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2> 요즘 미국을 보며<下>

기사입력 2002-09-13 오전 10:18:00

  영어의 ‘trigger-happy'를 굳이 번역해 온다면 ‘방아쇠가 마렵다’고 할까? 총을 가지고 있으면 방아쇠를 당기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린다는 말이다. 미국처럼 총이 흔하지 않은 사회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주먹이나 칼을 쓰는 데도 이와 비슷한 어감의 표현이 없다. ‘주먹이 근질댄다’ 정도로는 ‘trigger-happy'보다 훨씬 약하다.
  
  미국 사회는 가끔씩 방아쇠가 마려운 경관들 때문에 발칵 뒤집힌다. 연전 뉴욕에서 무기도 가지지 않은 한 흑인 청년이 자기 아파트 현관 앞에서 불심검문을 받다가 집중사격을 당해 죽은 일이 대표적인 예다. 서아프리카에서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말도 짧은 이 청년이 신분증을 꺼내려던 것인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자 마구 갈겨 버린 것이다. 마흔 몇 발을 맞고 죽었다는 보도에는 경찰 폭력에 둔감해진 미국 시민들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모양이다.
  
  탈레반 정권이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 보고 무너지는 것을 보며 뉴욕의 그 가엾은 청년이 생각난다. 탈레반이 뉴욕 테러의 범인이었다는 증거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설령 탈레반이 범인이었다 하더라도,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가 뉴욕테러보다 엄청나게 컸다. 살인용의자 하나를 체포하기 위해 도시 하나를 통째로 폭격한 격이다. 미국이 세계경찰을 자임하지만 아프가니스탄 국민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시민으로 여기지 않은 셈이다.
  
  방아쇠가 마려운 이 경관이 이번에는 이라크에 총구를 겨누고 있다. 그 뒤에 손볼 용의자로 ‘악의 축’이니 뭐니 하며 명단까지 작성해 놓고 있다. 이 경관은 용의자를 법정에 보낼 생각도 없다. 전에 자기가 과테말라에서 한 짓이 고발당했다고 해서 국제형사재판소의 권위를 부정한 그 경관이다. 이라크의 혐의를 유엔에서 조사하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무조건 총질부터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경찰뿐 아니라 어떤 공권력도 힘과 정당성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정당한 권력이라도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뜻을 관철할 힘을 가져야 한다. 또, 아무리 강한 권력이라도 보편적 원리에 입각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깡패나 군벌의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정당성을 민주주의적 기준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하고, 인권의 기준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 인권사회가 성립하는 것이다.
  
  미국은 유엔을 무시하고 국제형사재판소를 부정하는 등 국제질서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용의자들을 자기 손으로 체포하고 처단하겠다고 설치고 있다. 그 정당성을 우기는 명분은 단 하나, 테러리즘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가능하고 타당한 일일까?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 대중, 또는 개인을 상대로 예측불가능한 폭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행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테러리즘’ 정의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이란 “다른 수단을 추가한 정치적 관계의 연장”일 뿐이라고 정의했다.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국제 테러리즘은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다. 예측불가능하다는 점, 즉 국가 단위의 선전포고가 없다는 점만이 일반 전쟁과 다른 점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대립하는 의견이 없을 수 없다. 이 대립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지만, 일상적 정치로 처리되지 못하는 갈등이 있고, 이것이 쌓이면 전쟁이라는 과격한 수단을 통해 큰 폭의 조정을 겪는다. 국가 단위의 전쟁이라는 익숙한 수단이 의미를 잃게 된 유일 초강대국의 시대에는 이 갈등이 테러리즘의 형태로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미국은 테러리즘의 조직분쇄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권 테러리스트들은 이슬람세계의 자원이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체제에 착취당하고 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횡포에 무엇보다 분노하고 있다. 조직을 분쇄한다고 해도 이 불만과 분노는 해소되지 않는다. 자살테러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만드는 이 불만과 분노가 있는 한 알 카에다 수준의 조직은 언제 어디서라도 만들어진다.
  
  미국이 세계경찰로서 세계질서를 가능한 한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더 확실한 정당성이 필요하다. 세계경찰인 동시에 한 국가의 정부이므로 그 국가의 이익을 도외시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국민 한 명 다쳤다고 해서 남의 나라 사람 열 명, 백 명이라도 쓸어버리겠다고 날뛰어서는 불만과 분노를 온 세계에 키우고 테러리즘이 넘쳐나는 세계를 만들게 될 것이다.
  
  어틀랜틱 먼슬리 지 기자 로버트 카플란은 ‘무정부시대가 오는가’에서 ‘위험한 평화’를 이야기한다. 비극을 피하려면 비극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극의 감각을 지우는 완벽한 평화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 불가능이 다행한 일이라고 말한다. 절대적 평화는 인간을 현재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게 만들어 사회가 천박한 편안함 속에 썩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평화를 바라는 세계인의 대다수는 미국이 무너지기보다 정신차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현세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미국인들이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기 바란다. 군사력에만 의지해서는 테러리즘의 위협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자라나게 되어 있다.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세계 평균과 똑같이 하지는 않더라도 두 배 정도만 하면 안 되는가? 다섯 배는 너무 많다. 사람의 목숨 값도 세계 평균의 두 배 정도만 생각하면 안 되는가? 열 배는 너무 많다.

Posted by 문천
2009. 12. 25. 09:13

일요일 밤을 요양원에서 지내본 것은 9월 하순 큰형이 다니러 올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며칠 틈을 내 다녀가는데 숙소 계획이 불안정해서는 안 되니까 확인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침에 일어나 생각하니, 이렇게 식전 새벽에 어머니를 뵙는 게 참 모처럼의 일이었다. 병원에 계실 때 거의 매일 찾아갔지만, 새벽에 막 깨어나신 모습을 뵌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한 주일 전 와 뵐 때에 비해 이런저런 일에 대한 반응이 무뎌진 느낌을 받았는데, 새벽 시간의 모습을 뵈니 이곳의 일상에 이제 익숙해지신 결과라는 생각이 분명히 든다. 바람을 쐬어 드릴까, 불경을 함께 외울까, 책을 읽어 드릴까, 뭘 권해 드려도 큰 열정 없이 "뭐 그래도 좋겠지." 정도 반응이시다. 처음에는 기운이 없으시거나 마음이 어두우신 건 아닌가 걱정도 살짝 됐는데, 쭉 살펴보니 그런 건 아니다. 생활의 여러 요소들이 만족스럽고 편안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꼭 그래야지." 하는 집착이나 열정이 안 일어나시는 것 같다.

이야기하시는 태도에서 이 점이 제일 분명히 확인된다. 원장님이나 안경 할머니가 자극을 드리기 위해, 또는 얘기의 재미를 위해 어머니 말씀 내용을 걸고 들어갈 때, 좀체 말려들지 않으신다.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태도시다. 말씀을 하시더라도 "들으려면 듣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상대방이 그 말씀을 꼭 듣게 하려는 욕심 없이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털어놓으시는 기분이다. '소통'을 거부하시는 건 아니다. 다만 그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신 것으로 보인다.

새벽부터 내 얼굴이 보이니까 기분좋은 기색이시다. 빙긋이 웃음을 띠고 가만히 누워 한참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그 전 주 왔을 때, 낮잠에서 깨어 내가 와 있는 것을 보셨을 때와 비슷한 태도였다. 좋은 건 좋은 건데, 요란을 떨 일은 아니고, 그냥 조용히 누리면 되는 일.

한참 웃음을 입가에 걸고 누워 계시다가 불쑥 뜻밖의 한 마디. "어째 그리 훤하냐?"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고 덧붙이신다. "니 얼굴."

밝은 쪽으로 표현이 나오실 때는 수선을 피우거나 너스레를 떨어 그 기분을 북돋워 드리는 게 좋다. "어머니, 그게 제 마음도 밝고 어머니 마음도 밝으신 덕분 아니겠어요? 제 마음이 어두우면 얼굴이 훤할 리가 없고, 어머니 마음이 밝지 못하시면 제 얼굴이 아무리 훤한들 훤하게 보이겠습니까?"

이런 상대주의 관점에는 거의 본능적으로 긍정 태도를 보이신다. 고개를 마구 끄덕이시는 것을 보며 한 번 찔러보았다. "어머니, 근데 지금 제 얼굴이 훤하다고 하시는 건 전에 훤하지 않던 것과 비교하시는 말씀 같아요. 제가 전에는 얼굴이 훤하지 못했죠?"

표현의 이면을 짚는 이런 화법이 지금 어머니 정신상태로 바로 파악이 될지 자신이 없지만 시도해 본다. 금강경 강독할 때를 비롯해 철학 토론 비슷한 화법을 기회 있을 때마다 어머니에게 시도하는데, 생각 밖으로 익숙하게 받아들이실 때가 많다. 90 노인이 현상을 뛰어넘는 추상적 사고력을 능란하게 구사하시는 걸 어쩌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기절할 것처럼 놀라기도 한다. 지난 3월 현대병원에서 물리치료를 시도할 때 심한 거부 반응을 보이신 것은 치료사가 시도한 화법에 제일 큰 문제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확실한 자신 없이 찔러본 말씀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바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어 한참 말없이 계시다가 어눌하게 한 마디 하신다. "그래... 네가... 참 어두웠지." 기억력이 크게 퇴화하셨지만, 이런 식의 자극에는 꽤 깊이까지 생각이 돌아가시는 것 같다.

아침 식사도 깨끗이 비우셨다. 전날 저녁과 아침 식사 모두 방에서 내가 먹여드렸다. 그곳 생활방식대로 홀에 나가 노인들 틈에서 드시게 하고 싶기도 했지만, 요번에는 좀 바짝 관찰을 하고 싶었다. 이빨 없이 식사하시는 데 별 문제를 느끼지 않으신다. 김치를 한 쪽 드려 보니 맛은 다 빨아 잡숫고 섬유질 덩어리를 혀로 밀어내 잇몸 바깥에 모아놓고 치워 달라는 시늉을 하신다.

휠체어에 세 시간 가량 앉아 계시더니 "힘들다." 말씀을 거듭하신다. "누우시겠어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눕혀 드리니 금세 잠이 들어 코까지 고신다. 9시 반. 원래 계획보다 한 시간 빨리 곁을 떠나게 되었다.

이번 방문에선 원장님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일요일은 그곳에 사시는 원장님이 근무를 맡으시는 모양이다. 활동력이 좋으신 것으로 보아 한참 젊은 분으로 생각했다가 차츰 보면서 원숙한 면모를 느끼게 되었는데, 밤 여덟 시 취침시간 뒤에 차 한 잔 함께 하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나보다 한 살 위시다. 그 나이로도 각별히 깊이 있는 성품으로 느껴진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재주가 우선 놀랍다. 어머니를 이해하는 데 도움될 만한 얘기를 좀 한다고 하다 보니 나 혼자만 얘기를 한 꼴이 되어 아쉽다. 원장실은 놔두고 노인들 방에 끼어 잠까지 주무시는 그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분 얘기도 더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 8, 27  (0) 2009.12.27
09. 8. 17  (0) 2009.12.27
09. 7. 12  (0) 2009.12.25
09. 7. 6  (0) 2009.12.25
09. 7. 1  (0) 2009.12.25
Posted by 문천
2009. 12. 25. 09:08

늦은 아침식사 후에 공주를 떠나 폭우를 뚫고 요양원에 도착하니 11시 55분.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점심식사가 나왔다. 원장님이 한 번 식사 대접을 해보라고 권해서 이곳에 모신 후로는 처음으로 식사를 떠먹여 드렸다.

손을 씻고 와 보니 된장국에 벌써 밥을 말아 한 숟갈 떠 잡숫고 있었다. 이제 숟갈질도 정 급하면 하실 만큼 팔이 풀리신 것은 반가운 일인데, 아직 불안한 수준이시다. 식판 위에 흘려놓으신 밥이 입에 넣으시는 밥의 절반 분량은 되어 보인다.

이빨 없이 식사를 하시니 병원에선 꼭 죽으로 대접하고 반찬도 믹서로 갈아서 내 왔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밥을 드리고 반찬도 원래 모양대로 드려 보았더니 소화에 아무 문제가 없으셔서 계속 그렇게 드리기로 했단다. 정상적 생활에 최대한 접근시켜 드리려는 노력이 가상하다.

묵직한 놋그릇과 놋수저를 쓰는 것도 참 탐탁한 일이다. 집단배식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집체생활의 분위기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 질 좋은 그릇과 수저를 쓴다는 것이 '생활의 질'을 추구하는 자세를 은연중에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얼마동안 휠체어에 앉아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허리가 아프다며 눕고 싶어하신다. 그래도 식후 바로 눕혀드릴 수 없어 30분 가량 휠체어 산책을 시켜드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이사장님이 3층은 아직 비어 있으니 산책에 더 편할 거라고 안내를 해주었다. 복도 끝, 바닥까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휠체어에 앉아서도 밖을 넓게 내다볼 수 있는 곳에 주차시켜 드렸더니 하염없이 내다보시다가 불쑥 한 마디 하신다. "고향에 온 것 같다."

더 일찍 모셔오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지난 2년간이 어머니께는 '잃어버린 세월'이다. 숲을 바라보실 수 있고, 정원의 풀과 꽃을 만져보실 수 있고, 함께 지내는 노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는 생활을 빼앗기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빼앗긴 세월이 지금의 평안을 뒷받침해주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2년 전까지 절에서 계실 때 얽매여 계시던 집착에서 그 세월을 통해 벗어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주어진 것들을 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찾아갔다가 떠날 때 "고맙다. 와줘서." 하시는 말씀도 내 반응을 헤아리기보다 자연스럽게 나오시는 것으로 느껴진다.

내가 곁에 더 있어 드렸으면 하는 마음도 물론 있으시다. 식사가 나올 때 내가 손 씻으러 나오려니까 곁에 있던 원장님에게 "저 놈 또 도망가네, 도망가." 하는 말씀은 장난기가 곁들인 것이긴 하지만, "도망"이란 말이 불쑥 나오신 것은 붙잡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 것 아니겠는가. 산책을 끝내고 침대에 눕혀드린 다음 담배 한 대 피우러 "어머니,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했더니 "야, 자꾸 도망가지 마라. 네가 없으면 나 심심해." 하고 칭얼 모드로 나오신다.

직원들이나 다른 노인분들을 대하시는 방식은 어리숙 모드를 기조로 하시는 것 같다. 아버지 일기에 붙이신 글을 보면, 경성제대 나온 여자가 시골마을에서 살림하고 들어앉아 있으면서 행여 마을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일으키지 않도록 어리숙한 체하신 이야기가 있다. 당시 여성으로서 0.0001%의 고학력자가 세상을 순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리숙한 체하는 노력을 부단히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몸에 배어, 요양원에서도 인간관계의 긴장감을 피하려는 노력이 무의식중에 나타나시는 것 같다. 내가 도착한 것을 보고 곁에 있던 원장님이 "이 분 누구세요?" 하면 "내 아들이구만." 하시지만 이어 "몇째 아드님이세요?" 여쭈면 "잘 모르겠어요. 야! 너 몇째냐?" 천연덕스럽게 나오시는 것이다.

차에 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오는데 현관 앞에 있던 이사장님이 커피 한 잔 하자고 청하신다. 생각 밖으로 얘기가 길어져서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분이 말씀하고 나는 듣는 식인데, 말씀 내용은 요양원 사업을 이렇게 잘하려고 애쓴다는 홍보지만, 무리한 자기과시가 별로 없이 합리적인 이야기여서 맞장구쳐 드리며 앉아 있기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미국의 형이 9월 하순에 어머니 뵈러 올 계획을 원장님께 인사 전화 드린 김에 얘기를 해놓아서 이사장님도 알고 있었다.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눈 김에 혹시 싶어서 그 얘기를 꺼냈다. 이천 시내 호텔에 묵으면서 어머니 뵈러 들어오려 하는데, 식사 때마다 오락가락하기가 힘드니 여기서 직원들과 같이 식사를 할 수는 없겠냐고. 그러자 펄쩍 뛰면서 그런 상황에 뭐 호텔에 묵으실 필요가 있냐, 2,3일 같으면 자기 집에서라도 지내시게 해드리겠다고.

한 건 올려놓은 흐뭇한 기분으로 더욱더 열심히 맞장구를 쳐드리며 앉아 있다 보니 이사장님의 원래 사업 분야가 종이 장사였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고종사촌 영규 형님 생각이 떠올랐다. 연배도 비슷하고 재산 규모로 보아 사업 규모도 비슷한 차원이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사촌형님도 그 분야 사업을 하신 분이 있는데..." 얘기를 꺼냈더니 누구냐 묻고, 이름을 댔더니 깜짝 놀라신다. 사업 하던 시절에 아주 가깝게 지낸 사이라며, 이런저런 집안 사정까지 다 짚어서 이야기를 하신다. 그러고는 지금까지와도 다르게 나를 남 아닌 사람으로 대하시는 기색이 역력하다.

집에 돌아와 영규 형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 모신 곳이 어떠냐고 묻다가 그곳 이사장님이 형님 아는 분이더라 했더니 어리둥절하다가 이름을 대 드리니 역시 깜짝 놀라며 반가워한다. 그분이 하는 요양원이라면 잘할 것을 믿을 수 있다, 외숙모님도 뵙고 그 친구도 보러 빨리 한 번 가봐야겠다고 덧붙인다.

그거 참... 영규 형님 가까운 분이 하시는 데로 모시게 된 것도 공교로운 일이지만, 그런 사정이 이렇게 바로 밝혀지게 된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전에 비해 남의 얘기 들어주는 능력은 확실히 늘어났다. 이사장님이 편안하고 재미있는 얘기상대로 여겨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영규 형님이 언제고 어머니 뵈러 왔다가 그분과 얼굴을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모르고 지낼 수도 있는 일 아니었겠나. 아무튼 이사장님이 어머니를 남 아닌 분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어머니 생활에 이것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 8. 17  (0) 2009.12.27
09. 7. 19-20  (0) 2009.12.25
09. 7. 6  (0) 2009.12.25
09. 7. 1  (0) 2009.12.25
09. 6. 27  (0) 2009.12.23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