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일 전 프레시안 기고를 그만둘 결정을 내렸다. 이제 출판을 위한 저술도 그만둘 결정을 내린다.

 

'글 장사'에 나선 지 8년 된다. 2008년 이전에도 번역이나 칼럼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글 장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칼럼이나 서평은 내 공부의 부산물로 여겼고, 번역에 생계를 걸고 지낼 때도 여의치 않은 형편의 임시방편으로 생각했다. 2008년 두 권의 책을 내면서 저술을 내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

 

8년간 16권의 책을 냈다. 그만큼 담아낼 컨텐츠를 쌓아 왔다는 점으로 평생의 공부에 만족하는 마음이 들고, 집필 기간 동안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을 이어 온 점으로 내 인생의 자세에 안심하는 마음이 든다.

 

집필 작업에 평온한 마음으로 여러 해 임해 오다가 1년 전부터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공부를 가급적 넓은 범위의 독자에게 전하려는 뜻으로 '에세이'란 형태를 내세워 왔는데 그것이 불만스럽게 여겨진 것이다. 내 '에세이'는 학술문헌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으면서 내용은 그에 준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 '학술'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 반성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설' 작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것 역시 그 동안 해온 것처럼 출판을 통해 펼치는 것을 당연한 길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주 작다면 작은 일 하나를 계기로 '글 장사'에 대한 생각을 한 번 뒤집어보게 되었다. 계기가 된 일은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에 신청했다가 낙방한 일이다.

 

연간 140권의 "우수출판콘텐츠"를 선정해서 각 권의 저자에게 3백만원, 출판사에 7백만원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책을 낼 때마다 좋은 평을 받아도 인세가 생활비에 턱도 없고 출판사도 헛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던 차에 이런 것 하나 받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처음 신청해 봤다. 소설로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 에세이집으로 착수해 놓은 <서세동점의 끝> 기획안을 넣었다.

 

그런데 내가 "필생의 작품" 비슷하게 생각하며 공을 들이는 이 책이 한국에서 한 해 동안 나올 140권의 "우수출판콘텐츠"에 끼지 못한 것이다. 이런, 세상에.

 

이런 일을 당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이가 없을 뿐이다. 내 책보다 잘 팔릴 책이라면 1년에 몇백, 몇천 권이라도 나올 수 있지만,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내용을 더 잘 담는 책이 몇 권이나 나오겠는가? (여기까지 와서 이 글 읽어주는 분들은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놓고 떠든다.) 그런데 140권에 들지 못하다니!

 

소식을 전해준 S형이 위로의 뜻으로 한 마디 해준다. "이번에 선정 목록을 보니 신인 지원에 중점을 둔 느낌이던데, 김형은 너무 거물이라서 뺐나 봐."

 

이 말에서 '글 장사'의 의미를 뒤집어보게 되었으니 "꼭지가 돌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거물"이라 할 만큼 실적을 쌓고도 이런 지원 사업을 끼웃거리고 있다는 게 어찌된 일인가! 십여 권의 책을 내고 그만큼 좋은 반응을 얻은 필자가 왜 출판사와의 거래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원의 필요를 느끼는 것인가!

 

8년간 글 장사를 하면서도 돈 벌어 부자 되겠다는 꿈은 꾸지 않았다. 이번에도 지원 받으면 노후에 도움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집필 과정이 좀 편안할 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내 또래 대부분 사람들에 비해 돈 필요한 데가 적은 덕분에 하고 싶은 공부 한 것을 풀고 싶은 대로 푸는 일을 몇 해 동안 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지난 8년간 한 것만큼 될지 장담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하던 식으로 그냥 하고 있다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나려면 디게 억울할 것 같다. 이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하면서 살아야겠다.

 

그런다고 무슨 별난 게 있기야 하겠는가? 글 쓸 생각뿐이다. 하지만 출판사 통해 팔아먹는 '글 장사'는 접는다. 얼굴 모르는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은 글은 여기에만 올릴 거다. 소설도 여기 올린다. 그러다가... 어느 출판인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책으로 내고 싶다면, 그건 생각해 볼 거다. 출판사에서 내기 좋도록 써서 내 달라고 내가 쫓아다니는 짓은 이제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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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