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치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까지 중국은 세계정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구 공산권 국가의 하나로 여겨졌다. 자본주의 원리를 급격히 도입한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1당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국의 앞길이 더 막막해 보였다. 이 단계 변화의 의미를 원톄쥔(溫鐵軍)은 <백년의 급진>(김진공 옮김, 돌베개, 2013) 124쪽에 이렇게 설명했다.
거시경제에 파동을 일으킨 배경을 시간에 따라 네 단계로 나누어본다면, 각각의 시작 시점은 1980년, 1988년, 1994년, 2002년이 될 것이다. 성격을 기준으로 분류를 하자면 21세기 이전 대외개방의 세 단계는 일반적인 후발국가의 경우와 유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자본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 외부 자본을 유인하기 위해, 그들이 들어와 이익을 얻는 데 유리하도록 조건을 마련한 임시방편의 성격을 띤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온 이후의 네 번째 단계는 일반적인 후발국가의 경우와 현저하게 다르다. 3대 차별이 심화됨으로써 심각한 내수 부족 현상이 초래되고 산업자본 과잉의 압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계기로 중국 내 생산능력 과잉의 압력을 국제시장을 통해 해소하려 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이미 빌붙어 사는 처지로 전락한 국제 산업자본도 금융 버블의 압력에 밀려서 중국으로 대거 확장해 들어왔다.
기존 세계체제의 주변부 현상이던 중국의 변화가 세계적 변화의 한 중심축으로 부각된 것이다. 막강한 발전 동력과 함께 상당한 안정성을 가진 ‘강대국’의 모습을 중국이 갑자기 드러낸 것이다. 자본주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독자적 발전을 계속하는 중국의 존재에 서방 관측자들은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을 국제사회의 위험 요소로 보는 ‘중국위협론’이 일어났다.
중국인들은 중국위협론이 중국 발전을 견제하려는 서방 일각의 책략이라고 보고, 중국의 발전이 세계경제에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중국기회론과 중국공헌론으로 대항했다. 그러다가 2003년 10월 원로학자 정비젠(鄭必堅)이 ‘화평굴기(和平崛起)’란 말을 쓰고 두 달 후 원자바오 총리와 후진타오 주석이 공식석상에서 이 말을 씀에 따라 널리 퍼지게 되었다.
‘굴기’라 함은 중국이 19세기 중엽 이래 치욕과 고난의 역사를 헤치고 대국으로 일어서는 모습을 그린 말이다. 이 굴기를 통해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발전을 이룬다는 뜻에서 ‘화평’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몇 달 후부터 중국 지도부는 ‘화평굴기’란 말을 더 쓰지 않고 ‘화평발전’이란 말을 대신 쓰기 시작했다. ‘굴기’(rising)는 강대국으로 일어서면서 국제적 권력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개념인 데 반해 ‘발전’(development)은 단순히 중국의 위치가 상승한다는 뜻이다. ‘화평굴기’가 민간에서는 계속 쓰이고 있는데 당과 정부에서 굳이 ‘화평발전’이라 하는 것은 외부의 경계심을 피하기 위한 뜻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굴기는 진행 중인 현상이다.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굴기의 성격을 명쾌하게 재단할 길은 없다.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 현상에 작용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파악하고 그 요소들이 앞으로 계속 작용할 방향을 검토함으로써 향후의 진로에 대한 예측을 시도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서세동점에 의한 근대화를 겪기 전에 중국의 천하체제가 나아가던 방향의 연장선을 검토해 본다.
중국 변화의 네 가지 과제
조영남은 <21세기 중국이 가는 길>(나남, 2009) 278-279쪽에서 중국 변화의 큰 과제를 (1)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 (2) 국가체제의 합리화, (3) 정치민주화, (4) 세계 강대국화의 네 가지로 지목했다.
정치-외교분야에서 중국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추동력에 주목해야 한다. 이 네 가지는 중국의 특수성과 모든 국가의 보편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도출한 것이다.
첫째는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이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통치능력 강화와 통합유지를 목표로 한다. 중국은 당-국가로서 공산당과 국가가 조직적-기능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실제 정치과정에서 공산당이 국가기관의 역할을 종종 대체하는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중국의 현황과 전망을 검토할 때에는 엘리트 정치의 안정성 문제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 만약 중국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통치 엘리트의 안정성에 이상이 생길 경우이다.
둘째는 국가체제의 합리화이다. 1978년 중국이 시장화, 사유화, 개방화, 분권화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이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국가 통치능력 강화는 핵심과제로 제기되었다. 계획경제 시대의 국가체제로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지난 30년 동안 연평균 9.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각종 사회문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와 함께 국가체제의 합리화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치민주화이다. 이는 민주개혁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전체주의적 국가-사회관계를 개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혁기 중국에서는 수많은 사회 불안정 요소가 증가했다. 국민의 비관습적 정치참여의 급증은 이런 불안요소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실시했고, 향후 중국정치는 민주화 정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넷째는 세계 강대국화이다. 이는 중국이 아시아 지역 강대국에서 세계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국은 지난 30년 동안의 고도 경제성장과 지속적 군비증강, 소프트 파워 강화 등을 통해 지역 강대국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현재는 이를 바탕으로 미국 등 기존 강대국과 함께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세계 강대국으로 발전하려고 한다. 중국의 강대국화는 아시아 및 세계질서를 변화시킬 역사적 사건이고, 이것은 다시 중국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네 가지 과제는 서로 맞물린 것이거니와, 나는 가장 기본적 과제가 (4) ‘세계 강대국화’라고 본다. 10년 전 중국 지도부가 ‘굴기’란 말을 피해 ‘발전’이란 말을 쓴 것은 중국의 목표가 세계 강대국 아닌 지역 강대국에 있다고 엄살을 떤 것이다. 2008년 미국의 금융대란 이후로는 중국의 G-2 위상에 의문의 여지가 일체 없어졌다.
‘세계 강대국화’를 변화의 기본 축으로 보는 것은 역사적 복원력 때문이다. 2천 년 전부터 중국은 세계 최대의 물적-인적 자원을 가진 ‘강대국’ 역할을 해왔다. 주변부에 대한 중국의 통제력은 역사를 통해 일시적으로 약화된 시기도 있고, 그럴 때는 오랑캐의 정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국의 ‘굴기’를 보게 되는데, 그 방대한 물적-인적 자원이 뒷받침한 현상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서세동점의 물결 앞에 중국이 치욕의 시대로 빠져든 것은 과거에 거듭 겪었던 제국의 해체가 또 한 차례 반복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중국의 굴기는 그 인적-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강대국의 위치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다른 과제들은 부수적-지엽적인 것이다. 특히 (2) ‘국가체제의 합리화’는 국가 기능의 심화와 확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술적 문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에는 국가통치의 원리가 이데올로기 측면에 쏠려 있다가 문화혁명을 겪은 후 ‘개혁-개방’ 정책을 선포한 것은 국가 기능의 실용주의적 발전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 후 얼마 동안은 경제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고 근래에는 강대국으로서 역할에 맞춰 국가체제의 합리화가 진행되어 왔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특별히 제기할 논점이 없다. 그 밖의 과제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세계 강대국화’의 의미에 접근해 보겠다.
중국의 ‘내부 착취’ 발전정책이 가진 의미
근대의 만인평등 이념은 19세기를 풍미한 원자론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물질세계가 독립성을 가진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관점 그대로 사회를 독립성을 가진 개인의 집합체로 보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당연한 현상이고, 투쟁의 효과적 방법을 찾는 데 정치제도의 목적이 있다.
반면 중국의 전통적 질서구조, 특히 유가적 질서구조는 유기론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공자는 “임금이 임금 노릇, 신하가 신하 노릇, 아비가 아비 노릇, 자식이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이 질서의 근본이라 했다. 각자의 신분에 따른 역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기(禮記)>에는 “예(禮)는 서인(庶人)에게 내려가지 않고 형(刑)은 대부(大夫)에게 올라가지 않는다”고 했다. 명예를 좇아 움직이는 높은 신분 사람들과 두려움에 몰려 움직이는 낮은 신분 사람들을 구분한 것이다.
엘리트 정치의 담당자가 명예를 기준으로 행동하는 지배계급이었고, 역사를 통해 ‘사대부’, ‘진신’ 등의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 역할을 지금 중국공산당이 맡고 있다. 지금의 공산당원들은 ‘마레(馬列-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대학 입학을 위해 수능시험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입당을 위해 한 차례 시험을 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당원의 명예에 대한 의식은 확고하고, 이 위에 ‘엘리트 정치의 안정화’가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인류문명 발생 이래 유기론적 세계관이 일반적인 것이었고 원자론적 세계관이 세상을 휩쓴 것이 특이한 현상이다. 생명체인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가 유기적 특성을 가지는 것은 직관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물질세계도 이로부터 유추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스템공학 관점에서도 원자론-기계론적 조직방법은 과도한 경쟁으로 낭비를 불러오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이 약하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2백 년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세상을 휩쓴 것은 특수한 상황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상황의 한 측면은 ‘자연의 타자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부정하는 풍조에 있었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규정하고 절제 없이 착취하는 동안 지속가능성 문제에 눈감고 지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 들어서야 자원과 환경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반성이 널리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측면은 ‘자연의 타자화’를 연장한 ‘미개인의 타자화’ 풍조였다. 미개사회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무절제한 정복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환경론자 머레이 북친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그 역(逆)도 성립하는 것 같다.
근대세계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서방세력은 자연과 미개사회에 대한 착취를 발판으로 지속가능성 없는 체제를 억지로 지금까지 끌고 왔다. 그런데 중국은 그와 같은 외부 착취에 의존할 수 없는 나라다. 원톄쥔은 <백년의 급진> 11-12쪽에서 중국의 개발은 내부 착취를 통해 이뤄져왔다고 했다. 중국의 개발 논리는 서방의 것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처럼 해외 식민지를 통해 재부를 약탈하고 모순을 전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초대형 대륙국가인 중국은 주로 내향형의 원시적 축적에 의존해서 공업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식은 첫째, 고도의 조직화를 통해 전체 노동자의 노동잉여가치를 점유하고, 공업과 농업 생산품의 협상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농업의 잉여를 추출하는 것이며, 둘째, 노동력 자원을 자본화하여 국가의 기본적인 건설에 대규모로 집중 투입함으로써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결핍되어 있는 자본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 ‘중국의 경험’의 본질은 ‘정부의 기업화’라는 조건 하에서 산업구조를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해온 데 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도와 문화의 차원에서 보면, 중국은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수천 년 전통의 관개농업으로 형성된 집단문명을 지켜낼 수 있었고, 동시에 동방의 특색을 갖춘 중앙집권체제 내부에서 사회적 자원을 통합할 수 있는 두 가지의 효과적인 메커니즘을 형성할 수 있었다. 첫째, 유구한 역사적 유산의 핵심인 집단문화를 통해, ‘시장경제의 심각한 외부성 문제를 내부화해서 처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둘째, 수천 년 이어진 농가경제에 내재하는 ‘대가를 따지지 않는 노동력을 자본을 대신해서 투입’하는 메커니즘인데, 극도의 자본 부족 문제를 이를 통해서 완화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가운데 중국은 ‘서구인들이 완전히 식민지로 점령을 해서, 설령 독립을 하더라도 여전히 서구인들이 만들어놓은 상부구조를 계승할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제3세계 국가들’과 비교할 때, 훨씬 빠르고 손쉽게 공업화 단계로 진입했다.
‘아시아적 가치’가 되살아나는가?
‘정치민주화’가 가장 논란이 많은 문제다. 조영남은 위 책에서 중국정치가 전체주의로부터 권위주의로 지금까지 옮겨왔고, 이제 민주주의로 이행할 것을 당위적 과제로 본다. 정치민주화에 실패하면 중국의 변화가 파국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한국과 타이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권위주의 체제 하에 경제발전을 이룩한 다음 정치민주화를 성취한 것을 중국을 위해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하는 것이다.
사회의 어떤 변화든 그에 적합한 정치적 발전이 따르지 않으면 파탄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발전이 꼭 ‘민주화’여야만 하는가? 민주주의가 널리 실현된 것은 인류의 역사 중 최근 몇 백 년에 불과하다. 최근의 제도이기 때문에 최고로 발달시킨 성과물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민주주의 외의 여러 근대적 현상에 대해 회의적 시각이 커지고 있는 21세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모든 인간사회의 절대적 과제로 보는 관점은 흔들리고 있다.
‘민주주의’를 넓은 의미로 본다면 바람직한 정치질서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념으로 제시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근대서양식의 선거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 제한해서 생각한다면 모든 인간사회에 적용시킬 당위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원톄쥔의 글 중에 “노동력 자원의 자본화”란 말이 보인다. 지난 30여 년간 중국 경제발전의 핵심 원리를 짚은 말이다. 십여 년 전 중국에 처음 갔을 때 가장 놀랍게 본 특징이 사회경제적 낙차, 즉 불평등이 크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 비슷한 낙차가 있다면 당장 뒤집어질 정도인데, 큰 문제없이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댐의 낙차가 커야 큰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댐이 튼튼하지 않으면 큰 낙차를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버린다. 중국의 노동력시장은 큰 낙차를 버텨내 왔고, 그것이 “노동력 자원의 자본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서양식 평등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에 익숙하다. 사회경제적 낙차를 견뎌내기 힘든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이념이 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아직 민주화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생각하며, 민주화의 완성에 매진할 다짐을 한다. 이것을 원톄쥔이 말하는 바 “서구인들이 완전히 식민지로 점령을 해서, 설령 독립을 하더라도 여전히 서구인들이 만들어놓은 상부구조를 계승할 수밖에 없는” 질곡의 일부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990년대에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는 미국 등 서방의 압력에 대항해서 ‘아시아적 가치’를 제창했다. 1997~1998년 금융공황의 직격탄을 맞으며 이 주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 주장에 타당성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이 조그만 나라들에게는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대항할 힘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이제 중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중국식 민주주의’ 주장은 기존 세계체제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저항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왜 ‘세계정부’를 말했나?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경험 때문에 ‘중국식 민주주의’ 주장에도 나쁜 선입견을 갖기 쉽다. 이 주장 중에 그런 수준의 편의주의가 꽤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한국적 민주주의’에 비해 지금의 ‘중국식 민주주의’에는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의미가 훨씬 더 많이 들어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순전히 내부용이었다. 반면 지금의 중국식 민주주의는 대외관계 해명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앞에 말한 ‘화평굴기’, ‘화평발전’ 외에도 중국 지도부는 ‘책임대국’, ‘신안보관’, ‘조화세계’ 등의 구호로 원만한 대외관계를 표방하는데, 이것이 모두 중국식 민주주의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효사상’만을 단편적으로 내세운 한국적 민주주의와 달리 중국식 민주주의는 넓고 깊은 사상적 체계성을 추구한다.
이 추구의 겉으로 드러난 표적이 유가사상이다. 2004년 이래 ‘공자학원’의 이름으로 세워지고 있는 중국의 해외문화원 조직이 그 상징이다. 유가사상 부활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부활된 유가사상이 진짜 유가사상인지는 따질 필요가 없다. 유가사상 자체가 긴 역사를 통해 내용과 형식을 조정해 온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서방 정치학자들은 리콴유와 마하티르의 ‘아시아적 가치’를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권위주의로 규정했다. 그 기준으로는 중국식 민주주의도 권위주의 규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인민의 생활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데 충분한 효용성을 가진다면 ‘민주주의’의 이름을 가지건 말건 ‘정치발전’의 가치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중국식 민주주의 또는 유가적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를 유기론적 세계관에서 찾는다. 19-20세기를 지배한 원자론적 세계관은 지속가능성을 가진 체제를 만드는 데 근본적 결함을 가진 것이었다. ‘승자의 싹쓸이’(winner-take-all) 원리를 내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과 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는 이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 원리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의 하나가 아인슈타인이었다. 1945년 원자폭탄 투하에 충격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세계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세계 차원에서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를 조정해주는 세계정부 없이는 인류의 자기파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는 무정부상태에 머물러 있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제기된 ‘세계화’는 정치적 세계화가 아닌 경제적 세계화로서, 오히려 무정부상태를 더욱 심화시키는 추세였다. 유가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중국의 굴기가 세계정부로의 접근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중국인 중에도 패권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책임대국’이나 ‘조화세계’를 편의적인 구호로만 활용하고, 중국의 힘이 정말 커지면 과거의 영국이나 미국처럼 패권을 휘두르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중국인의 대다수라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중국에게는 과거의 패권국가와 다른 방향을 바라볼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 하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큰 정치경제적 변화가 없더라도 몇 십 년 내에 인류문명이 큰 벽에 부딪칠 것이 분명한 사실로 확인되어 왔는데, 세계 인구의 20%를 점하는 중국인이 패권국가다운 소비수준을 추구한다면 파국이 바로 코앞에 닥칠 것을 그들도 모를 수 없다.
또 하나의 조건은 문명 전통이다. 역사상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유기론적 원리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되어 왔다. 유기론적 조직-운영 방법을 가장 고도로 발전시킨 것이 중국문명이었다. 중국은 기존 패권주의적 세계체제를 바꾸기 위한 문화적 자원을 가진 나라다.
기존 세계체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들은 중국의 굴기를 견제할 이기적 동기를 갖고 있다. 그 목적을 위해 중국의 모든 현상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중국의 변화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선전한다. ‘중국위협론’이다.
중국위협론은 오래 전부터 힘을 잃기 시작했다. 조영남의 <21세기 중국이 가는 길> 176쪽에 미국의 퓨 리서치센터가 2005년 6월 발표한 조사결과가 인용되어 있는데, 유럽인들이 미국보다 중국에 대해 더 우호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영국 55:65, 프랑스 43:58, 독일 41:46, 스페인 41:57, 네덜란드 45:56] 아시아지역(터키,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레바논, 요르단, 인도)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중국의 굴기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중국의 경제성장이 자국에 유리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나는 중국의 변화에서 좋은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데, 이것이 정확한 의견이라고 장담하지는 않는다. 설령 정확한 의견이라 하더라도 중국의 변화가 인류에게, 특히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고난과 고통을 더해줄 측면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변화가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내다보이는 이 시점에서 이웃의 피해가 적은 방향으로 중국의 발전 진로를 찾는 데 생각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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