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SWNCC)에서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두 사람이 이날 밤 38선의 초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에 국무장관과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내게 될 사람들이지만 아직 대령급 실무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윗선에서 정해진 방침의 세부사항을 다듬었을 뿐이다.


미-소 양대국의 존재감은 2차 대전 진행 중에 드러났다. 연합국 진영 5대 강국이 유엔에서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지만 실세는 두 나라였다. 프랑스와 중국은 해방을 얻은 입장이었고, 영국도 양대 강국 덕분에 살아남은 입장이었다. 세 나라 모두 종전 시점에서 압도적 군사력과 생산력을 가지고 있던 미-소 두 나라의 눈치를 보는 입장이었다.


소련은 2차 대전 전체에서 큰 지분을 가진 나라였다.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독무대였지만 태평양 전역보다 유럽 전역이 더 중요한 전역이었고, 그곳에서 소련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소련은 유럽 전역에 집중하기 위해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계속하도록 다른 연합국들의 양해를 받고 있었다. 포츠담회담 뒤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서둘러 일본에 얼른 떨어뜨린 목적이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지분 확대를 제한하는 데 있었다는 해석이 많다. 정황으로 봐서 그럴싸한 해석이다. 원자폭탄의 실험 성공이 포츠담회담 개막 전날인 7월 16일이었고, 트루먼은 그 사실을 7월 25일에야 스탈린에게 알렸다고 한다. 8일간 매일 보며 회담을 진행시키는 동안 감추고 있었다는 것은 신무기의 존재를 소련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열쇠로 여겼다는 이야기다.


소련에게 알린 뒤 보름 내에 두 개의 폭탄을 터뜨렸다. 소련이 예정대로 일본과의 전쟁을 연 뒤 전쟁의 마무리 과정에서 자기 지분을 더 키울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원자폭탄 때문에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했고, 그로 인해 항복 시점에서 연합국의 점령 방침도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급작스럽게 점령 방침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원자폭탄의 존재는 소련의 입장을 적지 않게 위축시켰을 것이다.


일본의 항복이 몇 주일이라도 더 늦었다면, 그리고 원자폭탄의 존재가 소련의 입장을 위축시키지 않았다면 미국이 일본 본토를 통째로 점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if)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글은 역사가 아니고 일기니까. 그리고 이건 너무나 뻔히 눈에 보이는 일이다.


일본 점령의 독점은 미국에게 갑자기 떨어진 대박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아시아-태평양 연합군 총사령부가 점령의 주체였지만, 소련이 빠진 연합군 총사령부는 미국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을 소련이 양보할 경우 대가로 한국을 통째로 달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38선 제안에는 소련을 떠보려는 뜻이 있었던 것인데, 소련이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일본 방면으로는 쿠릴 열도와 사할린만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미국 관계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고 한다.


1943년 11월의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며 전후 처리 3개항을 발표했다. (1) 1914년 1차 대전 발발 이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도서들을 뱉어내고, (2) 만주와 대만을 비롯해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영토를 돌려주고, (3)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자유로운 독립국으로 만들 것.


카이로회담의 3개항은 일본제국을 일본열도로 돌려보낸다는 것인데, 한국은 돌려받을 임자가 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중국이 힘이 넘치는 사정이라면 보호국으로라도 돌려받겠다고 나설 입장이었지만 자기 앞도 가리기 힘든 형편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카이로회담 당시 한국을 어찌해야겠다는 아무 생각 없이 일본 영토를 깎아내기 위해 한국의 독립 방침을 세웠을 뿐이다. 미국 국무부가 장래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카이로회담 이후의 일이었다.


아무리 검토해도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그리 크게 인식되지는 않은 것 같다. 포츠담회담 직전까지도 미국 전쟁부 작전국(OPD)에서는 한반도의 미-영-중-소 4국 분할점령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포츠담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립 양상이 뚜렷해지고 원자폭탄의 등장으로 종전이 갑자기 닥쳐오면서 영국과 중국은 빠지고 미-소 두 나라가 서로 눈치를 살피는 상황이 되었다.


냉전의 공식적 기점은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이지만, 두 초강대국의 경쟁은 1945년 5월 독일 항복 이후 분명해지고 있었다. 러스크와 본스틸이 8월 10일 밤늦게까지 지도에 매달려 있었던 것은 일본이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밝혀 왔고, 이틀 전 일본에 선전포고한 소련이 이미 한반도에 진주하기 시작한 상황에 쫓긴 것이었다.


8월 10일 일본이 스위스와 스웨덴 공사관을 통해 연합국에 보낸 문서 내용은 8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이렇게 게재되었다.


“帝國政府에서는 항상 세계평화의 촉진을 希求하여 今次 전쟁의 계속에 의하여 齎來될 참화에서 인류를 免하게 하기 위하여 속히 전투의 종결을 祈念한다. 천황폐하의 大御心에 쫓아 이미 數週間前 당시 중립관계에 있던 소련방정부에 대하여 적국과의 평화회복을 위하여 알선을 의뢰하였는데 불행히 右帝國政府의 평화 招來에 대한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이에 帝國政府는 天皇陛下의 일반적 平和克服에 대한 御希念에 基하여 전쟁의 참화를 될 수 있는 한 속히 終止시키고자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帝國政府는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에서 미, 영, 중 三國政府 수뇌자에 의하여 발표된 후 소련정부의 참가를 본 공동선언에 든 조건을 右 선언은 천황의 국가통치의 대권을 변경하는 요구를 포함하여 있지 않은 了解下에 승낙함. 帝國政府가 右 了解에 있어서 그릇됨이 없음을 믿고 本件에 관한 명확한 의향이 속히 표시되기를 切望함.”


천황의 통치권 보전이 일본의 유일한 요구조건이었다. 이에 대해 연합국들은 이튿날 보낸 답신에서 “최종적으로 일본국정부의 형태는 포츠담선언에 遵하여 일본국 국민의 자유로 표명하는 의사에 의하여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고 하여 천황제 폐지 여부를 확정하지 않은 답신을 보냈고, 이를 14일에 일본이 받아들여 종전 합의에 이르렀다.

 


소련이 지분을 키우기 전에 서둘러 항복을 받아들이려는 미국의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소 간의 경쟁 양상을 꿰뚫어보는 전략가가 일본에 있었다면 조속한 항복의 대가로 관대한 정책을 미국에게 흥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진 것은 이처럼 일본 점령 방침을 놓고 판세가 출렁일 때였다. 한반도의 점령 가치는 일본에 비해 100분의 1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중견 실무자들이 한밤중에 만들어낸 분할점령안이 아무런 토론 없이 두 나라 사이에 결정되었다.


Posted by 문천

 

 

 

“뉴스위크 잡지에 발표된 바 포츠담 최후통첩을 발표하기 전에 스탈린이 三거두회의에 소개하였던 일본의 평화조건은 여좌하니

一. 아라사(러시아)와 일본 간에 평화를 계속할 것

二. 만주에서 일본이 퇴출하되 아라사(러시아)가 간섭치 말 것

三. 일본이 인도차이나, 범아(미얀마), 필리핀들에게 독립 주는 원칙을 승인할 것

四. 미국이 일본 내지에 돌입이나 점령하지 말 것

五. 조선과 대만은 미국에게 점령하기를 제공할 것”


 

8월 1일자 <국민보>(1913년 이후 하와이 교민단체에서 발행한 주간신문) 기사였다. 5월 초 독일 항복 후로 전세 역전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태평양 전선은 미군에게 모두 평정되어 일본 본토가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위 평화조건에는 종전을 간절히 바라는 일본의 태도가 드러나 보인다. 소련만은 끼어들지 말기를 바라고 본토를 점령하지 말아 달라는 것 외에는 무조건 항복이나 마찬가지다.


1854년 개항 이래 일본이 걸어 온 찬란한 성공의 길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전 세계 유색인종이 모두 침략과 지배의 대상이 되어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제국주의 강국으로 성장한 아시아 국가가 일본이었다. 개항 40년 만에 중국을 물리쳐 동아시아의 패권에 접근하고 그 10년 후에 러시아를 물리쳐 1류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면서 선망과 찬탄의 대상이 된 일본이었다.


파국의 출발점은 1940년 9월 베를린에서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서명한 추축동맹(Axis Pact)이었다. 그 동맹의 서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세계 모든 민족이 각자 차지할 만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지속성 있는 평화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일본,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과 대동아에서 각자의 노력을 지원-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관계된 민족들의 번영과 복지의 증진을 위해 설계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지키는 것이다.”


이 동맹을 맺을 때는 전쟁 상황이 추축국 진영에 한껏 유리할 때였다. 중립국 몇을 빼고는 전 유럽을 추축국 진영이 휩쓸어 영국을 고립시켜 놓고 있었다. 소련과 미국, 주전급 선수 둘이 아직 끼어들지 않고 있었는데, 추축 3국은 이 동맹을 통해 단결을 과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려 한 것이다.


동맹의 핵심은 “진행 중인 유럽전쟁과 중일전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국가가 동맹국을 공격할 때” 다른 동맹국들이 지원한다는 제 3조였다. 다만 제 5조에서 소련의 경우는 예외로 했다. 독일과 일본이 각각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41년 6월 소련과 독일이 개전한 뒤에도 소련과 일본 사이에는 종전 직전까지 불가침조약이 계속되었다.


일본은 1894~95년 청일전쟁 승리로 본격적 대륙 진출을 시작했다. 1904~5년 러일전쟁 승리로 대륙 침략의 발판을 넓힐 때 조선이 그 식민지가 되었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유럽 열강들의 경쟁이 둔화된 틈을 타서 만주를 먼저 탈취한 다음 1937년 전면적 중국 침략을 시작했다. 1940년까지 중국 본토의 태반을 석권한 상태에서 추축국 진영에 가담, 동남아시아의 연합국 식민지를 탈취함으로써 ‘대동아제국’ 건설의 꿈을 부풀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일본은 추축동맹이라는 한 차례 모험으로 근 백년간 쌓아 온 성공의 실적을 한 방에 날려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군부의 호전성과 모험주의가 일본인들을 참혹한 고통에 몰아넣고 일본의 국운을 망쳐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눈으로 보면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 이래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에게 그냥 놔둘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일본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치 한국이 일본에게 그냥 놔둘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미국에 대한 종속적 위치를 거부한 한 차례 몸부림이 태평양전쟁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지.


패전 후 결국 일본이 미국에 종속적인 위치에서 번영의 길을 걸어 온 결과를 보면 일본 군부의 도박이 국가 차원에서는 손해가 아니었던 것 같다.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국가의 힘을 한껏 과시한 것이 냉전의 보루로 미국의 낙점을 받은 결정적 조건 아니었겠는가. 국가로서 일본의 성공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대다수 국민이 고통을 겪었을 뿐이다. 국민이 국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Posted by 문천

포츠담. 독일제국의 출발점인 프러시아를 상징하는 도시. 그곳에서 연합군의 실세인 미국, 소련과 영국의 정상회담이 이 날 끝났다. 1943년 11월 28일~12월 1일에 열린 테헤란 회담, 1945년 2월 4~11일 열린 얄타 회담에 이어 세 번째로 세 나라 정상이 모인 자리였으나 이번에는 바뀐 얼굴이 있었다. 스탈린은 그대로였지만 미국은 지난 4월에 죽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대신해 트루먼이 왔고, 총선을 앞둔 영국의 처칠 수상은 유력한 후임자인 애틀리 부수상과 함께 왔다가 7월 28일에 선거 결과를 확인하고 대표 자리를 넘겨줬다.

 

바뀐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얄타 회담 때 항복이 임박해 있던 독일은 5월 8일에 항복했고, 이제 일본만이 남아 있었다.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은 회담이 진행 중인 7월 26일에 먼저 발표했다. 이번 회담의 주 의제는 평정된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관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관심의 초점은 소련이 어떤 전리품을 챙기느냐 하는 데 있었다. 테헤란 회담 당시에는 소련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폴란드의 동부 영토를 소련으로 떼어가고 동유럽을 공산화하는 스탈린의 구상이 이 회담에서 승인받았다. 서부전선은 영국을 겨우 지키고 있을 뿐, 동맹군의 주력에 거의 소련 혼자 맞서고 있을 때였으니 누구도 스탈린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 후 노르망디 상륙으로 서부전선도 한 몫 하게 되면서 서방국들은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 마음이 다르게 되었다. 특히 처칠은 소련이 유럽 대륙의 큰 세력으로 일어나는 것을 극히 꺼렸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처칠에게 동조하지 않고 소련의 몫을 그대로 존중했다. 냉전 시작 후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속아 넘어간 ‘어리석음’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을 ‘어리석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냉전의 상황에 얽매인 관점 같다. 우리가 본 많은 영화는 2차 대전에서 미국군과 영국군의 활약을 화려하게 보여준다. 모두 냉전시대 미국의 관점이다. 실제로 그 전쟁의 가장 큰 주인공은 소련이었다. 피해자로서도, 승리자로서도. 그 전쟁으로 인한 전 세계 인명 피해의 절반 이상을 소련이 입었다. 국토의 파괴도 제일 심했다. 그리고 종전 때까지 전쟁의 주 무대는 동부전선이었다. 루즈벨트는 독일 항복 보름 전 죽을 때까지 소련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것뿐이었다. 똑같이 이기적인 스탈린과 처칠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그는 자임했다.


일본 항복을 1주일 앞두고 소련이 선전포고한 것을 기회주의적 태도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2차 대전 전체 흐름을 놓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테헤란 회담 당시에 독일의 주력군을 혼자 감당하고 있던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지킬 필요가 있었고, 독일 항복 3개월 후 일본 공격에 참여하기로 미국과 영국의 양해를 얻었다. 그 며칠 전 장개석이 루즈벨트, 처칠과 함께 동아시아-태평양 문제를 의논한 카이로 회담에 스탈린이 참석하지 못하고 테헤란 회담을 따로 열어야 했던 것도 일본에 대한 소련의 입장 때문이었다.


독일 항복 후 두 달여가 지난 7월 17일 포츠담 회담이 시작될 때 트루먼은 전임자 루즈벨트보다 인색한 협상자였다. 그리고 상대를 위축시킬 새로운 무기를 그는 가지고 있었다. 진짜 엄청난 무기였다. 원자폭탄.


회담 시작 바로 전날 뉴멕시코의 시험 폭발이 성공했다. 트루먼은 이 무기를 일본 상대로 사용할 방침을 처칠과 합의해 놓은 다음 7월 25일에야 스탈린에게 이 무기의 존재를 밝혔다. 그 이튿날 발표된 대 일본 최후통첩 ‘포츠담선언’에서는 무조건 항복 요구에 불응할 경우 “신속하고 철저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를 명시해서 위협했다. 새 무기의 존재를 과시하는 듯한 문구였다.


일본에서 과연 핵폭탄 사용이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필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이니 어느 쪽으로도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미국에게 새 무기를 확실하게 데뷔시키고 싶은 강한 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스탈린을 겁주기 위해서.


아무리 굉장한 무기가 있더라도 실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가치가 제한된다. 그런데 원자폭탄 같은 무차별적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실전에 쓴다는 것은 웬만한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다. 일본 항복 전의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다시 기회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원자폭탄 이야기를 듣고 스탈린이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며 트루먼은 (그리고 처칠도)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그 후 소련은 이란, 터키, 베를린 등지에서 서방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줄줄이 양보했다. 그런데 불과 4년 후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추격이었다. 원자폭탄을 믿고 탱자탱자하던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고, 매카시선풍이 일어났다. 소련 해체 후 KGB 비밀문서에서 소련이 스파이활동을 통해 미국 기술을 빼내 온 사실, 포츠담 회담 이전에 스탈린이 원자폭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그 스파이들은 매카시선풍에 희생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원자폭탄 사용 방침 합의가 포츠담 회담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