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23. 12:25

 

龍洞의 顔山農은 <서상기>의 말미에 자신의 감회를 이렇게 술회했다.

 

"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에게 아직 동심이 남아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대저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는 진실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무릇 동심이란 거짓을 끊어버린 순진함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갖게 되는 본심을 말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이 없어지게 되고, 진심이 없어지면 진실한 인간성도 잃어버리게 된다. 사람이라도 진실하지 않으면 최초의 본마음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요, 동심은 마음의 처음 모습이다. 대저 최초의 마음이 어찌하여 얿어질 수 있는 것이랴! 그러나 동심은 왜 느닷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원래 그 시초는 듣고 보는 것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안에서 사람을 주재하게 되면 동심이 없어지는 데서 발단한다. 자라서 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사람의 내면을 주재하게 되면 어느덧 동심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쌓이고 아는 바와 느끼는 바가 나날이 넓어지게 되면 또 美名이 좋은 줄 알고 이름을 드날리려고 애쓰다가 동심을 잃어버리게 되고, 좋지 못한 평판이 추한 줄을 알게 되면 그것을 가리려고 애쓰다가 동심을 잃게 된다.

 

무릇 도리와 견문은 모두가 많은 책을 읽어 義理가 무엇인지 아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옛날의 성인이야 어찌 글을 읽지 않은 적이 있으셨을까! 하지만 공부하지 않아도 동심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설사 많은 책을 읽고 난 다음이라 해도 이 동심을 보호하여 그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셨으니, 보통 공부하는 자들이 많은 책을 읽고 의리를 깨우침으로써 도리어 동심을 가리는 경우와는 매우 다르셨던 것이다.

 

공부하는 자들이 많은 독서로 의리를 깨우치다 자신의 동심을 가리게 되었다면, 성인들은 또 어째서 많은 책을 지으시고 말씀을 남기셔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동심을 가리게 하셨을까? 동심이 가려지고 나서 말을 하면 그 말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게 되고, 천거를 받아 정치를 하게 되면 정사에 기초가 없어지며, 저술한답시고 문장을 지으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된다. 문장의 외적인 아름다움에 비해 내용이 칠칠하지 못하고 내포된 바가 독실해 빛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니, 한 구절 덕스러운 말이나마 구하려 해도 끝내 얻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동심이 가리어진 마당이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견문과 도리가 마음 자리를 다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견문과 도리가 마음이 되고 나면 말하는 바는 모두 견문과 도리의 말이요 동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게 된다. 언사가 비록 아름다워도 나에게 의미가 없는 것은 어찌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내뱉으며 거짓 일을 꾸미고 거짓 문장을 지어낸 때문이 아니겠는가? 원래 그 사람이 거짓되면 거짓스럽지 않은 바가 없게 마련이다. 이렇게 해서 거짓말을 거짓된 사람에게 말해주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며, 거짓된 문장을 거짓된 사람과 토론하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게 된다. 거짓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기뻐하지 않을 바도 없는 것이다. 온 장내가 거짓이니 구경하던 난쟁이가 무슨 말을 재잘거릴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 비록 최고로 잘된 문장이 있었다 하더라도 거짓된 사람에 의해 인멸되어 후세에는 볼 수 없게 된 글들이 또 어찌 적다 하리오! 어찌하여 그럴까? 천하의 명문은 동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동심을 항상 지닐 수만 있다면 도리가 행해지지 않고, 견문은 행세하지 못하며, 언제 지어도 훌륭한 글이 되고, 어떤 사람이 지어도 좋은 글이 되며, 어떤 체재의 글을 지어도 빼어난 글이 아닌 경우가 없게 된다.

 

詩는 왜 꼭 古詩에서 뽑아야 하고, 문장은 왜 꼭 先秦의 것이라야 한단 말인가? 후세로 내려와 六朝시대가 되자 시는 바뀌어 近體가 되었다. 또 변해서 傳奇가 되고, 院本이 되고 雜劇이 되었으며, <서상곡>-<수호전>이 되기도 하고, 오늘날의 과거문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 모두는 죄다 고금의 명문으로 시세의 선후만 갖고는 논할 수 없는 글들이다. 이렇듯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나는 동심에서 우러나온 명문들에 감격하고 말았으니, 거기에 무슨 <육경>을 말할 것이 있으며 <논어>-<맹자>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무릇 <육경>이나 <논어>-<맹자>는 사관들이 지나치게 추켜세워 숭상한 말이 아니면, 그 신하와 자식들이 극도로 찬양하고 미화시킨 언어일 뿐이다. 또 그런 것이 아니라면 세상물정 어두운 문도와 멍청한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억해낼 때 앞뒤는 잘라먹거나 빠뜨린 채 제멋대로 자신의 견해를 책에다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후학들이 이를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성인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지껄이며 경전으로 지목해버렸는데, 그 대부분은 성인의 말씀이 아닌 줄 누가 알리오?

 

설사 성인께서 하신 말씀일지라도 요컨대 목적이 있으셨으니, 병세에 따라 그때그때 적당한 약을 처방하여 이들 멍청한 제자와 물정 어두운 문도들을 일깨우려 하셨을 따름인 것이다. 거짓된 병을 치료하는 데 드는 처방은 고정불변인 것이 되기 어려우니, 이것들이 어떻게 만세의 지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육경>과 <논어>-<맹자> 따위는 도학자가 내세우는 구실이고 거짓된 무리들의 소굴일 뿐이니, 그것들이 결코 동심에서 나온 말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해진다. 오호라! 나는 또 어찌해야 동심을 잃지 않은 진정 위대한 성인을 만나 그와 한 마디 말과 글이나마 나눠볼 수 있을 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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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