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가보다 천하를 생각할 때

 

오늘날 어느 나라에서나 ‘국익(國益)’을 ‘공익(公益)’과 거의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이 점을 반성하기 위해 국익에 관한 맹자와 양혜왕의 대화를 되새겨 본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선생께서 천리를 머다 않고 오셨으니 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지신 것이겠지요.” 할 때 맹자가 “임금께서는 왜 꼭 이로움[利]을 말씀하십니까. 어질음[仁]과 옳음[義]이 있을 따름입니다.” 대답한 장면이다.

 

현대인은 이 이야기에서 맹자의 비현실적 도덕주의를 읽는다.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도덕적 가치를 현실적 국익에 앞세우는 자세를 보며 “역시 어수룩한 시절이었어.” 생각한다. 하지만 맹자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문제들이 근년에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 환경 오염, 자원 한계, 핵 위협, 경제 불안 등. 인민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어질음과 자연과 잘 어울리려는 옳음이 경제적 이익에 밀려나기 때문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고 작게 끝나야 할 일이 커지는 것이다.

 

맹자가 스승 자사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로 무엇을 앞세워야 합니까?” 물었더니 “먼저 이롭게 해주느니라.” 대답한 일이 있다. “임금의 백성을 가르침이 어질음과 옳음에 있을 뿐인데 어찌 꼭 이로움이겠습니까?” 맹자가 캐묻자 자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질음과 옳음도 사실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수단이니라. 위에서 어질지 아니하면 아래에서 자기 자리를 얻지 못하고 위에서 옳지 못하면 아래에서 속이기를 즐겨하게 될 것이니, 그 이롭지 못함이 크지 않은가. 그러기에 <주역>에 이르기를 ‘이로움은 옳음의 어울림’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롭게 쓰고 몸을 편안히 함은 덕을 받드는 길’이라 하였으니, 이 모두 이로움의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仁義 固所以利之也 上不仁則下不得其所 上不義則下樂爲詐也 此爲不利大矣 故 易曰 利者 義之和也 又曰 利用安身 以崇德也 此皆利之大者也)

 

스승인 자사는 이로움의 중요성을 앞세웠는데, 제자인 맹자는 후에 양혜왕에게 이로움을 앞세우지 말라고 윽박지른 것이다. 맹자가 자사의 가르침을 버린 것일까? 뒷날 사마광은 이렇게 풀이했다.

 

“자사와 맹자의 말은 같은 것이다. 무릇 어진 자라야만 어질음과 옳음의 이로움을 알고 어질지 않은 자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맹자가 양혜왕에게 대답함에 바로 인의를 말하고 이로움을 말하지 않은 것은 말하는 상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子思孟子之言 一也 夫唯仁者 爲知仁義之利 不仁者 不知也 故 孟子之對梁王 直以仁義而不及利者 所與言之人 異故也)

 

자사와 맹자 같은 프로선수끼리는 인의와 이익의 미묘한 선후관계를 거리낌 없이 논할 수 있지만 양혜왕 같은 아마추어에게는 정확한 대답보다 명확한 대답이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 자사가 이로움의 중요성을 말한 것은 정치의 목적이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있다는 원론이다.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 인의를 앞세워야 한다는 데는 자사와 맹자의 생각이 같다. 목적이어야 할 이로움에 방법에서부터 매몰된다면 그 이로움은 공익(公益) 아닌 사익(私益)이 될 위험이 크다. 천하의 이로움보다 특정 국가의 이로움이 되고 백성의 이로움보다 위정자의 이로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익을 앞세우지 말라는 맹자의 말씀을 우활한 것으로 현대인이 보는 까닭은 근대적 국민국가의 현상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근대세계에서는 ‘국익’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맹자는 ‘국익’도 공익보다 사익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자기 나라의 국익에 지나치게 매진하는 것이 천하의 공익을 해칠 수 있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제국주의시대에 이르기까지 근대세계는 국익 추구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세상이었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며 국익을 넘어선 ‘세계질서’를 위한 노력의 필요성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20세기 후반에 자원과 환경 문제들이 부각됨에 따라 더욱 절실해졌다. 자오팅양의 <천하체계>에는 국가를 최종 단위로 여기던 근대 정치철학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대목이 있다.

 

“세계에서 중국이 공헌할 수 있는 적극적 의미는 새로운 형태의 대국, 세계를 책임지는 대국, 세계사에 출현한 갖가지 제국과 아주 다른 대국이 되는 것이다. 세계를 책임지는 것은 단지 자신의 국가에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론에서 중국 철학의 관점이고 실천에서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천하’를 정치/경제적 이익에 관한 분석 단위로 삼아 문제를 분석하여 서양의 민족/국가의 사유 방식을 뛰어넘는 것이며, 세계를 책임지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새로운 세계 이념과 세계 제도를 창조하는 것이다. 세계 이념과 세계 제도는 역사적으로 줄곧 결여되었던 이 세계의 가치관이자 질서였다. 일찍이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과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에는 지금까지 모두 국가 이념만 존재했다. 따라서 모두 자국의 이익만 고려했기 때문에 세계를 관리하는 측면에서 영국과 미국은 지금까지도 정치적인 합법성도 없었고 특히 철학적인 합법성도 없었다.”

 

맹자가 ‘인의’를 앞세운 것은 공익과 사익의 판별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의에 어긋나는 이익은 사사로운 이익일 뿐이며 천하의 공익에 해로운 것이다. 양혜왕이 이익을 앞세울 때 자기 한 몸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말도 되지 않는 암군(暗君)이다. 자기 나라 전체의 이익을 꾀할 정도의 명군(明君)이라는 가정 하에, 이익을 앞세우지 말 것을 맹자는 권했다. 그 나라의 국익을 지나치게 추구하다 보면 천하의 공익이 훼손될 수 있으니, 인의의 실천에 힘을 쏟으며 그 결과로 이익이 저절로 생겨나게 하라는 것이었다.

 

 

2. 투쟁보다 협력을 생각할 때

 

1990년대 초, 동유럽 공산권과 소련의 붕괴 등 세계정세의 구조적 변화 앞에서 미국 사회과학자 두 사람의 담론이 세계를 휩쓸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의 담론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후쿠야마의 이야기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에 입각한 담론이 아니라 역사의 단선적 발전에 대한 근대적 믿음을 ‘미국 자본주의 승리’에 뒤집어씌운 나팔수 노릇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의 행로가 어지러워지면서 후쿠야마의 담론은 다시 거론할 가치가 없게 되었다.

 

헌팅턴의 담론은 현실의 관찰에 근거를 둔 것이므로 아직도 음미할 여지가 남아있다. 냉전시대에 진영 논리에 갇혀있던 문명의 잠재적 역할을 냉전 해소 직후의 몇 개 국지적 분쟁에서 읽어낸 것은 훌륭한 통찰력이다. 그러나 그 또한 문명 간의 관계 전개를 “충돌”로만 본 것은 근대적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한 한계였다.

 

후쿠야마와 헌팅턴의 담론이 풍미하던 1990년대 중엽까지 월러스틴 등의 세계체제론은 사회과학계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파탄이 드러나는 데 따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확립되면서 근대자본주의와 다른 경제발전 경로까지 밝히고 있다. 프랑크의 <Reorient>(1998)와 포머런츠의 <The Great Divergence>(2000)가 새로운 시야를 열었고, 아리기의 <Adam Smith in Beijing>(2007)은 더 면밀한 시각을 확보했다.

 

세계체제론의 확장에 따라 근대자본주의를 문명발전의 유일한 진로로 보던 믿음이 무너지고, 그 믿음에 얽혀 있던 근대적 세계관도 퇴조하고 있다. 원자론에 입각한 근대적 세계관은 물질세계가 독립적 원자로 구성된 것처럼 인간세계도 독립적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사회의 조직도 독립적 국가를 위주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간 것이다. 헌팅턴이 장래의 세계구조에서 문명권의 역할을 떠올리면서도 그 사이의 관계를 “충돌”로만 본 것은 그 습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19세기 초에 돌턴이 발표한 원자론은 19세기 유럽 사상계를 지배했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득세하고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도 원자론의 틀에 맞춰 형성되었다. 19세기가 끝나기 전에 원자론은 물리학계에서 힘을 잃었지만 사상계로 번진 원자론의 여파는 20세기까지 계속되며 세계로 퍼져나갔다. 19세기에 구축된 자본주의 세계체제도 20세기까지 세계를 지배했다. 독립주권을 기반으로 한 국가체제도 마찬가지였다.

 

물질세계나 인간세계나 원자론적 원리와 유기론적 원리가 어울려 작용한다는 것은 직관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안정성을 가진 사회조직은 이 두 가지 원리를 함께 작동시킨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같은 근대적 조직 원리는 원자론에 치우쳐서 안정성에 한계를 가진 것인데, 산업혁명 이후 급격한 생산력 발전의 배경 위에서 일시적으로 성립한 체제다. 경쟁을 제1원리로 삼는 국가체제도 마찬가지다. 생산력 발전의 한계에 부딪친 21세기 상황에서는 유기론적 원리의 보강이 필요하다. 중국 지도부가 근년 제기해온 “화해(和諧)세계” 구호에 이 필요에 부응하는 측면이 있음을 ‘1帶1路’ 사업의 진행방법에서 알아볼 수 있다.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에 따라 경쟁과 대결 위주의 지속성 없는 국제관계가 전개된 사례는 전국시대 말기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나타난 바 있다. 낭비적 전쟁을 최소화하는 춘추시대 이래의 전통을 뒤집고 진나라가 이 정책을 채택한 것은 철기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 발전 덕분이었다. 잉여생산력 소화를 위해 전쟁의 대형화를 추구한 이 노선은 기원전 3세기 초 진 소양왕에게 채택되어 기원전 2세기 말 한 무제의 흉노 원정까지 계속되었는데,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세계적 전쟁시대와 방불하다.

 

국가 간의 맹목적 경쟁과 대립을 억제할 필요는 1차대전 때부터 인식되어 국제연맹과 국제연합 등을 통해 대립의 완화가 시도되어 왔지만 그 성과는 미미하다. 앞에 인용한 자오팅양은 근대 정치철학에 ‘세계정치’ 개념이 취약한 점을 지적했는데, 구체제의 관성 속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 기득권세력의 반동적 저항이 최근까지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효과를 거둬온 것이다. 근년 들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구체제 핵심국가들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은 이 저항이 마지막 한계에 도달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중국과 한국은 긴 역사를 통해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서로 뒤얽힌 관계를 펼쳐왔다. 19세기 후반 ‘서세동점’ 상황에서 강요된 ‘만국공법’ 체제는 이 특별한 관계를 부정하고 표준적 국제관계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강요된 조건으로 인해 두 나라는 이웃 간의 신뢰와 협력을 통해 혜택을 나눌 기회를 빼앗겼다. 국교가 수립되고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외세의 요구에 따른 불편함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사드’ 배치 문제에서 확인한다.

 

 

3. 잃었던 시간을 되찾을 때

 

근대세계에서 역사학은 많은 일자리를 품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그 일자리는 대개 국가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활동 목적을 국익에 맞추라는 압력을 일반적으로 받게 된다. 이 압력의 노골성과 변덕스러움은 상황에 따라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지만, 완전한 무압력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맥밀런은 <The Uses and Abuses of History>에서 역사학이 정체성 확보와 강화에 이용되는 역할을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는 ‘상상의 공동체’를 강요하는 수단이다. 예를 들면 민족주의자들은 자기 민족이 ‘태곳적’부터 아득한 곳에서 늘 존재해왔다고 입맛대로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떤 집단을 조사해 봐도 정체성은 과정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집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내적 발전, 종교적 각성, 외적 압력에 따라 정체성을 규정하고 다시 규정한다.”

 

‘상상의 공동체’가 나왔으니 ‘발명된 전통’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과거가 현재를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만들어내는 전도된 현상이 전통의 발명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표현처럼, 역설적이게도 ‘민족주의는 현대의 것이지만 자기 스스로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민족주의를 먹여 살리고 있는 역사는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이용한다. 그것들 중에는 대개 사실인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민족이 오랜 세월 온전하게 존재해왔다고 확인시키거나 민족이 앞으로도 존속하리라는 희망을 심어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오는 러시아인들의 재미있는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과거를 지닌 나라에 살고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실감나는 말일 것이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난 11월 7일은 소련시대 국경일이었다. 옐친은 이 기념일을 없애고 싶었지만 공휴일을 없애 서민들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만 ‘화합과 화해의 날’로 바꿨다. 푸틴은 2005년 그 날짜를 당겨 11월 4일을 ‘국민통합일’로 지정했다. 현재의 정치상황이 과거의 기념일을 바꾼 것이다. 한국의 건국절 논란이나 중국에서 악비(岳飛)에 대한 평가의 추이를 보면 과거를 예측하기 힘든 것은 러시아인들만이 아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끝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말이 있다. 많은 역사학도의 마음을 설레게 한 이 말이 근대적 역사관의 큰 질곡 하나를 담은 것임을 나는 근년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과거’를 왜 ‘현재’와 격리된 실재로 세워야만 하는 것인가?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가 카 자신에게도 석연치 않았던 모양이다.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그의 근대적 관념 속에서 ‘현재’란 과거와 미래 사이를 구분하는 점으로, 실체가 없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래서 자기가 뜻한 것은 “미래와 과거 사이의 대화”이며, 역사가의 상상력이 미래의 역할을 맡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관계를 카처럼 보는 데 나는 동의하지 않으며, 카의 관점은 근대인의 오만을 표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며 인간의 인식능력이 무한히 발전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니 역사학의 과학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도 시간에 대해, 진보에 대해, 그리고 역사에 대해 카와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을 가진 역사학도에게 나는 의미있는 작업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을 갖고는 과거와의 스킨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현대의 역사산업에서는 재생산된 현재가 역사학의 탈을 쓰고 시장을 지배했기 때문에 카와 같은 관점이 유행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근대역사학은 종전보다 정치적 무기로서의 기능을 더욱 강화했다. 민족과 문명들 사이의 접촉이 늘어난 상황 때문이었다. 국민국가들은 국민에게 민족의 영광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역사’를 경쟁적으로 개발했고, 이 경쟁에 ‘과학성’이 동원되었다. 그래서 근대역사학은 유사과학(pseudo-science)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 성격을 더욱 강화한 것이 계급투쟁을 제창한 유물사관이었다. 20세기의 한국사 서술은 일본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출발했다. 과학성을 위장한 식민사관이 1945년까지 학계를 지배한 것은 물론이고, 이에 반발하는 민족사관 역시 이 시대배경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한국의 영광’을 외치는 역사 담론 중에는 과거 ‘일본의 영광’을 부르짖던 제국사관의 틀을 안팎만 뒤집어 그대로 쓰는 것이 많다. (...) 내가 잘나기 위해 남을 깎아내려야 하는 계량적 사고는 사이비 과학성의 등에 업혀 근대역사학을 삭막한 싸움터로 만들어왔다.”

 

카의 시간관을 배척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시간관을 가졌냐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확실한 대답이 없다. 사람마다 얼마간씩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나 자신도 명확히 단정하지 못하는 점들이 있다. 그러나 카와 다른 점을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과거는 현재와 격리될 수 없고, 현실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개인으로서 내가 과거에 겪은 일을 지금의 나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사회도 과거의 축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중국과 한국의 관계도 나는 이 생각 위에서 바라본다. 한국에게 지금 최대의 교역 상대국으로서의 중국, 적대국 “중공오랑캐”로서의 중국, 항일운동의 동지로서의 중국, 조공 대상국으로서의 중국, 문명 전수자로서의 중국, 역사의 고비고비에서 뒤얽혔던 이웃으로서의 중국, 모두 현실 속의 한-중 관계를 구성하는 부분들이다. 그 전체를 보기 어렵게 만드는 장벽이 하나 있다. 19세기 후반 만국공법 전래 이후 동아시아인들이 길들여진, 국가를 완전한 독립체로 보는 관념이다. 이 관념에 얽매여서는 19세기 이전 두 나라의 관계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두 나라 관계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꼭 생각해야 할 점이다.

Posted by 문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8월을 넘기지 못하고 심각한 파탄을 드러냈다. 8월 31일 위원장 여운형이 사퇴했고, 뒤이어 부위원장 안재홍과 집행부 간부들도 내부 혼란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며칠 후 35인 간부회의에서 지도부의 재신임이 의결되었지만 다시 며칠 되지 않아 건준 일부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자 건준은 해산해 버리고 만다.


건준의 좌절을 놓고 좌익의 책임이니 우익의 책임이니 따지는 얘기가 많았는데, 나는 총독부에 근본적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총독부가 진심으로 협력할 생각 없이 건준을 이용하려 들기만 했기 때문에 건준의 입지가 없었던 것이다.


구체적 갈등의 사례야 수없이 많지만, 우발적 사건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근본적 문제는 총독부가 건준에게 ‘질서 유지 협력’을 바라는 대신 그에 상응한 보상을 거부한 데 있다.


총독부는 16일 안재홍의 방송 직후 그 내용 중에 ‘질서 유지’를 넘어서는 건국 사업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항의하며 건준 해산을 들먹였다. 20일에는 경기도 경찰부장이 모든 정당, 단체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건준도 이름에서 ‘건국’을 뺄 것을 요구했다. 그 동안 일본 군경과 건준 치안대 사이의 충돌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15일 아침 여운형이 엔도 정무총감과 만났을 때, 두 사람이 계약서 쓰고 도장 찍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이러한데, 지나친 혼란은 우리에게나 당신네에게나 피차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니 함께 도와가며 혼란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합시다.” 하는 원칙에 공감을 확인하고 약간의 구체적 방법을 의논했을 것이다. 8월 16일 휘문중학교 연설에서 여운형이 발표한 5개항은 의논한 내용 중 대중에게 발표하기 적합한 일부를 정리한 것이었을 것이다.


거래란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총독부는 ‘질서 유지 협조’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총독부가 아직 형식적 통치권과 실질적 무력을 갖고 있지만 정권 이양과 무장 해제 방침은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질서가 무너지면 총독부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총독부가 여운형과 건준을 ‘질서 유지’만을 위해 월급 주고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운형과 건준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한국인에게 뭔가 도와주는 일이 있어야 했다.


도와줄 일이 뭐가 있었을까? 건국 준비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총독부와 일본군의 순조로운 퇴출을 도와주는 작업은 그 자체가 건국 준비의 뜻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잘 해내는 주체는 많은 한국인의 신뢰를 모으지 않을 수 없으니까. ‘질서 유지’를 적극적으로 하도록 건준에게 부탁하는 것이 바로 총독부가 건준과 한국인을 도와주는 길이었다.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작업을 맡는 것이 정치 주도권을 쥘 좋은 기회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도 어느 시점에서 누구에게 항복하느냐를 놓고 흥정 밑천을 삼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항복선언 시점에서 누구에게 협조를 청하느냐 하는 것이 총독부가 쥔 칼자루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선택에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다. 친일파의 딱지가 너무 선명한 사람에게 맡겨서는 한국인을 설득할 수 없었다. 명망 있는 인물이면서 친일파가 아니고, 그러면서도 총독부의 순조로운 퇴출에 동의할 만한 대국적 식견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여운형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여운형과 건준의 성공을 도와주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건준이 한국인의 신뢰를 모으고 지키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지휘체계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건준이 요구하는 데 따라 총독부와 일본군이 필요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도와줄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질서 유지’의 범위를 좁게 잡고 그를 넘어서는 ‘건국 사업’을 막으려고만 들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이 송진우를 건준에 끌어들이기 위해 공들인 데는 송진우와 연계된 자본가 그룹으로부터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받으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송진우가 움직이지 않자 민중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26일 전선직역자치조직본부의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좌익에게 건준을 맡기는 길이었다.


건준은 발족 직후부터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유지자대회를 열려고 노력했으나 어수선한 가운데 지연되고 있었다. 송남헌은 <해방 3년사 I>(까치 펴냄) 45쪽에서 박헌영 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이 지연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18일에 여운형이 괴한들의 피습을 받아 1주일간 활동을 못하게 되어 대회 개최가 계속 늦어졌다.


25일에 건준 지도부와 우익 인사들이 만나 전국유지자대회 대신 확대위원회를 열기로 하고 62명 확대위원 명단을 작성했다. 그런데 그 날 밤 건준 측에서 일방적으로 73명을 추가해 발표하는 바람에 건준에 협력하려던 우익 인사들까지 배신감을 느끼고 돌아서게 되었다. 여운형이 퇴원하던 25일까지는 공산주의자들이 건준의 요충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붙이는 9월 1일자 <매일신보> 기사의 명단이 25일에 작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일에 열려던 이 회의도 결국 열리지 못하고 말았다.


建國準備委員會에서는 2일 오후 5시부터 京城府 安國町 徽文小學校 준비위원회사무실에서 同會 위원선정 後 제1회 위원회를 개최하기로 되어 1일 그 안내장을 발송하였다. 이날 위원회에서는 그동안 정세의 성숙과 사업발전에 따라 널리 각계 각층으로부터 진보적인 의사를 대표할 만한 인물을 망라하여 한층 더 강력한 지도부를 확립할 터이며 따라서 이 준비위원회 중앙집행부 전원은 지난 8月 31日 총사직장을 呂위원장에게 제출하였으므로 呂위원장 통솔하에 신중앙집행위원 선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당면한 요구를 협의하게 될 터인데 안내장을 받은 이는 다음의 135名이다.

吳世昌 權東鎭 呂運亨 許憲 安在鴻 洪命憙 曹晩植 金性洙 明濟世 金恒圭 權泰錫 李仁 鄭栢 趙炳玉 李斗烈 李增林 崔奎東 白寬洙 金度演 李克魯 崔鉉培 趙東祐 李英 鄭在達 崔善益 尹洪烈 趙漢用 都宥浩 李萬珪 金重華 金丙淑 元世勳 朴瓚熙 吳鳳善 李裕弼 李康國 崔容達 具滋玉 金敎英 李英學 金銘洙 方應謨 兪億兼 孫在基 李奎甲 金俊淵 李如星 鄭寅普 白南雲 崔益翰 徐世忠 崔益煥 李珖 李昇馥 劉錫鉉 咸明燦 李鍾洙 金若水 鄭求忠 咸尙勳 宋鎭禹 張德秀 梁在厦 洪起文 鄭烈模 尹亨植 李容卨 高景欽 洪增植 梁柱三 洪永傳 李寬求 金良瑕 徐光卨 李義植 朴文圭 金觀植 康基德 鄭世容 鄭雲永 玄東完 李源赫 許永鎬 朴明煥 金振國 羅泰彙 金光鎭 崔謹愚 張埈 吳夏英 崔容馥 李圭鳳 鄭雲海 朴衡秉 洪南杓 金成壽 吳德淵 全永澤 金法麟 李□洙 尹炳浩 李鍾翊 金世鎔 李丙學 鄭宜植 張權 鄭珍容 李觀述 金台俊 金炳燦 李瑄根 金利龍 崔允東 白南薰 金錫璜 金良洙 朴儀陽 朱義國 李佑植 李鏞 鄭一亨 徐相日 具汝順 李鳳洙 蔡奎恒 高志英 朱鍾宜 金弘鎭 朴秉源 韓林 金性業 韓雪野 崔星煥 李相薰 李東華 鄭和濬 以上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여운형이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꼴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놓은 것이 총독부의 협조 거부를 넘어서는 건준 박해였다. 건준이 총독부의 적극적 협조를 받고 있었다면 한국민주당으로 나타날 송진우 일파가 그토록 냉담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건준이 무기력하게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대신 좌우익 간의 공개적 경쟁의 장이 되었을 것이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협조를 부탁하면서도 실제로는 건준의 협조를 요긴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는 항복선언 후 두 주일이 지난 29일에야 일본에 상륙했지만, 그 두 주일 동안 일본 정부와 맥아더 사령부 사이에 온갖 의논이 벌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본국 승인을 받지 않은 맥아더 취향의 통치노선까지도 드러나고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정보의 일부는 조선총독부에도 계속 전파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건준의 협력에 대한 총독부의 필요는 계속 줄어들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김: 선생님 어제부터 많이 바쁘셨죠? 어제 오후에도 3시에 경성방송국에 가서 연설방송을 하고 바로 휘문중학으로 건너와 군중에게 연설하셨죠. 그 연설을 들은 어느 중학생이 “운집한 시민들 앞에서 말할 수 없이 초라한, 어떻게 보면 걸인 같은 모습의 한 50대 중반의 신사가 해방된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고 회고한 것을 보았습니다. (송건호, <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 153쪽)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면서 차림에 너무 신경을 안 쓰신 것 아닙니까?


안: 내 풍채가 원래 신통찮아서 아무리 차려입어봤자 별 수도 없지만... 옷 갈아입을 틈은커녕 이틀째 잠도 못 자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에야 의자에 앉은 채로 눈을 잠깐 붙였습니다. 14일 밤 해방을 알고서부터 너무 좋아서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잠을 안 자도 졸리운 줄을 모르겠더니, 어젯밤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늙었나봅니다.


김: 세는 나이로 55세면 한창 일하실 나이인데, 늙으시다뇨. 하지만 몹시 피곤해 보이시기는 합니다. 건강에 별 문제는 없으신지요? 1943년 초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서 고생하면서 건강이 많이 상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안: 아, 홍원경찰서! 지독했습니다. 3-1운동 그 해부터 시작해 전후 8차, 연 7년간 옥중생활을 했으니 감옥살이에는 이골이 날 만한데도 홍원경찰서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두 분이 거기서 돌아가셨죠. 12월 20일에 끌려갔다가 석 달 만에 나왔는데, 한 달만 거기 더 있었어도 살아서 나왔을지 죽어서 나왔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그 때 팍삭 늙어버렸습니다.


김: 민족 지도자들 중에 몽양 선생과 선생님, 두 분이 가장 끝까지 옥고를 겪은 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건준 사업을 일본인들이 두 분께 부탁하면서 그 점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인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분들이라고.


안: 해방되던 날까지 고생한 분들이 숱하게 많죠. 특히 좌익 쪽에. 몽양이나 나는 나이도 있는 편이고 신문사 대표를 하던 사람들이니까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린 거죠.

몽양은 나보다도 다섯 살이나 연상인데, 그 때 들어가기는 하루이틀 상관으로 들어갔다가 나보다 넉 달이나 오래 붙잡혀 있었어요. 다행히 홍원경찰서처럼 끔찍한 데는 아니라서 때리거나 매달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출옥한 이튿날 찾아가 보니까 얼이 다 빠져 있더라고요. 늘 그렇게 씩씩하던 분이 아주 참혹한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총독부에서 우리에게 질서 유지 협조를 부탁한 것은 그런 상황을 터놓고 얘기해 왔기 때문이지요. 전쟁 막바지 그 엄혹한 상황에서 일본인 고관, 장군들에게 “너희들 전쟁 지면 어떻게 하냐? 대비책을 만들어놔야 하지 않냐?” 소리를 당당히 한 것은 우리 둘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긴 그 막판까지 감옥살이를 한 입장이니까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긴 하죠.


김: 전쟁에 질 가능성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반역죄에 걸릴 상황이었는데, 그런 말씀을 거리낌 없이 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일본인들이 기절하거나 발광하지 않았습니까?


안: “거리낌 없이”라고 한 것은 좀 과장이었습니다. 기절하거나 발광할 사람들한테 함부로 말하지는 않았죠. 원래 소심한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몽양 같은 호걸도 그 얘기 하는 데는 무척 조심했죠.

1943년 출옥 후 우리를 전향시키려고 자꾸 집적거리는데, 말도 안 통하는 조무래기들한테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하루하루 둘러대면서 지내다 보니까 안 되겠어요. 마침 경기도 경찰부장 오카 히사오 씨가 이해심도 있고 담력도 있는 사람이라서 마음먹고 한 번 이야기를 했더니 심각하게 받아들이더군요. 1944년 12월 초였습니다. 그 후로 그에게 전해들은 요인들이 의논을 청해 와서 몇 차례 자리가 있었습니다. 1945년 5월 하순 백운장에서 몽양과 함께 니시히로 경무국장 등 몇 사람을 만났을 때는 ‘민족대회’ 소집 제안 등 구체적인 방법까지 의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과정을 갖고 몽양과 나를 ‘친일’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친일이라면 백번이라도 합니다. 맞아요. 일본사람들 걱정해 주는 입장에서 꺼낸 얘깁니다. ‘꼭’ 패전할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만약’ 패전할 경우 어찌할 거냐고 걱정해 준 겁니다. 일본인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책이 조선사람들 피해도 줄이는 방향이 되도록 우리 의견을 알린 것입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 토론의 범위가 넓어지니까 거품을 물고 펄펄 뛴 자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헌병대 쪽에서요. 시골 집 습격 음모가 있다고 오카 부장이 알려줘서 마지막 몇 달은 서울 시내에서 숙소를 자주 옮겨가며 지냈습니다.


김: 패전 상황을 걱정해준 것이 ‘친일’이라면 정말 자비롭고도 용감한 친일이군요. 그런 데 어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지는 안 봐도 빤합니다. 자기 뒤가 구린 사람들이 남 걸고넘어지는 데 열심이죠.

민족 자주, 호양 협력, 마찰 방지의 3대 원칙을 두 분이 내세웠고, 일본인 요인들 중에도 그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있어서 항복 시점에 두 분의 협조를 요청한 것이었죠. 그래서 항복 선언에 바로 이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세우시게 된 것이고요.

이틀 지내시면서 전망이 어떠하신지? 어떤 어려운 점을 느끼시는지?


안: 시작 단계에서 섣불리 전망을 얘기할 일은 아닙니다만, 생각보다 어려운 점을 꽤 느낍니다.

첫째,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협조를 요청해 놓고도 자기네가 할 협조를 잘 안 해 줍니다. 무엇보다도,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아요. 총독부와 일본군이 어떤 조치를 취해 나갈지 계획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와의 협력관계에 대해 간부들 사이에 저항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건준 참여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데서 파생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온갖 허황한 소문이 떠돌고 있고,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좌익 사람들은 소련군이 진주할 것이라고 하고, 우익 사람들은 미군이 들어올 것이라고 하는 식이죠.

셋째로, 건준을 함께 하겠다고 모인 사람들도 전심전력으로 달려들지 않고 각자 다른 궁리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좌익 사람들. 15일 밤에 공산당 설립 모임이 있었다는군요. 일에 선후가 있는 것이지, 당파 만드는 일이 나라 세우는 일보다 급할 수 있습니까? 어젯밤 몇 사람과 앉았을 때 신간회 망치던 짓을 또 되풀이할 거냐고 따졌더니, 이번에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다짐하더군요. 두고 봐야죠.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