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한 분이 이런 자리를 마련한 책방을 봤다며 사진을 보내줬네요. 끝나기 전에 나도 가봐얄텐데~

Posted by 문천

 

4회 아시아적 가치의 부활

 

 

슬픈 학문의 시대

 

1990년경의 공산권 붕괴 앞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공산주의체제 실패의 필연성을 논한 대목을 면밀히 읽어보면, 자본주의체제에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체주의 국가의 경우, 그 근저에는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전체주의는 시민사회의 완전한 파괴를 시도했으며, 시민 생활의 완전한 관리를 목표로 했다. 1917년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이래 소련은 반대당, 신문, 노동조합, 사기업, 교회 등 러시아 사회에서 권력에 맞설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조직을 탄압해 왔다. 1930년 말에도 이러한 조직 중 몇 개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옛 정신의 골자는 모두 빠져 버리고, 국가에 의해 철두철미하게 통제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민 하나하나는 원자(原子) 상태에 놓여, 전능한 정부 이외의 모든 '중간조직'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남겨졌다.

전체주의 국가 소비에트는 보도관리나 교육, 정치선전을 통해서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 그 자체의 골격을 바꾸고, 그것에 의해 소비에트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개인적이고 가까운 관계인 가족관계에까지 미쳤다. (...)

사회가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분화되어감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가지 인간관계 - 가족, 종교, 역사적 사실, 언어 - 가 공격 목표가 된다. 그리고 개개인의 밀접한 관계는, 그 당사자를 위해서 할당되어지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다른 인간관계에 의해 대치된다. (<역사의 종말>(이상훈 옮김, 한마음사 펴냄) 57, 필자 밑줄)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똑같이 일어난 일 아닌가? 후쿠야마는 파괴, 탄압, 통제, 조작 등 행위의 주체로 국가를 지목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주체는 당()이고 국가는 도구다.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국가를 도구로 같은 행위를 행하는 세력이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자본세력은 공산주의체제의 당처럼 명확한 형태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그 행위를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는 범위에 차이가 있지만,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 경향은 그 존재를 분명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밑줄 친 두 부분이 두 체제에 확실히 공유되는 것이다.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체제 확장에서도 이것이 핵심적 요소였다. 이 이데올로기, 즉 배금주의 없이는 주변부 착취의 효율성에 한계가 있다. 피착취 사회나 계층의 자발적 호응 없이 착취자가 일일이 힘들여 빼앗아오는 것으로는 체제 작동이 제대로 안 된다.

"주민 하나하나가 원자 상태에 놓이는" 것 또한 자본주의체제 성립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가족, 종교, 역사, 언어 등 이익관계 아닌 다른 원리에 입각한 모든 인간관계가 자본주의체제에서는 공격받거나 주변화된다. 자본주의체제의 가치체계 획일화에는 탄압보다 선전이 더 큰 몫을 맡았는데, 여기에는 근대적 학문이 적극 활용됐다. 노명우는 <사회학의 쓸모>(지그문트 바우만 외 지음, 서해문집 펴냄) '역자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쓸모없다고 박대당하고 있는 철학을 '슬픈 학문'이라고 불렀다. 사회학 역시 철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슬픈 학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슬픈 학문'의 마지막 희망을 "철학이 방법론으로 변질된 이후 지성의 냉대를 받거나 자의적 경구에 머물다가 끝내는 잊히게 된 영역, '올바른 삶'의 이론"을 회복하는 데서 찾았다. 철학만큼이나 '슬픈 학문'인 사회학의 마지막 비상구 역시 거기에 있다.

제도화된 사회학은 방법론적 정교화에 몰입한 나머지 질문의 능력을 상실했다. 사회학적 질문은 질문을 위한 질문이 아니며, 사회학적 연구의 최종 목적지는 계량화된 연구 실적이 아니다. 질문을 위한 질문, 연구를 위한 연구와 같은 동어반복적 폐쇄회로의 저편에 놓여 있는, '올바른 삶'을 위해 던지는 사회에 대한 질문, 사회학은 그러한 질문에 내재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질문의 힘을 잃어버린 사회학은 주어진 '현재'에 존재하는 '사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무엇이 없어야 하고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상상을 상실했다. '좋은 삶''좋은 사회'에 대한 상상을 키우는 질문의 힘을 잃어버린 사회학은 그저 세간의 눈으로는 쓸모없어 보인다.(245)

어느 분야의 학자라도 이 글을 읽으며 자기 분야도 또 하나의 '슬픈 학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도 그렇다. 계몽주의시대에 발흥한 근대역사학이 이전 시대의 '봉건제'를 비판한 데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정지작업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그 위에 자본주의체제가 세워진 후의 봉건제 비판은 반동적 행태일 뿐이다. 질문의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학문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근대 세계체제의 한계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 인간 하나하나를 '원자 상태'에 두는 조직방법, 둘 다 공산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의 공통된 요소다. 그리고 이들은 두 체제의 형성기인 19세기의 '과학 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문명 발생 이후 인간은 자연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늘리려고 노력해 왔다. 그것인 인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나는 이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자연과 자신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다. 지금으로써는 완전한 이해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만 일단 관심을 둔다.

인간은 이해가 부족한 영역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확장되어 19세기에는 '과학 신앙' 현상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다른 문명권에 뒤져 있던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또 한편으로는 해외 약탈활동을 통한 물질적 조건의 향상이 이 믿음을 뒷받침해 줬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성과를 얻으면서 이 믿음이 사회를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연과학의 성과를 발판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도 완성을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사회과학이 일어났다. 사회과학은 애초에 종교와 봉건 관계에서 벗어난 '신세계'의 합리적 원리를 모색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났지만, 개척기가 지난 뒤에는 위에 인용한 노명우의 탄식처럼 '제도의 덫' 속에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역할이 더 크게 된 것이다.

19세기를 풍미한 원자론이 이 신앙의 경전이 되었다. 19세기 벽두에 발표된 존 돌턴의 원자론은 한편으로는 자연의 완전한 이해에 이르는 지름길로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 평등 등 계몽주의적 관념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이런 관념을 이념을 넘어 진리 차원으로 받드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어 사회 조직방법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자연과학에서 원자론은 19세기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물질 탐구의 진전에 따라 힘을 잃기 시작해서 20세기 들어와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그러나 사회과학 여러 분야에서는 원자론에 입각한 제 원리가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당한 힘을 지키고 있다. 원자론에서 파생된 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어서 질문의 능력을 잃어버린 학문이 현실의 정당화에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원자론이 그리스철학의 일각에서 나타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여러 문명권에서 원자론과 비슷한 환원론적 세계관이 등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는 어느 사회에서도 이런 세계관이 긴 시간에 걸쳐 강한 지배력을 가진 일이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일로 보인다. 원자론에서 도출되는 개인주의는 사회 조직방법으로서 지속가능성에 불리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과도한 경쟁과 사회안전망의 약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원자론이 19세기 유럽을 풍미하고 오늘날까지 큰 힘을 발휘해 온 것은 산업사회로의 재편기라는, 지속가능성의 약점이 부각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도 전국시대에 원자론에 가까운 사조가 상당한 힘을 얻었던 것 역시 농업사회로의 재편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에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나오고 오일쇼크가 겹쳐지면서 지속가능성 문제가 비로소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밝히는 '세계체제론'도 이 무렵에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뒤이어 문학계와 학술계의 관성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되었다.

어찌 보면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공산주의체제 포함)의 한계가 1970년대에 확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안이 없는 상황 때문에 신자유주의 반동노선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가운데 국제적으로, 그리고 각국 내부에서 모순이 심화되어 왔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부상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이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굴기를 보는 시각

 

19987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공화당 우파와 민주당 좌파가 이례적으로 손잡고 반대했다. 자본주의에 정식으로 투항하지 않는 중국의 성장에 도움이 될 행동을 미국이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파의 주장이었고, 좌파의 주장은 미국사회가 요구하는 인권 기준을 중국이 충족시키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우호적인 행동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점까지도 미국인들이 중국을 얼마나 깔보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상황이다. 중국이 공산권 붕괴의 소용돌이를 용케 모면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정책에서나 인권정책에서나 미국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동유럽의 구 공산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시장경제' 전면 도입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중국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져 있다. 중국이 초강대국이 될 것인가 여부가 아니라 어떤 성격의 초강대국이 될 것인가에 지금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기존의 초강대국과 비슷한 성격이 될 것인가, 전혀 다른 성격이 될 것인가?

중국도 기존의 초강대국과 비슷한 성격의 패권국가가 되리라고 보는 관점은 기존 세계체제의 성격에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관성에 휩쓸려 1970년대 이래 변화의 조짐과 추세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세계체제의 성격 변화라는 것은 매우 함의가 큰 현상이므로, 그 전망이 분명하지 않은 단계에서도 그 가능성을 가늠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방향으로 참고할 만한 논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성공'이 널리 확인된 2008(베이징 올림픽과 미국의 금융공황이 있었던 해) 이후 담론 확산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직전에 나온 조반니 아리기(1937~2009)<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길 펴냄)가 이 방면 담론의 중요한 지표를 담은 것으로 본다.

아리기는 1970년대부터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과 함께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켜 온 비교사회학자다. 1994<장기 20세기>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개 과정을 개관하고 미국 헤게모니의 말기 증상을 살펴본 그가 중국의 약진에 관심을 집중해서 그 특징적 현상에서 세계체제의 다음 단계를 내다보는 열쇠를 찾은 것이 이 책이다. 얼마 전까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중국의 급속한 발전에 대한 이 시점에서 가장 깊이 있는 이론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도입부에서 아리기는 제목에 애덤 스미스를 불러낸 이유를 설명한다. '자본주의의 시조'로 알려진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서 제시된 '시장경제'가 자본의 무제한적 축적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원리와 다른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중국의 비자본주의적 경제발전 방식이 "자연스러운 경로"라고 평가한 점을 상기시킨다. 자본주의 아닌 경제발전 방식이 가능하며 전통시대 중국의 경우를 그 구체적 사례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제발전 방식은 유럽 발 자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아리기는 스기하라 가오루가 제기한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을 예시한다.

스기하라에 따르면, 경제적 향상을 추구하면서 비인적 자원보다 인적 자원을 동원하는 이 같은 성향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 경제 내에서 서구 기술을 통합하려고 하던 때에조차도, 계속해서 동아시아 발전 경로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1880년대까지 일본 정부는, 일본이 토지와 자본 모두 부족하지만 노동은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질이 높다는 인식에 입각하여 산업화 전략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전략은 "전통적인 노동 집약적 기술의 적극적 이용, 전통 산업의 근대화, 그리고 요소 부존량의 상이한 조건을 감안하여 서구 기술을 신중하게 적용하도록" 장려하였다. 스기하라는 이 이종 교배의 발전 경로를, "서구 경로보다 노동을 더 전면적으로 흡수하고 이용하면서 기계와 자본으로 노동을 대체하는 것에는 덜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노동 집약적 산업화"라고 불렀다.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61)

원래 스기하라가 근면혁명 개념을 제기한 것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는데, 아리기는 이 개념이 전통시대의 중국에 또한 적용될 뿐 아니라 20세기 후반 이래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자본집약적 발전 원리인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집약적 발전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전통시대 중국의 발전 원리가 오늘날의 상황에도 적용 가능하다는 아리기의 관점은 시사하는 바가 엄청나게 크다. 무엇보다 나는 근대문명의 원자론적 관점(atomic view)에 밀려난 여러 지역 전통문명의 유기론적 관점(organic view)의 부활 가능성을 여기에서 본다. '서세동점'의 본질인 원자론적 관점의 극복에서 그 해소의 결정적 열쇠를 찾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좌익이 된 까닭

 

<해방일기> 작업 중 '사회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19468, 응답자의 70%가 바람직한 체제로 사회주의를 꼽았던 여론조사를 살펴보면서였다.

이 응답자들이 생각한 '사회주의'가 어떤 것이었을까? 나란히 제시된 다른 선택지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었으니,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나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와 다른 것, 즉 소유권을 제한된 범위에서 인정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를 생각한 것 같다.

이 무렵의 여론조사에 대해 "피면접자들의 대표성도 의심스럽거니와 면접의 절차와 분위기가 과연 정확한 민심의 소재를 밝혀낼 정도로 적절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연구자도 있다. (전상인 <고개 숙인 수정주의> 14) 여기 소개한 항목 같으면 응답자들이 과연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충분한 이해를 갖고 응답한 것인지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는 1946년의 일반인만이 아니라 2015년의 연구자들도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지난 200년 동안 이 말이 쓰여 온 폭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말을 쓰는 데는 정치적 의지가 얹히는 일이 많아서 더욱 혼란스럽다.

1820년대에 '사회주의'(socialism)란 말이 처음 쓰인 것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대립되는 뜻이었다고 한다. 당시 원자론의 폭발적 유행으로 개인주의 풍조가 강화되는 데 대한 저항의 의미로 생각된다. 그런데 20여 년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1848)에서 사회주의를 '() 자본주의'의 뜻으로 쓰고 사회주의 중에도 제대로 된 사회주의,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지칭하면서 사회주의의 뜻이 굴절을 겪게 되었다.

'반 개인주의'의 뜻을 가진 사회주의를 '반 자본주의'로 정의하는 것은 일종의 범주착오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인데,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공통점만을 근거로 사회주의를 동류(同類)로 끌어들인 데서 용어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원자론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자론에 반대하는 사회주의가 입지를 잃고 공산주의에 휘말리게 된 것이라고 나는 본다. 유기론적 질서를 중시하던 초기 사회주의는 '공상적 사회주의'로 몰려 유럽 사상계에서 배제되었다.

20세기 들어 원자론과 개인주의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3세계'에 서양 정치사상이 들어왔을 때 '사회주의'에 대해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오염되기 전의, '반 개인주의'로서 원래의 사회주의를 찾는 경향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 주제에 관한 연구 성과나 논설을 아직 접하지 못했는데, 관련 학계의 검토를 권하고 싶다.

19468월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선택한 '사회주의'에는 '반 개인주의'의 의미가 어느 정도 얹혀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조선인의 대다수가 지키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던 '전통질서'는 유기론적 원리에 따른 것이었고, 일본 통치자들이 제시한 새로운 사회 조직방법에 가장 강한 반발을 보인 것이 그 원자론적 원리였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글 또 한 대목에서 비슷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전체주의의 가장 근본적 실패는 사상을 콘트롤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 소련의 시민은,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혼자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줄곧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오랜 기간 동안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그 정부가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시민은 알고 있었다. 스탈리니즘 이래 견뎌온 개인적인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갖고 있었다. 사실상 모든 가정이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또는 1930년대의 공포정치 하에서 육친이나 친구를 잃게 되었고, 전쟁에서 치른 희생은 스탈린의 외교정책의 실패로 인해 더더욱 크게 되었다. (...) 사람들은 말로는 계급이 없다는 자신들의 사회에서 새롭게 계급제도가 대두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역사의 종말> 65)

 

 

이름을 잃어버린 유기론적 원리를 찾아

 

2008년 가을 <뉴라이트 비판>을 쓸 때, 정치적 입장을 대충이라도 밝힐 필요를 느꼈다. 여러 모로 생각한 끝에 나 자신을 '보수'로 판정했다. 개별 사안을 놓고는 '진보' 쪽 주장에 공감하는 것이 많았지만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있는 그대로 대충 만족하는 사람이다. 물론 향상을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만 점진적 향상을 바란다. 근본까지 바뀌거나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몇 해 동안 이 판정에 스스로 만족하고 지냈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이 판정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선택지가 '진보''보수' 둘 뿐이라면 보수가 맞다. 그런데 이 양자택일이 과연 충분한 의미를 가진 선택일까?

몇 해 전까지 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 사회의 지식인들은 환원론적-원자론적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선택지를 떠올리기 힘들다. 원자론을 벗어난 원리에 따른 사회 조직방법이 가능하다면, 그 조직방법을 추구하는 정치적 입장을 세울 길이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 입장에 설 것이다. 그것을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데는 '개인'을 앞세워야 하는 측면도 있고 '사회'를 앞세워야 하는 측면도 있다. 개인을 앞세우는 개인주의와 사회를 앞세우는 사회주의는 꼭 이름을 붙이지 않고도 인간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리며 작동해 왔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 개인주의에 일방적으로 경도되는 풍조가 일어나 세계를 휩쓸고 오늘에 이르렀다.

개인주의에 대칭되는 원리는 이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지경에 와있다. '사회주의' 외에도 '전체주의'(totalitarianism), '집체주의'(collectivism) 등 개인주의에 맞설 만한 이름이 모두 특정한 정치체제에 이용당하다가 좁고 부정적인 의미에 갇히게 되었다. 유기론적 사회조직 원리는 근대 정치학에서 제대로 검토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해방공간에서 만난 민족주의자 대부분이 '중간파'의 길을 걸었다. 194610월에 그들이 빚어낸 좌우합작 7원칙 중 토지에 대한 '체감(遞減)매상 무상분배' 원칙은 일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원칙의 절충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 당시 인민의 70%가 원하던 '사회주의' 원칙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후 수십 년간 환원론적-원자론적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지금 사람들에 비해 그들은 유기론적 정치 원리에 대한 감각을 아직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을 좌절시킨 외세의 압력을 이겨낼 때, 이 사회가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기 바란다.

'서세동점의 해소'가 바로 '동세서점'은 아닐 것이다. 동양 세력이 힘을 키워 서양 사회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광경만을 그려서는 진정한 해소를 바랄 수 없다. 서세동점의 본질적 요소들을 극복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나는 원자론적 조직방법과 사고방식을 그 핵심으로 본다. 유기론적 원리가 복원되어 원자론적 원리와 적절한 방법으로 어울리게 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서세동점의 해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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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3회 동아시아의 서세동점

 

 

1793년 조지 매카트니가 영국왕의 사절로 중국에 왔을 때 황제에게 고두(叩頭, kowtow)의 예를 거부해서 국교 수립을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은 낭설이다. 이듬해 베이징에 온 네덜란드 사절단은 고두의 예를 행했지만 역시 국교 수립에 실패했다. 청나라 황제와 조정은 중국이 오랫동안 외국을 대해 온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건륭제가 매카트니에게 들려 영국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그대 나라 사람 하나를 천조(天朝)에 보내 그대 나라를 대표하게 하고 그대 나라와의 교역을 감독하게 해달라는 그대의 요청은 모든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고 들어줄 수 없는 것이오. 천조에 봉사하는 유럽인들이 북경에 살도록 허락받아 온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들은 중국 복장을 입어야 하고 지정된 장소에서만 활동할 수 있으며 제 나라로 돌아갈 허락을 받는 일이 없소. 그대도 관습을 잘 알 것이오. 그대가 보내려 하는 사절에게 북경의 유럽인 관리들과 같은 위치를 부여할 수도 없으며, 자유로운 활동이나 본국과의 연락을 허용할 수 없소. 그러니 그가 이곳에 있더라도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오.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오직 훌륭한 통치를 행하고 천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뿐이오. 진기한 물건이나 값비싼 물건에는 관심이 없소. 그대가 보내온 공물을 내가 가납하는 것은 머나먼 곳에서 그것을 보내온 그대의 마음을 생각해서일 뿐이오. 이 왕조의 크나큰 덕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모든 왕과 부족들이 육로와 수로를 통해 귀한 공물을 보내오고 있소. 그대의 사신이 직접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없는 물건이 없소. 나는 기이하고 별난 물건에 관심이 없으며 그대 나라 출산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없소.”

16세기 초 동양항로 개척 이래 유럽 전체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심각한 무역 역조를 겪어왔다.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채굴한 막대한 양의 은이 유럽인의 손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더 이상 은의 채굴을 늘리기 어려워진 18세기 말에 이르러 영국 등 산업혁명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유럽국들은 공산품의 수출로 이 역조를 메울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역 확대를 위해서는 국교 수립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절단을 보냈지만, 중국 측에게는 종래의 관습과 제도를 바꿀 뜻이 없었다.

영국동인도회사는 18세기 말부터 대 중국 무역 역조를 극복하기 위해 아편 수출정책을 추진했다. 인도에서 대량생산한 아편을 콜카타에서 경매로 팔면, 중국의 금령을 뚫고 가져가 파는 것은 상인들의 몫이었다. 아편 사업은 대박이었다. 18세기 말 연간 약 1천 상자(한 상자는 60kg 남짓)에서 1830년대에는 연간 3만 상자까지 늘어나, 중국의 가장 큰 수출 품목인 차의 수입액과 맞먹게 되었다. 여기에 제1차 중영전쟁(1840-42)의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아편전쟁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아편전쟁은 물론 중국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제2차 중영전쟁(1856-1860)의 충격만은 못했다.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해서 국토 일부를 침범하는 정도의 사태는 역사상 꽤 자주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가 유린당하는 사태는 그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서세동점현상은 제2차 중영전쟁을 계기로 본격적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무렵 해상수송력의 급격한 발달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종래의 항해기술로는 수송비가 너무 비싸 어느 수준 이상의 고가품만 장거리교역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제 값싼 대량수송이 가능해졌다. 군대의 이동도 쉬워졌다. 중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조건이 갖춰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서는 서양 문물을 적극 도입하려는 양무(洋務)운동이 일어났고 조선과 일본에도 그 여파가 크게 미쳤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따라 이듬해 일-미 화친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개항이 이뤄진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54년의 화친조약은(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미국 선박의 피난 정박과 필수품 공급지로 개방한다는 내용으로, 일본은 이 해 러시아, 영국과도 같은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하나의 고식책일 뿐, 쇄국정책의 폐기가 아니었다. 진정한 개항은 1858년 미국-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 5국과의 수호통상조약으로 이뤄졌다.

1858년의 수호통상조약이 미국 영사 타운젠트 해리스의 설득에 따른 것으로 한 때는 알려졌지만 근래의 연구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 내에서 1857년 초부터 개국정책이 검토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1854년의 조약은 페리 함대의 위협 앞에서 당장 전쟁을 피하기 위한 고식책이었다. 그런데 3년 후 적극적 개방 정책을 스스로 모색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2차 중영전쟁이 불러일으킨 위기의식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에서는 1863년 고종의 즉위와 대원군의 집정이 세도정치의 양상을 바꾼 원인에 대한 고찰이 아직도 미흡하다. 안동 김 씨의 세도는 당시 절정에 올라 있고 쇠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느껴 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동 김 씨는 헌종 때도 실력을 지키고 있는 채로 풍양 조 씨를 전면에 내세운 일이 있었다. 내우외환 때문에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느꼈다면, 서양 세력이 중국을 꺾고 동아시아 지역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것이 원인의 일부일 수 있다.

1861년 초, 열하(熱河)로 피신한 황제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북경에 사행으로 갔던 박규수(1807-1877)가 귀국 직후 박원양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전쟁의 충격을 줄여서 보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서양 오랑캐가 요구하는 바는 곧 배상금 독촉과 시장 개방 등의 일에 불과했다. (...) 군주란 멀리 도피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만 어쩔 수 없이 주화파에게 이끌려 잠시 그 예봉을 피하면서, 한편으로 화의를 허락하고 조약 체결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자 오랑캐가 곧 철군하여 모두 떠나가고, 남아 있는 자들은 약간의 상인 무리이다.”

북경 체류 중 비변사에 보낸 장계에서도 서양 오랑캐는 그 의도가 토지에 있지 않으며, 통상과 포교에 전력할 따름이라 하여 위기의식을 축소하는 논조였다. 그러나 그 후 그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도입하는 데 힘을 쏟아 개화파의 영수 역할을 맡은 것을 보면 그의 낙관적 견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찍이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살펴보며 정세 변화에 민감하던 그로서, 서양 오랑캐의 북경 유린이라는 경천동지할 사태가 조선 민심에 너무 큰 충격을 주지 않도록 애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원군, 하면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말이 쇄국정책이다. 일본에서 많이 쓰인 이 말을 그대로 옮겨 쓰는 데는 문제가 많다. 대원군 집정기의 대외정책은 아편전쟁 전의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통적 대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일본과도 종래의 통신사 관계를 지키려 했다. ‘만국공법의 기준으로 봤을 때 쇄국인 것이고, 만국공법에 따른 대외관계, 개항의 압력이 발생했기 때문에 쇄국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본이 일찍 자발적으로 개화에 나서서 근대화-산업화에 성공한 반면 중국과 조선은 개화를 거부하고 있다가 열등한 위치에 빠졌다는 통설이 있다. 큰 의미가 없는 비교다. 같은 평면 위에서 비교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본을 우선 비교한다면, 일본은 서양세력이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개항 전에도 은의 수출 등 서양세력이 주도하는 교역체제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19세기 중엽 대형 증기선으로 해군력을 확장한 서양세력이 일본 개항에 나선 것은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어느 정도 확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 소규모 도발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을 때도 더 큰 함대를 동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일본이 함포외교에 굴복해 형식적 개항을 한 후에도 메이지유신(1868)으로 본격적 개화에 나서기까지 15년의 시간이 걸렸다. 15년간 일본 내에서 온갖 곡절이 일어나는 동안 적극적으로 개입할 강한 동기를 느끼는 서양 열강이 없었다. 반면 조선은 강한 진출의지를 가진 일본에게 개항을 당했고, 일본은 자기네가 누린 시간 여유를 조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의 비교에서는 고려할 사항이 매우 많은데, 서양 열강들에게 동양 침략의 궁극적 대상이 일본 아닌 중국이었다는 점을 무엇보다 지적하고 싶다. 서양인이 16세기 중엽 동아시아 교역에 끼어든 이래 중국은 그들이 원하는 온갖 재화를 무궁무진 공급할 엘도라도로 보였다. 일본은 중국 침략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서양 열강들 중에 자기편으로 삼으려는 나라가 있을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의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모든 열강이 이해를 함께 했다. 청일전쟁(1894-95) 시점에서 일본은 서양 열강의 사냥개 역할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제국주의 경쟁에서 열강의 최대 표적은 중국이었다. 러시아가 아관파천(1896)으로 조선에서 유리한 기회를 쥐고도 일본에게 양보한 것은 중국으로 진출할 통로인 만주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1904-05)은 일본이 만주의 러시아 이권에 도전한 결과였다. 전쟁의 표적은 조선이 아니라 만주였다.

산업화 수준이 아직 낮은 단계에 있으면서 근대화 열망이 높은 일본은 유럽의 1류 열강들에게 하위 파트너로서 인기 있는 존재였다. 세계체제론에서 말하는 반()주변부에 있던 일본은 1류 열강과 합작할 때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대 표적인 중국 가까이 있어서 중국 침략을 염두에 둔 동맹의 가치도 컸다.

1차 세계대전에서도 일본은 연합국의 하위 파트너로 참여해 중국에서 독일의 이권을 넘겨받는 등 이익을 챙겼다. 이때까지 일본의 상위 파트너 역할을 주로 맡은 것은 영국이었다. 그런데 1차 대전을 계기로 국력이 급성장한 미국이 일본의 길을 가로막는 위치에 섰다. 태평양 건너편을 바라보는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일본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어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은 반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발돋움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래와 같은 하위 파트너 역할로 만족하지 못하는 단계에 와있었다.

1차 대전이 유럽대전에 그친 반면 제2차 세계대전에는 태평양전쟁이 겹쳐져 있었다. 유럽의 기존 열강들이 뒤얽혀 기력을 소진하는 동안 태평양 양안의 두 신흥 강국이 태평양시대의 주도권을 놓고 부딪친 이 싸움에서 승리한 미국은 일본이 자기 하위 파트너 역할을 맡도록 개조했다. 그 개조의 핵심 내용이 군사력 제거였다. 그로 인해 불구(不具)국가가 된 일본은 과거사의 반성에조차 제약을 갖게 되고, ‘보통국가가 되려는 열망조차 자연스러운 표현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 지금까지 빠져 있다.

 

2차 대전을 통해 제국주의체제가 냉전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근본적 변화를 겪지 않았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서 냉전시대의 공산주의체제를 자본주의체제의 하위체제로 보는 데 나는 동의한다. 소련의 진영 내 헤게모니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 틀 속에서 부속적인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모순이 제국주의체제에서 민족 모순의 형태로 불거지는 동안 계급 모순이 자라나 냉전체제의 배경이 되었다. 민족 모순은 산업화 이전 시대에서 유래하는 것이므로 먼저 나타난 반면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심화되는 계급 모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화될 것이 예상되었다. 2차 대전은 표면상 민족 모순을 둘러싸고 진행되었지만 바닥에는 계급 모순을 둘러싼 대립이 잠재해 있었다. 따라서 미국과 영국에게 공식적인 적은 일본과 독일이었어도 숨겨진 더 큰 적은 소련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 잠재적 적대관계가 표면화되어 냉전체제를 빚어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한--3국은 냉전체제에 바로 편입되었다. 일본은 미국 점령 하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교두보로 개편되었고 한국은 남북으로 쪼개져 냉전의 첨병이 되었다. 중국은 공산화되어 동아시아는 자본주의진영의 일본-남한과 공산주의진영의 중국-북한으로 갈라졌다. 겉보기로는 완전한 대칭 상황이었지만, 일본과 중국의 위치에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미국에 예속되었다. 반면 중국의 소련에 대한 종속은 확실하지 않았다. 전쟁 후 소련은 동유럽의 공산권 구축에 전념하면서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았고, 중국 공산당은 자력으로 대륙을 석권했다. 초기의 공산중국은 소련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정권이 안정되자마자 소련에 대한 종속관계에서 벗어났다.

이 차이가 1970년대 데탕트 상황에서 한층 더 분명히 드러났다.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편승해 중국이 국제무대로 복귀하면서 냉전체제의 중요한 변수로 부각된 것이다. 중국이 겪은 정치적 곡절을 나는 세밀히 알지 못하지만, 소련 해체와 공산권 붕괴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수십 년에 걸쳐 큰 국력 신장을 이룬 배경을 냉전기 중국의 독자적 정책 추진에서 찾는 원톄쥔(<백년의 급진>)의 관점을 그럴싸하게 받아들인다.

중국이 독자적 정치노선을 펼치는 동안 일본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고, 그 효과가 남한을 비롯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로 확산되었다. 서양에서 만들어진 냉전체제의 제약 안에서 동양인은 나름대로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그 결과 아시아적 가치논의가 1990년대에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20세기 말까지 서세동점의 상황이 틀을 지켰지만,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후반까지 서양세력이 보인 압도적인 힘은 이제 상대적 위치로 물러서고 있었다. 리고 21세기 들어와서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힘이 상승하는 추세가 더 뚜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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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