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5. 09:13

일요일 밤을 요양원에서 지내본 것은 9월 하순 큰형이 다니러 올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며칠 틈을 내 다녀가는데 숙소 계획이 불안정해서는 안 되니까 확인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침에 일어나 생각하니, 이렇게 식전 새벽에 어머니를 뵙는 게 참 모처럼의 일이었다. 병원에 계실 때 거의 매일 찾아갔지만, 새벽에 막 깨어나신 모습을 뵌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한 주일 전 와 뵐 때에 비해 이런저런 일에 대한 반응이 무뎌진 느낌을 받았는데, 새벽 시간의 모습을 뵈니 이곳의 일상에 이제 익숙해지신 결과라는 생각이 분명히 든다. 바람을 쐬어 드릴까, 불경을 함께 외울까, 책을 읽어 드릴까, 뭘 권해 드려도 큰 열정 없이 "뭐 그래도 좋겠지." 정도 반응이시다. 처음에는 기운이 없으시거나 마음이 어두우신 건 아닌가 걱정도 살짝 됐는데, 쭉 살펴보니 그런 건 아니다. 생활의 여러 요소들이 만족스럽고 편안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꼭 그래야지." 하는 집착이나 열정이 안 일어나시는 것 같다.

이야기하시는 태도에서 이 점이 제일 분명히 확인된다. 원장님이나 안경 할머니가 자극을 드리기 위해, 또는 얘기의 재미를 위해 어머니 말씀 내용을 걸고 들어갈 때, 좀체 말려들지 않으신다.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태도시다. 말씀을 하시더라도 "들으려면 듣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상대방이 그 말씀을 꼭 듣게 하려는 욕심 없이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털어놓으시는 기분이다. '소통'을 거부하시는 건 아니다. 다만 그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신 것으로 보인다.

새벽부터 내 얼굴이 보이니까 기분좋은 기색이시다. 빙긋이 웃음을 띠고 가만히 누워 한참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그 전 주 왔을 때, 낮잠에서 깨어 내가 와 있는 것을 보셨을 때와 비슷한 태도였다. 좋은 건 좋은 건데, 요란을 떨 일은 아니고, 그냥 조용히 누리면 되는 일.

한참 웃음을 입가에 걸고 누워 계시다가 불쑥 뜻밖의 한 마디. "어째 그리 훤하냐?"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고 덧붙이신다. "니 얼굴."

밝은 쪽으로 표현이 나오실 때는 수선을 피우거나 너스레를 떨어 그 기분을 북돋워 드리는 게 좋다. "어머니, 그게 제 마음도 밝고 어머니 마음도 밝으신 덕분 아니겠어요? 제 마음이 어두우면 얼굴이 훤할 리가 없고, 어머니 마음이 밝지 못하시면 제 얼굴이 아무리 훤한들 훤하게 보이겠습니까?"

이런 상대주의 관점에는 거의 본능적으로 긍정 태도를 보이신다. 고개를 마구 끄덕이시는 것을 보며 한 번 찔러보았다. "어머니, 근데 지금 제 얼굴이 훤하다고 하시는 건 전에 훤하지 않던 것과 비교하시는 말씀 같아요. 제가 전에는 얼굴이 훤하지 못했죠?"

표현의 이면을 짚는 이런 화법이 지금 어머니 정신상태로 바로 파악이 될지 자신이 없지만 시도해 본다. 금강경 강독할 때를 비롯해 철학 토론 비슷한 화법을 기회 있을 때마다 어머니에게 시도하는데, 생각 밖으로 익숙하게 받아들이실 때가 많다. 90 노인이 현상을 뛰어넘는 추상적 사고력을 능란하게 구사하시는 걸 어쩌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기절할 것처럼 놀라기도 한다. 지난 3월 현대병원에서 물리치료를 시도할 때 심한 거부 반응을 보이신 것은 치료사가 시도한 화법에 제일 큰 문제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확실한 자신 없이 찔러본 말씀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바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어 한참 말없이 계시다가 어눌하게 한 마디 하신다. "그래... 네가... 참 어두웠지." 기억력이 크게 퇴화하셨지만, 이런 식의 자극에는 꽤 깊이까지 생각이 돌아가시는 것 같다.

아침 식사도 깨끗이 비우셨다. 전날 저녁과 아침 식사 모두 방에서 내가 먹여드렸다. 그곳 생활방식대로 홀에 나가 노인들 틈에서 드시게 하고 싶기도 했지만, 요번에는 좀 바짝 관찰을 하고 싶었다. 이빨 없이 식사하시는 데 별 문제를 느끼지 않으신다. 김치를 한 쪽 드려 보니 맛은 다 빨아 잡숫고 섬유질 덩어리를 혀로 밀어내 잇몸 바깥에 모아놓고 치워 달라는 시늉을 하신다.

휠체어에 세 시간 가량 앉아 계시더니 "힘들다." 말씀을 거듭하신다. "누우시겠어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눕혀 드리니 금세 잠이 들어 코까지 고신다. 9시 반. 원래 계획보다 한 시간 빨리 곁을 떠나게 되었다.

이번 방문에선 원장님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일요일은 그곳에 사시는 원장님이 근무를 맡으시는 모양이다. 활동력이 좋으신 것으로 보아 한참 젊은 분으로 생각했다가 차츰 보면서 원숙한 면모를 느끼게 되었는데, 밤 여덟 시 취침시간 뒤에 차 한 잔 함께 하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나보다 한 살 위시다. 그 나이로도 각별히 깊이 있는 성품으로 느껴진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재주가 우선 놀랍다. 어머니를 이해하는 데 도움될 만한 얘기를 좀 한다고 하다 보니 나 혼자만 얘기를 한 꼴이 되어 아쉽다. 원장실은 놔두고 노인들 방에 끼어 잠까지 주무시는 그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분 얘기도 더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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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