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2월 22일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 카초로프스키 대통령이 사임했다. 후임자는 없었다. 망명정부는 1939년 9월 파리에서 세워진 지 51년 만에 사라졌다.


본국에서 바웬사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였다. 망명정부는 대통령기와 휘장, 국새, 1935년 헌법 원본 등 제2공화국의 유산을 바웬사 정부에게 넘겨주었다. 그래서 바웬사 정부는 공산정권을 청산하면서 제2공화국의 법통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폴란드 공화국이 독일과 소련에게 유린당할 때 파리에 체류 중이던 상원의장 라츠키에비츠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세워진 망명정부가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아닌 망명정부(government in exile)였던 것은 제2공화국의 법통이 연속되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1935년 헌법에는 이런 규정이 있었다.


전쟁 중에는 대통령직의 임기가 전쟁 종료 3개월 후까지 연장된다. 그런 상황에서 공화국 대통령은 전쟁 종료 전에 대통령직이 궐위될 경우에 대비해 후계자를 지명한다. 지명된 후계자가 승계할 경우 그 임기는 전쟁 종료 후 3개월까지다.


1939년 9월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자 모슈치츠키 대통령은 17일에 라츠키에비츠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30일에 사임했다. 라츠키에비츠는 즉각 파리에서 대통령에 취임하고 망명정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 프랑스가 나치에 항복함에 따라 폴란드 망명정부는 런던으로 자리를 옮겨 50년 후까지도 국무회의를 격주로 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폴란드 망명정부의 역할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폴란드 해군의 거의 전부, 그리고 수만 명의 육군이 폴란드를 벗어나 나치에 대한 항전을 계속했다. 1941년 6월에 소련이, 그리고 12월에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연합군 중에서 폴란드군이 영국군과 자유프랑스를 이어 세 번째로 큰 병력이었다. 소련 참전 후 동부전선에서 편성되어 소련군 지휘계통에 편입된 폴란드 부대도 망명정부의 지도를 받았다. 폴란드 국내에도 망명정부를 따르는 독립군(Armia Krajowa) 세력이 있었다. 연합국들은 모두 폴란드 망명정부를 승인했다.


1943년 4월 독일이 카틴 숲 학살을 공개한 것은 연합국 사이를 이간시키기 위해서였다. 1939년 폴란드 동부에 침공한 소련군이 끌고 간 장교급 포로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독일은 1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했는데, 그 후 4,443구의 시체가 확인되었다. 소련은 이 공개가 조작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연합국들은 그 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폴란드 망명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탈린은 폴란드 망명정부와의 관계를 끊었다.


연합국 지도자들, 특히 처칠은 폴란드 망명정부와 소련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애를 많이 썼다. 그러나 폴란드 망명정부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 몇 가지가 있었다. 카틴 학살만이 아니라 1939년 침략 때 소련의 여러 가지 만행을 소련이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은 전쟁 후 1939년에 점령했던 폴란드 영토를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폴란드에 공산정권을 세우려는 소련의 집념도 망명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44년 말 폴란드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가면서 소련은 망명정부를 무시하고 공산정권 수립 준비를 시작했다. 1945년 1월 1일을 기해 임시정부를 출범시키고 2월 초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이것을 기정사실로 주장했다.


얄타 회담 때까지도 연합군의 승리는 소련의 역할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도 20만의 폴란드 장병들이 영국군 지휘 아래 독일군과 싸우고 있었다. 얄타 회담에서 폴란드에 대한 배신은 이른바 ‘서방의 배신’(Western Betrayal) 중에서도 제일 비열한 사례로 꼽힌다. 처칠은 귀국한 후 의회에서 곤욕을 치렀고, 의원 한 사람은 항의하는 뜻으로 의원직을 사임하기까지 했다.


폴란드 국내의 독립군은 망명정부를 받들고 있었다. 망명정부는 독립군이 소련군과 ‘전술적 협조’를 하도록 지도함으로써 민족주의 세력의 발언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소련군은 이에 불응, 1944년 8월에서 10월까지 바르샤바 봉기에서 독립군이 궤멸당하는 것을 강 건너에서 구경하고 있기까지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소련과 폴란드 공산정부는 독립군과 영국군 항전자들을 오랫동안 탄압했다. 15만의 폴란드인이 귀국을 거부해서 영국 의회는 이들을 위해 이민법을 개정해 줘야 했다. 그 15만과 그 자손들이 1990년까지 망명정부를 지탱해 왔다. 망명정부 청사로 쓰던 옛 대사관 건물을 영국 정부가 폴란드 공산정부에게 넘겨주자 대통령 사택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그리고 자유로운 공화국이 반세기만에 폴란드에 되살아나자 망명정부를 거둔 것이다.


1945년 8월 28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대표대회를 열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본당은 先祖先烈의 장엄한 전통적 민족정기를 계승하여 민주독립의 위대한 시대적 정신에 기인하여 玆에 국내외 동지 동포에게 정중히 선언을 발표한다.

본당은 유구한 역사적 계통을 가진 반일투쟁을 계속하여 강렬히 전개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대상이 소멸된 이때에 있어서는 과거를 다시 검토하면서 신단계의 임무를 규정하지 아니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에 침입한 이후 70年來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분전하였다. 이것은 왜적을 撲滅하고 조국의 완전한 주권을 쟁취하려는 민족정신의 표현이었다. 회고하건대 甲申革命, 甲午更張, 의병의 遊擊戰, 獨立協會, 大韓自强會, 反日救國, 除奸 3·1大革命 等은 그 대표적 운동이었다. 그 발전과정에 있어서 비록 객관적 정세로 인하여 그 環節의 大小가 不一하고 형태가 不同하였지만 금일까지 꾸준히 생장하고 발전하여 왔다. 그 최후의 環節이 곧 韓國獨立黨이다. 따라서 혁명역사가 韓國獨立黨에게 부여한 임무는 원수 일본의 침탈세력을 撲滅하고 조국을 완전 광복하는 것이다. 본당은 如斯히 유구한 연원을 가진 광영스러운 역사적 임무를 완성하기 위하여 우리의 민족운동을 復國, 建國, 治國의 階段으로 分期 進行할 心要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특히 건국과 치국의 全 과정을 통하여 본당의 일관한 목표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립하는 동시에 族與族 國與國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世界一家의 진로로 향함에 있는 것이다.

(...)

우리는 본당의 黨義와 수정한 黨綱과 黨策을 친애하는 동지 동포앞에 제공하여서 공정한 비판을 청한다. 이에 공명하는 자매형제여 韓國獨立黨의 기치하로 모이자.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며 또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완성하기 위하여 공동분투하자!


大韓民國27年 8月 28日

韓國獨立黨 第8次 臨時代表大會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임시정부 쪽에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틀 뒤에는 임시정부 대표들이 중경 미 대사관을 방문해서 귀국 희망을 표명했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75쪽)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기독교 신자가 많은 자신들이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대거 입국 때문에 희망을 잃고 있다고 표명하고, 임정의 지도적 요인들이 점령군의 보좌역 또는 통역의 자격 등으로 입국시켜 줄 것을 요망하면서, 미국의 도움으로 입국한다면 그들은 미 점령군이나 혹은 국무성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망록을 남겼다.”고 한다.


임정 대표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들먹인 것을 서중석은 “미국 정부로 하여금 대소 경계를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한 극우적 발상”이라고 했는데 너무 각박한 논평 같다. 누추한 자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몇 달 전 폴란드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리라는 가정 아래 다시 살펴보기 바란다. ‘얄타의 배신’은 상당 기간 서방 언론을 도배한 주제였는데, 중경의 임정 인사들은 서방 언론을 접하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

 

 

이북 지역의 일본군 주력인 관동군 제34군의 무장 해제가 함흥에서 이뤄졌다. 서울에서는 15일부터 소련군과 미군이 곧 진주할 것처럼 온갖 소문이 떠돌고, 17일에는 소문에 들뜬 군중이 서울역에 모여들기까지 했다. 실제로 미군은 아직 어느 부대를 한국에 진주시킬지도 결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소련은 연변 방면에 주둔 중이던 적군 제15군을 21일부터 한국에 진주시키기 시작했다.

 

소련의 점령 방침이 미국과 다른 점 하나가 바로 나타났다. 소련군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함경남도의 행정권을 접수하자 바로 조선민족 함경남도 집행위원회에 넘겨준 것이다. 함흥에서는 16일 함흥 형무소에서 석방된 정치범들을 중심으로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가 결성되고, 또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함경남도 지부도 결성되어 있었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두 단체가 합쳐 조선민족 함경남도 집행위원회를 만들어 도 행정권을 넘겨받은 것이다.


소련군은 이 방침을 계속했다. 26일 평양관구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평안남도 행정권을 접수하면서 바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넘겨줬다. 15일에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치안유지회가 결성되었다가 건준 평안남도 지부로 이름을 바꿔놓고 있었다. 공산당 평안남도 지국위원회도 15일부터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26일 저녁 조만식, 현준혁과 후루카와 일본인 지사와 함께 한 자리에서 “오늘 오후 8시를 기해 평안남도의 행정권은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인계된다”고 선언하고, 각 도의 정부가 수립된 후 통일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새 정부의 소재지는 서울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해방 3년사 I>(송남헌 지음, 까치 펴냄) 108쪽에서 재인용)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는 건준 측 16인과 공산당 측 16인, 32인으로 구성되었다.


8월 31일에 평안북도 임시인민정치위원회가, 9월 13일에 황해도 인민위원회가 도 행정권을 넘겨받고 9월 말 함경북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38선 이북 5도 인민위원회 체제의 얼개가 완성되었다. 소련군 사령부에는 로마넨코 소장 휘하의 민정부를 설치했다. 10월 10일 김일성이 입국할 때는 민정부의 지도 아래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대표대회가 평양에서 열리고 있었다.


약탈, 강간 등 소련군의 횡포에 관한 이야기를 함경도에서 피난 오신 외조부모님께 많이 들으며 자랐다. 소련군의 무질서한 민간인 침해 행태는 당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미 육군 정보국에서는 1945년 12월 이런 내용의 보고도 있었다고 한다. (<북조선 탄생>(찰스 암스트롱 지음, 김연철-이정우 옮김, 서해문집 펴냄) 78쪽에서 재인용)


소련이 북한에 주둔할 의사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조선 인민의 존경을 받을 일은 거의 하지 않고 그들과 멀어질 일만 일삼고 있다. 그들은 점령태도에서 무례하다. (...) 약탈, 강간, 그리고 식량공급과 수송을 위해 주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징발하는 것은 붉은 군대에 대한 염증만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된다.


10월에 이르러 소련군의 폭력적 행태가 많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11월에는 북한 주둔군의 20%가 여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주둔과 점령 방법의 세밀한 면까지 그 사이에 점검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행정을 현지인에게 맡긴다는 기본 방침은 8월 하순 진주할 때 이미 분명하게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소련군보다 보름 이상 늦게 진주했고, 그 후에도 꽤 오랫동안 총독부 산하 조직에게 행정과 경찰을 맡겨놓았다. 넘겨받은 뒤에도 많은 일본인 간부들을 고문으로 채용해서 역할을 맡겼다. 소련군이라 해서 현지인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아주 풀어놓은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인민위원회가 상당한 책임과 권한을 누리는 상태가 한국 사회의 장래를 모색해 나가기에, 그리고 점령군과 현지인 사이에 신뢰를 쌓아나가기에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왜 소련군은 한 것을 미군은 하지 못했을까? 또는 하지 않았을까?


소련 적군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군대가 정치를 중시하는 일반적 특징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공산주의 군대에서는 각급 부대에서 정치장교가 지휘관의 바로 차석이다. 반면 미군이나 한국군에서 민정참모는 참모 서열 5위다. 병사들의 기율은 아무리 엉망이더라도 소련군 지휘부의 정치 개념은 미군에 비하면 프로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휘관의 정치능력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소련은 현지 사정을 적극적으로 통제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고, 형편 돌아가는 데 따라 최소한의 조정만 하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 아닐까? 동유럽에서 소련군은 현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폴란드와 동독을 제외하고) 현지 공산주의자들이 정권 세우는 것을 도와주며 최소한의 감독만 하면 되었다. 한국에서도 소련에 유리한 조건이 상당히 존재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반면 미국은 신뢰할 만한 세력이 현지에 있을 것을 기대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일본이 35년간 지배해 온 지역이고, 안정된 영향력을 입증해 온 저항조직도 없었다. 이 지역 사정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거스르는 쪽으로 펼쳐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일본의 통치체제를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로 보였을 것이다.


한국 주둔 미군과 군정청은 일본에 주둔한 맥아더 사령부 예하에 있었다. 아직 냉전 체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을 때였지만, ‘가이진쇼군(外人將軍)’ 맥아더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의식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는 일본을 극동의 보루로 키우고 있었고, 남한 경영의 목적은 그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한국을 한국인의 손에 맡겨놓는 것보다 미국의 국익에 더 잘 들어맞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10월에 이승만이 찾아왔을 때 그렇게 반가워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자기보다 힘이 약한 사람이 옆에 있을 때 괴롭히려 드는 사람에게는 대개 두 가지 동기가 얽혀서 작용한다. 상대를 괴롭힘으로써 돈을 빼앗든가 무슨 이득을 취하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는 동기다. 그런데 실제로 별 이득이 없는데도 괴롭히기 위해 괴롭히는 것 같은 경우도 있다. 이것은 가해자가 가해 행위를 통해 자아 확인을 할 필요가 있다든가 하는 심리적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왜 한국을 침략했는가.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의 산업화에 따라 식민지가 필요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870년대 정한론이 들먹거릴 때의 일본은 산업화가 겨우 시작한 단계였다. 식민지의 필요가 없을 때였다. 그때의 침략 동기는 임진왜란과 별 차이가 없었다. 국내 체제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 침략으로 위세를 과시하려는 수준이었다.


실제 식민지로 만든 1910년까지도 일본의 산업화는 근대적 의미의 식민지가 필요한 단계가 아니었다. 긴 안목으로 내다보는 사람에게는 20년 후의 필요가 감지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식민지로 일본에게 필요한 곳은 일본 본토와 비슷한 농업사회가 자리 잡고 있던 한국보다 근대적 개발의 여지가 큰 만주와 시베리아였다. 조선의 병합은 현실적 필요에 대한 냉정한 판단보다 단순한 야욕에 의해 이뤄진 면이 크다.


그래서 조선 식민지 경영은 일본에게 별로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었다. 통치 비용의 상당 부분을 일본 정부에서 지불해야 했다. 손실을 줄이기 위해 기껏 할 수 있는 일이 지세(地稅) 증대였고, 그를 위한 토지조사사업이 1910년대 식민 통치의 가장 큰 내용이었다. 이 단계에서 식민지로서 조선의 제일 큰 가치는 일본에서 산업화에 따라 수요가 늘어나는 쌀의 공급에 있었다.


유럽 산업국들이 큰 파괴를 겪은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 산업화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기회가 되었다. 그에 따라 한반도에도 초보적 수준의 산업화가 시작되었지만, 쌀 공급지로서 식민지 조선의 기본 가치는 더욱 심화되었다. 일제 통치자들은 쌀 생산을 늘리고 지세 수취를 원활히 하기 위해 소농민과 소작인을 외면하면서 지주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정책을 광범위하게 시행했다. 그 결과 조선의 소작인 경작 비율은 조선 시대에 상상도 하지 못한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식민통치의 혜택을 가장 크게 받은 집단이 지주층이었다. 지주층은 ‘친일’이라고 딱지붙인 행위를 따로 행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 양태 자체가 친일이었다. 전통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던 가혹한 조건으로 소작인을 착취할 수 있게 된 것은 일제 식민통치 덕분이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일본에 쌀을 보내 식민지의 임무를 수행하고 지세를 납부함으로써 식민통치의 비용을 조달했다.


전통사회에서 지주-소작인 관계는 금적적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적 관계이기도 했다. 소작인은 경작하는 땅에 관습적 경작권을 가지고 있어서 지주의 소유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주가 소작인의 경작권을 무시하고 소유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면 여론의 표적이 되기도 하고 관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소유권을 절대화했고, 산미증식 정책은 소유권 행사 방식을 ‘자유화’했다. 조선 후기의 조정은 지방 지주세력의 통제가 약해져 소작료가 수확량의 절반을 넘는 사례가 나타나는 현실을 개탄하곤 했다. 식민지시대에는 소작료가 80%를 넘는 사태에 이르렀다. 소작인의 최저생계비가 보장되지 않는 이런 사태는 정상적 국가 경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식민지 경영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자본주의 체제라도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체제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의 재부는 지주층에게 집중되었다. 1920년대에 나타나 1930년대에 확장된 초보적 산업화에 나선 ‘민족자본’의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 것도 당연히 지주층이었다. 그래서 식민지 조선의 ‘민족자본가’들은 행동 양식에서 지주층의 특성을 일반적으로 나타내게 된다.


지주층의 첫 번째 특성은 지배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이다. 자기네 활동범위 내에서 공권력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 지주들은 자기 동네에서 왕과 같은 존재였다. 대지주들은 자기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인적사항도 알 필요가 없었다. 지주와 소작인의 신분관계만 있었다. 조선시대의 전통적 양반 지주가 맡고 있던 가부장적 책임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전통적 양반 지주의 기반 없이 조선 말기의 혼란 속에서 치부의 기회를 잡은 아전과 모리배들이었다. 유서 깊은 양반 지주들은 이 신흥 지주층의 행동양식에 따라가든지, 아니면 도태되었다. 이영훈은 <대한민국 이야기>(기파랑 펴냄)에서 “그들의 사회적 성공을 가져다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적”이었던 이 신흥 지주층이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계층”이 되었다고 했다. 그들이 일제에 협력적일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동포인 소작인들을 자본가인 자신에게 지배받는 노동력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이후 지주층이 산업자본으로 진출할 때 그들은 ‘민족자본’의 간판을 이용했다. 일본제 경쟁상품보다 여러 모로 불리한 조건을 만회하고 조선 내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민족 정체성은 사업을 위한 방편이었다.


친일 여부도 이들 자본가들에게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국가의 힘에 도취된 이념적 친일파처럼 열정적으로 친일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민족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그들에게는 사업을 위한 이용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의 속성을 이해하는 식민 당국은 그들에게 노골적인 충성 표시를 요구하지 않았다. 친일과 반일의 회색지대에 그들은 서 있었고, 국가와 민족보다 자본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임했다.


식민지시대도 그들에게는 괜찮은 세월이었다. 그 세월이 끝나고 세상이 바뀔 때 그들은 지금까지의 특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좌우할 만한 상당한 역량을 자기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온 세상이 독립과 건국 이야기만 하고 있을 때 그들은 특권을 지키려는 자기네 속셈을 드러내 떠들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 속에서 자기네에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밀고 당기며 해방된 한국의 진로에 꾸준히 작용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