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의 "민주화" 30주년이 다가오는 데 따라 여러 각도에서 지난 30년을 반성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주화만 이뤄지면 이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될 것으로 여기던 희망이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반성의 목소리 중에는 그 사이의 민주화가 완전하기 못한 데 문제가 있다며, 민주화를 완성하기 위해 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다짐의 뜻을 담은 것이 많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가 너무 컸던 것 아닌가 하는 지적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반성이란, 적어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철저할 수록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성이 충분히 깊어진 뒤에는 앞뒤를 재어가며 적절한 행동 수준을 결정해야겠지만, 잘못을 비로소 깨닫고 반성을 시작할 때는 아주 기본적인 믿음에서부터 뒤집어볼 필요가 있다. 일부러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관성 때문에 중요한 오류를 간과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화의 완성도에 대한 기술적 반성보다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이념적 반성이 앞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침 이번 주 프레시안뷰로 나온 이관후의 글은 기술적 반성에서 이념적 반성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요컨대,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정치 이념이고, 그것의 완성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좋은 정치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란 권력을 가진 소수보다는 다수 인민의 의사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논쟁적인 명제들에 대한 합의에 다름 아니며, 민주주의 안에는 얼마든지 좋은 정치만큼이나 나쁜 정치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이제 민주주의의 민낯을 막 보기 시작했을 따름입니다.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의 관계가 아직 "신혼" 단계이기 때문에 부부생활의 구체적 내용에 아직 익숙지 못하다는 비유가 그럴싸하기는 한데, 그 비유를 받아들이더라도 몇 가지 지워버릴 수 없는 의문이 있다.

 

첫째, 이 각시 누가 정해준 거지? 1919년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을 내걸 때부터 민주공화제에 대한 합의가 조선인 사회에서 이뤄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는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아직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46년 8월 11일 미군정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14%가 자본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바람직한 체제로 선택한 반면 70%가 사회주의를 선택한 일을 <해방일기>에서 지적한 바 있다.)

 

둘째, 한 사회의 운영 이념이 일부일처제처럼 단일성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黑猫白猫"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여러 유럽국에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배합한 사례는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형태로 널리 인정받아 왔다. 인간의 자유보다 자본의 자유를 앞세우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사회의 집착은 병적인 수준이다.

 

비유의 적절성에는 이런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이를 발판으로 한 고찰은 적절한 방향을 가리킨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 서로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없으면, 민주주의 따위 아무 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단언컨대,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습니다. 나와 내 새끼만 잘살면 되고, 모두가 각자도생의 길을 가며, 욕을 먹든 법을 어기든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에게 아무런 제재를 할 수 없는 곳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지옥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곳을 지옥공동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불어 사는 인간성의 회복,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인간의 삶에 대한 존중, 그것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인간을 잡아먹는 일을 돕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할 것입니다.

교육부 고위 관리 하나가 국민 대다수를 "개, 돼지"로 본다 해서 시끄러운데, 특정 동물과의 비교가 적절한 지를 차치하고 본다면, 피상적 요구만 충족시켜 주면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 꽤 타당성을 가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국민을, 인간을, 표 찍는 기계로 보고 그 기계의 조작방법을 발전시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목적 아닌가.

 

Posted by 문천

 

<녹색평론> 149호를 받아보니 글 제목 둘이 눈에 들어온다. "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 3년째 "자본주의 이후"를 생각하고 있는 데다가 요즘 <차이나 모델>을 번역하면서 "민주주의"에 관한 생각을 굴리고 있으니 이 제목들이 내 눈에 뛰어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김종철 선생의 글 "유일한 대안"을 다 읽을 때까지 의아한 생각이 쌓여가기만 했다. 기후 변화, 기본소득, 노동윤리... 늘 하던 얘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민주주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 문단에 가서야 민주주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정치'라는 결론을 여기서 다시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어리석은 탐욕에 맞서고, 기후변화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다수 민중의 삶을 보호하고, 자연세계를 보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합리적인 정치'이다. 그리고 현 단계에서 합리적인 정치란 온전한 의미의 민주정치뿐이다. 민주주의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다.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자연' 상태에는 약육강식이든 뭐든 모든 것을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데 끝난다. '당위'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문명'이고, 당위를 실행하는 과정이 정치 아닌가. 약육강식의 '현상'을 통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정치의 실종"을 탄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치가 꼭 "합리적인 정치"여야 하는가? 김 선생이 배제해야 한다고 여기는 "비합리적인 정치"는 어떤 것일까? 민주정치 이외의 정치를 모두 "비합리적인 정치"로 보는 것이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세습 군주제 정치 중에는 '현상의 통제'라는 정치의 기본 목적을 현대 어느 민주주의국가보다 잘 성취한 사례가 많다.

 

김 선생은 민주정치만을 합리적인 정치로 보는 독단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현 단계에서"란 말과 "온전한 의미"란 말을 붙였다. 이 "현 단계"가 누구의 어떤 단계를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온전한 의미"란 어떤 의미인가?

 

내 아래 세대 학인 중 나랑 관심 범위와 관점이 제일 많이 겹치는 이가 이병한 선생이다. 몇 해 전 그를 처음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무슨 얘기 끝에 그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선생님은 민주주의까지도 상대화해서 보려 하시는군요?"

 

내가 대답했다. "그러려고 애는 씁니다. 모든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단계에 세상이 와 있어요. 하지만 우리 세대는 한계가 있어요. 바로 우리 또래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 엄청난 인간적 희생을 감수한 이들이 있는데, 그분들을 존중하는 마음 때문에 표현만이 아니라 생각에도 절제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선생 세대에서는 바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최근 "자본주의 이후"에 생각을 모으면서 "민주주의 이후"도 생각할 필요를 떠올리고 있다. 근대세계의 모순을 초래하거나 격화시킨 제도와 이념 중에 민주주의도 그 몫이 작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온전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못 되었던 것이라고 하는 변명을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가? "온전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언제 어디서 실현되기나 했었다는 말인가?

 

김종철 선생은 나랑 같은 세대다. 현실의 제 문제에 대한 절실한 비판을 "온전한 의미의 민주정치"에 대한 희망으로 마무리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악마로 보고 민주주의를 천사로 보는 우리가 사실은 2인조 사기단에 걸려든 것은 아닌지 한 차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 선생이 뜬금없이 민주주의를 들고 나온 계기가 그 다음의 글, 그가 번역한 미즈노 가즈오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에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에서도 민주주의는 역사적 현상으로서 바람직한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글 중 민주주의를 언급한 대목을 다 뽑아봐도 몇 군데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적인 근대성'이라는 것은 명분상으로는 "개개인의 재능이나 노력에 근거한 격차가 그 밖의 격차보다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신념에 기초해 있다."(20쪽)

 

그 합리성이 형식적이나마 성립된 것은 20세기의 전반뿐이며, 그 기간을 제외하면 근대의 대부분에 걸쳐서 합리성이나 경제적 민주주의는 부정돼왔다.(21쪽)

 

21세기는 자본주의 대 민주주의의 싸움이 될 것이다. '아베노믹스'로 대표되는 일본의 성장전략이라는 것은 현재의 틀 안에서 부의 집중을 촉진시키고, 민주주의가 없는 앙시앵레짐 체제로 역사를 되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성장을 우선하는 근대화 노선은 결국 부의 집중을 초래하고, 앙시앵레짐 체제와 테러의 시대로 국민을 끌고 간다.(27-28쪽)

 

그리고는 글 끝에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종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민주주의뿐이다. 민주주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시장이 폭력을 휘드르게 된다.(29쪽)

 

십여 년 전 한국교회사연구소의 한 세미나에서 뮈텔 주교의 친일 행적에 관한 발표에 이은 토론 중 고 최석우 신부님의 재미있는 말씀이 생각난다. 오붓한 자리였기 때문에 거침없는 의견 발표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두 패로 갈라져 약간 과열의 조짐이 있었다. 한쪽은 교구장이던 분의 행적을 그렇게 가차없이 다뤄도 되냐는 신앙파였고, 또 한쪽은 학문연구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는 과학파였다. 이 논쟁을 최 신부님이 한 마디로 마무리했다.

 

"주교님께서는 조선인의 육신보다 조선인의 영혼을 더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가 근대성의 육신이고 민주주의가 근대성의 영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요즘 든다.

 

Posted by 문천

조금 높은 정도의 벽이나 난간으로 만들면 안 되나? 선로에 떨어질 위험만 막아주면 될 텐데, 왜 그렇게 바람도 통하지 못하는 밀폐형으로 만들어야 할까? 내가 많이 이용하는 경의중앙선의 지상 역에서는 벽만 덩그러니 서 있는 모양부터 우스꽝스럽다. 1미터 높이의 벽에 슬라이딩 도어를 붙이면 지금 만드는 식보다 설치비도 몇 분의 1이면 될 거고, 밀폐된 공간에서 열차를 피할 길이 없는 참혹한 꼴을 안 봐도 될 텐데.

 

이것도 '근대정신'의 폐단일지 모르겠다. 선로와 승강장을 '격리'시키려면 물 샐 틈 없는 장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완벽한 안전은 없다. 하지만 피해자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애쓸 여지조차 없는 상황은 너무 참혹하다. 세월호에서도 보지 않았는가. 위험을 헤쳐나오기 위한 노력조차 가로막는 시스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안전불감증'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자살공화국'이 더 그럴싸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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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