼 "중국의 경제개혁 30년: 평가와 전망" 내용을 발판으로 만든 <중국개혁 30년>(장웨이잉 엮음, 이영란 옮김, 산해 펴냄)의 서문 모두에 개혁개방시대 중국의 변화가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덩샤오핑이 일으킨 중국 경제개혁은 이미 30년의 역사적 과정을 거쳤다. 뒤돌아보면, 30년 전 개혁을 시작할 당시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사건을 예상하지 못했다.

 

첫째, 개혁 과정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개혁의 지도자는 처음에는 약 5~10년이면 개혁을 완성하리라 생각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많은 개혁가들이 1990년, 늦어도 1995년에는 개혁이 마침표를 찍을 거라고 낙관적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은 여전히 개혁 중이고, 이 개혁이 언제 끝날지 우리는 아직도 그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둘째, 중국 경제의 발전 속도가 이렇게 빠르고 개혁의 성과가 이렇게 클 줄 예상하지 못했다. 1980년대 초, 덩샤오핑은 2000년이 되면 국민소득이 두 배 늘어나리라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는 태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무모'하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 경제는 덩샤오핑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했다. 지난 30년, 중국의 1인당 GDP는 매 10년이 되기도 전에 두 배나 증가, 2007년에는 2,500달러에 도달했다. 중국의 경제총량 순위는 1978년 세계 13위에서 2007년 4위로 상승했다. 중국의 수출입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8년 23위에서 2007년 3위로 상승했다. 애초에 우리는 30년 후 위안화의 환율이 국제적인 경제 문제로 부상하리라곤 예측하지 못했다.

 

30년간 연평균 9.7% 성장, 놀라운 현상이다. ‘한강의 기적’도 이렇지는 못했다. 게다가 중국처럼 덩치 큰 나라가 이런 거대한 변화를 일으켰다면 중국 지도자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세계질서의 구조 변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2001년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자본주의 도입에 발버둥치는 ‘실패한 사회주의국가’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2년 후 ‘화평굴기’가 나온다. 중국을 내려다보던 서방의 눈길이 마주보는 각도로 바뀌었고, 10년이 지난 지금은 쳐다보는 각도로 올라와있다.

 

중국이 6자회담을 주도하고 나선 때가 바로 국제사회에서 그 위치가 크게 바뀌고 있던 시점이었다. 2000년까지 북한을 바라보고만 있던 중국이 북핵문제를 계기로 후원국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러 나선 것이다. 그때까지 북한에 대한 중국의 태도를 더듬어보면 북한, 한반도, 그리고 동북아 질서에 대한 중국 정책의 궤도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1980~2012년간 북한과 중국 최고위 인사들의 상호 방문 상황은 이렇다. (김계동 <북한의 외교정책과 대외관계>(명인문화사 펴냄) 245~259쪽에서 발췌 정리)

 

1980. 10 리센녠 부주석 방북

1981. 12 자오쯔양 총리 방북

1982. 4 덩샤오핑 군사위 주석, 후야오방 총서기 방북

1982. 9 김일성 방중

1983. 6 김정일 방중

1984. 5 후야오방 총서기 방북

1984. 11 김일성 방중

1985. 5 후야오방 총서기 방중

1989. 11 김일성 방중

1990. 3 장쩌민 총서기 방북

[1990. 9 한-소 수교]

1990. 9 김일성 방중

1990. 11 연형묵 총리 방중

1991. 5 리펑 총리 방북

1991. 11 김일성 방중

1992. 4 양상쿤 국가주석 방북

[1992. 8 한-중 수교]

[1993. 3 북한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

[1994. 7 김일성 사망]

[1995. 11 장쩌민 주석 방한]

[1998. 9 김정일 국방위원장 체제 공식 출범]

1999. 6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방중

2000. 5 김정일 방중

[2000. 6 남북정상회담]

2001. 1 김정일 방중 (푸둥 지구 등 경제발전상 시찰)

2001. 9 장쩌민 주석 방북

[2002. 10 제2차 북핵 위기]

[2003. 3 후진타오 주석 취임]

[2003. 8 6자회담 개막]

2003. 10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 방북

2004. 4 김정일 방중

2005. 10 후진타오 주석 방북

2006. 1 김정일 방중

2008. 6 시진핑 부주석 방북

2009. 3 김영일 총리 방중

[2009. 5 북한 제2차 핵실험 / 유엔 안보리 북한 제재 결의안 채택에 중국 동참]

2010. 5 김정일 방중

2010. 8 김정일 방중

2011. 5 김정일 방중

[2011. 12 김정일 사망]

 

1990년을 전후해 상호방문이 잦았던 것은 공산권 붕괴의 위기 앞에서 서로 격려하며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8년간 최고지도자의 상호방문이 끊어진 것은 두 나라의 관계에서 가장 긴 공백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밀접한 친선관계가 지속된 사실을 김계동은 이렇게 정리했다.(위 책 248쪽)

 

중국은 한반도에서 영향력 확보와 경제발전을 위해 대북한 ‘변방외교’와 대남한 ‘실리외교’의 이중정책을 구사한 반면, 북한은 중국에 대한 ‘전통적 친선관계’의 지속을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 수교 이후 북한의 중국에 대한 신뢰감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양국관계는 과거와 같은 수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특히 1995년 4월 평양축전 기간 중 평양-타이완 전세기 운항 및 2002년 아시안게임 개최지 선정 당시 북한의 대만 지지 입장, 로동신문 북경 특파원에 대한 중국의 추방 결정, 1995년 11월 장쩌민 주석의 방한 등이 북-중관계에 긴장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갈등요인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중국과의 이념적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미국과의 갈등 및 경쟁관계에 중국을 활용하는 정책을 모색하였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이 가장 부담 없이 지원받을 수 있는 국가는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과의 유대관계 강화를 도모한 것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식량, 코크스탄, 비료, 원유 등 주요 물자를 중국에서 우호적인 가격으로 구입하기 위한 경제외교에 치중하였다. 중국은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당시 곡물 10만 톤을 지원한 이후 많은 양은 아니지만, 거의 매년 곡물, 코크스탄, 원유 등을 지원하였다.

 

1990년대 후반 북한과 대만의 접근에 “홧김에 서방질”이란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너희가 남한이랑 놀면 우리는 대만이랑 놀겠다!” 당시의 북-중 관계를 비쳐 보여주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하나의 한국’ 주장을 중국이 존중하지 않겠다면 자기네만 중국의 ‘하나의 중국’ 주장을 존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곁눈질이 중국에게는 무척 괘씸한 일이었을 텐데,(중국은 물자 지원 등으로 가장 노릇을 하고 있지 않았는가!) ‘사랑싸움’이 ‘파경’을 들먹일 정도로 험한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북한과 중국의 ‘혁명 1세대’는 항일전쟁 이래의 ‘혁명 동지’로 굳게 맺어진 사이였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이 동지 관계가 양국 관계의 기조였다. 중국이 개혁개방 시대에 접어들면서 북한의 후계체제를 비판적으로 봄에 따라 동지 관계의 결속력이 약해졌다.

 

그러다가 공산권 붕괴의 위기가 닥치자 ‘사회주의 동지’의 측면이 부각되었다. 1990년대에는 중국 자신이 새로운 상황에의 적응에 바빠 북한의 요구에 충분히 응해주지 못하면서 최소한의 동지 관계를 지켜왔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능동적 역할을 맡을 만큼 위상이 강화되자 새로운 차원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펼쳐나가게 되었다.

 

위에 말한 <중국개혁 30년>을 보더라도 개혁개방시대 중국의 변화에 대한 해석은 중국 안팎에서 아직도 이론이 분분하다. 중국의 변화가 워낙 크고도 빠른 것이어서 변화가 진행 중인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해석을 얻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변화가 세계정세의 변화, 특히 한반도 상황의 전개에 미칠 영향이 갈수록 크게 느껴지는 만큼, 가능한 해석의 범위를 넓게 탐색할 필요는 확실하다.

 

6자회담 이래 북한 문제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21세기 중국의 대외정책이 어떤 특성을 가지는지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시금석이기도 하다. 중국의 ‘의도’에 대해 많은 견해가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다. 그중에는 중국이 ‘동맹국’이란 이름의 ‘종주국’ 위치를 굳히려 한다는(극단적으로는 동북4성 편입까지) 이야기가 일각에서 많이 나오는데, 나는 다른 방향의 가능성을 더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굴기’의 의미에 비쳐보는 것이다. 중국이 일어선다면 (1) 과거 미-소 양극체제를 복원하며 소련의 위치를 대신하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2) 1990년대 이래 미국이 맡아 온 위치를 빼앗겠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3) 전통시대 천하체제를 복원하려는 것일까?

 

내게는 (3)이 가장 그럴싸한데, 내가 생각해도 동의할 이들이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도 이쪽으로 끌리는 것은 40여 년 전부터 중국사를 공부하고 20여 년 전부터 문명의 성격을 궁리해 온 이력 때문일 것이다. 이 생각은 관계된 조사를 더 해서 나중에 정리할 것으로 남겨두고, 우선 여기서는 (1)과 (2)를 그럴싸하게 보지 않는다는 사실만 밝혀둔다.

 

냉전시대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1)의 길을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한-미-일과 북-중-러의 진영 대결 추세를 논하는 이야기가 지금도 많이 떠돌고 있다. 중국의 북한 흡수 가능성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동아시아에서는 냉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냉전은 국지적 현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한 지역에서 진영 대결이 벌어진다면 대결이 가져오는 손실을 그 지역 사람들도 오래 감내할 리가 없고, 지역 밖에서도 대결 해소를 향한 압력이 쏟아질 것이다.

 

(1)보다는 (2)가 더 그럴싸하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 20년간 미국이 누려온 패권을 부러워한 중국인이 많다. G-2의 위치에 올라선 이제 미국의 패권을 빼앗기까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함께 누리기 바라는 것이다.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가 중국에서 하나의 거센 추세로 일어나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식 패권을 중국이 빼앗거나 나눠 갖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 중요한 측면 하나인 에너지 소비수준만 놓고 봐도 그렇다. 과거 수십 년간 미국인은 세계 평균의 5배 이상(다른 선진산업국의 두 배 이상) 에너지를 소비해 왔다.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점한 중국의 에너지 소비수준이 아직도 세계 평균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만약 이것이 미국 수준을 따라가게 된다면 지구의 자원과 환경 문제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몇 십 년 뒤의 일로 걱정하던 것이 몇 년 후의 일로 닥치게 될 것이다. 미국 사회는 문명사회로서는 이례적으로 외부 문제와 장래 문제에 대해 둔감한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식의 패권을 키워온 것인데, 중국의 대중화주의가 아무리 거세다 하더라도 ‘미국예외주의’처럼 무절제하게 전개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미국이 안 가지고(소련도 별로 안 가졌었고) 중국이 가진 것이 ‘문명의 전통’이다. 이 차이가 장래 현실에 큰 작용을 하리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단순히 ‘희망사항’일지,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에 대한 2003년 이래 중국의 태도에서 이 검증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 과거에 가졌던 관계를 지키려는 것보다 국제사회의 새로운 위상에 따른 역할을 추구하는 목적을 가지는 것으로 가정을 일단 세워둔다.

 

 

Posted by 문천

 

냉전 후 미국 대외정책의 기조는 ‘봉쇄’(containment)정책에서 ‘개입’(engagement)정책으로 옮겨졌다. 봉쇄정책은 접촉과 교류를 줄임으로써 상대방을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군사적 논리를 주축으로 하는 것인 반면, 개입정책은 접촉과 교류를 늘림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외교적 논리에 기울어진 것이다. 그리고 봉쇄정책은 이쪽에 대한 상대방의 영향을 줄이는 데 중점을 두는 소극적인 것인 반면 개입정책은 상대방에 대한 영향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는 적극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반공독재 시절 한국은 미국의 공산권에 대한 태도가 온건한 쪽으로 기울 때마다 대결정책에 대한 집착으로 한미관계에까지 어려움을 겪곤 했다. 정권의 정당성을 공산권과의 대결에 의존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군사독재가 끝난 1987년 이후 한국의 대북정책이 맹목적 대결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북한에 대한 유연한 태도는 햇볕정책으로 발전하게 된다.

 

김근식은 <대북포용정책의 진화를 위하여>(한울아카데미 펴냄) 42쪽에서 대북포용정책의 개념적 연원을 미국의 탈냉전 이후 개입정책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개입’이란 번역어의 적절성을 잠깐 짚어본다. ‘engagement’의 원래 뜻은 관계를 만들고 접촉면을 키운다는 것이다. 대북관계의 ‘지렛대’란 말을 흔히 하는데, 지렛대를 크게 만드는 것이 바로 ‘engagement’다.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느낌의 ‘개입’보다는 오히려 ‘포용’이 더 적절한 것 같다.

 

대결은 곧 경쟁이다. 냉전 후 유일한 슈퍼파워가 된 미국이 적극적 개입정책으로 돌아선 것은 경쟁에서 초연한 위치에 왔기 때문이었다. 남한이 북한에 대해 포용정책을 발전시키게 된 것 역시 40여 년의 체제경쟁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했다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남북 간 체제경쟁이 펼쳐져 온 양상을 살펴보면 1990년대 이래 남한의 포용정책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1960년대 말까지 남북 간에 말도 섞지 않고 지내던 시절에는 경쟁의 양상을 깊이 살필 만한 장면도 나타나지 않는다. 1970년대 들어 세계적 데탕트의 전개에 따라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경쟁의 무대가 제대로 차려진다.

 

홍석률은 <분단의 히스테리>(창비 펴냄)에서 1970년대 초에 나타난 경쟁 양상 중 북쪽의 ‘남조선혁명론’과 남쪽의 ‘자유의 바람’을 대비시킨다.

 

남북대화 과정에서 북한이 보여준 행태는 남쪽에서 혁명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실질적인 목표를 두었다기보다는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측면이 있었다. 예컨대 북의 언론들은 남북대화를 보도하며 ‘남조선 인민’들이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배려에 무한히 고무되면서 북과 남 사이의 교류를 열렬히 바란다”고 보도하였다. <로동신문>은 남쪽의 주민들이 북한 대표단 가슴에 달려 있는 김일성 초상 배지를 보고, “저걸 보십시오. 김일성 장군님의 사진을 달았어요. 건장하시구만요”라고 수군대고, 배지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가던 길을 먼추고 다시 돌아와 보고 갔다고 보도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날 신문에 김일성 사진이 나오자 남쪽 주민들이 이를 보기 위해 신문 가판대로 모여들었으며, 사람들이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일이 늘어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 심지어 남쪽에서 온 적십자 대표단이 김일성 생가를 방문하기를 원했고, 김일성을 위대한 인물이라 칭송했다고 전했다.

 

이와같은 북한 관리의 언급과 언론보도에 대해 그 진위 여부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이 결코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의 정부와 언론은 내외적으로 남쪽 사람들이 북의 지도자와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선전하였다. 결국 이같은 선전은 남쪽 주민들도 김일성을 열광적으로 숭배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김일성을 우상화하고, 이를 통해 북한 주민들을 통제하는 자기만족적 행위라 할 수 있다. (260-261쪽)

 

예컨대 1972년 4월 19일 김덕현이 북한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합법적으로 남한을 방문했을 때 그의 야간일정은 대단히 조밀하게 짜여 있었다. 4월 20일 저녁 일정을 살펴보면, 세검정 안가에서의 만찬을 시작으로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3-1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오진암이라는 요정에서 밤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자정이 넘어 4월 21일 새벽 1시 40분경 이후락 부장이 직접 모는 차를 타고 김덕현은 풍전호텔 고고클럽으로 인도되었다. 새벽에 숙소인 조선호텔로 돌아온 후에도 소규모 술자리를 갖고, 새벽 4시 30분에야 잠이 들었다. 후일 이후락은 미국CIA 한국지국장에게 김덕현의 서울 체류를 설명하며 “처음에는 냉혈적이던 그가 시시각각 녹아나서 떠날 때는 여심에 도취되는 등 매우 재미를 보고 갔다”고 했다. 북의 적십자 대표단이 왔을 때도 양상이 비슷했다. 북의 대표단을 워커힐호텔로 데려가 무희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캉캉춤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고고클럽에 데려가기도 했다. 남쪽의 ‘자유’를 맛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남측이 북쪽에 불어넣으려고 한 ‘자유’는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남쪽 인사들은 이처럼 다분히 속물적인 자유의 분위기를 북에 보이려 했고, 북쪽 사람들이 이를 맛보면 이념적인 세뇌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본성과 감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이는 남북대화의 쟁점이었던 인도주의와 통일(정치)논쟁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남쪽에서 ‘인간적’이라는 의미는 종종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65-266쪽)

 

“제 눈에 안경”이란 말 그대로다. 북측은 ‘혁명’ 빼고는 말할 것이 없고, 남측은 ‘향락’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북측 대표단은 돌아가 “우리가 보여주니까 남쪽 사람들도 혁명에 눈을 뜬다”며 자기들끼리 좋아하고 남측에서는 “우리가 보여주니까 북쪽 사람들도 자유에 눈을 뜬다”고 신이 났다.

 

1970년대 초의 남북대화는 형편에 떠밀려 마지못해 벌인 것이었다. 각자 자기 가치기준 위에서 자기 진영을 향한 선전에만 바쁘지,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화’란 이름이 무색하다. 그래도 양쪽 국력이 꽤 비슷하게 어울린 시점의 접촉으로서 본격적 체제경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국제무대에서는 이런 ‘자기만족적’ 관점이 마음대로 통하지 않는다. 강대국들의 데탕트 정책은 남한과 북한이 그때까지 적대시하기만 하던 반대진영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남북 간의 치열한 외교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남한의 수교국이 81개국에서 93개국으로 늘어나는 동안 북한의 수교국은 35개국에서 88개국으로 늘어났다. 남한 수교국이 12개 늘어났을 뿐인데 북한 수교국은 53개나 늘어난 것이다. 남한 수교국이 아직 더 많기는 하지만, 이 외교 경쟁의 승리자가 북한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방진영의 핵심국가들이 남한 입장을 배려해서 북한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데도 불구하고 북한은 이 기간에 종래의 고립상태를 크게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외교 경쟁을 통해 남북 양측은 종래의 ‘하나의 한국’ 주장에서 한 걸음씩 물러섰다. 남한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의 몰락을 계기로 북한을 절대적으로 무시하던 관점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1970년대 초 데탕트 상황에서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계기를 맞았다. 1973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의 ‘6-23선언’이다.

 

6-23선언은 공산권과의 호혜평등 외교를 추구할 것과 함께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을 제안했다.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적극적인 태도였다. 19개월 전인 1971년 11월 김대중이 동시 유엔 가입을 처음 제안했을 때 박정희는 “민족의 통일을 위한 염원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불과 5개월 전인 1973년 1월에도 남한 외무부는 재외공관에 내린 지침에서 남북 모두가 “통일 이전 가입을 원치 않으며”, “동시가입은 남북분단을 항구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홍석률 위 책 327-334쪽)

 

6-23선언은 한 달 전 북한의 WHO 가입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홍석률은 해석한다. 북한이 어차피 유엔본부에 항구적 접촉점을 갖게 되어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가로막던 종래의 봉쇄정책이 실효성을 잃게 된 바에야 선제적 조치로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도로 중앙정보부에서 기획한 것이라는 전직 중앙정보부 관리들의 증언을 인용한다.

 

한편 북측은 당시의 정세 변화를 자기네에게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조선혁명론’을 마음속으로는 고수하면서도 유연한 대외전략에 나설 수 있었다고 김해원은 <북한의 남북 정치협상 연구>(선인 펴냄) 70-71쪽에서 설명한다.

 

1970년대 초에 있어 북한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제환경의 변화가 자신에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여 고무되었던 입장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철수와 닉슨 독트린을 남조선혁명 달성에서 유리한 요소로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컨대 1970년 11월 초 노동당 제5차 전당대회 총화보고에서 김일성은 국제정세의 호조로 혁명의 ‘만조기’에 들어섰다고 현 정세를 진단하고 호치민의 월맹 해방군이 민족해방전쟁을 성공리에 마무리 짓고 있으며, 미군은 한반도에서도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남한에 대해 “내부의 계급적 모순이 첨예화되어 있고 따라서 인민대중의 혁명적 진출이 적극화되어 있는 상황”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북 간의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1970년과 1971년 2년 동안 북한은 적극적인 평화공세로 미-중 긴장완화에 적응하며 통일문제에서 주도권을 잡고, 이를 궁극적으로는 주한미군을 완전 철수시킬 계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베트남으로부터 미군 철수사례는 북한이 한반도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북한은 1960년대 후반 울진-삼척사태, 1-21사태 등과 같은 이전의 대남 무장공비의 직접침투 방식을 지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북한의 평화공세는 동맹국들에 대한 안보책임을 줄여가고자 하였던 닉슨정부의 정책을 이용하려는 입장에서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여진다.

 

1970년대 초의 남북대화는 피차 전략적 동기에 따라 접근한 것이었고, 상대방과의 절충에 따라 길을 찾아 나간다는 진정한 ‘대화’의 의미는 갖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화의 시늉이라도 하면서 직접적 경쟁의 양상을 드러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방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경쟁을 드러내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남북 모두 체제 단속의 수준을 높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남한에서는 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고 북한에서는 1972년 12월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남쪽의 유신이나 북쪽의 사회주의헌법이나 모두 체제 강화를 노린 것이었지만 억지스러운 면은 유신이 더했다. 공산권 국가들이 어느 정도 사회주의 정착 단계에 들어설 때 건국 초기의 인민민주주의헌법을 사회주의헌법으로 바꾸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북한의 경우 김일성 개인숭배와 주체사상의 강화 현상이 덧붙여지기는 했지만, 기본 축은 사회주의체제의 안정에 있었다. 반면 남한의 유신체제는 ‘체제의 발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조치였다.

 

김근식은 <대북포용정책의 진화를 위하여> 44쪽에 개입정책의 성립 조건을 몇 가지 열거했는데, 그중에는 적대적 세력 간의 ‘대화’를 위한 일반적 조건으로 볼 만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개입정책이 항상 어디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책으로서 추진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는데 주체국가 대상국 간 접촉이 초기에 낮아야 하고, 관계 개선과 교류 확대를 대상국이 매우 필요로 해야 하고, 대상 국가는 주체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가능케 하는 자원으로 간주해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개입정책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상국가의 정책결정이 매우 중앙집권적이어야 하고 주체국가의 대내적 지지 확보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대상국가에 대해 과도한 ‘야심찬 목표’가 아니라 ‘적당한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대내적 지지 확보” 같은 것은 개입정책만이 아니라 어떤 대외정책의 추진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남북대화가 시작되는 단계에서, 그 대화의 성공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제반 자유를 봉쇄하는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가. 내부의 지지를 포기하는 조치였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없이 국민의 지지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박정희 정권에게 남북대화를 발전시킬 뜻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연한 증거가 유신 선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과의 경쟁에 자신이 없었고, 자신을 못 가지는 가장 큰 이유가 체제의 안정성 문제였다. 서울에 온 북한 대표에게 남쪽의 우월한 면을 보여준다고 기껏 데리고 다니는 곳이 요정이고 호텔이고 고고클럽이라니, 남한의 현실에 얼마나 자신감이 없었단 말인가. 남북대화를 강요하는 국제정세로부터 국내사회를 차단하기에 급급한 태도가 유신 선포로 나타난 것이었다.

 

세계적 데탕트에 이끌려 남북이 시작한 ‘대화’는 1973년 8월 북측의 일방적 성명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다시 대화 재개의 시도가 나타난 것은 1980년 1월 이종옥 정무원 총리와 김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남한 국무총리 등에게 보낸 편지였다. 박정희가 죽은 후의 혼란을 이용하려는 의도였던 듯, 몇 차례 실무회담 끝에 남한 국무총리가 ‘서리’이기 때문에 자격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유로 접촉이 중단되었다. (김계동 <북한의 외교정책과 대외관계>(명인문화사 펴냄) 198쪽)

 

1981년 9월 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되면서 체제경쟁과 외교경쟁에서 남한의 우위가 확인되었다. 이제 10년 전과 달리 남한 정부는 자신감을 갖고 북한을 상대하게 되었기 때문에 1983년 10월의 아웅산 사건을 겪고도 이듬해 북한의 수해물자 지원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산권의 침체와 붕괴 등 국제정세의 변화는 북한의 개방을 요구했다. 전두환 정권 말기에 시작된 북방정책은 1987년의 민주화를 거치며 포용정책(개입정책)으로 발전할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1988년 이후 노태우 정권의 대북정책은 10년 후 햇볕정책으로 만개할 포용정책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