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님 어제부터 많이 바쁘셨죠? 어제 오후에도 3시에 경성방송국에 가서 연설방송을 하고 바로 휘문중학으로 건너와 군중에게 연설하셨죠. 그 연설을 들은 어느 중학생이 “운집한 시민들 앞에서 말할 수 없이 초라한, 어떻게 보면 걸인 같은 모습의 한 50대 중반의 신사가 해방된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고 회고한 것을 보았습니다. (송건호, <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 153쪽)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면서 차림에 너무 신경을 안 쓰신 것 아닙니까?


안: 내 풍채가 원래 신통찮아서 아무리 차려입어봤자 별 수도 없지만... 옷 갈아입을 틈은커녕 이틀째 잠도 못 자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에야 의자에 앉은 채로 눈을 잠깐 붙였습니다. 14일 밤 해방을 알고서부터 너무 좋아서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잠을 안 자도 졸리운 줄을 모르겠더니, 어젯밤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늙었나봅니다.


김: 세는 나이로 55세면 한창 일하실 나이인데, 늙으시다뇨. 하지만 몹시 피곤해 보이시기는 합니다. 건강에 별 문제는 없으신지요? 1943년 초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서 고생하면서 건강이 많이 상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안: 아, 홍원경찰서! 지독했습니다. 3-1운동 그 해부터 시작해 전후 8차, 연 7년간 옥중생활을 했으니 감옥살이에는 이골이 날 만한데도 홍원경찰서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두 분이 거기서 돌아가셨죠. 12월 20일에 끌려갔다가 석 달 만에 나왔는데, 한 달만 거기 더 있었어도 살아서 나왔을지 죽어서 나왔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그 때 팍삭 늙어버렸습니다.


김: 민족 지도자들 중에 몽양 선생과 선생님, 두 분이 가장 끝까지 옥고를 겪은 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건준 사업을 일본인들이 두 분께 부탁하면서 그 점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인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분들이라고.


안: 해방되던 날까지 고생한 분들이 숱하게 많죠. 특히 좌익 쪽에. 몽양이나 나는 나이도 있는 편이고 신문사 대표를 하던 사람들이니까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린 거죠.

몽양은 나보다도 다섯 살이나 연상인데, 그 때 들어가기는 하루이틀 상관으로 들어갔다가 나보다 넉 달이나 오래 붙잡혀 있었어요. 다행히 홍원경찰서처럼 끔찍한 데는 아니라서 때리거나 매달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출옥한 이튿날 찾아가 보니까 얼이 다 빠져 있더라고요. 늘 그렇게 씩씩하던 분이 아주 참혹한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총독부에서 우리에게 질서 유지 협조를 부탁한 것은 그런 상황을 터놓고 얘기해 왔기 때문이지요. 전쟁 막바지 그 엄혹한 상황에서 일본인 고관, 장군들에게 “너희들 전쟁 지면 어떻게 하냐? 대비책을 만들어놔야 하지 않냐?” 소리를 당당히 한 것은 우리 둘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긴 그 막판까지 감옥살이를 한 입장이니까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긴 하죠.


김: 전쟁에 질 가능성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반역죄에 걸릴 상황이었는데, 그런 말씀을 거리낌 없이 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일본인들이 기절하거나 발광하지 않았습니까?


안: “거리낌 없이”라고 한 것은 좀 과장이었습니다. 기절하거나 발광할 사람들한테 함부로 말하지는 않았죠. 원래 소심한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몽양 같은 호걸도 그 얘기 하는 데는 무척 조심했죠.

1943년 출옥 후 우리를 전향시키려고 자꾸 집적거리는데, 말도 안 통하는 조무래기들한테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하루하루 둘러대면서 지내다 보니까 안 되겠어요. 마침 경기도 경찰부장 오카 히사오 씨가 이해심도 있고 담력도 있는 사람이라서 마음먹고 한 번 이야기를 했더니 심각하게 받아들이더군요. 1944년 12월 초였습니다. 그 후로 그에게 전해들은 요인들이 의논을 청해 와서 몇 차례 자리가 있었습니다. 1945년 5월 하순 백운장에서 몽양과 함께 니시히로 경무국장 등 몇 사람을 만났을 때는 ‘민족대회’ 소집 제안 등 구체적인 방법까지 의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과정을 갖고 몽양과 나를 ‘친일’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친일이라면 백번이라도 합니다. 맞아요. 일본사람들 걱정해 주는 입장에서 꺼낸 얘깁니다. ‘꼭’ 패전할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만약’ 패전할 경우 어찌할 거냐고 걱정해 준 겁니다. 일본인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책이 조선사람들 피해도 줄이는 방향이 되도록 우리 의견을 알린 것입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 토론의 범위가 넓어지니까 거품을 물고 펄펄 뛴 자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헌병대 쪽에서요. 시골 집 습격 음모가 있다고 오카 부장이 알려줘서 마지막 몇 달은 서울 시내에서 숙소를 자주 옮겨가며 지냈습니다.


김: 패전 상황을 걱정해준 것이 ‘친일’이라면 정말 자비롭고도 용감한 친일이군요. 그런 데 어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지는 안 봐도 빤합니다. 자기 뒤가 구린 사람들이 남 걸고넘어지는 데 열심이죠.

민족 자주, 호양 협력, 마찰 방지의 3대 원칙을 두 분이 내세웠고, 일본인 요인들 중에도 그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있어서 항복 시점에 두 분의 협조를 요청한 것이었죠. 그래서 항복 선언에 바로 이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세우시게 된 것이고요.

이틀 지내시면서 전망이 어떠하신지? 어떤 어려운 점을 느끼시는지?


안: 시작 단계에서 섣불리 전망을 얘기할 일은 아닙니다만, 생각보다 어려운 점을 꽤 느낍니다.

첫째,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협조를 요청해 놓고도 자기네가 할 협조를 잘 안 해 줍니다. 무엇보다도,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아요. 총독부와 일본군이 어떤 조치를 취해 나갈지 계획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와의 협력관계에 대해 간부들 사이에 저항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건준 참여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데서 파생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온갖 허황한 소문이 떠돌고 있고,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좌익 사람들은 소련군이 진주할 것이라고 하고, 우익 사람들은 미군이 들어올 것이라고 하는 식이죠.

셋째로, 건준을 함께 하겠다고 모인 사람들도 전심전력으로 달려들지 않고 각자 다른 궁리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좌익 사람들. 15일 밤에 공산당 설립 모임이 있었다는군요. 일에 선후가 있는 것이지, 당파 만드는 일이 나라 세우는 일보다 급할 수 있습니까? 어젯밤 몇 사람과 앉았을 때 신간회 망치던 짓을 또 되풀이할 거냐고 따졌더니, 이번에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다짐하더군요. 두고 봐야죠.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