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프레시안>을 훑어보다가 "홍석현의 평화 구상이 가치 있다고 보는 이유"라는 서평 제목에서 멈칫, 놀랐다. 아무리 호의적인 서평이라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긍정적인 제목은 잘 달지 않는다. 더구나 정치적 역할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는 저자 이름을 앞세워서.

 

필자 이름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최장집. 대한민국 학자 중에 가장 무게 잡는 인물의 하나로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저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호의적인 서평을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면 그런 학자까지도 진심으로 인정할 만한 좋은 책을 그 친구가 썼단 말인가?

 

바로 몇 달 전에 그 친구와의 인연과 관계를 한 차례 돌아보는 글을 여기 올린 일이 있는데, 그 회고로 돌아가 본다. 지난 3월 중앙일보-JTBC 회장직 사퇴 소식을 듣고 적은 글인데, 올린 뒤 '비공개'로 묶어놓았다가 한 달 뒤에 풀었다. 이 블로그에는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적어 올리는데, 불편한 문제가 있으면 비공개로 해둔다. 이 글도 쓸 당시에는 그 친구의 거취가 주목받을 때여서 덮어두었다가 한 달 지나니 사정이 풀렸던 것이다.

 

 

홍석현이 중앙일보-JTBC 회장직을 벗어난다는 소식 앞에 그 친구와의 인연과 관계를 한 차례 돌아보게 된다.

 

15년간 얼굴 안 보고 지내던 그 친구를 다시 보고 지내게 된 것은 작년 여름 중국에서 지낼 때 꿈에 몇 차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연락해서 찾아가기로 한 다음, 찾아가기 전에 보낸 메일에서 그 꿈 이야기 한 것을 옮겨놓는다. 개인적 메일이지만 그 친구도 이제 자유를 찾는 것 같아서 깨놔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워낙 오랜만에 찾아가면서, 왜 만나보려 하는지보다 왜 그 긴 세월 동안 만나보지 못하고 지냈는지부터 설명해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언론-문화 분야에서 활동하며 지내다 보니 자네에게 내 쪽에서 접근하기가 조심스러웠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이해하겠지.

 

최근 들어 은퇴를 결심했어. 앞으로 아주 아무 일도 않고 지낼 생각은 물론 아니지만, 완전히 개인으로만 활동하기로. <프레시안> 기고도 그만두기로 한 것은 물론, 출판을 위한 글쓰기도 하지 않기로 했어.

 

은퇴를 결심하고 나니까 자네 찾아보기 어렵던 기제가 무의식중에 풀린 걸까? 몇 주일 전 중국에 머물고 있을 때 자네가 꿈에 나타나는 거야. 세 차례나. 그래서 자네를 찾아볼 생각이 든 거지.

 

첫 번째 꿈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 나. 그냥 "아니, 뜬금없이 왜 이 친구가 나타났지?" 잠이 깬 후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바로 이튿날 또 나타났는데, 꿈의 끝자락이 어렴풋이 기억나. 뭔가 자네 아랫사람들이 자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일을 놓고 자네가 나를 돌아보며 "그게 뭐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하는 식의 냉소적인 표현을 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릿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는 정도의 기억.

 

그리고 며칠 후에 세 번째 꿈을 꾸었는데, 그 끝자락은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이 남아 있어. 우리 둘이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뭔가 구경도 가고, 같이 놀고, 꽤 긴 시간을(10여 시간?) 보낸 뒤 헤어져서 내가 자네 집무실에서 나오려다가, 지하 주차장에 놓아둔 차 생각이 나서 돌아서서 "주차증 좀..." 얘기를 꺼내는데 자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 오늘 찾아온 건 공무가 아니잖아?" 하는 거야. 내가 좋아서 온 거니까 주차비 해결해 줄 필요가 없다는 거지. 한편으로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 자네 짖궂은 모습을 되찾은 것 같은 흐뭇함을 느꼈지.

 

학생 시절의 연분은 차치하고, 교수직을 떠난 뒤 10년간 중앙일보에 객원으로 걸치고 있으면서 자주 보고 지냈으니 그에게 손님(client) 대접을 받은 셈인데, 중앙일보 떠난 후 15년간 연락 없이 지낸 것은 내게 인간적 문제가 있는 거다. 그러다 불쑥 나타난 사람을 스스럼없이 맞아주는 그에게 살짝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아니, 그에게라기보다 그로 하여금, 나로 하여금 세월에 관계없이 서로를 편하게 대하도록 해주는 인연에 감동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후로 한두 달에 한 번씩 그에게 들러 차 한 잔 놓고 이야기 나누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 지난 주 금요일에 서울 나갈 일이 있어 그 길에 들를까 하고 며칠 전(화요일)에 메일을 보냈더니 그 날은 곤란하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금요일 사정이 있는데 어쩌지? 곧 알게 되겠지만 신상에 변화가 생겨 좀 어수선해요. 그날.

 

신상에 변화? 이뭥미? 바로 답장을 보냈다.

 

"신상에 변화"?

태연히 얘기하는 걸 보면 궂은 일은 아닌 것 같아 걱정은 않겠네만...

설마... 설마... 정치는 아니겠지? 

(...)

제발... 제발... 정치만 아니기를 빌겠네.

 

내가 그 친구를 다시 보며 지내게 된 것을 안 주변사람들이 그 친구 대권의 꿈이 있어 보이더냐고 묻곤 했다. 그런 질문 받을 때 나는 좀 어리둥절해진다. 15년 전에 갖고 있던 생각을 지금도 그대로 갖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날 때도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런 쪽으로는 이야기가 나올 틈도 없다.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권력 쳐다보지 않고도 할일이 충분히 많은 친구로 나는 본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도 불쑥 "신상에 변화" 얘기가 나오니 놀라서 "설마... 설마..." 소리가 나온 거다. 이튿날(수요일) 다시 메일을 보내 "어제 서둘러 보낸 반응에 미안한 생각도 들고 부끄러운 마음도 드네." 하고 사과했다. 그러자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할수 있을 때 연락할께요." 하는 응답이 왔다.

 

그리고는 어젯밤 회장직 사퇴를 알게 되었다. 그의 속내는커녕 사정도 잘 모르지만, 오래된 친구로서 일단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 차례 결산 아니겠는가. 누린 것도 많지만 짐도 많았던 친구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에 쫓기며 살아온 친구다. 친구의 행복을 바라는 wishful thinking 일지 모르지만, 이 친구가 의무방어전 종료를 선언하고 이제는 자기 가치관을 앞세우는 인생으로 접어드는 변화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할 무렵 하늘을 찌르는 그의 의욕에 내가 놀라서 "야, 너 이 일을 평생의 일거리로 생각하는구나?" 하는데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물론이지!" 한 일이 있다. 몇 주일 전 잡담 중 그 생각이 나서 얘기를 하니 "그랬었나?" 하고 빙긋이 웃었다. 23년 전 자신의 업(業)을 향해 달려들 때의 사명감을 이제 졸업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본다.

 

내 wishful thinking 은 그의 행복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내 소망을 비추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큰 힘을 가진 사람이 자기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일개 지식인의 입장에 서서 사회를 위해 할 일을 찾아 나선다면 큰 공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와의 우정을 오래도록 알뜰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군자(君子)의 경지로 잘 나아가기 빈다.

 

 

그 친구 얘기 다시 꺼내는 김에 그와의 관계를 더 분명히 밝혀둔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지만 과외활동을 통해 가까워졌고, 집도 같은 방향이라 서로 오가며 지냈다. (원남동의 그 친구 집이 명륜동의 우리 집보다 학교에서 가까워서 내가 그 친구 집에 들른 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가 유학 간 후 10여 년간 못 보고 지내다가 귀국 후 관직을 몇 해 지낸 다음 삼성코닝 일을 할 때 다시 보기 시작했고, 몇 해 후 내가 교수직을 물러나면서 그의 추천으로 중앙일보사에 객원 연구위원으로 적을 두게 되었다. 뒤이어 그가 중앙일보를 맡게 될 때의 이야기를 앞서의 회고에도 적었는데, 10년간 그와 주객(host-client) 관계를 편안하게 누린 셈이다. 내가 글쓰기에 나서게 된 것도 그가 중앙일보에 넣어준 덕분이다.

 

중앙일보를 떠난 뒤에 얼굴 안 보고 지내면서도 얼마동안은 간간이 메일 안부라도 보내고 지냈는데, 이 친구가 답장을 잘 안 해줘서 끊어버렸다. 그때 생각에도 바쁜 사람이니 본의 아니게 그럴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 친구가 힘이 있는 입장이고 내가 여러 해 의지해 지냈기 때문에 자격지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 중앙일보 색채가 극우로 기울어지고 있어서 덧정 없기도 했다. 서로 보고 지낼 때 기회 있는 대로 내가 권한 것은 '복선'을 늘 깔라는 것이었다. 어떤 조류를 받아들이더라도 생각 속에서는 다른 방향을 잊지 말라는 것이니 중도적 자세를 권한 셈이다.

 

그러다 작년 여름 이 친구 다시 볼 생각이 든 것은 한편으로 내 속이 편해진 까닭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JTBC의 발전이 탐탁해 보인 까닭도 있었을 것 같다. 그 후 한두 달에 한 번씩 찾아가 만나면서 이 친구도 속이 많이 편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3월달의 회고는 그 인상 위에서 쓴 것이다.

 

다시 최장집의 서평으로 돌아가서...

 

5개 절로 구성된 이 글에서 필자는 저자가 시야를 넓혀 준다는 점을 제일 크게 평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제2절에서는 오디세이 역정의 비유를 통해 시간적으로 긴 과정을 설정하고, 제3장에서는 국가와 반도의 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 좌표를 염두에 두도록 공간적 확장을 시도한다고 했다. 그리고 제4절에서는 역사적-문화적 공동체를 인식해서 정치-군사-경제적 고려를 넘어 사상과 문화 방면까지 생각의 폭을 넓힐 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제1절에서는 통일에 집착하지 말고 평화에 치중하자는 저자의 제안을 수긍하고, 제5절에서는 저자의 신분과 위치가 이 제안의 실행과 관련해 가지는 의미를 제시했다.

 

이런 설명을 보니 내 생각과 너무 많이 맞는다. 그런데 내 생각은 책상머리에 편안히 앉아 글 읽으며 짜낸 건데, 이 친구는 여러 가지 책임을 짊어진 채로 돌아다니며 이런 생각을 키워냈다니, 존경심이 들 정도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길을 통해 얻은 생각이 이만큼 통한다면 그 타당성에 대한 자신감도 더 들고 함께 하는 뜻을 위해 앞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희망도 일어난다.

 

서평을 보고 바로 메일을 보냈다. 책 좀 보내달라고. 저녁때 들어와 보니 보내주겠다고 답장이 와 있다. 오늘 아침 그에게 다시 보내는 메일에 "괄목상대"라 제목을 붙이고 이렇게 썼다.

 

지난 가을 오랜만에 자네 ​찾은 건 그저 그리운 마음 때문이었는데, 15년 전의 자네와 다른 느낌을 은근히 받으면서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다 이번 책 이야기를 보고는 좀 바짝 놀랐지. 그러고 보면 자네가 나를 보면서도 예전과 다른 걸 느끼는 게 있으리라 생각되기도 하고. 선비를 사흘 안 보면 괄목상대하게 된다는데, 15년이나 지났으면 변하는 게 있어야겠지.

​변했으면서도 본질은 지킨다는 느낌 역시 서로 함께 나누는 게 아닐까 싶네. 그렇다면 자네나 나나 지난 15년간 "성장"을 제대로 한 거라고 자부해도 될 것 같네. "동반성장"은 아니었더라도. ^^ 우리 세대로는 괜찮은 성적 같아.

​내가 "사상가"로 전업할 뜻을 말했었지. 카의 관점을 쉽게 비평할 수 있게 된 건 근대적 시간관을 확실히 벗어났다는 자신감 덕분인데, 꼭 그러려고 목적을 세워 공부해 온 게 아닌데,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사실을 따지기보다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찾아내는 데 노력하다 보니 몰상식하면서 그럴싸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게 쌓이다 보니 우리 세대가 받아들였던 생각의 틀과 다른 틀을 짜기에 이른 거야. 서로의 공부를 서로 참고할 게 꽤 많을 거 같은데, 앞으로 열심히 나눌 수 있기 바라네.

​"괄목상대"는 최창집 교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은 인상의 4자 감상문이야. 책 받아본 뒤에는 8자 감상문이 나오리라 예상하네.

 

이 친구랑 얼마 전부터 "4자 감상문"이란 말을 쓰고 있다. 내가 메일 보낼 때, 전에 쓴 글 보여주고 싶은 걸 한 꼭지씩 붙여 보내는데, 이 친구는 스마트폰으로 읽어보고 극히 간단한 답장을 보내곤 한다. 한 번은 내용이 "또 배웠네..." 네 글자뿐이었다. 그래서 다음 메일에서 "4자 성어"는 많이 들어봤는데 "4자 감상문"은 처음이라고 짐짓 불평을 했더니 이번에 보내준 글에는 "선견지명"이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는 것이었다.

 

<한반도 평화 만들기>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최 교수의 서평을 보거나 저자의 스타일을 생각하거나 그 내용에 기대가 크게 간다. 그리고 앞으로 그 친구랑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즐거운 상상이 마구 펼쳐진다.

 

 

'퇴각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 8. 17 / 친구의 유산을 노린다.  (0) 2017.08.17
17. 8. 14 / "Black Anger"  (0) 2017.08.14
17. 8. 3 / "차카게 살자"  (0) 2017.08.03
17. 7. 31 / 신입교인의 배짱  (2) 2017.07.31
17. 7. 28 / 그 의사에 그 환자  (0) 2017.07.28
Posted by 문천

1주일에 두 차례 오후를 처형들과 마작으로 보낸다. 복잡한 생각 않고, 그저 패 나오는 대로 따고 잃는 수준이다. 아직 수업료 바치는 입장이지만 진행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 전에는 마작판 벌이기가 번거로워서 간단히 노는 데 훙스(紅十)를 선호했지만, 큰언니 댁에 자동마작기를 연전에 들여놓고는 종종 그 집에 모여 놀게 되었다.

 

선선한 날씨지만 오래 앉아 있으려니 선풍기를 틀어놓았다. 선풍기 위치가 바로 내 등뒤인데, 선풍기를 켜고는 내게 춥지 않냐고 물으신다. 괜찮다고 하자 하시는 말씀, "춥다고 말만 해. 죽이겠어."

 

문득 짖궂은 생각이 떠올라 짐짓 절절매는 시늉을 하며 "목숨만 살려주세요." 했더니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좀 전에 하신 말씀을 되짚어 보고는 정신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여기서는 기계 끄는 것을 "죽인다"고 한다. 전등불도 죽이고 뎬스(TV)도 죽인다. 일상적인 말 한 마디가 타지 사람에게는 흉악한 협박으로 들릴 수 있는 것이다.

 

어휘의 조그만 차이가 오해를 곧잘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괜찮다"는 말이 건강이 좋다는 뜻으로만 쓰인다. 한국의 "괜찮다"는 여기 말로 "일 없다"다. 중국어의 "沒事"에 영향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제 만났던 사람에게 전화해서 예의상 뭔가 사과하는 시늉을 할 때 "일 없음다." 소리를 들으면, 사과를 거부당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여기서 처가 사람들 외에는 왕래가 별로 없이 지내는데, "처가"의 90%가 처형 세 분이다. 작년에 다녀간 후 위의 두 분은 큰 수술을 받았는데 다행히 경과들이 좋으시다. 셋째 언니는 퇴직후 춤바람이 들어 전통무용을 세미프로 수준으로 익혔는데, 요즘 연출(공연)이 많아서 마작판에 끼지 못한다.

 

4자매가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한 차례 여행을 하기로 작당이 되었다. 해남도에 작은오빠 아파트 비어있는 데 가서 놀겠다는데, 북경부터 2박3일의 열차편으로 시작하겠다고. 나도 함께 가겠냐고 아내가 묻기에 또 한 번 절절매는 시늉을 하며 "목숨만 살려주세요." 했다. 데려갈 생각도 애초 없이, 예의상 물어본 모양이다. 덕분에 몇 주일 홀아비 노릇을 하게 됐다.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번역을 폐기하겠다는 출판사  (7) 2017.10.30
어느 날  (2) 2017.09.12
석현 생각  (3) 2017.03.19
爲己之學의 길  (6) 2017.01.12
달걀 한 알에 184원?  (0) 2017.01.10
Posted by 문천

 

김: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1950년생으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역사 공부를 해온 사람입니다. 2010년 시점에서 대한민국이 생겨나던 상황을 정리해 볼 생각을 했습니다. 1945년 8월 해방에서 1948년 8-9월 분단 건국에 이르는 과정을 65년의 시차를 두고 하루하루 더듬어보고자 합니다. 그 동안 나온 연구 성과를 힘닿는 대로 살펴볼 텐데, 이따금 선생님 생각도 여쭙고자 합니다.

안: 반갑습니다. 나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다른 분보다 나랑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 모양인데, 실망시킬 것 같아서 미리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 세대는 공부할 여건이 워낙 열악해서 공부에 어설픈 점이 많습니다. 독립된 우리나라에서 자라나고 공부한 김 선생 세대에게 가르쳐줄 만한 것이 뭐가 있을지...


김: 과연 “독립된 우리나라”에서 제가 공부를 제대로 해 온 것인지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것은 접어두고, 제가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것은 꼭 역사학 선배시라서보다,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3년간 정치의 전개 속에 꾸준히 중요한 역할을 맡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에 참여하면서도 역사학도의 냉철한 시각을 지키셨다는 점이 중요하기는 하지요.


안: 역할이라... 후손에게 부끄럽습니다. 소년시절에 잃었던 나라를 중년이 지나서야 찾으며, 후손들은 우리처럼 불행하게 살지 않기를 바랐는데... 우리 민족의 좋은 점을 잘 살려낼 수 있는 나라를 세우고 싶었는데... 그 3년의 시간에 보람보다 회한을 더 많이 묻게 되었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그나마 부끄러움을 줄이는 길일 테니, 뭐든 서슴지 말고 물어보세요.


김: 고맙습니다. 65년 전 해방 시점으로 돌아가 보죠. 식민지 상황에 전쟁 상황이 겹쳐서 여러 해 동안 언론 통제가 엄청났지요. 그 동안 선생님은 국내외 정보를 어떻게 입수하고 계셨는지요?


안: 나는 사람 많이 안 보고 틀어박혀 지냈지만, 신문사 간부를 오래 했기 때문에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찾아와서 전해주는 이들이 좀 있었습니다. 1942년 말 단파방송 사건으로 개성방송국과 경성방송국이 적발되었지만, 단파라디오가 그 두 군데만 있었겠습니까? 믿을 만한 분들에게서 이따금씩 이런저런 소식을 들으며 지냈습니다.

전쟁 말기가 되어서는 고위직 일본인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꽤 얻게 되었습니다. 대화숙(大和塾)을 통해서 포섭이 안 되니까 총독부와 경찰의 고위간부들이 내 협력을 얻겠다고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상황을 설명하는 데서 알아내거나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있었지요.


김: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해방이었다는 뜻이죠. 그런데 아무리 정보를 통제한다 하더라도 온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을 그 안에서 감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은 일본의 패전을 꽤 오래 전부터 예견하고 계셨다면서요?


안: 민간 신문이 모두 폐간될 정도의 심한 통제였지만,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어느 날 5천리 밖에서 진격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한 달 뒤에는 3천리 밖에서 진격, 또 한 달 뒤에는 2천리 밖에서 진격 중이라고 하니, 후방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얘기겠습니까? 통제와 억압이 갈수록 심해지고 물자가 귀해지는 것만 보아도 전황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지요.

내가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더 일찍, 더 깊이 알아차릴 수 있는 면도 있기는 했습니다. 1938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중국의 무한삼진(武漢三鎭) 점령을 축하하는 소리가 담장 안에까지 들렸지요. 함께 갇힌 사람들이 낙담할 때, 나는 일본이 패망의 길로 들어선 것을 장담했습니다. 3년 후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때는 이제 시간문제라고 확신했습니다. 역사 공부가 없었다면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 때 그 패망을 확실히 생각하기 어려웠겠죠.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1943년 초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있을 때, 일경의 학대는 내가 겪어본 중에서도 최악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매 맞고, 매어달리고, 물벼락을 뒤집어쓰면서도 갇혀 있는 우리들의 마음은 밝았습니다. 터널의 끝이 보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문당하고 나서 감방에 돌아오면 해방이 되었을 때 이 사람을 총리 시키면 좋겠다, 저 사람이 외교총장 감이다, 우스개를 나누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김: 그러나 선생님 못지않게 학식이 깊은 분들 중에도 일본의 패망에 대비하고자 애쓴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고 대개들 얘기했지요.


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전혀 예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지요. 물론 정확히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7월 말 시점에서 나도 보름 후의 일로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몇 달은 더 버틸 줄 알았지요. 그러나 1945년이 될 때는 그 해 중에 끝날 것을 확실히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예견했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서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패망을 거론한다는 것은 ‘비국민(非國民)’ 정도가 아니라 역적이었죠.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으니 속으로 생각만 했다고 하기가 더 부끄러운 겁니다.

대화숙에서 내게 요구한 것이 젊은이들이 징병-징용에 응하도록 설득하는 강연이었습니다. 나도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회피’했습니다. “어차피 질 싸움에 젊은이들 무의미하게 희생시키는 짓을 나는 못하겠소.” 당당히 거절하지 못하고 병으로 핑계를 댔습니다.


김: 말이 통하지 않는 실무자들에게야 핑계를 대고 ‘회피’를 하셨지만, 일본인 고위층에게는 당당히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해방 당시 여운형 선생과 함께 질서유지 협조를 부탁받아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사업에 착수하신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 “당당히” 얘기했다고 하기는 좀 어색합니다.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고 생각대로 말한 것도 아니고, 지금 벌이고 있는 큰 전쟁의 결과를 낙관만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느냐, 정치에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대비책을 세워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차원의 얘기였습니다.

1944년 봄부터 총독부, 일본군과 경찰의 최고위 간부들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비협력 지도층’ 회유를 그들이 큰 과제로 삼게 된 것이었죠. 나 외에 여운형, 송진우, 조만식, 홍명희 제씨였습니다.

그들과 여러 번 만나다보니 빤한 사실을 접어놓고 딴전만 피우는 것이 답답해졌어요. 그래서 초겨울에 오카 히사오(岡 久雄) 경기도 경찰부장 만났을 때 그런 쪽으로 처음 얘기를 했습니다. 전쟁 결과를 낙관만 하고 무리한 정책을 폈다가 뜻밖의 결과가 벌어지면 조선인들의 쌓인 원한을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했죠. 그 사람이 다른 일본인들에게 그 얘기를 해서, 그 후로는 금기(禁忌)를 접어놓고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 상식적인 얘기일 뿐이었다고 말씀하시지만, 당시 상황에서 상식적인 얘기를 하는 데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죠. 그런 자세 때문에 신변의 위협도 많이 겪지 않으셨습니까. 일본인들끼리도 그런 상식적인 얘기를 나누기 힘든 시절이었는데, 여운형 선생과 선생님 두 분만이 패전 가능성을 당당히 언급할 수 있었던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는가요?


안: 몽양과 내가 제일 늦게까지 옥살이를 한 까닭이 아닐지? 그건 농담이고, 몽양은 워낙 호걸의 풍도가 있는 사람이라서, ‘일본 패망’ 이야기를 주변사람들에게 일찍부터 해 왔죠. 1942년 말 내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잡혀 들어갈 무렵에 몽양이 잡힌 것도 그 때문이라 하더군요. 믿고 얘기한 사람이 고발하는 바람에.

나는 몽양 같은 호걸이 아니지만, 내 한 몸의 이해관계 때문에 할 말을 못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가 얼마간의 불이익이나 위험을 겪더라도 그 말을 해서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겪을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이라면 해야죠. 내 그런 앞뒤 안 재는 성질을 일본인들도 웬만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뒤에 무슨 꿍심이 있는지 오해받을 염려는 별로 없다고 믿었습니다.

나랑 얘기를 나누는 일본인들도 내 신변을 걱정해 줬습니다. 자기네는 이해하지만 헌병대에서는 나를 노리는 자들이 많다는 얘기도 해주고, 극우조직에서 나를 처치할 자객들까지 정해 놨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그래서 마지막 몇 달 동안은 시골집에 내려가 있지 못하고 서울시내에서 숙소를 자주 옮겨가며 지냈습니다.


김: 일본인 고위층과 속을 털어놓고 얘기를 나눈 사실 위에 해방 시점에서 질서유지 협조 부탁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두 분에게 ‘친일파’라는 누명을 씌우려 한 자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안: 말 같지 않은 소리 하는 놈은 사람 같이 보지 않으니까 신경도 안 씁니다. 나보다 몽양이 많이 당했죠. 그놈의 전향서라는 것 때문에. 1943년 7월 그 양반 출옥한 다음날 찾아갔는데, 참혹한 지경이었어요. 그 지경에 이른 사람을 전향서를 써야 풀어준다고 하니까 가족들이 대신 써 내는데 막지를 못했다더군요.

일본인들 눈치만 보면서 별 짓 다하던 작자들이 그 종이 한 장 갖고 몽양을 모함하는 것은 정말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랄지. 그래도 한 가지 교훈은 얻습니다. 뜻 있는 사람이 뜻 나타내는 데는 정말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어야만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을.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