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제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교단에서 가르치던 선생님들은 대개 일제시대의 황민교육을 받은 세대였으니, ‘사대주의’를 우리 민족사의 치욕으로 여기던 관점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겠죠. 대학에 들어가 역사를 전공하면서 비로소 이 말이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진출’을 위해 편의적으로 만들어진 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를 ‘事大’의 자세로 대했지요. 중국의 천자를 중심으로 한 천하체제는 중국이 주변국을 ‘冊封’하고 주변국이 중국에 ‘朝貢’하는 조공-책봉 관계로 운영되었는데, 사대는 조공의 자세였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脫亞入歐’를 표방하며 대륙 침략을 꾀할 때 중국 중심 천하체제가 ‘만국공법’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점을 공략했습니다. 조선과 관계를 새로 연 제물포조약(1876)은 물론, 청일전쟁의 성과인 시모노세키조약(1895)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열심히 명시한 까닭입니다.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조선에 영향력을 키우는 단계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전통적 한-중 관계를 폄하하고 부정하기 위해 조공-책봉 관계에 ‘사대주의’의 딱지를 붙였습니다. 이 딱지는 또한 한민족의 특성을 의존적인 것으로 규정해서 일본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하는 효능도 가진 것이었습니다.
‘사대주의’라는 말이 만들어진 이런 배경은 그 동안 많이 밝혀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이 힘을 잃고 과거의 대외관계에서든 현재의 국제관계에서든 ‘사대’의 원리가 스스럼없이 존중받아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을 ‘사대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를 ‘사대적’이라고 비판하는 반미주의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뜻으로 한 말이든 말 자체는 옳은 것 아닌가?” 하는 인식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인식에 어떤 허점이 있는지, 그런데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까닭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지 한 차례 살펴보겠습니다.
반성 없는 해방이 남긴 문제
73년 전의 ‘해방’이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역사를 공부할수록 하게 됩니다. 해방 전보다도 민족사회의 고통이 오히려 더 커졌다는 사실에서 시작된 생각이고, 더 들여다보면서는 한미관계의 비대칭성을 확인하면서 억압자만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뀐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더 넓고 깊게 살피면서는 일본 제국주의와 함께 한반도에 들어온 세계관과 가치체계가 이 땅에 계속 살아남고 자라나 왔다는 사실에서 더 큰 이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관과 가치체계는 이 사회의 관습과 제도, 나아가 학술연구 방법까지 지배해 왔기 때문에 그 문제점을 포착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체제 아래 시작되고 해방 후 독재정권이 추진한 ‘근대화’를 통해 전통시대와 다른 세계관과 가치체계가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에 따른 변화의 나쁜 점이 더러 불거지기도 했지만, (과도한 개인주의와 물신주의 등) 걸러내면 되는 지엽적 문제나 더 큰 가치를 얻기 위해 감수해야 할 필요악 정도로 보아 단편적이고 산발적인 문제 제기만 이뤄져 왔지요.
‘근대적 사고’가 지배해 온 것은 우리 사회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이에 대한 총체적 반성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냉전 종식이 큰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냉전 중에는 근대적 가치체계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있어도 상대 진영에 책임을 떠넘기거나 대결 상태의 긴장 때문에 문제 제기를 억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의 일원적 체제를 바라보는 데 장애가 없게 되면서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죠.
‘근대체제’에 대한 반성이 인류사회의 미래를 어느 방향으로 열어갈지 아직 분명하지 않은 문제가 많지만 윤곽이 차츰 떠오르고 있습니다. 특히 냉전 종식 전부터 제기된 환경 문제와 자본주의체제 문제가 윤곽을 파악하는 큰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과학사-문명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근대체제의 한계와 문제점을 생각해 왔는데, 그에 입각해서 국제관계의 원리에 대한 근대적 통념의 허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급변하는 정세 앞에서 민족사회의 진로를 내다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주의’로부터의 해방
자원-환경 문제는 1960년대 <침묵의 봄>, 1970년대 <로마클럽보고서> 이래 문제의식을 키워온 결과 지금은 인류사회 최대의 과제로 떠올라 있지요. 자본주의체제 문제 역시 1970년대 이래 I 월러스틴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론”이 확장되어 왔습니다. 저는 양쪽 다 연구결과의 일부만을 살펴보면서 문제의 윤곽만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깊은 수준의 토론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양쪽 문제에 공통되는 기반조건 두 가지를 짚어보고 싶습니다.
하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근대적 세계관의 편향성이라는 문제입니다. 문명 발생 이전에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였다는 사실에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문명의 발생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거리가 커지더라도 자연 밖으로 나가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세기 유럽의 이른바 과학혁명 이후 자연을 타자화(alienate)하는 풍조가 유행하기 시작했지요. 그 결과 자연을 소유와 이용의 대상으로 보며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우되 자연의 존엄성은 무시하는 ‘세속화’ 현상이 인류사회를 휩쓸었습니다. 지금 대통령 발의 개헌안의 ‘토지 공개념’ 논란도 그 한 끄트머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인간사회와 자연의 내부구조를 원자론의 관점으로만 보는 경향입니다. 모든 조직에는 원자론의 원리와 유기론의 원리가 함께 작용합니다. 그런데 19세기 초 J 돌턴의 원자론이 나오면서 존재의 근원을 “대등한 입자들의 물리적 결합”으로 규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유행했습니다. 인간사회 역시 “대등한 개인들의 물리적 결합”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 뒤를 따라 나오면서 사회과학 형성의 발판이 되었지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도 이 발판 위에 세워졌습니다. 19세기 말 원자 이하의 소립자 현상이 관찰되면서 물리학계에서는 원자론이 폐기되었지만, 사회과학계에서는 주류 학설의 근거로 유지되었고 사회체제 이념은 냉전기까지 그대로 지켜졌습니다.
우리가 20세기 내내 겪어 온 ‘근대화’란 이 두 가지 편향성을 내재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자연에 대해서나 사회에 대해서나 백 년 전의 조상들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방식이 문명화된 것이고 조상들의 방식이 미개한 것이었다고 흔히 생각하지요. 그러나 꼭 그런 것인지 널리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조동일 교수가 <동아시아문명론>(2010)에서 제기한 “중세화(medievalization)”가 눈길을 끕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대가 역사의 종착점이라고 하는 근대주의자들의 착각을 시정하고 근대를 극복하는 다음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지난 시기의 중세화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야 한다. 근대는 중세를 부정하기 위해서 고대를 계승한 시대였듯이, 다음 시대는 근대를 부정하기 위하여 중세를 계승하는 시대이다. (29쪽)
이제 역사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은 오판이다. 지금까지 선진이었던 곳이 파탄을 일으켜 만들어낸 착각이다. 과거에도 한 시대의 누구나 지배자는 자기 시대가 역사의 종착점이라고 주장했으나, 그 말대로 되지 않았다. (...)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전환은 근대에 후진인 곳에서 선도해 근대의 평가기준에서는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방법으로 시작된다. 유럽문명권의 침해를 받고 위축되어 있던 동아시아가 분발의 선구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63쪽)
이 방향 주장은 나온 지 오래지 않고, ‘근대’가 좋은 것이라고 하는 강고한 통념을 깨트릴 만큼 확실한 논거를 갖추고 있지는 못합니다. 다만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그냥 웃어넘길 수는 없을 만큼 근대체제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對明事大’에 나선 조선
‘중세적’이다, ‘봉건적’이다 하는 말은 ‘미개’하다는 뜻으로 쓰여 왔습니다. 이제 잠시라도 이런 근대적 통념을 제쳐놓고 ‘사대’의 의미를 한 차례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事大’는 ‘字小’(또는 事小)와 어울려 중국 고대, 적어도 춘추시대부터 천하 질서의 원리로 제시되어온 것입니다. <春秋左氏傳> 昭公 30년 조에 “禮라 함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고 큰 것이 작은 것을 아낌을 이르는 것”이라 하였고, <孟子> “梁惠王篇”에는 “仁이란 큰 것이 작은 것을 섬길 줄 아는 것이고 (…) 智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길 줄 아는 것이며 (…) 큰 것이 작은 것을 섬김은 하늘을 기쁘게 하는 일이고,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일이니, 하늘을 기쁘게 하면 천하를 지킬 것이요, 하늘을 두려워하면 나라를 지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만국공법’으로 대표되는 근대 국제관계관은 국가의 대소 구분을 무시하고 평등주권을 상정합니다. 원자론 속의 원자들이 평등한 것처럼 사회 속의 개인들도 평등하고 세계 속의 국가들도 평등하다는 것이지요. 반면 동아시아 조공체제에는 대소의 분별이 있었습니다. ‘사대’와 ‘자소’의 교환은 군주의 보호와 신하의 충성을 교환하는 봉건관계의 전형이었습니다.
명목상의 평등은 현실의 불평등을 은폐함으로써 약자 보호의 필요를 부정하는 수단으로 흔히 이용됩니다. 일본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규정하는 데 애쓴 것은 19세기 후반 유럽인의 세계정복 과정에서 만국공법이 이용된 사례의 하나일 뿐입니다. 동아시아 조공체제에서는 이와 달리, 약소국이 제 분수를 지키는 한 강대국에게 이를 보호하고 보살펴줄 책임이 있었습니다.
약소국에게는 조공체제가 대외 안보를 제공하는 이득이 있었죠. 한편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천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천하의 모든 세력을 끊임없이 힘으로 억누른다는 것은 오랫동안 계속하기 힘든 일입니다. 주변국에게 작은 존재로서 주체성을 인정해주는 타협책이 현실적으로 유용했습니다. 안보 측면에서 조공체제에는 호혜적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호혜적 효과의 단적인 사례를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설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1368년 건국한 명나라는 원나라로부터 천하를 넘겨받으면서 고려에게 원나라에 대하던 것과 같은 종속관계를 요구했습니다. 무리한 요구였지요. 오랜 기간에 걸쳐 왕실의 혈통부터 생활습속에 이르기까지 원나라와 쌓아온 밀착관계가 명나라와의 사이에는 없었으니까요.
1388년 위화도 회군에서 1392년 조선 개국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명나라 조정에 살벌한 긴장이 흐르던 시기였습니다. 1390년 胡惟庸의 옥(獄)과 1393년 藍玉의 옥은 건국 공신집단을 섬멸하다시피 한 명 태조의 친위쿠데타였지요. 대충 세워놓은 천하 지배를 절대권력으로 굳히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인 만큼 이웃 고려에 대해서도 명나라의 태도가 대단히 위압적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위화도 회군 후 회군파가 우왕, 창왕을 폐하면서 몽골 지배 이전의 신종(1197∼1204) 자손으로 원 황실과 혈연관계가 없는 인물을 공양왕으로 세운 데는 명나라를 안심시키려는 뜻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어쩌면 왕조 교체에까지도 원나라와 오래 얽혀 온 고려의 간판을 내림으로써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하려는 뜻이 들어 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 이념에 극히 투철한 조공-책봉 관계를 세우는 데는 명나라보다 조선 측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행을 잦게 하려 한 조선 측 노력에서 알아볼 수 있는 일이지요. 조선 건국세력은 중원의 통치자로 자리 잡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최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고려 말의 사회경제적 위기는 엄청난 수준이었습니다. 과전법 시행 등 당시 개혁의 기득권 혁파는[田民辨正] 혁명 수준이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강도 높은 개혁의 수행을 위해서는 대외관계의 안정이 또한 필요했는데, 조선 건국세력은 유가 이념에 투철한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안팎의 정책적 수요를 함께 충족시키는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초월적 권위의 역할
‘사대’의 ‘智’와 ‘자소’의 ‘仁’을 이야기한 <맹자> “양혜왕편”의 내용 중 ‘하늘[天]’의 역할에 눈여겨 볼 점이 있습니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양자 간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하늘을 낀 삼각관계로 그려진 것입니다.
세속주의와 합리주의에 길들여진 근대인의 감각으로는 초월적 존재의 역할이 한낱 레토릭으로만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전통시대 동아시아인들은 실존에 가깝게 느꼈고, 그 인식 속에 ‘하늘’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관계의 입체화를 통해 대립보다 협조의 측면이 더 잘 유도되도록 하는 것이죠. 비슷한 욕망을 가진 두 주체 사이에 관계가 끝난다면 욕망의 충돌이 관계를 지배하겠지만, 다른 차원의 또 하나 주체를 도입함으로써 충돌을 완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하늘’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새로운 방향으로 번져 갑니다. 근대세계의 인간중심주의가 지나쳐 ‘자연’과의 관계를 너무 경시해 온 풍조를 생각하다 보니, 전통시대의 초월적 존재에게는 ‘자연’을 대변하는 역할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문명의 발전에는 원래 자연에 대한 공격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 공격성이 적정선을 넘어서지 않도록 절제하는 데 종교와 신앙의 역할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근대 이전에는 문명권마다 세속권력을 초월하는 이념적 권위가 제도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유교문화권의 천자, 이슬람권의 칼리프, 그리고 기독교권의 교황 등등. 이념적 권위의 존재는 국가 간 관계가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발판을 갖게 함으로써 단기적이고 평면적인 관계가 과열에 빠질 위험을 억제해 주었습니다. 그 권위의 성격에 따라 인간사회와 자연 사이의 관계에도 배려가 돌아갈 여지가 있었지요.
그런데 ‘만국공법’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국가관계는 초월적 제3자의 역할을 배제합니다. 중국의 철학자 趙汀陽 교수는 <天下體系>(2005)에서 근대정치학에 ‘세계정치’의 영역이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세계를 책임지는 것은 단지 자신의 국가에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론에서 중국 철학의 관점이고 실천에서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천하’를 정치/경제적 이익에 관한 분석 단위로 삼아서 천하로부터 세계를 이해하는 것, 즉 ‘세계’를 사유의 단위로 삼아 문제를 분석하여 서양의 민족/국가의 사유 방식을 뛰어넘는 것이며, 세계를 책임지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새로운 세계 이념과 세계 제도를 창조하는 것이다. 세계 이념과 세계 제도는 역사적으로 줄곧 결여되었던 이 세계의 가치관이자 질서였다. 일찍이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과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에는 지금까지 모두 국가 이념만 존재했다. (...) 따라서 영국과 미국의 ‘세계 사유’는 단지 특수한 자신의 가치관을 널리 보급하여 보편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 타자는 생각할 만한 가치도 없는지를 증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합법성을 상실했다. (노승현 역 <천하체계> 12-13쪽)
중국의 정치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 즉 내가 말한 ‘천하체계’의 이론을 창조하려고 했다. 이것의 이론의 틀과 방법론은 서양의 정치철학과 매우 다르다. 먼저 이론의 틀에서 살펴보면 중국의 정치철학은 천하를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한 정치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딴 것에 앞서는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다. 이것은 국가의 정치 문제를 천하의 정치 문제에 종속시켜 이해하려고 한 것이자 천하의 정치 문제는 국가의 정치 문제가 근거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29-30쪽)
‘세계정치’를 포괄하는 새로운 정치철학의 형성을 위해 근대 정치학과 다른 기준과 방법이 필요하다는 趙 교수의 주장은 앞서 인용한 조동일 교수의 ‘중세화’ 주장과도 통하는 것입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태도에서 서양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중국에는 서양과 전혀 다른 세계관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모순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서양 사상이지만 조화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중국 사상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미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설적인 근거가 될 수도 있는 전혀 다른 사상인 세계관-가치론-방법론과 정치학-경제학-사회사상이 논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중국 사상에는 그런 것과 전혀 다른 세계관-가치관-방법론과 정치학-경제학 사회 이론이 숨어 있다. 그것은 서양 사상의 틀 안에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틀 안에서 표현해야 하고 아울러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28쪽)
‘小國主義’의 재발견
아인슈타인은 1945년 원자폭탄 투하를 보고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제창하며, 그것이 비현실적인 주장이라고 한다면 인류사회의 파멸이 불가피한 현실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세계정부’ 내지 ‘세계정치’의 필요성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더욱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유엔의 ‘세계정부’ 기능은 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정치’의 도입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국가주권입니다. ‘정치’란 구성원들의 권리와 의무를 조정하는 것인데, 국가주권을 절대시하는 통념이 인류사회에 대한 국가의 의무 설정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 통념을 벗어나 국가주권의 현실적 기준을 세우는 데는 역사 공부를 통한 현실 인식이 도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역사 공부는 반대 방향으로 많이 갔죠. 저는 <밖에서 본 한국사>(2008) “서언”에 이렇게 썼습니다.
민족 정체성에 대한 자신감을 새로운 차원에서 표출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우선 계량적 지표에 너무 얽매이던 상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역사가 길어야만 훌륭한 민족인가? ‘세계 최초’가 많아야만 뛰어난 민족인가? 내가 잘나기 위해 남을 깎아내려야 하는 계량적 사고는 사이비 과학성의 등에 업혀 근대역사학을 삭막한 싸움터로 만들어왔다.
금속활자를 생각해보자. 금속활자 발명은 한민족의 자랑거리다. 그런데 금속활자 출현의 배경조건은 중국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인쇄술의 기초 기술을 중국에서 받아왔을 뿐 아니라 서적의 수요 또한 중국문명 도입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한민족이 중국문명의 단순한 수용을 넘어 그 발전에 주동적 역할까지 맡은 하나의 사례가 금속활자였다. 이것을 경쟁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며 중국보다 앞섰다는 사실만을 내세우는 것은 그 발명의 진정한 의미를 외면하는 편협한 관점이다. (12쪽)
한 개인에게도 자존심은 너무 적어도 안 좋고 너무 많아도 안 좋은 특성이지요. 국가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대세계에서 국민국가의 흥기를 위해 민족적-국가적 자존심 고취 작업이 대대적으로 행해졌고,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후의 유럽에서는 이를 범죄시하는 반동이 일어났습니다. “상상의 공동체”, “전통의 발명” 같은 비판도 그런 분위기에서 나왔지요.
우리 사회에 국가적-민족적 자존심에 대한 집착이 비교적 강한 것은 특이한 식민지 경험의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대개의 식민지는 전혀 생소한 배경으로부터 나타난 ‘외계인’에게 정복당한 것이었는데, 우리 민족은 바로 이웃나라, 그것도 대충 낮춰봐 오던 이웃나라에게 당했다는 점이 특이하지요. 굴욕감과 우월감이 뒤얽혀 콤플렉스 현상을 빚어낼 조건입니다.
최원식 교수는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2009)에서 유가사상의 ‘小國主義’에 주목하고 민족문제 해결에도 그 원리를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남한’과 ‘북조선’이 하나의 나라가 되는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느슨한 연방 또는 국가연합이 통일의 최종단계라도 무방하다는 소(小)한국주의를 국민적 합의 아래 안팎에 천명하는 작업이 긴절하다. 그런데 소한국주의는 어떤 통일에도 반대하는, 또는 냉담한, 소국주의가 아니다. 분단체제의 극복과정에서 출현할 사회란 “한결같이 가난을 나누는 사회라기보다 각자가 넉넉하면서도 검약과 절제를 터득한 사회, 그리고 사회 차원에서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물질적 부(富)를 축적하되 그 처분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즉 ‘공빈(共貧)’보다는 ‘중용(中庸)’ 혹은 ‘중도(中道)’에 친숙한 소국주의라고나 할까. (30-31쪽)
최원식 교수의 ‘소국주의’ 주장이 ‘어울림’을 중시하는 데 저는 깊이 공감합니다. 민족문제의 해결이 민족 내부에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생각하면 외부와의 관계를 원만히 할 궁리가 필요한데, 자존심만 앞세우는 대국주의로는 그런 궁리가 어렵겠지요. 민족 화해가 민족 구성원들에게 이로운 측면만이 아니라 인류사회에 혜택을 가져올 측면에 생각을 더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최 교수는 ‘소국주의’ 이념이 ‘事大’의 자세를 요구한다고까지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수에 맞춰 禮를 갖추는 것은 유가 ‘소국주의’의 필수 요소였지요. 하지만 큰 나라가 ‘字小’의 자세를 갖추지 않는데 작은 나라 쪽에서만 ‘事大’에 나서는 것은 굴종이지요. “효도도 손발이 맞아야”라는 옛말처럼, 전체 시스템이 이뤄져야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런 시스템의 성립을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제국’과 ‘제국주의’
위키피디어에는 “empire"와 ”imperialism“이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An empire is defined as "an aggregate of nations or people ruled over by an emperor or other powerful sovereign or government, usually a territory of greater extent than a kingdom, as the former British Empire, (...) or Roman Empire".
Imperialism is an action that involves a nation extending its power by the acquisition of inhabited territory. It may also include the exploitation of these territories, an action that is linked to colonialism. Colonialism is generally regarded as an expression of imperialism.
권력이 국경을 넘어 작용한다는 현상만을 그렸을 뿐, 원리나 의미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조동일 교수의 “중세” 설명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앞의 책 15-16쪽)
문명권은 중세라고 불러 마땅한 시기에 생겼다. 고대에는 세계 몇몇 곳에서 각기 특이한 문명이 일어나고 그 밖의 다른 지역은 변화가 더디었다. 고대문명은 창조의 주역이 홀로 위대하다는 자기중심주의를 특징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공자가 동아시아인이 된 5세기 무렵에 중세화가 시작되어 중세문명의 시대에 들어섰다. 고대문명에서 이룩한 유산을 내용이나 지역에서 대폭 확대해 참여자는 누구나 대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보편주의 가치관을 이룩한 것이 중세문명의 특징이다. 보편주의 가치관이 공동문어로 표현되고, 세계종교로 구성되었다.
저는 근대 이전의 제 문명이 근대문명보다는 보편성을 중시했다는, 바꿔 말하면 근대문명이 보편성을 경시하는 특성을 가졌다고 하는 조 교수의 관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보편주의 가치관의 또 하나 표현으로 ‘제국’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문화진화론에서는 인류 전체의 역량이 구성원 개개인 역량의 산술적 합계보다 크다는 사실을 문명의 ‘협력적’ 속성으로 설명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문명의 본질이 대립-경쟁보다 협력에 있다는 것은 복잡한 언어를 발전시킨 데서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지요. 경쟁과 투쟁에는 그렇게 복잡한 언어가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명사회의 인간관계의 기조는 조화와 협력에 있는 것이고 갈등과 대립은 부분적, 일시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죠. 정치 역시 갈등의 축소, 해소에 기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문명의 초기 단계에서 빚어진 작은 규모 정치조직들이 문명 발전에 따라 접촉 범위가 넓어질 때, 상호관계를 최대한 원만하게 만드는 상부구조를 만든 것이 ‘제국’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런데 문명 발전의 어느 단계에서는 협력보다 경쟁을 중시하는 상황이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기술 발전의 중요한 고비를 넘길 때, 자원 공급의 규모가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낭비를 걱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소비가 미덕”이라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 되면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는 심리로 무한경쟁을 벌이게 되지요.
유길준의 <서유견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라 안의 물산에는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 자연적인 것은 무궁하고 인공적인 것은 유한하지만, 자연적인 물산이 인공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금이나 구슬 같은 보화라도 지푸라기나 흙처럼 천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라 안에서 공업에 대해 연구하게 되면 자연적인 물산이 비록 모자라더라도 세계 각국의 물산이 다 그 나라로 몰려들 것이다. (허경진 역 <서유견문>, 326쪽)
<서유견문>은 19세기 말 시점에서 서양인의 생각을 소개한 글입니다. 산업혁명의 성과에 도취되어 기술만능주의(Taylorism)가 횡행하던 시절이지요. 자연을 무궁한 것으로 보던 관점이 무색하게 된 지금은 그 때 당연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에 의문을 품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그중 국가주의를 반성 대상으로 제시하며, 국가체제를 넘어서는 “제국의 부활”을 생각해보도록 여러분께 권합니다.
‘제국주의’라는 말은 제국의 진정한 의미와 관계없이 쓰여 온 말입니다. 제국이 사라진 시대에 제국의 껍데기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근대세계의 제국주의였습니다. 국가주의의 극복이 아니라 국가주의의 극한이었습니다.
“사대주의자”로 매도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바라는 바를 감추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가 속한 국가가 ‘사대’를 할 만한 대상이 있기 바랍니다. 중국의 천자가 ‘천명’을 의식하며 약자에 대한 횡포를 삼갔듯, 인류사회와 자연 사이의 관계를 의식해서 겸손한 자세를 지킬 줄 아는 강자의 출현을 바라고, 우리 사회의 노력도 그 출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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