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9월 27일) 해방 직후 통화량의 급격한 증가에 관한 생각을 적은 후 한 독자께서 그 분야를 많이 살펴온 연구자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급히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 - 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역사비평> 64호, 2003 가을)과 “8-15 이후 ‘融資命令’의 실시와 무책임의 체계”(<한국민족사연구> 33호, 2002. 12)를 찾아서 읽어보았다. 거기서 배운 것을 가지고 수정할 것은 수정하고 보완할 것은 보완한다.


정병욱은 당시의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水田直昌)의 추산에 의거해 8월 15일에서 9월 28일 사이의 화폐 추가발행액을 33억5천만 원으로, 그중 예금인출로 지불된 액수를 19억2천만 원으로 파악했다. 나머지 14억3천만 원의 대부분은 퇴각자금과 대출금 등으로 파악했다. 예금인출 중에도 고객들의 단순한 재산권 행사 의미를 넘어서는 '돈 퍼주기'가 많았겠지만, 그 밖의 돈은 전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풀려나간 것이다.


두 논문에서 정병욱이 초점을 맞춘 문제는 정치적 대출의 배경이 된 ‘융자명령’이다. 전쟁이 어떻게 되든 은행은 은행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다. 대출을 주려면 융자 목적의 타당성과 상환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원칙과 상식을 무시하는 ‘돈 퍼주기’에 나서려니 은행의 업무처리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총독부가 나서서 융자명령이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해준 것이다.


융자명령이란 1938년 4월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에 의거해 일본 대장대신이 생산력 확충 등 시국에 긴요한 자금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은행에게 자금 융통 등을 명령하는 조치다. 행정 권력을 절대화하는 전시법령의 대표적인 사례다. 8월 21일 미즈타 재무국장이 융자명령을 발동한 것은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전시법령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전시법령의 시행 요건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한 자의적 조치였다. 그러나 상부의 감독이 없고 은행 경영자들과 배짱이 맞았기 때문에 그냥 시행된 것이다.


융자명령에 따른 대출은 총독부와 은행 양쪽의 심사를 거쳤는데, 어느 쪽 심사도 책임감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정병욱이 “무책임의 체계”라 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총독부 재무국은 고위층의 지시에 따라 일을 처리했고, 은행에서는 총독부의 결정에 기계적으로 따랐다. 총독부 고위층은 이 조치를 통해 마음대로 화폐를 세상에 풀어낼 수 있었다.


미즈타 재무국장과 조선은행의 호시노(星野喜代治) 부은행장, 조선식산은행 야마구치(山口重政) 이사 등 은행 간부들은 미군정 하에서 몇 달 동안 한편으로 군정에 협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유용, 경제교란 등 혐의를 조사받았다. 빙산의 일각 정도였겠지만 상당한 범위의 혐의가 확인되었으나 아무도 기소되지 않고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 사이에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드러난 빙산의 일각 중에는 ‘댄스홀 사건’이란 것이 있다. 김계조라는 사람이 융자명령에 의거해 조양광업 대표로 식산은행으로부터도 대출을 받고, 조선석탄주식회사를 통해 조선은행으로부터도 대출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은행 대출금 250만 원으로 서울 시내에 몇 군데 댄스홀을 만든 것이다.


미즈타 등 관계자들은 미군의 ‘여성 수요’를 댄스홀로 충족시킴으로써 민간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뜻이었다고 변명했단다. 전숙희의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 낙랑클럽 활동무대의 하나로 나오는 미츠코시 백화점 댄스홀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몇 개 댄스홀이 6만 미군 장병의 ‘여성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얼마나 효과를 거뒀는지는 몰라도, 후임 지배자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려는 전임 지배자의 노력은 눈물겹도록 알뜰하다.


새로 찍은 조선은행권이 해방 후 조선의 이곳저곳에 뭉칫돈으로 존재하며 권력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리라는 내 추측은 이 논문들을 보며 더욱 굳어진다. ‘융자명령’은 당시 ‘돈 퍼주기’의 전형적 양상을 예시하는 것이지만 돈 움직임의 윤곽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융자명령에 따라 집행된 대출금 규모는 1억 원 남짓에 불과하다. 1945년 9월에 유통되고 있던 조선은행권의 20% 가량이 최근 한 달 동안 어떤 경로로 해서 어디로 풀려나갔는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의 조선처럼 생산력이 저하된 상태의 사회에서 현금은 매우 큰 힘을 가진다. 숙식만 제공해도 수많은 유민을 조직할 수 있고 약간의 용돈만 쥐어줘도 수많은 시위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극우 학생조직의 지도자 이철승이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김성수 댁을 거쳐 전용순 댁에 가서 활동자금을 타내고, 김구 댁인 경교장, 조소앙, 신익희 등 임정요인들이 묵고 있는 한미호텔을 방문하는 것이 일과였다.”고 한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333쪽) “인촌(김성수)의 주머니가 바로 이철승의 주머니”라는 말도 있었다. 1945년 연말부터 나타난 반공 조직의 배경에는 강한 자금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유행한 정치형태였던 ‘사랑방정치’의 비용에서 명월관, 국일관의 수많은 잔치들까지. 그리고 이승만과 김구 등이 귀국했을 때 제공된 정치자금까지. 아무리 재력가 그룹이라도 당시 상황에서 보여준 현금 동원능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해방 후 몇 주일 동안 총독부는 막대한 금액의 돈을 풀었고, 그 후에 뛰어난 현금력을 보인 그룹이 있었다. 그 사이의 연결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조선에 있던 일본인 지도부의 퇴각 계획이 상당히 잘 준비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받는 대목이 많다. 화폐 발행과 관련해 특히 강한 인상을 받는다. 통화량의 확대는 퇴각하는 일본인에게 여러 모로 유리한 것이었고, 조선 사회에는 여러 모로 큰 상처를 남긴 일이었다. 종래의 연구에서 조선의 국부(國富) 유출 문제를 지적해 왔는데, 그보다도 조선 사회의 권력구조에 끼친 영향이 더 큰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Posted by 문천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경이적 수자를 보이고 있는데 이를 일본이 항복한 8月 15日과 미군이 경성에 진주한 날과 현재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8月 15日 4,975,148,877圓

9月 8日 8,463,890,631圓

9月 26日 現在 8,631,185,160圓

 

이를 보면 일본항복 당시로부터 9月 8日의 미군진주의 二旬 餘 사이에 거의 倍額인 23億萬圓이나 되는 엄청난 거액을 발행하였다. 이것은 조선 경제 질서의 교란 단말마적인 발악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것으로 이에 따른 인플레의 경향은 날로 심하여 그에 대한 적당한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28일


이 기사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1944년 말의 발행고는 31억4천만 원이었다고 한다. (<네이버백과사전> “조선은행” 조) 8월 15일까지는 60% 미만의 증가인데, 큰 전쟁의 막바지로 그리 심한 것이 아니다. 화폐경제의 틀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종전 후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70% 증가는 보통 일이 아니다. 새로 찍어낸 35억 원의 돈이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시중에 풀릴 시간이 안 된다. 그 대부분이 여기저기 뭉칫돈으로 쌓여 있었을 것이다.


“돈은 도는 것”이란 말이 있다. 경제학원론의 첫 명제도 경제적 가치를 덩어리(stock) 아닌 흐름(flow)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상태(normal state)에서의 관념이다. 시장실패(market failure) 상황에서 돈은 돌지 않고 덩어리로 뭉칠 수 있고, 그럴 때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힘을 가진 실체가 된다. 물의 순환이 순조롭지 못할 때 ‘물벼락’도 되고 ‘물폭탄’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상황에 관해 명분과 이념 이야기를 늘 읽고 들어 왔다. 그런데 인간이 명분과 이념만으로 사는 것이 아님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65년 전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보다는 명분과 이념을 더 많이 생각했겠지만, 현실적 조건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으리라는 말이다. 당시 상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현실적 조건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서 돈 문제를 밝히는 데 들인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50쪽 분량의 13장 “1945~47년 정치자금 조성과 운용”에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져 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진짜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 많다.


그런데 돈 문제를 파고들기 어려운 문제의 한 측면을 정병준의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치자금의 규모를 대략 파악해 놓은 다음 그 크기를 최대한 실감나게 설명하려고 애쓰는데, 실감이 그리 잘 나지 않는 것이다.


GNP 대비로 계산해보면 1947년 1인당 GNP 35달러와 1997년 1인당 GNP 9,511달러는 무려 272배 정도 차이가 있다. 이승만이 당시 거둬들인 정치자금을 최소 금액으로 상정해 1인당 GNP 대비에 단순 비교하면 현시가로는 73억 원에 해당한다. 또한 이승만이 거둬들인 정치자금은 1945년 GNP의 0.3857%에 해당한다.(위 책 608쪽)


2년간에 73억 원? 빙산의 일각이 차떼기로 드러나는 지금 세상에선 너무 귀여운 액수다. 그런데 GNP의 0.3857%? 지금 상황에 대입하면 2~3조 원은 될 것 같은데? 정치자금으로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틀이 다른 경제 상황 속에서 일정한 금액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정확히 비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름대로 정상상태에서의 교환가치는 쌀 등 생필품을 기준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지만, 화폐의 분포가 고르지 않은 상태에서 뭉칫돈이 가지는 힘의 크기는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설명도 되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해방 직후 조선은행권의 대량 발행이 “일본인의 귀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명을 몇몇 자료에서 봤지만, 그 수요가 어떻게 파악되고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는 설명을 찾아보지 못했다. 추측컨대 ‘귀환 자금’이란 것은 신권 수요의 일부일 뿐이었는데 내놓고 얘기하기 좋은 것이라서 핑계 삼은 것이 아닐까 싶다.


총독부가 일종의 ‘정치자금’을 필요로 했을 것은 당연히 추측된다. 여운형이 치안 유지를 부탁받으면서 1천만 원 내외의 돈을 함께 받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사실 여부를 확실히 판단할 근거는 찾지 못했다. 단, 얼마 액수건 돈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받고 싶은 마음’은 어쨌건, 총독부에게 ‘주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총독부가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진 대상은 여운형과 건준 외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10월 중순 이승만의 귀국 때, 그리고 11월 말 임정 인사들의 환국 때, 한민당 주류 인사들이 상당액의 자금을 제공한다. 그 사람들이 먹고 싶은 것 참으면서 꼭꼭 아껴뒀다가 제공한 돈이 아닐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 외에도 자기네 세력 확장에 필요한 데는 두루두루 썼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현금 뭉칫돈은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는 자원의 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권력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8~9월간 발행된 35억 원의 행방을 윤곽이라도 파악한 연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일부에 대해서라도 내 멋대로 한 번 짐작을 해본다. 한민당 주류 인사들은 일본과 만주에 상당 규모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총독부에서 그것을 사들이거나 보상한다는 명분으로 돈다발을 그들에게 쥐어주지는 않았을까?


내가 총독이라면 그렇게 했다. 막강하던 권력이 해소되고 있는 지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해관계를 최대한 공유하는 집단에게 지금 내가 실어줄 수 있는 힘을 최대한 실어줘야 한다. 김성수 집안이 가지고 있는 만주의 재산을 총독부가 사들이는 형식으로 새로 찍은 지폐를 차떼기로 넘겨준다면, 나중에 혹시 감사(監査)를 받더라도 할 말은 있다.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1945년 9월 말 시점에서 조선 내 통화량의 40%가 최근 한 달 동안 찍은 새 돈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그 대부분이 권력의 성격을 가진 뭉칫돈으로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상당히 분명한 추측이다. 그리고 당시 한민당 주류 세력이 막강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Posted by 문천

 

조선내의 토지소유권(북위 38도 이남)에 대하여 22日 군정청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조선내의 토지소유권은 미군점령지내에서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데 세금은 종전과 같이 군정당국의 명령대로 이를 바칠 것이다. 그리고 지주는 소작인의 소작료를 수확물로 받거나 현금으로 받거나 하는 권리를 가졌으므로 소작인은 이 지시에 따라야 할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22일


토지개혁의 필요성은 1930년대 이후 한국과 중국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환영받은 가장 큰 이유였다. 중국에서는 국가의 소민(小民) 보호 기능이 사라진 상태가 오래되면서 토호 세력이 자라났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제국의 쌀 생산기지로 이용하는 정책에 의해 농지 소유의 집중이 심화되고 소작요율이 살인적 수준까지 올라갔다.

 


유럽의 공산주의가 산업자본가와 산업노동자 사이의 계급 모순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산업화가 발전해 있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의 농업사회에서는 아직 산업화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 모순이라는 근대적 상황은 진행되고 있었다. 농업사회이기 때문에 농업자본가와 농업노동자 사이에 집중되었을 뿐이다.


해방 당시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토지개혁이었다. 이승만의 극우정권조차 이 과제를 외면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을 서두름으로써 정치사회적 안정을 먼저 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9월 22일 미군정의 “토지소유권 무 변동” 발표는 이 현실을 인식하기는커녕 그에 역행하는 방침을 명언한 것이다.


미군정이 왜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검토가 있어 왔다. “바보라서.” 하는 간단한 대답에 나는 제일 끌린다. 그런데 이 문제보다 피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이 내게는 떠오른다. 왜 이 시점에서 토지개혁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발표했을까? 무엇을 하겠다는 방침이라면 물론 발표해야겠지만 무엇을 안 하겠다는 방침이라면 그냥 안 하고 가만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토지개혁의 필요성은 인식하지 못해도 토지개혁의 요구가 광범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좌익 정당들은 말할 것도 없고, 16일 한민당 결당식에서 선포한 정책 8개 항 중에도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이 있었다. 이 요구에 대해 응답할 필요를 군정청이 느꼈을 수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식적 의안 제기도 없는 상태에서(그런 통로도 없는 상태에서), 기자회견에서 답변을 요구받은 것도 아니면서, 군정청이 자발적으로 이 방침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어떤 동기와 계기 때문이었을까? 모든 정당이 최소한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정도는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정치 감각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것 안 한다.”는, 스스로 인기 떨어뜨리는 발표를 할 필요가 없다. 부득이하게 답변이 필요하더라도 “이제부터 검토해 보겠다.”는 정도로 얼버무리는 것이 상식 아닌가?


거의 한민당 인사만으로 구성된 고문단을 군정청이 위촉하는 것은 10월 5일의 일이다. 그러나 한민당 인사들과의 집중적 접촉은 진주 시점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아무리 확인된 근거가 없더라도 9월 22일 군정청의 “토지소유권 무 변동” 발표는 한민당 인사들의 로비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민당 주류 세력이 토지 소유에 힘의 큰 근거를 두고 있었던 만큼, 겉으로는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을 표방하면서도 변동이 없기를 속으로는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토지소유권 무 변동” 방침을 군정청이 세우게 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정식으로 발표하게 했다는 사실에 더욱 음미할 점이 있다. 미군정에 대한 자파 세력의 영향력을 과시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는 위축되어 있었다. 경찰관 대다수가 잠적해 버려서 군정청에서는 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굳이 드러난 친일파가 아니더라도 일제 치하의 특권계층은 처신을 조심스러워하고 있을 상황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 날 군정청의 발표에서 한민당의 메시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떨 것 없어요. 한민당에 오면 돼요.”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이치, 이승만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던 생존의 원리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