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휴직하고 1985년 상반기를 케임브리지의 니덤연구소(동아시아 과학-기술-의학사 연구소)에서 지낸 것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학부 시절부터 공부해 온 중국역법사에서 가톨릭 동양선교사 쪽으로 연구 방향을 바꿔 이후 문명사 공부에 매달리게 된 출발점도 그곳에 있었다. 그보다 더 큰 변화는 다른 환경 속에 살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생각난다. 1월 어느 날 아침 연구소를 찾아가 벨을 눌렀을 때,(당시 니덤연구소는 주택가 안에 있는 3층 일반주택 하나를 쓰고 있었다.) 그레고리가 나와 문을 열어주고 활짝 웃으며 "Oh, you are Professor Orun, aren't you?" 말을 건네오던 장면을.

 

휴게실로 안내해 주면서 그레고리는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연신 싱글댔다. 몇 주일 전 니덤 박사에게 보낸 내 편지를 모두 둘러봤다는 것이다. 그 편지에 약간 비친 유머감각이 보통 접해온 엄숙하기만 한 동아시아 학자들과 달라 보여서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는 설명을 나중에 들었다.

 

그래서 문 열어줄 때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니덤 박사에게 처음 편지를 보낼 때 이름을 "Orun Kihyup Kim"으로 적고 그 옆에 "金基協"이라고 붙여 적었다. 한자를 아는 분이니까. 그런데 그분이 답장에서, "Kihyup Kim"이 한자 이름과 대응되는 것을 알겠는데, "Orun"이 무엇이냐, 신분을 표시하는 타이틀이냐,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임의로 만든 퍼스트네임이며, 한국어에서 "나이든 분"이란 뜻의 "어른"을 음역한 것이라고 답장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선생님처럼 진짜 나이든 분(당시 84세)께 그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할 상황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 지금은 후회됩니다." 이 말이 재미있다고 커피브레이크 때 꺼내서 연구소 식구들에게 두루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 조그만 접촉 때문에 연구소 식구들은 나를 "말 통하는 사람"으로 여겨주었고, 덕분에 말도 관습도 익숙지 못한 내가 그곳 생활과 활동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특히 같은 나이또래인 그레고리와 프란체스카는 아주 편안하게 어울려 지냈다.

 

서로서로를 속속들이 알 만큼 되었을 때 두 사람이 내 문제 두 가지를 지적해 준 것이 있다. 그 하나는 내가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 모든 면에서 멀쩡한 문화인처럼 보이는 내가 음악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화인이라면 음악에도 꼭 관심이 있어야 하나?" 내게는 생소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틀림없는 지적이고, 그 지적 덕분에 음악에 관심을 키우게 되지는 못했지만, 내게 그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만은 자각하게 되었다.

 

음악 문제는 둘 중 누가 지적해준 것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또 하나 문제는 프란체스카가 지적해 준 것이 분명하다. 당시 독신이던 프란체스카는 가정을 가진 그레고리보다 나랑 시간을 많이 함께 하면서 개인적인 문제까지 털어놓고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내 성격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인간관계에서 불필요한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 문제를 명확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black anger"라는 표현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 지적이 참 절실하게 들렸다. 어려서부터 나는 쉽게 분노를 일으키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별로 가지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대로 분노의 그럴싸한 이유를 댈 수 있었고, 남들보다 더 쉽게 더 많이 분노하는 경향은 정의감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미화하곤 했다. 더러 턱도 없이 화를 낸 경우는 단순한 실수로 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체적 경향을 놓고 "이유 없는 분노"를 지적해 주는 데 쉽게 수긍할 수 있었던 것은 익숙지 못한 다른 문화권에 적응해 가는 자세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처럼 나 자신을 새로운 눈길로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 1985년 영국 체류의 큰 효과 하나였다.

 

치료법이 완전하지 않은 증세라도 일단 진단을 제대로 받아놓으면 어떻게든 완화시키는 길을 찾을 수 있는가보다. 그 후로 분노가 일어날 때마다 이것이 불가피한 분노인가, 이렇게까지 분노할 일 맞는가, 한 번씩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무척 온화한 사람으로 보이게까지 되었다. 여러 사람 앉은 자리에서 아직 낯이 덜 익은 분이 내 "부드럽고 너그러운" 인상을 이야기하면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은 쿡쿡대기 바쁘다. "아직 덜 겪어봤군!"

 

글을 통해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온화한 사람으로 인식하기 쉽다. 글은 정제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글이 거짓된 것은 아니다. 身과 言에 따라붙는 가변적 감정이 書와 判에서는 쉽게 배제될 뿐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통한 자기표현에 치중하며 오래 지내다 보니 일상적 현실에서도 가변적 감정에 휘둘리는 일이 적게 되었다.

 

겉보기로는 온화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 되어 가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의 "분노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엄격한 태도를 취할 때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더 책임감을 느끼는 관계이므로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데 합당한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엄격한 정도가 지나쳐 관계 자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면?

 

며칠 전에 적은 홍석현과의 관계에도 그런 고비가 있었다. 2002년 말 내가 연변으로 떠날 때 이후 얼굴을 안 보고 지내면서도 간간이 메일은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지나 "이 친구에게 메일을 그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연락을 끊었다. 그의 답장을 꽤 오래 받아보지 못하고, 중앙일보의 색갈이 조선일보 뺨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나는 분노 속에서 그와의 관계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렇게 끊었던 친구가 1년 전 꿈에 불쑥 나타나고 그를 계기로 그를 다시 보게 되면서 과거 어느 때 못지않게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 어찌된 조화인지 알 수 없다. 알 수는 없어도 좋은 조화니까 반갑게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생각할 때, 내가 관계를 끊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문제 때문에 더 큰 관계의 가치를 덮어버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격의 길에서는 가치있는 자원이라도 진격 목표에 맞지 않으면 쉽게 버릴 수 있다. 그런 자원의 가치가 퇴각의 길에서는 크게 아쉬울 수도 있겠다. 포기했던 관계들도 이제 다시 돌아봐야겠다. 꿈에 불쑥 나타나주는 조화를 기다릴 것 없이 내가 조화를 만드는 길도 생각해봐야겠다.

Posted by 문천

 

 

미 육군 24군단이 남한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미군의 남한 점령을 명시한 일반명령 1호는 9월 2일자로 발령되었지만, 그 내용을 맥아더가 마닐라에서 일본 전권대사 가와베에게 8월 20일 이미 교부해 놓았다. 가와베는 21일 일본에 돌아갔고 22일 일본 내무차관이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에게 전문으로 알려놓았었다.


24군단장 하지 중장은 9월 9일 오후 4시를 기해 조선 총독과 조선 주재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한국인을 상대로 성명서를 발포했다.


조선 인민 제군이여!

태평양방면육군총사령관이요 연합국총사령관 맥아더대장을 代하여 余는 오늘 남조선 지역에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駐朝鮮美合衆國司令官으로서 余는 玆에 下記 항복에 관한 諸 조건을 確守케 하노라. 余는 玆에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조선의 경제 상태를 앙양시키며 인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며 기타 국제법에 의하여 점령군에게 과하여진 기타 제 의무를 이행하노니 점령지역에 있는 제군도 또한 의무를 다하여라. 余의 지휘 하에 있는 제군은 연합국군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장차 발할 余의 諸種의 명령을 엄숙히 지켜라.

제군은 평화를 유지하며 정직한 행동을 하여라. 이를 지키는 이상 공포의 念을 가질 필요는 없다. 만약 명령을 아니 지킨다던지 또는 혼란 상태를 일으킨다면 余는 즉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수단을 취하겠노라. 이미 확정된 항복조건을 이행함에는 余는 시초에 있어서는 현 행정기구를 사용할 필요가 있노라. 동시에 余는 장차 나의 지휘 하에 있을 관리의 명령에 복종하기 바란다.

조선인민을 위하여 정부의 정책은 장차 필요에 응하여 개정될 것이다. 法制, 商業, 工業, 學校敎育에 있던 종래에 諸種의 인류적[인종적] 차별은 곧 끝이 날 것이다. 신앙의 자유, 언론·사상의 자유는 제군에게 돌아 갈 것이다. 신문, 라디오는 금후 곧 조선사람을 위한 기관이 될 것이다. 余는 조선인 제군이 장구하고 또 귀중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아노라. 또 제군이 과거 수십 년간 제 압박 하에 신음하여 온 것도 잘 알며 제군의 대망이 무엇이라는 것도 잘 아는 바이며 제군이 생활상태 개선을 하루 바삐 수행하고자 하는 제군의 열망을 가슴 깊이 품고 있는 것도 잘 아노라.

此點에 관하여는 제군이 그 때가 올 때까지 좀 기다려 주기 바란다. 제군이 참아 온 수십 년에 亘한 弊政을 수일 사이에 전부 교정코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어다.

장차 올 幾個月에 亘한 제군의 언어 행동으로서 제군은 전 세계 민주주의 국민 及 그들의 대표자인 余에게 전 세계라는 일가족에 구성분자로서의 명예 있는 지위를 받을 일 민족의 자격능력을 표시하게 될 줄 아노라.

1945年 9月 9日 (매일신보 호외 1945년 9월 9일)


얼마 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의 포고문과 대비되는 면이 있다.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새 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심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과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일본 통치 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조각돌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누구를 위하여 당신들이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굴욕한 것은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절머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구히 없어져버렸다. 조선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들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들을 회복시켜라. 새 산업 기업소들을 개시하라.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 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붉은 군대 사령부 (<해방 3년사 I>(송남헌 지음, 까치 펴냄) 105-106쪽)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이 당시의 한국인이 할 일에 대해 한국인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면, 하지의 성명서는 한국인이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미국인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이고, 또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얼마간의 상상을 떠올리는 정도로 놓아두었다가 앞으로 상황 전개에 따라 차츰 음미해 보기로 한다. 지금은 우선 이런 차이가 생긴 이유를 생각해 보자.


먼저 하지 중장이 어떤 사람인지, 당시 공표된 약력을 살펴보자.


제20군사령관 존 R.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당년 51세 군인 중의 군인이요 전쟁을 가장 잘 아는 전형적 군인이다. 지휘관으로서의 냉정한 판단과 전선에서 항상 병졸들과 같이 있는 점은 부하병졸의 신임을 크게 사고 있다.

제1차대전시에는 육군대위로 독일군과 센트 미히엘 뮤스알공에서 싸웠고 이번 제2차대전에는 將官으로 가다르카나 뉴조르지아 뿌겐빌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하지중장은 일본군과 쩡글전투의 권위이다. 처음 가다르카달에 나타나기는 1942年 12月 큰 성공을 세우고 1943年 5月 소로몬島를 떠나 7月에 뉴조지아에 도착 이곳에서도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44年 3月에는 뿌겐빌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은 가장 맹열한 것이었으나 이를 격파하였다.

중장은 일생의 대부분을 군인으로 지냈으니 1917年에 정규군 육군소위가 되었고 4년간 육군성참모부에 근무하였고 陸軍大學, 參謀學校, 步兵學校, 化學戰學院 등을 졸업하였으며 航空部隊 戰術學校까지 졸업하였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장발이다.

그는 짧게 기른 회색 머리털을 갖고 있다. 그는 병졸에게 가장 길어서 2인치 이상의 머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유언비어를 엄중이 삼가케 하므로 그의 部下에는 流言이 없다. 그는 將官이 병졸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미국군인이 세계제일의 훌륭한 군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지난 6月에 沖繩에서 중장에 승진하였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11일)


“전쟁을 가장 잘 아는 전형적 군인” 하지 장군을 멋진 모습으로 부각시키려고 애쓴 글인데, 정치력이나 이해심을 돋보이게 할 여지는 없었던 모양이다.

 


한국 점령이 전투가 아니라 통치를 위한 것이라면, 전쟁만 아는 ‘전형적 군인’보다 정치도 아는 ‘참모형 군인’이 더 적당할 것이다. 중국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웨드마이어 장군이 더 적당하지 않겠냐는 논의도 있었는데, 결국 하지 같은 ‘전형적 군인’으로 낙점된 것은 한국 점령에 따로 정치력이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결과일 것이다. 맥아더 사령부뿐 아니라 미국 국무부에서도 한국은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한국 점령정책은 일본 점령정책에 부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소련과 미국 사이의 군대 성격의 차이도 작용했을 것이다. 소련 군대에는 정치장교의 역할이 컸다. 초기에는 정치위원(commissar)이 중대급 이상 각 부대에서 지휘관과 대등한 위치를 가진 시기도 있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 각급 부대에서도 ‘정위(정치위원)’는 지휘관에 버금가는 위치에서 큰 역할을 맡는다. 일반 장교의 정치교육도 서방의 군대보다 훨씬 비중이 크다. 소련 장군들 중에는 하지처럼 순진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을 것 같다.


이것은 군대가 국가의 군대이기 이전에 당의 군대이기 때문이다. 공산국가에서 당과 국가의 관계는 서방과 다르다. 북한의 헌법 11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1당 독재’라고 흉보는 교육을 받으며 컸지만, 이것은 국가와 정당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일 뿐이다.


며칠 전 안재홍의 성명에도 “정당 결성 문제에 있어서도 이상으로서는 전 민족 단일당에 있겠지만” 하는 대목이 있었다. 안재홍이 생각한 이상적 정당이란 국민의 모든 요구를 수렴하는 존재로서, 중국의 공산당처럼 국가사회의 ‘엘리트계층’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Posted by 문천
2017. 8. 12. 15:30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1950년대 후반, 전쟁의 여파가 덜 가셔서 그랬는지, 군대가 크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김경언이던가, 만화가가 "칠성이"라는 인기 캐릭터를 만들어 엄청 많은 만화를 냈는데, 그중에 "일병 칠성이", "상병 칠성이"에서 시작해 "대장 칠성이", "원수 칠성이"까지 계급 별로 한 권씩 그려 낸 연작이 생각난다. 이제 와 생각하면, 반공-전쟁 만화를 표방하면서 전쟁 중에 고속승진한 똥별들을 은근히 풍자하는 뜻이 있었는지도?

 

딱지놀이도 있었다. 일등병 밑의 "무등병"부터 시작해 대장인가 원수인가까지 그려진 딱지를 갖고 한 장씩 뽑아 붙이는데, 계급 낮은 쪽이 따먹힌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최고 계급 딱지가 무등병과 마주치면 잡힌다. 무등병 딱지는 모든 딱지에게 지고 한 딱지에게만 이기는 것이고, 최고 계급 딱지는 모든 딱지에게 이기고 한 딱지에게만 지는 것이다.

 

육군 대장이 "새까만 쫄병"들 함부로 다뤘다가 경 치는 꼴을 보니 공관병 중에 무등병이 하나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틀에 갇힌 폐쇄사회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밖으로 불거져 나오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40년 전 남의 소원수리 작성 도와줬다가 말년에 고생한 사연을 적은 일이 있다. http://orunkim.tistory.com/1424) 정말 모처럼 용꼬로 걸렸다.

 

문제된 박 대장을 보직해임 후 전역시키지 않고 수사를 진행하니까 본인이 빨리 전역시켜달라고 인사소청을 하고 행정소송을 하고 난리인 모양이다.(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5456) 군인이 군인 신분으로 저지른 일에 대한 심판을 민간인 신분으로 민간 법정에서 받고 싶어 저렇게 안달인 것을 보면, 군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이 꼭대기까지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고위 장성이 저런 행태를 보이는 군대를 진짜 군대라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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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