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8. 15:10

예전에는 번역을 수단으로 생각했지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창조적인 작업이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게다가 내 저술을 싫도록 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내 글이 역사학도의 글로는 남들 별로 않는 얘기를 많이 담는 편이니까 창조성에 관해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데... 날이 갈수록 "창조성이 밥 먹여주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밥벌이를 위해 번역을 밤낮으로 하며 내 글을 적게 쓸 때는 "아! 언젠가는 내 글 쓰며 살았으면!" 하는 갈망이 있었다. 그러다 2008년 <밖에서 본 한국사>가 기대 이상의 환영을 받으면서 신이 났다. 그로부터 8년 동안 책으로 찍혀 나온 분량만 원고지 3만 매가 넘으니... 글 적게 써서 아쉽다고 투정할 일은 없게 되었다.

 

내 글 쓰기 바쁘다 보니 번역은 아주 마음에 드는 일만 이따금씩 맡게 되었고, 어쩌다 할 때는 재미도 있고 느끼는 보람도 괜찮다. 그러다 1년 전 좀 큰 일거리로 <China Model>을 맡고, 그 작업에서 기대 이상의 재미와 만족을 얻었다.

 

재미와 만족을 늘리는 데 저자와의 소통이 큰 몫을 했다. 일 시작할 때 기술적인 문제로 메일을 보냈더니 응답이 퍽 은근했다. 역자가 어떤 사람인지 뒷조사를 좀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편하게 이야기 나누다 보니 작업에 필요한 범위를 넘어 벼라별 얘기를 다 나누게 되고 급기야는 지난 여름 중국 가는 길에 만나보기까지 하게 되었다.

 

저자와의 소통이 든든하게 되니까 글 옮기는 데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문면에 얽매일 필요 없이 저자가 알더라도 동의하거나 좋아할 표현방법을 짐작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에도 내 번역문에 불평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이번 번역을 보고는 만족을 넘어 희열을 표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이는 차치하고, 며칠 전 유시민 선생에게 받은 소감에서 "책 내용은 충분히 흥미롭고 / 외람된 말이지만, 번역도 훌륭합니다^^" 한 대목을 읽으면서 참 뿌듯했다. 번역을 평해 달라고 검토를 부탁한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런 외람된 말을 하다니, 아마 내게 그만한 수준을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번역"이라는 일의 의미를 더 크게 보는 생각이 작년 연말부터 일어났다. 신영복 선생 글을 읽다가, 이런 글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 글과 달리, 속도를 생각지 말고 마음으로 잠겨드는 방식의 읽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이 글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면 그런 읽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옛날 학인들이 경전에 주석(注釋) 작업을 한 것이 바로 그런 읽기 방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글 쓴 사람에 대해 수동적인 위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텍스트를 전해받는 사람들에게 능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아닌가. 쓰는 사람은 능동, 읽는 사람은 수동의 위치에 묶이는 우리가 익숙한 자세는 어쩌면 대중을 관객의 위치로 몰아넣는 근대문명의 풍조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신 선생 글 외에도 외국 독자들에게 내놓을 만한 것이 있으면 번역을 고려해 보려고 평소 좋아하던 필자들의 글을 조금 들춰보았는데, 생각 밖으로 찾기 힘들다. 내가 읽기에는 좋은 글도 외국 독자들을 떠올리면 썩 내키지 않는 것이 많다. 국내용 글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한 차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필자들의 글 중에 외국 독자에게 내놓을 만한 것이 적은 까닭이 뭘까? 인류 공통의 주제들을 놓고 세계 각지의 지성인들과 함께 생각할 여유가 없을 만큼 우리 사회 지식인들은 너무 수준 낮은 문제들에 절박하게 몰리는 상황을 겪어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른 들었다.

 

내 글을 돌아봐도 그렇다. 내 글 중에 외국 독자들을 위해 번역할 만한 것이 있나 살펴볼 때, 저술활동의 진행에 따라 국내용의 성격이 강해져 왔다. <밖에서 본 한국사>는 괜찮다. <망국의 역사>까지도 괜찮다. 한국사를 서술한 것이지만 외국 독자들도 흥미를 일으킬 만한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그 후의 책들은 한국 밖의 독자에게 보여줄 것이 별로 없다.

 

신영복 선생의 글이 특출한 범용성을 가진 것은 그분이 한국사회에서 격리된 위치에 오랫동안 묶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감옥 안에서 생을 마칠 수도 있다는 마음이라면 사회를 휘두르는 이런저런 문제에서 꽤 초연한 자세로 보다 보편적인 명제에 생각을 쏟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 보면 나 자신도 사회성 부족 때문에 격리된 위치를 스스로 지키다 보니 감옥살이 않고도 보편적인 명제에 생각을 꽤 모을 수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군 복무 시절 생각이 난다. 고참이 되어 좀 할랑해지면 감금생활의 질곡이 더 예민하게 느껴져 자유로운 "사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절실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그 "사회"라는 곳에 또 어떤 질곡이 있는지 떠올리며 막막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 "사회"가 그 후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그 좋아진 수준이 마치 고참들이 비꼬는 말 "군대 참 좋아졌다~" 수준과 별 차이 없는 게 아닐까.

 

세계 지성계에 대한 한국사회의 공헌이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영화, 소설 등 여러 분야에서 눈에 띄는 공헌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한국사회의 제반 조건 덕분에 그런 공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릅쓰고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충분한 역량을 가진 문화인이라도 한국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려고 애쓰다 보면 한국 밖에 내놓을 성과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조건이다.

 

앞으로 내 일할 수 있는 능력의 가급적 많은 부분을 해외 독자들을 향한 일에 활용할 생각을 한다. 내 기왕의 글 포함해서 한국의 좋은 글을 영어로 옮기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앞으로 쓰는 글에서도 독자 범위를 한국 안에 한정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For Foreign Eyes" 카테고리는 그런 뜻에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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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7. 2. 27. 10:44

 

똑똑한 애들 다 모아놨다는 경기학교에서 나도 천재 취급을 받은 일이 있다. 아마 5년간 아무 존재감 없이 지내던 조용한 넘이 고3 되면서 갑자기 시험 잘 치는 재능을 드러내는 바람에 친구들이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고3 되면서 그런 식으로 사고 치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고3 되면서 치기 시작하는 월례 모의고사의 시험 스타일이 정규시험과 크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영-수-국 세 과목 시험을 서울대 입시 스타일로 치르고 난이도를 엄청 쎄게 하니까 상층부의 변별력이 엄청 크게 나타난다. 그래서 정규시험에서는 두드러져 보이지 않던 친구가 한 과목에서라도 강점을 보이면 크게 눈길을 끌고 "영어 도사", "수학 도사" 타이틀을 딴다. 나는 워낙 사고를 크게 쳐서 "전 과목 도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게 했다.

 

그런데 "도사"라는 타이틀이 진짜 어울리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수학 한 과목에서는 2등이 보이지 않는 1등을 독점하고 지냈다. 2등 그룹이 60점 전후라면 그 친구는 80점, 속인들과 뚝 떨어진 경지에서 혼자 노닐었다. 마침 성도 구 씨였는데, "도사"란 말 유행한 것이 그 무렵 인기를 끈 무협소설 정협지의 "瞿 도사" 때문이어서 그 친구는 "구 도사"로 통했다.

 

이 구상진이라는 친구는 불교학생회에도 함께 다녔고 고3 올라갈 무렵에는 나랑 함께 물리학과를 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사이였다. 가까운 사이일 뿐 아니라 나는 그 친구를 매우 좋아했다. 사람 좋아하는 이유에 꼭 분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수학 도사" 얘기를 꺼낸 참이니 그의 "수학 마인드"에 마음이 끌린 점은 말할 수 있다. 그가 수학 문제 잘 푼 것은 별다른 기능을 갖춰서가 아니라 쓸 데 없는 요소들을 쉽게 배제하고 요점에 집중하는 능력 덕분이었다고 그때도 생각했다.

 

입학원서 제출을 불과 몇 주일 앞두고 이 친구가 법학과로 지망을 바꿨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보다도 훌륭한 물리학도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유일한 친구였는데. 법률 같은 분야에도 수학 마인드가 필요한 구석이 있긴 하겠지, 하고 넘어갔다.

 

구상진은 무난히 법학과에 합격했고, 졸업 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학 졸업 후 몇 해 못 보고 지내다가 1980년에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검사직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만나서 사연을 들었다. 반공법 피의자 하나를 "무혐의 불기소" 처분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했다. 피의자인 학생이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주장을 하는데 이 친구 보기에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무것도 없으니 "자백이 유일한 증거일 때에는 증거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원리에 의거해 본인 주장을 묵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군부 유력자들의 성미를 건드려 옷을 벗게 되었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구상진답다"고 생각했다. 좌파고 나발이고, 자백의 증거능력에 관한 원리가 분명한 이상 다른 것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닌가. 그 날 저녁 술이 얼큰해지자 좀 이상한 소리도 나오곤 했지만(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체벌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둥) 역시 수학 도사다운 의견으로 가상하게 생각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더욱더 좋아하게 되었다.

 

의사인 부인에게 "Wife Grant"를 받아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더니 얼마 후 서울시립대 교수로 들어갔다. 간간이 얼굴 보며 지내다가 1990년 내가 학교를 떠난 후 다시 적조해졌다.

 

2002년엔가? 평생 유일하게 법정에서 다툴 일이 생겼을 때 이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고, 거기 응해 주어서 회포를 풀 기회를 가졌다. 그 무렵 가족법인지 호적법인지 문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나는 못마땅했다.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세상 일에 일리가 하나둘인가? 자기 주장을 하나의 의견으로 내놓는 데 그친다면 친구로서 계속 좋아하겠는데, 현실적인 사업으로 밀고 나가는 데는 찬성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만난 나까지 자기 주장에 승복시키려고 기를 쓰는 데는 딱 질색이었다. 그 무렵 어느 당의 국회의원 공천을 바라본다는 이야기에 겹쳐져, 이 친구가 수학의 세계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대리인단에 이 친구가 이름 올린 것을 보며, 물리학도의 길을 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고종인지 외사촌인지 사촌 자형이 김기춘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김기춘의 이력을 검색해 보니 1968년 우리가 대학에 진학할 때 10년 연상의 김기춘이 평검사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을 때였겠다. 그가 재주있는 처사촌이 자기 길을 따라오도록 권유한 게 아니었을지. 1980년 구 검사가 옷 벗을 때는 김기춘의 기세가 잠시 수그러졌을 때였고.

 

이제 구상진의 기억을 추억의 서랍 속에 쟁여둔다. 나보다는 확실한 천재로 여겼던 또 하나 친구의 기억과 함께. 공과대로 진학했다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현수. 동급생들보다 한 살 아래였고, 그 한 살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질 만큼 순진한 성품이었던 현수는 고등학교 시절에 언어 능력이 놀랄 만큼 빠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가 오래 살았다면 대외적 성취는 차치하고, 적어도 사회와의 소통에는 나나 구상진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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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안희정의 "선한 의지" 논란을 보며 최근 번역한 글(D Bell, The China Model)에서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말한 정치인관을 소개한 대목이 떠오른다.

 

베버는 정치가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정열,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각. 정열이란 감정적 고양이 아니라 대의(大義)에 대한 헌신성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가는 이 대의에 대한 책임감을 행동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 또한 균형감각은 그로 하여금 내면적 집중력과 침착성을 갖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해주며, 따라서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지키게 해준다.”

 

훌륭한 정치가에게 문제는 결국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균형감각을 어떻게 하나의 인간 안에 합쳐놓느냐하는 것이다. 나쁜 정치인의 경우 권력의 추구가 객관성을 잃으면 대의를 위한 헌신이 아니라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길이 된다. 정치의 궁극적 대죄(大罪) 두 가지 중 하나는 객관성의 상실이고, 또 하나는 무책임이다. 정치인이 전면에 나서고 싶어 하게 하는 허영심이 두 가지 죄 중 하나, 또는 둘 다를 향해 강하게 이끌어간다.”

 

안희정의 발언에 "분노"가 들어 있지 않다는 문재인의 지적은 간결한 표현으로 정곡을 찔렀다. 정열이 없거나 감춰진 발언이라는 것이다. 안희정은 비유니, 반어법이니, 테크니컬한 기준으로 해명을 했지만, 문재인의 지적에 자신은 "분노의 정치"를 바라지 않는다고 대응했다. 이 대응은 득보다 실이 많은 방향이었다고 나는 본다. 당장은 그 자신 선량한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 한 말이라고 사람들의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자신이 "정열 없는 정치가"가 되려 한다는 고백 아닌가.

 

일반 생활인에게도 정열은 필요하다. 그리고 정열이 지나쳐도 문제가 된다. 질 좋은 정열을 적당량 갖고 사는 것이 본인에게도 좋고 그가 속한 사회에도 좋다.

 

일반인보다 넓은 범위에 많은 책임을 지는 정치가라면 이 점에서 일반인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단, 책임이 큰 정치가의 정열이 지나칠 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아무리 감정적 고양이 아니라 대의에 대한 헌신성이라도, 정열이 지나친 정치가가 큰 책임을 맡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한편 '정치'가 '행정'과 다른 점을 생각한다면 정열의 필요가 분명하다. 가치 판단의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의 현상 유지를 위해서라면 정열 없는 행정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새로운 가치 판단을 부단히 필요로 한다. 특히 인민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정치에 정치가의 정열은 꼭 필요한 것이다. 인민의 정열에 호응하는 정치가의 정열이 있어야 인민의 정열이 파괴적인 방향으로 나타날 때도 건설적인 방향으로 물꼬를 틀어줄 수 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는 인민의 분노를 여과없이 대변했고 힐러리는 아무 호응을 하지 못했다. 인민의 정열을 승화시킬 길을 보여준 것은 샌더즈였다.

 

정치에 정열의 필요성은 사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 대다수 인민이 편안한 만족을 누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정열을 발동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민의 불만이 커서 큰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 불만을 정치권이 수용하고 소화하는 데 정치가의 정열이 필요하다.

 

한국 정치에서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분석에 큰 의미가 없다고 나는 본다. 수구와 변혁의 대결을 그 기본 양상으로 본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구호가 무엇이었나. "바꿔 보자!" 아니었던가. 한국 정치는 "운용의 미" 정도로 다수 인민을 만족시킬 만한 틀을 갖춰본 적이 없다. 1987년을 계기로 수준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50보 100보였다는 사실이 근년 확인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다수 인민은 어느 쪽으로에 상관없이 "바꿔 보자!"를 외쳐온 것이다. 한편 숫자는 적지만 유리한 위치를 누리는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또는 무의식중에라도 "이대로!"를 외치며 버텨 왔다. ("개혁"이란 말은 큰 틀을 "이대로!" 지키며 최소한의 운용상 변화만 바라보는 뜻으로 많이 쓰여 왔기 때문에 여기서는 "변혁"이란 말을 쓴다.)

 

나는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이상주의적인 진보 주장에 반대하는 생각을 변함없이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 상당한 변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해 왔다. 불가피한 변혁을 받아들이되 지나친 욕심에 휘둘리지 않기 바라는 것이다. (변혁의 범위가 제한되기 바라는 뜻이 "개혁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기술적 수준에 그치는 "개혁"을 넘어 이념적 정합성을 요구한다는 데 나는 의미를 둔다.)

 

지금은 그 변혁의 필요성이 모처럼 크게 드러나는 상황이다. 정치가들의 균형감각보다 정열이 크게 요구되는 상황이다. 정치판이 정열에 휩쓸릴 수 있는 이 상황에서 굳이 "분노의 정치"에 경멸감을 표하며 균형감각을 강조하는 안희정의 뜻도 가상하고 용기도 가상하다. (이것은 반어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한 의지" 발언에 대한 차후의 해명은 구차하다. "이대로!"를 마음에 품은 강력한 소수파에 영합한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