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신탁통치 관련 <동아일보> 허위기사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한 달이 지났다. 이 허위기사에 연루된 하지가 곤욕을 치렀지만, 이 한 달 동안 하지보다도 더 큰 타격을 받은 쪽이 있었다. 임정과 김구였다. 커밍스는 이 시점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민주의회란 어떤 것이었는가? 프레스턴 굿펠로우와 이승만, 그리고 하지가 민주의회의 설계자들이었다. 굿펠로우는 11월 말 서울에 도착한 이래 임정과 한민당, 그리고 그밖의 비 좌파 정치조직들이 이승만의 영도 아래 모이도록 노력해 왔다. 1월 28일까지 그는 임정 해산과 이승만 주도의 통합 운동에 대한 김구의 지지를 확보해 놓았다. 물론 임정은 이미 해체되어 있었고(또는 자폭 상태였고), 김구는 너무나 체면이 구겨져 이승만의 뒷전에서 놀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32쪽)


굿펠로우는 해방 전 OSS 부사령관이었다. 1946년 설치된 CIA의 전신인 OSS는 1942년 만들어진 것인데, 대령이 부사령관이었던 것을 보면 아직 초라한 위상이었던 것 같다. 굿펠로우는 OSS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승만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이승만의 미국 내 활동, 그리고 귀국까지 도와주었다. 진나라 장양왕이 왕자 때 조나라에 인질로 있는 것을 보고 여불위가 “기화가거(奇貨可居)!”를 외친 것과 같은 안목이 굿펠로우에게 있었던 것인지.


여불위가 장양왕을 따라 진나라에 들어간 것처럼 굿펠로우가 이승만을 따라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45년 11월 하순의 일이었다. 그 상황을 커밍스는 이렇게 그렸다.


이승만의 미국인 후원자 프레스턴 굿펠로우는 다소 수상쩍은 경로를 통해 점령군 고문인가 뭔가 하는 직책으로 그 무렵까지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주] 굿펠로우의 임명 경위가 흥미롭다. 11월 5일 이승만의 오랜 친구 제이 윌리엄스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굿펠로우를 “한국에 파견할 것”을 권했다. 그러자 트루먼은 11월 7일 번즈 국무장관에게 “굿펠로우 대령에게 이런 임무를 맡겨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쪽지를 보냈다. 11월 13일 존 빈센트는 굿펠로우와 윌리엄스가 이승만과 함께 “국무성을 제멋대로 비판해 온”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11월 13일 번즈는 트루먼에게 편지로 굿펠로우의 임명에 “반대는 없지만” 그를 “대통령 특사”로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을 전했다. 굿펠로우가 한국에 온 길은 이렇게 이승만이 온 길과 비슷한 길이었다. 국무성 국제주의자들의 반대를 회피하는 우회로였다. 이쪽에서 이승만이 맥아더와 하지에게 굿펠로우 선전을 해주는 자기 몫을 한 것은 물론이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07, 518쪽)


커밍스의 책에는 미국의 정책 혼선 상황이 세밀하게 살펴져 있다. 번즈 국무장관이 대표하는 국무성의 국제주의 노선이 공식적인 위치를 지키고 있었지만 국가주의 노선이 이미 강력히 대두하고 있어서 맥아더와 하지의 일탈 행위도 현실적 근거를 상당히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커밍스는 본다.


그러나 국무성의 점령군 비판에는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1943년 이래 국무성 자체의 한국 관련 계획에는 하지의 관점과 꽤 맞아떨어지는 요소들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또는 그 남반부가 소련의 영향이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보장은 남한 현지에서 어떤 원료를 얻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 반대할 것이 확실한 현지 세력은 이승만, 한민당과 경찰뿐이었다. (...) 뿐만 아니라 하지의 국가주의-봉쇄주의 관점은 존 맥클로이, 딘 러스크, 조지 케넌, 애버럴 해리먼 등 전후(戰後) 미국 외교정책에서 극히 중요한 인물들이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해리 트루먼 자신도 공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국가주의 논리에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국제주의 노선과 전후 세계 현실 사이의 간극에 있었던 것인가?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29-230쪽)


주 소련 미국대사 해리먼이 2월 2일 하지를 만나러 한국에 올 때 하지에게 따지러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그저께 적었는데, 커밍스의 설명을 보면 잘못 짚은 것 같다. 해리먼의 회고에서 “1월에 한국에 갔을 때 하지 장군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까지 인용되어 있다. 주 소련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조지 케넌이 유명한 ‘긴 전보’를 작성한 것이 1946년 2월 22일의 일이었는데, 이 무렵의 외교 현장에서는 국제주의가 완전히 한물 간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루즈벨트 시대를 통해 미국 외교정책을 관통해 온 국제주의 노선이 루즈벨트가 죽은 지 1년이 안 되어 뒤집히고 있었던 것이다. 원자탄의 등장이 이 변화를 촉진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은 유럽 선진국과 맞먹을 수 없는 2류 국가에서 1류 국가로 발돋움했다. 국제주의 외교노선은 그 상황에 맞춰 세워진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슈퍼파워가 된 미국은 나눠 먹기 식 국제주의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가 1947년 10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하원의원들에게 미국이 “모스크바 합의 대신 영구히 분단된 남한을 향해 노력하는 편이 좋았겠다.”고 한 말을 들어 커밍스는 하지가 이승만과 똑같이 분단을 지향했다고 본다. (같은 책 229쪽)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의 말은 후회를 뜻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초 당시 분단을 확고한 목표로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후회하는 말로 이해되는 것이다.


분단이 하지에게 확고한 목표는 아니었더라도 분단 회피 역시 그에게 확고한 목표는 아니었을 것이다. 1945년 11-12월에 임정과 김구를 극진히 대접한 것은 임정을 내세울 경우 남한만이 아니라 한국 전체를 미국의 영향력 안에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12월 30일의 ‘국자 사태’로 김구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서 한국 전체에 대한 하지의 야심이 무너지고 분단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 시작했을 것이다.


분단 건국 방침을 이승만이 처음 공언한 것은 1946년 6월 3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방침을 마음속에 품은 것은 물론 더 오래된 일이다. 공언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 가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하지보다는 빨랐을 것이다. 1945년 12월 들어 반공 발언을 강화할 때는 이미 분단 건국의 목표가 굳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가 분단을 바라지 않은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앞장선 극한적 반탁운동이 한국을 분단의 길로 몰아넣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반탁의 깃발을 쳐들기만 하면 민중은 말할 것 없고 경찰, 군정청 직원, 친일파, 자본가들까지 모두 그 깃발 아래 모을 수 있으리라고 그가 정말로 믿었던 것일까?


임정의 권위마저 크게 훼손되었다. 26년간 존재한 임정이지만, 귀국 시의 그 모습은 1942년 10월의 좌파 포용 이후의 것이었다. 좌우합작의 모델 노릇에 임정의 큰 가치가 있었다. 극한적 반탁운동 속에 좌우합작의 정신이 외면당하면서 임정의 깃발이 찢어졌다. 돈과 폭력의 위협에서 한민족을 지켜줄 가장 큰 도덕적 권위의 주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

'古稀'란 말을 처음 배웠을 때,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아도 되는 건가?" 생각했었는데, 그게 1년 앞으로 닥쳐오다니! 생일 몇 차례 지내 본 거 같지 않은데 벌써 68번째?

 

"축하 사절"을 걸어 놔야 축하가 없어도 마음이 안 아프겠지?

 

Posted by 문천

 

70년 전 분단건국 당시에는 통일이 민족공동체의 너무나 지당한 염원이었다. 1천 년간 민족국가를 영위해 온 민족사회가 35년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민족국가를 회복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막히면서 민족공동체는 생살 찢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70년이 지난 지금은 찢어진 상처가 겉으로는 아물어져 있다. 불구 상태에 많이 익숙해져서, 이제 정상을 되찾기 위한 통일이라는 수술을 부담스러워하며 그냥 이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민족사회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통일보다 평화를 앞세우는 뜻이 여기 있다. 상처의 아물림을 더 완전하게 함으로써 이대로 살더라도 불구 상태의 어려움을 줄이고, 수술을 받더라도 위험이 적도록 하여, 장래 세대의 선택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민족 분단 상태의 이 사회에서는 평화에 관한 깊은 생각을 키우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대결 상황이 사람들의 의식을 끊임없이 압박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세계적 냉전의 해소 이후로는 대결 상황이 서서히나마 완화되어 왔다. 대결 상황의 압박이 줄어들고 있는 지금, 풀려난 의식으로 평화에 관한 생각을 키우는 것이 이 사회의 과제다.

대결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분쟁을 회피한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세상이 돌아가는 일반 원리로서 평화의 적극적 의미가 자리 잡고 대결과 분쟁은 예외적 상황으로 처리되는, 그런 평화체제를 바라볼 수는 없을까?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평화체제는 인류문명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갈등과 분쟁이 전혀 없었던 일은 없다. 그러나 소수의 당사자들이 갈등과 분쟁을 겪어내는 동안 대다수 구성원의 생활과 활동이 교란받지 않는 상태라면 평화체제라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150년 동안 인류의 대다수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직면해 있었던 것은 인류 역사상 하나의 특이한 시기, 전 세계적 난세(亂世)였다고 볼 수 있다.

세계적 난세의 표현 하나가 냉전이었고, 한민족의 분단건국이 바로 냉전의 신호탄이었다. 한반도의 분단 극복은 전 인류의 난세 극복과 맞물린 과제다. 세계적 평화체제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한반도 평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세계적 평화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다.

한반도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주변 4의 향배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 역사 속에서도 한민족의 운명에 큰 작용을 한 나라들이고,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이 예상되는 나라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관심을 더 넓힐 필요가 있다. 우선, 세계가 좁아졌다. 70년 전 유엔총회에서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분단건국 관련 표결에 참여했던 나라들이 모두 지금은 한국과 상당 규모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의 정착 여부에 상당 수준의 득실이 걸려 있다.

또한 평화체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지나간 난세 중에서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힘의 공학적 관계에만 매달려서 안 될 것이다. 평화체제의 성립에는 현실적인 군사력과 경제력만이 아니라 평화를 아끼는 인류의 사랑과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근대의 난세가 휩쓸기 전에 인류문명의 여러 갈래에서 크고 작은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운영하던 경험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난세가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인류를 우리로 인식하지 못하고 사이의 빼앗고 빼앗기는 관계에만 매달려서 살았다. 자연을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며 인간 이외의 어떤 대상에도 두려움을 품을 줄 모르는 풍조 안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아끼는 마음을 잃었다. 사람들 사이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내 행복의 조건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잔치가 끝나고 있음을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평화에 관한 생각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징표로 나타나는 평화의 염원 앞에서 평화는 정의의 열매라고 하는 교회의 가르침이 하나의 표준으로 부각된다. 무기력의 균형이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의 토대를 건설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우고 이뤄나가겠다는 의지로부터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한반도 평화를 품어줄 세계적 평화체제의 전망을 바라보고자 한다. 주변 4강을 넘어 전 세계의 형세를 살펴볼 것이며, 지금의 형세만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도 시야에 담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역사를 통해 평화체제에 공헌해 왔고 앞으로도 공헌을 기대할 수 있는 정신적 문화적 역량의 존재를 밝히고자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