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의 의미

 

분단 과정을 직접 겪은 세대와 분단 상태에서 자라난 세대 사이에 통일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당연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앞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민족의 의미에 대한 생각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70년 전에는 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통일성과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었는데, 지금은 국가를 달리 하더라도 각자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민족을 중시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은 민족의식이 흐려진 것이라고 한탄하며 민족정기를 되세워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정체성의 약화는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시대의 추세이기도 합니다. ‘민족국가가 근대국가의 원리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근대세계에서 민족국가라는 말이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지요. 그런데 현대세계에서는 공동체의 울타리로서 민족의 의미가 약해져 왔습니다.

한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언어와 역사입니다. 과거를 함께 해 온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미래도 함께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야 함께 활동하며 공동체를 이룰 수 있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이동이 급격히 늘어나는 현대세계에서는 공동체의 그런 장벽들이 크게 낮아집니다.

중국 조선족의 생활방식 변화에서 그런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전에는 조선족 인구의 대다수가 조선족 집거지역 안에서 조선족끼리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한어를 익힐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많았지요. 그런데 지금은 집거지역을 벗어나 생활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고, 연변에서도 도시 인구 비율이 높아지면서 택시와 식당 이용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한어를 익히지 않는 사람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조선어로 교육받는 조선족학교를 이용할 수수민족으로서의 특권을 마다하고 한족학교에 취학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지요. 그래서 민족의식의 약화를 걱정하기도 하지만, 부득이한 추세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근년 외국인근로자와 이주민, 그리고 다문화가정이 크게 늘어나고 있지요. 그런 사람들을 지나치게 소외시키는 풍조에 대한 우려가 있는데, 그 풍조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민족의식이지요. 민족의식이라도 건전한 민족의식이면 괜찮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래도 민족의식이 너무 큰 데 기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같은 민족이면 꼭 같은 국가에 속해야 하는 것일까, 통일이라는 과제를 앞에 놓고 한 차례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될 질문입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우를 살펴보면 꽤 참고가 됩니다.

 

2. 독일 민족의 곡절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글이 피히테의 독일 민족에게 고함”(1808)입니다. 나폴레옹군의 진격 앞에 독일 국민의 분기를 촉구한 이 글이 호명한 독일 민족(deutsche Nation)”이 과연 누구였을까요?

독일어를 쓰는 주민은 오랫동안 지금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 분포해 있었지만 피히테 당시까지 하나의 국가를 이루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정치조직이 962년부터 1806년까지 존재했지만 많은 조그만 정치조직의 집합체로서 하나의 국가로 볼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 황제 자리를 1438년 이후 오스트리아에 근거를 둔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차지하고 있었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해체가 임박했을 때 마지막 황제는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해서 새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새 자리의 이름이 이런 것이었지요. 황제, , 대공 등 수십 개 지역의 우두머리 이름을 겹친 것이었습니다.

 

"Francis the First, by the grace of God Emperor of Austria; King of Jerusalem, Hungary, Bohemia, Dalmatia, Croatia, Slavonia, Galicia and Lodomeria; Archduke of Austria; Duke of Lorraine, Salzburg, Würzburg, Franconia, Styria, Carinthia, and Carniola; Grand Duke of Cracow; Grand Prince of Transylvania; Margrave of Moravia; Duke of Sandomir, Masovia, Lublin, Upper and Lower Silesia, Auschwitz and Zator, Teschen, and Friule; Prince of Berchtesgaden and Mergentheim; Princely Count of Habsburg, Gorizia, and Gradisca and of the Tyrol; and Margrave of Upper and Lower Lusatia and Istria".

 

피히테가 독일 민족에게 고함을 쓸 때는 독일어를 쓰는 많은 지역이 오스트리아 황제의 치하에 있었지만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호칭의 열거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무기력한 황제 외에는 나폴레옹군의 진격에 대항할 주체가 없다는 사실을 한탄하며 독일어를 쓰는 여러 지역 주민들이 독일 국민으로 정체성을 세울 것을 피히테는 호소한 것이지요. 이 호소에 호응하는 민심에 편승해서 프러시아왕국이 오스트리아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독일제국을 세운 것은 60여 년이 지난 1871년의 일이었습니다.

독일제국이 세워졌어도 피히테가 생각한 독일 민족의 일부는 독일어를 쓰지 않는 인민도 많이 품고 있던 오스트리아제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19181차대전 종결 때 독일제국은 바이마르공화국이 되고 오스트리아제국이 해체되면서 제국의 독일어 지역이 오스트리아공화국이 되었는데, 많은 오스트리아인은 독일과의 통일(Anschluss)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승전국들은 독일이 큰 나라가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별개의 공화국이 되었지요. 당시 티롤, 잘츠부르크 등 오스트리아 일부 지역의 주민투표에서 98% 이상이 독일과의 통일을 지지하는 결과가 나왔는데 승전국들이 더 이상의 주민투표를 막았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인의 통일 염원은 1938410일의 국민투표에서 독일과의 합병 지지 99.7%의 결과로 다시 나타나 합병이 이뤄지게 되는데, 이 투표에는 문제가 있었죠. 히틀러의 독일군 점령 상태에서 7만여 명이 투옥되고 40여만 명이 투표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으니까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그려진 장면입니다. 공정하지 못한 투표이기는 하지만, 민족통일을 바라는 민심은 역시 압도적이었다고 해야겠습니다.

194311월 연합국 정상들이 조선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은 잘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그 직전에 연합국 외상들이 오스트리아 독립을 약속한 모스크바선언이 있었습니다. 연합국은 일본제국과 독일제국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약속했던 것입니다. 모스크바선언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연합왕국과 소비에트연방, 그리고 아메리카합중국 세 나라 정부는 히틀러 침략의 첫 희생물이 된 나라인 오스트리아가 독일 통치로부터 해방될 것에 합의한다. 3국은 1938315일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강제한 합방을 무효로 간주한다. 그 시점 이후 오스트리아에 일어난 변화에 3국은 구애받지 않음을 스스로 확인한다. 자유롭고 독립된 오스트리아가 복원되고, 그럼으로써 오스트리아인 자신과 그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이웃 여러 나라 주민들이 항구적 평화의 불가결한 근거인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향한 길을 찾을 수 있기를 3국은 함께 희망함을 선언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다는 피면할 수 없는 책임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해방을 위한 오스트리아인 스스로의 노력이 최종적 처리에서 감안되리라는 사실을 오스트리아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끝 문장에 연합국의 진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에게는 전쟁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줄이기 위해 독일에 대한 항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 직후에 나온 카이로선언에는 이런 말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똑같은 뜻이 들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는 10, 조선은 5년의 신탁통치를 선고받았습니다. 조선은 여기에 반대하다가 2년 앞당겨 독립을 하기는 했지만 분단건국이었죠. 반면 오스트리아는 좌우합작정부를 세워 10년의 신탁통치를 받아내고 1955년에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습니다. 전쟁 후 끔찍한 고통을 겪고 분단을 겪을 독일에 비하면 훨씬 좋은 팔자였지요. 70년이 지나도록 분단 극복은커녕 극한 대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고요.

1808년에 피히테가 호명한 독일 민족이 걸어온 길을 한 번 되돌아보죠. 1871년 독일제국 건국으로 독일 국민의 국가가 만들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인은 독일 아닌 지역까지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남아 있었고요. 1918년 합스부르크 제국 해체 때 오스트리아공화국이 생겨 피히테의 독일 민족은 두 개 공화국으로 갈라져 있게 됩니다. 그러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독일에 흡수되었다가 7년 후 도로 분리되었고, 독일공화국은 1945년에 동서로 분단되었다가 1990년 재통일에 이르렀습니다.

독일 민족국가의 이러한 역사에서 저는 두 가지 점을 눈여겨봅니다. 하나는 통일도 독립도 외적 조건에 크게 구속받는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사회의 발전과 인민의 행복이 민족국가의 통일이나 독립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3. “화해를 위한 조건

 

이제 한반도로 다시 눈길을 돌려보죠. 저는 지난 10년간 한국근현대사를 정리하는 작업으로 1910년 망국에 이르는 과정을 살핀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1945~1948년 해방에서 분단건국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한 <해방일기>, 그리고 1990년대 남북관계 발전의 기회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그린 <냉전 이후> 등의 책을 썼습니다. 지난 백여 년의 그 역사를 저는 치욕과 고통의 역사라고 부르는데, 그 불행한 역사의 원인을 민족사회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국제정세에서 찾습니다. “남의 탓을 하기 위한 역사 공부지요.

교회에서는 내 탓잘 찾아낼 것을 권합니다. 내 탓을 찾지 않고 남의 탓만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태도가 되기 쉽죠. 개인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큰 공동체의 걸어온 길을 살피고 나아갈 길을 더듬는 데는 남의 탓도 잘 따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내 탓만 찾다 보면 진정한 문제를 밝히지 못하고 이웃과 불화만 키울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친일파 비판에도 너그러운 기준을 주장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민족화해운동에 큰 힘을 쏟아 왔는데, “화해란 남북 사이에서만 이뤄질 것이 아닙니다. 같은 남한사회 안에서 살면서 생각이 달랐던 사람들 사이에 화해가 이뤄져야 남북 사이의 화해도 가능할 것입니다. 19958월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광복 50주년 메시지 중 아래 대목을 저는 종종 되새겨 봅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를 요구해왔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새로운 은총 얻고 진정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우리를 반성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체험하고 있는 분단은 사랑과 평화와 일치를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 분단의 상황이 반세기에 걸쳐서 지속되어 온 것은 우리 겨레가 하느님이 명하신 화해와 일치의 가르침을 소홀히 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분단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는 남북의 겨레는 그 잘못을 겸허하게 참회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 겨레는 공동체적 죄악의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일치와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참회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구원과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역사학자로서 저는 남의 탓따지는 데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목해 탓을 뒤집어씌우는 데 그쳐서야 그 노력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불행한 역사의 책임을 민족사회 내부에서 너무 따지는 것이 안타까워 내부의 화해를 위해 외부에서 책임을 찾았던 것입니다. “나는 깨끗한데 너는 잘못했다는 시비를 넘어서야 추기경님이 말씀하신 공동체적 죄악을 함께 참회할 수 있습니다.

제가 결국 찾아낸 남의 탓은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입니다. 산업혁명으로 부강해진 서양의 힘이 동양을 압박해 온 현상이죠. 전 세계가 서양에 정복당하는 소용돌이에 조선도 휩쓸려 들어가 식민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강대국끼리 부딪친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퇴함으로써 해방을 맞았지만 일본 대신 한반도를 점령하러 온 미국과 소련의 너무 강한 힘 앞에 민족국가를 다시 세우려는 선현들의 뜻이 꺾이고 말았습니다.

저는 십여 년간의 공부를 통해 이 서세동점 현상이 근년 들어 해소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왔습니다. 그 설명을 해드리고 싶은데 오늘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군요. 앞으로 더 설명드릴 기회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은 다만, 우리 민족사회를 치욕과 고통의 역사로 몰아넣었던 외부조건이 바뀌고 있다는 가정 아래 우리 사회의 장래를 생각해 보시도록 여러분께 권합니다.

서세동점 현상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분단국가로 만든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과 내용까지 바꿔 놓았습니다. 지금의 한국인은 백 년 전 조상들의 생각이 미개했다고 깔보는 마음을 갖고 있지요. 그러나 차분히 생각하면 백 년 전 사람들의 생각에 더 건강했던 점이 많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가진 근대적사고방식이 크게 잘못된 것으로 저는 개인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생각합니다. 둘 다 오만한 마음에 바탕을 둔 것이지요.

개인의 권리가 위계질서의 제약을 받는 것을 봉건적이라고 우리는 배척합니다. 개인을 내세우는 사회풍조가 강한 자들에게는 마음껏 행복을 추구하게 해주지만, 약한 자들에게는 보호받고 위로받을 길을 끊어 버립니다. 온갖 소외현상이 이 풍조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존엄성에도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갑질을 못하게 하는 상대적 존엄성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꼭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동물을 학대하고 자연을 파괴하면서 인간의 편익만을 추구하는 식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절대화하면 문제가 생기죠. 동물도 자연도 모두 함께 사는 세상을 인간중심주의가 깨트려 왔습니다.

불리하던 세계정세가 유리하게 바뀐다 해서 갑질 당하던 자가 갑질을 하러 달려들면 바뀌던 정세가 멈춰버릴 겁니다. 박근혜가 물러났다고 그 자리를 넘겨받은 문재인이 박근혜 하던 짓을 대신하겠다고 들어서 되겠습니까? 박근혜가 게을리한 일을 찾아서 챙기고 박근혜가 잘못한 일을 찾아서 바로잡기를 우리는 바라죠.

서양의 패권이 해소될 때, 비슷한 패권을 이번에는 우리가 휘두르겠다고 달려들 일이 아닙니다. 현대인의 다수를 불행하게 만든 앞 시대의 풍조를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통일의 과제부터 그렇습니다. 남북을 합쳐 다른 나라들에게 큰소리치는 강대국이 되려고, 또는 북한의 미개발자원을 이용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려고 통일을 바라본다면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세상을 지금까지보다 덜 위험한 곳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앞세워야 평화로운 통일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한 민족이 한 국가로 통일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꼭 불행의 조건은 아닙니다. 분단이 아니라 대립이 문제죠. -서독 사이는 대립 때문에 힘들었지만 오스트리아는 대립에서 벗어나 있어서 자기네도 편안하고 주변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대국의 대립이 강요했던 분단을 이제부터 극복하기 위해서는 화해와 평화를 향하는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Posted by 문천

 

I. “통일이란 말이 어떻게 쓰여 왔나?

 

통일이 민족의 과제로 떠오른 것은 분단의 상황 때문이다. 19458해방때까지 한반도의 민족사회는 국가를 갖지 못한 식민지 상태에서도 하나의 나라로 존재해 왔다. 그 존재를 소멸시키려는 일제 말기의 내선일체주장이나 국어(일본어)통일정책에 대한 광범하고 확고한 반발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통일<동아일보> 기사를 검색하면 1945년에 74건의 기사가 나타난다. 그 해 121일에 복간되었으므로 한 달 동안의 기사다. 이듬해부터 3년간 해마다 5백여 건씩 보이다가 분단건국 이듬해인 1949년에 1020건으로 늘어난다.

1950416, 1951292, 1952374건으로 줄어든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1953649건으로 늘어나 1959년까지 500건 내지 1천 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19601152, 19611210건으로 늘어난 것은 4-19혁명의 여파였다. 1962603건으로 다시 줄어들고 1969년까지 500건 전후를 오락가락한 것은 민족통일을 기피하는 초기 박정희 정권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었다.

19721397, 19731195건으로 치솟은 것은 7-4 남북공동성명을 둘러싼 정세 변화 때문이었지만 1974년부터 1986년까지는 연 1천 건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6699건에서 19871348건으로 갑절로 늘어난 것은 민주화에 따른 현상으로 보이며, 1997년까지는 1500건에 못 미치는 해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9981183, 19991083건으로 좀 줄어들었다. (검색된 기사 중에는 통일이 남북통일 아닌 다른 뜻으로 쓰인 것도 더러 끼어 있지만 세밀히 걸러내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1987년 민주화에 이르는 37년 동안 통일 논의가 독재정권에 의해 억압된 상황을 기사 분량의 추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재정권의 통제력이 약화된 1960-61년에 (그리고 정권의 필요에 따라 남북관계가 부각된 1972-73년에) 기사 수가 많았던 것은 그 밖의 시기에 통일 논의가 원활하지 못했던 사실을 반증한다.

그런데 이 37년의 세월이 통일의 실질적 의미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 말 통일운동에 앞장선 문익환(1918-1994) 선생의 자세에서 이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문 선생이 통일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데서는 변화 이전의 의미,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제창한 데서는 변화 이후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II. 미국이 한반도 분단건국에 집착한 까닭

 

1945년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지역 분단은 날벼락이었다. 주민들의 생활권과 경제권이 갈가리 찢어지고 틀어 막혔다. 지속적 민족분단의 위험을 차치하고도 이 분단 상태 자체가 식민지시대에도 겪은 일이 없던 총체적 질곡이었다. 19458월에 한반도를 찾아온 것은 해방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통치보다도 더 불합리하고 악랄한 분단 점령이었다.

이 분단은 3년의 점령기 동안 갈수록 강고해져서 결국 분단건국에 이르게 된다. 민족주의만이 아니라 민생(民生)의 원리에도 역행하는 분단의 고착화는 두 점령국의 이해관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대다수 인민이 반대했지만 남북의 외세 의존세력이 분단을 부추겼고, 이에 대한 지식층과 인민의 저항은 이적행위나 적대적 책동으로 몰려 탄압받았다.

두 점령국 모두 솔로몬의 판결에 나오는 가짜 어미처럼 아기를 죽여서라도 자기 몫을 챙기려 들었다. 그런데 가짜 어미들 사이에도 잔혹성에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소련은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위치에 있고 당시 조선의 사회경제 상황도 미국식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를 필요로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영향력 확보를 위해 무리한 정책을 펼 필요가 적었다. 그래서 점령 직후부터 행정과 치안을 조선인의 인민위원회에 맡길 수 있었다.

미국의 이남 점령정책은 이북의 소련 정책에 비해 무리하고 거칠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 오랫동안 뜻을 두고 주의를 기울인 반면 한반도 남반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 얼떨결에 맡게 되어 키워놓은 군정 요원도 없었다. 또한 먼 곳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더구나 현지 사정에 맞지 않는 자본주의체제를 세우기 위해 민심에 거스르는 정책을 펴야 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뒤를 잇는 군정청이 행정과 치안을 독점해야 했고, 협조세력으로 친일파를 끌어안아야 했다.

그래서 38선의 강화를 통한 분단의 고착을 주도한 것도 미국이었다. 미군정은 1946538선 통행을 일방적으로 제한하고 나섰고 물자의 이동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38선 이북의 저수지에서 물을 받는 연백평야의 물 값 지불을 거절하고 이북의 송전에 대한 전기 값 지불도 회피하다가 19485월 송전 중단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미국과 소련 모두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했지만 이 점에서도 미국 쪽이 더 강경했다. 통일된 민족국가가 어떻게든 세워질 경우 미국의 무리한 정책방향을 받아들일 개연성이 적고 미국의 협조세력인 친일파의 입지도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점령군의 조기 철수를 주장하는 등 민족 독립을 지지하는 척 생색을 내면서 미국의 분단건국 집착에 편승해서 실속을 차리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미국에 대해 수동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1949년의 핵실험 성공 전까지 소련의 전략노선이었다.

 

 

III. 북한 평화공세의 근거

 

분단건국은 민족국가를 염원하는 민심을 역행한 것이었기 때문에 양쪽 정권은 그 염원에 부응하는 시늉으로라도 통일정책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북에서는 이남에 비해 민족주의 노선을 포용하는 국가체제를 세울 수 있었고, 그를 기반으로 적극적 통일정책을 펼 수 있었다. 반면 민족주의 세력이 거세되고 배제된 남한 독재정권은 국민의 통일 염원을 왜곡해서 북진통일이란 구호로 대립의 격화만을 꾀하면서 일체의 평화통일논의를 이적행위로 몰았다. 조봉암 처형의 결정적 이유도 평화통일 주장에 있었다.

북한은 분단건국 직후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공산중국의 대륙 석권에 고무되어 무력통일 노선에 나섰고, 전쟁에 실패한 뒤에도 이승만 정권과 대립하는 동안 그 노선을 지켰다. 그러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평화통일 노선으로 전환했다. 19608-15 경축대회 연설 중 김일성은 연방제통일 방안을 제의했다.

 

남조선 당국이 남조선이 공산주의화될까 두려워서 아직도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먼저 민족적으로 긴급하게 나서는 문제부터 해결하기 위하여 과도적인 대책이라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책으로서 남북조선의 련방제를 실시할 것을 제의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련방제는 당분간 남북조선의 현재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 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련방제의 실시는 남북의 접촉과 협상을 보장함으로써 호상 이해와 협조를 가능하게 할 것이며 호상간의 불신임도 없애게 될 것입니다.”

 

분단건국 이전부터 이남 건국세력은 남북 총선거를 실시할 경우 이북 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한 좌익이 유리한 결과를 얻을 것을 꺼려서 회피했다. 이 우려를 감안해서 완전한 통일이 아니라 적대행위의 위험을 줄이고 협조의 기회를 늘리자는 연방제 제안은 현실적 합리성을 가진 것으로서 무력통일 노선에서 평화통일 노선으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1960년 시점에서 북한 측이 이념과 국력 양면에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7-4공동성명 후 1년이 지난 19736월에는 연방제 제안을 더 구체화한 고려연방공화국제안이 나오고 198010월에는 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더 점진적 방안인 고려민주연방공화국제안이 나왔다.

 

우리 당은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우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내오고 그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를 실시하는 련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합니다. 련방 형식의 통일국가에서는 북과 남의 같은 수의 대표들과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 대표들로 최고 민족련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련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북과 남의 지역정부들을 지도하며 련방국가의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하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은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에나 쁠럭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국가로 되어야 합니다.”

 

이 시점까지 통일에 관해 북한 쪽이 평화공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남한 쪽은 정세에 떠밀려 7-4공동성명에 나선 외에는 어떤 평화적 통일 방안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평화통일 주장을 내놓은 김대중은 그것 때문에 빨갱이로 몰렸다. 그러다가 1980년대를 지나는 동안 남한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상황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IV. 문익환 통일론의 양면성

 

급속한 경제발전을 통해 국제적 위상이 올라간 남한이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건국 이래 싸잡아 적대시해 온 공산권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앞의 두 차례 대회가 반쪽으로 치러진 뒤였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은 특별히 큰 관심을 모았다. 결과가 대성공이 된 것은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개혁-개방으로 나서는 등 공산권의 결속력이 이미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헝가리 등 남한과 수교에 나서는 나라들까지 나타났다.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진행 때문에 북한에 대한 자세도 유화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웅산 테러에 불구하고 북한의 수해 구호물자를 받아들이는가 하면 특사를 교환하며 정상회담을 타진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북방정책이 나타나고 있는 시점에서 1987년 여름 민주화가 이뤄지자 민간의 통일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임수경, 황석영, 문익환 등 각계 인사들의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북한 방문이 특히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며 통일 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통일의 의미는 40년 전 분단 당시와 같을 수 없었다. 문익환 선생의 당시 메시지 중에서 이 변화의 양쪽 측면을 읽을 수 있다.

첫째로, 문 선생은 통일이라는 과제에 어떤 대가라도 아깝지 않은 절대적 가치가 실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분단 당사자 세대의 관점이다. 30세 무렵에 분단 과정을 겪은 문 선생은 4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분단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 문 선생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제창했다. 이것은 40년이라는 분단 기간을 고려한 현실적 관점이 반영된 주장이었다. 분단 기간이 길지 않았다면 어느 순간 통일을 선언하기만 하더라도 바로 분단이 해소되고 분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긴 기간의 분단 상태 속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고착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분단의 해소에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었다.

분단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것은 민족공동체에게 생살 찢는 아픔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생활하던 사람들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고, 경제공동체의 파괴로 고난을 받아야 했다. 진행되고 있는 분단을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절규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거대한 힘 앞에 파묻혀 버렸다. 분단이 건국으로 완성되고 전쟁까지 겪은 뒤에도 사람들은 어느 날 그 분단이 무효로 돌아가기 바라는 마음으로 통일을 염원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찢겼던 생살은 엉성하게라도 아물었다. 반토막난 민족사회라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틀이 잡혔고, 정든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생이별을 겪은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거나 노인이 되었다. 인구의 대다수는 분단에 따른 생이별을 겪어보지도 않고, 반토막 민족국가에 태어나면서부터 길들어진 사람들이 되었다. 이제 민족통일이 이뤄지더라도 그에 적응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통일이 이제 필연의 과제가 아니라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덩어리 민족공동체를 잘라내는 분단은 폭력행위였다. 그런데 이제는 두 덩어리 국가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통일 과업에 폭력의 성격이 곁들이게 된 것이다. 도덕적 평가와 관계없이 엄연한 현실의 문제다. 통일에 너무 많은 고통과 불편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경우 실제로 이뤄지기가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V. “목숨 바치는통일, “정성 다하는통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내가 어렸을 때는 셋째 절을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라고 불렀다. 언제 누구 손으로 바뀐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시대의 변화를 잘 나타낸 개사(改詞)라고 생각한다. 통일을 무조건 이뤄야 할 과제로만 여기고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 마음이 그만큼 불안해지기 때문에 성취가 더 힘들 수 있다.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임해야 길이 열릴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꼭 이뤄야 할 절대적 목표의 설정은 오만한 마음에서 나온다. 목표의 가치에 대한 자기 믿음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지난 70년간 분단 상태를 겪어온 데 모든 민족공동체 구성원들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고, 그 부끄러움 위에서 겸손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분단을 강요한 외세나 분단에 앞장선 일부 세력에게 모든 책임을 미룰 일이 아니다. 식민지시대에 숨 쉬고 산 죄밖에 없던 선량한 사람들도 그 죄까지 반성해야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분단시대를 진심으로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시대를 밥 먹으며 산 죄까지 반성하며 욕심을 버려야 한다. 물질적 욕심만이 아니라 정신적 욕심까지도.

겸손한 마음으로 통일의 과제를 다시 바라본다면, 민족공동체의 복원이라는 완전한 통일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통일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담은 부차적 과제들이 눈에 들어온다. 분단에 대립이 따랐기 때문에 전쟁도 겪었고, 많은 국방비를 소진했고,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했고, 극심한 단절로 분단의 고통을 극대화했다. 민족의 화해는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대립을 줄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과제다. 이러한 취지에서 1990년대 중반 민족화해운동이 시작되었는데 1995815일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에 그 뜻이 담겨 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를 요구해왔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새로운 은총 얻고 진정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우리를 반성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체험하고 있는 분단은 사랑과 평화와 일치를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 분단의 상황이 반세기에 걸쳐서 지속되어 온 것은 우리 겨레가 하느님이 명하신 화해와 일치의 가르침을 소홀히 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분단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는 남북의 겨레는 그 잘못을 겸허하게 참회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 겨레는 공동체적 죄악의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일치와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참회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구원과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추기경 말씀에서 인용한 성서와 그리스도의 뜻만이 아니라 민족 대의에 따라서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가르침이다. 지금 이 사회에는 분단 극복의 의지를 분명히 가진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 그 사람들의 도덕적 문제 이전에 지금까지 이 사회가 처해 있던 상황에 있는 것임을, 의지가 분명한 사람들도 인정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함께 반성하는 겸손한 자리에 서야 한다. 그래야 함께 반성하는 사람들을 늘리고, 진심으로 분단 고착을 원하는 극소수 반동세력을 고립시켜 분단 극복의 성공 가능성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VI. 미국의 그림자를 벗어나면...

 

나는 민족의 통일아닌 화해를 목표로 삼기로 했다. 분단건국이 이뤄진 뒤에 태어나 대립을 조장하는 정치체제 아래 자라난 우리 세대에게 통일은 추상적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극단적 대립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분단의 극복보다 대립의 해소가 더 절실한 과제이기도 하다. 대립의 해소가 어떤 이득을 가져올지는 내가 굳이 설명하려 애쓸 필요가 없을 만큼 잘 밝혀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의 노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온 상황이 설명을 필요로 한다.

1945~48년 사이 해방에서 분단건국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본 <해방일기>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북한 개방이 실패하는 과정을 살펴본 <냉전 이후> 작업을 통해 나는 미국의 정책이 한반도 분단의 근본 원인임을 밝혔다. 해방공간에서 미국의 정책이 분단의 구조와 동력을 제공했고 소련은 그에 소극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다. 1990년대에 북한의 종주국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북한의 개방 의지를 가로막은 것은 세계경찰 역할을 위해 악의 축을 필요로 하는 미국의 네오콘 정책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미국의 반동세력은 중국 견제를 위해 북한의 고립상태를 원했다. 그 의도는 근년 사드 배치 문제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는 사드 문제에서 미국의 반동노선이 한계에 이른 것을 느낀다. MD(미사일방어)는 현실적 가치가 없는 무기 개념이다. 공격에 비해 월등 높은 수준의 기술과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MD의 공격대상은 소련도 아니었고, 중국도 아니고, 미국 국민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세금을 집권세력과 밀착관계에 있는 군수산업에 쏟아 넣는 통로일 뿐이다.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이 엄살을 떨고 있지만 속으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표정관리에 바쁠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아주 작은 기술적 부담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이득을 한-미간 혈맹관계 해소에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트럼프의 등장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가 완전히 사라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미국의 헤게모니 상실 추세를 10년 전에 이렇게 설명한 사람도 있다.

 

우리는 미국의 헤게모니 없는 지배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상대적 쇠퇴 단계의 영국 경우처럼,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확대는 국내외에서 미국 기업의 경쟁적 지위 악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영국의 경우처럼, 비록 덜 성공적이기는 하지만, 미국 자본은 이러한 악화에 대해 세계적 금융 중개업으로 특화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맞섰다.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상황은 런던이 해외 제국을 포기하고 불만스럽지만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의 하위 파트너에 만족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세계의 주도적인 채권국으로서 예전의 지위를 상실하는 데는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이 소요되었다. 두 차례 전쟁으로 영국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재정적으로는 패배했다.

반대로 미국은 영국보다 훨씬 일찍 그리고 더 심각하게 채무국이 되었는데, 미국의 소비주의적 경향만이 아니라, 영국이 자국의 헤게모니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세계 남측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군대를 공짜로 끌어 쓸 수 있는 인도가 미국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은 이들 군대와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무기에 돈을 치러야 했다. 그 위에 해외 제국으로부터 공물을 수탈하기는커녕, 미국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의 균형을 맞추는 데 필요한 자본을 위해 기를 쓰고 경쟁해야만 했다.” (죠반니 아리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도서출판 길 펴냄) 271-272)

 

지금의 젊은이들은 미국을 하늘같이 우러러보며 자라난 우리 세대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고 생활한다. 단순한 분단 이전 상황의 복원이 아닌, 21세기 상황에 맞는 민족 통일의 길을 그들이 열어 나가기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세대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자세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Posted by 문천

 

 1. ‘통일과제의 출현

 

통일의 과제는 1945년 해방과 함께 38선 이남과 이북이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역으로 갈라지면서 제기된 것입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통일로 검색하면 1944년까지 이 말이 나타나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없었는데, 1945년에 74건의 기사가 나타납니다. 이듬해부터 3년간은 5백여 건씩 보이고 분단건국 이듬해인 1949년에는 1020건으로 늘어납니다.

1950년에 416건으로 줄어들고 이듬해 292, 그 이듬해 374건으로 더 줄어든 것은 전쟁 때문이었겠지요. 전쟁이 끝난 1953649건으로 늘어나 1959년까지 500건 내지 1천 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19601152, 19611210건으로 늘어난 것은 4-19혁명의 여파로 이해됩니다. 1962603건으로 줄어들고 1969년까지 500건 전후를 오락가락한 것은 초기 박정희 정권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19721397, 19731195건으로 치솟은 것은 10월유신과 적십자회담 등 남북 간의 접촉 때문일 것이고, 1974년부터 1986년까지는 1천 건을 넘기는 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86699건에서 198713481348건으로 갑절로 늘어난 것은 민주화에 따른 현상으로 보이며, 1997년까지는 1500건에 못 미치는 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981183, 19991083건으로 꽤 줄어들었습니다. (검색된 기사 중에는 통일이 남북통일 아닌 다른 뜻으로 쓰인 것도 약간 끼어 있지만 세밀히 걸러내지 않았습니다.)

시기에 따라 많이 쓰이고 적게 쓰이는 굴곡은 있었지만, 남북통일은 지난 72년간 한국인의 과제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가진 실질적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저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 변화와 차이를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2. 통일 논의의 전개 양상

 

해방 직후의 상황부터 생각해 보죠. ‘국가를 잃고 있던 식민지시대에도 조선은 하나의 나라로서 존재해 왔습니다. 그래서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도 내선일체국어(일본어) 통일에 사람들이 반감을 느꼈던 것이지요. ‘해방이 되고 미-소 점령지역으로 분단되었을 때 통일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친척, 친구 간의 방문에 국경을 넘는 것 같은 어려움이 따르고 사업상의 거래관계가 모두 막히게 된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연백평야 곡창에 20리 북쪽의 저수지 물을 대지 못하게 되었고, 발전설비가 부족한 이남 지역은 극심한 전력난을 겪게 되었는데,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물 값, 전기 값 지불을 퍼주기로 여겼는지 제대로 치르지 않아 민생과 산업을 파탄에 빠트렸습니다.

3년의 점령기가 지나는 동안 38선의 장벽은 더욱 강고해졌고, 결국 분단건국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전쟁을 겪으면서 남북의 정권은 상대방을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지요. 제 또래들은 북한의 빨갱이를 뿔 달린 괴물처럼 여기도록 교육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30여 년 후 북한을 처음 가본 황석영 씨가 방문기 제목에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고 했던 것입니다.

전쟁을 겪고도 통일을 원하는 민심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내걸었지요. 북한 측과 의논해서 통일에 합의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정권을 타도하겠다는 적대정책이었습니다. “평화통일주장은 빨갱이로 몰렸습니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 나선 조봉암이 평화통일을 내세웠을 때 당시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는 몇 해 후 빨갱이로 몰려 사형당했고, 2011년에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반공정권이 무너진 후 억눌렸던 민간의 통일 논의가 크게 일어났으나 5-16쿠데타 후 다시 군사정권의 억압을 받았습니다. 1970년대 초 세계 정세 변화에 따라 남북대화의 길이 잠깐 열렸지만 박정희 정권은 민간의 통일 논의를 계속 틀어막았습니다. 1987년 군사정권 종식 후에야 통일 논의가 열리게 되었고, 남북 간의 교류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을 전후해 공산권 붕괴와 소련 해체에 따라 통일 논의가 새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한반도 분단 상태는 약 40년간 냉전의 체제 대립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냉전 해소로 남북통일의 중요한 조건 하나가 갖춰진 셈이지요. 그 상황을 이용해서 한반도 긴장완화 노력이 1990년대 초에 펼쳐졌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북한이 핵사찰을 허용하고 그 대신 핵발전소 건설 등으로 연료문제를 해결해 주는 제네바합의가 1994년 타결되었으나 미국의 부시 정권이 2001년 북한에 적대정책으로 돌아서면서 합의가 파기되었고, 그 후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해서 200610월 제1차 핵실험에 이르게 됩니다. 1990년대 초에 실체 없는 의혹으로 불거진 북핵이 현실화되면서 그 후 남북관계의 발전을 가로막아 왔습니다.

 

3. 통일을 바라보는 세대 간의 차이

 

1987년 남한의 민주화 무렵에는 남북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다른 변화들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1970년대까지는 북한의 경제상황이 괜찮았기 때문에 통일 문제를 놓고도 북한이 공세적 입장을 취해 왔지요.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는 남한 경제력이 크게 자라나,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는 공산권 전체를 상대로 전례 없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을 전후해 공산권 붕괴와 소련 해체로 이어질 공산권의 약점이 1987년 무렵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헝가리를 위시한 동유럽 국가들이 남한과 교역을 늘리고 수교까지 하게 되면서 북한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지요.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은 동유럽 방면에서 활발하게 펼쳐졌지만, 결국 바라보는 방향은 북한이었습니다.

분단 후 약 4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정세의 큰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반공 군사정권이 종식되면서 억눌려 있던 통일운동이 크게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운동에 앞장선 한 분, 문익환 선생의 주장 가운데 두 가지 측면을 저는 중시합니다.

그 하나는 통일의 절대적 가치를 주장한 것입니다. 민족통일은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이뤄야 할 절대적 과제라고 그분은 주장했지요. 이것은 분단 당사자 세대의 입장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1918년생의 문 선생은 30세 무렵에 분단 과정을 겪었지요. 그 과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그 세대의 입장이었습니다.

또 하나 주장은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말씀하신 것이죠.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분단은 현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문 선생 세대와 달리, 다음 세대 사람들은 함께 자란 사람들끼리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일이 없었지요. 그러니 우리 민족이라 하더라도 구체적 인간관계가 뒷받침해 주지 않는, 다소 추상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체제 아래 살아오면서 가치관과 생활감각에도 상당한 차이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의미 회복을 위한 과정을 제안한 것입니다.

1950년대에서 4-19혁명기까지의 통일운동은 분단의 원천무효를 주장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원천무효 선언만으로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즉각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통일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출발점으로부터 하나의 과정, 한편으로는 통일의 장애물을 제거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통합성을 확충해 나가는 과정이 시작될 것을 그분은 제창했습니다.

분단 과정을 직접 겪은 당사자 세대에게 분단은 생살 찢는 아픔이었습니다. 함께 살아오던 가족, 친척, 친구들이 서로 다른 세상으로 갈라져야 했으니, 많은 죽음을 한꺼번에 겪어야 했던 셈입니다. 그 세대의 통일운동에는 갈라졌던 가족, 친척, 친구들을 되찾겠다는 의미가 얹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찢어진 상처는 엉성하게라도 아물어 갔습니다. 이후 세대에게는 남북으로 갈라진 친구들이 없고, 친척이라도 직접 겪어보지 않고 말로만 들어 온 추상적 존재일 뿐이지요. 한편 서로 다른 체제 속에 살아오는 동안 이질감이 늘어났습니다. 한 덩어리 민족 집단을 둘로 쪼갠 1940년대 후반의 분단 과정에 폭력성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두 덩어리 주민 집단을 하나로 합치는 통일 과업에 폭력성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4. ‘통일보다는 통합

 

분단 당사자 세대에게는 통일이 필연의 과제였지만 이후 세대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가치를 추구하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가치들의 성취를 위해 통일이 유리한 길이라면 우리가 선택할 것이고, 불리한 길이라면 거부할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통일이 우리 민족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줄 것이라면 통일을 선택할 동기가 커지겠죠. 그러나 통일로 인해 지금보다 인권과 자유에 제약을 겪어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적 발전에 유리한 점이 많으리라는 사실은 개성공단의 실험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밖에도 남북통일이 되면 북한의 천연자원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고, 대륙과의 물류(物流) 조건도 크게 좋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 남북통일을 위해 양쪽 체제를 절충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북한의 낮은 자유와 인권 수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것이 반갑지 않은 일입니다. 통일을 하더라도 남한 체제의 좋은 점을 양보하고 싶지 않죠. 그렇다고 남한 체제를 그대로 두고 북한만 남한 체제에 가깝게 바꾸라고 요구한다면 통일이 아예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통일보다 통합이란 말을 더 쓰고 싶습니다. “통일이라면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는 뜻인데, 분단 직후에 적합하던 이 말을 지금까지 그대로 쓰는 데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죠. 꼭 균질한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접고, 대립을 지양하며 서로 돕는 가까운 사이가 되는 정도로 목표를 낮추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통합은 유연성을 가진 말이어서 아주 긴밀한 통합에서 꽤 느슨한 통합까지 조정이 가능합니다. 최소한의 느슨한 통합을 일단 해놓으면 그것이 당사자들의 마음에 들 경우 더 긴밀해져서 결국 통일에 이를 수도 있겠죠. 처음부터 화끈한 통일 아니면 안 된다고 꼭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통일의 목표에 유연성을 가하려는 노력도 오랫동안 있어 왔습니다. 20006-15 남북공동성명 제2항은 이런 내용이었죠.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단일국가를 궁극적 목적으로 하되 그 과정에서 연방 형태의 통합을 먼저 하자는 제안은 김일성이 19608-15 경축대회에서 내놓은 이래 북한의 전형적 통일방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연방제라는 말 자체가 빨갱이로 몰렸던 것인데, 2000년까지도 색깔론이 등등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 측에서 비슷한 내용을 연합제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죠.

북한의 연방제 제안에 처음에는 평화공세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남북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연방공화국을 만들면 국론이 다양한 남한보다 북한 측 의지를 관철시키기 쉽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러나 공산권 붕괴 후에는 방어적 자세로 돌아섭니다. 그래서 19934월에 발표한 전 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중 제5항에는 서로 상대방에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들어간 것이죠.

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반환받은 후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실시한 것은 완만한 통합 과정을 거쳐 장기적으로 통일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대만에게도 비슷한 통합 과정을 제안하고 있지요. 우리도 문익환 선생 말씀처럼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생각한다면 어려움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5. 고쳐 부르는 통일의 노래 

 

얼마 전 어느 자리에서 통일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제가 어렸을 때는 셋째 절을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언제 누구 손으로 바뀐 것인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잘 나타낸 개사(改詞)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분단의 극복에 따르는 이점을 일반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많이 더 깊이 살펴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그 이점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