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모델>은 불과 몇 달 동안에 내 다른 어느 책보다도 많은 비평과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공론의 장에서 이런 주목을 받은 것이 내게는 물론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비판의 화살도 받을 만큼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도발적 표현을 피하려고 일부러 노력도 했고 책의 3분의 1 분량을 따분한 주석으로 채워놓기까지 했는데도 원색적인 정치적 감정을 꽤 불러일으킨 것 같다.

이 책의 주된 논지는 그리 도발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의 정치이론과 제도에 진지한 고려가 필요한 측면이 있다는 주장, 그리고 중국에서의 정치 발전(또는 퇴보)을 논하는 기준으로 중국의 정치문화와 역사를 채택해야 한다는 관점 정도를 담은 책이다. 미국의 정치제도 개혁을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논한다면 우스운 일 아닌가. 마찬가지로 중국의 정치체게 개혁을 미국의 건국이념이나 칸트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논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이 많은 까닭이 무엇일까? 자유민주주의만이 절대적 정당성을 지닌 정치지도자 선출방법이라는 맹목적 믿음(“역사의 종말”)이 하나의 이유일 것 같다. 11표만이 정치지도자 선출의 도덕적으로 정당한 방법이며 다른 방법을 주장하는 것은 도덕적 죄악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믿음 위에서는 중국 자체의 문화와 역사에서 다른 정치이념을 추출해 볼 필요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중국의 정치체제에서 어떤 좋은 것도 나올 수가 없다는 독단적 믿음이다. 소련이나 북한과 본질적으로 같은 사악한 공산정권이므로 빨리 무너질수록 좋다는 믿음이다. 이런 관점에 대해 책 안에 써놓은 것을 넘어 따로 응대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보다 열린 마음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서는 더 설명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최근 중국의 정치적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몇 가지 중요한 비판점에 응대하고자 한다.

 

 

민주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내 책을 민주주의 비판으로 받아들인 독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스타인 링겐은 이 책이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우리에게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설득하려는책이라고 주장했다. 내 의도는 민주주의 자체를 깎아내리려는 (...) 고약한 책이다. 벨은 중국 체제의 신봉자로서 내 편이 잘 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내 적이 망해야 속이 시원해지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내 의도는 민주주의 자체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나는 선거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나라에서 선거민주주의가 지켜질 것을 강력히 원한다. 민주주의가 능력주의 제도 중 훌륭한 것으로 보완되기를 바라지만, 어떤 보완도 선거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이뤄지기 바란다. 다른 대안이란 것이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포퓰리즘 같은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투표권을 한 번 쥐면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체제를 바꾸는 길은 폭력에 의지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바꾼 결과는 선거민주주의보다 못하기 마련이다. 타일란드나 이집트를 보라. (이집트에서 소수의 부유한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군사독재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슬람형제단 정권을 뒤엎었을 때 얼마나 낙담했던지!) 그러므로 어떤 나라든 11표 원리를 체제화하고 나면 아무리 바꾸고 싶어도 (폭력을 통하지 않고는) 바꿀 길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선거민주주의체제도 능력주의 제도 중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도입할 수 있고, 도입해야 한다. 유능한 직업관료층의 육성이나 각 분야에서 전문가의 권한 강화 등이 그런 예다.

내가 첫 장에서 민주주의체제의 전형적 문제 네 가지를 논한 까닭이 무엇이었나? 내 목적은 널리 인정되는 좋은 정치의 기준으로 볼 때 선거민주주의가 능력주의 정치제도보다 무조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11표 이념을 신성시하는 믿음을 해제하는 데 있었다. 그래야 중국의 정치체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내 노력에 독자들을 동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생각하면 거의 종교적 신앙 대상이 되어 있는 정치적 가치를 상대화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서방세계의 정치문화 속에서 자라난 내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뒤집어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십여 년에 걸친 도덕관의 충격이 필요했다. 이 책의 한 장을 읽어보고 그런 관점의 전환을 일으키기 바란 것이 너무 비현실적인 희망은 아니었을까? 1장이 독자들의 마음을 열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닫아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어떤 나라에는 적합하고 중국 같은 나라에는 적합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인도 같은 야만국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J S 밀을 연상시키는 오리엔털리즘에서는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중국인의 소질이 너무 낮아 선거민주주의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중국 지식인들에게는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 주장은 그와 다른 것이다. 1장에서 나는 확실한 경험적 증거에 입각해서 미국 같은 나라에도 유권자의 소질 문제가 있음을 밝힌 다음 중국인이라 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합리적이고 공공성 의식이 높기를 기대할 이유가 없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우수한 지적-사회적-도덕적 특성을 갖춘 정치지도자들을 뽑아 등용하는 능력주의 체제가 (매우 불완전한 형태지만) 개발되고 운영되어 왔으니, 이 체제를 발전시키는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개선해서 그 문제점을 최소화하는 길을 찾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중국처럼 능력주의 이념이 긴 역사를 가진 곳, 지난 30년간 정치개혁의 지표로 작용해 온 곳,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에서 인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에서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년 동안 많은 북토크에 나서면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선거민주주의가 타이완에서는 잘 작동되는데, 본토라 해서 다를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대답은 정치적 맥락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타이완은 여유가 있는 편의 조그만 사회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본토 중국의 거대한 문제들(환경 파괴, 빈부 격차, 거대 인구의 절대빈곤 등)에 비하면 두드러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설령 타이완 정치가 마비 상태에 빠지더라도, 세상이 무너질 일은 아니다. 반면 본토 중국의 정치에 문제가 생기면 세상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크기가 문제가 된다. 조그만 정치공동체가 포퓰리즘과 근시안적 정치로 장기적 계획이나 미래 세대와 외부 세계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중국처럼 거대한 정치공동체의 정책은 현재와 미래 중국의 십여 억 인민의 생활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다. 본토 중국에서는 타이완식 선거민주주의의 약점을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능력주의 정치제도의 개선 노력에서 민주주의사회의 특성 중 도입에서 제외할 것이 많지 않다. 11표의 원칙은 빼더라도 언론의 자유나 법치주의는 그대로 들여올 수 있고, 결사의 자유 중 최상층 권력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정당의 결성 정도가 문제될 것이다. 주민(국민)투표나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같은 진보적 과제들도 포함될 수 있다. 중국의 현대화가 계속된다면 이런 민주적 가치나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나는 밝히고자 노력했다.

 

 

내가 현실옹호론자라고?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언급하는, 고전의 반열에 내 책이 들었다고 축하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과연 그런지 나는 모르겠다. 한 번 자리 잡은 오해를 털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비난이 내가 중국 정부의 변호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하나의 이념을 옹호하는 것이지, 특정한 정치 현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딱지를 붙인다면 나는 정치이론가이고 내 방법은 상황정치론이다. 사회의 공적 문화를 주도하는 정치적 이념을 합리적인 방어가 가능한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베이징에서 살며 일한 지 십년이 넘기 때문에 이 방법이 자연히 현재 중국의 중심적 정치논쟁에 적용되는 것이다. 내가 서방국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이 책을 쓸 마음도 들지 않았을 것이고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베이징의 연구자와 정치개혁가들은 정치지도자에게 필요한 특성이 무엇인가, 그런 특성을 가진 인재를 잘 골라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논쟁을 벌인다. 능력주의 원리에 따라 선출된 지도자의 권력을 제한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민주주의와 능력주의를 어떻게 하면 조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논쟁도 벌인다. 서방의 정치계나 학계에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주제들인데, 중국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내 책의 목적은 그런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중국에서 관리, 개혁가, 지식인에서 일반인까지 널리 지지받는 정치적 이념은 이 책에서 내가 말한 민주적 능력주의의 수직 모형이다. 하층부는 민주주의 원리를, 그리고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능력주의 원리를 더 많이 따르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때 과격한 포퓰리즘과 자의적 독재의 끔찍한 경험을 통해 중국에는 능력주의 원리에 따른 최고지도부 구성을 반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중국 지도자들은 시험에 의한 지도층의 선발과 고과考課에 의한 승진 등 능력주의 전통의 여러 요소들을 별 논란 없이 재현할 수 있었다.

수직형 민주적 능력주의 이념은 지난 30년간 정치개혁의 지침으로 작용해 왔지만 이념과 현실 사이에는 아직도 큰 간극이 남아있다. 따라서 내 책에는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측면이 들어있다. 정치적 현실옹호가 아니다. 하지만 중국 내에서 지지받는 이념을 개혁의 기준으로 삼자고 주장하는 것이기는 하다. 중국의 역사와도, 근년의 정치개혁 방향과도, 그리고 지금 중국인들의 생각과도 어울리지 않는, 해외에서 수입된 이념에 집착하지 말자는 것이다.

상황정치론은 서방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이 널리 활용하는 방법이다. 널리 통용되는 민주주의 이념에 해석을 가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정치현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방법이 비민주적 사회, 즉 지도자를 인민이 선택하지 않는 사회를 대상으로는 거의 쓰이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활동 중인 정치이론가 중에서 그런 방향으로 책 한 권도 나온 것이 없다.

이론가들이 비민주적 정치체제를 다루기 꺼리는 이유는 말할 나위 없이 20세기의 경험에 있다. 나치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 모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서방 지식인 가운데 이들 정치체제를 옹호하고 나선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모두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린 것은 마땅한 일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옹호하고자 하는 정치체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현실과 관계없는 이론적 구조물로 그 정치체제를 포장하려 든 것일 뿐이었다.

내 책에 대한 비평 중에는 이 책 또한 이러한, 비도덕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방향을 잘못 잡은 정치사상의 전철을 밟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들 비평가들이 내 선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논평 대상인 사회로부터 격리된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북한처럼) 불투명하고 의문에 싸여 있는 사회에 자기 이념을 투영한 것이다. 무엇보다 큰 그들의 잘못은 폐쇄된 사회에 관한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감안해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의 중국은 다른 종류의 연구 대상이다. 거대하고 복잡한 나라이고, 그곳에 검열이 있고 시민권의 제약이 있고 정치적 투명성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치체제와 기본 가치가 뭔지 제대로 알아보기에 충분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 누구든 중국어를 알고, 중국 안팎을 여행하고, 여러 종류 사람들을 (각급 관리들을 포함하여) 만나고, 중문과 영문 자료를 찾아 읽고, 여러 성향의 웹사이트를 섭렵하는 사람이라면 중국사회의 지배적 정치이념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그려볼 수 있다. 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각자 마음대로지만, 수천만 명을 학살한 독재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폐쇄된 정치체제를 실상도 모르는 채로 옹호하던 예전 사람들과 내 작업을 비교하는 짓은 마음대로 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방법이 중요한 까닭은 어떤 이념을 기준으로 정치현실을 평가하느냐 하는 것이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 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중국의 정치적 진보와 퇴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정치 전통 내의 이념들을 활용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J S 밀로 시작해 헤겔과 마르크스까지 참여한 서방 정치사상가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관점이다. 그런데 그 사상가들이 명성을 떨친 때가 바로 서양 제국주의의 전성기였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중국은 식민지가 아니다. 자부심을 갖고 힘을 키워가는 나라이며, 풍부하고 다양한 정치적 전통을 가진 나라다. 그리고 그 지도자, 개혁가, 지식인과 일반인들이 날이 갈수록 자기네 전통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고 있다중국의 정치 현실을 중국 자체의 전통과 아무 관계없는 이념으로 재단하려 드는 서방 학자들에 대한 반감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 학자들이 서양세계에 현존하는 민주주의를 유교적 이념으로 재단하려 들면 반감을 일으킬 것과 마찬가지다.

서방 민주주의자들의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다 하더라도, 중국 정치문화의 중요한 이념들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라도) 공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중국과의 관계에서 장애를 겪을 것이다. 물론 말보다 실천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떠오르고 있는 중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

 

 

유토피아 홍보물이라고?

 

반대 방향에서 쏟아지는 비판도 있다. 내가 중국의 정치현실과 너무 가까워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멀어서 문제라는 것이다. 앤드루 네이선은 내 책이 픽션이라는 주장을 담은 세 차례 리뷰를 내놓았다. 12년간 베이징에서 살며 일해 왔고, 많은 지식인과 관리들을 만나 왔고, 중국 최고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에서 가르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쓴 책은 중국의 진정한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기층부의 선거민주주의나 중간층의 실험공간에 대한 내 설명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그 영역의 현실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상층부 정치권의 능력주의 이념에 대한 내 긍정적 관점이 그에게는 문제되는 것이다.

시험제도를 통해 지도자를 선발하고 수십 년에 걸친 고과제도를 통해 승진시키는 능력주의 제도가 정기적인 선거의 경쟁을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제도보다 우월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쉽게 인정된다. 하급 단계에서 뛰어난 실적을 거둔 사람들이 상급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든가, 능력에 의거해 선발된 지도자에게는 시행착오의 위험이 적다든가, 다음 선거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미래 세대의 복리를 위주로 장기 정책을 세울 수 있다든가, 권력 상층부의 안정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몇 년, 몇 십 년을 기다려야 성과를 볼 수 있는 실험을 진행할 수 있다든가, 선거자금 모금을 위해 똑같은 연설을 돌아다니며 되풀이할 시간을 아껴 진짜 정책의 구상과 실행에 노력을 집중할 수 있다든가 하는 장점들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정치 현실은 능력주의 이념과 관계가 없거나 아주 멀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이 있다이런 냉소적 태도는 중국공산당의 절대적 과제가 완벽한 권력 통제에만 있다고 보는 시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에 대해 마오쩌둥 시대와 본질적으로 바뀐 것이 없고 모든 독재체제와 비슷한 성격이라고밖에 말할 것이 없다면 중국 정치사의 중요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중국공산당이 자기네 몰락을 초래할 위험이 있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확립하기로 결정한 것은 다른 비민주적 정치체제들과 분명한 차별점이며, 지난 30년간 거둬 온 성공의 열쇠이기도 하다.

능력주의 정치체제의 존재 여부를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복잡성을 띤 질문임에 틀림없다. 능력주의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지도자를 선발해서 권력을 맡긴다는 이념인데, “뛰어난 능력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는 맥락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제2장에서 밝혔다. 비교적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현대화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능력주의 정치체제를 이룩하고자 하는 거대한 나라에서 관리들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능력이 어떤 것인지 밝히는 데 나는 주력하고, 그 결과를 중국의 경우에 적용시켜 본다.

내 주장인즉 정치체제가 뛰어난 지성과 사교능력, 그리고 덕성을 갖춘 인물을 선발, 등용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런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이는 장치를 나는 제안한다. 그러나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자유롭고 공정한 민주적 선거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처럼 빈곤하고 혼란스러운 지역에서도 시행될 수 있는(결과야 어떻든) 것과 달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지도자를 선발하고 등용하는 목적의 공정하고 안정성 있는 체제가 자리 잡는 데는 적어도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지난 30년간 능력주의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을 어떤 근거 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이념과 현실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남아 있다. 누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권력투쟁은 말할 것도 없고, 파벌과 연줄이 작용한다. 관리 선발과 임용의 기준을 세우는 조직국의 업무는 몇 해 전보다는 조금 더 개방되어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이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체제가 마오쩌둥 시대보다 능력주의 쪽으로 바뀌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지도자의 선발과 등용에서 교육과 시험의 역할은 꾸준히 늘어나 왔다. 내 책에는 하급 직위에서의 우수한 실적을 발판으로 승진된 예가 많다는 경험적 근거가 실려 있는데, 실적의 내용은 대개 경제성장을 기준으로 평가된 것이다. 이런 연구의 대략적 결론은 경력 중 어느 단계에서든 경제성장정책의 성공이 출세의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이지만,(내놓을 만한 경제 실적 없이 고위직에 이른 관리는 거의 없다.) 정부 최고위층에 이르면 파벌이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런 현상을 좋게 말한다면, 중국의 고위 지도자 대부분은 경제에 관한 높은 수준의 이해력과 집행력을 갖고 있으며,(북한 같은 나라들은 차치하고 선거민주주의체제 국가 지도자들과 비교해도) 특히 최고위층에 들기 위해서는 정책 집행에 도움이 될 만한 수준 높은 사교능력도 필요하다.

수억 인구를 빈곤으로부터 건져내는 데 통치자들의 공로를 회의적으로 보는 비판자들도 있다. 정부가 아니라 인민의 노고를 통해 이뤄진 일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활동은 정책의 틀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중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능력주의 정치제도와 빈곤 퇴치의 기적 사이의 연관성을 나는 이렇게 지적한다. 관리들은 기층에서 중간층까지 직위에서 실적을 근거로 승진된다. 실적은 대개 경제성장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경제성장은 빈곤 퇴치의 열쇠다. 그러므로 관리 승진의 평가제도가 빈곤 퇴치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위계질서 하의 실험과 토지개혁을 실행한 관리들의 선발과 등용에도 경제 관련 능력이 적어도 부분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경제 관련 능력이 관리들의 출세 전망을 좌우하는 상당히 큰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누가 올라가는지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옳다. 링겐은 하급 관리를 승진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치안 확보의 실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치안 능력이 문제 되는 것은 대개 부정적인 의미에서다. 담당 구역에서 소요와 불안이 나타날 경우 승진에서 제외되기 쉽다는 말이다. “당에 대한 충성도 마찬가지다. 당에 대한 배신이 드러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치안 능력이나 당에 대한 충성은 승진의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없다.

대규모의 빈곤 퇴치가 다른 정치체제 아래서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 입증 책임이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한국과 타이완이 민주주의체제 아래 고소득 국가가 되었다는 링겐의 지적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빈곤을 벗어난 사람의 숫자를 놓고 본다면 중국과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타이완의 경제성장은 대부분 별로 민주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고, 본격적인 민주화 이후에는 성장이 둔화되었다.

정치에 있어서 우수성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비평들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는 우수한 특성을 가진 지도자를 뽑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이 다 말이 안 되는 짓이다. 네이선은 이렇게 주장했다. “벨의 능력주의 이론에서 제일 큰 문제는 좋은 결정을 내릴 우수한 지도자를 확보한다는 생각이 결정 중에 옳은 결정이 있고 틀린 결정이 있다는 관념을 발판으로 한다는 점이다.”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결정이 있을 수 없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결정 중에는 좋은 결정이 있고 덜 좋은 결정이 있는 것 아닌가. 기후 변화를 방치한다든지, 멋대로 전쟁을 건다든지 하는 끔찍한 결정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지난 30년간 빈곤 퇴치에 역량을 집중하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만큼 양식 있는 지도자들이 중국에서 선발되어 정치를 맡아 온 것은 누구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중국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변화를 겪어 나갈지 몰라도, 정치제도의 개선이 지금까지의 능력주의 제도를 폐기하는 방향이 아니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필요는 분명하다.

능력주의 원리에 따라 선발된 지도자들의 권력에 제약의 필요가 있다는 점을 나는 제3장에서 밝혔다. 제대로 된 정치체제라면 지도자가 좋은 일을 하도록 권한을 부여함과 동시에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해야 한다. 그런데 두 가지 요건 사이의 균형점을 놓고는 타당성을 가진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정치문화의 차이나 중국인들이 국가적 상황이라 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중국인들은 권한 부여 쪽에, 미국인들은 제한 쪽에 대개 무게를 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세계에서 예상하기 힘든 금융위기나 환경 재앙에 대비해서 강력하고 효과적인 정부의 대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권한 부여 쪽으로 앞으로 더 기울어져 갈 것이 예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중국공산당이 보이기 시작한 노쇠현상으로 인해 앞으로 국가 운영이 어려워질 우려가 있다.

 

 

차이나 모델이 끝났다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유능하고 열성적인 지도자들이 이끄는 무한질주의 경제열차처럼 보였고, 세계무대에서 미국에 도전하는 위치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그런데 지금은 중국경제가 내부붕괴를 일으켜 전 세계가 거기에 빠져들고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떠돌고 있다.

중국 비관론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우려에는 과장된 감이 있다. 경제적 성공이 중국 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최근의 경제 난관이 큰 파장을 일으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많은 서방 분석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경제 성적의 하락으로 인해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잃고 정치체제가 위기에 빠지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는 분명히 잘못한 것이 있다. 주식시장의 거품을 키운 것이 가장 뚜렷한 사례다. 관영언론의 부채질 아래 개인투자자들이 상하이 주식시장에 몰려들어 주가 기록을 거듭거듭 갱신시켰다. 2015421일까지 주가가 연초보다 80%나 상승해 있는데도 온라인 판 <인민일보>에는 독자들에게 저축한 돈을 주식시장에 가져가라고 부추기는 기사가 실리고 있었다. “국가의 개발전략과 경제개혁의 확고한 뒷받침으로 주식의 수익성이 계속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거품이 터진 것은 2015612일이었다. 78일까지 상하이 시장의 총가치가 30% 줄어들었고, 727일에 8.5% 더 떨어졌다. 이에 대한 정부의 행정적-사법적 대응은 외부 관찰자들에게 갈피가 없고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들었다. 자원의 분배의 결정적역할을 시장에 맡겼다고 하는 정부의 공식 해명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경제적 능력에 의거하여 발탁된 것으로 여겨지는 중국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었을까? 어차피 주식가격을 낮추는 쪽으로 작용했을 국유기업 개혁이나 IPO 개혁처럼 어려운 개혁을 쉽게 하기 위해 시장을 이용한 것으로 보는 정도가 너그러운 시각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불장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거품이 터졌을 때, 대응은 차치하고 책임이 정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정부가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여부에 있다. 아무리 유능한 정부라도(또는 개인이라도) 실수는 있게 마련이고, 중국의 정치체제에는 완미하지 못한 구석들이 있다. 중국 정부가 시장개혁을 더 일관성 있는 방법으로 추진하는 정책으로 바꿀 수도 있다. 실패에 책임 있는 관리들을 더 투명하고 공개적인 방법으로 밝혀낼 수도 있다. 정부의 아래 층위에서 실험을 진행해 거기서 가려낸 결과가 좋은 정책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상황이 좋을 때만이 아니라 나쁠 때도 잘 대응하는 관리들을 우대, 등용하는 쪽으로 인센티브 구조를 바꿀 수도 있다. 정책결정 전의 토론과 심의 장치를 키우고 늘릴 수도 있다. 이런 조치는 정치체제를 크게 손보지 않고도 취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정권의 정당성을 판별할 진짜 시금석은 경제 운용에 실패할 때가 있느냐 여부가 아니다. 잘못을 바로잡을 능력이 있다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중국인 중 주식 투자자의 비율이 아주 작기 때문에 주식시장의 실수가 중국공산당 지배에 중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훨씬 더 심각한 경제 실패라도 정권의 근거를 흔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20019-11 테러 후 싱가포르 경제 붕괴 때 정권의 지지율이 (전에는 경제 상황에 연계되어 움직이는 지수였는데) 오히려 더 높아진 일이 있다. 경제 붕괴가 정부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정부 지도부를 여전히 유능한 경제 관리자로 보는 시각 덕분이었다. 사실 경제 상황이 나쁠 때는 모험적 정치개혁의 욕구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만약 중국의 경제 불황이 길어진다면, 그리고 중국 인민이 불황의 책임을 정부에 묻게 되고 상황 개선의 능력에도 불신을 갖게 된다면, 그러면 차이나 모델은 진짜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10%대 고성장 시대는 지나갔지만 중국이 부유해지고 서비스업 비중이 높은 경제체제로 옮겨감에 따라 그보다 낮은 성장률의 시기에 접어들 것이 예상된다. 실질구매력 기준으로 이미 세계 최대 규모인 중국경제로는 넉넉잡아 5-6% 성장률만 하더라도 고속성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국의 경제 실적이 35년간 우수했기 때문에 쉽게 비관적 전망으로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 인민이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은 생활수준 향상, 취업 기회의 확대, 그리고 미래 세대에 대한 희망이다. 이 조건들을 더 잘 충족시킬 다른 정치체제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더 심각한 위협은 그 정당성의 근거로 경제성장이 누리던 힘이 약해지는 현상이다. 지난 30년간 정부의 첫 번째 임무가 높은 성장률을 이루는 데 있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계속되어 온 것은 경제성장이 바로 빈곤 퇴치의 열쇠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리의 승진이 다른 무엇보다 경제 실적을 기준으로 한다는 데 별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문제가 훨씬 다양해졌고, 그중에는 경제성장에 대한 관점의 전환에 말미암은 것도 있다. 부패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환경오염, 빈부격차, 복지정책의 부실, 정부부채의 폭발적 증가 등 문제들이 있다. 앞으로는 경제성장률이 어떠하든 이 문제들을 다 잘 처리하지 못하면 정부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 것이다.

이러면 관리의 선발과 등용에 능력주의 원리를 적용한다는 정치체제가 복잡한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능력? 사회복지를 개선하는 능력? 부패를 줄이는 능력? 환경을 보호하는 능력? 빈부격차를 좁히는 능력? 정부부채를 줄이는 능력? 도대체 어떤 능력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단 말인가? 여러 능력을 종합한다면 그 배합 비율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득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을 테니 논란을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정부가 인민으로부터 힘을 얻을 필요가 있게 된다. 최선의 결정을 찾아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정책에 불만을 품는 각종 집단의 비판으로부터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인민의 힘이 필요하다.

요컨대 차이나 모델이 살아남는 길은 정부가 체제를 개방해서 기층부의 참여와 숙의 통로를 확충하는 것뿐이다. 숙의를 위한 얼마간의 장치는 그 정치체제 안에 이미 갖춰져 있다. 예를 들어 재산법이 전인대全人代를 통과하는 데 걸린 9년 동안 전문가 의견 청취와 공개토론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더 넓은 영역에서 비전문가들을 토론에 참여시키고 발언권을 키워줄 필요가 있다. 정책결정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결정에 대한 책임감을 확산시키기 위해 그런 개방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확대할 필요가 있고 당 내외에 토론과 숙의를 위한 장치를 늘릴 필요가 있으며, 실적이 나쁜 관리들을 도태시키는 투명한 제도가 필요할 것이다. 기층부의 선거민주주의가 개선되고 시급市級까지 확대되고 당 안에서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 공개청문회, 공론조사, 주요 의제에 대한 주민투표 등 현대 민주사회의 여러 개선책을 도입하는 것도 정치체제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기본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법치의 원칙을 더욱 굳건하게 세울 필요가 있다.

이런 방향의 변화가 많은 서방 분석가들의 견해처럼 11표의 원칙이 최고지도부 선출에도 적용되는 목표를 향해 필연적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완전한 선거민주주의의 시행이 중국을 과거의 혼란과 대외적 굴욕으로 돌려보낼 것이라는 걱정은 중국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다수 일반인이 가진 것이다. 아무리 바람직한 민주화의 길을 걷더라도 최고지도부까지 일반선거에 맡길 경우 현행 정치체제의 장점을 잃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현행 정치체제의 확실한 장점은 지도자들이 수십 년 단련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미숙성의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정책 결정에 장기적 관점을 취할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이 밝힌 2030년까지의 기후변화 대응책을 보라. 중국 정부니까 이 정책을 지킬 것을 믿을 수 있지, 미국 정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집권당이 바뀌면 전임 정권과의 차별성을 내세우기 위해 일부러라도 정책을 바꾸는 일이 많지 않은가. 최고지도부의 안정성은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지 모르는 기층부의 체제개혁 실험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중국이 완전한 선거민주주의를 도입할 경우, 공산당의 집권이 계속될 수도 있지만 국가 운영 경험이 적은 선동가가 권력을 쥘 수도 있다. 부유층의 재산을 몰수하고 일본에 전쟁을 걸고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몽땅 취소하자는 공산당 판 도널드 트럼프가 어느 날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유능하고 양심적인 정치가들도 다음 선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정책결정 과정에서 재선에 도움이 될 단기적 효과를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정책 관련 능력의 연마보다 선거자금 모금을 위해 똑같은 연설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써야 할 것이다.

중국 정부가 최고지도부 선출을 제외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를 도입하면서 기존 정치체제의 능력주의 측면을 보강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지금의 추세로는 전망이 밝지 않다. 지난 2년간 정부는 검열을 늘리고 시민사회에 대한 억압을 강화했다. 차이나 모델의 전망이 괜찮다면 억압적 통치방법에 의존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당장의 필요성은 시진핑 주석의 부패추방 운동에 있다. 중국근대사상 가장 길고 가장 치밀한 부패추방 운동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 부패, 즉 사적 이익을 위한 공권력의 남용이 치명적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성과 공공심이 지도자 자격의 중요한 일부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부패한 관리를 선거로 퇴출시킬 수 있는데, 능력주의 체제에는 그런 안전판이 없다. 중국의 전체적 부패 수준은 지난 30년간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근년의 소셜미디어 발달과 과시적 소비의 증가에 따라 더욱더 눈에 드러나는 현상이 되고 있다. 이것을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한 시 주석이 부패추방을 정권의 최우선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 운동에 부작용이나 편향성도 다소 있는지 모르지만, 체제 정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런데 운동의 주도세력이 당 내에 공포감을 불어넣음으로써(빠른 효과를 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적대자들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지도부가 평소보다 더 심한 불안감을 가지고 인권 억압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부패축소를 위한 장기적 대책으로 독립적 감찰기구 설립,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분리, 공무원 급여수준의 향상, 유교 윤리에 입각한 공무원 교육 등이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어서 효과를 보려면 몇 년, 심지어 몇 십 년이라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억압적 정책의 또 한 가지 이유는 이웃나라들의 상황을 참고한 데 있다. 중국과 비슷한 경제개발 정책을 수행한 한국과 타이완에서 선거민주주의의 득세가 뒤따랐고, 최근 홍콩의 민주화운동 때문에 그 물결이 중국에도 닥칠 전망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본토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커녕 논의에조차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지나친 걱정이다. 우선, 동아시아의 작은 정치공동체들은 민주화를 향한 강력한 이념적 압력을 미국으로부터 받아 왔다. 더 중요한 점은 능력주의 이념이 중국에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조사에서나 대다수 사람들은 일반인이 정치에 참여하고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가 절차상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원리보다 유능한 지도자들에게 공공선 실현의 책임을 맡기는 후견인 원리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육이 바뀌면 그런 추세도 바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중국 최고의 명문학교 중 하나인 칭화대의 내 제자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민주주의 원리와 능력주의 원리의 득실을 두루 따져본 학생의 대부분은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쪽의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언론의 자유, 정치의 투명성, 법치주의 등 서양식가치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있고, 그 요구는 근대화의 진전에 따라 더욱 커지고 있다. 조심스럽게 구축해 온 능력주의 체제를 무너트릴 위험이 있는 방식의 선거민주주의 도입을 배제하면서 정권의 개방성을 늘릴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 방안은 국민투표를 통해 온건한 개혁방법에 대한 인민의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확대하지만 최고지도부에 대한 선거나 1당체제에 도전할 정당 결성을 배제하는 개혁방법이다. 인민의 동의를 받아낸다면 정권의 정당성이 강화되는 데 따라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을 걱정할 필요 없이 개방성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보다 비관적인 전망도 가능하다. 경찰과 군대를 발판으로 한 포퓰리스트 독재자가 나타난다면 어찌할 것인가. 톈안먼 방식의 억압으로 비판을 잠재우면서 외부를 향한 군사도발로 지지를 확보하려 들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중국의 역사를 보면 가혹한 법가식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기적 효과를 기준으로 보면 선택의 방향은 분명하다. 중국이 능력주의 원리를 지키면서 정치체제를 개방할 수 있다면 그 가버넌스 모델은 다시 생명력을 충전할 수 있다. 그 모델의 성공에는 외부세계의 반대가 아닌 협조가 하나의 중요한 조건일 것이다.

 

 

1천하, 2체제를 바라보며

 

내가 희망하는 정치의 세계는 이런 모습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부의 모든 층위 지도자를 선거로 뽑고,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최고 층위 지도자들을 고시로 임용해 수십 년에 걸친 훈련을 통해 키워낸다. 양쪽 체제 모두 자기네 약점을 인정하면서 정부의 할 일을 잘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을 벌인다. 정부의 할 일이란 당연히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인데, 그 인민은 그 정부의 정책에 영향 받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능력주의의 좋은 점을 배움으로써 민주주의체제를 향상시키고 능력주의 사회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배합함으로써 능력주의체제를 발전시킨다.

어느 쪽 체제가 우월하다는 주장은 의미를 잃는다. 양쪽 체제는 서로 다른 기반 위에 구축되어 있으면서 상대방 체제의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한다. 서방을 이끄는 미국과 동방을 대표하는 미국은 이해관계가 겹치는 영역에서 협력을 위해 노력한다. 가치의 다양성이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받는 세상에서, 각자의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정치체제의 다양성은 세상 전체를 위해 바람직한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희망사항에 그칠 것을 나는 걱정한다. 민주주의체제의 장기적 전망을 나는 걱정스럽게 내다본다. 문화, 역사, 조건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채용할 수 있다고 하는 정치적 다원주의가 중국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또한 학습의 문화를 가진 중국사회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좋은 것을 배워오려는 자세를 지킨다. 지금처럼 경제가 침체되고 억압이 강화되는 암울한 시기에도 시찰을 위해 공무원들을 해외로 파견하고 정부보고서 작성에 외국인의 참여를 환영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반면 민주주의국가들은 자만심에 빠져 장래를 대비하는 자세를 잘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근본적인 정치 변화의 필요가 일어나더라도 내부에서만 해결책을 찾는 감정적이고 편협한 반응만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만약 중국식 능력주의 정치제도가 개선과 개혁을 계속하는 동안 민주주의사회들이 끝끝내 자만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를 갖추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결국 인민의 마음을 잃고 능력주의가 전 세계 정치체제의 지배적 원리가 될 것이다.

시민들이 지도자를 선택할 자기네 권리를 제한하는 데 자발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능력주의 정치체제가 인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민주주의체제보다 나은 실적을 계속해서 보여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혹시 지금부터 1백년 후라면, 정치지도자를 시험으로 뽑은 다음 하위직에서의 실적에 따라 고위직으로 승진시키는 원리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사람들은 도대체 사회를 이끌 지도자를 11표의 원칙에 따라 뽑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옛사람들이 어떻게 하게 되었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문천

 

 

201310월에 출처가 모호한, 얍삽한 만화동영상 하나가 인터넷에 떠다녔다. [1] 두 주일 동안 1천만 이상 조회수를 기록한 이 동영상은 여러 나라에서 지도자가 선택되는 서로 다른 방식을 대비시킨 내용이었다.

[1] http://world.time.com/2013/10/17/whats-the-secret-to-chinas-incredible-success/.

먼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혜성 같은 등장이 그려져 있다. 수억 달러 캠페인 비용을 들여 11표 원칙에 따른 전국 선거의 형태로 나타난 승리, 그 과정에 민주주의딱지가 붙어 있었다. 또 한편 시진핑 주석이 중국 최고의 권좌에 오르는 수십 년의 도정이 그려져 있다. 지방 말단 현급의 초라한 자리에서 시작해 시, , 급을 거쳐 중앙위원회, 정치국, 그리고 마침내 정치국상임위원회에 이르는 승진의 모든 단계에서 그 정치적 지도력을 입증할 엄격한 심사를 겪어온 과정, 여기에는 능력주의딱지가 붙어 있었다. 최고 정치지도자를 선발하는 데 중국식 능력주의에 아무런 도덕적 결함이 없다는, 어쩌면 민주주의적 선거보다 더 우월한 원리일 수도 있다는 뜻을 풍기는 동영상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어느 부서에서 만든 동영상일 것 같다. 그런데 만약 능력주의가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중국공산당은 그 출처를 밝히지 못했을까? 나아가, 왜 중국공산당은 정치적 능력주의를 공식적으로 표방하고 그 제도를 자랑스럽게 내놓지 못하는 것일까?

중국식 능력주의 정치제도가 현실에서 결함을 가졌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추구하는 체제에서 정치적 진보(또는 퇴보)를 평가하는 도덕적 기준이 어떤 것일까 하는 문제를 여기서 떠올릴 수 있다. 다른 문제들도 있다. 동영상에는 능력주의 정체제도와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하지만 능력주의와 민주주의의 장점을 결합한다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동영상에는 반대자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가혹한 탄압이 그려져 있지 않다. 제도가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반대자를 애써 찍어 누를 필요가 있단 말인가? 능력주의 정치제도가 정당한 것으로 인민의 눈에 비쳐지고, 따라서 압제적 방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런 운영방법은 없을까? 이 책은 이런 질문들에 관한 생각을 담은 것이다.

능력주의는 정치이론 중 가장 연구가 많은 주제이면서 또한 가장 적은 주제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든 서양에서든 뛰어난 능력과 덕성을 가진 지도자를 선발해 권력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늘 중요한 것이었다. 이유는 자명한 것이다. 과학계에서도, 법조계에서도, 기업체에서도, 지도적 위치에는 필요한 훈련을 거친 자격자를 필요로 한다. 제도 중 가장 중요한 제도인 정치제도라 해서 예외일 수 있는가?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다니엘 벨(1919-2011)은 말했다. “정무직에는 정치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어느 사회에서나 삶의 질은 지도력의 질에 상당 정도 걸려 있다. 한 사회의 지도부를 가장 뛰어난 인재로 채우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문제가 있는 상황이다.”[2] 공자와 플라톤부터 주희, 존 스튜어트 밀을 거쳐 손문과 월터 리프먼에 이르기까지 정치사상가들이 현명하고 정당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제일 잘 갖춘 인물에게 지도력을 맡기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고심한 것이 이 때문이다.

[2] Daniel Bell, "On Meritocracy and Equality." National Affairs 29 (1972 가을): 66-67. 벨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 주요 사상가 중 능력주의 이념을 옹호한 몇 안 되는 사람의 하나다. 그는 경험 많고 이해관계에서 초연한 정치지도자들로 구성되어 공동선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원로원House of Counselors’을 제안하기도 했다.(Bell, "The Old War: After Ideology, Corruption," New Republic, 1993823, 30일자) 벨은 시대정신에 맞추는 데 솜씨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 주제를 놓고는 너무 늦었고, 또한 너무 빨랐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방향의 노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중국에서는 지식인과 교사보다 군인, 노동자, 농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마오쩌둥 사상에 이유가 있었다. 혁명지도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참여적 사회민주주의를 밑바닥에서부터 쌓아올릴 것을 선포했고, 이에 따라 중국 대륙에서는 정치적 엘리티즘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일체 사라졌다.[3] 서방사회에서는 선거민주주의의 패권에 이유가 있었다. 민주주의제도의 역할은 인민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게 하는 데 있을 뿐이며, 후보자의 자격은 투표자의 심사에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이성을 가진 투표자가 선택을 잘하기만 한다면 좋은 지도자의 자격이 어떤 것인지, 자격자를 잘 선발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이론가들의 관심은 정치 등 사회생활의 여러 부문에서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방법이라든가 국가 안에서, 그리고 전 세계 안에서 적정한 부의 분포를 유도하는 방법 등으로 옮겨갔다.

[3] 능력의 이념이 남용의 위험 때문에 배척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다른 이념의 경우(예컨대 인민의 동의에 근거한 통치라는 이념) 남용이 되는데도 이념 자체는 배척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지프 케트는 (미국 경우를 놓고)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 미국인은 자기 투표권의 진정한 가치에 회의감을 품고 있다. 투표자들이 아니라 막후의 강력한 이해관계자들이 정책 결정을 좌우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동의에 근거한 통치라는 이념을 버리는 사람의 거의 없다. 능력과 동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나란히 내걸었던 두 이념에 지금 사람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인다. 동의에 근거한 통치가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나타나도 이념 자체를 걸고넘어지는 사람이 없는 반면 능력 위주의 정치에 문제가 생기면 비난과 조롱이 이념 위에 쏟아진다.” 능력 이념의 시행이 언제나(또는 대개)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면 이념이 반성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라고 케트는 주장한다. “이 나라의 역사를 통해 능력의 원리가 종래 소외되어 온 집단들의 평등권 주장에 힘을 얹어주어 왔다.” Kett, Merit: The History of a Founding Ideal from the American Revolution to the 21st Century (이사카, 코넬대학 출판부, 2013), 261-262.

능력주의 정치제도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곳은 조그만 도시국가 싱가포르였다. 1960년대 이래 싱가포르 지도자들은 가장 유능한 인재를 지도자로 키워내는 제도를 제창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의 제한까지 감수한다는 것이었다. 정치지도자들은 선거제도에 영합하기보다 장기적 전망을 세워야 할 것이며, 대중추수적 정치가들이 목전의 이해관계에 매몰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정치제도를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하나의 보편적 이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고, 따라서 싱가포르의 사례가 외부세계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인구와 자원이 적고 적대적인 이웃나라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싱가포르에 능력주의 원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니, 이처럼 특이한 도시국가에나 적합한 제도를 다른 곳에서 참고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근년의 두 가지 변화로 인해 능력주의 정치제도가 전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첫째, 서양식 민주제도의 가버넌스 위기로 인해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맹신이 흔들리고, 정치적 대안을 찾는 공간이 열렸다. 서방세계 외부에 민주제도를 이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정도가 아니다. 서방세계 안에서 시행해 온 민주제도가 명확한 긍정적 모델 노릇을 못하게 된 것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경제상황의 악화에 따라 유권자들이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나라에도 장기적으로 불리한 정책을 내거는 대중추수적 정치가에게 쏠리는 일이 많아진 것이 한 가지 예다. 서방 민주국가에도 능력주의 원리와 제도를 더 많이 도입함으로써 가버넌스 향상을 기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개혁적 정치사상가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 까닭이다.[4]

[4] Nicolas Berggruen and Nathan Gardels, Intelligent Governance for the 21st Century: A Middle Way between West and East (케임브리지, Polity Press, 2012)

또 하나, 중국의 굴기가 능력주의 정치제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이래 중국에서 개발된 정교하고도 포괄적인 인재 양성 및 등용 제도가 놀라운 경제 발전의 발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왕조시대의 제도와 비슷하게 하위직에서부터 시험과 실적 고과를 통해 관리를 승진시키는 제도다. 이 능력주의 제도에 숱한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규모나 경제발전 단계가 비슷한 민주주의 국가에 비해 성과가 좋은 편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능력주의 실험은 전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싱가포르와 달리 중국은 세계를 뒤흔들힘을 가진 나라다. 중국 경제가 이토록 빨리 자라나 세계 2위의 자리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 사람이 1990년대 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부터 20년 후에는 중국식 능력주의 정치제도가 서양식 민주제도에 대한 도전 내지 또는 대안으로 검토되고 있을지 모른다.

더 나아가기 전에 용어 몇 가지를 확실히 해두겠다. 이 책은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옹호하는 책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도 행정직과 사법직의 능력 기준으로 선발된 전문가들에게 권한을 주기는 하지만, 이 전문가들은 선거로 뽑힌 지도자들에게 간접적인 방법으로라도 책임을 지는 입장이다.[5] 그들의 권한은 엄격히 규정된 영역 내에서만 작용하고, 최대한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공무원은 선거직의 정치인들에게 지시를 받아 업무를 처리해야 하고, 거기에 자신의 관점을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6]

[5] Stephen Macedo, "Meritocratic Democracy: Learning from the American Constitution,"Philip Pettit, "Meritocratic Representation," The East Asian Challenge for Democracy: Political Meritocracy in Comparative Perspective, ed. Daniel A Bell and Chenyang Li(뉴욕,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 2013). 사법 평론과 미국 대법원에 관한 논쟁을 보면 정치적영역과 사법적영역 사이의 경계가 분명치 않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원칙에 있어서는 사법관이 정치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6] 선출된 정치가가 결정을 하고 공무원이 실행을 한다는 이론적 원칙이 현실에서 종종 어그러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략]

중국 같은 능력주의 국가에서는 이와 달리 정치 지도자들이 넓은 영역에서 정치적 판단을 행하게 되어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직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공권력을 비롯한 최고의 정치권력을 행사한다. 요컨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능력주의 기준으로 선발된 관리들은 정치적 입장을 내세울 수 없는 반면 능력주의 국가의 관리들은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정치적 능력주의와 경제적 능력주의를 구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영어의 'meritocracy'는 경제적 자원 분배의 한 가지 원리를 가리키는 뜻을 갖고 있다.[7] 부의 분배에 있어서 계급이나 성분보다 능력과 노력을 기준으로 하는 원리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함에 있어서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이 이뤄진다는 선전과 달리 계급 배경에 따라 부가 분배되는 경향을 지적했다. 공산주의의 목적은 계급의 철폐에 있고, 자본주의체제 직후의 초급 공산주의 단계에서는 이런 선전을 현실로 만드는 데 목표를 둔다고 했다. “능력에 따라 거두고 공헌에 따라 나눈다는 원칙에 다라 경제 자원을 분배한다는 것이다.

[7]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The Rise of the Meritocracy(런던, 테임즈 앤 허드슨, 1958)에서 "meritocracy"란 말을 만들어 쓴 것은 비판적인 취지에서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정치적 능력주의와 경제적 능력주의를 혼동했다.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방법으로서 경제적 능력주의와 구분되는, 능력과 덕성을 가진 인물을 정치지도자로 선발한다는 정치적 이념을 중국어로는 현능정치賢能政治가 더 잘 표현할 것이다.

능력주의처럼 보이는 이 원칙은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만 개인 능력의 차이, 즉 자연이 부여한 생산력의 특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결함을 가진 것이다.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닌 타고난 능력으로 혜택을 누려서는 안 되고, 자기 잘못 아닌 생산력 부족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에 따라 거두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원칙에 따라 자원이 분배되는 고급 공산주의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8]

[8] Karl Marx, The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1875, Part I)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5/gotha/ch01.htm).

영향력이 큰 20세기 철학자 존 롤스도 겉보기의 공정한 경쟁이 비정한 능력주의 사회를 몰고 올 위험을 비슷하게 저적한 바 있다.[9] 능력을 갖고 태어나느냐 마느냐는 본인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타고난 능력이 부를 누릴 도덕적 자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산에 대한 공헌을 기준으로 부를 분배하는 대신 가장 불우한 집단에까지 혜택을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차등을 인정하는 차등의 원칙을 롤스는 옹호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금융가이던 벤 버냉키 미 연준 위원장(당시)2013년 프린스턴대학 졸업식 치사에서 비슷한 식으로 능력주의를 비판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능력주의 체제 아래서는 물려받은 유산에서 행운을 얻은 사람들, 건강과 유전자, 가족의 지원과 격려와 높은 소득수준, 교육과 취업의 기회 등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행운을 얻은 사람들이 가장 큰 보상을 받습니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체제가 최소한의 윤리적 기준을 충족시키고 공정성을 인정받으려면, 이 모든 방법으로 행운을 누리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공헌하고 자신의 행운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려는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10]

[10] Jordan Weissman, "Ben Bernanke to Princeton Grads: The World Isn't Fair (and you all got lucky)," The Atlantic, 2013.6.3.

 

경제체제로서의 능력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에 나는 공감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물질적 재산의 분배방법에 관한 하나의 특정한 이론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내 뜻은 능력주의 정치제도, 즉 정치적 권력을 능력과 덕성에 맞춰 부여한다는 원리를 옹호하는 데 있다. 경제적 자원의 분배 문제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고 정치적으로 실현가능한 능력주의 정치제도의 시행에 관련된 범위 내에서만 다룰 것이다.[11]

[11] 마찬가지로 교육에 관해서도 교육제도 내의 위치 배분 문제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고 정치적으로 실현가능한 능력주의 정치제도의 시행에 관련되는 범위를 제외하고는 능력주의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옹호할 생각이 없다.

 

1. 내용의 개관

 

정치 지도자를 11표의 원칙에 따라 뽑아야 한다는 관념이 많은 사회에 뿌리박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옹호하는 이야기를 꺼내려면 우선 선거민주주의 비판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대안이 필요하다는 사실부터 설득해 놓지 않는다면 어떤 대안을 제시하더라도 독자들이 거들떠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가 인간에게 본질적 가치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결과의 좋고 나쁨을 떠나 선거와 피선거의 권리를 옹호하는 철학가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에는 반대도 많다. 중국에서 선거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데는 투표행위의 본질적 가치 주장이 잘 먹혀들지 않을 것 같다.

동아시아 여러 사회의 정치 연구에서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측면보다 결과적 측면이 중시된다는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민주적 절차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보다 그로부터 얻는 좋은 효과를 더 중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민주적 선거가 좋은 효과를 일으킬 것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질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 민주주의의 흥행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부와 안정, 그리고 자유를 누리는 나라들은 모두 민주국가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도 장래에 심각한 위험을 불러올 염려가 있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고, 능력주의를 통해 이런 문제에 더 잘 대치할 가능성을 검토할 여지가 있다.

1장에서는 민주주의(국가 최고 지도부를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는 최소한의 의미에서)의 네 가지 중요한 위험을 제시하고 능력주의에 의거해 이를 해결할 이론적-현실적 방안을 각각의 결점에 붙여놓았다.

첫 번째 위험은 다수의 전횡이다. 비이성적이고 이기주의적인 다수파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소수파를 억압하고 나쁜 정책을 채택하는 쪽으로 권력을 휘두를 위험이다. 이론적으로는 투표자의 능력 검사가 최선의 해결책이고, 현실적으로는 싱가포르의 능력주의 정치제도가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위험은 소수의 전횡이다. 경제력을 장악한 소수 집단이 지나친 힘으로 정치과정에 개입해서 공공선에 부합하는 변화를 가로막거나 자기네 이익에 맞는 정책을 관철할 위험이다. 이론적으로는 유력계층을 배제한 시민단체의 개입으로 대응할 문제인데, 중국의 정치제도를 효과적 대안으로 검토할 수 있다.

세 번째 위험은 투표 집단의 전횡이다. 미래 세대나 외국인처럼 어떤 정책에 영향을 받지만 투표권을 갖지 못한 집단과 투표권을 가진 집단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후자의 입장이 언제나 관철된다는 문제다. 미래 세대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부기구의 설치가 이론적 해결책인데, 미래 세대에게 해로운 정책에 대한 거부권을 총통에게 두는 싱가포르 제도가 좋은 참고가 된다.

마지막 위험이 유능한 개인주의자의 전횡이다. 선거민주주의에는 사회 갈등을 완화하기보다 격화하고 갈등의 조화로운 해소책을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문제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합의제를 채택하는 것이 이 점에서 바람직하며, 중국의 정치모델에 갈등 해소를 위한 실제적 장점이 있다.

요컨대 선거민주주의의 중요한 문제들의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고 정치적으로 실행 가능한 방안들을 찾을 수 있다. 논의의 목적이 중국의 경우에 능력주의가 가진 장점을 확인하는 데 있는 것이라면, 능력주의 정치제도가 어떤 경우에나 선거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강경한 주장까지 할 필요가 없다. 중국의 1당 체제가 쉬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가정 아래 개선할 방향을 찾기만 하면 된다.[12]

[12] 만약 중국에서도 (소련에서처럼) 1당 체제가 무너지고 서양식선거민주주의가 들어선다면? 그런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라도 그 민주주의에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에서처럼) 중국 정치문화의 특색이 가미될 것이다. 그 중요한 특색 하나가 능력주의 정치원리일 것이므로 이 책에서 제시하는 능력주의 원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역시 유효할 것이다.

2장은 네 가지 전제 위에 전개된다. (1) 자질이 뛰어난 지도자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이 좋은 일이다. (2) 중국의 1당 통치체제는 가까운 장래에 바뀌지 않을 것이다.[13] (3) 중국 정치제도의 능력주의 측면에는 좋은 점이 있다. (4) 여기에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

[13] 형식적으로는 중국도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다당제 정치체제다. 그러나 등록되어 있는 8개의 작은 정당들이 공산당과 권력을 놓고 경쟁하게 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전제 위에서 나는 사회과학, 역사학, 철학의 관점에 입각해 평화 상태에서 근대화 진행 중인 거대한 능력주의 국가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어떤 특성이 중요한 것인지 제시한다. 아울러 그런 특성을 가진 지도자들을 뽑아 올리기 좋은 제도적 방법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런 특성을 기준으로 삼아 중국에서 작동되고 있는 능력주의 제도를 평가한다. 결론은 중국의 현행 제도에는 개선의 여지가 있고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요한 지적 능력을 판별하기 위해 더 효과적인 심사방법이 필요하고, 정책 작성에 필요한 교섭 역량을 늘리기 위해 여성 지도자의 역할이 늘어나야 하고, 봉사정신이 투철한 관리들의 발탁을 위해 상호평가 제도를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그 장점을 자랑하는 것보다 그 단점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수 있다. 3장에서는 능력주의에 흔히 따르는 세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논한다. (1) 우월한 능력을 근거로 선발된 통치자가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 (2) 정치적 위계질서가 고착되어 사회유동성을 떨어트릴 위험. (3) 권력구조 외부에 체제의 정당성을 납득시키는 어려움.

최고위층에 대한 선거민주주의 시행 가능성이 중국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나는 선거제도 없이 위의 문제들에 대비할 길이 있을지 살펴본다. 부패(권력 남용) 문제에 대해서는 독립적 감찰기구의 운용, 급여 수준 향상, 도덕 교육 강화 등의 대책이 있다. 체제 경색 문제에 대해서는 겸손한 정치적 자세를 취하고 집권당을 다양한 집단에 개방하며, 새로운 종류의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 선발을 쉽게 하는 노력 등 대책을 검토한다.

다만 체제 정당성 문제는 정치적 참여의 기회를 늘려주는 것 외에 대책이 없다. 국민의 명시적 동의를 어떻게든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제는 능력주의와 민주주의 원리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데로 집약된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한 최고지도자 선출이나 경쟁적 다당제 없이도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4장에서는 민주적 능력주의의 몇 가지 형태를 놓고 득실을 살펴본다. 우수한 지도자를 뽑는 능력주의 원리와 인민이 지도자를 선택하는 민주주의 원리를 결합하는 여러 모델을 검토하는 것이다. 첫째 모델은 두 원리를 투표자 차원에서 결합하는 것인데,(교육수준에 따라 가산점을 주는 등) 아무리 철학적으로 타당성이 있다 해도 현실적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다.

두 번째, 수평적 모델은 중앙 정치기구 차원에서의 결합인데, 설령 중국처럼 능력주의의 인기가 높은 정치 환경에서라도 그런 구조를 세우고 유지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세 번째 수직적 모델, 중앙정부 차원의 능력주의와 지방정부 차원의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구조라면 지금 중국의 정치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것도 아니고 정치철학의 관점에서도 충분한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정치구조 모델을 위는 능력, 아래는 민주로 단순화해서 볼 수만은 없다. 최상층과 최하층 사이에 폭넓고 체계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중간층이 필요하다. 마지막 장에서는 중국 모델을 구성하는 세 개 층을 그려 보이고 마오쩌둥 이후의 중국 정치개혁이 바닥의 민주주의, 중간의 실험, 꼭대기의 능력주의라는 원칙에 따라 펼쳐져 온 경위를 설명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는데, 이 간극을 줄이는 방법을 나는 제시하는 것이다. 능력주의 체제의 가장 큰 약점이 정당성 문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 어느 시점에서 중국 정부는 국민투표 같은 방법을 통해 민주적 능력주의체제에 대한 인민의 동의를 구할 필요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이 장 끝에서는 중국 모델의 세계적 확장 가능성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내놓는다. 역사와 문화의 배경이 다른 사회에서 쉽게 이 모델이 채택되지는 않겠지만 모델의 구성 요소들이 부분적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 정부가 그런 확장에 노력을 기울일 여지도 있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뛰어난 덕과 능력을 갖춘 정치지도자를 육성하고 선출하는 데 목적을 둔 정치체제의 장점을 최대화하고 그 단점을 최소화하는 방안, 특히 지금의 중국 현실 속에서 시행 가능한 방안을 찾는 것이다. 인민에게 이로운 정책을 수행할 필요를 지적하는 외에는 그런 지도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일부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중국은 거대하고 복잡한 나라이므로 어떤 과제가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인지 때와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인민의 실제 요구가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고는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약간의 지침이라도 독자에게 제공할 필요를 느끼고 인터넷에 발표했던 내용을(http://press.princeton.edu/titles/10418.html) 두 개의 부록에 담아놓았다. 첫째 부록은 조화 계수Harmony Index’, 평화로운 질서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심을 투영하는 네 가지 사회관계가 각 사회에서 얼마나 잘 펼쳐지는지 보여주는 지표를 담은 것이다. 중국에서든 어디에서든 사회의 진보(또는 퇴보)를 알아볼 수 있는 지표다. 특히 중국과 같은 정치 환경에서 이 지표의 또 한 가지 가능한 용도는 관리들의 고과考課에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유일한 기준으로 보던 관행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지금, 이런 기준의 채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두 번째 부록은 어느 중국공산당 정치관료와의 정치적 대화(대면 접견과 이메일을 통한) 내용을 담은 것이다. 정치에 관한 내 생각은 주로 유교적 가치에 입각한 것이지만, 능력주의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유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경험적 측면에서도 규범적 측면에서도 유교의 역할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능력주의에 대한 생각을 빚어내는 데 유교의 실제 역할이 작지 않을 것이므로 중국의 정치적 능력주의와 유교의 관계에 직접 초점을 맞춘 이 대화를 내놓는 것이다. 학식이 깊은 공산당 간부가 개인적 견해를 허심탄회하게 표명한 흔치않은 자료다. 이 부록의 제목을 유가와 공산당 사이의 대화라고 붙여 놓았는데, 대화의 끝에 이르면 누가 어느 쪽인지 판별이 잘 안 될 것이다.

 

2. 연구방법

 

능력주의는 큰 잠재적 중요성을 가진 주제인데도 오늘날 정치학계에서 이론화 작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연구를 위해서는 사회과학, 철학, 역사학의 넓은 범위를 참고로 하여, 주제를 직접 다루지 않은 내용까지 끌어 모아야만 했다. 능력주의 정치제도의 이론과 실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문헌조사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내 생각을 키워내기 위해(너무 이기적이었나?) 철학, 역사학, 사회과학 연구자들을 모아 능력주의 정치제도의 흥기(또는 재기) 전망과 그것이 중국 및 세계의 정치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토론하는 두 차례 학술회의를 열었다.

영어를 사용한 첫 회의는 20121Li Chenyang과 공동으로 싱가포르의 난양기술대학에서 연 것인데 그 내용이 The East Asian Challenge for Democracy: Political Meritocracy in Comparative Perspective(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이란 책으로 묶여 나왔다. 중국어를 사용한 두 번째 회의는 칭화대 철학과와 상하이 春秋연구소 공동 주최로 201210월 칭화대에서 열렸고 그 내용은 20133<文史哲> 특집호에 실렸다. 이 두 차례 회의에서 이뤄진 지적 교류를 통해 얻은 바가 엄청나게 많았고, 중국과 싱가포르 정치지도자들과의 대담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얻었다. 그리고 초고 작성 중 시간을 내어 원고를 읽어보며 의견을 준 고마운 동료들이 몇 명 있다.

지난 몇 해 동안 칭화대학, 상하이교통대학, 싱가포르국립대학 학생들에게 능력주의에 관한 글을(내 설익은 생각을 포함해서) 읽게 했고, 그들의 비평과 의견에서 얻은 것이 또한 적지 않다. 특히 싱가포르국립대학 철학과 대학원생들이 이 책 초고를 놓고 윤독회를 열어 많은 의견을 준 데 깊이 감사한다. 이 책 내용은 이 많은 분들 덕분에 많이 향상되었다.

 

3. 동기에 관하여

 

나는 왜 이 주제에 매달려 왔는가? 내가 능력주의 정치체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교 전통과의 만남 덕분이었고, 따라서 이 주제에 관한 초기의 내 글에서는 현실정치보다 유교사상의 일환으로서 능력주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근년 들어 중국의 정치체제가 능력주의 특성을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칭화대의 우수한 내 제자들이 갈수록 많이 중국공산당에 채용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의 정치철학적 의미를 중국의 현실정치와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 정치적 중요성을 가진 문제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중국과 서방의 언론매체에 몇 편 기고문을 보냈다. 그 기고문은 비평가들의 융단폭격을 맞았다. 중국공산당의 나팔수에서 골드먼삭스(내 아내가 다니는 회사)의 첩자까지, 안 들어본 소리가 없다. [14] 그래서 내 생각을 제대로 담고 학술적 기준을 충족시키되 일반 독자가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정한 5개년계획을 최선을 다해 실행한 결과물인 이 책에서 얼마만큼 그 뜻이 이뤄졌는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14] 이런 비판에 내가 일체 대응하지 않은 ([생략]) 까닭은 제대로 된 대응을 위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이 책 내용의 일부를 발표할 때도 똑같은 문제에 마주쳤다. 예를 들어 제2장 내용을 발표하면 그에 대한 질문과 논평이 제3장이나 제4장에서 이야기할 내용까지 번지고, 4장 내용을 발표하면 제1장이나 제3장 내용과 관련된 질문과 논평이 쏟아지는 식이다. 그래서 그런 궁금증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이 책 전체를 다 써서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생략])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로 중국에 관한 책을 왜 미국의 학술출판사에서 내게 되었는지도 해명이 필요하겠다. 내가 영어로 글을 쓴다는 것이 이유의 하나다. [15] 머잖아 중국어로도 번역출판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사회에서 반향을 좀 일으키기 바란다. 정치체제의 작동방법은 중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주제인데, 이 책이 정치적 진보(및 퇴보)를 판별하는 기준에 관한 토론이 더 늘어나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

[15] 또 하나 이유는 내가 주요 영-미 대학 출판부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일반 출판사에 비해 학문적 자유와 학문적 능력주의를 존중하는 자세를 출판 과정에서 느낄 수 있다.

아울러 이 책이 영어권 독자들에게는 능력주의 정치체제의 목표인 현능賢能정치의 이념에 대한, 그리고 현실 속의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이해를 늘려주기 바라며, 나아가 서방 민주주의국가에서도 능력주의 개혁의 가능성 탐색을 이끌어내기 바란다. [16] 영어권 독자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 온 사실을 중국의 관점에서 새로 바라보게 되는 효과는 바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이 책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베이징에서 십년 넘게 살면서 가르치는 일을 해왔기 때문이고, 그런 경험 없이 이 책과 같은 내용에 접했다면 나 또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17]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내 정치적 입장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로서 중도적인 편이다.

[16] 민주국가에 관해 내가 생각하는 개혁은 N. Berggruen and N. Gardels, Intelligent Governance for the 21st Century: A Middle Way between West and East (케임브리지, 폴리티 프레스, 2012)에 제시된 것처럼 민주주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선거민주주의가 실행되고 있는 국가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무너트리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실제적 대안이 군사독재나 포퓰리즘 권위주의 체제로 빠지기 쉽다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이고, 능력주의 정치체제가 (선거민주주의와 달리) 일거에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능력주의가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실제적 대안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은 그 원리가 주류 정치문화에서 익숙한 것이고, 지난 30년간 그 원리에 따라 정치체제가 ()구축되어 왔으며, 향후의 개선도 지금 만들어져 있는 모델 위에서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에서 더 상세히 논할 것이다.)

[17] 엄밀히 말해서 중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정치적 견해의 이념스펙트럼 위에서 내 책은 중간쯤 위치일 것이다. 왼쪽에서는 사회주의 신봉자들과 중국적 특색의 민족주의자들이 국민투표나 언론의 자유 확장에 반대할 것이고, 오른쪽에서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지지자들이 최고지도부의 투표 선출에 반대하는 내 주장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서방 독자들 중에는 이 책 내용을 도발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내 뜻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서방 사회에 더 많은 표현의 자유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의 서양식 민주주의 이해에 비해 서양인들의 중국식 능력주의 이해가 크게 뒤쳐져 있다. 그 간격을 줄여 대칭성에 접근하자는 것이 내 듯이다. 언제고 중국인과 서양인이 이념적 간극이나 문화적 오해 없이 격조 높은 정치 토론을 벌이게 되는 날이 오기 바라며, 내 노력이 그런 방향으로 조그만 공헌이라도 될 수 없다면 나는 깊은 보람을 느낄 것이다.

 

Posted by 문천

[책 소개] Daniel Bell, <The China Model> (Princeton U P, 2015)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 둘 중에서 덜 나쁜 후보를 선택할 기회가 미국 유권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역대 최저의 투표율이 예상된다. 기권자 중에는 정치적 책임감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이 보통인데, 이번에는 책임감이 특히 강한 사람들 중에 기권이 많을 것 같다. 자기가 투표한 후보가 당선될 위험이 두려워서다.

민주주의 종주국 행세를 해온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과연 민주주의가 국민을 잘 만족시키는 제도인지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도 민주화를 이룬 지 30년째 되는데, 그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가. 아직도 경제 민주화까지 이루어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믿는 사람이 많지만, ‘민주화자체가 어떤 한계를 가진 것인지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200년 넘게 민주공화국을 운영해온 나라 국민들이 갈수록 불만스러운 상황을 겪고 있다면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가 짧다는 탓만 하고 있을 수 없다.

마침 번역을 맡은 책, 대니얼 벨의 <차이나 모델(The China Model)>에서 많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 10여 년째 칭화대 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가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안팎의 압력에 대항해서, 중국의 정치 발전이 민주화 아닌 다른 길로 나아갈 가능성을 제시한 책이다. “민주주의의 한계와 능력주의 정치체제라는 부제처럼 능력주의(meritocracy)가 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중국의 현행 1당독재를 옹호하는 선전이라고 하는 비판을 저자도 많이 의식한다. 나와 주고받은 메일에서도 자기 주장이 규범적(normative)’ 담론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책 안에도 중국의 현행 제도와 관행에 대한 비판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자신은 엄정한 자세를 지키는데, 통념화되어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맹신 때문에 자신을 이단시하는 것이라고 불평한다.

핵심 개념인 ‘meritocracy’의 번역을 놓고 저자와 의견 마찰이 있었다. 저자는 能力主義가 온당치 않다며 賢能政治尙賢制를 권했다. ‘meritocracy’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지목받아 왔는데, 그런 맥락에서 쓰여 온 능력주의를 피하고 싶다고 했다. 분배에 적용되는 경제적 능력주의아닌 정치적 능력주의를 자기는 뜻한다는 것이었다.

저자의 뜻을 알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중국 독자에게라면 현능정치상현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그러나 한자어를 쓰면서도 한자 자체에게서는 멀어진 한국 독자들에게는 어색할 것 같다. 그리고 중국 독자에 비해 미국식 민주주의 관념에 더 깊이 길들여진 한국 독자에게는 현능정치’, ‘상현제처럼 좋은 뜻을 풍기는 용어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이런 뜻을 알리면서 이렇게 붙여 썼다.

책읽기를 하나의 여행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생각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 출발점은 독자에게 익숙한 장소로 정해준 다음, 책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저자와 역자가) 보여주고 싶은 장소로 안내해 가는 편이 더 쉽고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벨 교수는 즉각 답장을 보내 한국 독자의 성향과 그에 대한 전략의 판단을 전적으로 역자에게 맡긴다는 뜻을 알려주었다. 교신을 시작한 지 며칠 안 되었을 때였는데, 핵심 개념의 표현을 선선히 맡기는 데는 나도 감동했다. 이를 통해 상호 신뢰가 세워져 저자로부터 최고 수준의 협력을 받게 되었다.

이 책의 목차는 이렇게 되어 있다.

 

서론

1장 민주주의는 과연 제일 덜 나쁜 정치체제인가?

2장 능력주의 정치체제에서 좋은 지도자를 뽑는 방법

3장 능력주의 정치체제의 문제점들

4장 민주적 능력주의 체제의 세 가지 모형

결론: ‘차이나 모델을 실현시키는 길

 

민주주의에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나서려면 왜 대안이라는 게 필요한지, 민주주의의 한계가 무엇인지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1장에는 (1) 다수의 전횡, (2) 소수의 전횡, (3) 투표집단의 전횡, (4) 유능한 개인주의자의 전횡이 민주주의체제의 일반적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있다. 운영상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옹호자들도 최상의 체제아닌 제일 덜 나쁜 체제라고밖에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오늘의 미국 유권자들이 클린턴과 트럼프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지 명쾌한 이해가 가능하다. 선거민주주의에는 온건한 지도자들에게 너무 많은 핸디캡을 안겨주고 별난 인간들만 활개 치게 해주는 경향이 있다.

2장에는 능력주의 정치체제가 자격 있는 지도자의 선발에 유리한 점이 설명되어 있다. 1장에서 지적된 민주주의체제의 문제점에 대비할 때 능력주의체제의 유리한 점은 분명히 이해된다. 저자가 말하는 지도자의 능력이란 것이 포괄적 의미를 가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지식과 사고력만이 아니라 사교능력, 덕성처럼 통상적인 능력주의논의에서 제외되는 요소들이 들어간다.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여러 가지 특성들이 아울러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3장에는 오늘의 중국 정치체제가 보여주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능력주의체제의 약점이 집중적으로 조명되어 있다. 권력 남용, 즉 부패나 권력집단의 폐쇄성처럼 흔히 지적되는 문제들은 기술적 대처가 어렵지 않은 것으로 저자는 본다. 저자가 근본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합법성(legitimacy)’ 문제다. 인민의 위임을 확인하는 선거민주주의체제와 달리 능력주의체제의 권력의 근거에 대해서는 쉽게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능력주의를 결합한 민주적 능력주의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4장에는 두 원리의 결합을 위한 몇 가지 모형이 검토되어 있는데, 지속가능한 실현성을 저자가 인정하는 것은 지방-하층부는 민주주의 원리를 중심으로, 중앙-상층부는 능력주의 원리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수직 모형이다. 저자가 특히 역점을 두어 설명하는 것은 실험공간으로서 중간층이다. 두 원리의 결합에 참고할 만한 역사적 경험이 적다는 사실 때문에 시행착오의 위험이 크고, 그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실험공간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론부에는 두 원리의 배합을 중심으로 저자가 바라는 중국의 정치 발전 방향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현행 체제에 대한 비평이 곁들이지 않을 수 없는데,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신랄한 비판을 보면 중국 권력집단의 나팔수라는 비방을 피하려는 뜻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지엽적인 여러 문제에 비판이 쏠려 있고 중요한 기본 문제는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 없이 순조로운 개혁의 진행을 기대하는 입장이다.

결론부의 마지막 몇 쪽 중국을 넘어란 제목의 절에는 중국이 능력주의 정치체제를 잘 발전시킬 경우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 제기되어 있다. 중국 밖의 독자에게는 특히 흥미로운 주제이고 저자 본인도 매우 중시하는 논점인 듯한데, 중국의 정치개혁 방향 제시에 주력한 이 책에서는 간략하게 취급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주의체제 도입에 이어 아랍권의 재스민 혁명도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해 민주주의의 위신이 추락 중인 작금의 상황에서는 능력주의가 중국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떠오를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능력주의 정치체제의 시행 사례는 이 책에 두 갈래로 소개되어 있다. 광범위한 시행 사례로 중국의 전통적 유교정치체제가 과거제를 중심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현대의 상황에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 따른다. 다른 한편으로는 싱가포르(1960년대 이후)와 중국(1980년대 이후)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 경우는 능력주의 원리를 공식적-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 중국에서 체계적 시행이 확장되고 유교정치체제에 관한 연구가 심화하는 데 따라 벨 교수의 주장에 대한 호응이 커질 것을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