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조선의 비교로 돌아가 보자.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워진 오스트리아공화국은 유럽에서 좌우대립이 가장 격렬한 곳의 하나였다. 기독사회당(CS)과 사회민주당(SPO)을 중심으로 대립과 혼란이 계속되다가 19333월 쿠데타로 의회가 봉쇄되고 파시스트 독재정치가 시작되자 SPO 해산 등 좌익 탄압으로 인해 19342오스트리아 내전이라 불리는 전면적 무력충돌 사태까지 겪었다.

1945년 봄 독일의 패망 때까지도 오스트리아 좌우익 간의 피맺힌 원한은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런데 좌우익 지도자들은 국가 위기의 극복을 위해 내부 대립을 자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좌우합작에 나섰다. 우익을 재편한 인민당(OVP)이 첫 총선에서 의회 과반수를 단독으로 확보하는 승리를 거두고도 SPO와 정권을 분담함으로써 시작된 대연정1966년까지 계속되었다.

해방 조선의 좌우익 사이에는 그런 원한도 없었다. 굳이 갈등이라면 신간회 운동이나 해외 독립운동에서 나타난 정도의 경쟁심이나 개인적 불신감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좌우합작에 실패하고 분단건국과 전쟁에 이른 까닭이 무엇인가.

민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국제정세 판단을 잘못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파적 득실에 얽매여 대국(大局)을 그르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쉽다.

그러나 냉철히 살펴보면 지도자들의 잘못보다 주어진 상황의 차이에서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행로가 갈라진 더 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해방 당시의 잠재적 지도자 중 이승만, 김구, 김일성, 박헌영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는 좌우합작을 지지했다. 여운형, 김두봉, 백남운, 김규식, 조소앙, 원세훈, 김병로, 안재홍, 홍명희, 이극로 등등, 민족국가 건설을 지상과제로 여긴 사람들의 현실 인식과 노력은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에 못하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의 차이는 무엇인가. 위치가 차이를 가져왔다. 유럽 중앙에 있는 오스트리아는 국제여론의 주목을 받는 곳이었다. 어느 점령군도 국제적 기준을 벗어나는 횡포를 부릴 수 없었다. 구 통치기구가 종전 직후에 마구잡이로 찍어낸 돈이 우호적 세력의 수중에 있다 해서 점령군이 그 효력을 인정해주는 것 같은 일은 오스트리아에서 있을 수 없었다. 나치 협력세력을 끌어 모아 경찰력을 부풀리는 것 같은 일도 있을 수 없었다.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은 군정청의 비호 아래 친일파가 장악한 자금력과 폭력(경찰력 포함)에 억눌렸다. 이북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런 탄압까지 받지는 않았지만 소련의 힘에 기댄 공산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내줘야 했다. 그런 상황이 친일파와 극렬 좌익 등 민족주의에 거스르는 세력의 힘을 키워주었고, 민족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조차 유혹과 공포에 시달리게 했다.

 

극좌-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

 

이북에서는 소련군 진주 이후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좌우합작이 진행되었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절반씩 인민위원회에 참여하도록 소련군이 지도한 지역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소련군이 좌익에 힘을 실어주기는 했지만 우익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고 좌익이 주도권을 쥐게 해주는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남에서는 인민위원회 같은 자치조직이 일체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좌우합작의 진행을 위한 현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리력에만 의존하고 민심을 도외시하는 미군정은 좌익에게 어떤 양보도 하려 하지 않는 극우세력을 친일파 집단을 바탕으로 키워냈다.

이런 상황에서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 일부를 포용하는 원만한 건국의 길을 모색했다. 친일파라도 다 같은 친일파가 아니었다. 식민지체제 아래 출세하고 호의호식하고 재산 모았던 사람이라도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 공조한 사람만 아니라면 해방을 계기로 과거를 반성하고 기득권을 양보하면서 건국 대열에 동참할 것을 바랐다.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가진 동아일보 그룹이 가장 중요한 포섭 대상이었다. 그래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한민당에 참여해 한민당을 민족주의 노선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극우세력도 처음에는 민심을 살폈다. 그래서 임정 봉대를 내걸고 김구를 영수로 받들면서 민족주의자들을 우대했다. 그러나 경찰과 군정청의 장악이 차츰 확실해지자 민족국가 건설을 회피하려는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610월 당 해체에 가까운 대규모 탈당 사태를 통해 한민당은 극우정당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같은 무렵 이남 좌익에서도 분화 현상을 통해 극좌 노선을 분명히 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나타난 것은 적대적 공생관계의 궤도 진입이었다. 극단주의 노선은 이념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고 정치 아닌 선동을 통해 근거를 확보한다. 선동을 위해서는 주적(主敵)’의 존재가 필요한데, 이남의 극좌와 극우는 서로의 주적 노릇을 해준 것이다.

이 공생관계의 기본 동력은 친일파와 미군정의 야합에서 나왔다. 미국은 통제하기 어려운 지역에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친일파는 민족국가 건설의 대세를 뒤집기 위해 민심을 억누르는 억압적 통치체제의 필요를 공유했다. 이들이 빚어낸 정치적 혼란에 일부 좌파세력의 종파주의가 편승해서 이남 정치계를 좌우대립양상으로 몰고 갔다.

극우-극좌세력이 분명해지면서 좌우합작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중간파진영을 형성했으나 극우-극좌세력의 자금력과 조직력 앞에서 역부족이었다. 중간파를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이며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극좌와 극우의 공생관계가 위력을 발휘했다. 겉보기로는 -대립이었지만 실제로는 -대립의 양상이었다.

1948년 들어 분단건국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는 시점에 김구가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이 양상에 마지막 파란이 일어났다. 중간파는 극우세력의 분단건국 획책 저지를 위해 이북 지도부의 협조에 희망을 걸었지만, 이미 분단건국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던 이북 지도부는 중간파의 노력을 이용 대상으로만 여겼다.

 

친일파, 친미파의 번식 원리

 

어느 사회에나 자기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인간들, 즉 불량분자는 약간씩 섞여 있는 법이다. 그로 인한 사회의 피해는 어느 정도 감수하는 편이 좋다. 불량분자가 일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할 때, 진짜 비인간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낳기 쉽다.

잘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불량분자가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골방에 틀어박혀 댓글질이나 하고, 더러 범죄를 저질러도 개인적 범죄에 그친다. 그런데 사회의 원칙과 질서가 무너질 때는 그들이 중심부로 진출하고 권력을 쥐기까지 한다. 국토를 파괴하는 일, 국고를 거덜내는 일이 조직적으로 벌어지는가 하면 공직자 인사청문회는 요식적 절차가 되어버리고, 국가적 참사에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해방공간 이남 사회의 사정이 그랬다. 해방 직후 마구 찍은 35억 원에 대한 미군정의 “OK” 한 마디로 일반인이 쥐고 있던 돈의 가치가 40% 잘려나가는 한편 친일파 집단의 막강한 자금력이 확보되었다. 식민지경찰 중에도 악질분자들이 갑절 크기로 커진 군정경찰의 주축이 되었다. 능력도 자질도 관계없이 영어마디나 하는 자들이 온 나라의 이권을 주름잡았다.

외세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식민지시대와 달라지지 않은 점이다. 일본 통치자들이 키워낸 친일파는 독립투사 때려잡는 순사, 헌병 보조원만이 아니었다. 조선 농업사회에서 대대로 존중되어 온 소작권을 무시하고 지주 소유권을 절대화했을 때 보통 심성의 지주들도 그 이득을 마다하지 않았고, 쟁의가 일어나면 총독부 관헌에 의지했다. ‘자기 것을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친일파가 되어 갔다.

돌이켜 보면 조선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부터 나타났던 현상이다. 건강한 사회에서라면 사회에 큰 해를 끼칠 능력조차 가질 일이 없을 불량분자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활개를 친 것은 외세의 힘이 내부 질서를 까뭉갤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 불량분자들의 활약이 침략과 지배를 쉽게 해주기 때문에 외세는 그들에게 힘을 빌려준다. 그런 상황이 오래 가면 선량한 사람들 중에도 심지가 약한 사람들은 불량분자들의 행태를 따르게 된다.

외세의 너무 강한 힘이 문제라면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을 생각할 일이다. 19세기 들어 산업혁명의 성과로 부국강병을 이룬 서양 열강의 힘이 세계를 휩쓴 현상이다.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과 생산력 앞에서는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 같은 큰 나라도 고통과 치욕의 역사를 피할 수 없었다. 서양의 부국강병을 본뜬 일본의 힘 앞에 조선의 지사(志士)들이 아무리 좋은 뜻을 일으켜도 그 침략을 막을 길이 없었다.

 

서세동점현상의 퇴조를 바라보며

 

서세동점 현상은 1945년에도 건재했다. 조선에서 힘을 휘두르는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두 나라가 힘을 휘두르는 방식은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 일차적으로 달려 있었다. 연합국 시절의 협력관계가 계속된다면 두 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함께 누릴 것이고, 배타적 영향력 확보를 위해 극한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나라의 관계는 원래 적대적이었다. 공산혁명 후 소련 승인이 제일 늦었던 나라가 미국이었다.(16년이 지난 1933,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후에야 소련을 승인했다.) 추축국을 상대로 한 전쟁 때문에 적대관계가 미봉되었을 뿐, 전쟁이 끝나면 적대관계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조선의 분단건국이 이뤄지기까지 3년의 과정은 바로 그 적대관계가 냉전체제로 현실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연합국의 분할점령국 중 오스트리아는 10년 후라도 제대로 독립을 했고, 전쟁 책임이 제일 큰 독일은 분할되기는 했지만 내전까지 겪지는 않았다. 이들 유럽국과 달리 동아시아의 조선과 베트남은 내전, 대리전, 국제전의 양상이 뒤섞인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서아시아의 중동은 화약고가 되었다. 냉전의 갈등이 아시아 여러 지역에 전가된 이 현상은 서세동점 현상의 계속을 보여준다.

20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주체적 진로를 찾아 나가려는 아시아 인민의 노력은 서양세력의 막강한 힘 앞에 좌절을 거듭했다. 가장 치열한 노력을 보여준 베트남인의 경우 민족자결이라는 간단한 목표 하나를 이루기 위해 30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중국도 오랜 고난의 행로를 걸어야 했고, 중동 여러 나라의 인민은 지금도 고난 속에서 헤매고 있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서세동점 현상의 해소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 말부터 한국 등 신흥산업국(NICs)의 눈부신 성장에 따라 해묵은 서양우월주의가 힘을 잃기 시작했고, 금세기 들어서서는 중국의 놀라운 성장세가 더 큰 충격을 일으켰다.

현실의 변화에 앞서 학문적 고찰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서세동점의 형세 속에서 조성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1960년대에 종속이론으로 지적된 후 1970년대 이후 세계체제론의 발전은 서양인이 주도한 근대 세계체제의 한계를 밝혀 왔다. 2008년 금융위기 무렵부터는 새로 형성될 세계체제의 방향 모색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은 서세동점의 충격 앞에서 망국에 이르렀고, 1945년의 해방도 서세동점의 형세 때문에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었다. 냉전의 첨병 노릇도 서세동점의 압력이 강요한 것이었다.

고난의 역사를 한반도에 빚어낸 서세동점 현상의 퇴조 앞에서 민족사회는 주체적 진로를 찾아 나갈 기회를 150년 만에 맞고 있다. 이 기회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가치관의 정비가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다. 고액 복권 당첨자가 그 행운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불행을 맞는 일이 많다고 한다. 복권이 가져다주는 돈에 실린 힘을 행복을 위해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잘못 휘둘러 주변사람들을 괴롭히고 그 고통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힘 자체에 대한 갈망을 가졌을 뿐, 그 힘으로 추구할 가치를 마음속에 품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현대사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서세동점의 압력 아래 왜곡된 현실 속에서 외세에 의지해 조그만 권력을 휘두른 자들보다,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좋은 뜻을 품고도 좌절을 겪은 이들의 자취에서 배울 것이 많다. 민족사회가 힘을 갖지 못했던 시절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이 아니라 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문천

 

카이로선언에 담긴 연합국의 속셈

 

일본이 러일전쟁(1904-05)으로 조선 침략의 마지막 경쟁자 러시아를 물리치고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대외주권을 빼앗자 고종은 국제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냈지만 44개국이 참석한 이 회의에 참가 자격을 얻지 못했다. 이 시도에 분노한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세웠다.

1919년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파리평화회담에 대표를 파견해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조선 독립을 호소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제국주의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소민족의 절규가 국제무대에서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 독립의 호소가 처음으로 국제적 호응을 얻은 것은 194311월 카이로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에서였다. 당시 주요 연합국으로 미---4개국이 있었는데 카이로회담은 일본 문제를 다루는 자리였기 때문에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이 빠졌다. 이 회담 직후 열린 테헤란회담에는 미--3국 정상이 모여 유럽 문제를 다뤘다.

--3국 정상의 카이로선언이 조선의 독립에 대한 첫 국제적 합의였다. 그런데 이 합의가 약소민족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일본의 패망에 따른 조선 해방의 실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독립 약속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몇 주일 전 미--3국 외상회담의 모스크바선언에서 나온 오스트리아의 독립 약속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앞둔 1938년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에 합병되어 독일제국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선언에는 전쟁 후 오스트리아의 독립 방침에 이어 이런 말이 붙어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전쟁을 수행한 데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최종 결정에서 자신의 해방을 위한 오스트리아 스스로의 노력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스트리아인에게는 지금까지 독일을 도와준 책임이 있으며, 지금부터 연합국을 얼마나 도와줄지 두고 보겠다는 것이다. 당시 연합국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려고 안간힘을 쓸 때였다.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것은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내부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뜻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독립 전 10년과 5년의 신탁통치를 결정한 데는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본 데 따른 징벌의 의미가 있었다. 연합국이 끝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승인하지 않은 것도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단건국의 수단이 된 반탁운동

 

오스트리아는 원래 좌우대립이 극심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19454월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은 좌우합작 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10년 신탁통치를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4개국 분할점령 10년 동안 좌우합작 정부는 소련과 서방국 어느 쪽에도 분규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1955년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하기에 이른다.

반면 조선에서는 1945년 말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 신탁통치 방침이 결정되자 즉각 거센 반탁(신탁통치 반대)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다. 그것은 1227일자 <동아일보>워싱턴 25일 발 합동 지급보란 바이라인이 붙어 나온 기사 때문이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란 제목대로 미국이 조선의 즉각 독립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선인이 독립의 의지를 보이고 소련만 설득하면 즉각 독립이 가능할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기사였다. 민족 독립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탁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기사였다. 그러나 조작된 기사였다. 사실에 있어서는 미국이 더 긴 신탁통치기간을 주장했는데 소련이 줄일 것을 요구해서 5년으로 낙착된 것이었다.

반탁운동은 결국 “5년 신탁통치 후 독립이라는 연합국 합의가 실행되지 못하게 되는 데 큰 몫을 했고, 그 결과가 분단건국과 전쟁이었다. 나는 <해방일기>에 이렇게 썼다.

“<동아일보>가 아직 살아 있는 신문이라면 해마다 1227일에는 19451227일에 내보낸 이 기사에 대한 사과문과 반성문을 실어야 한다. 언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례로 이 기사는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극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2, 294)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모스크바회담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민족주의자들은 반탁운동의 대열에서 빠져나가 좌우합작의 노력을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 하에서 좌우합작 없이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다.

그런데도 반탁운동을 계속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주축은 한민당 중심으로 뭉친 친일파-지주 집단이었다. 그들에게는 미군 점령지역의 분단건국이 민족국가 수립보다 유리했다. 분단건국이 내전을 몰고 올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들은 미국의 군사력이 소련을 압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들이 대열을 떠난 후에도 반탁운동이 어느 정도 기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금력 덕분이었다. 막강한 자금력으로 군중을 동원하고 테러조직을 키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김구와 이승만, 두 민족주의 지도자를 포섭해서 간판으로 내놓을 수 있었다.

 

무엇이 김구의 눈을 흐리게 했나?

 

김구와 이승만은 해외 독립운동가 중 가장 저명한 인물이었다. 국내에 있던 사람들에 비해 국제정세를 잘 파악할 위치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즉각 독립의 환상에 빠지더라도 현실의 엄혹함을 알려주고 좌우합작의 노력에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반탁을 빙자한 극단적 반공(反共)-반소(反蘇)에 나선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여운형과 함께 건준을 이끌다가 보름 만에 사퇴한 안재홍은 언론인과 역사학자로 여러 차례 감옥을 드나든 국내의 대표적 민족주의자였다. 이승만과 김구가 귀국하자 안재홍은 그들을 건국 과업의 지도자로 받들기 위해 정성을 다했지만 결국 갈라서게 된다.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안재홍은 나중에 이승만의 사조직이 될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에 앞장섰다가 곧 멀어지는데,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어도 짐작이 가는 대목이 있다. 19462월 민주의원을 만들 때 미군정에 종속적 성격이라는 이유로 참여를 꺼리는 안재홍에게 이승만이 참여를 강권하며 그것이 장차 세워질 국가의 대신(大臣)’이 되는 길이라 했다고 적은 글이 있다. 이승만이 이익을 앞세우는 사람임을 그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김구의 지도력에 대한 안재홍의 기대는 훨씬 더 오래갔다. 19464월 자신이 이끌던 국민당을 김구의 한독당에 통합시켜 국내 기반을 키워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1년 후 반탁운동을 고집하며 미소공위를 방해하는 김구와 결국 결별하기에 이른다.

안재홍이 이승만과 김구의 지도자 추대에 애쓴 데는 건준의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해외에서 깨끗이 지켜온 지도력이 국내 지도자들의 도토리 키 재기를 뛰어넘어 안정된 지도부 구축을 위한 깃발이 되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당시의 민심도 환국 독립운동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풍찬노속(風餐露宿)’에 대한 동정심과 구원에 대한 열망 위에서 그들의 행적이 많이 부풀려져 전해져 왔다. 김일성도 이런 민심의 덕을 본 사람의 하나였다.

김구의 임정은 국민당과 한민당 양쪽의 구애를 받았다. 임정을 중심으로 모든 계열 지도자들을 통합하자는 국민당의 보강론(補强論)’과 달리 한민당은 임정 그대로 지도부로 삼자는 직진론(直進論)’을 내세웠다. ‘임정 봉대(奉戴)’라는 한민당의 아첨은 진심을 담지 않은 것이었다. 김구가 그런 한민당과 손을 잡고 반탁운동에 나선 것은 그쪽의 자금 지원이 진심을 담은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일까. (경교장도 그쪽 제공이었다.)

 

인민의 여망을 등지는 민족지도자

 

19451123일 오후 4시경 김구 일행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할 때는 물론, 5시경 경교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환영 인파가 없었다. 언론에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6시에야 하지 사령관이 라디오로 임정 환국 사실을 밝혔다. 김구의 방송연설은 이튿날 오후에 군정청의 허가를 얻어 단 2분간, 300자 길이의 인사말을 인민에게 전할 수 있었다.

임정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은 미국의 공식 정책은 합리적 근거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임정 지도부의 환국을 비밀에 부치고 경교장에 연금하다시피 한 것은 별난 일이었다. 이런 조치는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었을까? 도착한 날 김구가 만난 사람이 이승만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이 주의를 끈다. 당시 이승만은 맥아더와의 친분을 앞세워 하지 사령관의 엄청난 공경을 받고 있었다. (이승만은 귀국 길에 도쿄에 들러 맥아더를 만났는데 맥아더는 하지를 도쿄로 불러 이승만에게 인사를 시키고 자기 전용기에 태워 보냈다.)

전쟁 말기에 김구는 이승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임정은 중국 정부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중국 정부는 미국에 의지하고 있었고 이승만은 미국 군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구가 형님이라 부르던 이승만이 미군정의 힘을 빌려 격리시켜 놓은 김구에게 그날 밤 어떤 이야기를 한 것일까?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김구의 말 한 마디가 짐작을 도와준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문제를 어찌할 것인가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을 줄 안다. 우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므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

산수에는 ‘A+B=B+A’라는 교환의 법칙이 있다. 그러나 현실사회에는 경로의존성이 있지 않은가? 불량분자를 배제하지 않은 채 건국사업을 진행할 경우 불량분자가 그 진로에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 건국 후의 불량분자 배제가 어렵게 될 것을 김구가 정말 몰랐을까? 그가 적어도 당장은 이승만의 뜻을 거스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실을 같은 회견 중 통일전선 결성 방침을 묻는 질문의 대답에서 알아볼 수 있다.

나에게 이박사 이상의 수완이 있다고는 신빙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나는 제군이 아는 바와 같이 국내와 연락이 없었고 국내 사정에 어두운 만큼 현실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모두 30년간 해외에 나가 있었던 만큼 현하 정세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미군정을 쥐락펴락하는 이승만, 으리으리한 경교장까지 마련해준 이승만, 못 이기는 체하고 그의 뜻에 따르고 있으면 언젠가 자신에게 유리한 형세가 돌아올 때가 있을 것이라고 김구는 판단했을 것 같다.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건국사업에 큰 역할을 맡아줄 것이라는 여망을 모으고 있던 김구는 이렇게 귀국 이튿날부터 그 여망을 저버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1950년생인 내가 학교에 들어간 1956년이면 해방 후 11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때 어른들은 해방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었다. 해방당시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감격으로 해방을 맞았고, 사진과 같은 광경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펼쳐졌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그런데 이 사진은 해방 순간을 찍은 것이 아니다. 이튿날 아침 서대문형무소에서 정치범이 석방될 때의 사진이었다. 당시 36세의 신문기자였던 영문학자 조용만은 815일 당일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들이 큰길로 뛰쳐나오고 독립만세를 부르고 좋아라고 법석일 줄 알았는데, 그냥 그전대로 무표정하기만 했다. 오랫동안 줄곧 겁만 먹고 일본 경찰에 옴쭉달싹 못하고 눌려 지내온 때문일까. 일본이 항복했다고 해도, 우리가 일본 통치에서 해방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일본 경찰이 아직도 버티고 있었으므로 이것이 겁났을는지도 몰랐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29쪽에서 재인용)

사리에 맞는 회고다. 일본 통치당국은 만약 패전할 경우 조선인들도 참혹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줄기차게 선전해 왔다. 조선 독립을 연합국이 약속했다는 카이로선언은 완강한 언론 통제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희미하게 전해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의 패전에 민족 독립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 과정에서 어떤 혼란과 고통을 겪어야 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걱정이 줄고 기쁨이 늘어났다. 인식의 변화가 외진 시골보다 서울에서 더 빨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에서는 815일 해가 지기 전에 죄수의 석방이 시작되고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요원들이 도처에 배치되는 것을 보며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반가운 변화의 소문은 철도를 따라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총독부가 건국준비위원회를 밀어준 까닭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함석헌은 말했다. 박헌영은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했다고 했다. 50여 년 후 친일 혐의를 추궁받던 어느 시인은 일본이 패망할 줄 알지 못했기 때문에그런 행위를 했다고 변명했다. 일본의 패망은 국내에서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일본당국이 아무리 보도를 통제해도 불리한 전황을 몽땅 감출 수는 없었다. 연합국 방송을 단파라디오로 듣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몰라도, 정세 변화에 관심을 가진 지식층 사람들은 일본의 패색을 모르고 있을 수 없었다. 그 패망이 언제 어떤 식으로 닥쳐올지 정확히 알지 못했을 뿐이다.

함석헌과 박헌영의 발언은 일본 패망에 대비한 준비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탄식한 것이다. 일본의 통제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민족사회를 이끌고 갈 역량을 갖춘 지도부가 만들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통치당국은 협력을 거부하는 조선 지도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전쟁 막바지에 탄압이 더욱 극심해서 잠재적 지도자들이 거의 모두 전향하거나 옥중에 있는 채로 해방을 맞았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막상 항복 상황에 이르자 조선인사회 지도부의 존재를 아쉬워하게 됐다. 조선에 있던 백여만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서는 조선사회의 질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독부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준을 밀어주기로 한다. 치안을 비롯한 총독부의 일부 기능을 건준에 양도하는 대신 건준은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협력한다는 거래였다.

송진우가 먼저 이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기 때문에 여운형을 청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중에 송진우 주변에서 나왔다. 정황으로 보아 현실성 없는 주장이다. 김성수와 송진우 등 동아일보-보성전문 그룹은 식민통치에 협력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인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처럼 최근까지 옥고를 치른 투철한 민족주의자라야 일본인에 대한 폭력의 절제를 호소해도 인민의 의심을 살 염려가 없었다.

그런데 총독부 측은 건준의 역할을 바라면서도 흔쾌히 밀어주지 않았다. 며칠 지나 건준의 치안활동이 궤도에 오르려 하자 경찰력을 다시 동원해 치안권을 빼앗았다. 본국이 항복을 했으니 누군가에게 칼자루를 넘겨주고 처분을 바라야 하는 입장이었고, 여운형과 안재홍 같은 합리적 민족주의자가 적합한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길은 없을까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승계자였다.

 

눈치를 볼 대상은 진주할 미군이었다. 일본은 개항 이후 소련(러시아)과 계속 갈등을 겪어왔다. 2차 세계대전 중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으면서도 가장 두려워한 연합국이 소련이었다. 미국의 86일과 9일 원자폭탄 투하도, 일본의 재빠른 항복도 88일 대 일본 공격을 시작한 소련의 입장 강화를 막는 데 일본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진행이었다.

일본의 항복 결과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군사적-경제적 거점으로 만들 수 있었고 일본은 분할점령을 면하고 천황제를 지킬 수 있었다. 일본정부가 포츠담선언 수락의 뜻을 밝힌 것은 810일이었다. 814일 합의까지 어떤 흥정이 오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윈의 결과를 위해 치열한 물밑교섭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빤한 일이다.

오키나와에 있던 미 육군 24군단이 남조선 점령군으로 정해진 것은 820일의 일이었다. 24군단과 조선총독부 사이의 직접 교신이 822일부터 시작되었다. 9824군단이 인천에 입항할 때까지 교신 내용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24군단 진주 후에 벌어진 일을 보면 얼마간의 짐작이 가능하다.

미군정은 일본인과 협력하여 조선 지배를 넘겨받는 것을 기조로 삼았다. 총독부 이하 모든 기관의 일본인 간부를 그대로 쓰다가 차츰 미군 장교로 부서장을 임명했지만 일본인 전임자가 고문 자격으로 업무를 계속했다. 몇 달 후에야 일본인을 내보내고 조선인을 쓰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전에 중간급 간부로 일하던 친일파였다. 일부는 미국유학생 출신과 기독교인 등 친미파의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데는 상대를 존중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경우가 있고 자기 이익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려는 경우가 있다. 국가 간의 관계는 개인의 경우보다 국익을 더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겉으로는 조선에 해방군으로 온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점령군의 속셈을 가진 것이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오는 소련군에 비해 태평양 건너, 자본주의가 적합하지 않은 지역을 점령하러 오는 미군은 불리한 조건에 있었고, 그만큼 억압적 점령정책을 필요로 했다. 미군의 조선 점령정책은 일본의 조선 통치를 이어받았다. 그래서 일체의 조선인 자치조직을 인정하지 않고 총독부와 경찰을 통한 통치체제를 그대로 지켰던 것이다.

 

총독부와 미군정 합작의 초대형 위조지폐사건

 

조선총독부에서는 미군정의 이런 방침을 24군단 도착 전에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군은 8월 하순 이북 지역을 점령하면서 일본인 관리들의 권한을 바로 조선인 인민위원회에 넘겨주었다. 미군도 비슷한 조치를 취할 것이 예상되었다면 이남의 일본인 관리들이 건준에 적극 협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항복 선언 며칠 후부터 건준을 무시했다.

일본인만이 아니라 친일파 집단도 건준을 외면했다. 여운형과 안재홍은 송진우를 참여시키기 위해 애를 썼는데, 송진우는 김성수의 동아일보-보성전문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 세력은 본질적으로 친일-지주 세력이면서 민족자본을 표방해 왔다. 온건한 친일파라 할 수 있는 이 세력을 건준에 포용함으로써 건국사업의 기반을 넓히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그룹은 건준 참여를 거부하고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만들었다. 김병로, 원세훈 등 명망 높은 민족주의자들이 이때 한민당에 참여한 것은 한민당을 민족주의 노선으로 이끌어가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1년 후 한민당을 장악하고 있던 동아일보 그룹이 좌우합작을 노골적으로 거부하자 민족주의자들이 떠나고 한민당은 지주당(地主黨)의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194610월 한 달 동안 한민당 중앙위원 150명 중 80명이 탈당했다.

우익에게 외면받은 건준은 좌익 천지가 되었다. 박헌영 중심의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해서 건준을 장악하자 부위원장 안재홍은 사퇴하고 여운형 위원장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군 진주 직전에 일방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창당 준비 중이던 한민당은 준비위원회 명의로 인민공화국을 거칠게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좌우대립을 지향하는 노선을 예고했다.

친일파 집단과 일본인들 사이에 당시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두 집단과 미군정, 3자 사이에 상당한 교감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던 일 한 가지가 짐작을 도와준다. 19458-9월간의 엄청난 화폐 증발(增發)이다.

일본 항복 직전 조선은행권 통화량은 약 50억 원이었다. 그런데 926일까지 6주일 동안 약 35억 원을 더 찍었다. 원래 조선은행권은 일본에서 인쇄해 들여왔는데, 이때는 서울의 몇 곳 민간 인쇄소까지 징발해 고액권을 마구 찍었다. 열악한 조건에서 서둘러 찍는 바람에 인쇄 품질도 나빠서 당시 상인들은 붉은 돈이라 부르며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정이 이 돈에 화폐의 효력을 인정하고 교환을 보장해주었다. (이때 징발된 인쇄소의 하나가 정판사로 이름을 바꿨고, 남아있던 지폐 원판 때문에 19465공산당 위폐사건의 빌미가 된다. 천여만 원의 위폐를 인쇄-유통시켰다는 검찰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거니와,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총독부-미군정의 소행에 비하면 새 발의 피.)

몇 주일 동안 시장을 통해 유통된 분량이 몇 푼이나 되었겠는가. 조선은행권은 일본에 가져갈 수도 없었다. 그 대부분이 친일파 집단의 수중에 있었을 것이다. 박흥식은 조선비행기회사 투자에 대한 보상으로 5천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친일파 사업가들이 이승만 귀국 후 2천만 원을 헌납한 일, 김구 귀국 후 7백만 원을 헌납한 일이 밝혀져 있다. ‘붉은 돈의 행방 중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것이다.

일본제국의 붕괴로 인한 산업과 경제의 파탄 속에서 통화량의 40%를 특정세력이 현금으로 쥐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가 살아날 수 없는 치명적 조건이었다. 그리고 한민당 등 극우세력이 룸펜화된 군중을 동원하고 테러조직을 키우는 데 이 돈이 쓰였으니 정치를 죽이는 무기이기도 했다. 퇴각하는 일본인과 진주하는 미군 사이의 협력과 양해로 이뤄진 이런 조치가 해방이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게 만든 중요한 조건의 하나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