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북협상이 필요하게 된 이유

 

19458월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은 조선인에게 국가 건설의 과제가 주어졌다. 1천 년간 민족국가를 운영하다가 30여 년 전 식민지로 전락했던 조선이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면서 민족국가를 회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식민지가 되기 전의 왕조국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국 형태의 국가 건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민족국가의 회복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 나타났다.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이었다. 점령의 공식적 목적은 일본의 통치권을 넘겨받았다가 정당한 정권에게 넘겨주는 것인데, 넘겨받을 정당한 정권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점령기간이 길어졌고, 그 동안 미-소 양국은 각자의 점령지역에서 자국에 유리한 정치정세를 빚어내는 데 노력했다. 그 결과 반도 남북의 양국 점령지역은 갈수록 격리가 심해져 다른 나라처럼 되어 갔고, 각 지역에서 주도권을 쥐는 정치세력 간에 적대적 관계가 굳어져 갔다.

애초에 미-소의 분단점령은 일본을 항복시킨 연합국의 합의에 의한 것이었고, 두 나라 점령군이 공동위원회를 만들어 그 위원회가 통치권을 넘겨줄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194512월의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그에 따라 바로 미소공동위원회가 만들어져 1946년 봄과 1947년 여름에 회의를 진행했지만 양측의 이견을 해소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1947년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공동위원회를 통한 문제 해결을 포기하고 유엔으로 조선 건국 문제를 가져가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유엔 설치 논의가 미국 땅에서 이뤄지고 본부가 미국에 설치된 사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당시 압도적인 경제력을 갖고 있던 미국은 유엔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엔에서 결정한다는 것은 곧 미국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소련은 유엔 회부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3-8선 이남 미군 점령지역에는 유엔 결정에 따라 하나의 국가가 만들어지고 이북 소련 점령지역에는 별도의 국가가 만들어지는, 분단건국의 위협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분단이 왜 나쁜 것인지 분단점령의 현실 속에서 분명히 확인하고 있었다. 민심은 단호히 분단을 반대했고 민족주의자들은 이 민심을 받들어 민족국가 건설의 길을 찾았다. 그러나 막강한 힘을 가진 점령세력이 그 길을 막았다.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한민당을 앞세워 민의 표출을 틀어막으며 194610월의 대구사태와 19473월 이후의 제주사태에서처럼 무력으로 인민을 억압했다. 이북에서는 소련 측의 비호를 받는 공산세력이 주도하는 통일전선에 참여하는 길만이 민족주의자들에게 허락되었다.

분단건국으로 이어질 전망의 유엔 상정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남북 정치세력 간의 협상을 통해 민족의 장래에 대한 자주적 결정을 내리자는 것이었다. 이남 민족주의자들의 당면 목표는 유엔에서 이남 단독건국 결정을 막는 데 있었다. 주요 정치세력의 단결을 통한 조선인의 자주적 결정으로 유엔 회원국들에게 호소한다는 것이었다.

이남의 남북협상 대표들이 현실 권력을 갖지 못한 재야입장에 있었던 반면 이북 대표들은 인민위원회 체제를 구축하고 소련 측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이북 지역의 당국입장이었다. 협상 결과를 실행할 위치에 있는 주체와 그렇지 못한 주체 사이의 협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일 수밖에 없었다. 남측 대표들에게는 협상의 성공을 통해 단독건국을 막는 것이 유일한 정치적 활로였지만 북측 대표들에게는 분단건국이 되더라도 정치적 활동영역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협상은 대등한 관계의 협상이 될 수 없었다.

 

 

2. 남북협상에 임하는 각 주체의 입장

 

(1) 민족자주연맹(민련)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은 분단건국 저지를 위해 194712월에 민련을 결성했다. 당시 한민당도 민족주의를 표방했지만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다. 한민당은 지주, 친일파 등 식민지시대의 기득권층이 기득권 유지와 확장을 위해 뭉친 극우정당으로 좌익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주의 간판을 내걸었을 뿐이다.

한민당은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위에 미군정을 등에 업고 행정력과 경찰력까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민족주의자들은 제대로 조직조차 하기 힘들었다. 민족주의 정당으로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도 있었지만 극우세력과 손잡고 반탁운동을 벌이며 미소공동위원회를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민족주의자들을 포용할 수 없었다.

미군정은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김규식 안재홍 등 일부 민족주의자들에게 약간의 활동공간을 마련해 주지 않을 수 없었고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근거로 좌우합작을 통해 민족국가 건설의 길을 열려고 노력했지만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남로당의 비협조로 지지부진하다가 19477월 좌익 지도자 여운형의 암살로 합작의 길이 완전히 막혔다. 바로 뒤이어 미소공동위원회가 파탄에 이르고 분단건국의 위험이 가시화되자 우익 측 민족주의자들이 이에 대처하기 위해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당시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중간파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공산당-남로당의 극좌와 한민당의 극우 사이의 노선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니, 극좌와 극우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다.

중간파는 미소공동위원회를 돕기 위해 각정당협의회(정협)를 중심으로 느슨한 연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극우세력의 좌경비난에 시달렸다. 1947년 가을로 접어들며 조소앙 등 한독당 일부에서 분단건국 저지의 목표에 합류할 기색을 보이자 좌익을 배제하고 우익 인사들만으로 민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중요한 지도자로는 김규식, 홍명희, 이극로 등이 있었고, 민정장관 직에 있기 때문에 직접 참가하지 못한 안재홍도 이에 동조했다.

 

(2) 한국독립당(한독당)

 

김구가 이끌던 한독당이 임시정부(임정)의 주류라 할 수 있다. 1940년 충칭(重慶)에 도착할 때의 임정은 한독당 일색이었는데 임정의 활동근거를 보장해주고 있던 중국국민당이 좌우합작에 나서면서 임정에도 합작을 권하는 데 따라 김규식, 김원봉 등 중도적 인사들이 참여함으로써 비주류가 형성되었다.

194511월 말 임정 귀국 때는 민족주의 본산으로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946년으로 접어들면서 김구가 강경한 반탁운동에 나섬에 따라 비주류가 떨어져나가 임정의 권위가 크게 훼손되고, 이후 임정보다 한독당이 정치조직으로서 더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국내의 민족주의자들 중에도 한독당이 민족주의 본산 역할을 맡아주기 바라는 추세가 있어서 19464월 국민당과 신한민족당을 통합하기도 했으나 한독당 주류가 강경한 반탁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미소공위 협조를 거부하는 바람에 오래지 않아 도로 떨어져나갔다.

김구는 귀국 이튿날 기자들 앞에서 친일파 처단이 서두를 일이 아니라는 견해를 밝혀서 민족주의자들을 실망시켰는데, 그 시점까지 만난 인물이 이승만 한 사람뿐이었다는 사실로 보아 이승만을 통해 한국민주당(한민당) 측의 회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의 정치활동은 극단적 반탁투쟁을 중심으로 이승만-한민당과의 연대 속에서 이뤄졌다. 경교장 제공을 비롯해 한민당 측 재력가들의 대규모 후원을 받은 사실이 일부 드러나 있다.

1947년 말 분단건국의 전망이 짙어지는 상황에서 김구가 이승만-한독당과 결별하고 남북협상 지지로 돌아서는데, 그 과정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한독당 제2인자라 할 수 있는 조소앙의 정협 참여를 한 동안 묵인하는 기색이었다가, 이승만이 조직한 민족대표자대회(민대)를 자기 조직인 국민의회에 통합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느닷없이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하고 나섰다.(47. 12. 2) 며칠 후에는 한독당의 정협 대표들이 제명당했다.

그랬다가 장덕수 암살(1947. 12. 2)의 여파로 두 조직의 합병이 무산되고 김구 자신이 궁지에 몰리는 상황에서 남북협상 지지로 돌아선 것이다. 결단의 순수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1948210일 발표한 글 삼천만동포에게 泣告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대목은 민족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가세는 막막한 심정으로 남북협상 추진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3) 북조선로동당(북로당)

 

19468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으로 만들어진 북조선로동당은 민족통일전선의 성격을 어느 정도 띠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지만 상당 범위의 민족주의자들도 참여한 것이다.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합작은 해방 직후부터 소련 점령군의 후원 아래 진행되었고, 1946년 봄의 토지개혁 시행으로 인민위원회 체제의 실효성이 확인되자 연합세력을 북로당의 형태로 정비한 것이다.

북로당의 창당이 공식적으로는 19451010일로 되어 있다. 조선공산당의 북조선분국이 설치된 날짜다. 국제공산주의의 11당 원칙에 따라 조선의 공산당은 박헌영이 당 중앙을 장악한 조선공산당 하나뿐이었지만 분단점령의 상황에 맞춰 상당한 독립성을 가진 분국 설치가 허용되었던 것이다. 북조선분국은 그 정치적 역할이 확립되면서 북조선공산당이란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지만 형식적으로는 조선공산당의 하위조직이었다. 북로당 창당은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의 의미도 가진 것이었다.

이남의 미 점령군이 총독부의 역할을 넘겨받은 군정을 실시한 것과 달리 이북의 소 점령군은 진주 초기부터 인민위원회 조직을 후원하고 행정-경찰 업무를 넘겼다. 그래서 이북에서는 실력을 갖춘 지도부가 형성되었고 그 지도부가 북로당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다. 따라서 북로당은 이북 지역의 집권정당으로서 이남의 정당들과 다른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1947년 가을 미소공위 실패에 이어 미국이 한국 독립 의제를 유엔에 상정하고 소련이 이를 거부하는 상황에 이르자 북로당 중심의 이북 지도부는 헌법 제정, 군 창설 등 독자적 건국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유엔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통일건국을 준비하되, 미국의 비협조로 통일건국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북 지역에 우선 국가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헌법에 수도를 서울로 표시하고 태극기를 국기로 채택함으로써 통일 민족국가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

19482월 이남의 민련과 한독당이 남북협상을 제안할 때 이북 지도부는 이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북 지도부는 선거를 통해 전 주민의 위임을 받은 입장인 반면 민련과 한독당은 이남의 우익만을 대표하는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남 좌익까지 포괄하는 지도자 연석회의에 중점을 두고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영수회담은 부수적인 행사로 간주했다.

 

(4)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이북 측에서 주장하는 지도자 연석회의 중심의 남북협상에서는 남로당-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민련-한독당과 대등하게 이남의 절반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민전은 남로당의 장악 아래 있었으므로 남로당이 남북협상의 4분의 1 지분을 가진 셈이었다.

실제에 있어서 남로당은 미군정의 탄압 때문에 이남에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었고, 박헌영 등 지도부가 이북에 체류하며 북로당의 지원에 의지하고 있었다. 이런 종속적인 위치를 부정하고 북로당과 대등한 입장을 주장할 필요에서 남로당 지도부는 이남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모험주의 투쟁노선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북 지도부에게는 남로당의 지분 주장이 남측에 대한 우위를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유리한 것이었다. 모든 주체가 협상에 참여한다는 원칙에도 합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남의 활동 근거가 위축되어 있어서 현실상 북로당에 종속된 위치에 있던 남로당의 지분을 이남 우익과 대등하게 인정하는 것은 남북 양측 간의 균형을 무너트림으로써 대등한 협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었다.

 

 

3. 남북협상의 진행 경위

 

194711월 유엔총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한국 독립 방안이 채택되고 이 결의에 따라 구성된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19481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북 당국이 위원단의 입경을 거부함으로써 총회 결의에 따른 총선거가 불가능하게 되자 미국은 유엔 소총회에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를 제안하여 분단건국의 위험이 구체화되었다.

단독선거에 줄곧 반대해 온 민족자주연맹과 최근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 김구 측은 위원단에 의견을 개진했고, 위원단에도 단독선거의 강행을 꺼리는 위원들이 많았다. 단독선거 아니라도 총선거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만 세워진다면 위원단에서도 단독선거를 반대할 것이고 소총회에서도 미국의 제안 철회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김규식과 김구 연명으로 2월 중순 김일성과 김두봉 앞으로 보낸 남북협상 제안 편지의 가장 큰 목적이 유엔위원단을 설득해서 단독선거를 막는 데 있었다.

북측의 제안이 없는 채로 226일 소총회에서 미국의 제안이 가결되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325일에야 평양방송에서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제안이 나오고 김구와 김규식에게도 김두봉과 김일성의 답장이 전달되었다. 북측의 연석회의 제안은 앞서 보낸 남측 제안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독자적인 제안이었다.

김규식은 북측의 제안에 성의가 없다고 여겨서 응하지 않으려 했다. 유엔의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몇몇 요인들이 얼른 만나자는 것인데, 소총회 의결이 나와 미국이 원하는 단독선거를 향해 한참 일이 진행된 뒤에야 거창한 연석회의를 열자는 것은 다른 뜻이라고 본 것이다. 미국 뜻대로 이남에 단독건국이 이뤄지기를 기다려 이북에도 단독건국을 하려는 속셈으로 읽은 것이다.

그러나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평양의 초청에 응하는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김구는 419, 김규식과 민련 대표들은 422일 서울을 출발했는데, 북측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내세운 19일에서 26일의 연석회의에는 둘 다 참석하지 않았다. 김구는 잠깐 인사만 했고 김규식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연석회의가 북측에서 준비해 놓았던 결의안을 채택하고 끝난 뒤 보다 실질적인 협상의 의미를 가진 남북요인회담이 27일부터 30일까지 열렸다. 참석자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이극로·엄항섭·김일성·김두봉·허헌·박헌영·최용건·주영하·백남운의 15인이었다. 이 회담에서 다음과 같은 통일정부 수립방안이 작성되었다.

 

첫째,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하는 것이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유리한 방법이다.”

둘째,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뒤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셋째,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다음 연석회의에 참가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통일적 조선입법기관을 선거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넷째, “위의 사실에 의거하여 이 성명서에 서명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은 남조선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요인회담 참석자 중 김일성·김두봉·최용건·주영하 4인만이 북측 인사였고 11인이 남측이었다. 그러나 11인 중 홍명희·이극로·허헌·박헌영·백남운의 5인이 회담 후 이북에 남았으므로 남쪽으로 돌아온 것은 6인뿐이었다.

허헌·박헌영·백남운이 이북에 남은 것은 좌익의 입지가 없던 이남 형편 때문이라 할 수 있지만 홍명희, 이극로 같은 투철한 민족주의자들이 북을 택한 사실이 당시 상황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북에서는 북로당의 주도 하에라도 민족통일전선이 어느 정도 이뤄져 있어서 민족주의자들이 희망을 걸 여지가 있었던 반면 이남에서는 좌익만이 아니라 민족주의자들의 입지마저 허용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4. 남북협상이 가져온 결과

 

연석회의에서는 미-소 양국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채택하고 단선단정반대전국투쟁위원회 결성을 결의하는 등 북측에서 준비한 안건만이 처리되었다. 그보다 협상의 성격을 가졌던 요인회담에서는 앞에 인용한 4개항의 통일정부 수립방안이 작성되었는데 이남에서는 유엔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단독선거가 강행되었다.

가능 지역의 선거를 표방한 이남의 단독선거에 이북 측은 불가능 지역의 선거로 맞섰다. 인민위원회의 이름의 이남 지역 지하선거로 전 민족적 대표성을 가진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19488월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와 달리 다음 달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전 민족을 대표한다는 정통성 선전의 근거를 만든 것이고, 이 정통성에 입각한 국토 완정주장은 전쟁 도발로 이어지게 된다.

남북협상 중 요인회담에서 나온 통일정부 수립방안 4개항 중 마지막 항, 협상 참여자들은 남조선 단독선거를 거부한다는 조항은 정부수립 단계의 이남 정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단독선거와 분단정부를 거부한다는 명분이 민족주의자들의 정치 참여에 족쇄를 채운 것이다. 남북협상에 참여한 인사들의 5-10 선거 보이콧이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과분한 득세를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족주의자 중에서는 소장파만이 선거에 참여해서 무소속의 이름으로 국회 내에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으나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는 규모가 되지 못하여 이승만 독재체제 구축을 막을 수 없었다.

19484월의 남북협상은 홍명희 등 지도적 위치의 민족주의자 상당수가 이북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남의 단독선거에서 많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정부 진입을 가로막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남 정계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역할을 줄여서 친일파를 포괄하는 극우반공 세력의 발호를 도와준 셈이다.

이 결과를 우연한 것으로만 볼 수 없다. 협상의 주체가 자리 잡고 있던 수준에서 남북 간에 차이가 워낙 커서 대등한 협상이 될 수 없었다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북 지도부 입장에서 남측 대표들은 어떤 협상이 이뤄지더라도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자격 없는 대표였다. 자기네 목표를 성취하는 데 이용할 만한 데가 있으면 이용할 뿐이었다. 반면 남측 대표들에게는 이 협상이 유일한 활로였다.

북측의 오만과 남측의 무능이 합쳐진 결과 남북협상은 분단건국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전쟁 위험을 늘리는 역효과만 가져왔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모처럼 남북관계가 활성화되는 반가운 장면 앞에서도 북측의 오만과 남측의 무능이 또 되풀이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마음 한 구석에 일어난다. 미국 주도의 국제공조에 묶여 있던 이남과 그를 거슬러 갈 길을 가던 이북의 모습이 지금 현실에 겹쳐져 떠오르기 때문이다.

 

 

 

Posted by 문천

 


1946년의 설날은 2월 2일 금요일이었다.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교무과장 김성칠은 1일 오후 5시에 서울역에서 대구행 기차를 탔다. 대구 지역 업무를 보는 길에 영천군의 고향에 가서 성묘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출장이었던 것 같다.


민족주의자 김성칠은 기차에 오르기 전부터 불편한 마음을 느낀다.


Traffic Controlling Bureau엘 들렀더니 회장이 이미 전화로 연락해 두었으므로 곧 좌석 지정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 사람에게 빌붙어서 일반 동포들이 가지지 못하는 좌석을 차지하지 말라는 아내의 부탁이었고 나는 그 말이 지당한 줄 알지만 이번에 일부러 이 길을 취해보기로 하였다.

 

조선 사람들의 타는 차는 그렇게도 초솔한 것이건만 미군인 전용차량은 2등 침대차를 개조한 것으로서 호화로운 것이었고 그나마 조선 사람의 손으로 각별히 소제해놓은 것이었다. 이러한 것이 멀리 온 손님을 위해서 우리들의 반가운 심정을 표하는 것이고 또 저네들도 겸손한 마음으로 고맙게 받는 것이면 좋으련만 만일 그렇지 못해서 우리들은 힘에 눌려서 상전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러한 설비를 베풀고 또 저네들은 어떠한 우월감으로써 이 대접을 받아들인다면 통곡할 현상이다.


조선 사람들의 대접하는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는 차치하고, 미군이 대접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 확인할 수 있었다.


좌석을 준다기에 미군 전용차량에 탔더니 MP들이 와서 next car로 가라고 몰아세운다. 계집아이 둘만 남기고 기타의 조선 사람은 좌석 지정이 있어도 전부 쓰레기통 같은 다음 찻간으로 쫓아내고 그리고 그 찻간에 이미 타고 있는 일반승객들은 또 몹시 붐벼서 설 자리도 없는 다음 찻간으로 내쫓는다. 간혹 그런 줄을 모르고 이 찻간에 타는 사람이 있으면 총부리를 내밀고 left go를 연발하면서 기어이 next car로 떠밀어낸다. 이쪽 차량에는 열 사람도 못다 타서 아주 비다시피 하고 다음칸은 수백 명이 붐비어서 창밖에까지 넘칠 지경이다.

 

앞에 찻간에 탄 계집아이들이 얄밉기 그지없다. 그러나 next car의 수많은 승객들은 이 찻간에 탄 우리들을 또 그와 같이 얄밉게 생각하리라.

 

밤이 깊을수록 한기가 스며드는데 유리가 깨어진 차창으로부터 눈보라 섞인 매운바람이 불어치고 그나마 거의 비다시피 한 찻간이므로 사람의 훈기도 없어서 몹시 춥다. 이러한 곡경은 미인(米人)에게 좌석 지정을 받은 당연한 업보리라.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 2008년 개정판) 34-35쪽)


식민지시대 일본인의 횡포에 관한 기록이 수없이 많지만,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특권과 차별을 당연시하는 자세는 본바 없다. 군정 실시 5개월을 채워가는 시점에서 미군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김성칠은 깨끗하고 따뜻한 차량을 미군과 함께 타고 가는 ‘계집아이’들을 얄미워한다. 그러면서 자리라도 넉넉한 ‘다음칸’을 타고 가는 자신을 더 뒷칸의 사람들이 얄미워할 것을 알고 있다. 미군의 절대적 특권을 많이 나눠받은 제1그룹을 조금 나눠받은 제2그룹 입장에서 얄미워하지만, 미군의 특권과 아무 관계없는 제3그룹의 눈길을 의식하는 것이다.


두 명의 ‘계집아이’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군정청 직원 아니면 유력계층 인사의 따님들이었을 것 같다. 출장길의 금융조합 간부보다 우대받을 공식적 자격은 없었겠지만, 미군의 ‘기사도정신’ 때문에 제1그룹이 되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 양장을 갖춰 입은 젊은 여자가 길을 지나가면 아이들이 아무 이유 없이 “양갈보!” 소리치기도 하고 심지어 돌을 던지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미군의 특권에 대한 반감이 연약한 표적을 향해 비뚤어져 분출된 것 같다.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을 젊은 여성들을 ‘계집아이’라고 적은 것도 분노의 비뚤어진 표현으로 보인다.


1주일 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의 봉변은 더했다.


미군 철로계의 증명서를 가졌으므로 미군 전용차에 타려다가 다른 군정청 조선인 관리들과 함께 가슴패기를 몹시 얻어맞았다. 가슴이 사뭇 떨리고 눈에 눈물이 핑 돈다. 개도야지처럼 함부로 얻어맞고 쫓겨나서 화차에 가까스로 설 자리를 비집을 수 있었다.

 

소년 시절에 왜인 경찰에게 무지스레 얻어맞았고 이제 다시 미국 군인에게 이 봉변을 당했다. 약소민족의 설움이 새삼스레 뼈에 사무친다. 그래도 그때는 일정(日政)을 반항하다가 얻어맞았지만 이번엔 미군정에 빌붙어서 좀 편한 자리를 얻으려다가 이 봉변이다.

 

그들의 만행을 책하기보다도 내 지지리 못났음이 한스럽다. 아무리 몸이 고달프더라도 다른 동포들과 함께 붐비는 중에 고생하는 것이 옳은 것을, 그들의 증명서를 이용하려던 내 태도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떠나기 전에 아내가 그 비루칙칙한 증명설랑은 쓰지 마라던 것을, 그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면서도 몸의 컨디션이 좋지 못함을 양심에의 변명으로 삼고 차중의 안일을 얻고자 한 내 생각이 무엇보다도 잘못이었다. (<역사 앞에서> 38-39쪽)


김성칠은 대구고보 재학 중이던 1928년 15세 나이에 독서회와 동맹휴학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미결수로 복역하면서 일제의 극심한 폭력을 겪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일정을 반항하다가” 얻어맞은 것이지, 그 후 16년간 식민지시대를 지내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 이유 없이 미군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꼴은 보지 않고 살아왔다. 미군정의 질서 유지 방식은 일본 식민지배자들보다 더 야만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족의식을 가진 지식인이 어떻게 처신할 수 있었을까? 김성칠의 아내 이남덕은 남편보다도 더 선명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군의 증명서가 “비루칙칙한” 것이니 아예 쓰지도 말라고 했단다. 그런 증명서가 미국인의 손에서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김성칠이 내려가는 길에 이 증명서를 쓴 것은 “일부러 이 길을 취해 봄”으로써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고, 올라오는 길에는 여러 날 출장 끝에 편안한 여행을 바란 것이었다고 한다.


아내의 관점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겪어보고는 아내의 관점에 동의하게 된다. 그가 두 달 후 금융조합을 그만두고 경성대학 사학과 조수(조교)로 들어간 데도 미군 대위를 회장으로 모시는 직장에서 일하기 싫은 마음이 작용했을지 모른다.(경성대학 학장도 미군 대위였지만, 금융조합에서처럼 가까이서 모실 필요는 없었으니까.)


출장 중에 김성칠은 틈을 내어 17년 전 함께 검거되었던 선배, 친구 몇을 만났다. 일제하에서 쟁쟁한 사회주의운동가가 된 사람들이었고 몇 달 후에는 대구 ‘10월 민중항쟁’의 주역으로 활동할 사람들이었다.


이상길 군을 노조에서, 김일식 군을 전매국의 쟁의현장에서, 윤장혁 군을 민성일보사에서, 장적우 씨를 이목 씨 댁에서 만났다. 장씨에게는 조선공산당의 신탁문제에 관련한 오류를 지적했더니 솔직히 그들의 잘못을 승인하였다. 민족전선의 혼란을 막고 또 건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좌익이 좀 더 양보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우익의 극단한 반동화와 당래할 그들의 쿠데타를 위하여 어느 일선을 사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또 좌익 파쇼와 또 일부 공산당원들의 소아병적인 경향 때문에 민심이 공산당에서 이탈하고 있으니 공산당이 독선주의를 고집하지 말 것과 또 학생들을 정치전선에 몰아내지 말고 잠심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유의해달라는 요망을 하였다.

 

어제 박군 댁에서도 강신묵 씨에게 공산주의의 이념은 좋으나 조선공산당의 잘못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며, 소련과 스탈린을 우상화하지 말라고 하고 공산당의 사대주의를 시급히 청산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오늘 장씨에게도 젊은 공산주의자 중에 공산당을 유아독존으로 여기고 스탈린을 전지전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더니 그도 웃었다. (<역사 앞에서> 37-38쪽)


<역사 앞에서>를 세상에 내놓을 생각을 떠올리고 서중석에게 검토를 부탁했을 때 그의 검토 의견 첫 마디가 지금도 생각난다. “역시 중도 우파셨구먼요.” 분명히 그렇다. ‘개량주의자’라는 표현이 적확하다. 김성칠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린 1932년의 동아일보 농촌구제책 현상공모 당선작이 철저한 개량주의 입장이었고, 그 기본 입장은 1946년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도 우파 개량주의자도 공산주의(내지 사회주의) 원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좌익의 보다 바람직한 역할에 관해 좌익 운동가들과 스스럼없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같은 날 군정청 사람들과의 자리에 관한 기록은 이와 대조적인 분위기다. 도청의 부장들이라면 그 지역 우익의 중진급 인사들일 텐데, 그런 자리에서 민족과 사회의 장래를 걱정하는 이야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 그냥 우연한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밤에 화월식당에서 김의균 지사 이하 각 부장을 초대해서 연회가 있었다. 농상부장 서만달 씨가 여러 사람을 붙들어서 함부로 욕설을 퍼부어도 모두 감수하므로 부쩍 기수가 나서 종말엔 나를 대하여 이 자식 금융조합에 무슨 교무과가 필요하냐고 트집을 걸기에 너 같은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받아주었더니 노발대발해서 덤비었다. 아무리 술자리라 하더라도 그 아니꼬운 버릇을 고쳐주고 싶었으나 나는 주인 측이고 그는 손님이며 또 금융조합 전체의 일을 위하여 참고 자리를 비켰다. (<역사 앞에서> 38쪽)


 
Posted by 문천
2018. 2. 8. 10:41

Come to think of it, perhaps it is not only the teeth that we shed off through the course of life. Life may be just a process of distributing fragments of our minds and bodies to various places and various persons. They can be anything, either just a passing word, or a whole segment of our lives. We keep sowing them in our friends' minds, in a small plot of field, in a dirty alley of a decadent city, or in the open square of History.

 

As for me, I have left a good part of myself in the prisonhouse. It makes me feel cluttered, like a pulled-out tooth put in a formalin bottle. [Shenzi]

 

 

The essence of life is relationship, and relationship is realized through sharing. The prison puts restrictions to the inmates' sharing. All the South Korean population was in prison for 40 years until 1987. During the time its ability for sharing has shrinked to the degree of deformity. It will take still some more time for the Korean society to fully recover its sense of relationship, sense of life. [Orun]

 

'For Foreign Ey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We too will be one."  (0) 2018.02.19
anti-cold recipes  (0) 2018.02.13
holding a writing brush  (0) 2018.01.30
light and shadow  (0) 2018.01.23
unsimple life  (0) 2018.01.16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