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요즘 미국을 보며<上>

기사입력 2002-09-11 오전 9:19:11 

  걸프전쟁을 끝내면서 당시의 부시 미 대통령은 "우리는 드디어 베트남 콤플렉스를 이겨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반세기의 가상적국 소련의 퇴장 이후 무적의 미 군사력을 유감없이 과시했으니 '역사의 종말'은 아니라도 '전쟁의 종말'을 맞았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미국에게는.
  
  그로부터 10년 후 미국의 심장부가 테러 벼락을 맞았다. 남북전쟁 후로 미국 본토가 겪어본 적 없는 최악의 공격을 이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맞은 것은 어찌된 일인가.
  
  냉전시대는 평화가 없는 시대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나라가 잠재적 전쟁의 불안에 잠겨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모든 나라가 불안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대형 전쟁을 억제하는 역설적 논리가 통할 수 있었다. 미-소 두 나라가 가진 '확실한 상호파괴능력(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이었다.
  
  군사력의 균형에 입각한 이 논리가 경제력의 불균형 아래 무너지고 난 뒤 미국은 '확실한 일방파괴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에 도전하는 어느 나라도 미국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기 전에 철저하게 파괴될 정도의 군사력 격차다. 미국은 이 격차를 지키고 키우기 위해 다른 모든 나라를 합친 것과 같은 수준의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다. 모든 나라가 미국을 두려워하면 어느 나라도 감히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미국밖에는.
  
  강한 힘을 가진 것만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깡다구가 있어야 하고 독기가 있어야 한다. 미국은 베트남전 때부터 이 점을 투철하게 인식했다. 닉슨은 "소련인들이 나를 비이성적 행동도 불사할 인물로 인식한다면 미국 국익을 위해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미치광이 이론(mad man's theory)'이라는 이름을 얻은 원리였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미치광이 같은 행태, 미국이 선택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두 축이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아프가니스탄을 작살내러 나서면서 "반테러전쟁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의 적"이라고 선언하는 데서 이 두 축이 분명히 드러난다. 과연 이것이 세계와 미국을 안전한 곳으로 만드는 길이 될 수 있을까?
  
  뉴욕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임을 당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참혹과 암울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이라도 확인한다면 '테러 응징'의 상징적 효과라도 있을텐데, 그나마도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아프간 대학살'이 정당한 것은커녕 미국에 별로 이익이 되지도 못하는 것이었다는 인식이 미국인 사이에도 널리 일어나고 있다.
  
  뉴욕 테러에 대해 '맹목적 보복'이라는 처방은 별로 약효를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테러 1주년을 계기로 이 처방을 더 고단위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다. 부작용이 클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적극 동조하던 유럽국들은 회의적인 태도로 돌아서고 있고 미국을 지지하던 아랍국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미국내 여론의 지지도 엄청나게 약화되었다. 전쟁 수행중에는 지지도가 올라가겠지만 고단위 마약과 같은 효과일 뿐이다.
  
  탈냉전시대에 미국은 '세계경찰'의 역할을 자임했다. 이 '경찰'이 어떤 경찰일까? 경찰관이 업무중에 총기를 원칙적으로 휴대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경찰의 도덕적 권위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경찰관이 모습만 나타내도 완력이나 화력을 쓸 필요 없이 대개의 분쟁을 정리해 줄 수 있는 사회다. 그런데 미국 경찰은 어떤가? 이른바 세계경찰의 의미가 미국식 경찰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다른 곳에서 배워 왔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질서 유지의 선봉인 경찰에 대한 공격은 질서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협이며, 다른 어떤 위협에 대해서보다도 철저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찰이 습격당했다고 해서 누구 짓인지 확인도 않은 채 평소 밉보인 녀석들을 즉결처분하러 돌아다닌다면 경찰의 자격에 문제가 있다. 온 세계인이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경찰의 권고와 지시에 따르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인가,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인가? 경찰이 시민에게 신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려고만 든다면 그 자체가 테러체제로 전락하고 만다.
  
  한 사회 안에서 누군가가 압도적 힘을 독점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요소가 되기 쉽다. 소련의 견제를 벗어난 무적의 군사력 자체가 세계평화의 불안요소이며 미국 자신에게도 큰 짐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소련을 상대로 익힌 미치광이 춤사위를 혼자서도 싫증내지 않고 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신명나는 춤을 어울려 함께 추려고 나서는 자들이 없을 수 없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