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8>

기사입력 2002-12-14 오후 3:12:29 

 20년 전 한 친구가 검찰을 떠난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란 일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 천재로 날렸던 이 친구의 재능이 새로운 유형의 검사로 자리잡는 데 쓰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고, 통상적 정치이념에 초연한 세계관이 그를 정치바람에서 보호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구상진 변호사를 만나 옷 벗은 경위를 설명듣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친구의 수학적 감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단순명쾌한 문제였던 것이다.
  
  반공법인지 보안법인지에 걸린 한 피의자가 자신은 “초등학교 때부터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젊은 구 검사가 보기에 이것이 피의자의 혐의를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는 무혐의 불기소 결정을 내렸고, 얼마 후 옷을 벗었다.
  
  “유죄를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가 피의자의 자백일 때는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형법 원리가 80년대초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구 검사가 무혐의 결정을 내린 이유였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구 변호사는 그 결정이 인권을 위한 것이었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법률의 정확한 적용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할 뿐이다.
  
  10월 초 켈리 대사가 방북했을 때 북한의 핵 개발 자백을 받아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북한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고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른 중유 공급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은 그 대응으로 기본합의의 자기 쪽 이행사항인 핵시설 봉인을 풀겠다고 나서고 있다.
  
  북한은 켈리 대사에게 핵 개발을 시인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개발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제네바 기본합의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의 핵 개발에 대해서는 자기네가 하건 말건 남에게 확인해 줄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중유 공급 중단이 형식상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결정이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의지에 따른 것임이 명백하다. 그 결정을 앞두고 한국의 통일부 장관이 이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다고 같은 나라 외무부 관리가 바로 반박하고 나서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벌어지지 않았던가.
  
  중유 공급 중단은 북한의 핵 개발 혐의에 대한 판결의 의미를 가진 결정이다. 개인이 법률을 통해 사회 속에서 신분과 권리를 보장받듯 국가는 조약을 통해 국제사회 속에서 위치와 권리를 보장받는다. 북한의 위치와 권리를 보장하는 기제의 일부인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기하거나 보류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공민권을 제한하는 형벌을 내리는 것과 같은 조치다.
  
  이 제재가 타당한 것인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겹겹이 안고 있는 결정이다. 북한이 “할 수도 있다”고 하는 범위의 핵 개발이 정말로 국제질서에 벗어나는 것인가? 그런 사업을 추진한 사실을 북한이 인정했다고 하는 켈리의 증언에 절대적 증거능력이 있는가?
  
  미국은 상식과 합리성을 벗어난 북한 압박정책을 강행하면서 ‘북한의 의도’를 들먹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북한은 상식과 합리성을 지키고 있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봉인해제를 정중히 요청함으로써 이것이 미국의 제네바 기본합의 위반에 대한 대응조치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긴장사태 해소를 위한 열쇠가 미국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지금의 상황을 왜 만들고 있는가, ‘미국의 의도’가 더 궁금하다.
  
  인도양의 북한 화물선 나포가 이 궁금증을 많이 줄여 준다. 미국은 북한을 ‘불량국가’로 각인하고 싶은 것이다. 켈리 한 개인의 증언으로 일방적 선전은 할 수 있지만 설득력이 없다. 이것을 꼬투리로 중유 공급을 중단하면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기본합의가 깨어지면 북한의 핵 위험성을 제한 없이 선전할 수 있게 된다.
  
  북한을 위험한 나라로 만들면 미국에 무슨 이득이 있는 것일까? 테러전쟁의 세계화를 바라는 것일까? 군수산업의 호황을 바라는 것일까? 동북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바라는 것일까? 이런 것들을 바라는 미국인들도 있겠지만 정말 미국 전체를 위해서라면 잘못된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부시의 공화당 정권을 위해서는 큰 이득이 있을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 뿌리깊은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미국의 국익을 고려해 줄지언정 부시와 공화당의 당파적 이익에 한국의 정책이 얽매여서는 안될 것이다. 더구나 부시의 강경책이 관철될 경우 이 나라에 몰고 올 장기적 파장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지난 연초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북한이 아무런 꼬투리를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테러전쟁의 분위기에 편승해 나온 언어폭력이었다. 아무 근거 없이 적개심을 보이는 상대가 다시 몰상식하고 불합리한 압박을 가해 온다 해서 무조건 발가벗고 두 손 들 것을 북한 아니라 누구한테도 기대할 수 없다.
  
  제네바 기본합의가 파괴되면 북한은 국제통제에서 벗어난 핵 개발로 나아가게 되고 이 지역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게 된다. 이것이 한국에게 바람직한 길인가?
  
  KEDO에서 한국이 미국의 의지에 굴복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중유 공급 중단이라는 제네바 기본합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행위를 결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는지, 한국이 따지지 않는다면 누가 따질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제네바 기본합의 파기로 가장 크고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북한 다음으로 한국인데.
  
  20년 전 구상진 검사를 질곡에 빠뜨린 형법 원리로 되돌아가 보자. 자백이란 유사 이래 재판관들이 가장 편리하게 이용해 온 증거다. 이것을 얻어내기 위해 고문이란 것도 생겨났다. 자백의 증거능력 약화는 피의자 인권 보호를 위한 획기적 조치였다.
  
  미국이 켈리 대사를 통해 자백을 받아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KEDO의 중유 공급 중단을 요구한 것은 북한의 국권을 철저하게 무시한 행위다. 그 결과가 제네바 기본합의의 전면파기에까지 이를 것을 내다보게 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국익을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눈치만 보며 ‘business as usual', 놀던 대로 놀아도 되는 걸까? 제네바 기본합의가 날아가든 말든, 북한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이어 3번타자가 되든 말든, 미국 주둔군만 치외법권으로 모시고 지내면 평화와 번영의 길이 보장되는 걸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에게도 “NO"라고 말할 줄 아는, 북한의 비핵 보장을 미국보다 앞장서서 주선해 줄 수 있는 정권이 한국에도 들어서기 바란다.

'페리스코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소국의 선택  (0) 2009.12.26
미국이 북한과 싸우려는 이유  (1) 2009.12.26
동물을 사랑합시다  (3) 2009.12.26
이런 法도 있구나  (0) 2009.12.26
‘문화의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나  (0) 2009.12.26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7>

기사입력 2002-12-05 오전 10:44:09 

 인간과 동물 사이는 어떤 관계인가. 서양의 주류사상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절대적 경계가 있다고 보았다. 구약성서 창세기편에서는 세상 만물이 인간의 지배를 받으며 동물도 그 일부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보았다. 근세에 와서는 데카르트가 동물을 영혼이 없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설명했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모든 동물이 인간과 함께 윤회의 고리들을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모든 동물을 인간과 함께 진화의 흐름 속에 자리잡은 존재로 본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절대적 구분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와 통하고 지금의 인간보다 더 진화된 존재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인간제일주의에서 벗어나는 경향도 있다.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도 인간과 동물의 절대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것이든 짐승의 것이든 참혹한 시체를 보면 마음이 언짢고, 인간이든 짐승이든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괴롭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다. 인간과 덩치가 아주 차이 나거나 신체구조가 크게 다른 동물, 예컨대 곤충이나 물고기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덜 느끼는 것이 보통이나 인간과 비슷한 동물이라 하더라도 인간에게와 똑같은 동정심을 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정상적인 인간의 동정심은 모든 동물에게 미친다.
  
  서양의 주류사상에서 동물을 인간과 격리시키려 한 것은 문명단계에 들어와서 농경보다 목축에 비교적 비중을 많이 둔 때문이라고 하는 설명이 있다. 늘 잡아먹어야 하는 동물에 대해 동정심을 억누르고 살해행위의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관념의 주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미 펜실베이니어 대학의 제임스 서펠 교수는 ‘동물과 함께 하는 세상 (In the Company of Animals)’이라는 책에서 동물과의 관계는 문명 발생과 함께 인간이 가지게 된 문제라고 설파한다. 원시상태의 인간은 여러 동물들 중의 하나로서 다들 하는 것처럼 쫓고 쫓기고 치고 받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었는데, 문명을 가지고 동물을 키우게 되니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잡아먹기 전까지 내 손으로 먹이 주고 돌보면서 남의 동물 아닌 ‘내 동물’로 정을 들여 놓았는데 막상 잡아먹으려면 뭔가 내 식구 죽이는 것처럼 찜찜하고, 저항도 못하는 놈을 죽이려니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책을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법을 동원하게 되는데, 서펠 교수는 이것을 절연, 은폐, 책임전가, 왜곡의 네 영역으로 구분한다.
  
  절연(detachment)은 관념을 이용한다. 앞에서 말한 서양 주류사상이 대표적인 예다. 어느 심리학자는 실험실의 쥐가 관념화되는 현상을 다룬 논문에서 ‘좋은 쥐’ ‘나쁜 쥐’ ‘먹이용 쥐’의 구분을 지적했다고 한다.
  
  좋은 쥐는 실험대상으로서, 동물학대방지의 기준이 적용된다. 좋은 쥐가 도망쳐 통제에서 벗어나면 나쁜 쥐가 되므로 어떻게 잡아죽여도 상관없다. 다른 실험동물사료로 쓰이는 먹이용 쥐에게는 또 별도의 기준이 적용된다.
  
  은폐(concealment)는 동물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대부분 유럽 언어에서 쇠고기, 돼지고기, 사슴고기를 가리키는 단어들이 소, 돼지, 사슴의 단어들과 별도로 쓰이는 것이 그 예다.
  
  근대화된 세계에서 공장화된 목축장과 도살장은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게 자리잡는다. 그리고 개체로서의 동물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대량사육에도 은폐의 효과가 있다. 가공육의 개발도 같은 원리로 육류 소비 촉진에 도움이 된다.
  
  책임전가(shifting the blame)는 문명 초기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수법이다. 기르던 동물을 잡으면서 제사 올릴 귀신들이 요구해서 부득이 죽인다든지, 동물의 수호신이 동물을 더 좋은 곳으로 보내 이승을 떠나게 하는 것이라든지, 여러 가지 핑계가 여러 종족의 풍속에서 발견된다고 서펠 교수는 소개한다. 근대세계에서 일부 동물을 ‘해로운 동물(vermin)'로 규정해 인간에 대한 죄악을 박멸의 명분으로 삼는 것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왜곡(misrepresentation)도 관념화의 일종인데, 동물의 종류에 따라 인간의 특성 중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뒤집어씌우는 수법이다. 게으르고 더러운 돼지, 비굴한 개, 음흉한 고양이, 멍청한 소(양, 당나귀), 교활한 여우, 흉포한 곰, 탐욕스러운 늑대, 등등 끝이 없다.
  
  가축의 경우 이런 규정은 자기충족성을 가지기 때문에 딱하기도 하다. 돼지는 더러운 동물이라 해서 더러운 환경 속에서만 살게 하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만다. ‘꼬마돼지 베이브’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이런 고약한 운명을 깨뜨려 보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동물의 딱한 사정에 동정심을 느끼며 읽다 보니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런 수법이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근년 미국의 대외정책에 납득하기 어려웠던 측면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절연: “미국은 다른 모든 나라와 다른 특별한 나라야. 근대세계 최초의 공화국인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국가니까. 미국 이외의 국가에는 무슨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있어. 그런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기네 문제니까, 미국만 흔들리지 않게 지키고 있으면 다른 나라들도 미국을 따라오게 되어 있어. 인류평등 좋아하네. 자기네 나라를 미국처럼 만들어놓은 뒤에 평등 얘기하라고 그래.”
  
  은폐: “전쟁터에서 군인과 군인이 마주치는 일을 극력 피해야 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추를 눌러 게임 하듯 사람을 죽여야 해. 피해자들에 대한 구체적 보도는 최대한 막거나 어렵게 해야 해. 물론 우리쪽 피해내용은 최대한 극적으로 광고해야 하지.”
  
  책임전가: “우리는 아프간인을 좋아하고 이라크인을 사랑하지만 탈레반과 후세인 때문에 부득이 공격하는 거야. 아프간인과 이라크인이 더러 죽고 다치고 고생도 하겠지만, 탈레반과 후세인 밑에서 영원히 신음하기보다는 우리에게 감사해야지. 더러 몰지각한 자들이 우리를 원망한들 어쩔 거야. 탈레반과 후세인을 날치게 놔둔 자기들 잘못을 탓해야지.”
  
  왜곡: “이라크가 유엔 사찰수용하겠다고? 그러니 경제제재를 풀라고? 후세인이 어떤 놈인지 아직도 모르는구먼. 두고봐, 목을 조인 채 몇 달만 지켜보면 본색을 드러낼 거야.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도 있다고 그랬다고? 그거 개발하고 있다는 얘길 거야. 걔들 얘기는 무조건 최악의 뜻으로 해석하면 돼. 악의 축이잖아? 제네바 합의를 우리 쪽에서만 어기고 있다고? 맘대로들 떠들라고 그래. 우리 나팔이 훨씬 더 크니까. 우리 말 안 듣겠다는 건 바로 세계평화를 등지겠다는 뜻이야. 그걸 우리가 증명해 보여야 해.”
  
  히틀러의 시대를 살아 보지 않았지만 대개 비슷한 수법들이 판을 쳤을 것 같다. 우리 모두 동물을 불쌍히 여길 줄 압시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6>

기사입력 2002-12-02 오전 10:28:35 

 운전병이 먼저지? 관제병이 먼저라고? 그럼 관제병 들어오라고 해요.
  자네가 관제병인가? 자네가 탄 궤도차량에 한국 애들이 깔려죽었다고 하는데,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지? 혹시 자네 책임은 아닌가? 돌발사태가 벌어지면 운전병한테 알려서 위험을 피하게 하는 게 관제병 책임이잖아?
  
  뭐라고? 잘 안 들려. 좀 큰 소리로 말해 주게. 아니, 그렇다고 소리까지 지를 건 없고. 알았어. 50미터 전방, 20미터 전방에서 두 차례나 운전병한테 경고를 보냈다는 거지? 지금 하는 것처럼 씩씩한 목소리로 말해준 거지? 그렇다면 자네는 당연히 무죄지. 누가 자네를 재판받으라고 이리 보냈는가? 할 일도 없는 걸.
  
  아, 검사, 자네가 보냈다고? 이 친구가 운전병한테 경고를 보냈다는 증거가 없다고? 그럼 경고를 안 보냈다는 증거가 있는가? 이봐,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풍토병에라도 걸린 게 아닌지 진찰 좀 받아보게. 유죄를 주장하려면 입증할 증거를 검사가 내놔야지, 피고한테 무죄 입증 증거를 내놓으라는 거야? 우리가 지금 마녀재판하고 있는 줄 아는가? 운전병이 경고를 안 받았다고 그랬다고? 아니 이보게, 운전병 말만 믿고 우리가 전도유망한 이 피고인의 장래를 망치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본인은 경고를 보냈다고 하잖아?
  
  배심원 여러분, 잘 들으셨죠? 피고인은 사고에 앞서 운전병에게 적절한 경고를 보냈다고 자신있는 어조로 확고한 진술을 해주었습니다. 검사는 경고를 못 들었다는 운전병의 말만을 근거로 피고인의 진술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만, 운전병은 피고인과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신빙성을 가질 수 없으므로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과연 이 전도유망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이 청년이 문제된 사고에 조금이라도 책임이 있는지 여러분께서 잘 판단해 주시기를 믿습니다. 평결 부탁합니다.
  
  평결 결과 잘 받았습니다.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피고인의 무죄를 평결했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자리에서 피고인의 석방을 명합니다. 아울러 아무런 잘못도 없이 사고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의심을 받아 피고인의 신분으로 이 법정에까지 끌려오게 된 고초에 대해 재판장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표합니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도 재판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최선의 협조를 베풀어준 데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재판을 이만 마칩니다. 누구시죠? 프레시안 기자라고요? 짤막하게 물어봐 주세요. 내일 또 재판이 있어서 준비에 바쁩니다.
  
  네,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에게 저도 개인적으로 깊은 애도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미국인들은 한국에 손님으로 와 있으면서 주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되겠죠. 그래서 저도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사건의 엄정한 처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이 재판에 임하고 있습니다.
  
  네? 관제병의 무죄판결이 엄정한 처리냐고요? 기자님, 그런 질문을 하시기 전에 미국의 법체계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미국은 1류 중의 1류 국가입니다. 어떤 3류 국가처럼 여론재판이 판치는 나라가 아닙니다.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미국에서는 죄지은 사람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는 일이 없도록 법체계를 운용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처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잖습니까? 내일 재판을 지켜봐 주십시오. 아마 미국 법체계의 엄정한 운용에 혀를 내두르시게 될 겁니다. 그럼 이만 실례...
  
  자, 오늘은 운전병 차례지? 들어오라고 해요.
  자네가 운전병인가? 자네가 몰던 궤도차량에 한국 애들이 깔려죽었다며? 자네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관제병이 경고를 보냈다고 하던데 왜 멈추지 않았지?
  뭐라고? 아무 경고가 없었다고? 자네는 운전수칙에 따라 차를 몰았고, 자네의 시야에는 길 옆의 애들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항력이었다는 거지? 그렇다면 자네의 과실치사 혐의는 근거가 없는 거구만. 과실이 없다면 죄가 될 수가 없지. 그런데 죄도 없는 자네를 누가 여기 보냈지?
  
  아, 검사, 자네가 보냈다고? 이 친구가 관제병한테 경고를 안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그럼 경고를 받았다는 증거가 있는가? 이봐,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풍토병에라도 걸린 게 아닌지 진찰 좀 받아보게. 유죄를 주장하려면 입증할 증거를 검사가 내놔야지, 피고한테 무죄 입증 증거를 내놓으라는 거야? 우리가 지금 마녀재판하고 있는 줄 아는가? 관제병이 경고를 보냈다고 그랬다고? 아니 이보게, 관제병 말만 믿고 우리가 전도유망한 이 피고인의 장래를 망치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본인은 경고를 안 받았다고 하잖아?
  
  배심원 여러분, 잘 들으셨죠? 피고인은 사고에 앞서 관제병에게 아무 경고도 받지 않았다고 자신있는 어조로 확고한 진술을 해주었습니다. 검사는 경고를 보냈다는 관제병의 말만을 근거로 피고인의 진술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만, 관제병은 피고인과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신빙성을 가질 수 없으므로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과연 이 전도유망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이 청년이 문제된 사고에 조금이라도 책임이 있는지 여러분께서 잘 판단해 주시기를 믿습니다. 평결 부탁합니다.
  
  평결 결과 잘 받았습니다.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피고인의 무죄를 평결했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자리에서 피고인의 석방을 명합니다. 아울러 아무런 잘못도 없이 사고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의심을 받아 피고인의 신분으로 이 법정에까지 끌려오게 된 고초에 대해 재판장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표합니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도 재판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최선의 협조를 베풀어준 데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재판을 이만 마칩니다. 누구시죠? 성조지 기자라고요? 잘 왔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내 방으로 갑시다.
  
  아, 묻지 않아도 뭐가 궁금한지 압니다. 한국인들 뚜껑 열리겠죠. 하지만 우리가 어느 나라 군인이고 어느 나라 기잡니까? 미군 사기 앙양하는 것이 우리 임무죠. 한국인들 달래는 거야 다른 부서에 전문가가 있고 담당자가 있지 않습니까? 워낙 냄비라서 뚜껑이 잘 열리기도 하지만 마침 선거판이 진진하게 돌아가니까 금방 잊어버릴 겁니다. 아무튼 기사 잘 부탁합니다. 한국인들이 혹시 읽으면 돌아버릴 정도로 뻔뻔스럽게 긁어 주세요. 그래야 우리 애들이 시원해 할 겁니다. 이런 재판을 맡은 나 같은 행운아도 미군의 영웅으로 뜰 거고요.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