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전라북도 장수읍에 들렀을 때 읍내를 산책하는 중 산뜻한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태극기 아래 적힌 문구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들어왔다. “대한민국이 하나이듯 우리의 역사도 하나입니다.” 조금 작은 글씨의 옆 문구로 무심코 눈길을 옮겼을 때 그 지당한 말씀을 걸어놓은 뜻이 뭔지 비로소 깨달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촉구!”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의 역사가 하나”라는 말에 나는 거부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역사가 하나라 해서 그 교과서를 국정으로 통일해야 하는 건가?
이 세상도 하나다. 수십억 사람이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사람마다 생각에 차이가 있지만, 생각이 다르다 해서 사는 세상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는데, 그 방식이 사회질서에 해롭거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경우 규제를 받는다. 생각 자체는 규제를 받지 않는다. 그것이 사상의 자유다.
표현은 일면으로는 행동이지만 또 일면으로는 사상이다. 사람의 생각은 전달과 교환 없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표현에는 제약이 전혀 없을 수 없지만, 그 제약을 최소화하는 것이 민주정치의 과제다.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고, 그래야 주권자로서 책임 있는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세상을 보는 중요한 창문이다. 역사를 이해하는 방향에 따라 세상을 보는 시각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위가 절대적이던 시절에 국민의 역사관을 통일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것은 모든 국민이 역사를 같은 방향으로 이해해야 국민의 노력을 같은 방향으로 묶어(그리고 다른 방향의 노력을 억압해서) 국가 간 경쟁에서 유리한 자세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향이 파시즘을 가져왔다. 국가권력이 원하는 방향을 벗어난 역사관과 세계관을 배제함으로써 고도의 ‘국민통합’을 이룬 것이 파시즘이었다. 파시즘은 사상 통제를 통해 능률을 추구했지만, 자유로운 생각을 펼치려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름으로써 파국을 불러왔다. 자국 입장만을 내세우며 타국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파시즘으로 인해 세계대전과 인종학살 사태를 겪은 후 사상의 자유가 강조되는 시대를 맞았다.
근대역사학은 국민국가시대에서 제국주의시대에 걸쳐 세계인의 화합보다는 국가-민족 간의 대립에 더 많이 이용되었다. 마거릿 맥밀란의 <역사사용설명서>(권민 옮김, 공존 펴냄)의 원제는 “역사의 이용과 악용(The Uses and Abuses of History)”이지만, 실제 내용은 이용보다 악용에 치중된 책이다.
저자는 20세기 영국사 연구자면서 국제관계 전문가로도 활동해 온 사람이다. 캐나다인이면서 영국에서도 많이 활동해 온 것은(2007년 이후 옥스퍼드대 세인트앤토니스 칼리지 학장으로 있다.) 그 어머니가 영국 명문가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이드 조지 수상의 외손녀인 어머니가 캐나다에 여행 중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캐나다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제1장 “역사에 열광하는 시대”에서 저자는 우선 역사가 정치적 무기로 쉽게 활용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과거에 대한 열광에는 분명히 시장의 힘이나 정부 정책 외의 요인이 있다. 역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까지 다양한 요구에 응답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거에 대한 관심은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생물학적 결과다. 다른 생명체처럼 인간에게도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에 자기 이야기가 위치한다.
과거에 대한 관심은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급변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과도 관계있는 듯하다. 이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장소와의 관계든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든 이전에 당연하게 여긴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17쪽)
앞 문단에서 역사에 대한 관심의 일반적 근거를 지적한 다음 뒤 문단에서는 근대세계에서 특히 그 관심이 강렬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들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처한 조건이 너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나기 쉽고, 그에 대응해서 과거, 즉 자기 조건의 배경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병리적 현상으로도 나타난다고 한다.
하버드의대 산하의 매클린 병원 생물심리연구소의 연구자들은 최근에 ‘억압된 기억 증후군’에 대해 연구했다. 그들의 관심은 20세기 후반에 이 증상이 갑자기 출현한 것에서 촉발됐다. 이 증후군이 인간두뇌의 고유한 증상이라면 분명히 역사 속에 줄곧 발생 증거가 남았을 것이다. 그들은 19세기 문헌에서 예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현상금을 내걸었는데도 1800년 이전의 소설이나 비소설에서는 예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증상은 선천적인 신경 기능이 아니라 19세기에 기원한 ‘문화특이적 증후군이다.”(71쪽)
조상 대대로 살아가는 장소와 살아가는 방식이 크게 변하지 않던 전통시대에 비해 일생 동안 대다수 사람이 주소와 직장을 몇 번씩 바꿔야 하는 근대 상황에서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양은 늘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억압된 기억 증후군’ 같은 증세는 자신의 과거, 즉 정체성에 관련된 강박이 근대에 나타난 사실을 알려준다.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강화되는 상황을 맥밀런은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는 ‘상상의 공동체’를 강요하는 수단이다. 예를 들면 민족주의자들은 자기 민족이 “태곳적”부터 아득한 곳에서 늘 존재해왔다고 입맛대로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떤 집단을 조사해봐도 정체성은 과정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집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내적 발전, 종교적 각성, 외적 압력에 따라 정체성을 규정하고 다시 규정한다. 동성애자들이 많은 사회에서 그래왔고 아직도 그렇듯이, 누구든 억압받고 고통을 당하면 그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의 일부가 된다.(89쪽)
‘상상의 공동체’가 나왔으니 ‘발명된 전통’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과거가 현재를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만들어내는 전도된 현상이 전통의 발명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표현처럼, 역설적이게도 “민족주의는 현대의 것이지만 자기 스스로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민족주의를 먹여살리고 있는 역사는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이용한다. 그것들 중에는 대개 사실인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민족이 오랜 세월 온전하게 존재해왔다고 확인시키거나 민족이 앞으로도 존속하리라는 희망을 심어주는 경향이 있다.(126쪽)
그래서 그가 인용하는 러시아인들의 재미있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과거를 지닌 나라에 살고 있다.(193쪽)
러시아인들에게는 실감나는 말일 것이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난 11월 7일은 소련시대 국경일이었다. 옐친은 이 기념일을 없애고 싶었지만, 공휴일을 없애 서민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만 ‘화합과 화해의 날’로 바꿨다. 푸틴은 2005년 그 날짜를 당겨 11월 4일을 ‘국민통합일’로 지정했다. 현재의 정치상황이 과거의 기념일을 바꾼 것이다. ‘건국절’ 논란을 보면, 그리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책동을 보면 우리에게도 과거는 더욱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혹자는 역사를 분명히 하기 위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왜곡된 역사보다 더 나쁜 것이 ‘가짜 역사’라고 못 박는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 만연한 현실 외면 풍조가 파시즘의 득세와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온 일을 사례로 제시한다.
1918년부터 계속 독일군의 패배의 책임을 피하려고 “믿는 도끼에 찍힌 발등”이라는 허구를 열심히 조장했다. 즉 독일은 전쟁터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고국에 있는 배신자들의 활동 때문에 패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유대인 가운데 하나이거나 셋 모두일 수 있었다.
전쟁 피로증 등을 이유로 연합국이 독일을 침략하거나 점령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자 독일인들 사이에서 이 허구가 더욱 신뢰를 얻게 됐다. 독일을 패전국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독일이 항복한 상황 때문에 더욱 강해졌다. (...)
어쨌든 독일은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하려고,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전혀 다른 독일이었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망명했고 군주제는 폐지됐다. 그리하여 독일은 이제 공화국이 됐는데, 왜 과거 정권이 저지를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
독일 안에서 과거에 대한 이런 관점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연합국에 대한 깊은 원망과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를 끊어버리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 기름을 부었다. 히틀러는 불만덩어리 참전 용사와 극우파, 1920년대 초에 뮌헨의 맥주집을 떠돌던 사람들 사이에서 지지를 모으기 시작하면서 이런 “믿는 도끼에 찍힌 발등”과 불공평한 평화 같은 주제들을 맹렬히 비판했다.(146-148쪽)
유럽에서 근대국가 발생과 나란히 근대역사학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역사학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에서 랑케(1795-1886)가 역사학의 표준을 세우고 있던 시절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한 독일은 알자스와 로렌을 탈취하려는 야욕을 역사적 근거로 분식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요구에 좀더 무난한 새 옷을 입혀서 내놓았다. 과거에 로렌 지방의 일부와 알자스는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으므로 두 지역의 역사 가운데 상당 기간은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다. 루이 14세가 알자스를, 루이 15세가 로렌 지방을 점령하긴 했지만, 이제 그곳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낼 때가 됐다. 주민들 다수가 독일어를 못하거나 프랑스에 그대로 속하고 싶어해도 상관없었다. 독일의 주도적인 역사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는 독일 민족은, 비통하게도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였던 “이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최선책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의지에 반하는 그들의 진정한 자아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152쪽)
신성로마제국의 계승자를 굳이 꼽는다면 오스트리아제국이었다. 그런데 프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전쟁(1870-71)에 앞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해 놓았고(1866), 파리를 포위한 상태로 베르사유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했다(1871). 새로 태어난 독일제국이 신성로마제국의 옛 영토의 회복을 꾀한다는 이유로 알자스-로렌의 할양을 요구한 것이었다. 두 지역 주민의 이름은 독일식이 많았지만 모두 프랑스인이 되어 프랑스어를 쓰고 있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주민들이 원치 않더라도 독일인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9년이던가, 전국역사학대회의 공동주제를 “통일시대의 역사학과 역사교육”으로 했을 때 한 발표자가 뜻밖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독일 중등교육에서 독일사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데, 그것이 통일을 쉽게 만든 한 가지 조건으로 지목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뜻밖으로 느껴진 이야기지만, 이제 맥밀런의 책을 보니 당연한 이야기다. 역사는 하나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이것이 갈등의 치유보다는 격화에 쉽게 이용된다. 한 사회가 하나의 시각에만 매달릴 경우, 내부의 갈등도 문제거니와 외부와의 갈등을 억제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다.
과거를 샅샅이 뒤져서 불만거리를 찾아내기란 너무나 쉽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과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 제1차 세계대전 뒤에 유고슬라비아라는 새로운 국가가 섰을 때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완전히 다른 역사를 기억했다. 세르비아인들은 자신들이 남슬라브계 근연 민족을 해방시켰다고 생각한 반면,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이 지배하는 나라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가 자기네 정부의 공정한 주권을 박탈당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기억했다.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주의자들은 1763년 영국에게 정복당한 바람에 250년 동안의 굴욕이 계속됐다고 과거를 묘사했다. 그들은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국계 캐나다인이 서로 협조하고 친분을 나눈 많은 사례를 폄하하거나 무시해버린다.(103-104쪽)
원제가 <역사의 이용과 악용>이지만 내용은 <역사사용설명서>라기보다 <역사악용설명서>가 더 어울릴 정도로 악용 사례에 치우쳐 있다. ‘오용(misuse)’ 아닌 ‘악용(abuse)’이란 말을 쓴 데서도 부정적 관점이 강하게 나타난다. 마지막 장(제8장) “길잡이로서의 역사”에 가서야 ‘이용’ 측면으로 주의를 돌린다. 저자는 역사가 우리를 현명하게 해 줄 수 있지만, 명쾌한 해답을 역사에서 기대하는 데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역사는 우리가 현명해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역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넌지시 알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선명한 청사진 따위는 역사 속에 없다. 각각의 역사적 사건은 여러 요인, 사람, 연대가 얽히고설킨 유일무이한 집합체다. (...)
하지만 우리가 이미 내린 결정을 굳건히 하는 교훈들만 찾다가는 곤경에 빠질 수 있다.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경고가 온데사방에서 들려온 1941년 5월에 스탈린은 그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
그러나 불과 한 달 뒤 독일군은 국경선 후방의 방어 진지나 지키라는 명령을 들은 소련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스탈린은 마음만 있었다면 과거에서 다른 교훈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동쪽으로 움직이겠다는 장기 목표도 전혀 숨기지 않았다.(225-226)쪽)
역사가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를 늘려주기 때문이다. 타인의 두려움과 희망, 그리고 행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결정하는 정책이 어떤 실패를 가져오는지, 맥나마라(베트남전 당시 미 국무장관)의 회고를 통해 보여준다.
<회고록>에서 그[맥나마라]는 미래의 지도자들이 명심하기를 바라는 몇 가지 교훈을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남베트남의 국민과 지도자들을 우리의 경험선상에서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싸울 각오를 읽어냈다.”
마찬가지로 미국은 북베트남의 각오도 잘못 이해했다. 재삼재사 미국은 북베트남에 가하는 고통을 키우면 그곳 지도자들이 비용 편익 분석을 하여 항복할 시간이 됐다고 결정할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7년간이나 싸워 프랑스를 물리친 사람들이었다. 맥나마라는 비통해하며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적과 아군 모두에 대한 우리의 오판에서, 그 지역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와 정치, 그리고 그곳 지도자들의 성격과 습관에 대한 우리의 심각한 무지가 드러났다.”(211-212쪽)
요컨대 역사의 가르침은 명확한 단답형(單答型)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이다. 역사에서 명쾌한 해답을 얻으려는 것은 컴퓨터에 입력을 제대로 하지 않고 정확한 출력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맥락과 예를 제시해주기 때문에 현재 세계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역사는 질문을 체계적으로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질문이 신통치 않으면 일관성 있게 생각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역사를 알면 그런 질문에 답하는 데 어떤 종류의 정보가 필요할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또 그런 정보를 평가하는 방법은 경험으로 알 수 있다. (...)
역사는 우리가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한 가지 관점이나 한 가지 행동 방침밖에 없다는 생각에 경종을 울리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대안을 생각하고 이의를 제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도자들이 “역사가 우리를 선도한다.” 또는 “우리가 옳았음을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고 해서 현혹돼서는 안 된다. (...) 국민들은 권위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항상 더 잘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245-246쪽)
책을 덮으며 생각하니, 저자가 제시하는 역사의 ‘악용’ 사례가 거의 모두 전쟁과 연관된 것이다. 전쟁을 둘러싸고는 정책결정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가 분명히 드러나기 쉽기 때문에 전쟁 이야기를 많이 한 것이겠지, 넘어가려다 보니 좀 더 생각할 점이 있다.
전쟁이 무르익어 갈 때나 진행되고 있을 때의 사회 분위기는 평시와 다른 것이 보통이다. 갈등을 격화시키려는 사회 전체 또는 일부의 의지, 즉 역사를 악용하려는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전쟁과 관련된 사례를 통해 살핀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의 ‘악용’ 추세를 과도하게 부각시킬 수 있다. 책 제목에 맞는 방향으로 역사-역사학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려면 평시의 역사 ‘이용’ 사례를 통해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하기야 근대 2백년간 세계정세를 주도하는 나라들은 전쟁 없이 지낼 때가 별로 없었고 전쟁에 관한 정책이 세계의 진로 결정에 중요한 몫을 맡아 온 만큼, 전쟁 상황에 고찰을 집중한 것이 큰 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2백년보다 평화로운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고찰의 범위를 확장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투쟁의 시대’에 태어난 ‘근대역사학’이 투쟁의 무기로 ‘이용’된 것이 저자에게는 ‘악용’으로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평화의 가치를 존중하는 보수주의자다. 평화를 깨트리기 위해 역사를 이용하는 정치가들이 저자에게는 역사를 ‘악용’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오용’ 아닌 ‘악용’이란 말을 쓴 이유도 이해된다. 2000년대 초 미국 부시 정권은 철저한 악용자로 보였을 것이다. 부시의 보좌관 하나를 이름도 밝히지 않고 등장시킨 한 일화에서는 저자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다.
[맥나마라의 <회고록> 인용에 이어] 그런데 근래에 백악관의 부시 행정부가 배운 교훈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2002년에 어느 수석 보좌관은 언론인 론 서스카인드에게 “당신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며 경멸 투로 말했다.
“세계가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은 더 이상 그렇지가 않아요. 오늘날 우리는 제국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움직이면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거요. 당신이 그 현실을 직시하는 동안, 물론 알아서 잘 하겠지만, 우리는 다시 움직여서 다른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거고, 당신은 또 그 현실을 직시하겠죠. 세상만사는 앞으로도 그렇게 돌아갈 거요. 우리가 바로 역사의 배우[‘actor’의 번역일 것 같은데, ‘행위자’라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할 듯]란 말이요. (...) 그리고 당신, 당신네 모두에게는 그저 우리가 하는 것을 직시하는 일밖에 없겠죠.”(212-213쪽)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역사를 들먹였을 것이다. 과거를 샅샅이 뒤지면 자기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사례를 뭐든 찾아낼 수 있다. 맥락과 동떨어진 사례를 근거라고 내놓을 때, 역사로부터 쉬운 대답을 바라는 대중은 쉽게 현혹된다. 갈등의 격화를 위한 대중 동원에 역사를 이용(악용)하는 추세는 근대역사학의 선천적 질환일지도 모른다. 근대사회에서 역사학자의 직장이 늘어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역사가 갈등 증폭에 악용되는 추세를 보며 나는 이렇게 쓴 일이 있다.
근대역사학은 종전보다 정치적 무기로서의 기능을 더욱 강화했다. 민족과 문명들 사이의 접촉이 늘어난 상황 때문이었다. 국민국가들은 국민에게 민족의 영광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역사’를 경쟁적으로 개발했고, 이 경쟁에 ‘과학성’이 동원되었다. 그래서 근대역사학의 유사과학(pseudo-science)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 성격을 더욱 강화한 것이 계급투쟁을 제창한 유물사관이었다.
20세기의 한국사 서술은 일본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출발했다. 과학성을 위장한 식민사관이 1945년까지 학계를 지배한 것은 물론이고, 이에 반발하는 민족사관 역시 이 시대배경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한국의 영광’을 외치는 역사 담론 중에는 과거 ‘일본의 영광’을 부르짖던 제국사관의 틀을 안팎만 뒤집어 그대로 쓰는 것이 많다. (...)
민족 정체성에 대한 자신감을 새로운 차원에서 표출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우선 계량적 지표에 너무 얽매이던 상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역사가 길어야만 훌륭한 민족인가? ‘세계 최초’가 많아야만 뛰어난 민족인가? 내가 잘나기 위해 남을 깎아내려야 하는 계량적 사고는 사이비 과학성의 등에 업혀 근대역사학을 삭막한 싸움터로 만들어왔다.(<밖에서 본 한국사> 11-12쪽)
맥밀런은 역사 공부를 자동차의 백미러에 비유하면서 “후사경으로 뒤를 돌아보다가 도랑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역사는 우리가 어디서 왔고 길 위에 다른 누가 있는지 아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역사학의 가치를 긍정한다.(208쪽) 동아시아문명에서 현실을 비쳐보는 거울로 역사를 본 것과 같은 뜻이다.
거울은 하나의 도구다. 도구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 선한 뜻으로 쓰면 선용이 되고 악한 뜻으로 쓰면 악용이 되는 것이다. 평화를 해치고 다수 인민에게 고통을 끼치는 정책을 뒷받침하는 데 역사가 이용되는 경우를 맥밀런이 ‘악용’의 사례로 제시하는 것은 그의 가치관에 따른 것이다. 세계평화보다 미국의 패권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사람에게는 사담 후세인을 히틀러의 환생으로 보고 전쟁을 일으켜 놓는 것이 역사를 잘 이용하는 길이다.
맥밀런은 자기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선량한 보수주의자가 근현대 세계사의 주류였고 역사를 전쟁에 악용하는 자들을 ‘악인’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순진한 생각이다. 그가 악인으로 여기는 자들이 근현대사의 주류였다. 2000년 5월의 전국역사학대회 공동주제 “역사학과 지식정보사회”에 대한 발표에서 나는 근대역사학이 하나의 ‘산업’ 형태로 발전한 사실을 지적했다. ‘역사산업’의 발전은 용도가 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고, 전쟁을 쉽게 많이 벌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용도의 하나였다. 히틀러에 대한 스탈린의 ‘오판’을 지적한 대목에 뜬금없이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소련 같은 정권과 제국이 과연 살아남았어야 했을까?” 덧붙인 말에서(203쪽) 저자 자신에게 냉전 논리가 어떻게 체화되어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자본주의 이후”는 “근대 이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다. 몇 달 전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을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6193) 한 차례 올리면서 근대역사학의 성격을 반성하는 책들도 소개할 필요를 생각하게 되었다.
과학의 진실성과 진보의 필연성에 대한 카의 믿음은 아직도 주류 역사학의 중요한 한 가지 지표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믿음은 근대적인 믿음이다. 이 믿음을 갖고 역사를 보는 한 근대적 사고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근대적 상황을 벗어나는 길을 살핌에 있어서는 이 믿음으로부터 우선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역사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보조기구와 같은 것이다. 현미경, 망원경, 안경 같은 시각보조기구는 각각의 용도에 따라 사용자의 관찰능력을 증진시켜 준다. 그러나 정해진 용도를 벗어나면 오히려 관찰에 지장을 준다.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면 보조기구를 벗어던지고 맨눈으로 바라보고 지금까지 쓰던 것과 다른 보조기구를 시용해 봐야 한다.
맥밀런은 학문적 권위와 대중적 인기를 함께 누려온 원로 역사학자다. 그런 위치에서 역사의 ‘악용’을 걱정하는 데서 이 ‘악용’이 근대역사학에서 얼마나 일반적인 현상인지 알아볼 수 있다. 쉽고 재미있기 때문에 더욱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활달한 번역도 잘 읽힌다. (위에서 한 군데 번역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지만, 아주 드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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