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31. 21:09

 

마테오 리치는 1552년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 안에 있는 작은 도시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1568년 법학을 공부하러 로마에 간 리치는 1571년 예수회에 입회하고 1577년까지 플로렌스와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했다. 예수회 입회 이래 꾸준히 동방선교를 지원한 결과, 1577년 여름 포르투갈로 갔다가 이듬해 3월 동방을 향해 출항했다.[1]

[1] 리치의 약력 개관에 편리한 책으로 V Cronin, The Wise Man from the West(London, 1965)G Dunne, The Generation of Giants(London, 1962) 등이 있고, 학술적으로 더 치밀한 것으로는 平川祐弘, <マッテオリッチ1>(東京, 1969)J Spence, The Memory Palace of Matteo Ricci(New York, 1983)가 나와 있다.

6개월 항해 끝에 인도의 고아에 도착한 리치는 그곳에서 신학 공부를 마저 끝내고 이듬해 신부로 서품되었다. 고아와 코친 등 인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리치는 예수회 동방순찰사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1606)의 명으로 중국 선교요원에 충당되어 1582년 봄 고아를 출발, 말라카를 거쳐 8월에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카오에서 중국어 학습 등 1년 남짓의 준비를 거쳐 15839월 동료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羅明堅, 1543-1607)와 함께 광동성 肇慶에 정착해 중국 선교를 시작했다.

리치와 함께 중국에 입국한 루지에리는 5년이 못 되어 중국을 도로 떠난 반면, 리치는 16105월에 죽을 때까지 근 27년간 중국에서 활동했다.[2] 리치가 죽을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는 10명 전후였는데, 그 가운데 중국 활동기간이 가장 긴 사람이 리치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가톨릭의 초기 중국 선교에서 리치가 차지했던 비중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로 1774년까지 중단 없이 계속된 예수회의 중국 선교 노선은 그 뼈대가 리치에 의해 건설된 것이었으며, 리치가 중국인에게 기독교를 소개하기 위해 쓴 <天主實義>20세기 초까지도 같은 목적을 위해 계속 쓰였다.

[2] 리치가 중국 입국 후 꼭 한 번 중국 밖에 나와 본 것은 1593년 초, 발리냐노와의 업무협의를 위한 마카오 방문이었다. M Ricci(J Gallagher, tr.) China in the 16th Century: The Journal of Mattew Ricci. New York, 1953(이하 <中國誌>로 표시함): 258-259.

 

위와 같이 몇 줄로 요약한 리치의 생애를 보더라도 리치가 기독교 중국宣敎史에서 차지한 두드러진 위치는 분명하다. 따라서 리치의 활동은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사가들, 특히 예수회 학자들에게 중요한 연구과제가 되어 왔다. 20세기에 들어와 리치에 대한 중요한 연구업적을 남긴 Tacchi Venturi, Pasquale d'Elia, Louis Pfister, Henri Bernard, Joseph Dehergne 등이 모두 예수회 학자들이었고, 지금도 J Witek, N Standaert, C Spalatin 등 예수회 학자들이 관련분야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3] 1974년 이래 프랑스 샹티이에 있는 예수회 시설에서 3년마다 개최되는 Colloque de Sinologie16세기 이후 가톨릭 중국선교사를 중점적으로 다뤄오고 있어서 이 분야 연구의 세계적인 구심점 역할을 맡고 있다. 미국에서도 조지타운 , 노트르담 , 로욜라 , 샌프란시스코 등 예수회 계열 대학들이 중국선교사 연구의 중심이 되어 왔다.

[3] 이들의 대표적인 업적은 참고문헌 목록에 표시되어 있음.

교회사의 맥락을 중심으로 이어져 오던 마테오 리치 및 중국선교사에 대한 연구가 1980년대에 들어와 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1970년대 초 중국이 개방을 시작하면서 중국에 관한 서양 학자들의 연구, 특히 동서관계에 관한 연구가 전체적으로 늘어난 데서 파생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연구의 첫 번째 특징은 교회사의 입장에서 벗어난 점이다. J GernetJ Spence의 연구를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D Mungello, J Wills, W Peterson 등이 눈에 띄는 업적을 관련분야에서 내놓고 있다.

 

GernetChine et christianisme[4]은 근세 동서교섭사 학계에 하나의 충격을 던졌다.[5] 17세기 예수회 중국 선교의 기본노선이었던 적응주의를 전례논쟁의 상대방이었던 전통적 보수주의와 대비해서 진취적, 건설적 방향으로만 파악해 온 종래의 평면적 시각에서 벗어나, 적응주의 논리의 내부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그 내재적 한계를 밝힌 것이다. 리치 등 선교사들이 지은 교리서들, 거기 붙인 중국인 입교자 및 후원자의 서문, 그리고 17세기 중엽에 작성된 서학 공격 문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Gernet는 선교사들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이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중국인 입교자들, 특히 明末의 신분이 높은 입교자의 대부분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4] Paris, 1982. Eng. tr. by J Lloyd, China and the Christian Impact, Cambridge, 1985.

[5] 19873월 홍콩 中文大學에서 열린 “China and Europe: 16-18th Centuries” 심포지움에서 Gernet의 관점이 많이 논의되었는데, 길고 열띤 토론 끝에 J Spence“Gernet shock”라는 표현을 써서 많은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Gernet는 이미 1974년부터 이 주제에 관한 자신의 논점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J Gernet, "Philosophie chinoise et christianisme de la fin du ⅩⅥe au milieu du ⅩⅦe siecle“ in Actes du Colloque International de Sinologie, Chantilly, 1974(Paris, 1976).

Gernet의 연구에 대한 비판에서 가장 널리 지적된 점은 서학 공격 문헌의 편파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지나치게 활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입교자들이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 지은 서문 등의 자료에는 일반인의 반감을 줄이기 위해 표현에 제약이 있어서 그 내면의 정신세계가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것만을 근거로 그 종교적 태도를 판별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예수회 소속 소장 학자 N Standaert<楊廷筠: 明末天主敎儒者>(홍콩, 1987)는 한 지식인 입교자의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이런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 이런 비판을 통해 Gernet의 관점이 지나치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이 인식되어 오기는 했지만, 종래 당연하게 여겨져 오던 명제들에 대해 새로운 검토를 요구한 그의 문제 제기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1983년에 나온 J Spence의 연구는 마테오 리치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는 리치가 중국인 독자들을 위해 가장 일찍 지은 책의 하나인 <西國記法>의 서술방법을 중심으로 리치의 의식을 파고들어가는 특이한 연구방법을 통해 유럽문명의 어떤 배경 위에 리치의 사상체계가 펼쳐져 있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르네상스 유럽의 분위기와 라틴 고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Spence는 리치를 하나의 르네상스인간으로 제시했다.

리치 자신이 스스로 의식한 바 신앙인으로서보다도 하나의 르네상스 인간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그의 반응과 태도를 이해하는 데 더 적절하다고 하는 Spence의 문화사적 관점은 여러 연구자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리치에 대한 그의 관점을 직접 부연하거나 비판한 연구는 눈에 띈 것이 없지만 연구자들 사이에 많은 논의가 되어 왔으며, 리치 이후 다른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에서 비슷한 문화사적 시각이 채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6]

[6] M Lackner, "Jesuit Figurism" in T Lee, ed., China and Europe: Images and Influences in 16th to 18th Centuries (Hong Kong, 1991), D Mungello, Curious Land: Jesuit Accommodation and the Origins of Sinology (Honolulu, 1985) 등의 예가 보인다.

유럽 자연과학의 소개에 관한 연구도 H Bernard1935년 연구, P d‘Elia1960년 연구 등 예수회 학자들이 주도해 왔으나, 여기에도 1970년대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전 연구에서는 유럽의 과학이 우월한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그 전파가 중국의 과학 수준을 끌어올리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유럽 과학을 전달하는 선교사는 施惠者 입장으로, 그리고 이것을 전달받는 중국 학자들은 진보적 입장으로 도식적인 규정을 받았다.

이런 발전론적 과학사관은 1930년대 이래 퇴조한 것으로, 1960년대까지는 아마추어 사학자들만이 애용하는 것이 되어 있었으나 중국과학사에 있어서는 1954년 시작된 J Needham의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된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로운 관점으로 대치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국의 개방을 계기로 구미 학자들의 중국과학사 연구가 크게 늘어나는 가운데 17세기의 유럽 과학 소개에 대해서도 새로운 방향의 중요한 연구가 나타났으니, N Sivin1976년 연구가 대표적인 예다. 이 연구는 선교사들이 제시한 서양 우주관을 이념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을 결합한 시각에서 검토함으로써 소개된 유럽 과학의 내용이 과학 외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 측면, 그리고 이것이 중국인들에게 채택되는 데 있어서도 전반적인 문화 조건에 의해 그 내용과 형태가 결정된 측면을 지적했다. 이처럼 과학을 각 문화의 흐름 속에서 외연적인 맥락 가운데 고찰하는 관점은 그 후 수학사 분야에서 많은 연구의 틀을 이루었다.

1970년대부터 구미 학자들이 제기한 몇 가지 새로운 관점에 따라 근세 동서교섭사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검토를 받고 있고, 또 그 과정에서 더욱 새로운 관점들이 계속해서 떠오를 것이 예상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연구의 양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데, 특히 크게 팽창하고 있는 분야는 서양이 중국의 문물에 영향받은 측면이다.[7] 그리고 중국 측이 받은 영향에 관해서는 샬폰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2-1666)과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23-88)에 근래 연구가 집중되었는데, 그 서거 300주년 및 탄생 400주년 기념행사가 계기가 된 것이다.[8]

[7] D Lach,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2 vols. Chicago, 1965-70)EtiembleL'Europe Chinoise (2 vols., Paris, 1988)가 중요한 지표가 되어 있다.

[8] 우리나라에서도 샬폰벨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이 제출되어 이 방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보여준다. 장정란, 아담 샬 연구 -중국 전교활동과 그에 따른 사상논쟁을 중심으로-, 성신여대 학위논문, 1993.

이 논문은 마테오 리치의 선교노선을 고찰하는 것이다. 근세 동서교섭사에서 리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이 언제나 집중되어 왔고, 앞에서 예시한 새로운 방향의 연구업적 가운데도 J GernetJ Spence의 연구가 리치에게 큰 중점을 두었거나 전적으로 다룬 것이다. 그러나 리치 활동의 全貌를 밝히기 위해서는 새로운 조명을 필요로 하는 구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며, 그중 긴요한 몇 군데 빛을 비추는 것을 이 논문의 목표로 삼는다.

가장 중요한 일은 리치의 행적 파악이다. 앞에서 소개한 G DunnV Cronin의 책들은 리치의 보고서 <中國誌>를 무비판적으로 편집한 것이어서 주관적 서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中國誌>는 리치가 예수회 상급자들에게 보낸 보고서였기 때문에 서술방법과 방향에 얼마간의 편향성이 없을 수 없다. 이 편향성을 밝히고 바로잡는 사료비판 없이는 이 자료의 가치를 제대로 살려낼 수 없다. 그러나 세부사항의 대부분에 관해 대조할 만한 다른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는 자료의 내부적 일관성을 따지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보다 치밀한 서술을 J Spence의 책에서 볼 수 있는데, 저자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몇몇 측면에만 단편적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전체 모습을 살피는 데는 아쉬운 점이 많다. 이 논문 제1장에서는 <中國誌>의 전체 내용 가운데 선교노선과 관계되는 측면들을 정리해서 리치의 행적에 맞추어 단계적으로 제시한다.

다음 할 일은 리치의 중국 인식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의 선교노선을 형성한 두 개의 축이 그의 문화적 배경과 중국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J GernetJ Spence의 연구가 문화적 배경에 큰 비중을 둔 반면, 중국 인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이것은 서양인 연구자들이 당분간 피하기 어려운 경향일 것이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 논문 제2장에서는 <中國誌>와 리치의 書信, 그리고 몇 가지 중국어 저술에 비쳐진 리치의 중국 인식을 파악하는 데 힘을 쏟는다. 특히 선교노선의 배경이 될 만한 문화, 사상, 종교 등의 요소에 초점을 모은다.

다음 제3장에서는 리치의 선교노선을 개관한다. 그 이론적 핵심을 補儒易佛論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儒家사상에 대해 어떤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儒家와의 결합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神論과 윤리관을 전개했는지를 그의 저서 <天主實義>를 중심으로 살핀다. 이것은 Gernet의 연구에서도 상당히 세밀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지만, 이 논문에서는 앞의 두 장에서 밝힌 바 리치의 중국 인식이 단계적으로 진전되는 과정에 맞추어서 그 실제적 의미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리치의 과학활동을 선교노선의 기본적인 한 요소로 논한다. 그의 과학활동을 선교의 전술적 방편으로 통상 이해해 온 종래의 관점을 넘어, 선교노선의 한 핵심 요소로 그 능동적 의미를 추구함으로써 선교노선 전체 모습을 확충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리치의 선교노선이 그 주변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고찰한다. 그 선교노선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리치 자신의 기록과 날줄과 씨줄처럼 어울려 선교노선의 실제 위치를 확인하는 좌표계를 만들려는 것이다. 리치의 지도 아래 활동하다가 그 뒤를 이어받은 선교사들, 그리고 영향력이 강했던 몇몇 입교자들의 입장을 살펴보고, 특히 리치의 과학활동이 <崇禎曆書> 사업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더듬어본다.

끝으로는 리치의 장례와 매장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 업적의 윤곽을 개관해 본다.

 

이 연구의 기본이 되는 1차 자료는 리치의 <中國誌><天主實義>. 리치가 유럽어와 중국어로 남긴 대표적 저술로 손꼽히는 것들이다. <中國誌>는 리치의 말년에(1608년 이후) 예수회 본부에 보고하기 위해 중국 사정과 그곳에서 예수회의 활동연혁을 정리한 것이고, <天主實義>는 기독교 신앙의 개략을 중국 지식층에게 알려주기 위해 1590년대 초부터 작성한 것을 1603년에 출판한 것이다.

<中國誌>가 처음 공개된 것은 트리고(Nicolas Trigault 金尼閣, 1577-1628)의 손을 통해서였다. 트리고는 1610년 말 중국에 도착하여 南京, 杭州, 北京 등지에 몇 달씩 체류한 후, 1613년 초에 중국선교단의 사절로서 유럽으로 향했다. 중국 선교를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의 모집, 중국선교단의 위상을 관구로 승격시키기 위한 교섭, 그리고 마테오 리치 보고서의 유럽 전달 등이 그 임무 가운데 중요한 것들이었다.

트리고가 넘겨받은 리치의 보고서는 거의 완성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다섯 권 가운데 제1권은 중국의 제반 문물에 대한 박물지적인 해설이고, 그 뒤의 네 권은 1550년 경 사비에르의 중국 진입 시도에서 시작해서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 연혁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것이었다. 리치는 이 보고서를 이탈리아어로 작성해 놓았는데, 이 보고서가 특정한 형식에 맞추는 것이 아니고 리치가 바쁜 중에 쉽고 빠르게 작성하기 위해 라틴어를 쓰지 않고 익숙한 말을 쓴 것이다. 1권 제1장에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리치의 입장이 적혀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키워진 거대한 사업이나 위대한 시도의 시작 부분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하는 것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일이 어째서 일어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얻은 결론은, 아무리 큰일이라도 그 처음에는 아주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나중에 중요한 일이 되리라고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초창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당시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도 않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큰 노력을 쏟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업의 초기에는 어려운 고비가 많이 있기 마련이니, 일 자체를 성사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당사자로서는 기록을 남기는 데 쓸 시간과 정력도 충분하지 못했을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런 기록을 남기려는 것은 오랫동안 문호를 봉쇄하고 있던 중국의 거대한 영역에 우리 가 진입한 경위, 그리고 이 고귀한 민족으로부터 처음으로 거둬들인 기독교의 과일을 망각의 심연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 뿌리는 福音의 씨앗이 훌륭한 수확으로 장차 거두어지게 될 경우, 이 훌륭한 민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하느님을 위해 지난 여러 해 동안 뛰어난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후세의 신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이 작업의 또 하나 목적이다. 만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판단에 따라 그런 수확이 거두어지지 않는 경우에라도 우리 예수회의 미약한 힘이 不信의 두터운 그림자를 거두기 위해 어떻게 쓰였는지, 우리 會士들이 어떤 열정과 정성을 가지고 이 새로운 땅의 개간에 나섰는지를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영혼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해주는 데 전력을 다하는 이 사업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사업의 이런 성격을 생각할 때, 우리는 화려한 자랑보다는 사실의 묘사를 통해 독자의 이해에 공헌하려 한다. 이 보고서로 인해 우리의 연례보고서나 동료들의 私信들의 가치가 손상되지는 않을 것이니, 이런 자료들은 당연히 진실성과 권위에 입각한 것들이며, 서로 상충되는 경우에만 더 이상의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나는 이런 종류의 보고서에서 모든 세부사항을 묘사하거나 모든 주제를 망라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니, 기록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다른 일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중국과 유럽은 그 풍속과 관습의 차이가 지리적인 거리에 못지않게 현격한 때문에 유럽인들을 위한 이 글을 씀에 있어서는 중국에서의 우리들의 경험을 서술하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 나라의 위치와 그 풍속, 법률, 기타 제 측면을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서술의 고비마다 불가결한 해설로 독자들이 끌려 다니는 따분한 노릇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다. 취급하는 범위를 정하는 데는 우리의 풍속이나 관습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제한하도록 한다. 이런 주제들에 대해 유럽에 이미 퍼져 있는 출판물들이 있지만, 같은 주제에 대해 우리들의 기록을 읽는 것을 지루하게 생각할 독자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곳 중국에서 30년 가까이 살아 왔고, 중요한 지역들을 여행해 왔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중국의 귀족들, 고위관리들, 그리고 일류 지식인들과 교분을 나누며 지내 왔다. 우리는 중국어로 말하고 중국의 풍속과 법률을 공부해 왔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중국의 학문을 연구하는 데 밤낮으로 애써 왔다. 이런 장점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나라에 들어와 본 적이 없는 필자들로서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목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傳聞에 의해, 스스로의 신빙성이 없이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우리는 이런 주제들을 첫 권의 몇 장 안에 묶어 놓았지만, 하나하나 주제들을 놓고 그 상대적인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그 모두를 하나하나의 책으로 다루어야 마땅할 것이다.”[9]

[9] <中國誌> 3-4

 

트리고는 로마로 여행하는 배 위에서부터 리치 보고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해서 1615년에 아우구스부르그에서 처음으로 출판했다. 이 출판은 유럽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아서 라틴어로만도 1616, 1617, 1623, 1648년에 거듭 간행되었고, 다른 유럽어들로 번역되어서 1616, 1617, 1618년에 프랑스어판, 1617년에 독일어판, 1621년에 스페인어판, 1625년에 영어축역판이 나왔다. 이탈리어판도 1621년에 나왔는데, 이것은 트리고의 라틴어판을 도로 번역해 온 것이었다. 이처럼 트리고 판 리치 보고서가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까닭은 당시 유럽인들이 새로운 의 원천으로서 동양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데 비해 중국에 관한 믿을만한 자료가 많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트리고가 리치의 보고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얼만한 변화를 집어넣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는데, 1909년 로마의 예수회 書庫에서 Della entrata della Compagnia di Giesu e Christianita nella Cina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리치의 자필 원고가 발견된 덕분에 이 논란이 정리되었다. 이 원고는 Tacchi Venturi에 의해 Opere storiche del P. Matteo Ricci라는 제목으로 1911-13년에 출판되었으나(리치의 고향인 마체라타에서) 편집자가 중국에 대해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고증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같은 원고가 중국학 전문가 Pasquale d'Elia의 손을 거쳐 1942-49년에 Fonti Ricciane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이 논문에서 참조한 것은 불문판과 영문판, 중문판이다. 불문판은 1617년의 불역판 Histoire de l'expedition chretienne au royaume de Chine를 토대로 1978년에 다시 정리해 낸 것이다.(J Shih 서문, J Dehergne 주석) 영문판은 트리고 라틴어판과 불역판으로부터 L Gallagher가 번역한 China in the Sixteen Century: The Journal of Mattew Riccl(1953)이다. 중문판은 d'Elia 판과 영문판으로부터 王玉川劉俊餘가 번역한 <利瑪竇中國傳敎史>(1986)이다.

이 세 판본 가운데 학술적으로 가장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은 불문판이다. 중문판은 d'Elia 판을 저본의 하나로 했기 때문에 트리고의 손을 거치지 않은 리치의 원래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편집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오역이 많아서 신뢰도가 떨어졌다. 실제 작업에 있어서는 영문판과 중문판을 먼저 읽은 다음 불문판을 대조했으며, 중문판과 다른 판본들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는 몇 곳을 d'Elia 판으로 확인했다. 논문 속에서 둘 이상의 판본을 통해 확인한 내용을 인용할 때는 “<中國誌>”로 표시하고 페이지는 영문판의 것을 나타낸다.

 

리치는 1590년대 초, 韶州에 있을 때 중국 고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중국 지식인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새로운 형태의 교리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596년 초고를 완성해서 그 라틴어 번역을 마카오에 있던 일본 주교 체르케이라에게 보내 검열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원고는 1601년까지 계속해서 보완, 수정되었다.

루지에리와 리치가 중국에 들어온 후 처음 만든 인쇄물은 十誡命을 번역한 것이었고,[10] 뒤이어 <天主實錄>이라는 제목의 교리서를 만들었다.[11] 후에 南昌에 있을 때 새로운 교리서를 만들고는 그 전의 판은 부숴서 내버렸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책자를 보면 스스로 서방으로부터 온 승려라 칭하고 불교와 통하는 점을 내세우는 한편 儒家사상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고 하니[12], 중국 사정을 아직 잘 모르는 상태에서 승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을 반영하는 것 같다.

[10] <中國誌> 155.

[11] <中國誌> 157-8, Gernet, 전게서: 8.

[12] <天主實義 영역본> “introduction": 12-13.

1589肇慶에서 韶州로 옮길 때 남화사의 승려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일,[13] 韶州에서 입교자들의 불상파괴를 사주 내지 방조한 일[14] 등을 보면 아마 肇慶을 떠날 때부터 불교를 적대하고 儒家에 접근하려는 방침을 세워놓은 것 같다. 이 방침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은 1595韶州에서 南昌으로 옮길 때였다. 1593년에 이미 승복을 유삼으로 바꿔 입을 것을 순찰사 발리냐노에게 허락받고 있었으나[15] 광동성 안에서는 졸연히 바꾸기기 쉽지 않았던 것을 南昌으로 옮기면서부터 뜻대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16]

[13] <中國誌> 222-4.

[14] <中國誌> 247-8.

[15] <中國誌> 258-9.

[16] <中國誌> 260: “유감스럽게도 광동성의 영역 안에서는 이라는 지긋지긋한 딱지를 신부들이 떼어버릴 수가 없었다. 다른 성에서는 도착하면서부터 학인계층과 같은 신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하고도 유용한 일이었다.”

南昌에 도착한 뒤 리치 신부는 교리문답서를 수정했는데, 학식 있는 사람이 지은 것처럼 보이도록 보충도 하고 배열도 고쳐서 했다고 하고, “새 판이 만들어진 후 그 전의 판은 부숴서 내다버렸다고 한 것으로 보면,[17] 이때 완성된 <天主實錄> 원고를 형식적으로는 체르케이라 주교의 검열을 기다리면서, 실제로는 판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검열을 위해 마카오로 보냈던 원고는 1598년에야 수정할 곳이 지적되어 리치에게 발송되었으나, 리치가 이 수정 원고를 받은 것은 1601년 북경에 도착한 후였다.[18]

[17] <中國誌> 287.

[18] <天主實義 영역본> “introduction", 15.

리치의 서문을 쓴 날짜로 표시된 1603822(七月 旣望)까지는 초판 발행을 위한 원고가 확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19] 그 해 말에 나온 초판은 <天學實義>라는 제목이었는데, 그 후 많은 판본은 모두 <天主實義>라는 제목으로 나왔다.[20] 이 책이 나오자 많은 중국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어서, 오랫동안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문헌이 되었다. 전례논쟁의 결과 1704上帝라는 말이 신의 호칭으로 사용이 금지된 뒤에는 그 말만 바꿔서 20세기 초까지 선교의 목적으로 계속해서 중판을 거듭했다.

[19] 그 후에도 字句 수정은 있었음이 <天主實義 영역본> “introduction": 18-19에 밝혀져 있다.

[20] Gernet, 8. 여러 판본에 대한 서지학적 연구는 方豪, 天主實義之改竄(<方豪六十自定稿>, 臺北, 1969)<天主實義 영역본> “introduction"에 정리되어 있다.

이 연구에서는 아세아문화사 영인본(1976)<天學初函> 판을 준거로 했는데, 연구자들에게 제일 보편적으로 활용되어 온 판이다. 다만, 인쇄상태가 좋지 않아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곳이 많아서 영역본[21]倂記된 원문을 함께 참조했다. 영역본의 원문은 현존하는 거의 모든 판본을 검토한 결과이기 때문에 학계의 기대를 모은 작품이고, 근래 구미 학자들의 대부분이 이용하는 판본으로 되었으나 실제로는 誤字가 많이 있어서 다른 판본과의 대조 없이 단독으로 사용할 수 없다. 영인본과 영역본 양쪽을 가지고도 원문을 판별하기 어려울 경우에 대비하여 Nazareth Retreat House 조판본(홍콩, 1939)을 준비하였으나 실제로 쓸 필요는 없었다. 이 조판본에는 上帝등의 용어들이 규제되어 있다.

[21] M Ricci, The True Meaning of the Lord of Heaven (Eng. tr., with Introduction and Notes, by D Lancaster and P Hu, ed. by E Malatesta, St Louis and Taipei, 1985). 이 논문의 각주에서는 <天主實義 영역본>으로 표시함.

내용의 위치 표시는 歐美 연구자들 사이에 관행이 되어 가고 있는 방법에 따라 영역본의 문단 표시를 이용했다. 이 방법은 <天主實義>의 경우에 아주 유용한 것인데, 판본이 워낙 여러 가지라서 面數로 표시해서는 차질이 있기 쉽고, 篇數만으로 표시해서는 위치가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문단의 설정이 자의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中士西士 사이에 문답이 오고간 次數에 따라 표시하는 것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원본의 각 에 포함되는 문단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 1-15

1: 16-64

2: 65-116

3: 117-169

4: 170-257

5: 258-320

6: 321-420

7: 421-520

8: 521-596

 

<天主實義> 외에 리치가 작성한 중문 자료로 <畸人十篇> <辯學遺牘> <二十五言> <交友論> 등이 있는데, 모두 <天學初函> 영인본에 수록되어 있고 같은 책에 붙여진 금장태의 해제에 간략하게나마 설명이 되어 있으므로[22] 여기서는 따로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이 책들은 <四庫全書總目>에도 提要가 되어 있으며,[23] <한국가톨릭대사전>(서울, 1985) 등에도 설명이 되어 있다. 또 하나 리치의 저술 <西國記法><天主敎東傳文獻>(臺北, 1965)에 수록되어 있다.

[22] 李之藻 () <天學初函>(서울 아세아문화사, 1976) -ⅹⅲ.

[23] <四庫全書總目>(臺北, 中華書局, 1964) 125.

또 한 가지 리치 연구에 빠뜨릴 수 없는 자료는 그의 편지들이다. 그 편지들이 출판되어 있는 것은 Tacchi VenturiFonti Ricciane 안에 원어인 이탈리아어로 수록된 것과 이것을 중국어로 번역한 <利瑪竇書信集>[24]이 있다. 이 연구에는 <書信集>을 이용했는데, 번역과 편집에 미심쩍은 것이 있어서 다른 판과 대조해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 곳이 더러 있었다. 다만, 편지 내용 가운데 참고가치가 큰 중요한 내용은 대부분 <中國誌>에 중복되어 있어서 별 문제가 없었고, 말년의 편지들(예를 들어 16092월에 파시오와 알바레스에게 보낸 편지들)만이 <書信集>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24] 2, 臺中, 1986, 이하 ‘<書信集>’으로 표시함.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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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5.24 09:08

    마테오 리치를 읽기 시작합니다. 읽고 싶었는 데,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 2022.05.28 18:31 신고

    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