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인구 분포를 파악해볼 필요를 느끼고 <Wikipedia>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있다. 눈에 띄는 대로 생각할 만한 점을 정리해 둔다.

 

아래 표는 주요 인구 조밀지역 목록이다. 새삼스럽게 눈에 띄는 점은 일찍 산업화가 이뤄진 곳이 별로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 일본의 태평양벨트(8500만), 북유럽(4400만), 미국 동북부(4500만), 영국 중남부(4000만) 정도다. 표에 나타난 23억의 10%에도 못 미친다.

 

어릴 때 유럽이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라고 배웠던 것과 전혀 다른 인상이다. 산업화와 인구 증가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새로 생각할 점이 많은 것 같다.

 

Region Population Area (km2) Density
(Pop. per km2)
Indo-Gangetic Plain (Punjab to Bangladesh and Assam) 1 billion 1,000,000 1000
Greater North China Plain 600 million 700,000 857
Sichuan Basin 110 million 250,000 440
Java Island 145 million 130,000 1115
Taiheiyo Belt (Japan) 85 million 60,000 1417
SE China coast (Guangdong, Hong Kong, Fujian) 140 million 100,000 1400
Nile Delta 50 million 50,000 1000
Southern India (Tamil Nadu, Pondicherry, Bengaluru, and Kerala) 120 million 170,000 706
West Indian Coast (Maharashtra and Gujarat Coast) 70 million 100,000 700
Colombian Andes (Colombia) 40 million 170,000 235
Northern Europe (Benelux, North Rhine-Westphalia) 44 million 110,000 400
NE US Coast 45 million 100,000 450
S Central England 40 million 60,000 667
Central Mexico 40 million 100,000 400
Luzon Island 50 million 105,000 476
South Korea 50 million 100,000 500
Southeastern Brazil Coast 50 million 100,000 500

 

 

밑에는 인구밀도가 높은 정치단위(국가) 목록이다. 위 표에서 한국은 9위이지만, 인구 1000만 이하의 도시국가를 제외한 아래 표에서는 방글라데시, 타이완에 이어 3위다. 그런데 여기서도 흥미로운 점은 산업화가 일찍 이뤄진 나라가 적다는 사실. 네덜란드, 벨기에, 일본만이 들어 있다.

 

인구 분포를 다시 살펴볼 생각이 든 것은 유럽 행 이민 사태 때문인데, 이 정도 기초 자료를 보면서도 이민 사태가 전쟁이나 정치 혼란 등 일시적 이유로 인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 압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대화 선발주자인 유럽이 산업화의 부담을 제3세계에 전가해 왔기 때문에 우수한 '삶의 질'을 보장하는 생활조건을 지켜온 것 아닌가. 유럽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고 있을 때는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알제리, 터키, 인도 등에서 징발해 와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유럽의 우월한 생활조건을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이민의 물결을 막거나 통제-관리할 능력이 약화되어 있는 것이다.

 

 

With population above 1,000,000
Rank Country/Region Population Area (km2) Density
(Pop. per km2)
1  Singapore 5,535,000 719 7698
2  Hong Kong 7,234,800 1,104 6553
3  Gaza Strip 1,816,379 360 5045
4  Bahrain 1,234,567 750 1646
5  Bangladesh 157,457,000 147,570 1067
6  Taiwan 23,361,147 36,190 646
7  Mauritius 1,288,000 2,040 631
8  Lebanon 5,851,000 10,452 560
9  South Korea 51,529,338 99,720 517
10  Rwanda 11,262,564 26,338 428
With population above 10,000,000
Rank Country/Region Population Area (km2) Density
(Pop. per km2)
1  Bangladesh 157,457,000 147,570 1067
2  Taiwan (R.O.C) 23,361,147 36,190 646
3  South Korea 51,529,338 99,720 517
4  Rwanda 11,262,564 26,338 428
5  Netherlands 16,919,139 41,526 407
6  India 1,263,680,000 3,185,263 397
7  Haiti 10,413,211 27,750 375
8  Belgium 11,239,755 30,528 368
9  Philippines 102,078,300 300,076 340
10  Japan 127,290,000 377,944 337

 

Posted by 문천

'브렉시트' 사태 앞에서 전에 쓴 글 하나가 생각나 옮겨 놓습니다. 로버트 카플란, <무정부시대는 오는가>(장병걸 옮김, 들녘 펴냄)에 추천사로 붙인 글입니다.

 

국가의 발생은 인간 사이의 투쟁의 양상을 바꿔놓았다. 생존의 기본조건을 획득4하기 위한 홉스 식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국가가 개입하면서 개인 간의 투쟁이 억제되는 대신 국가의 국가에 대한 투쟁이 투쟁의 주류로 부각된 것이다.

국가 간의 투쟁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쟁점을 걸고 나오는 데 특징이 있었다. 많은 사람을 동원하는 데 성패가 걸린 투쟁인 만큼 보편성을 가진 명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실상은 구체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투쟁인데도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는 일이 많았다. 문화와 종교가 그 명분 노릇을 많이 해왔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유와 평등을 비롯한 철학적 명제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무정부시대가 오는가>의 저자 로버트 카플란은 인간의 투쟁이 형이하학적이고 구체적인 쟁점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문명의 핵심적 요소로 존재해온 국가의 기능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면서 투쟁의 양상이 야만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냉전 이후의 여러 분쟁지역과 불안정지역을 두루 둘러본 카플란은 인구 팽창을 중심으로 한 자원 부족, 환경 오염, 질병 확산 등의 구체적 문제들이 이념의 포장을 뚫고 노골화되고 있으며, 분쟁을 억지하는 기존의 제도가 급속히 힘을 잃어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전면적 무정부상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의 정책토론은 진보보수의 대결에 주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카플란은 진보와 보수가 엇갈리는 사각지대에 서 있다. 인류의 현재보다 장래를 걱정한다는 점에서 출발점은 진보진영이지만 인권따위 섣부른 명분에 가려 현실에 눈감아서 안 된다는 그의 현실주의는 보수진영의 누구 못지않게 냉혹하다. 그래서 미국의 자기중심주의를 규탄하면서도 그 주도권을 제창하고, 키신저의 독단성을 혐오하면서도 그 정책의 타당성을 옹호하며, 세계평화의 꿈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강력한 첩보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두 진영 모두 카플란에게 배울 것이 있다. 상대방의 오류를 곧 자신이 옳다는 증거로 삼기에는 현실이 너무 엄혹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념과 명분에 소모할 힘을 합쳐 현실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하더라도 승산을 크게 바라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그의 경고가 우리 귀에 특히 무섭게 울리는 것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졸업하기는커녕 아직 입문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 아닐까.

우리 사회는 앞만 보고 달려왔다. 발밑에는 탄탄한 땅이 언제나 있다고 믿고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펼쳐지고 있는 세계화의 큰 흐름은 달리기에서 수영으로 종목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물결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거센 강물 속의 수영으로.

새 종목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흐름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화의 본질이 희망과 기쁨이 아니라 가혹한 물질적 조건에 있는 것이며, 무릉도원이 아니라 파멸의 낭떠러지로 향하는 것이라는 카플란의 경고가 기우이기 바란다. 주어진 경고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경고된 재앙을 피할 수도 있으나 묵살할 경우 그 경고가 그대로 맞아떨어지기 쉽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카플란의 말을 들으며 가장 절실하게 느낀 점은 바로 우리 사회가 현실 인식에 얼마나 둔감한가 하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급진전을 보고 있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나 민족감정의 차원을 넘어서서 통일의 잠재적 의미를 현실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전반적으로 미약하다. 통일뿐이 아니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가 평행선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사회의 현실 인식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결함은 어디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주체성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지낸 20세기 한국사에서 일단 배경조건을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의 침략이 강화되는 속에서 20세기를 맞이하고 곧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해방이 되고도 새로운 외세에 휘둘려 민족국가를 온전히 이룩하지 못한 채 20세기를 마쳤다. 게다가 국내정치마저 권위주의 억압체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권력자에 대한 저항에 나선 한국 지식층은 현실을 논하기보다 이념을 따지기에 바빴던 것이다.

경제발전을 새로운 이념으로 받드는 작금의 세태 속에도 현실 인식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세계화의 소용돌이 속에 성공하는 인류실패하는 인류로 분화하는 현상은 카플란 외에도 지적해온 이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세계화 논의는 성공의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여 왔다. 카플란이 그려주는 참혹한 실패의 양상 속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거듭 발견하면서 소름끼치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경제발전의 이념을 하루아침에 휴지통에 던져넣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념을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쯤으로 여기던 시절을 과거로 돌리려면, 이념의 성취를 내일의 현실로 맞아들이려면, 현실 인식의 폭과 깊이를 더해 현실에 작용하는 주체로서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우리 사회에는 전반적으로 있다.

이런 노력에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정부주의가 오는가>. 십여년래 민주화가 결실을 맺어오고 있음에도 그 결과가 무질서와 분열의 확산으로만 이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남북관계가 반세기의 질곡을 깨뜨리고 새 마당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민족통일의 실마리가 쉬 잡히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빈부 양극화의 새 세계 속에 우리는 어떤 위치에 어떤 자세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인가. 한국을 직접 다루지 않으면서도 이런 질문들에 놀라울 정도로 절실한 참고가 되는 책이다. (20017)

 

Posted by 문천

 

 "2017년의 선택"을 다시 생각한다.

 

평화운동가 정욱식 선생이 소설을 써냈다. 잘 썼는지 못 썼는지를 떠나, 그가 왜 소설 쓸 생각이 났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 내년부터는 다른 형태의 글보다 소설을 통해 생각을 발표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남의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좀 더 재밌고 알기 쉽게 읽을 수 있는책을 쓰고 싶었다고 본인은 말한다. 지금까지 적잖은 글을 발표해 온 그가, 자기 글이 별로 재미가 없고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재미가 있고 없고, 알기 쉽고 어렵고는 상대적인 문제다. 하지만 새로운 장르에 도전할 필요를 느낀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 글에 스스로 불만을 가졌다는 증거로 볼 수 있겠다.

집에서 새던 바가지가 밖에 나가면 안 새나?” 하는 말이 있다. 장르를 바꾼다 해서 같은 사람 쓰는 글이 재미가 더 생기고 알기가 더 쉬워질 수 있나? 내 보기엔 그렇다. 소설에서는 정확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확성을 아주 내다버리는 것은 아니라도, 적어도 한 발 물러설 수 있다.

지난 십여 년간 정 선생이 열심히 글을 써온 목적이 뭔가? 자기 생각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그 글을 독자가 시간 내어 읽어주려면, 전하려는 생각도 좋은 생각이어야 하지만, 전달수단인 글에도 이런저런 장점이 있어야 한다. 여러 장점 중에 제일 앞서는 것이 신뢰성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글이라도 내용이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면 효용성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신뢰성을 담보하는 첫 번째 조건이 정확성이다. 이 필자가 글에 담는 내용이 사실과 부합한다는 믿음 없이는 생각의 전달이 안 된다. 아무리 밀리언셀러라도 이 믿음이 없으면 소비재 역할에 그친다. 독자에게 쾌락의 대상일 뿐이지, 독자의 생각과 힘을 키워주지 못한다.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필자는 정확성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확성은 경쟁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방향의 영향을 사회에 끼치고자 하는 필자들이 각자의 글의 정확성을 독자에게 인정받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이 경쟁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 학술과 자료다. 이 때문에 개혁파는 수구파와의 경쟁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에 직면하기 쉽다. 학술적 권위와 자료의 생산-유통에서 수구파가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정의의 관점에서 비판할 생각이 없다. 세상이 바뀔 필요가 있다 해도 가급적 서서히 바뀌는 편이 좋다고 보는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안정성도 사람들의 행복과 만족을 보장하는 중요한 조건 아닌가. 서서히 바뀌는 편이 더러 답답한 문제는 있다 하더라도 너무 빨리 바뀌어서 위험을 겪기보다는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정의(正義)의 문제보다 정도(程度)의 문제를 나는 중시한다. 개혁의 속도가 늦더라도 방향만 지켜진다면 참고 견디겠는데, 방향까지 뒤집히거나 사라질 정도로 수구파의 전횡이 심하다면 참고 견딜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 점잖지 못한 짓이라도 할 필요가 있다. 소설 쓰는 것 같은 짓이라도.

그런 취지에서 정 선생의 새로운 시도를 지지하고 공감한다. 다년간 많은 글을 통해 정확성에 대한 신뢰도를 쌓아온 단골 독자들은 근거를 명시하지 못하는 상상이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답답한 글을 저자의 좋은 뜻 때문에 읽어야 하던 글 고문에 대한 보상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내게는 그렇다.) 그리고 정 선생 글에 접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도 좀 더 재밌고 알기 쉽게 읽을 수 있는책으로 권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문학으로서의 가치는 저자 자신 바라보지도 않은 것이고, 2018년 봄의 상황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수명도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길지 않은 기간이라도 “2017년의 선택에 어떤 의미가 얹혀 있는지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고, 그 효용에 맞춰 분량도 가볍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운명에 대해 가장 많은 고민을 하고 공부를 해온 사람의 하나인 저자가 생각을 알뜰하게 담은 이 책은 이미 그의 주장에 공감하던 이들에게도 생각을 정리하는 데 적지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