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고 책을 덮으니 제목에 생각이 걸린다. 겉으로 나타나는 흐름에 감춰진 내면의 흐름을 짚어낸다는 뜻에서 <말죽거리 잔혹사>를 패러디한 것은 좋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묵직한 내용에 비해 너무 겸손한 표현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에 비해 "민주주의"를 내건 데는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내거는 이유가 머리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도 엘리트들이나 유명한 사람들만 주로 부각되고,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은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의 역할이 여전히 부차화, 주변화되는 것은 현재 민주주의의 가장 잔혹한 측면이다. 즉 '민주주의 잔혹사'라 할 때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탄압, 국가폭력 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혹은 희생된 사람들이 여전히 가려지고, 역사에 잘 기록되지 않는 것 역시 잔혹한 일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가운데 놓고 보니 이 책에 담긴 여덟 개 사건 중 "5-16쿠데타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등이 민주주의 잔혹사로 다뤄진 것이 다소 의외라고 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 두 개 사건만이 아니라 다른 사건들이 품고 있는 의미도 민주주의에 꼭 초점을 둔 것이 아니다. "민주화운동"과 가까운 소재를 다룬 제1장 "박종철과 6월항쟁"과 제6장 "마산 할머니와 4월혁명"을 봐도 민주주의 이전의 인간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다.

 

내가 편집자로서 저자에게 제목을 제안하는 입장이라면 "대한민국 잔혹사"를 오히려 권할 것이다. 1946년 1월의 학병동맹 사건에서 1987년 1월의 박종철의 죽음까지 선의의 개인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부딪쳐 좌절하는 여덟 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게 나라냐?" 하는 질문은 너무나 늦게 울림을 일으켰다. 이 책의 여덟 개 장면, 어느 곳에서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게 나라냐?" 하는 질문이 왜 나오는가?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획일적인 것일 수 없다. 높은 수준의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군사적 안전을 더 중시하는 사람도 있고 경제적 경쟁력을 더 중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부정할 수 없는 최소한의 요건이 있다. 세금을 받아먹었으면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폭력의 독점권을 주장하려면 국민의 안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국가가 이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가로막았기 때문에 촛불 든 시민들이 광장에 나와 물었던 것이다. "이게 나라냐?"

 

해방 후 조선에는 민간조직이 취약했다. 일제 통치자들이 일체의 자발적 조직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일제 말기에 학병으로 징발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학력이 높고 군대 경험을 공유하면서 상호 연락이 가능한 특수집단이었다. 그들은 독립국 군대의 자원이 되고자 하는 목적으로 학병동맹을 결성했다. 이 조직이 남조선을 점령한 미군정에게는 불편한 존재였고, 일제의 주구에서 미군정의 주구로 변신하려는 경찰에게는 큰 적이었다. 그래서 경찰은 학병동맹을 좌익 동조세력으로 몰아 참혹한 탄압을 가했고 미군정은 이것을 용인했다.

 

1951년 2-3월경의 어느 날 산청군 지리산 자락의 한 야산 골짜기에 특이한 복색의 군인들이 2백여 명의 민간인을 버스에 태워 끌고와 학살했다. 2008년 진실과화해위원회 결정에 따라 현장을 발굴한 결과 확인된 피살자는 268~276명으로 추정된다. 피살자들이 어디서 끌려온 누구인지 아직도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량학살 중 특이한 현상이다. 저자는 1951년 1월 말 <민주신보>의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피난민으로 가장한 불온세력 286명이 검거되었다는 기사와 연결시켜 보는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합당한 추측이다. 1월 21일에 286명이 거제도에서 검거되었다는 기사는 1951년 1월 31일자 <동아일보>에도 실려 있다. 이때 검거된 사람들의 사법처리 등 향배에 관한 기사는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찾을 수 없었다.

 

학병동맹 사건은 대한민국이 모습을 갖추기 전의 일이지만 그 가해세력이 대한민국의 주축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분단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을 원했다. 통합된 민족국가가 세워진다면 자기네 친일 경력이 용납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분단의 상대방을 악마화함으로써 "반공"을 "민족"에 앞세웠다. 그 억지를 강행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전쟁의 책임이 이승만 정권에게 전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상당 부분 있다는 뜻이다.)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가운데 하나가 외공리 사건이었다. 전쟁에 치어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 기가 막히는 일이다.

 

저자는 외공리 학살사건을 서술하다가, 참혹한 역사를 파헤쳐야 하는 필요를 이렇게 말한다.

 

필자는 기억하고, 진상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단 이와 같은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던 환경과 조건에서 우리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극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면, 이 문제를 꺼내고, 규명하고, 또한 성찰할 필요가 있다. (243쪽)

 

그런 규명과 성찰은 1987년까지 군사정권 하에서 국가의 힘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1984년 10월 청송감호소에서 박영두의 죽음,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의 죽음, 모두 규명과 성찰을 모르는 대한민국의 국가 특성이 불러온 수많은 비극을 대표해서 이 책에 그려져 있다.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의 이야기에 이어 나오는, 아무 소문없이 희생된 한 청년의 이야기가 심금을 더 깊이 울린다. 그와 비슷한 수많은 무명의 희생자들이 떠오르기 때문일까.

 

민주화에 따라 대한민국의 인권 감각도 발달했다. 진실과화해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규명과 성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명박정권 아래 국가인권위원회가 변질되면서 규명과 성찰의 분위기는 덮여 버렸다. 그러다 보니 수백 명 목숨이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동안 머리나 다듬으면서 전화와 서류로만 사태에 대응하는(또는 대응했다고 우기는) 대통령까지 보게 되었다. "이게 나라냐?"

 

대한민국의 국가 성격에 대한 비판은 수없이 이뤄져 왔다. 홍석률의 비판이 독자의 감흥을 특히 강하게 일으키는 것은 "보통사람"들에게 시선을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민주화"라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겪어내는 조건으로서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관점을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은 역사학자들이 기록을 너무 숭배한다고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자질구레하게 기록에 집착하는 것은 기록을 숭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그 반대다. 기록을 문자 그대로 읽지 않고 맥락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 기록에 작용하는 권력관계를 제대로 파악해 내기 위해, 무엇이 기록되고 기록되지 않았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전반적인 전개 과정과 맥락을 알아내고 재구성하는 데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있어야 주변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 점을 찍듯이 언급된 자투리 기록들이 서로 연결되어 선이 드러나고, 면을 형성하면서, 그 입체상을 보여줄 수 있다. 이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드러나고, 현실화되지 못한 희생된 역사의 가능성도 다양하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190쪽)

 

역사의 입체상을 추구하는 노력은 좋은 방향이다. 1840년대에 프레데리크 바스티아가 쓴 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을 종종 되새겨 보는데, 보이는 것에 집착해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는 풍조가 실증주의의 큰 병폐였다는 생각을 한다. 존재하는 것 중에는 여건에 따라 보이게 되는 것이 있고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함직한 것을 살피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역사학만이 아니라 어느 학문도 현재의 상황을 지키기만 하는 역할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현실화되지 못한 희생된 역사의 가능성"에 관한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역사의 필연성을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가 학인(學人)에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홍석률은 "다양한 가능성을 내걸고 활동하는 주체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진로는 다양한 갈림길 앞에서 그때그때마다 형성되어 간다."고 말하는데, 나는 모든 주체의 노력이 역사의 흐름에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 노력이 서로 어울어져 큰 흐름을 만드는 것이지, 하나하나의 노력이 개별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 사회에 말해줄 수 있는 것은 특정한 가능성에 대한 평가보다 흐름의 방향에 대한 의견이라는 생각이다.

 

"역사의 가능성"에 대한 이 관점의 차이가 이른바 진보와 보수의 경계선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역사학에서는 이 경계선에 그리 큰 의미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는 가능성의 "희생"에 애틋한 마음을 품고 역사의 주변부를 밝히려 애쓰는데, 나는 현재의 상황에 가려져 있는,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 반갑다. 역사를 더 넓게, 그리고 더 깊게 바라보려는 마음은 같은 것이다. 어느 대목에 가서 이 관점의 차이가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을까?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이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 극복하지 못한 현실 때문에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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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7. 5. 26. 11:44

 

이 계획서의 저술계획과 규모는 대체로 무난하다고 할 수 있지만, 주제의 독창성과 독자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그다지 창의성이 돋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에 대한 연구업적은 사실 중국과 일본, 중국 더 나아가 서양 쪽에서도 많은 성과를 남겼기 때문이다. 또한 별도로 동아시아 서학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성과가 있기 때문이다. 인문저술 출판은 사실 연구기간 그리고 연구역량이 상당히 많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또한 그로 인해 새로운 독창적인 저술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 계획서를 볼 때 학문발전 공헌도가 미약한 편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서학을 논할 때, 일본의 서학을 빼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계획서를 작성한 필자의 연구활동을 살펴보면, 중국 명청사에 관한 전문 연구자라고 보기 어려우며, 중국 근대사 내지 동아시아 서학 전반에 걸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고는 볼 수 없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사 관련, 그것도 근현대에 연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최근 5년간 연구활동 또한 연구재단의 업적을 살펴보면, 이 계획서와 연관한 실적이 미흡하다. 연구자의 연구업적과 주제는 연관성 약하며, 연구성과를 볼 때, 동아시아 서학과 관련한 연구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3월 한국연구재단 저술출판지원사업에 신청한 "예수회의 중국선교와 동아시아의 서학"의 심사 종합의견이다. 심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종합의견을 공시하는 것은 물론 좋은 제도다. 나도 한국연구재단의 전신인 학술진흥재단의 지원 과제 심사에 참여할 때 심사 자체 못지않게 종합의견 잘 작성하는 데 공들이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내 신청에 대한 종합의견을 읽으면서는 공정한 심사를 받았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낙방을 작정해 놓은 뒤에 억지로 이유를 꿰어맞춘 느낌이다.

 

맨앞에서 "창의성이 돋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를 보라. 예수회의 중국 선교와 동아시아 서학에 대한 연구성과가 외국에서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니,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내가 1985년 이 분야 연구를 시작해 몇 해 사이에 조선 서학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국제학회에서 발표하고 학술논문집에 실은 것은 국제학계에서 최소한의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 아닌가.

 

그 연구를 계속해 1993년까지 학위논문 "마테오 리치의 중국 인식과 보유역불론"을 작성하고 심사받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전공이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구분되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나는 학부 때부터 동양사를 선택했다. 내가 생각하는 동양에는 한국이 포함된다. 그런데 중국과 조선의 서학을 함께 고찰하려던 애초의 연구계획서가 학과장에게 거부당했다. 동양사 학위논문에 한국사 주제를 넣으면 안 된다는 것이 동양사를 전공한 학과장의 거부 이유였다. 그래서 국제학계에까지 발표해 온 조선 서학 연구를 접어놓고 마테오 리치로 주제를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심사 과정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문제 제기가 많아서 나는 통과를 아예 포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결국 학위를 받게 되었는지 아직도 모른다.

 

내가 소속한 학회는 동양사학회와 과학사학회 둘이었는데 서울대에서 민두기 교수와의 사제관계를 거부한 후 동양사학회에서는 활동이 불편해 발길을 끊고 지내다 보니 소속감이 전혀 없게 되었다. 종신회원으로 등록했던 것 같은데, 나도 학회 들여다볼 일이 없고 학회에서도 내게 연락한 일이 없다. 위에 올린 "종합의견"을 보니 동양사학회 쪽에서 나온 의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학위논문 통과 후 제도권 학계에 넌덜머리가 나서 공부하는 "學人"의 자세는 지키되 제도적 틀에 맞추는 "學者"의 위치에는 집착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학계를 떠나 내멋대로 공부하며 20여 년을 지냈다. 그러다 노망날 때가 되어서야 철이 들었는지, 격식 있는 연구활동을 다시 시작할 마음을 먹으니 과학사학회 후배들은 진심으로 환영해주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지난 3월 한일과학사세미나라는 중요한 자리에서 발표할 기회도 만들어주고 연구활동의 여건을 갖춰주려 애쓴다. 말하자면 내가 해온 공부에서 "울거먹을" 게 있다고 보는 거다.

 

반면 동양사학계에서는 내 공부를 울거먹을 필요를 느끼는 기색이 없다. 한국근현대사와 관련된 내 근년의 저술 업적을 놓고, 동양사 공부와 아무 관계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동양사 논문에 조선 서학을 넣으면 안 된다고 하던 20여 년 전의 학과장님처럼. 나는 한국을 포함하는 동양문명권의 역사적 진로를 꾸준히 더듬어 왔고, 근년의 한국근현대사 관계 저술은 그 표현의 일환이다. 그것을 놓고 한국사 연구자 중에는 시야를 넓혀주었다고 고마워하는 이들이 있는데, 동양사 연구자 중에서는 현실과의 관련성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해 주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 분야에서는 이 사회의 진로에 참고할 의견이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한 지 오래다. 동양사 분야는 한국사 분야보다 적기는 하지만 상당한 규모의 자원을 누리고 있는데, 왜 쓸모있는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가. 나와바리 때문이고 철밥통 때문인가.

 

같은 사업에 지원한 다른 이들의 계획서를 보지 못했으니 내 신청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많아서 내가 배정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계획서에 대한 "종합의견"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이런 말. "이 계획서를 볼 때 학문발전 공헌도가 미약한 편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서학을 논할 때, 일본의 서학을 빼놓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서학"? "서학"이란 1583년 중국에 입국한 마테오 리치가 1595년경 한문 저술 출판을 시작한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작성한 "서학서"를 발판으로 이뤄진 학풍이다. 일본의 기독교 선교는 1540년대에 시작되어 한 때 큰 규모에 이르렀다가 1590년대 이후 박해가 시작되면서 쇠퇴했다. 16세기 일본의 선교사업에는 "서학"이란 이름이 붙을 만한 학술적 활동이 따르지 않았고, 17세기 후반 이후 나타난 "란가쿠(蘭學)"는 중국, 조선의 서학과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학술연구 지원을 위한 공적 자금의 통로인 한국연구재단 사업의 심사를 맡았다면 공정성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계획서를 작성한 필자의 연구활동을 살펴보면, 중국 명청사에 관한 전문 연구자라고 보기 어려우며" 같은 대목을 보면 명청사 연구자라야 지원 받을 자격이 된다는 생각인 모양이고 자신은 명청사 연구자라고 자임하는 모양인데, "일본의 서학" 운운 하는 것을 보면 그 자격도 의심스럽다. 중국에도 서학이 있고 조선에도 서학이 있었다면 일본에도 당연히 서학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식견을 가진 사람에게 이런 사업의 심사를 맡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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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10년 전부터 일반 독자 상대의 글쓰기를 열심히 해오다가 작년 이맘때부터 작업 방향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공부가 일반 독자를 상대하는 글쓰기에 꼭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 공부는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내려는 것인데, 일반 독자들은 이미 통용되고 있는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 마침 학교에 있던 또래들도 은퇴하는 무렵이라, 나도 프레시안 필진에서 은퇴했다.

 

그 동안 해온 일반 독자 상대 글쓰기가 내게는 가치있는 일이었다. 내 공부가 현실의 수요에서 벗어나 우활한 것이 되기 쉬운데, 일반 독자를 의식하려는 노력이 나를 현실 세상 안에 붙잡아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작업을 계속할 세월에 한정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공부의 목적에 더 집중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제 매달리려는 "필생의 작업"을 어느 방향으로 펼쳐갈까, 여러 모로 생각을 굴려봤다. 그러다가 교수직을 떠난 후 돌아보지 않던 "연구작업"으로 돌아갈 생각이 차츰 들었다. 연구점수를 위해 형식 갖추기에 급급한 연구작업에 묶이지 않고 내멋대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한다는 자세로 20여 년 지내 왔는데, 이제 평생의 공부를 모아 후세에 남기려면 역시 탄탄한 연구성과물의 형태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내 마지막 연구작업이 되었던 학위논문 "마테오 리치의 중국관과 선교노선"이 생각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 논문을 제출할 때 서중석 교수가 보고 그가 당시 주관하던 역사비평사에서 책으로 낼 것을 권했지만, 당시 동양사학계에 내 안티가 많았기 때문에 껄끄럽게 생각되어 사양했다. 그리고는 다시 책으로 정리하지 못한 채 남아있다. 작년에 글쓰기를 늦추고 돌아보니, 한창 나이에 몇 해 공들였던 그 논문, 내 문명사 공부의 출발점이 된 그 논문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조금 정리해 출판할 생각을 굴려보다가,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서 종이책까지 만들 것 없이 이 블로그에나 남기자는 생각으로 원래 내용 그대로 올려놓았다.

 

그렇게 올려놓은 것을 보고 연구자 몇 분이 이런저런 의견과 관련 정보를 보내주었다. 그에 따라 그 분야의 최근 연구성과를 살펴보니, 학계의 연구동향이 아주 재미있는 대목에 접어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7세기 예수회의 중국선교는 학술분야의 교류에 큰 비중을 두었고, 이것을 발판으로 중국과 조선에 "西學"이 일어났다. 서학은 산업혁명을 앞둔 시점에서 동서문명의 접촉-교류가 급격히 늘어난 현상이므로 서양의 힘이 동양을 압도하는 "서세동점" 현상이 일어나기 전 동서문명 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창문이다. 19세기 이후 유럽문명을 인류문명의 표준으로 보는 "유럽중심주의"가 세상을 풍미하다가 이제야 걷히기 시작하고 있는데, 균형 잡힌 시각을 새로 세우는 데 17-18세기 중국과 조선의 서학이 큰 참고가 될 수 있다.

 

근세 초기 동서문명교섭사라 할 예수회 선교사업과 서학에 대해서까지도 유럽중심주의 관점이 오랫동안 적용되어 왔다. 선교사들이 우월한 문명을 전해주었는데 깨인 사람들은 그것을 적극 수용했고 몽매한 자들은 그것을 배척했다는 식이다. 서양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동양 지식인들도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풍조 때문이었다. 이 확신을 벗어나는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이 20세기 후반을 통해 점차 확대되어 왔지만 20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대세는 바뀌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이 주제를 주목하게 된 것은 자크 제르네의 1982년 책 Chine et christianisme: Action et réaction 에 접하면서였다. 그 전까지 서양사의 맥락에서만 고찰되던 예수회 중국선교를 중국사의 맥락에서 살필 가능성을 제시한 책이었다. 내 학위논문은 마테오 리치의 중국 인식 수준과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제르네의 제안을 뒷받침하려는 것이었다. 애초에는 조선 서학까지 고찰 범위에 넣으려 했는데 당시 학과장이 "왜 동양사 논문에 한국사 내용을 넣으려 하느냐?"고 반대하는 바람에 마테오 리치의 활동만으로 범위를 좁히게 되었다. 조선 서학에 관한 논문도 두 편 썼지만 해외에서만 발표하게 되었다.

“Western Studies and Confucian Responses in 18th Century Korea” in T. H. C. Lee, ed., China and Europe: Images and Influences in Sixteenth to Eighteenth Centuries (Hong Kong, 1991)

“Development of Shilhak and Western Studies in 18th Century Korea” in Edward J. Malatesta and Yves Raguin, eds., Images de la Chine : le contexte occidental de la sinologie naissante (San Francisco, 1995).

제르네의 제안이 관련 학계에 큰 충격을 던졌으므로 그 방향의(중국사의 맥락에서 초기 동서문명교섭사를 바라보는) 연구가 활발하게 나올 것을 나는 기대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나온 연구성과를 지난 겨울에 훑어보니 예상 외로 적었다. 그 동안 중국의 국력 신장과 서양식 근대문명에 대한 반성 등 여건 변화를 감안하면 교섭사의 관점이 크게 바뀌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가만 생각하니 이 분야에 관한 중국 학자들의 연구가 아직도 많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한일과학사세미나 강연에서 (http://orunkim.tistory.com/1691) 밝힌 것처럼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중국의 관점"이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문학 분야는 중국에서 아직 충분한 자원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중국천주교회와 교황청 사이의 관계가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 작용해 온 것은 아닐까?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서양 연구방법과 이론을 배워가기 바쁘던 중국 사회과학계에서 지금은 사회과학의 발전 방향을 선도해 가는 움직임을 보이기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정말 빨랐다. 인문학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이제부터 일어난다면 사회과학계보다 더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초기 문명교섭사 관련 연구가 큰 돌파구가 될 것이다. 더구나 중국과 교황청 사이의 관계 변화도 불원간의 일로 예견되는 시점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연구활동으로 돌아갈 뜻을 굳혔다. 문명교섭사에 대한 서양 중심의 관점이 풀릴 때, 그 반작용으로 지나친 중국 중심의 관점이 일어날 개연성이 크다. 그런 상황에서는 중국문명의 주변부에 있던 조선의 서학 연구가 시각의 균형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연구 분야와 주제라면 연구자에게 정말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행운이다. 내가 왜 마다하겠는가?

 

이런 뜻을 알게 된 한국과학사학회 후배들이 모두 환영해 주었다. 꽤 역량 있는 선배 한 사람이 연구활동을 외면해 온 데 대한 서운함이 깔려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전북대 과학문명학연구소 신동원 소장이 열렬히 환영하며 자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등록해 주고 연구활동 지원 신청을 권해주었다.

 

그런데 첫 지원 신청에 낙방했다. 한국연구재단의 저술출판 지원사업에 2년간 지원을 신청했는데, 지난 월말 발표된 선정 목록에 들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내 스스로 신기한 것은 낙방에도 불구하고 연구활동에 복귀하려는 내 뜻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평소의 내 드러운 성질로는 뭐가 내 맘대로 안 될 때, "에잇, 할일이 딴 게 없어서 여기 매달려?" 하고 집어칠 마음이 들 텐데, 이번에는 "즈그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내가 하고 싶은 걸 어떡해?" 하는 마음이다. 늙었나?

 

과학사 쪽만이 아니라 교회사 쪽의 환영도 크게 힘이 된다. 조광 교수는 학위논문 준비할 때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마주치며 경의를 품었던 분이라 연구활동을 재개하며 자료 등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상상 밖의 열렬한 환영과 극진한 도움에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내 연구가 교회사 서술에 도움이 되는 측면을 깊이 이해해 주는 것이다. 내 연구가 애초에 과학사 쪽으로부터 방향을 잡아 온 것인데, 우발적으로 발생한 교회사 방면에 대한 함의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주니, 내 연구도 그 함의를 추구하는 데 더 비중을 두게 될 전망이다. 그것이 "문명사"의 의미를 더 잘 키우는 길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한국연구재단에 지원을 신청한 작업은 학위논문의 업데이팅과 업그레이딩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공적 자금의 지원 없이 작업 수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그 계획은 접어두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시 세우고 있는 작업계획은 서학서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살펴보는 것인데, 이미 익숙해져 있는 마테오 리치의 저술 범위에서 시작하기가 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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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