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민중봉기의 우려에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우리의 양심을 억누르고 있다. 살인이건 고문이건 행하는 주체가 우리고 대상이 빨갱이라면 괜찮다는 식이다. ...... 과테말라 군부가 그런 짓들을 저지르도록 우리가 부추기지 않았냐는 역사의 질문에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1968년 봄 과테말라 주재 미국 공사 피터 바키가 이임하면서 국무성에 보낸 메모의 일부다. 며칠 전 중미지역을 방문 중인 클린턴은 30여 년에 걸친 과테말라의 내전과정에서 우익 군부를 지원했던 미국의 역할에 대해 사과발언을 했다. 바키의 메모는 미국 측이 과테말라 군부의 인권유린과 양민학살 상황을 알 만큼 알고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다.

 

과테말라 내전은 1954CIA가 지원한 군사쿠데타로 아르벤스 대통령의 민간정부가 전복된 데 뿌리가 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군사정부에 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대폭 늘리면서 과테말라를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의 모범생으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60년경 공산혁명의 물결이 중남미를 휩쓸 때부터 과테말라에서 치열한 게릴라항쟁이 시작됐다.

 

미국의 군부 지원에 분노한 게릴라들은 바키 공사가 떠난 몇 달 후 미국대사를 암살하기까지 했다. 격분한 미국정부는 더욱 노골적으로 군부의 게릴라 진압을 도왔다. 과테말라의 극심한 인권탄압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던 77년 카터 행정부가 공식 원조를 중단했지만 82년 레이건 행정부는 원조를 재개한다. 90년 군부가 한 미국인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다시 원조가 끊어지고 나서야 평화협상이 시작됐다.

 

UN 중재로 96년 평화협상이 타결된 후 과테말라는 새로운 민주질서를 세우려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내전 중의 범죄행위를 조사하는 작업이 진행돼 지난 달 조사보고서가 나왔다. 범죄행위의 93%가 군부에 의해 자행됐고 게릴라 측의 몫은 3% 뿐이라는 것이다.

 

냉전기간을 통해 쿠바는 미국정책의 실패사례였고 과테말라는 성공사례였다. 이 성공이 과테말라에게는 20여만 인명을 희생시키는 36년간의 내전을 끌고 온 재앙이었다. 미국의 턱밑에 자리 잡고 있어서 특히 심한 경우였지만 미국이 과거의 잘못을 사과할 곳은 과테말라뿐이 아니다.

 

바키 공사의 메모는 당시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지만 그가 이 메모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다. 외교관직에서 은퇴한 바키에게 그 까닭을 기자가 묻자 아무도 읽지 않았나 보죠.” 하고 웃는다. 잘못을 저질러도 훌훌 털고 고칠 수 있는 것은 이런 자세가 용납되는 사회이기 때문일까.  199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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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엔트로피는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이다. '엔트로피'는 통상적인 말로 정확히 바꾸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굳이 갖다댄다면 '평형'이나 '안정' 비슷한 것이다. 열역학 원리로 사회 현상을 설명하려 하는 사회열역학에서는 인간 사회의 자연적 변천이 특권의 해소와 계급의 소멸을 향해 간다는 비유로 엔트로피의 법칙을 제시하기도 한다.

 

쉬운 말로 "물은 아래로 흐른다"고 하는 것도 엔트로피 법칙의 한 표현이다. 중력의 작용을 받는 물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여지를 가지고 있다면 평형성이 부족한 상태다. 흐르고 흘러 바다나 호수에 들어가든, 웅덩이에 고이든, 더 낮은 곳을 찾을 수 없을 때 엔트로피는 최대가 된다. 말하자면 물의 흐름은 엔트로피를 늘려 가는 과정이다.

 

'평형'이니 '안정'이니 하면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실인즉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은 곧 죽음의 방향이다. 사람을 비롯해 생물체가 살아있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비교적 낮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더 늘어날 여지가 없는 상태가 바로 '죽음'이다.

 

평형과 안정이 없는 사회는 사람들을 괴롭게 만든다. 그래서 평형과 안정을 늘리려고 많은 사람들이 애쓴다. 그러나 평형과 안정이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사회의 역동성이 사라져 버린다. 공산권 붕괴 과정에서도 드러난 일이다.

 

우리 사회는 엔트로피 수준이 꽤 낮은 편이다. 남한 사회만 봐도 그런데, 북한까지 넣어 민족 전체를 본다면 평형과 안정을 늘려갈 여지가 엄청나게 많다. 물에 비유하자면 높은 폭포를 앞둔 강물과 같다. 앞으로 당분간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큰 변화를 겪어갈 장래가 눈앞에 닥쳐있다.

 

지금까지의 냉전체제는 물이 낭떠러지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댐이었다. 이 댐이 무너지며 폭포의 위력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정주영 씨의 소떼가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도, '총풍'을 빌미로 북한 측이 남한 정치권을 갖고 노는 듯한 모습도, 이 폭포의 낙차가 큰 데 말미암은 일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억지로 막아온 흐름이기 때문에 한번 터지면 큰 파괴력을 보일 수밖에 없다. 급격하고 심대한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도 가져다주고 고통도 가져다줄 것이다. 이 폭포의 잠재적 에너지가 터빈을 돌려 생산적인 용도에 쓰일지, 아니면 배를 뒤집어버리고 말지, 사회 전체의 큰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북 관계의 전개는 좁은 이해관계를 떠나 대국적 자세로 임해야 할 과제다. 199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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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4. 11. 23. 00:31

 

인류문명의 출발은 산업을 만들어낸 데 있었다. 원시시대의 인류는 자연 속의 식물 열매를 따먹거나(채집) 동물을 잡아먹고(수렵) 살았다. 식량이 될만한 식물과 동물을 골라 경작하고 목축함으로써 인류는 정착생활을 시작하고 종전보다 훨씬 복잡한 사회를 만들게 되었다.

 

문명의 기반이 된 두 산업, 농업과 목축을 서로 연결해 시너지효과를 불러온 것이 소였다. 소는 원래 고기를 얻기 위해 기르기 시작한 동물이었지만, 농사에 쓰면서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줬다. 사람의 힘으로 개간하기 힘든 지형을 소의 힘으로 개간해 대량경작이 가능한 농지로 만들고 그 땅을 역시 소의 힘을 빌려 경작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등 문명의 발상지에서 일찍부터 농사에 소를 사역한 흔적을 보면 문명의 선진성에 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농업문명이 본격화한 2천여 년 전부터 관직이나 부족 이름에 소가 나올 정도로 소가 중시됐다. 특히 복점(卜占)과 희생(犧牲)에 쓰인 데서 우리 조상에게 소가 가졌던 강한 상징성을 확인할 수도 있다.

 

1001 마리 소를 판문점으로 몰고 가는 장면부터가 세계의 이목을 모을만한 장관(壯觀)이었거니와, 역사를 통해 가까이해 온 동물인 때문인지 민족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의 심금에는 묘하게 와 닿는 점이 있다는 데서 정주영씨의 북행(北行)은 성공적인 이벤트였다. 그런데 돌아온 정씨의 보따리에서 나온 큼직한 꾸러미 하나가 북한 석유의 합작개발계획이라니, 이 또한 묘한 상징성을 던져주는 일이다.

 

농업혁명의 완성단계에서 소가 맡았던 것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산업혁명의 완성단계에서 맡은 것이 석유다. 1859년 채굴이 시작된 이래 140년 동안 석유는 인류가 쓰는 에너지원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충당할 정도로 쓰임새가 커졌다. 우리나라는 기름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란 말처럼 원유를 수입해야 하는 입장을 뼈아프게 느껴 왔다.

 

북한 유전의 개발가치가 정작 얼마나 될지는 낙관할 수 없다. 60년대 중반, 유전개발의 가능성으로 국민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어 군사정권의 문제점을 호도했던 기억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북한의 유전 선전도 비슷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소가 가고 기름이 온다는 것은 재미있는 상징성의 연결이다. 소는 민족사의 출발점을 상징하는 동물이고 석유는 민족분단시대의 고통을 상징하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199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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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