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11. 09:54

 

병원 대합실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던 중-노년 남성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모두 아내에게 얻어맞아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자 얻어맞은 사연을 돌아가며 이야기했다.

 

40대: 외출하는 아내에게 "어디 가?" 했다가 얻어터졌어요.

 

50대: 나랑 비슷하네. 나는 아내 나가는데 "같이 가." 했다가 쥐어터졌어요.

 

60대: 맞을 짓들 했구먼. 나는 아내가 밖에서 전화했길래 "어서 들어오세요." 했더니 들어와서 막 패더라구.

 

70대: 난 진짜 억울해. 내가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열심히 해드리고 있는데 막 때리는 거야.

 

다들: 아니, 왜요?

 

70대: 알짱알짱 오락가락하는 게 꼴 보기 싫다는 거야.

 

꿈벅꿈벅 듣기만 하고 있던 80대 노인에게 궁금한 눈길이 모였다.

 

80대: 난 아침에 눈 떴다고 얻어맞았어.

 

모두 어안이 벙벙한데, 조금 전 들어온 90대 노인이 옆에서 한숨을 내쉰다.

 

다들: 영감님은요?

 

90대: 집에서 자는데, "친구들 다 산에서 자는데 왜 당신만 방에서 자는 거야?" 하고 때리데.

 

아내가 친구들 모임에서 들은 얘기라며 들려주는데, 전해주면서도 새삼 우스워서 깔깔대는 바람에 협박의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방송을 별로 보지 않고 지내니 이 우스개가 국산품인지 어떤지 모르겠는데, 끝에서 90대 노인의 말을 보면 연변 수입품 같다. 연변에서는 무덤을 보통 "산"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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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집권당이 소수당이 된 20대 국회, 원 구성에서부터 새누리당은 적응 장애 증세를 보이고 있다. 소수당이 되리라는 사실을 두 달 전까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던 사정이나, 국회가 국회 노릇 못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권력자의 존재를 감안하면 이해가 전혀 가지 않는 증세도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 해도, 야당 간의 '야합'을 비난하는 꼴은 너무 졸렬하다. 아니, 당끼리의 의가 '야합' 아니면 뭐겠는가. '여합與合'을 너무 못하니까 야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국민이 많아서 선거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 아닌가. '야합'이란 말이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이는 데 기대어 야당 간의 합의를 무슨 못할 짓처럼 손가락질하는 꼴, 흠씬 두들겨맞은 양아치가 겉으로 소리도 못 내고 입속말로 구시렁대는 모습 같다.

 

나는 오히려 야당들이 국민이 원하는 '야합'을 충분히 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지난 8년간 국회가 국회 노릇 제대로 못하는 것이 이 나라가 망쳐져 온 제일 중심이 되는 문제였다. 이 사회의 모든 문제가 국회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일어난 문제라도 국가 차원에서 한 차례 걸러내 해소할 것은 해소하고 억제할 것은 억제하는 것이 국회의 역할 아닌가.

 

7년 전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 맞을라!"란 글에 (http://orunkim.tistory.com/184) 이렇게 썼다.


국회와 한나라당의 문제를 내가 크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을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로 보기 때문이고, 청와대와 이명박의 문제를 작게 생각하는 것은 없어도 괜찮은 존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대통령 제도는 없애도 되지만 국회가 없는 세상을 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명박은 없어도 괜찮지만 한나라당은 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다. 이명박은 폐쇄적 소수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물일 뿐이지만 한나라당은 이 사회 상당한 범위의 정치적 요구를 반영하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새누리당이 된 한나라당, 그 책임이 제일 크다. 대통령이 超제왕적 권력을 휘두르게 하는 이 나라 대통령제에 물론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국회 말고 누가 맡을 수 있는가? 권력자의 눈치보기에 급급해 국회의 역할을 등진 결과를 지금 맞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까지 물려받아 오고 있는 초월적 권력의 대통령제를 만들기 위해 이승만이 획책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1948년 5-10선거의 시행 주체는 미군정이었다. 그리고 5월 31일의 제헌국회 개원도 미군정의 '소집 공고'에 따라 이뤄졌다. 그런데 미군정은 소집하는 회의가 "국회의원의 최초의 집회"라고 했다. '국회 개원'은 이 소집에 따라 '최초의 집회'에 모인 당선자들이 스스로 한 것이었다.

 

선거 시행의 주체인 미군정이 국회 개원에서는 객석으로 물러선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의 주체성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유엔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5-10선거 당시 유엔임시조선위원단(UNTCOK)이 선거를 감시했다. 선거가 끝난 후 충분히 공정한 선거가 이뤄졌는지를 놓고 위원단 내에 격론이 벌어졌다. 위원단은 독립적 위치에서 토론을 진행하기 위해 장소를 상하이로 옮겼는데, 위원단이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회 성립'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5월 31일 "국회의원의 최초의 집회"가 열린 것이었다. 위원단은 6월 7일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바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6월 25일에야 5-10선거의 공정성을 인정하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대한민국이 유엔의 지지를 받아 세워졌다고 흔히 주장하지만 1948년 5월 31일부터 6월 25일까지는 유엔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앞만 보고 달렸다. 6월 3일 국회에 30인의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구성되자 위원회는 그 날로 유진오, 고병국 등 10인의 전문위원을 위촉했고, 전문위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헌법 초안을 내놓았다.

 

6월 3일의 초안 제출 후 16일 만인 19일에 기초위원회의 토론이 종결되었으니 가히 일사천리라 할 것이다. 초안이 잘 준비되어 있기도 했고, 위원회의 검토가 허술하기도 했다. 그런데 6월 19일 완성되어 있던 헌법안이 나흘 후 본원에 제출될 때 중요한 내용 하나가 바뀐 것이 있었다. 내각책임제가 대통령책임제로 바뀐 것이다. 6월 21일로 예정되었던 헌법안 본원 제출이 이틀 늦어진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6월 22일자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특히 정부조직에 있어서 원안에는 내각책임제로 되어 있으나 이승만 박사는 자초로 대통령제를 주장하여왔으며 지난 15일에는 기초위원회에 임석하여 대통령제를 주장하였고 또 20일에는 헌법을 기초한 의원들을 이화장에 초청하여 그러한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 헌법 전반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고 하며 헌법 심의를 위한 전윈위원회 개최의 주장도 그러한 의도의 연장이라고 보이는데 결국 비공개 전원회의는 비민주주의적이라 하여 16차 본회의에서 압도적 다수로 부결되고 말았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5-10선거를 보이콧했기 때문에 당시 국회에는 분단건국 추진세력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승만이 원하는 대통령책임제 추진이 국회에서 그렇게 뻑뻑했을까? 한민당과 무소속의 '야합' 때문이었다.

 

한민당은 이승만 친위세력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과 손잡고 분단건국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 이제 정부를 수립하는 단계에 이르자 이승만의 권력 독점을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한민당에게는 이승만 외에 대통령으로 내놓을 대안이 없었다. 그러니 대통령 자리를 그에게 주더라도 국회를 통해 자기네 권력 지분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국회는 한민당과 독촉, 그리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무소속이 3분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민당과 무소속의 '야합'이 이승만에게 걸림돌이 된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대통령책임제 주장이 관철되게 한 한민당과의 '빅딜'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히 확인은 안 되지만 짐작은 간다. 국무총리 자리에 무게를 두고 그것을 한민당이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주의자 이시영이 이미 차지하고 있던 부통령 자리보다 국무총리의 역할을 훨씬 더 크게 하고 그 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게 했다.

 

이승만이 끝내 국무총리 자리마저 허수아비로 만든 장면을 보면 지금 박근혜가 국회를 망가뜨리려고 광분하는 모습이 겹쳐진다. 그는 한민당만이 아니라 거의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인물을 국무총리에 임명한다며 동의를 요청했다. 국회에서는 토론도 없이 바로 표결해서 간단히 동의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을 불의에 임명했고, 부결을 거듭하기에 부담감을 느낀 의원들이 동의해 주고 말았다. 그 후 1954년까지 이승만은 다섯 명의 국무총리를 두고 열 차례 '서리' 또는 '임시' 국무총리를 임명하면서 국무총리가 제 구실 못하게 갖은 애를 쓰다가 사사오입 개헌으로 자리를 아예 없애버리기에 이르렀다. 정말 대단한 뒤끝이다.

 

결국 한민당이 게도 잃고 구럭도 잃은 꼴이 된 것은 무소속과의 '야합'을 포기하고 이승만 세력과의 '여합'으로 돌아선 결과였다. 무소속과 연대하면서도 지분에 집착한 한민당에게 국무총리 자리가 미끼가 되었다. 이승만이 도와주면 국무총리는 자기네 것이려니, 이승만에게 대통령책임제를 주는데 국무총리 정도야 양보해 주려니, 김치국부터 마셨는데, 이승만이 정말 어느 정도로 뻔뻔한 사람인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승만이 쉽게 한민당을 농락한 것은 한민당이 원하는 지분을 보장해줄 수 있는, 또는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행정력을 쥐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행정력이 국회를 압도하는 상황은 그렇게, 이승만의 술수와 한민당의 착각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과연 지금 장면에서도 집권자의 술수가 또 한 차례 주효할 수 있을까? 이제는 정말 국회가 국회다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되찾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난 8년간 못 보아 온 '야합'이 그 열쇠다.

 

Posted by 문천

시사를 역사로 다루는 역사 에세이스트김기협 역사학자

조성일 기자  |  pundit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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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호] 승인 201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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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시사로 보고 시사를 역사로 보는’ 역사학자 김기협(66, 사진)은 지난 100년간의 한반도 근현대사를 조망하는 작업에 매달려왔다. 2010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와 2015년 전10권으로 완간한 《해방일기》(너머북스)에 이어 최근 《냉전 이후》(서해문집)를 내놓음으로써 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관점’에서 한반도 근현대사를 조망하는 3부작 작업을 완결했다. 이제 ‘서세동점의 끝’이 언제 어떻게 될지를 조망하는 애초 계획의 최종판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는 그를 경기도 일산 대화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완결판’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아요. 근현대사라면 ‘3부작’의 완결 의미가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서세동점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도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서세동점이 계속된다고 보고, 그 끝나는 시점까지가 내 작업의 여정입니다.”
그랬다. 김기협의 지금부터의 작업은 ‘미래사’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그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역사학자’의 연구범주는 최대한 늘려 잡아도 ‘지금’까지이다. 그렇다면 지금을 넘어선 ‘내일’은 역사학자가 아닌 미래학자가 나서야 할 분야가 아닌가. 활용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미래사) 서술을 위해서는 ‘가정법’을 동원해야 함에도 그가 이 작업에 나선 이유는 뭘까.

서세동점 관점서 조망한 3부작
“한반도의 분단 원인은 ‘서세동점’의 관점에서 찾아야 합니다. 서세동점의 의미가 19세기 말에는 단순히 군사적 정치적 차원에서 진행됐지만 지금은 정신적인 것까지도 아우르는 것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대장정의 첫 출발을 알렸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는 민족국가를 잃어버리는 과정에 대해서 천착했는데, 사실 대부분이 망국의 결과에 대해서만 주목했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던 점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작업이다.

또한 그는 10권의 ‘대작’으로 내놓은 《해방일기》를 통해서는 분단의 근본 원인을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요인이 더 크다고 진단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합병됐던 민족국가가 해방공간에서 분단으로 이어져 오늘날이 이르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요인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체제’였다는 것. 그런데 이런 냉전체제는 소련과 동유럽의 해체로 종식을 고하지만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그 체제가 해소되기는커녕 더 공고해지고 있다고 그는 이번에 낸 《냉전 이후》에서 주장한다.
“내가 이 작업에 나서는 것은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꿔서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민족문제를 제대로 이해해보자는 의미에서입니다.”

물리학도 출신 역사학자
사람들은 김기협을 ‘무소속의 역사평론가’ 또는 ‘역사 에세이스트’라 부르기도 한다. 엄연한 제도권 대학에서 역사학과 교수를 지냈음에도 그에게 이런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은 아마도 그의 삶과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전도유망한 물리학도였다는 사실부터가 역사학자 김기협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전복시킨다.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를 다니던 시절 2등이 보이지 않는 1등인 천재였고, 이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재원이었다.

“고3까지는 존재감 없는 아이였는데, 고3 올라가 모의고사를 보면서 두각을 나타냈어요. 친구들도 의아해했지요. 과외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 전혀 공부 잘 할 환경이 못 되어서 더더욱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그가 역사학자가 되었던 것은 이과적 삶이 가져다 줄 갇힌 생활이 싫어서였다고 술회했다.
“인문학은 밥 먹고 사는데 급급할 것 같아 이과로 진학하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따랐는데, 평생 군대생활처럼 판에 박힌 생활을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도망쳤지요.”

역사학과로 전과
그가 역사학과로 전과한 것도 원해서가 아니라 전과가 가능한 과를 찾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박사학위까지 받고는 대구의 계명대에서 역사학자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다.

“아버지가 남긴 유고를 어머니가 역사학자인 제게조차 비밀로 했어요. 다 떠나서 한 마디로 저를 역사학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교수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인정하지 않는데….”
여기서 잠깐 그의 부모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아버지는 역사학자이자 서울대 교수로 《조선역사》를 쓴 김성칠이었고, 어머니는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첫 여학생이자 한국어 어원 연구의 개척자였던 전 이화여대 교수 이남덕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9·28 수복까지 피난가지 않고 3개월간 공산당 치하의 서울에서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의 본질을 겪었던 이야기를 담은 일기를 남겼었다. 이 일기는 민족사의 비극을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어머니가 1987년 말 공개할 때가지 아들에게조차 비밀로 했던 것이다.
그는 반공독재상황에서 자식들에게 혹 누가 될까봐 혼자 지켜왔다고는 하지만 어머니의 이 같은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급기야 어머니와 불화를 빚어낸다.

어머니와 불화
오랫 동안 어머니의 “훌륭한 점보다는 모순과 위선을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았”던 그는 2011년 치매를 앓던 어머니와 그간의 불화에 대해 화해했다.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3남1녀를 키우며 교수로, 또 불교 수행자의 삶을 살다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2007년 하안거 중 쓰러진다. 그때 그는 곁에서 어머니를 간병하며 ‘시병일기’를 쓴다.

“미국에 사는 큰형과 어머니 지인들에게 병세를 알린다는 생각에서 블로그에 시병일기를 썼는데, 결국 내가 힐링을 하는 효과를 얻었지요.”

2년여에 걸쳐 시병일기를 쓰면서 그는 불화했던 어머니와 화해한다. 어머니의 병상 스케치를 하면서 결국 자신의 자아와 대면했고, 결국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화해와 치유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병일기는 나중에 《아흔 개의 봄》이란 제목의 책으로 세상 독자들과 만났다.

이 책에서 그는 아버지가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과 같은 덮여 있던 가족사의 비밀까지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는 부모님의 결혼과정에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도 불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병상생활이 어머니의 제2의 인생이라고 생각한 그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웨하스를 날름 삼키기도 하고, 어머니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면서 사랑을 표시하기도 했다.

제도권과 거리 둔 삶
그런 어머니마저 3년 전에 작고하자 그는 이제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그렇다. 이 ‘고아’라는 말은 어쩌면 그의 인생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나와 중앙일보에서 객원으로나마 글을 쓰고 있었지만 보수화가 지나치게 심화되자 미련 없이 그만둔다. 또 다시 제도권과는 거리를 둔 ‘나 홀로의 삶’을 결행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사실 이 땅에서 그 어렵다는 전업 저술가의 삶을 살고 있다. 그가 내는 책들이 설령 ‘베스트셀러’라는 헌사가 바쳐진다고 하더라도 인문, 사회과학 분야는 1만 부 넘기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삶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랬다. 나는 그에게서 가난한 선비의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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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