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이 마테오 리치 서세 400주년이었다. 누구 출생 몇백 주년, 서거 몇백 주년 등 큰 기념이 있을 때는 연구자들도 그에 맞춰 연구성과를 발표하려고 애쓴다. 주목을 많이 받으려는 속셈도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야 연구 지원을 확보할 기회도 많고, 특정 주제에 관한 연구가 집중됨으로써 연구활동의 한 획기를 만들게 되는 효과도 있다.

 

마테오 리치 연구는 내게 문명교섭사 공부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마 교수직에 남아 있었다면 해외 학자들과의 교류에서 내 몫의 공헌을 계속하기 위해 연구 영역을 점진적으로 옮기고 넓혀 나갔을 것이다. 연구비 확보하기에도 좋은 방향이다.

 

그런데 나는 학교를 떠나고 학회활동도 중단하면서 교류나 지원을 도외시하고 개인적 판단에 따라 공부 방향을 빠른 속도로 옮기며 넓혀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시적 관점을 세울 수 있었고, 그 관점에서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10년간 활발한 저술활동은 그래서 가능한 것이었다.

 

근년 들어 저술활동의 효과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면서 향후 활동방향을 여러 모로 궁리하다 보니, 일단 양적 측면보다 질적 측면을 중시할 마음이 든다. "이런 이야기도 이 사회에 필요한 거야." 하는 기준으로 할일을 생각해서는 할일이 너무 많다. 가치가 인정되는 일 중에서도 다른 사람이 하기 힘든, 꼭 내가 할 일을 가려낼 필요가 있다. 가려내는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일차적 기준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가진 주제라야 능동적 공부가 가능한 것이니까. 그래서 "爲己之學"의 기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 노선은 내가 한국인의 관점에서도, 동아시아인의 관점에서도, 세계인의 관점에서도 흥미를 느낀 주제였다. 이후 내 문명교섭사 공부는 적응주의 원리를 중심에 두고 계속 펼쳐졌다. 그런데 이 주제를 가장 치밀하게 고찰했던 연구 영역을 별로 돌아보지 않게 된 것은 내가 네트워크를 떠나 혼자 틀어박혀 공부하며 지내게 된 상황 때문이었다. 내가 공부 성과를 언론과 출판을 통해 발표하는 곳이 한국사회인 만큼 한국 독자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는 범위로 작업이 쏠리게 되고, 그래서 한국근현대사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번에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 모처럼 치밀하게 검토하며 살펴보니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을 참 잘 담은 글이다. 지난 십여 년간 관계된 연구성과가 나온 것을 아직 잘 살펴보지 못했지만, 리뷰를 살펴보니 내가 추구한 방향의 연구는 많지 않고, 내 "이야기"를 확충할 만한 자료는 꽤 나온 것 같다. 최근 연구성과를 수용해서 이 논문을 더 좋은 읽을거리로 만드는 작업이 매우 중요한 일로 생각된다. 금년 한 해는 마테오 리치와 함께!

 

Posted by 문천

 

結論

 

<中國誌> 520-21장에는 리치의 죽음과 그 직후의 관련된 일들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이는 물론 리치 자신의 기록이 아니고 판토하, 우르시스, 롱고바르디 등 리치 주변 선교사들의 기록과 증언을 트리고가 정리한 것이다. 이를 통해 리치가 죽을 당시 중국 선교단이 처해 있던 상황과 선교사들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리치는 1610511일에 세상을 떠났다.[473] <中國誌> 520절에 그가 죽기 전까지 얼마나 일에 열심이었는지, 그리고 죽음에 임하여 얼마나 경건한 태도를 지켰는지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리치가 후계자들에게 당부하는 말로 유럽으로부터 새로 도착하는 선교사들에게 사려 깊게, 그리고 친절하게 대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기존 선교사들의 편협한 태도를 불안해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473] Pfister, Dehergne, 모두 <中國誌> 563-564의 기록에 따라 리치의 죽음을 511일의 일로 보았으나 의문의 여지가 있다. <中國誌> 568에 수록된 판토하의 탄원서에는 ()318일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양력으로 411일에 해당된다. 그리고 3월에는 윤달이 있었는데 윤3월의 18일은 510일이었다. 판토하의 탄원서가 비상히 빨리 처리되어서 제출한 지 한 달이 안 되어예부가 황제에게 答覆한 날짜가 ()423(양력 614)이었다고 하는데, 리치가 죽은 후 탄원서를 제출하기까지 걸렸을 날짜를 생각하면 윤318(510)보다는 본318(411)이었을 가능성이 크게 보인다.

또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고회사로 활약하고 있던 동료 예수회사 코통[474] 신부를 들어 나는 프랑스 궁정에서 일하고 있는 코통 신부에게 주님 안에서 크나큰 사랑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중국에서 노력해 온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고 싶다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의 入敎, 그리고 그에 따를 위로부터의 개종에 얼마나 큰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475]

[474] Pierre Coton. 프랑스 왕 앙리 4(부르봉 왕조의 첫 왕. 1589-1610 재위)의 치세 후기에 왕의 고회사로서 프랑스 궁정뿐 아니라 유럽 가톨릭 세계의 움직임에 큰 작용을 한 예수회 신부. W Bangert, A History of the Society of Jesus (St Louis, 1986): 123-131, R Fulop-Miller, The Power and Secret of the Jesuits (New York, 1930): 360-363, M Harney, The Jesuits in History (New York, 1941): 184-6, J Spence, The Memory Palace of Matteo Ricci (New York, 1983): 161, 214 등에 그의 활동이 서술되어 있다.

[475] <中國誌> 563.

리치가 죽을 때 선교소에 모인 신자들이 울음과 슬픔을 억제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슬픔이 지나치게 드러나 보일 경우, 신앙의 진실성이 손상되고 리치 신부의 영광이 흐려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북경의 선교소가 그 본래의 목적을 공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 신앙의 눈에 띄는 표현을 삼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76] 1년 가까이 지난 후 묘지가 확보되어 운구할 때도 조심스러운 태도가 일관된다: “리치 신부의 유해가 담긴 관은 1년 가까이 선교소의 예배당 제단 옆에 놓여 있었다. 신부들이 묘소의 집을 순조롭게 장악한 뒤 유해가 그곳으로 옮겨져 교회 법규에 맞는 묘지가 만들어지고 예배당이 만들어질 때까지 보관되었다. 장례식보다 개선행렬에 어울리는, 중국인의 요란하고 화려한 풍습은 이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그런 豪奢는 종교적 예법에도 마땅치 않을 뿐 아니라 선교소의 재정상태에도 어울리지 않았다.”[477]

[476] <中國誌> 564.

[477] <中國誌> 588.

장례식을 화려하게 하지 못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했지만, 이처럼 열심히 이유를 설명하려 든 까닭은 화려하게 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최근 몇 해 동안 韶州南昌에서 두드러진 선교활동이 주민들과의 갈등을 가져왔던 사정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478]

[478] 韶州南昌의 분규에 대해서는 <中國誌> 460-466, 522-535, 554-560 .

리치는 죽기 몇 해 전 선교단 묘지를 장만하려고 계약까지 했다가 무슨 문제인가가 생겨서 포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479] 이제 리치가 죽자 묘지 문제가 생겼는데, 여기서 황제에게 葬地下賜를 청원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479] <中國誌> 565.

장례 미사에 참석했던 많은 신자들 가운데 황궁의 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뛰어난 신분의 학인 한 사람이 혹시 황제께서 리치 신부에게 장지를 하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집에 돌아간 뒤에 했다. 그런 일이 이뤄진다면 이 나라에서 선교단과 신앙의 합법적인 존재도 확인하는 효과가 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신부들에게 제안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선교소로 돌아가 신부들에게 자기 의견을 내놓고, 이처럼 중요한 시도에 노력을 쏟아보고 그 결과를 기대해 볼만하리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신부들은 그와 의논해서 황제에게 보낼 탄원서의 초안을 만든 다음 이것을 리치 신부가 최근에 세례 준 李之藻에게 보내 올바른 문체로 다듬어달라고 부탁했다. 우아한 문체의 소유자로 평판 있는 관리인 李之藻는 탄원서를 다듬어주고 신부들의 시도에 찬성했을 뿐 아니라 그 추진을 도와주겠다고 자원했다. 그 후 그는 조정에 있는 동안 이 일의 진척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어서 신부들은 탄원서를 가장 영향력 있는 친구 몇몇에게 보여서 그들의 의견이 어떠한지, 너무 주제넘은 일을 벌이는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지 알아보고, 또 그들이 찬성할 경우 장차 그 일을 추진할 때 그들의 협조를 청하였다. 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찬성하고 그 추진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는데, 이런 일에는 위험이 개재되는 수가 많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480]

[480] <中國誌> 567.

탄원서의 감수를 빙자해서 가능한 한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협조를 부탁한 것이다. 선교단장 서리 판토하의 이름으로 작성된 탄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臣 龐迪我泰西 사람으로서 얼마 전에 죽은 같은 泰西사람 하나를 위해 삼가 이 탄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올립니다. 폐하의 넓으신 도량에 의지하여 바라옵는 바는 이 사람에게 葬地下賜해 주심으로써 폐하의 어지심이 천하의 어느 곳에서 온 사람도 다 덮어주실 수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臣 龐迪我는 먼 나라 출생으로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이 위대한 나라의 名聲을 흠모하여 3년의 항해로 구만리의 바다를 건너,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뛰어넘은 끝에 萬曆 2812, 利瑪竇 및 다른 동료 셋과 함께 폐하의 都城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 신들은 저희 고향에서 가져온 초라한 方物 몇 가지를 폐하께 進貢하였으며, 그 이래 皇家柴粮을 지급받아 왔읍니다.

萬曆 38318일에 利瑪竇老病으로 세상을 떠나매 먼 나라에서 온 孤兒처럼 남겨져 萬人의 동정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屍身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나 그 긴 航路에 선원들이 屍身을 배에 실어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들이 오랫동안 폐하의 그늘에서 살아온 것을 생각해서 폐하의 백성처럼 여겨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들을 살아있는 동안 먹여 살려 주신 것처럼 들이 죽은 뒤에도 몸 덮을 흙 한 자락을 베풀어 주실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감히 이런 바램을 가지는 것은 의 동료 利瑪竇가 중국 도착 이래 중국의 학문을 연마하는 데 게으름이 없었고 중국의 經典에 적힌 을 닦는 데 온 힘을 다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遠方에서 온 들이 지금 누리는 것을 넘어 어찌 더 바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는 죽은 동료를 매장할 땅 한 조각이 없음을 슬퍼하며 눈물로 폐하께 앙청하옵나니, 亡者를 묻을 곳을 정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살아있는 저희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앞서 죽은 동료의 모범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을 맹서합니다. 그가 했던 그대로 폐하와 태후 전하의 만수무강을 천주님께 기도하면서 폐하 아래 태평성대를 누리고자 합니다. 이처럼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비록 개미처럼 미미한 저희들이지만 감격하는 마음은 누구 못지않게 클 것이며, 그 은혜를 한 순간이라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폐하의 뜻을 엎드려 기다립니다.”[481]

[481] <中國誌> 567-569.

死者를 공경하고 屍身 처리를 중시하는 중국의 관습, 그리고 천하만민을 赤子로 여기는 중국의 통치이념에 호소하는 요지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중국에 체재하는 이유가 중국의 문화를 흠모하는데 공식적으로 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일 진행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東閣大學士로 있던 葉向高였다.[482] 政事의 처리에 별 열의가 없는 神宗황제에게 그의 작용이 없었다면, 아무리 이 탄원을 지지하는 관리들이 많았더라도 그렇게 신속히 처리될 수 없었을 것이다.[483] 그리고 또 한 사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都御史라는 신분만 밝혀져 있고 d'Elia에 의해서도 누구인지가 고증되지 않고 있는데,[484] 曹于汴일 가능성이 크다.[485] 그리고 이 일을 관장한 禮部의 상서 吳道南李之藻의 설득으로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486]

[482] 1562-1627. 그는 南京에서부터 선교사들과 상당한 교분이 있었고, 나중에 福建省의 고향에 은거한 뒤에도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483] <中國誌> 577-578에 문서의 수발에 결재를 담당하는 照磨官의 임명을 황제가 비준하지 않고 있어서 일이 지체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은 편법을 써서까지 이 일의 진행을 서둘러주었다고 한다.

[484] 리치의 원래 기록에는 극히 적은 수의 중국인들만 이름을 밝혀 놓았다. 대부분 중요한 인물은 d'Elia의 작업으로 고증되었다.

[485] 는 리치가 북경에 도착해서 환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부터 먼저 찾아와서 호의를 표시한 사람이며,(<中國誌> 377-378, 387-388) <畸人十篇> 5편의 상대방으로 나오는 曹給諫이기도 하다. 그는 吏科給事中左僉都御史, 左都御史 등의 직책에 오래 있었다.

[486] <中國誌> 572에 보면 원래 이 일이 황제의 下賜를 담당하는 호부에 배당되었으나, 신부들에게 우호적인 관리들이 예부에 많았기 때문에 (?)都御史의 주선으로 夷狄의 업무를 관장하는 예부에 이 일을 돌렸다고 한다.

애초에 판토하가 탄원한 목표는 葬地 뿐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얻어진 것은 葬地만이 아니라 선교소로 쓸 수 있는 큼직한 건물까지 붙어 있었다. 황제의 지시에 대한 禮部()423일부 答覆 내용을 은 폐하께서 順天府尹에게 명하시어 주인 없는 廟宇와 한 필지 땅을 찾게 해서 利瑪竇를 매장케 하고 龐迪我 등이 廟宇에 살면서 天主를 섬기는 자신들의 신앙을 자유롭게 받들면서 폐하의 만수무강을 빌게끔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487] 인용한 것은 곧이듣기 어렵다. 하사받을 땅과 집이 결정된 뒤 順天府尹 이름으로 그 집 앞에 붙인 포고문 내용을 황제가 이 재산을 그들에게 하사하시는 뜻은 그들을 赤子로 여기셔서 利瑪竇屍身을 매장케 하고 그의 동료들이 이곳에 항구히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받들고 황제 폐하와 태후 전하의 만수무강, 그리고 帝國의 태평을 빌도록 하는 것이다. [488] 인용한 것도 마찬가지로 선교사들의 윤색을 겪은 것 같다. 實錄에는 427일부로 賜西洋國故陪臣利瑪竇空閑地畝埋葬이라고만 되어 있다.[489]

[487] <中國誌> 575.

[488] <中國誌> 583.

[489] <明 神宗實錄> 470, 8.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일방적인 은혜를 받는 일이었기 때문에 받는 쪽에서 입맛을 내세울 계제가 아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閣老 葉向高의 영향력으로 시작해서 禮部상서 吳道南, 順天府尹 黃吉士 등 긴요한 위치의 고관들이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마음에 드는 장소를 고를 수 있었다.[490]

[490] <中國誌> 578-579.

그런데 선교사들이 고른 곳은 권세를 누리다가 무슨 죄목인가로 하옥되어 있던 환관이 사찰 명목으로 가지고 있던 별장이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크고 튼튼한 건물이 끼워져 있는 것이 아마 그들이 이곳을 고른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것은 결과적으로 불상 모시던 자리를 빼앗아 天主를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관리들의 도움을 통해 환관의 재산을 빼앗게 되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옥중의 환관은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별장을 외국인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애를 써 보았지만 여의치 않자 어느 고위의 태감에게 그 집을 넘겨주고 그에게 별장 지켜내는 일을 맡겼다. 그 태감이 府尹에게 압력을 가하려 하자 黃 府尹은 한편으로는 이 일이 황제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에게 이 태감을 찾아가서 인사를 닦도록 눈치를 주었다. 그런데 이 인사가 그리 기분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이 찾아간 날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기다린 뒤에 그 환관은 심부름꾼을 보내, 그 날은 너무 바빠 접견할 시간이 없으니 용무를 서면으로 심부름꾼 편에 들여보내면 나중에 읽어보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의 첫 방문을 거절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그제야 그들을 불러들였는데, 그들은 중국 사대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접견에 임해 그는 자리 잡고 앉아 찾아오는 다른 사람들처럼 신부들도 무릎 꿇고 인사 올릴 것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높은 관리들을 대할 때보다 이 자에게 더 공손하게 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뻣뻣이 서 있었다. 수작이 먹혀들지 않는 것이 분명하자 그 환관은 일어나 중국인들 사이의 平交의 예로 그들을 맞았다. 그 뒤의 대화는 그대로 서서 마주보는 채로 진행되었다. 신부들은 일부 환관들의 농간 때문에 관리들을 통해 얻은 황제의 은혜를 아직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고 그의 영향력을 통해 일을 바로잡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동료의 매장을 위한, 그리고 자신들의 거주를 위한 재산권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하고, 황제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라고 했다. 그들은 감사의 뜻을 표했으나 가지고 간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491]

[491] <中國誌> 584-585.

태감 馬堂의 주선으로 進貢을 성취하고 북경 거주의 허가도 환관을 통해 口頭로 전달받던[492], 북경에 처음 자리 잡을 때를 생각하면 금석지감을 느낄 일이다. 관리들의 도움을 통해 葬地 下賜라는 형태로 황제의 공식적 인정을 받은 이제 환관들 앞에 무릎을 꿇기는커녕 그들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 관리들의 호의를 얻는 데 유리하리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환관과의 대립을 과장해서 선전한 면도 있을 것 같다.[493]

[492] <中國誌> 389. 앞 제24.

[493] <中國誌> 333-334: 1599년 남경에서 守備太監 馮保에게 리치가 거만하게 대했다는 기록도 같은 방법으로 굴절된 것일 수 있다.

失勢한 환관의 집을 빼앗는 마당에 짐을 정리하러 온 환관의 하인이 중국인 修士에게 환관의 재산을 가로챌 정도로 강한 권세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너희 주인이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이 무엇이냐?” 물은 데 대해 우리 주인은 德性學問, 書籍, 그리고 가장 높은 하느님의 법률을 가진 분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이 하느님의 법률만큼 강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는 대목은 매우 상징적이다.[494] 이어서 비꼬는 투로 그렇게 설득력이 있다면 이 절보다 더 크고 더 좋은 절을 달라고 관리들을 설득하지 그러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그분은 겸손하고 검소한 분이어서 더 크고 더 화려한 집은 어울리지 않는다. 황제 폐하와 관리들이 주는 것이면 그분에게는 제일 좋은 것이다하고 빠져나갔다고 한다.

[494] <中國誌> 582.

환관뿐 아니라 관리들 가운데 입장이 어긋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녹녹치 않은 태도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애초에 葬地 下賜 件戶部에 배당된 것을 禮部로 돌렸다고 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었던 탓인지 이 일이 조세 면제 관계로 戶部에 돌아왔을 때 戶部상서가 너무 큰 집을 준 것이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공문을 順天府로 보냈다. 順天府 관리는 이 공문 사본을 판토하에게 보내고 회답에 어떤 내용을 넣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는데, 판토하는 회답을 보낼 필요 없이 공문 보낸 사람이 스스로 철회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판토하 신부는 戶部상서를 찾아가서, 황제께서 그들에게 葬地만이 아니라 거처할 집까지 하사하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집이 좀 거창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황제의 도량이 넓으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 신부들의 신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서 공문을 철회할 것을 청했다. 그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요구하는 태도에 상서는 적지 않게 놀라서 대답하기를 戶部의 조치에 불만이 있으면 서면으로 제출해 달라, 내일 회의에서 검토하겠다고 했다. 상서와 작별한 판토하 신부는 같은 戶部에서 일하는 친분이 있는 관리를 찾아갔다. 상서의 친구이기도 한 이 사람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한 다음, 많은 관리들이 함께 결정한 일에 혼자 나서서 반대해 가지고 좋을 일이 없다, 여러 사람 감정을 상하게 하면 본인에게 손해가 클 것이라고 상서에게 충고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사람은 신부의 부탁을 아주 철저하게 따라 주었다. 이튿날 戶部상서는 판토하 신부에게 매우 정중한 편지를 보내 모든 일이 신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처리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판토하 신부는 답신과 함께 유럽에서 가져온 신기한 물건으로 조그만 선물을 보냈고, 이것으로 이 일은 모두 마무리된 것으로 보였다. 며칠 후 문제의 공문은 정식으로 철회되었고, 새 집과 묘지는 영구히 조세가 감면될 것이 통보되었다.”[495]

[495] <中國誌> 587-588.

대단한 수준의 파워게임이다. 知彼知己의 자신감 없이는 이런 강공책을 쓸 수 없을 것이다. 中國誌의 기록에는 선교사들의 위상이 아주 높아서 고위관리들과 대등하게 왕래한 것 같은 인상을 주려 애쓴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관리들의 집에 불려가거나 서재에 불려 들어가는 것만도 대단한 기회로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일이 이만큼 진척되자 신부들은 황제로부터 이토록 커다란 혜택을 얻는 데 긴요한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런 일에 전문가인 판토하 신부는 상아를 깎아서 해, , 별을 관측하는 晷儀(해시계 모양의 관측기구)를 여러 개 만들었다. 재정이 넉넉지 않아서 더 값비싼 재료를 쓸 수가 없었지만 상아로 만든 물건도 보기 좋고 재미있게 생겼고, 받는 사람들이 그 사용방법을 배우고 싶어 했기 때문에 신부들이 그들의 집과 서재 안에까지 찾아들어가는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런 방문으로 인해 관리들 사이에서 위신이 높아지기도 했고 추진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었다.”[496]

[496] <中國誌> 575-576.

이 일을 추진한 주체는 판토하였다. <七克>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는 판토하는 1599년 중국에 도착한 이래 계속해서 리치를 수행해 왔고, 리치가 죽은 후에는 롱고바르디가 선교단장 업무를 넘겨받을 때까지 업무를 대행하고 있었다. 롱고바르디가 북경에 도착한 것은 161153, 葬地 下賜의 일이 완전히 낙착되어 리치의 유해를 새 집으로 옮겨놓은 후였다. 그 뒤 묘소와 예배당의 설계, 시공도 그 지휘 하에 진행되어 그 해 111일 만성절을 기해 리치의 매장과 새 교회의 祝聖이 행해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원래 있던 불상들이 파괴되었는데, 그 기록을 보면 선교사들이 불상의 파괴에 얼마나 강한 집착을 가졌는지 느낄 수 있다:

우상들을 원래의 제단에서 치운 다음, 진흙으로 만든 것은 부숴서 가루로 만들고 나무로 만든 것은 불태워버렸다. 선교소 하인들은 이 파괴의 작업에 아주 신명이 나서 서로 누가 많이 부수는지 시합까지 했는데, 부수는 과정에서 뭔가 찾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은 우상을 만들 때 그 뱃속에 동전이나 구슬 따위를 집어넣는 관습이 있는데, 하인들은 우상을 뜯어 발기면서 이런 물건들을 찾아내는 경쟁을 했다. 우상을 때려 부수는 일이 그 집 원래 주인들에게도 알려졌지만, 재산을 되찾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 집을 우상의 전당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재산을 지키려는 핑계였을 뿐이지, 정말로 그 우상들을 지키려는 뜻이 아니었다. 제단도 헐어내고 벽화 위에는 회칠을 했다. 새로 만든 제단 위쪽에는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修士 한 사람이 아름답게 그린 구세주 예수님의 초상화를 걸 자리가 마련되었다.”[497]

[497] <中國誌> 591.

예수회 선교사로 리치보다 앞서서 중국 땅에 정착을 시도한 것은 루지에리와 파시오였다.[498] 그리고 리치보다 앞서서 중국 땅에서 죽은 사람이 넷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평생의 일을 마치고 중국 땅에 묻힌 것은 리치가 처음이었다.[499] 그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방법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 판토하의 노력에 의해 묘지와 교회를 하사받은 일은 선교사의 존재를 공식화하기 위해 평생을 애써 온 리치의 노력을 마무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 교회의 대문에 선교사들이 자랑스레 써 붙인 欽賜라는 두 글자가 리치 자신의 눈으로 볼 때는 자신의 최대의 업적이었을 것이다.

[498] 마카오를 중국 땅에서 제외시키는 관점은 당시 선교사들의 시각에 따름.

[499] 앞서 죽은 알메이다(1591), 페트리스(1593), 소에리오(1607), 테데시(1609)는 모두 마카오에 운구되어 그곳에 묻혔다. 祝聖되지 않은 묘지에 묻을 수 없기 때문에 알메이다의 경우는 운구되기까지 2년간이나 韶州의 선교소에 유해가 보관되기도 했다. 祝聖된 묘지를 가지게 된 것이 선교단의 정착에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失澤利彦는 예수회의 성공을 뒷받침한 중국 布敎방침으로 讀書人重視주의, 北京中心주의, 科學주의, 禮物주의의 네 가지를 꼽고, 발리냐노가 발명한 적응주의를 그 바탕으로 제시했다.[500] 이 방침들은 누구보다도 리치의 활동 속에서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며, 하나하나의 방침이 나름의 효과를 일으킨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침들을 평면적으로 나란히 나열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500] 失澤利彦, <中國とキリスト>(東京, 1972) 64-66.

이른바 北京中心주의禮物주의라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전술적으로 대응하는 방침을 가리킬 뿐, 아무런 신학적 의미도 개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기에 主義라는 말을 붙이는 것조차 어색하다. ‘讀書人重視주의科學주의도 표현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들에 비해서는 선교의 원리가 함축된 것이며 중국 선교에 고유한 뜻을 가진 것으로, 최소한 전략적인 의미는 읽을 수 있는 것이다.

士大夫 계층, 특히 지식인층을 중시하고 과학활동을 선교활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세운 것은 리치가 중국 체류 경험을 통해 빚어낸 방침이다. 肇慶에서 王泮을 비롯한 관리들과 접하면서 리치는 관료-학인 계층이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의 제면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지 절실히 느꼈다. , 세계지도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반응을 살피며, 그리고 瞿太素, 王弘誨 등의 曆算學에 대한 관심에 부딪히며 과학활동의 전망을 키우게 되었다.

리치와 루지에리는 중국에 들어갈 때부터 황제에게 접근, ‘위로부터의 傳敎를 꿈꾸었는데, 이것은 예수회의 일본에서의 경험이 발리냐노를 통해 이식된 것이었다. 이 꿈을 리치는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고, 그의 葬地 下賜가 이 꿈의 한 부분이나마 이루어 준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北京에 자리 잡은 후로는 이 꿈의 양상이 처음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 변화는 리치의 환관에 대한 태도에서 읽을 수 있다. <中國誌>의 기록을 보면 1599南京에 있을 때부터 환관을 적대시하는 태도를 적어 놓았는데, 과연 그런 태도가 당시에 분명히 드러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501] 北京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도 환관의 힘을 많이 빌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환관들과의 관계는 그 후에 정리된 것 같다.[502] 이것은 일차적으로 환관과 관료 사이의 선택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는 황제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감춰져 있었다. 황제에의 접근이 절대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는 이러한 선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501] 리치가 해마다 10-11월에 예수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하여 상급자들에게 보낸 편지들 가운데는 공식 보고서의 성격을 띤 것이 많았고, 1608년 이후 <中國誌>를 작성할 때 중요한 과거의 일들을 이 편지들에서 되살려낸 것이 많다. 그러나 북경에 자리 잡기 전까지 환관들을 강하게 비판한 내용은 편지에서 찾아볼 수 없다.

[502] 北京에서 교유하게 된 曹于汴, 葉向高 東林 계열 인물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리치의 葬地 下賜라는 것이 관료들의 힘을 빌려 환관의 재산을 빼앗는 형태로 진행된 데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판토하의 관점에서 볼 때, 황제라는 것은 관료들을 통해 일정한 작용을 가했을 때 그에 따라 일정한 반응을 나타내는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리치와 함께 主客司 관리들을 따라 1601년에 빈 옥좌에 알현하던 때와는 다른 인식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황제가 차지하고 있던 큰 자리는 그동안 葉向高를 위시한 우호적인 관료들, 徐光啓, 李之藻를 비롯한 힘 있는 입교자들에 의해 채워져 왔을 것이다.

Gernet는 선교사들에게 우호적인 관료-학인들이 儒家 가치의 실현 및 확장을 위해 선교사들에게 동조한 측면을 강조,[503] 補儒論에 대한 중국 측의 반응을 부각시켰다. 왕조 말기의 위기상황에서 중국 일부 지식인들이 필요로 한 세계관과 인간관을 선교사들이 제시했다는 것이다. 리치가 북경에 자리 잡은 뒤 황제에의 접근에 집중하던 자세를 바꿔 관료-학인층을 주된 포섭대상으로 설정하면서 이 계층의 요구에 포괄적으로 부응하는 방향을 취함에 따라 윤리와 과학 분야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503] J Gernet, China and the Christian Impact (Cambridge, 1985): 64-68.

윤리 분야의 가장 큰 업적이 <畸人十篇>이고 그 先驅<天主實義>였다면 과학 분야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幾何原本>이었고 그 先驅<萬國全圖>였다. 歐羅巴人들의 天文推算工匠製作은 훌륭하지만 그 議論誇詐하고 迂怪하다고 비판한 四庫全書 편찬자도 <畸人十篇>에 대해서는 그 말이 힘있고도 부드러워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족하다하고 談禪에 비유했다.[504] 한편 <幾何原本>은 짧게는 崇禎 연간의 修曆사업의 근거가 되고, 길게는 淸朝 時憲曆을 통해 18세기 후반까지 北京에서 예수회 활동의 보루를 만들어 주었다. 이것들이 北京에 자리 잡은 후 십년 안 되는 기간 동안 리치가 이룩한 업적의 精髓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04] <四庫全書總目> 125.

리치가 죽기 직전에 세례를 준 李之藻는 자신이 죽기 직전, 1629년에 선교사들의 업적을 모아 <天學初函>을 간행했다. 수록된 理編 9가운데는 리치의 것이 5, 器編 10가운데는 6들어 있었다. Gernet는 이 체제가 당시 중국 지식인들이 西學兩面一體로 본 관점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는데,[505] 또 어떤 차원에서는 구분을 전제로 한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方以智(1611-71) 같은 사람은 과학 방면을 받아들이는 데는 적극적이면서도 종교로서의 西學과는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506] 이런 태도는 淸代에 접어들어 더욱 심화되어, 西學의 과학을 기독교에서 분리, 고대 중국의 학술이 파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西藝東源論으로까지 발전했다.[507]

[505] J Gernet, 상게서: 58.

[506] W Peterson, “From Interest to Indifference: Fang I-chih and Western Learning.” Ch'ing-shih wen-t'i (1976): 60-80 “Fang I-chih: Western Learning and the 'Investigation of Things'.” in Wm de Bary,(ed.) The Unfolding of Neo-Confucianism (New York, 1975).

[507] J Henderson, “Ch‘ing scholars’ views of Western astronomy.” HJAS, 46-1, 1986, 121-148.

리치 자신이 생각한 과학은 로마대학에서 클라비우스에게 배웠던 울타리 안에서 기독교의 세계관과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中國誌> 도처에서 서양 과학 소개가 중국인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기독교의 을 이해할 바탕을 만들어줄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가 북경에서 활동하는 동안 유럽에서는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활약하고 있었고, 톨레미의 우주관을 토대로 한 그의 과학활동이 時憲曆으로 결실을 맺자 얼마 되지 않아 케플러에 입각한 新法으로 바뀐다.[508] 유럽에서 종교와 우주관 사이의 결별이 중국에까지 파급된 것이다.

[508] 陳遵嬀, <中國天文學史>(3, 上海, 1973-83) 240-243, 藪內 淸, <中國天文曆法> (東京, 1969) 164-167.

전례논쟁을 통해 리치가 제창한 補儒論적 적응주의가 中西 양측의 정통주의자들에게 공박을 받아 立地를 잃은 일은 많은 연구가 되어 왔고,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이와 어느 정도 를 같이하는 일이 과학 분야에서도 일어났던 사실은 적응주의의 기본 구조에 같은 문제의 근거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시사해 준다. 리치의 적응주의가 明末 중국 지식인들의 요구에 맞춰 형성되었다고 보는 Gernet의 관점과 리치가 제시한 西學의 틀이 르네상스的 全人性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고 하는 Spence의 관점이 겹쳐지는 곳에서 그 선교노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Posted by 문천

 

4절 마테오 리치 傳敎방법의 反響

 

16092, 리치는 오랜 친구이자 지휘계통상 상급자인 일본-중국 순찰사 프란체스코 파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국선교의 전망을 밝게 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나열했다.[437]

[437] <書信集> 412-416.

1. 어려움 속에서도 중단 없이 사업을 계속해 온 결과 입교자는 날로 늘어가며 南京北京에서 좋은 평판을 누리고 있다 중국 관리들은 선교사들을 聖德之士이며 學識之人이라고 보는데, 이 두 가지가 중국인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2. 중국에서는 문학, 과학, 哲理 등이 존중되는데, 우리 신앙이 合情合理하기 때문에 士大夫의 신앙을 거두기 쉽고, 士大夫가 넘어오면 다른 사람들도 쉽게 넘어온다.

3. 중국에서는 서적이 중요한 전달매체인데, 이제 몇 가지 책을 내어 좋은 효과를 거두기 시작하고 있다.

4. 중국인은 총명해서 과학을 잘 받아들인다. 과학과 묶어 신앙을 전해줄 수 있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많은 존경과 감사를 얻을 수 있다.

5. 중국인은 원래 天理(자연법칙)를 중시하고 經典에는 事天의 개념이 있다. 1500년 전 석가의 우상이 들어온 뒤로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이를 따르는 것은 대개 婦女鄕愚에 불과하며 지식층은 진리를 따라올 것으로 기대한다.

6. 중국은 하나의 황제 아래 통일되어 있고 戰亂도 적어서 한 번 교화가 되면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선교사들도 황제 이하 중국인들이 교화될 경우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것을 입교자들에게 확실히 해 주어야 한다.

7. 선교사들이 중국인들 사이에서 훌륭한 학자, 인격자로서 평판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학문을 연구해서 그들의 생각에 다가가야 한다.

8. 학인 계층은 우상을 숭배하는 불교와 도교를 경멸하고 유교만을 받든다. 따라서 우리의 우상숭배 공격을 학인 계층은 반발은커녕 우호적인 태도로 받아들인다.

끝의 세 항목은 단순한 상황 분석이 아니라 선교의 노선을 제시하는 뜻이 강한 것이므로 그 全文을 옮겨 놓는다.

6. “중국의 교우들이 더욱 신앙을 보존하기 쉬운 것은 이토록 안강하고 태평하여 어떤 때는 백여 년이라도 전란이 없이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커다란 나라를 일단 귀화시키기만 한다면 황제 한 사람의 통치체제라는 것이 교회의 보존을 위해 더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동란으로 불안하거나 신기한 변화를 좋아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얻을 수 없는 조건이다. 지금 이곳에 천주교 없이도 오랜 태평을 누릴 수 있다면, 이제 이곳에 천주교가 널리 펼쳐질 경우, 미래의 세월은 太平萬世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주교는 과거에도 전란으로 찢어진 세계를 평화로 이끈 적이 여러 차례 있지 않았는가! 중국인은 이런 측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 존경심을 가진다. 나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밝히기를, 중국인들이 예수님께 귀의하더라도 반란을 일으켜서도 안 되며 왕조를 바꾸려 들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중국 황제와 황족이 법을 통해 모든 중국인이 천주교를 신봉케 하기를 바라면서도 우리는 천주께서 이 일을 서서히, 완벽하게 이뤄 나가시기를 성심껏 기구한다. 우리는 마땅히 천주께서 베풀어주신 이 좋은 출발을 아껴야 할 것이며 이것은 또한 돌아가신 발리냐노 순찰사 신부님의 뜻이기도 하다. 비록 당장 입교하는 사람의 수는 적지만 천주교는 중국 각지에서 높이 숭상받고 있다. 입교하려 하지 않는 저 사람들을 모두 행위가 나쁜 사람으로 보려는 사람이 정말로 있다면, 중국의 옛사람들 가운데 聖賢의 이름을 누리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을 어찌할 것인가? ‘중국의 옛날 善人들도 예수님 시대에 살았더라면 틀림없이 좋은 교우들이 되었으리라고 그들은 말한다. 입교하지 않은 중국인들이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어느 의 외교인은 우리의 <天主實義>를 간행하여 사람들에게 팔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사들이니, 그들이 비록 당장은 입교할 뜻이 없지만 훌륭한 종교로 여기는 것은 분명하다. 그 밖에 우리가 지은 윤리서도 여러 곳에서 거듭해서 출판되고 있다.”

7. “우리는 지금까지 중국 학인들과 交往함에 있어서 조그만 일에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해서, 그들은 모두 우리를 훌륭한 학자, 인격자로 칭송하는데, 이런 명예를 끝까지 지키기를 바란다. 우리들 중에는 품행이 단정하고 신학에 연구가 깊은 이들이 많이 있지만, 다시 심오한 중국 학술을 힘들여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학술만을 알고 중국의 학문에 통하지 않는다면 아무 쓸 데가 없고 일에도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부님, 이 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뚜렷이 이해해주십시오.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이런 자세로 천주님을 믿는 사람 1만 인을 진정 얻기 바라지, 다른 식으로 전 중국이 귀의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8. “중국에는 3종의 종교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유교는 관리와 학자들이 신봉하는 것이다. 다른 두 가지는 모두 우상을 숭배하고 서로 적대하여 학인들의 경멸을 받는다. 학인들은 신비한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윤리와 도덕을 논함에 우리와 별 차이가 없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가 만드는 서적에서는 유가 학설을 칭찬하면서 다른 양가 종교의 사상을 비판하는데, 다만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사상과 우리 교의가 어긋날 경우에만 반박한다. 그런 때문에 중국 사대부 중에는 우리에게 적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오히려 그들은 즐거이 우리와 왕래한다.”

이것이 말년에 이르기까지 리치가 정리해 놓은 중국선교의 기본노선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일본을 의식한 표현으로 보이는 제6항의 動亂으로 불안하거나 신기한 변화를 좋아하는 다른 나라”, 7항의 다른 식으로 전 중국이 귀의하는 것등이 재미있다. 1580년대 일본 다이묘들이 포르투갈인과의 교역을 바라고 다투어 전 주민을 입교시킬 때, 해마다 수만 명 입교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선교사들은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고 예수회 간부들의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관심이 모두 일본으로 집중되어 순찰사 발리냐노의 통찰력과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중국선교는 착수할 겨를조차 없을 지경이었다.[438] 중국선교가 시작된 뒤에도 입교자 숫자로 나타나는 선교의 성과는 일본에 비해 너무나 미미해서 관계자들을 고심하게 했다.

[438] 1590년대까지 예수회 일본선교의 활발한 모습은 C Boxer,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1549-1650 (Berkeley, 1951): 29-136; G Elison, Deus Destroyed (Cambridge-MA, 1973): 13-106 참조.

그러나 리치가 이 편지를 쓸 무렵까지 일본 선교현장에 큰 변화가 있었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번갈아 패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를 옹호하던 다이묘들이 몰락하거나 약화되는 한편, 중앙집권에 저항하는 요소로 인식된 기독교가 자주 탄압을 받게 된 결과 선교사들의 활동이 제약을 받고 교세가 위축되기에 이른 것이다.[439] 그리고 이 편지를 받은 파시오 자신이 누구보다 쓰라린 경험을 겪은 장본인이었다. 중국선교단 단장으로서 리치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겉보기 실적으로 압박받고 있던 상황에서 벗어나 고유한 방법론을 당당하게 개진할 수 있는 위치에 온 셈이다.

[439]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海老澤有道: 261-314; Elison: 111-127, 242-244; C Boxer,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1549-1650 (Berkeley, 1951): 137-187 등에 정리되어 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리치가 들고 나온 고유한 방법론의 요점은 무엇이었는가? 6항에서 기독교의 도입이 중국의 체제변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개종은 하지 않았더라도 기독교에 협조적인 학인 계층의 태도를 존중하는 입장을 밝혔다. 중국의 옛 善人들도 마찬가지 기준으로 존중한다고 하였다. 7항에서는 중국인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끌어들이려고만 들 것이 아니라 중국인의 생각에 이쪽에서 다가갈 필요를 밝히고, 신앙의 깊이가 없는 집단입교보다 개인의 자발적인 입교를 기다리는 입장을 표명했다. 8항에서는 去佛補儒의 방침을 밝혔다.

앞서 제1장에서 마카오에서 北京에 이르기까지 리치의 행적을 더듬어보았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어가는 동안에 제2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중국에 대한 인식도 형성되고,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선교를 위한 고유한 노선도 빚어졌을 것이다. 10년 가까이 北京에서 지내는 동안 처음 자리 잡는 단계의 불안정한 기간 얼마간을 지낸 후로는 상당히 안정된 생활과 활동의 틀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은 두 개의 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나는 <二十五言>, <天主實義>, <畸人十篇>, <辨學遺牘> 등 중국의 일반 지식층이 볼만한 책자를 만들고 그런 책자의 내용을 표준으로 한 사교활동을 벌이는 일이었다. 또 하나는 徐光啓, 李之藻 등에게 유럽 수학을 가르쳐주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 수학서를 중국어로 번역해 내는 일이었다. 일반 중국인을 위한 책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 四庫全書 편찬자들의 관점을 한 번 살펴보자.

<辨學遺牘> : 利瑪竇가 힘써 釋氏를 배척하였으므로 불교를 따르는 자들이 일어나 항쟁했고, 利瑪竇가 다시 말을 바꿔가며 공격했다. 각자 한 가지씩 황당무계한 설을 가지고 이치로 따져지지 않는 영역에서 승부를 겨루겠다는 것이다. 혹 불교에 물리쳐야 할 것이 있는지 몰라도 천주교가 나서서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천주교에 물리쳐야 할 것이 있는지 몰라도 불교가 나서서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함께 목욕하다가 서로 벌거벗은 꼴을 흉보는 모습이라 하겠다.

<二十五言> : 서양 敎法이 중국에 전한 것은 이 25에서 비롯한다. 큰 뜻은 釋氏에게서 표절한 것이 많은데, 문사는 더 졸렬하다. 무릇 西方는 오직 佛書만이 있는데 구라파인들이 그 뜻을 취하여 재주를 부렸지만 역시 그 근본을 멀리 떠나지는 못했다. 그 후 중국에 들어온 뒤 儒書를 보고 익히고 이것을 빌려 그 설을 분식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길어지고 복잡해져서 따지기 어렵게 되었는데, 스스로 三敎의 위에 높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내용을 남겨두어 그 가 시작할 때 所見이 이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天主實義> : (8편의 제목을 나열하고) 큰 뜻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주를 존신케 하여 그 를 행하게 하는 것이다. 유교를 공격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六經 가운데 上帝의 설을 부회하여 천주에 맞추었으며, 특히 釋氏를 공격하여 점수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천당지옥의 설과 윤회의 설은 별 차이가 없으며, 애써 釋氏의 설을 조금 바꾸기는 했으나 本原은 한 가지이다.

<畸人十篇> : (10편의 제목을 나열하고) 그 말씨가 힘 있고도 부드러워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족하다. 크게 보아 釋氏生死無常, 罪福不爽 등의 설을 뜯어 맞춘 것이지만 輪廻, 戒殺, 不娶의 설은 취하지 않았으며, 儒理附會함으로써 쉽게 비판하지 못하도록 했다. 같은 저자의 <天主實義>純涉支離荒誕한 데 비해 그 立說이 더 교묘하다. 불서에 비긴다면 <天主實義>禮懺에 해당하고 이 책이 談禪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총괄] 살피건대 구라파인들의 天文推算이 치밀한 것과 工匠製作이 정교한 것은 실로 옛 제도를 넘어선다. 議論誇詐하고 迂怪함 또한 異端 가운데 두드러진다. 國朝에서는 그 기능은 취하되 그 학술은 전하는 것을 금했으니, 具存의 깊은 뜻이다. 그 책들은 원래 冊府에 올릴만한 것이 못되지만, <寰有詮> 같은 것들은 <明史> 藝文志속에 이미 그 이름이 올라 있어, 빼어버리고 논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迷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드러나게 올려놓고 비판하는 것이다. <明史>에는 이 책들이 道家의 것으로 실려 있는데, 이제 그 내용을 보면 3를 아울러 표절하였고 또 3를 싸잡아 배척하였다. 變幻하고 支難하여 따질 수도 없게 만든 것이 참으로 雜學이로다. 따라서 雜家 속에 그 存目을 둔다.[440]

[440] <四庫全書總目> 125 雜家類存目(2) “辨學遺牘 一卷: ... 利瑪竇力排釋氏 故學佛者起而相爭 利瑪竇又反脣相詰 各持一悠謬荒唐之說 以較勝負於不可究詰之地 不知佛敎可闢 非天主敎所可闢 天主敎可闢 又非佛敎所可闢 均所謂同浴而譏裸耳,” “二十五言 一卷: ... 西洋敎法傳中國亦自此二十五條始 大旨多剽竊釋氏 而文詞尤拙 蓋西方之敎惟有佛書 歐羅巴人取其意而變幻之 猶未能甚離其本 厥後旣入中國 習見儒書 則因緣假借以文其說 乃漸至蔓衍支離 不可究詰 自以爲超出三敎上矣 附存其目 庶可知彼敎之初 所見不過如是也,” “天主實義 二卷: ... 大旨主於使人尊信天主 以行其敎 知儒敎之不可攻 則附會六經中上帝之說以合於天主 而特攻釋氏以求勝 然天堂地獄之說與輪廻之說相去無幾 特小變釋氏之說 而本原則一耳,” “畸人十 二卷 附西琴曲意 一卷: ... 其言宏肆博辨 頗足動聽 大抵 釋氏生死無常罪福不爽之說 而不取其輪廻戒殺不娶之說 以附會於儒理 使人猝不可攻 較所作天主實意純涉支離荒誕者 立說較巧 以佛書比之 天主實義猶其禮懺 此則猶其談禪也 ...” “案歐羅巴人天文推算之密 工匠製作之巧 實逾前古 其議論詐迂怪 亦爲異端之尤 國朝節取其技能 而禁傳其學術 具存深意 其書本不足登冊府之編 然如寰有詮之類 明史藝文志中已列其名 削而不論 轉慮惑誣 故著於錄而闢斥之 又明史載其書於道家 今考所言兼剽三敎之理 而又擧三敎全排之 變幻支離 莫可究詰 眞雜學也 故存其目於雜家焉

四庫全書 편찬자들도 천주교를 기본적으로 폄하는 입장이지만 일부 벽사론자들처럼 극렬한 태도는 아니다. 그들 눈에 이 책들이 전체적으로 誇詐하고 迂怪인상을 주었고, 불교와 한 통속이면서 억지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에 부회하려 드는 것으로 비쳐졌음을 알 수 있다. 앞 제2절에서 <天主實義>의 내용을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 보면서도 上帝’, ‘天主를 결합시키기 위해, 그리고 기독교 윤리관을 性善說과 합치시키기 위해 , , 등 전통적 유가 개념들을 스콜라철학의 엄격한 논리적 개념으로 전환시켜 복잡하고 정교한 논리체계를 구축하려 한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 일반 중국인에게는 變幻支難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처럼 작위적인 논리체계가 그 자체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윤리면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모범적인 태도와 결합되었을 때에만 설득력을 가졌으리라고 생각된다.

리치의 출판사업이 후계자들에 의해 어떻게 이어졌는지 살펴보자. 李之藻1629년 선교사들의 글 19종을 모아 <天學初函>이라는 총서로 간행했는데, 理編 9종과 器編 10종으로 되어 있다.[441] 理編 9종 가운데 리치의 것이 <辨學遺牘>, <畸人十篇>, <交友論>, <天主實義>, <二十五言>의 다섯 가지고 그 밖에는 삼비아시의 <靈言蠡勺>, 판토하의 <七克>, 그리고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西學凡><職方外記>가 들어 있다. 삼비아시와 알레니의 책들은 1623-4년에 나온 것이므로 리치의 후계자가 1610년대에 쓴 책으로 <天學初函> 理編에 들어간 것은 <七克>(1614) 하나뿐인 셈이다. 器編을 보더라도 리치가 직접 손댄 6(<渾蓋通憲圖說>, <同文算指>, <幾何原本>, <環容較義>, <測量法義>, <勾股義>) 외에는 우르시스의 <泰西水法>, <簡平儀說><表度說>, 그리고 陽瑪諾(Emmauel Diaz)<天問略>이 들어 있다. 1610년대 중요한 출판의 대부분이 北京에서 리치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Pfister의 책에는 롱고바르디(17), 바뇨니(26) 등의 중국어 저작도 여러 가지 들어 있지만, 대개 교인을 위한 교리서로 대외적인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교인 확보를 위한 실제 선교사업은 지금까지 살펴 온 리치의 노선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이루어진 것 같다. 특히 제6항에서 기독교 입교가 정치사회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개인의 내면적 변화에 그친다고 하는 것이 아직 입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입교 목표가 정말로 정신적 변화에 그치거나 장기적인 목표에 뜻을 둔 때문에 당장의 변화에 관심이 없는 입교자들은 소수였을 것이고, 대부분 입교자들은 힘들여 입교한 데 따른, 뭔가 분명히 눈에 보이는 변화를 원했을 것이다.

<中國誌> 뒷부분에는(417장 이후) 교인들에 관한 특기할만한 사항을 많이 적혀 있다. 그 중 北京 교인들에 대해 기록(516)을 보면 그리 별난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李之藻의 친척인 미카엘이라는, 어려서부터 불교에 깊이 빠져 있던 청년이 기독교에 접하자 교리문답을 중국어로 외우는 것이 성에 안 차서 라틴어로까지 외울 정도로 열심이더라는 얘기.[442] 李之藻의 부하 관리 중 누가라는 사람이 자살하겠다는 소실의 위협에도 끄떡없이 입교하고, 친척들에게 입교를 권하기 위해 세례 받는 사람들만 집안의 초상화에 그려 넣어 주었다는 얘기 정도다.[443]

[442] <中國誌> 538.

[443] <中國誌> 540-541.

다른 선교소의 이야기는 요란한 것이 많다. 롱고바르디는 1597년부터 韶州에 주재했는데, 1599년부터 주변지역 마을로 적극적 출장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교인들을 먼저 보내 사람들을 모아놓은 다음, 자신이 도착한 뒤에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 속에서 십계명을 설교하고 교리문답자를 모집했다. 교리문답과정을 마치면 세례와 함께 묵주와 메달 등을 주었고, 신입교인들은 징과 나팔로 떠들썩한 행진 속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곳 교인들 이야기 중에는 희한한 것이 많다. 집안의 우상들을 다 치우기 전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교리서를 읽지 못하더라는 얘기. 글도 못 읽고 기억력도 없는 칠십 노인이 용하게 교리문답을 통과하고 주변 사람들을 수없이 인도해 준 얘기. 임산부에게 성모 마리아를 매일 일곱 번씩 부르게 해서 순산했다는 얘기. 죽어가는 환자에게 그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세례를 주었더니 금방 회복이 되었다는 얘기. 물론 나중에 그 사연을 알게 된 어머니도 따라서 입교하고.[444]

[444] <中國誌> 406-411.

이렇게 요란한 행태가 주변의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갖고 있던 모든 불상을 불태우거나 강물에 내다버리도록 마치 입교 선서처럼 요구하는 일은 교인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어느 축제날 民俗 神像을 떠메고 기부를 거두며 다니던 일행이 선교소 문 앞에 神像을 세워놓고 기부를 하라고 야료를 부린 일은 아마 이런 반감이 터져 나온 결과였을 것이다: “이런 소동에 이끌려 선비 한 사람이 다가왔는데, 그는 롱고바르디 신부의 편을 드는 척하면서 사람들 요구를 들어주어서 달래 보내라고 권했다. 어차피 선교사는 외국 땅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입장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는 언성을 높였는데, 롱고바르디 신부도 따라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우상숭배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지푸라기 한 오라기도 줄 수 없다고 했다. 거절하는 이유가 욕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 이 선비나부랭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그럴싸한 방안이랍시고, 우상에게가 아니라 주민들에게 기부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신부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롱고바르디 신부는 이 제안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많았다. [445]

[445] <中國誌> 416-417.

韶州 선교소에 대해 주민들, 승려들, 유생들, 그리고 지방관들의 공격이 꼬리를 물었으나 큰 타격 없이 여러 해 버틸 수 있었던 데는 北京에 있는 마테오 리치의 권위가 큰 몫을 했다.[446] 北京에서 내려오는 고위관리들이 거듭해서 선교사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에 고무된 롱고바르디는 1603년 디아스가 韶州를 지날 때 水陸을 휩쓰는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벌이기도 했다.[447] 그러나 불과 3년 후, 마카오와 중국 관헌 사이가 일시적으로 불안하고 黃明沙 修士廣東에서 옥사할 때, “입교자들은 외교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선교소에 발길을 끊었으니, 반란죄의 혐의를 두려워한 때문이었으며,[448] 이 일이 가라앉은 뒤에도 廣東의 사태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등을 돌리게 했으며, 많은 신자들의 열의가 얼어붙어 버려서, 이 지역이 오랫동안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것 같은 전망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은 쫓겨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서둘러 움직이는 일은 피하기로 했다.”

[446] <中國誌> 418-426, 461-463.

[447] <中國誌> 463-464.

[448] <中國誌> 491.

이것이 리치에게 선교단장의 책임을 물려받을 롱고바르디의 행적이었다. 조금만 유리한 조건이 주어지면 무절제하게 이용하려 들고, 한 발짝만 물러서면 마치 모든 것을 잃을 것처럼 무작정 버티고, 어려운 형편이 닥치면 한없이 의기소침하는 애써 미화한 서술 속에서도 혈기가 앞서며 자제력이 아쉬운 모습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바뇨니가 있던 南京 선교소 사정도 큰 차이가 없어서,[449] 리치가 죽을 무렵까지 이룩된 절정의 위상을 무절제하게 누리다가 1616敎案을 일으켜 중국선교 전체가 위기에 몰리게 된다. 디아스가 주재하던 南昌 선교소도 교인들의 요란한 행태가 지역사회의 반감을 산 끝에 儒林과 분쟁을 일으켜 1607-09의 기간 중에는 官府의 명령에 의해 대외적으로 폐쇄되는 곡절을 겪었다.[450]

[449] <中國誌> 426-432, 542-549.

[450] <中國誌> 522-535.

北京을 제외한 각 선교소에 어려운 사정이 생길 때마다 北京에서 리치와 관계를 맺었거나 리치의 명성을 알고 있는 관리, 유력자들이 도움을 줌으로써 심각한 위기를 겨우겨우 넘기는 일이 거듭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리치의 사교활동의 효과를 각지에서 써먹기만 할 뿐, 적응의 효과가 각지에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유일하게 北京 선교소만이 지역사회의 반감으로 인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사실 또한 이런 느낌을 더 강하게 해 준다. 그리고 北京에서 리치와 함께 있던 판토하의 <七克>(1613)과 우르시스의 <泰西水法>(1612)이 선교사들의 출판물 가운데 중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환영받은 책들이었다는 점 역시 리치의 노선에 부합한 까닭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451] 리치의 노선은 그가 죽을 때까지 주변의 좁은 범위를 넘어서는 확고한 틀을 잡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노선을 효과적으로 계승한 것은 동료 선교사들보다도 오히려 신분이 높은 몇몇 입교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51] <四庫全書總目> 七克 條, <疇人傳> 熊三拔 條.

 

徐光啓, 李之藻, 楊廷筠의 세 사람은 중국 기독교의 3柱石으로 불려 왔다.[452]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활동시기가 비슷하고,(1562-1633, 1565-1630, 1557-1627) 출신지가 서로 가까웠다.(上海, 抗州 부근) 세 사람 모두 활동하기 좋은 나이에 進士에 급제했고,(34, 36세에 급제했고 43세로 조금 늦은 편이었지만 결국 최고의 관직까지 승진함) 꽤 뛰어난 官運을 누렸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학문적 성취도 뛰어난, 당시의 최정예 지식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452] 이들이 살아있을 때는 이런 표현이 쓰이지 않았는데, 그 뒤에는 워낙 많이 쓰여 왔기 때문에 정확하게 언제부터 쓰인 것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徐光啓에 대해서는 리치가 <中國誌>에서 “bulwark of Christianity in Pekin”(452, 불어판 542에는 “le secours de la foi chretienne en la ville royale”이라 하였음)이라 한 것이 비슷한 표현으로 눈에 띈다.

요컨대 이들은 중국 전통체제 속에서 최고의 신분과 권위를 누리고 있던 사람들로, 전통체제에서 이탈할 현세적 동기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사재를 털어가며 선교사들의 출판사업을 지원하고, 탄압의 시기에는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선교사들을 보호하게 한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신앙심만으로 설명하는 데 불만을 느낀 학자들이 더 실제적인 동기를 찾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453] Gernet는 이 고위 개종자들이 명목만의 기독교인으로, 실제로는 儒家的 가치를 추구하는 방편으로 기독교를 채용했다는 관점을 제기했다.[454] 이에 대해 Standaert楊廷筠 경우를 집중적으로 연구,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인정할만한 정신적 경험을 확인했다고 했다.[455] Peterson의 논문은 전체적으로 Gernet의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세 사람의 입장을 더 세밀하게 분석한 것이다. 이 세 사람이 입교하여 柱石노릇을 하게 된 정황과 의식의 여러 단면이 이들 연구로 상당히 밝혀졌다. 리치의 가장 강력한 호응자라고 할 수 있는 이 세 사람의 입장의 윤곽을 살펴본다.

[453] Gernet82년 연구와 Peterson, “Why Did They Become Christians?”이 대표적인 연구결과이고, Standaert87년 연구 역시 성직자이면서도 합리적인 설명을 추구한 예다.

[454] Gernet: 64-72.

[455] Standaert: 252-270.

徐光啓는 고향에서 여러 번 省試에 낙방한 후 1595(또는 1596)韶州에서 敎學을 하던 중 선교소에 들러 카타네오를 만났다. 1597년에 第一學人에 들었으나 이듬해 會試에 낙방. 1600년 남경에서 리치를 처음으로 잠깐 만났다. 이듬해 다시 會試에 낙방. 1603년 남경에서 로차 신부에게 <天主實義>를 받아(원고 상태로) 읽어보고는 서둘러 세례를 받았다. 이듬해 北京에 가서 리치를 만나고 進士에 들었다.[456] 그 후 리치의 여러 책에 서문을 써 주고 <幾何原本>을 함께 번역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456] 梁家勉, <徐光啓年譜>(上海, 1981) 57-72에서 발췌.

李之藻1598년에 進士에 들고 1601년 공부 원외랑으로 재임하던 중 北京에 막 도착한 리치를 만났다. 그는 일찍부터 지리에 관심이 많아서 스스로 지도를 그려 본 일도 있었기 때문에 리치의 세계지도에 먼저 관심을 가졌다. 리치의 학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여기서부터 넓어져, 오랫동안 리치에게 수학을 배우고 <同文算指>를 비롯한 수학서를 함께 번역하고 <畸人十篇>에 서문을 써주었다. 가족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이 입교할 것을 권장하거나 허용한 것을 보면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일 뜻이 세워진 것 같은데도 그가 정작 입교한 것은 1610년 봄 큰 병이 들었을 때였으니, 리치가 죽기 바로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그가 관직에서 한 차례 탄핵을 받은 일이 있는데 술자리를 너무 좋아한 것이 그 이유였다고 하니, 학문과 일에 열심인 대신 도덕과 윤리에는 대범한 성격이어서 세례 받는 일도 서두르지 않은 것 같다.[457]

[457] 리치는 李之藻에 관해 특별히 많은 기록을 남겼다. <中國誌> 397-399, 454-455, 537-539 .

楊廷筠1592년 진사에 들어 여러 곳 지방관과 都御史를 지낸 후 1609년부터 고향에 은거하여 독서와 수양에 전념하고 있다가 1611년 여름에 부친의 상을 당해 귀향한 李之藻에게 問喪하러 갔다가 기독교의 가르침에 접한다. 李之藻와 함께 와 있던 카타네오와 트리고로부터 교리를 배운 후 입교할 뜻을 밝히자 트리고는 일부일처를 지키지 않으면 세례를 줄 수 없다고 했다. 너무 까다롭게 구는 것 아니냐고 李之藻에게 불평하자 는 진리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규칙이 엄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것이 불교와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는데, 은 이에 황연히 깨닫고 모든 규칙을 받아들일 결심을 했다고 한다. 楊廷筠李之藻徐光啓와 마찬가지로 출판사업에 큰 공헌을 한 외에 특히 신도 조직에 큰 힘을 쏟았고, 1616년 남경교안 이후에는 여러 해 동안 선교사들의 거처를 제공하고 보호자 역할을 맡았다.

이 세 사람 외에 리치가 중시한 인물이 둘 있었다. 하나는 瞿太素였고 또 하나는 馮應京이었다. 瞿太素의 기록은 선교사들이 남긴 것 외에는 별로 보이는 것이 없다. 常熟(蘇州 부근)의 명문 출신으로, 1590년에 그를 만난 것이 리치로서는 중국의 1급 지식인과 처음 맺은 친분인 듯, <中國誌>에 그와의 만남이 하나의 독립된 으로 되어 있다.(33) 그는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고, 그런 까닭에 科擧를 통한 모범적인 지식인의 길을 걷지도 못했고 선교사들과 대범하게 어울릴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韶州에서 선교사들과 관리들의 관계에 도움을 주었고 남경에 정착할 때도 큰 도움을 주었지만, 리치가 북경으로 떠난 뒤로는 여러 해 동안 선교사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다가 1605년에 입교한 사정은 앞 제12절에서 설명했다. 리치가 아직 중국 사정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1590년대 초에는 그가 거의 보호자 같은 역할을 맡았던 것이 1599년경에는 互惠的인 관계가 되고, 다시 몇 년 후에는 그가 완전히 몰락하여 오히려 의탁하는 입장이 된 것 같다.

馮應京(1555-1606) 역시 남쪽 출신으로(安徽省 盱台) 1592進士에 든 후, 戶部 主事를 지내고 湖廣 僉事로 나갔다가 稅監 陳奉과 충돌, 무고에 의해 下獄되었다가(1601) 3년 만에 석방되었다. 리치의 기록에 의하면 湖廣에 있을 때 리치의 소문을 듣고 제자 하나를 리치에게 배우도록 보냈으나[458] 리치가 북경으로 향해 막 떠날 참이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 체포되어 북경에 왔을 때 두 사람은 처음 만나 굳은 우정을 맺었다고 한다. 이 하옥되었다고는 하나 엄격한 수감생활은 아니었던 듯, 북경에 있는 3년 동안 <交友論>을 출판하고 <天主實義> 원고를 교열하는 등 리치의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604년 석방되어서는 곧바로 북경을 떠나도록 명령받았는데, 이 때 겨를이 없어서 세례를 주지 못하고 미뤄 두었던 것이 끝내 실현되지 못한 것을 리치는 통탄하였다.[459]

[458] 리치가 남경에 있을 때 학자들이 자기 제자를 파견하여 리치에게 배우게 한 일이 <中國誌> 328-329에 보인다.

[459] <中國誌> 394-397.

이 다섯 사람이 선교사들과 사이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일을 살펴보면 그들의 성격과 태도에 상당한 편차가 있었던 것 같다. 瞿太素李之藻는 성격이 호탕하고 대범하여 예절에 별로 얽매이지 않고 향락과 호기심에 많이 쏠리는 편으로 보이는 반면, 馮應京楊廷筠은 윤리적 사명감이 강하고 처신이 극히 단정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徐光啓는 처신이 단정하면서도 학문적 호기심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460] 이런 차이를 단순한 印象 정도를 넘어 엄밀하게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서로 가까운 사이였던 李之藻楊廷筠이 알레니의 <職方外記>에 각각 붙인 서문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확인이 가능하다.

[460] 지금까지 이 사람들에 관련되어 <中國誌>에서 인용된 내용 및 PetersonStandaert의 연구를 종합한 필자의 견해임.

萬曆 辛丑(1601) 利氏來賓했을 때 나는 몇몇 동료와 함께 그를 방문했다. 그 벽에 大地全圖가 걸려 있는데, 度分을 선으로 그려 넣은 것이 매우 세밀했다. 利氏가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서쪽으로부터 온 길입니다. 그 산천과 형승과 토속을 상세히 적은 큰 책이 따로 있는데, 이미 길을 찾아 궁중으로 올렸습니다.’ 하고는 이어서 내게 설명해 주기를 지구는 하늘의 큰 공 안에 들어 있는 작은 공과 같아서 그 度數360로 서로 상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땅 위에서 남북으로 250리를 옮기면 해와 별의 높이가 1도씩 바뀌며, 동서의 차이는 交食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30도의 차이에 따라 交食一時[두 시간]의 차이가 생긴다고 하였다. 내 듣건대 西域의 천문은 洪武 年間右文으로 이미 번역하였으니 家法이 진정 이러함에 禮樂이 백년을 성하고 聲敎가 사방에 펼치는 것이다. 鳩摩羅什, 玄奘의 무리가 가져온 책들과는 같은 종류로 함께 보아서는 안 됨을 알아야 한다.”[461]

[461] <職方外記> 李之藻 의 시작과 끝 부분, <天學初函> 1269-1285.

西方之人千古에 홀로 나타나 一家를 열고 말하기를 천지는 모두 한계가 있는 것인데, 마치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모양이 큰 공처럼 생겨서 시작도 끝도 중간도 구별되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輕淸한 것이 하늘이 되는데, 하늘은 여러 겹으로, 땅 밖으로 벗어져 나왔으며 重濁한 것이 땅이 되는데, 하늘 속에 저 홀로 떠 있고, 그 성질이 重濁한 때문에 을 가진 물체들은 모두 이리로 와 붙는 것이라 하였다. 西士들이 사람들을 이끌어 天帝께 향하게 함에는 다른 일을 가지고 사다리로 삼는 일이 많아서 설명 가운데 깊은 뜻을 품은 것들이 많이 있는데, 이 책도 耳目을 즐겁게 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心靈을 건드리려는 것이어서, 말은 무척 쉽지만 뜻이 매우 깊은 것이다. 이것을 얕게 읽어서 가벼운 여행기나 博物의 얘깃거리 정도로 여긴다면 구슬을 바꾸어 궤를 사는 것과 같은 일이다.”[462]

[462] <職方外記> 楊廷筠 중간과 끝 부분에서, <天學初函> 1287-1297.

李之藻의 관심이 기술적인 면에 집중된 데 비하여 楊廷筠은 우주론과 윤리를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李之藻의 가치관이 중국의 禮樂聲敎를 확장하는 방향이었던 데 비해 楊廷筠은 그러한 기존의 틀에 구애됨이 없이 西士의 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 차이도 알아볼 수 있다. 초기 입교자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리라는 관점을 Gernet가 제기한 데 대한 반론을 Standaert가 펴면서 楊廷筠의 경우를 다룬 것도 이런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463]

[463] 명말 士大夫들이 윤리적 기준 확립에 열심이었던 사정은 Wm de Bary,(ed.) The Unfolding of Neo-Confucianism (New York, 1975)에 수록된 C-i Tang, “Liu Tsung-chou's Doctrine of Moral Mind and Practice and His Critique of Wang Yang-ming”C-y Cheng, “Reason, Substance, and Human Desires in 17th-Century Neo-Confucianism”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선교사들의 가르침이 중국 지식층 일부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나누어 윤리적인 면과 과학적인 면 양쪽으로 볼 수 있다. 윤리적인 면에 가장 두드러진 반응을 보인 것이 馮應京楊廷筠이었다. 楊廷筠 경우는 앞에서 본 것처럼 입교할 뜻만 갖고 입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행동으로 법칙을 따라야 하며, 그런 엄격한 속에 진정한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하는 李之藻의 설명에 탄복해서 기독교에 애착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에서 알아볼 수 있다. 馮應京<天主實義>를 검토한 뒤 그 출판을 서두르도록 리치에게 재촉한 이야기를 앞 절에서 인용했는데, 윤리적인 면에서 중국인에게 참고가 되는 선교사들의 논설을 보급하는 데 특출한 열성을 보였다. 그가 <交友論>에 붙인 서문에 그의 성향이 잘 나타나 있다.

西泰子가 팔만 리의 관문을 거쳐 으로 중국에 온 것은 벗을 사귀기 위해서이다. 그가 交友를 깨우친 바가 깊은 까닭에 그의 벗 구함이 절실하고 벗 대함이 돈독하며 交友를 논함이 빼어나게 상세한 것이다. 아아, 무릇 벗의 관계에 걸려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 君臣, 父子, 夫婦, 長幼는 모두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어찌 나눔이 없을 수 있겠는가? 무릇 나눔이라 함은 무심하지 않음이니, 함께 기뻐하고 함께 주고받을 따름으로 서로 비기고 서로 보태고 서로 바로잡고 서로 이루는 것이 그 가운데 담기지 않는 데 근거를 두며, 그 끝까지 풀리지 않는 데서 절정을 이루므로 이를 나눔이라 하는 것이다. 나는 나눔의 를 중히 여겨 그 버려짐을 차마 보지 못해 이에 얼굴도 본 적 없고 이야기도 해 본 적 없지만 정신으로 나누어지기를 바람이니, 이는 陽燧가 해를 향하고 方諸가 달을 향함에 水火가 상응하여 을 낳게 한 것과 같음이라, 어찌 그 을 잊을 것인가.”[464]

[464] <交友論> 馮應京 , <天學初函> 291-293.

한편 과학적인 면에 대해서는 개인적 흥미에서 국가적 필요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방향에 편차가 있었다. 앞의 제23절에서 본 것처럼 瞿泰素 경우는 개인적 흥미가 위주였다. 李之藻徐光啓는 개인적 흥미와 공적 필요성을 아울러 느낀 것 같은데, 그 중에서 徐光啓 편이 공적 측면을 더 중시한 것 같다. 李之藻가 리치에게 배우고 함께 번역한 것이 地圖算法 등 스스로 관심을 가진 분야를 단편적으로 취급한 데 비해 徐光啓는 기하학에서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학술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공적 필요성이 걸려있는 분야에 힘을 쏟았다. 徐光啓는 리치를 중국의 전설적 천문학 창시자 羲和에 비유했는데, 이것은 리치의 체계를 중심으로 天文曆算의 학술과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편하려는 뜻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465]

[465] <疇人傳> 44, 利瑪竇: 其於天學 皆有所得 采而用之 此禮失求野之義也 而徐光啓 至謂利氏爲今日之羲和 是何其言之妄而敢也.

리치 자신이 학인 계층은 우상을 숭배하는 불교와 도교를 경멸하고 유교만을 받든다. 따라서 우리가 우상숭배를 공격하는 것은 학인 계층의 반발은커녕 우호적 태도로 받아들여진다고 한 것처럼[466] 리치가 중심이 되어 제창한 선교사들의 논설은 사대부 일반의 공격을 별로 받지 않았다.[467] 따라서 초기의 공격은 리치가 두드러지게 적대했던 불교 측으로부터 나왔으나 아직 기독교의 위협이 심각하지 않은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의 내용이 깊이 알려지지 않은 때문인지, 기독교 자체에 대한 공격보다는 선교사들의 불교 공격에 대한 불평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闢邪集>에 수록되어 있는 鐘振之天學初徵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466] 리치가 16092월 파시오에게 보낸 편지(<書信集> 412-416) 일부를 이 절 앞에서 발췌해 놓은 가운데 제8.

[467] 비슷한 지적은 <四庫全書總目> 125, <畸人十篇> 에도 儒理附會함으로써 쉽게 비판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 것이 있다.

(그들은) 이르기를 죽기 전에 一刻이라도 천주교의 법을 따라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하니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臨終十念과 통하는 것이다. 그들이 긴요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佛氏도 또한 긴요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요, 그들이 十戒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佛氏도 역시 十戒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佛氏의 설을 통째로 훔쳐 와서 佛氏를 비판한다고 하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468]

[468] <天主敎東傳文獻續編> 921-922.

초기의 서학비판 논설은 强度도 높지 않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았으나 1616南京敎案을 계기로 양상이 달라진다. 이 때 나온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 오랑캐들은 스스로를 변호할 때마다 자기들이 존봉하는 天主가 중국인들이 받드는 하늘과 같은 것이라 하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은 우리 중국에서 언제나 하늘을 섬겨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랑캐들이 쓴 책을 보면 그들의 天主漢 哀帝 때의 어느 해에 태어났으며, 그 이름은 耶蘇이고 그 어미의 이름은 亞理瑪라고 분명히 되어 있다. 그러니 그는 西海의 한 오랑캐에 불과하며, 그가 악한 관리들에 의해 십자 모양의 형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또 되어 있다. 그러니 그는 사형당한 오랑캐 죄수일 뿐이다. 어떻게 처형당한 오랑캐 죄수를 天主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심지어 天主가 서양 어느 나라에 降生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469]

[469] <破邪集> 2, 22上下.

南京敎案 주동자 沈榷은 서양의 과학까지 공격했다: “그들은 감히 하늘이 일곱 층으로 되어 있다는 설을 만들어 하늘을 모독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이 세상 어느 것도 그들의 거짓말로 뒤집어놓고 흐트러뜨리는 데 조금이라도 망설이려는 것이 없다. 하물며 백리의 거리에서도 사물이 같을 수 없으며 천리의 거리에서는 圭表의 그림자마저 달라지는데, 구만리나 떨어진 곳의 圭表 그림자가 어찌 같을 수 있는가? 그들에게 합당한 것이라도 여기서 똑같이 통할 수가 없는 것이다.”[470]

[470] <破邪集> 1, 23.

이 단계 서학비판이 아직 그리 치밀하지는 않지만 선교사들이 만든 책 내용에서 비판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비판 내용이 체계화되고 보급 형식도 정비되는 것은 1640년 무렵에 나온 <破邪集>(1639)<闢邪集>이다. 이 책들에 실린 글은 대개 불교 성향 학인과 승려들이 지은 것이다.[471]

[471] 이 논문에서는 서학에 대한 1620년대 이후의 반응은 다루지 않았다. 1620년대 이후의 서학 비판에 관한 연구는 최기복, 明末淸初 儒家反西學 論辨(<수원가톨릭대학논문집>1, 1989)에 잘 정리되어 있다.

중립적 입장의 논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李贄가 리치를 높이 평가한 것은 앞의 제13절에서 인용했지만, 그것은 리치 개인에 대한 평가이며, 리치가 중국에 온 목적에 대해 마지막 구절에서 혹시 자기 배운 바를 가지고 우리 周孔의 공부를 바꿔치려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니 설마 그렇지야 않겠지.” 한 것이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黃宗羲破邪論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 것 정도가 중립적인 입장으로 볼만하다:

釋氏는 그 꺼리는 바 없음이 더욱 방자하게 되어 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까지 하고는 이어서 諸天의 설을 만들어 부처가 그 가운데 앉고 諸天으로 하여금 옆에 侍立케 했으니 至尊의 존재를 至卑의 자리에 놓고 쫓아다니며 심부름을 하게 한 것이다. 天主를 행한다는 자들이 抑佛崇天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나, 그러면서 天主을 세우고 그 사적을 기리니, 사실인즉 사람의 귀신에게 이를 맡겨서 上帝까지 아울러 말살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邪說들이 비록 君子에게는 통하지 않으나 그 유래한 바를 살피면 미상불 유생들이 그 실마리를 열어준 것이다. 오늘날 무릇 유생들이 하늘에 말함에 오직 만을 가지고 말할 뿐이다. 周易天生人物이라 하였고 詩經天降喪亂이라 하였으니 대저 冥冥한 가운데 주재하는 자가 실로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四時가 뒤집히고 헷갈릴 것이며 사람과 禽獸, 草木이 또한 뒤섞여서 가려낼 수가 없이 될 것이다.”[472]

[472] <黃宗羲全集> 195: 釋氏益肆其無忌憚 緣天上天下唯我獨存之言 因創爲諸天之說 佛坐其中 使諸天侍立於側 以至尊者處之於至卑 效奔走之役 爲天主之敎者 抑佛而崇天是已 乃立天主之像記其事 實則以人鬼當之 幷上帝以抹殺之矣 此等邪說 雖止於君子 然其所由來者 未嘗非儒者開其端也 今夫儒者之言天 以爲理而已矣 易言天生人物 詩言天降喪亂 蓋冥冥之中 實有以主之者 不然 四時將顚倒錯亂 人民禽獸草木 亦混淆而不可分擘矣.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