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8일의 소련 선전포고, 9일의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 이어 10일 일본 정부가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연합국에 통보했다. 단 하나 “천황의 통치권 계속”이라는 양해 사항을 붙였다.


11일에 미국 번즈 국무장관이 연합 4국을 대표해 일본으로 답신을 보냈고 이에 일본 정부는 14일 항복 통보로 답했다. 그 사이 사흘 동안 양측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보여주는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사흘 동안 일본 지도자들은 항복 여부를 저희끼리만 토론하고 있었을까? 연합국 수뇌부는 기한도 없이 일본의 항복 결정을 기다리고만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 사흘 동안 일본은 마지막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항복은 결정되었으나 언제 어떻게 항복하느냐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득실이 크게 갈라질 상황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3개월 전까지 독일을 상대로 함께 싸운 전우였지만, 적대관계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경쟁관계라는 사실이 그 사이에 이미 분명해졌다. 독일에서 누가 무엇을 챙길 지를 놓고 며칠 전까지 양국 정상이 포츠담에서 옥신각신했다. 이제 일본에서는 또 누가 무엇을 챙길 수 있을지, 일본이 항복하는 시점과 방법에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일본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는 당연히 최대한 너그러운 조건을 확보하는 것. 전쟁을 이끌어 온 자들이 지금 항복 문제도 결정할 위치에 있었다. 둘째는 소련보다 미국에게 운명을 맡길 것. 일본을 그 자리까지 이끌어 온 것은 자본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영토가 인접한 소련은 국가적 이해관계가 일본과 대립하기 쉬웠다.


너그러운 조건을 구질구질하게 열거하고 흥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10일의 문서에 ‘천황의 통치권’ 한 항목만을 상징적으로 표시했다. 패전 독일은 국체를 지키지 못했다. 일본 지도자들은 일본이 그보다 나은 대접을 받기를 바랐다.


이에 대한 연합국의 공식 답변은 “일본국정부의 형태는 포츠담선언에 遵하여 일본국 국민의 자유로 표명하는 의사에 의하여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천황제를 꼭 폐지한다는 말도, 꼭 존속시킨다는 말도 아니다. 상당한 점령기간이 지나 투표에 부친다면 일본인의 투표라 하더라도 점령국의 의지에 좌우될 여지가 크다. 요컨대 일본인들 하는 것 봐서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소련은 천황제의 폐지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연합국들이 미국을 지지하거나 순종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이 관철되었을 것이다. 일본인 자신의 의사에 맡긴다는 방침이 명분은 그럴싸하니까.


이 답신을 받아놓고 일본 지도자들이 미국과 흥정에 나서지 않았다면 직무유기다. 단둘이 거래할 경우 미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 있을지, 미국 국무부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챙겨줬을 것이다. 미국에게 돌아갈 이득 중에 일본을 너그럽게 처리할 때 이득이 더 커질 수 있는 측면은 특히 열심히 챙겨줬을 것이다.


731부대의 세균전 기술 같은 것이 큰 품목은 아니라도 전형적 흥정 대상으로 떠오른다. 그 기술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진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미국 담당자들에게 온갖 비밀자료를 다 보여주며 세일즈를 벌였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기술을 얻고 731부대 관계자들은 전범재판을 면제받고... 덤도 좀 있었을지 모른다.


가장 큰 품목은 물론 항복 시점이다. 소련이 지분을 키우기 전에 서둘러 항복하는 것. 그래서 전쟁에 패하고 항복하는 입장에서도 이 흥정만은 일본이 유리한 셀러즈마킷의 성격을 가졌을 것이다. 바이어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시한이 정해져 있는 흥정이니까.


오늘은 일기를 짐작으로 채워놓았다. 자료가 없으니까 짐작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사흘 동안 흥정을 벌이지 않고 멀뚱멀뚱 앉아 있기에는 미국과 일본 두 나라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이해관계가 너무나 많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이후 두 나라 관계의 전개를 봐도 항복 시점에서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상당한 수준으로 조율되어 있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