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황은 <1587>의 제7장에서 이지(李䞇, 卓吾)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이탁오를 공부하는 데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몇 대목을 <중국소설연구회보> 제31호(1997. 9)에 실린 김혜경의 학술번역 "이지 - 자기모순과 갈등의 철학자"에서 옮겨놓는다.

 

 

   1602년 이지는 옥중에서 면도하는 칼로 목을 따 자살했는데, 사후에는 그가 자아를 희생한 것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평론은 의심스러운 바가 자못 적지 않다. 이지의 저작은 당시에는 용납되지 않아 여러 번 관방에 의해 금서조치 되었지만,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은 금지령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중판을 찍어냈다. 이러한 저작들은 비록 그 편폭이 굉장하긴 했지만 역사상에 어떤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낸 것은 아니었다. 이지는 결코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유형의 작가들이 모종의 숭고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길 원하게 되고, 따라서 문장 안에는 자아를 불사르는 데 대한 만족과 쾌감을 표현하기 마련이다. 이런 특징을 이지의 저작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평자들은 이지가 하층 민중의 입장에서 농민을 착취하는 지주 계급을 비판하였다고까지 말하지만, 이런 논조야말로 정말로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1580년 요안지부(姚安知府)의 직무를 떠난 이후로 지주이며 신사(紳士)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활을 지탱해 나갔다. 하지만 이지 자신은 이러한 경제적 도움에 대해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명대 사회는 그가 땀흘리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허용하였지만, 그는 결코 체제에 대해서 아무러한 의혹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만약 어떤 면에서 그가 지주이거나 관료인 친구를 비판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 개인의 성격이나 품행 때문이지 경제적 입장에 관해 거론한 것은 아니었으며,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에게도 똑같은 비판이 적용될 수 있다고 명확한 어조로 지적했다.

 

이지는 유교의 신도였다. 1587년 이전에 그는 유교의 윤리대로 응당 가정에 바쳐야할 일체의 의무를 완성했다. 그 다음해 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는데, 그 해 나이 61세였다. 삭발의 원인은 그가 답답하고 구속감만 느껴지는 생활을 박차고 나와서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희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환경이 진즉에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둔세(遁世)와는 전혀 달랐다. 이성적인 면으로 보거나 사회적 관계로 보거나 출가 후 그의 행동은 사실상 온 나라 문인들의 양심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퇴직 이후 십여 년 동안 이지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저술이었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생전에 판각되어 간행되었는데, 지불원에는 간행된 목판을 쌓아두는 방이 따로 있었다. 저작의 내용은 대단히 방대했다. 유가경전의 해석, 역사적 자료에 대한 고찰, 문학작품에 대한 평론 및 윤리철학에 대한 내용이 모두 망라되었으며, 그 형식은 논문, 잡설, 시가, 서신 등으로 다양했다. 그러나 광범위한 섭렵이 반드시 다방면으로 조예를 갖추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닌 것이다. 그가 서술한 역사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결핍되어 있었고, 또한 체계가 형성된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문장이 사서를 보고 옮겨 적은 것인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견해에 따라 장과 절을 바꾸고 차례를 엮고 배치하여 거기에 약간의 평론을 가한 것뿐이었다. 소설을 접할 때도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작품의 예술적 가치나 창작방식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지는 작품의 주제의식이나 이야기의 구조, 인물묘사, 서술방법 등의 기교에는 전혀 주의하지 않았다. 그는 문학창작의 특질에 대한 탐구를 떠나서 오로지 소설속의 인물이 도덕적으로 고상한가의 여부와 행위의 정당성만을 따지면서, 마치 실존 인물이나 사실을 다루듯이 평론했다. 또 설령 철학적 이론을 천명하는 경우라도 대체로 매우 편면적인 부분만 손을 대서 소품문 비슷한 문장이나 썼을 뿐 계통적인 퇴고를 거친 결구가 근엄한 장편대작을 써내지는 못했다.

 

그의 각양각색의 저작은 결론이 모두 한 군데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독서인의 개인적 이익과 공중에 대한 도덕감은 서로 융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출발한 그의 저작은 마치 각종 악기가 함께 울려 한 곡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듯하다. 공과 사가 충돌할 때 어떤 방법으로 조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 그가 설사 적절한 답안을 찾아내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적어도 문제만큼은 일찌감치 제기해 놓은 상태였다. 독서인들에게 이 문제는 그들의 양심이나 지성의 완정성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아주 절박한 것이었다. 이지 자신의 경력은 그로 하여금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표현도 더 신랄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독자들의 호응을 불러낼 수가 있었다.

 

이지의 역사관은 대부분 전통적인 관점과 부합하고 있다. 예컨대 왕망(王莽)왕위를 찬탈한 도적이라고 확신한다거나, 장각(張角)요망한 도적이라고 질책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치란(治亂)은 거듭해서 순환할 뿐만 아니라 또 ()’()’이 서로 연관된 것이었다. 일대의 어진 임금이 에 치중해 문화를 극치의 상태로 끌어 올렸다면 그것은 벌써 동란의 기초를 열은 것이고, 반대로 난리를 평정하고 창업한 임금은 에만 관심을 두게 되므로 그저 백성들의 질고를 해결할 방법이나 추구할 뿐 문화적 수준은 돌아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문화적 생활수준과 국가의 안전은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관점은 중국역사의 전통적인 산물이면서 관료정치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앙집권적 통치 아래서는 많은 관료가 억만의 농민을 다스리면서 그들을 획일화시키고 단위별로 나누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특수한 성분이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법칙을 창조하는 일이 장려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관 집단은 기술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이미 상실했으며 새로운 역사적 문제에 대처할 능력도 없었다. 사회의 물질문명(곧 이지가 말한 ’)은 앞을 향해 발전해 나가는데 국가의 법률이나 조직기구가 그에 따라 개편되지 않았으므로 혼동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이랄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이지는, 역사의 순환은 피할 수가 없으며 정해진 운명이란 어떤 신비한 역량조차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힘들여서 어떤 새로운 해결방안을 찾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이지의 유심론은 결코 철저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흥망치란은 결코 사람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객관적 진실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심이 따라주지 않았다고 해서 치란조차 치란이 아니라고 우기는 그런 이론은 더욱 인정하지 않았다.

군왕이 일생동안 벌인 사업의 성패는 역사적 순환의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지는 역대 군주를 평론할 때에도 그들에게 시대에 적응할만한 식견과 기백이 있었는가를 살피는 데 치중했다. 이지는 천하라는 큰 책임은 재상이나 대신이 짊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대신들에게서 기대한 것은 그들의 정치적 치적이었지 도덕적인 언사가 아니었다. 뛰어난 재주와 식견을 가진 사람이 백성의 복리를 위한 공헌을 만드는 과정 중에 있다면 명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앞뒤를 돌아보고 손익을 재다 보면 자신의 행동이 구속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욕됨을 참고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사업상의 성공을 이뤄낼 수가 있어야 한다. 작은 절개를 버리고 대국을 바라보는 이런 행동이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려면, 그 전제조건으로서 백성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면 공중도덕은 개인의 도덕과 같을 수 없으므로 목적이 좋으면 수단이 불순해도 상관없다는 맥락으로 연결된다. 이지의 이러한 관점은 유럽의 철학자 마키아벨리(Machiavelli)와 매우 흡사하다.

이지는 역사상에서 재정경제문제에 대해 창조적 의지를 가진 집정자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전국 시대의 이리(李悝), 한대의 상홍양(桑弘羊), 당대의 양염(楊炎) 같은 인물은 존경했지만, 송대의 왕안석(王安石) 만큼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물론 왕안석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의 재주가 포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강하게 하는 방법은 알지도 못하면서 기필코 부강해지려 한다는 평론과 위에서 말한 논점을 서로 연계시킴으로써 이지는 한 명의 탐관오리가 미치는 해악은 작지만 청렴한 관리가 끼치는 해악은 매우 지대할 수 있다는 대담한 결론을 내렸다. 이지는 해서(海瑞)를 존중했지만 그가 전통적인 도덕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영원한 푸른 풀일 뿐이며, “찬 서리를 이겨낼 수는 있으되 동량이 될 수는 없는 자라고 말했다. 유대유(兪大猷)와 척계광(戚繼光)에 대해서는 극도로 경도되어, “이 두 원로는 정말로 가경, 건륭 간에 혁혁한 업적을 남기셨으니, 천백세에 길이 전할 인물이시다라고 찬양했다. 동시대의 인물 중에서는 장거정(張居正)을 가장 숭배하여, “재상 중의 재상이라거나 담력이 하늘만큼 큰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이지가 어떤 체계적인 이론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그의 단편적인 언론들은 자주 앞뒤가 모순되므로 독자들은 그가 반대하는 사물은 쉽게 식별해낼 수 있어도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알아내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앞뒤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지의 가장 큰 결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창조적 능력이 있는 사상가가 과감한 자세로 입론하는 경우라도 그 언론에서는 종종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이지의 불행은 오늘날 연구자의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가 남긴 상세한 기록 덕분에 우리는 당시 사상계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런 저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공맹사상의 영향이나 주희, 왕양명의 시비장단이 이지의 분석과 논변으로 더욱 명확해졌다. 만력황제나 장거정, 신시행(申時行), 해서와 척계광(戚繼光)의 생활과 이상조차도 이지의 저작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또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거대한 인구를 가진 국가에서 개인의 행동이 오로지 유가의 간단하고도 엉성하며 또 일정치 않은 원칙에 의해 제한되면서 거기다 또 법률까지도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사회가 발전해 나가는 정도는 반드시 제한당하기 마련이다. 취지가 아무리 선량하더라도 기술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만력 15년인 1587, 간지상으로 정해(丁亥)년인 이 해는 겉으로는 사방이 태평하여 아무런 특기할 일이 없었지만, 실제로 우리의 대명 제국은 이미 발전의 끝머리에 다달아 있었다. 이 시기에 황제는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을 강구하기도 했고 안일과 탐락에 취하기도 했으며, 재상은 독재를 하거나 조화를 추구했고, 고급장성은 풍부한 창조력도 있었고 일시적인 안일을 탐하기도 했다. 문관은 청렴하게 멸사봉공하거나 탐욕으로 부패하기도 했고, 사상가는 극단적으로 진보했거나 절대적으로 보수화하기도 했는데, 최후의 결과는 선악을 가릴 것도 없는 실패였을 뿐 아무도 자기의 사업에서 의의 있는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어떤 이는 몸을 망쳤고, 어떤 이는 이름을 더럽혔으며, 또 어떤 사람은 패가망신과 오욕을 겸해서 감내해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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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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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17 14:55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댓글을 단 지는 한참 되었지만 그동안도 날마다 들어와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번역문이 잘 읽히지 않아서 중문판을 찾아봤더니 역시 한글로 넘어오면서 어색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검색해 보니 이 책은 영문판에서 중문판으로 넘어갈 때부터 곡절을 거쳤다고 합니다. 저자가 친히 중문으로번역했는데 출판사에서 저자의 확인을 거치면서 세게 윤문을 했다고 합니다.
    '몸을 망치다'가 가장 이상했습니다. 원문은 身敗(지위나 신분을 상실하다)였습니다. 그밖에 창조성이나 창조력 같은 말도 이상한데 한자는 같지만 우리말의 '창의'와 더 잘 통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터넷 서점 미리보기에서 찾은 마지막 문단을 제가 타이핑해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A highly stylized society wherein the roles of individuals were thoroughly restricted by a body of simple yet ill-defined moral precepts, the empire was seriously hampered in its development, regardless of the noble intention behind those precepts. The year 1587 may seem to be insignificant; nevertheless, it is evident that by that time the limit for the Ming dynasty had already been reached. It no longer mattered whether the ruler was conscientious or irresponsible, whether his chief counselor was enterprising or conformist, whether the generals were resourceful or incompetent, whether the civil officials were honest or corrupt, or whether the leading thinkers were radical or conservative — in the end they all failed to reach fulfillment.

    当一个人口众多的国家,各人行动全凭儒家简单粗浅而又无法固定的原则所限制,而法律又缺乏创造性,则其社会发展的程度,必然受到限制。即便是宗旨善良,也不能补助技术之不及。1587年,是为万历十五年,丁亥次岁,表面上似乎是四海升平,无事可记,实际上我们的大明帝国却已经走到了它发展的尽头。在这个时候,皇帝的励精图治或者宴安耽乐,首辅的独裁或者调和,高级将领的富于创造或者习于苟安,文官的廉洁奉公或者贪污舞弊,思想家的极端进步或者绝对保守,最后的结果,都是无分善恶,统统不能在事业上取得有意义的发展,有的身败,有的名裂,还有的人则身败而兼名裂。

    선생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2015.05.18 01:05

      감사~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원문을 대조해 보니 뒷부분의 "或者"가 특히 잘못되었군요.

      여름까지 준비를 해서 가을부터(더 늦어질 수도 있고요) 본 작업에 들어갈 것 같은데, 메데님 훈수 많이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 2015.05.18 02:07

      제가 선생님께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或者 부분은 한글도 그렇지만 중국어도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영어는 잘 읽히는데 말입니다.^^ 윤문하신 분이 당대의 문필가이자 고전문학자(沈玉成)라고 합니다.
      훈수는 선생님의 인터넷 학당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십니다.

  2. 2015.05.19 19:34

    번역이 잘못 된 건 아닌 듯한데요. 번역문이 중문판을 저본으로 했기 때문에 저런 번역이 나온 거지 의미상 '특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영어판의 "It's no longer mattered whether~" 부분을 한글로 옮긴다면 저런 문장이 될 수는 없죠. 하지만 영어투의 말이 꼬이는 번역을 지양하고 독자에게 맥락을 짚어주고 싶어하는 번역자라면 심옥성의 고쳐 쓰기는 충분히 납득이 갈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한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영어판을 저본으로 삼은 초기의 번역본(미국 교포와 영문과 출신의 공역이었죠)을 읽어보신다면 왜 저런 중문판이 나오고, 이미 번역본이 있는 데도 왜 굳이 저 부분을 새로 번역해야 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번역의 작은 무당을 자처하는 분이 각 언어의 특징이나 문장의 가독성 여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번역의 지극히 초보적인 상식도 고려하지 않고 저리 말씀하시는 것은 좀 황당하네요.
    분서를 번역하던 초창기 탁오의 문장이 너무 어려워 한 중국 친구에게 그의 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격이 괴팍해서 글도 저리 쓰는 모양이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 왈, 古人은 우리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다, 저렇게 쓴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를 뭐라고 하기 전에 본인의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먼저 상기해라, 라고 충고해주더군요. 그 말을 들은 이후론 항상 그 문장을 따라가려 했지, 문장을 저에게 맞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글 앞에 겸손해지니 번역에서의 난제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절로 해결이 되더군요. 물론 모든 번역이 다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지만, 일단 번역자는 원문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사람임을 믿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전을 읽어야죠. 그리고 자기 수준에 맞춰 스스로 번역하고 그렇게 이해해야죠.
    말씀드렸듯이 탁오를 대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그를 내가 설정한 필요에 맞춰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 자신의 의도나 욕심을 버리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우선은 쫓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실패하면 그를 전통을 읽는 창으로 삼겠다는 선생님의 시도 역시 기존 연구와 차별화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들어와 봤다가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어 몇 자 남기고 갑니다~

    • 2015.05.19 22:47

      1. 결과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수준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 얼핏 이상했던 것은 일운님 역문의 유장한 글맛이 영어 문장에서 느끼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었어요.

      2. 남의 글을 안 읽으려면 몰라도 읽으려면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말씀, 지당합니다. 젊었을 때 그러지 못한 일이 많아서 반성하죠. 10여 년 전 <1587>을 훑어볼 때까지도 그런 자세가 남아있었다고 이번에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문을 대할 때는 겸손보다 조심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죠. 저보다 저자와 원문을 더 확실히 이해하는 것 같은 역자를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책소개에는 원문을 보지 않은 경우라도 번역에 대한 의견을 꼭 붙이려고 애쓰는데, 껄끄러운 일이지만 '소개'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3. 목표가 분명하면 기어가나 뛰어가나 가는 데는 마찬가지겠죠. 겸손을 성실성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가식이 될 수 있죠. 성실성을 일으키는 방향은 사람마다 위치에 따라 다른 것이고요. 시작부터 기존 연구와의 차별화에 매달릴 일은 아니고, 요리가 익은 뒤의 차별성을 서서히 그려 나갈 일이라고 봅니다. 탁오선생의 가르침을 구한다 해도 나이가 있는 만큼, 마른 땅이 봄비 빨아들이듯이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뱃속에 이미 든 것이 가득한 만큼(냄새나는 얘기 해서 미안~ ^^) 화(化)할 길이나 찾는 게 고작 아니겠습니까?

  3. 2015.05.20 14:49

    좋아하는 블로그에서 좋아하는 책의 좋아하는 선인을 다룬 부분을 놓고 재미있는 논의가 보이네요. ㅎ 끼일 만한 식견이야 전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예전에 읽은 이지 번역에서 많은 것을 얻었던 김혜경 선생의 글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다시 보게 되어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주제넘게 말을 보태 봅니다.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힌다는 말은 꼭 번역어라고 할 수도 없는, 흔히 쓰이는 우리말 표현입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身败名裂이나 身名俱灭, 失身墜名 같은 데서 유래한 거고, 몸이 그렇고 이름이 그렇듯이 身도 名도 중의적 표현이지요. 중국어본에는 身败와 名裂이 반복되는데 국역은 한번은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혔다고, 다음에는 패가망신과 오욕을 겸한다고 표현을 다르게 했더군요. 중의적인 의도를 드러내 이용한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지는 글자 그대로 자기 몸을 망쳤지만 척계광처럼 잃을 지위나 신분이 없었고 장거정처럼 이름을 더럽히고 패가망신을 한 것도 아니니까요.

    법 이론에서 실정법이 简单粗浅해서 법의 공백이나 흠결이 있을 때 법관의 판단으로 이를 얼마나 메꿀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흔히 “법 창조의 문제” 혹은 “법관의 창조적 역할”이라고 합니다. 중국어본에서 法律又缺乏创造性이라고 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단어, 같은 용법입니다. 여기선 성문이든 전례이든 명의 법체가 집행관료의 법 창조적 역할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지요. 장거정이나 신시행을 좌절하게 하고, 심지어는 황제조차도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만들어 버리는 그런 문제를 지적하는 것일 게고,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척계광 케이스를 가리키는 것임이 틀림없는 고급 장성의 창조력이란 말도 같은 의미이겠구요. 이를 바꾸어 법의 창의성이라든가 법관의 창의적 역할이라고 하면 있는 법을 자의적으로 그냥 무력화 시킨다고 하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될 겁니다. 법, 특히 公法이야말로 해석과 적용에서 창의성을 허용하면 안 되는 분야지요.

    “It’s no longer mattered whether~”가 중문에서는 无分善恶, 국역에선 “선악을 가릴 것도 없는” 인데, 선악이란 게 천사와 악마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결과의 좋고 나쁨이라든가 알고 모르고… 하는 여러 의미로 두루 쓰이는 말이니까 상호 모순되는 대립항의 의미를 저렇게 번역하는 것도 의미상으로나 문맥상으로나 흠잡을 데 없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논리학의 배타적 or(nor)를 일상어에선 구분하지 않고 그냥 or로 사용하지요. 여기서 或者(or, 또는)가 바로 그런 용법인데, 대립항들을 나열하면서 이들을 或者로 연결하는 것은 분열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의도적인 표현인 듯합니다. 저도 그랬는데, 처음 읽어 그 문장이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모순되고 양립할 수 없는 항들이 무덤덤하게 열거되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당혹스러움이야말로 저자의 의도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 해의 그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아닐까 합니다. 시스템이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서 나오는 당혹스러움만이 아니지요. 해서의 경우엔 사람이 시스템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멈추어 버리는, 당혹감을 넘어 일종의 블랙코메디처럼 느껴지는 부분조차 있었습니다.

    “he cut his throat with a razor blade in prison에서 razor blade”는 옮겨온 중문을 보니 刺刀라고 돼있던데, 혹시 剃刀의 오타가 아닌가 합니다. 이게 奥卡姆剃刀처럼 지금도 쓰이는 말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말도 칼도 적어도 唐代부터는 쓰였습니다…

    同年生在咸通裏,事佛爲儒趣盡高
    我性已甘披祖衲,君心猶待脫藍袍
    霜髭曉幾臨銅鏡,雪鬢寒疎落剃刀 <—
    出世朝天俱未得,不妨還往有風騷

    수염이란 것이 기르기 시작하면 꽤나 지저분해서 계속 다듬어 주어야 하는 게 귀찮은 일인데, 매일같이 剃刀로 다듬지 않고 美髥公이라는 말을 들을 수 없음은 옛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수지부모한 것이라 해도 선인들이 손톱, 발톱을 다듬지 않고 살았을 거라고 보기 어려운 것처럼, 춘추 시절의 성인께서도 아침마다 뻗친 수염과 솟은 잔털을 방치하고 사시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옛사람들이 왜 수염을 깎지 않았다고 생각할까? 하는 의문에서 저 唐詩 하나를 찾게 된 것인데, 시가 또 좋아서 가슴 가득히 꿈을 품었던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떠올리기도 하고 한바탕 큰 길을 돌아 희끗하고 듬성듬성해진 머리를 가지고 다시 만나게 되는 벗들을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단 시작하니 다 맞춰보자는 심정이 되어 뜻하지 않게도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1587은 참 좋아하는 역사책인데 국역본만으론 아쉬움이 많았었습니다. 소개해 주신 이 번역본은 왜 출판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군요. 판권 문제인가요… 지난 몇년간 해방일기를 비롯한 선생님의 작업을 듬성듬성이나마 따라오면서 역사가가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에 몇몇 벗들에게 소개도 하고 그랬습니다. 이제 탁오의 거침없는 말과 사유에 눈을 돌리신 걸 보고, 새롭게 펼쳐질 선생님의 작업을 행복한 마음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어지러운 글, 너그러이 보아 주시길 바랍니다.

    • 2015.05.20 17:24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타를 고칠 수 있었습니다.

    • 2015.05.20 18:44

      1.제가 중국어 ‘创造’를 우리말의 ‘창의’와 더 잘 통할 것 같다고 한 것은 ‘创造’를 꼭 ‘창의’로 번역하자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어 ‘创造’가 우리말 ‘창조’와 같은 뜻일 때에도 있지만 ‘발명’이나 ‘제조’로 쓸 때도 있고 ‘창의력을 발휘하다’로 쓸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를 불러일으킨 죄가 큽니다.
      그런데
      “법의 공백과 흠결을 법관의 판단으로 보완할 수 있는 것을 우리말로 ‘법 창조’ 또는 ‘법관의 창조적 역할’”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또,
      명나라에서 관료가 법을 집행할 때 법의 공백을 보완하지 못하게 금지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公法의 해석과 적용에 창의성(새로운 의견을 내놓음)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법관의 창조적 역할’이란 것이 있다면 법관이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영문본에는 없고 중문본에만 나오는 “法律又缺乏创造性”이 꼭 법관의 판단이나 법 해석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法律又缺乏创造性은
      이미 저자가 돌아가신 뒤라 정확한 뜻을 여쭤보기는 불가능해졌지만,
      명나라에서는 개혁 사상이 신법이나 변법으로 이어지기가 어려웠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거정 등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신법 또는 변법을 제안했으나 그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명나라가 한계를 보이고 말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마르크스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법은 창조된다기보다는 사회 변화상을 반영하여 제정되거나 개정된다고 생각합니다.

      3. whether the generals were resourceful or incompetent 또는 高级将领的富于创造或者习于苟安
      에서
      Resourceful 또는 富于创造를 ‘고급 장성’의 ‘풍부한 창조력’으로 옮기면 척계광 같은 장군이 뭘 많이 창조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장거정의 천거를 받기도 했을 만큼 고루하지 않았던 척계광이 자리를 지킬 생각만 하지 않고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을 표현했다고 봅니다.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원앙진법’을 썼다는데, 척계광이 그 아이디어를 냈다고 해도 천하에 아주 새로운 것이 없는 만큼 기지와 응용력을 발휘하여 옛부터 내려오던 진법을 현실에 맞게 구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족:
      1.the generals 또는 高级将领을 우리말 ‘고급 장성’으로 옮기면 명나라 때에도 ‘별’이 있었던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2.身败를 패가망신(집안의 재산을 다 써 없애고 신세를 망침)으로 옮기기에는 '재산을 다 써 없애다'가 걸립니다.
      통용되는 사전의 풀이로 보아 身败名裂는 '신세를 망치고 명예를 잃다'
      http://dict.revised.moe.edu.tw/cgi-bin/newDict/dict.sh?cond=%A8%AD%B1%D1&pieceLen=50&fld=1&cat=&ukey=-110460395&serial=1&recNo=0&op=f&imgFont=1
      인 것으로 보입니다.
      身名俱滅과 완전히 다른 말은 아니지만 身败名裂에는 '몸을 망치다'라는 뜻이 없는 것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신세를 망치다'와 '몸을 망치다'는 다른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失身墜名은 위 사전에 올라 있지 않은데 '失身'을 '여자가 정절을 잃다' '목숨을 잃다' 또는 '절의를 잃다'로 본다면, 身败와 失身은 다른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제 공부가 많이 모자랍니다. 더 많이 공부하겠습니다.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5.05.20 18:45

      와우, 식견이 없단 말씀은 정말 겸손이시고요. 꼼꼼히 읽어주신 덕분에 저 역시 많이 배웠습니다. 저 대신 '打抱不平' 해주신 것도 감사하고, 분서를 그토록 유의미하게 읽으셨다니 그것도 고맙습니다. 저는 있는 글자 그대로 '창조'를 갖다 썼을 뿐인데 '창의'와는 그런 차이가 있군요...

      왜 이 글의 번역본이 없는가 물으셨는데, 판권 때문이 맞습니다. 오래 전 책이 아까워서 나머지 부분도 번역해볼까 하고 저자에게 연락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 레이황은 이미 돌아가시고 그 아드님 말씀이 한국의 다른 분에게 판권을 넘겼다고 하더군요. 이후 새물결 출판사란 곳에서 책이 새로 나왔습니다만, 찾아보니 그것도 이미 절판이네요. 찾는 분이 많아지면 조만간 새로 찍어내지 않을까요? ^^

  4. 2015.05.20 17:21

    심하다 싶어 말이 과하게 나올까 봐 자제했던 부분입니다. 인용하신 부분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지는 옥중에서 면도하는 칼로 목을 따 자살했는데......
    가 몹시 걸렸습니다.
    명나라 때의 남자들이 면도(얼굴이나 몸에 난 수염이나 잔털을 깎음)를 하고 살았을까요?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he cut his throat with a razor blade in prison
    李贽在狱中以剃刀自刎

    이탁오 선생이 1588년부터 머리를 밀고 살았고,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리를 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해도, '면도하는 칼' 운운한 것은 어색합니다.

    • 2015.05.20 17:21

      '지나는 객'님의 말씀을 듣고 책을 확인해 보니 '刺'가 아니라 '剃'였습니다. 타자를 잘못한 죄가 큽니다. 고쳐 놓았습니다.

      저는 <중국소설연구회보> 제31호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같은 장에 나오는

      一天,李贽要侍者为他剃头。乘侍者离开的间隙,他用剃刀自刎,但是一时并没有断气。

      에서도 剃刀를 '면도하는 칼'로 번역했는지 궁금합니다.^^

    • 2015.05.20 17:23

      앗! 글자를 수정했더니 이 댓글이 아래로 내려와 버렸습니다. 댓글을 달았던 정확한 시간은 기억할 수 없으나 5월 19일 밤 9시 경이라고 밝혀둡니다.

  5. 2015.05.20 18:54

    메이데이님, 열심히 공부하시려는 모습에 감복했습니다. 아래 사이트에 들어가시면 번역문 전부를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체도는 이발도 하고 면도도 할 수 있는 칼이랍니다. ^^
    https://www.sinology.or.kr:46001/novel/

    • 2015.05.21 00:44

      감복하다=감동하여 충심으로 탄복하다(매우 감탄하여 마음으로 따르다)
      는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제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공자 앞에 문자 쓰듯 주제 넘은 짓을 한 죄가 큽니다. 이번 댓글을 마지막으로 선생님 번역에 관한 공개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체도剃刀가 이발도 하고 면도도 하는 칼이란 걸 참고하라셨으니 참고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 아닌 스님 생활을 했던 이탁오 선생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밀고 난 뒤에 그 머리를 밀었던 칼로 자결했다는 뜻이 잘 살아나는 번역이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더구나 제7장 이탁오 편의 첫 문장이 아니었겠습니까. 이탁오 편으로 막 접어들었는데 '면도하는 칼'이 나와서 어색했습니다. 명나라 문화에서 '면도하는 칼'이 '머리 밀 때 쓰는 칼'보다 얼마나 더 보편적이었을까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제 느낌이었을 뿐이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링크 감사합니다. 중국 집의 회선 사정이 좋지 않아 잘 연결이 안 됩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운받도록 하겠습니다.

    • 2015.05.21 15:31

      저는 체도를 노지심 돼지고기 썰어먹던 칼로만 알았어요. ^^

  6. 2015.05.20 23:02

    메데님 열정 덕분에 일운님과 객님 좋은 말씀도 들을 수 있었네요. 공부 좋아하는 분들과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일이 더 많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2015.05.21 00:42

      선생님 다시는 이런 '열정'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번역에 관한 언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선생님 글을 텍스트로 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모드로 돌아가겠습니다.
      선생님의 글이 어린 학생부터 연로한 분들까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단비처럼 내리기를 소망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젊은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권하려고 다짐합니다. 선생님을 깊이 존경합니다.

    • 2015.05.21 11:16

      애고~ 메데님, 존경심 표할 때는 '비밀댓글'을 이용해 주세요. 화끈화끈~

  7. 2015.05.22 17:49

    저의 어지러운 글이 메이데이님을 많이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습니다. 님의 의견에 반대한다기 보다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는 그런 말씀을 드린 것 뿐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답이 하나만 있어 맞고 틀리고를 따질 주제는 아닐 터이니까요.

    창조라는 간단한 말만 해도, 천지창조라고 할 때의 그 창조라면 대통령의 경제정책에서라면 몰라도 법에서는 대통령이든 관료든 법관이든 절대로 해서는 안되고 황제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요. 법이란게 보편적 규율이니 옛날이건 지금이건 만들고 폐하는 것에 엄격한 제한을 두어야 그 안정성이 유지되는 것이고, 옛 사람들은 그걸 성문화하고 전례와 관례와 수천년 전 성인의 말씀을 들어 "창조"를 제약해왔고, 지금 사람들은 선출된 의회만이 할 수 있는 권능으로 제한합니다. 특히 전제 사회라면 법이 그런 일반적 의미의 창조성을 결여했다는게 흠이라기 보다는 미덕일 수 있겠습니다. 역사를 보아도 사회의 불안과 쇠퇴가 법치라고 불리우는 안정성이 깨지고 군주나 고관, 토호의 자의가 앞에 나서는 데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래된 된 경국대전을 지금도 자랑하고 있는 거겠구요.

    본문에 법률의 창조성이 결핍되었다고 하니 그냥 나와 있는 그대로 법률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창조의 의미로 알아들은 것이고, 법관이나 집행관료들이 법의 흠결을 보충하는 것 처럼 장군들도 군제와 병법의 흠결을 보충하는 것이 통상 하는 일이니 그것도 그렇겠거니 한 것 뿐입니다. 딱히 문장에 쓰여진 맥락과 달리 해석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인데, 제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 좁게만 알아들은 건도 모르겠습니다.

    "장거정 등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신법 또는 변법을 제안했으나 그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명나라가 한계를 보이고 말았다는 뜻"을 말씀하셨는데,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굳이 저의 감상을 덧붙이자면, 그 사람들이 딱히 뭘 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그저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툭하면 멈추어 버리는 낡은 기계 같은 시스템을 닦고 기름치고 하면서 유지보수해나가던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법률의 창조성을 그렇게 읽은 것과 같은 맥락이겠는데, 이것 또한 그저 책 한권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혼자만의 인상기일 뿐이지요.

    대개의 사회가 그렇게 덜덜거리며 돌아가고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며 살아가지요. 흙탕물에 사는 메기처럼, 규정과 관례와 갈등과 파벌 같은 것들이 얽히고 설켜 사람이 적응할 환경을 만들어 냅니다. 새것은 새것 대로, 헌것은 헌것 대로 일상적으로 가동되어야 할 것들 중 뭔가가 잘 안돌아가는 일이야 흔히 있는 거고,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러려니 하면서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 조차도 못하지요. 문제라고 해도 일상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늠할 기준도 명확하지 않고, 일을 돌아가게 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어도 호통을 치거나 며칠 밤샘을 하거나 하면 또 얼마간 문제없이 잘 작동되곤 하니까요.

    작년에 수백명의 어린 학생들이 수장되어 버리는 것을 전국민이 지켜봤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시스템에 뭔가 큰 문제가 있다고 느꼈지요. 근데 막상 관련 공무원들은 가끔 터지게 돼있는 대형 교통사고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그게 그사람들의 보신주의라든가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긴 합니다. 그건 어느 사회든 항상 있는 거니까 새삼스럽지 않지요. 문제가 크니 이렇게 저렇게 바꿔야 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막상 원인을 구명하고 구체적인 대책의 목록을 만들어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딱히 콕 짚어낼게 안보이고 모든게 얽혀있어 일도양단이 안되고 섣부른 변화가 가져올 공백과 부작용도 많고 하니, 사고는 사고일 뿐... 하는 식으로 스스로 설득되어 있지요.

    그래도 대통령쯤 되는 자리에 있으니까 단순 무식하게 조직 해체라든지 하는 대형 해머를 동원할 수 있는데, 야당이든 관변 보수든 그런 사람들은 또 나름의 입장이 있으니 비판적인 취지의 말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생존 논리와 권위주의로 똘똘 뭉쳐 있는 특정 관료 조직을 정치적 "진보"와 관변 "보수"가 함께 나서서 옹호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하구요. 그게 또 말이 안되지 않는게, 대통령이 궁지를 모면하려고 희생양을 내세워 사태를 호도하려 한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고, 그럼 해안경비는 누가 할건데, 해양 범죄는 누가 잡을 건데 하는 식으로 그럴만한 세세한 이유들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정치적 티격태격이라는 일상으로 수렴되고 밀당으로 시간이 흐르고 으례 그렇듯이 다른 곳에 다른 문제가 또 생기니 지난 건 적당한 선에서 덮고 가야 세상이 돌아간다는 생각들이 더 많은 근거를 얻게도 되고...

    이런 것들이 온갖 것이 얽히고 설켜서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1587년과 오버랩되어 보이더군요. 저야 이 책을 읽지 않았었다면 그런 생각도 못했겠지요. 동기나 의도야 전혀 다르겠지만 어쩌면 신비롭거나 어쩌면 낭만적일 수도 있는 대통령의 일곱 시간이 만력제의 태업과 겹쳐보이기도 하구요.

    장거정이든 신시행이든 그 사람들이 과연 개혁을 추진했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이 제안한 개혁은 그 사회의 문제를 바르게 지적하고 실제로 더 큰 부작용 없이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 하는 것도 역사의 흥미있는 주제일 수 있지요. 그 다른 편에는 해서가 목숨걸고 나섰는데 시스템은 꼼짝도 안할 뿐 아니라 시스템도 해서를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고, 그 시스템을 뛰쳐나온 이지 같은 사람이 모아지고 완결되는 사유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독설과 지적질(^^)과 파격으로 한바탕 걸쭉한 굿판을 벌이다 표표히 떠나버리는 상황도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의 개성이지만, 전체로 보면 뭔가 해보려다가도 그만두고. 안할려고 하다가도 한번 손을 대보기도 하고. 그냥 그렇게 그렇게 지나가는 하나의 그림으로 합쳐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누가 뭘 한번 해보려는데 시스템이 안받쳐준다기 보다는요.

    하다못해 동네 편의점 사장님과 막걸리통을 가운데 두고 얘기를 나눠도 보수와 진보와 외교와 국방과 동양과 서양의 역사가 주제로 떠오르고 분석이 나오고 주장이 나옵니다. 그래도 우리 범부들이야 철학이 어떻든 정치적 주장이 어떻든 얽히고 설켜서 대체로 같은 일상을 어울려 살아가지요. 매일 매일을 열심히 살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역사에서 가장 바뀌기 힘든게 무덤양식이라고 하던데, 그렇게 얽힌 범부들의 생각과 일상이야말로 참 바뀌기 힘든 것 중 하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래전에 알게된 산동의 관료 한분은 술자리에서 악비의 일화를 얘기하다가 문혁 시절의 혼란과 아픔을 격정적으로 토로하면서 남아있는 당의 원로들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더군요. 그즈음 상해에서 만난 민간 기업인 한분은 또 좀 다른 말씀을 하시는데, 들에 나가 농사일 하다가 소문이 있어 문득 보면 말타고 지나가는 군대의 깃발이 달라져 있고, 세금 걷으러 오는 관원들 복색도 가끔씩 달라지고... 그냥 그렇게 수천년을 살아왔다구요. 당연한 얘기지만,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역사와 사회를 보는 시각에 굉장히 많은 차이를 가져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는 그런 차이 조차도 없게 만들어 버려서, 어떤 자리에 있는 어떤 사람이건 그 모든 사람들을 그냥 그렇게 얽혀서 매일을 살아가는 범부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더군요. 하급 관리부터 고관과 장군과 사상가와 심지어 황제까지도요.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이 점이 웨이 황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해를 그렇게 특별하게 보이게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아무런 철학도 없고 공공의 가치에 대한 아무런 존경도 없이 그저 세속적 의미의 입신과 양명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기업을 일구고 고관이 되고 하는 일들이야 어디든 늘 있겠지요. 그런데 참모총장이나 총리나 대통령직까지도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사회라면 그게 어떤 역사가의 주목을 끌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당사자들이나 그걸 보는 저희 범부들이야 툴툴거리면서도 세상이 으례 그런 거니 하면서 살고있지만요.

    그래도 그중 어떤 사람은 남겨 놓은게 있어서, 경극으로 이어져 수백년 후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작은 불씨가 되기도 하고 책으로 전해져 저같은 진짜 범부의 흥미를 끌기도 합니다. 해서의 파관이야 다른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을 소용돌이에 몰아넣는 명분이 되기도 했지만 이지의 문장은 문천 선생님의 새로운 눈길을 통해 정확한 자리에서 세상을 향한 날선 준론으로 되살아 날 것 같습니다.

    ...

    일운님 올리셨던 글을 봤었는데도 김혜경 교수님 본인이신줄 미쳐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워낙 그런 분들을 가까이 접할 기회가 없다보니 생각도 못했습니다. 분서에서 말고는 김교수님의 글을 접하지 못했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주제넘게 부러움도 느끼게 됩니다. 역시 고수는 고수와 직접 교유를 하시는군요... 죄송한 마음에 덧붙이려던게 또 길어졌습니다. 앞으론 그러지 않겠습니다.

    • 2015.05.22 17:38

      제가 밝힌 생각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읽고 제가 제 생각을 다시 말씀드린 것은 '토론'에 속하는 행위였습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제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거나 반대할 자유가 있습니다.

    • 2015.05.23 13:08

      객님처럼 관심도 많고 생각도 많은 분이 여기서 일운님과 마주칠 수 있었다니, 이 블로그의 존재가치가 빛나네요.

      하긴... 이 블로그 아니었으면 저 자신도 일운님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망가지는 걸 겁내지 않는 편이라 이렇게 전을 펴게 되었는데, 일운님은 워낙 단정한 분이라서 눈으로만 내려다보면서 좀체 끼어들지는 않으시죠. 객님도 글 앞뒤를 철저하게 단속하는 게 일운님 성향에 가까운 편 같은데... 앞으로 이 동네에선 허리띠 끌러놓고 편안히 말씀 나눌수 있기를...

      5년 전 <해방일기> 작업을 시작할 때 어느 자리엔가 "바로 이런 작업을 위해 내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운명감이 든다고 적은 일이 있습니다. 이번에 탁오선생을 떠올리며 비슷한 운명감을 다시 느낍니다. 40여 년 전 석사논문부터 시작해 박사논문을 거쳐 최근의 문명사 공부에 이르기까지, 부지불식중에 탁오선생을 향한 시선을 다듬어 온 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 운명감을 더 짙게 만드는 것이 일운님의 존재고요. 탁오선생을 그만큼 투철하게 이해하는 분이 계시고 제가 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행운이라 한다면 참 믿기 어려운 행운이죠. 사실, 그분의 도움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바로 착수할 엄두를 내기 힘들죠. 마음이 가더라도 뜸을 들이며 훨씬 더 천천히 접근할 생각을 했을 겁니다.

      탁오선생을 바라보는 데는 일운님과 저 사이에 수준만이 아니라 시각에도 꽤 큰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은 무당" 얘기가 나온 건데, 그 차이를 큰 무당과 작은 무당 사이의 차이로 이해해 달라고 제가 부탁드리는 거죠. '선무당'으로만 보지 말아 달라고. 작업 진행에 따라 수준 차이를 좁히면 시각 차이도 좁혀질지, 두고 볼 일이겠습니다.

      작업 준비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객님이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보여준 것이 무척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생각을 많이 보여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8. 2015.05.23 23:52

    저는 학자가 아니니 상식선에서는 메이데이님의 의견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중앙일보 (2015.2.25)에 <진흙에 묻힌 진옥, 이탁오의 부활>이라는 글에서 엔리에산 주진궈 저, 홍승직역 <<이탁오 평전>>의 글을 소개하고 있군요. "어느 날 머리를 깍으러 감옥 안으로 들어온 시종의 면도를 빼앗아 목에 그어 절명하였다. 그의 나이 76세때의 일이다." 홍승직 역의 책을 읽고 이렇게 정리해 놓은 글도 있네요. "사상은 그렇지 않았으나 육체는 이미 다 늙을대로 늙은 이탁오는 병상에 누운채 머리를 깍아주는 (그는 62세때에 수염만 남기고 머리를 깍고는 불경에 열중한다) 사람에게서 칼을 빼앗아 스스로 목을 자르고 자결한다. 그리고 왜 자살하려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70세 늙은이가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