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5. 09:08

늦은 아침식사 후에 공주를 떠나 폭우를 뚫고 요양원에 도착하니 11시 55분.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점심식사가 나왔다. 원장님이 한 번 식사 대접을 해보라고 권해서 이곳에 모신 후로는 처음으로 식사를 떠먹여 드렸다.

손을 씻고 와 보니 된장국에 벌써 밥을 말아 한 숟갈 떠 잡숫고 있었다. 이제 숟갈질도 정 급하면 하실 만큼 팔이 풀리신 것은 반가운 일인데, 아직 불안한 수준이시다. 식판 위에 흘려놓으신 밥이 입에 넣으시는 밥의 절반 분량은 되어 보인다.

이빨 없이 식사를 하시니 병원에선 꼭 죽으로 대접하고 반찬도 믹서로 갈아서 내 왔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밥을 드리고 반찬도 원래 모양대로 드려 보았더니 소화에 아무 문제가 없으셔서 계속 그렇게 드리기로 했단다. 정상적 생활에 최대한 접근시켜 드리려는 노력이 가상하다.

묵직한 놋그릇과 놋수저를 쓰는 것도 참 탐탁한 일이다. 집단배식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집체생활의 분위기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 질 좋은 그릇과 수저를 쓴다는 것이 '생활의 질'을 추구하는 자세를 은연중에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얼마동안 휠체어에 앉아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허리가 아프다며 눕고 싶어하신다. 그래도 식후 바로 눕혀드릴 수 없어 30분 가량 휠체어 산책을 시켜드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이사장님이 3층은 아직 비어 있으니 산책에 더 편할 거라고 안내를 해주었다. 복도 끝, 바닥까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휠체어에 앉아서도 밖을 넓게 내다볼 수 있는 곳에 주차시켜 드렸더니 하염없이 내다보시다가 불쑥 한 마디 하신다. "고향에 온 것 같다."

더 일찍 모셔오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지난 2년간이 어머니께는 '잃어버린 세월'이다. 숲을 바라보실 수 있고, 정원의 풀과 꽃을 만져보실 수 있고, 함께 지내는 노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는 생활을 빼앗기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빼앗긴 세월이 지금의 평안을 뒷받침해주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2년 전까지 절에서 계실 때 얽매여 계시던 집착에서 그 세월을 통해 벗어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주어진 것들을 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찾아갔다가 떠날 때 "고맙다. 와줘서." 하시는 말씀도 내 반응을 헤아리기보다 자연스럽게 나오시는 것으로 느껴진다.

내가 곁에 더 있어 드렸으면 하는 마음도 물론 있으시다. 식사가 나올 때 내가 손 씻으러 나오려니까 곁에 있던 원장님에게 "저 놈 또 도망가네, 도망가." 하는 말씀은 장난기가 곁들인 것이긴 하지만, "도망"이란 말이 불쑥 나오신 것은 붙잡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 것 아니겠는가. 산책을 끝내고 침대에 눕혀드린 다음 담배 한 대 피우러 "어머니,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했더니 "야, 자꾸 도망가지 마라. 네가 없으면 나 심심해." 하고 칭얼 모드로 나오신다.

직원들이나 다른 노인분들을 대하시는 방식은 어리숙 모드를 기조로 하시는 것 같다. 아버지 일기에 붙이신 글을 보면, 경성제대 나온 여자가 시골마을에서 살림하고 들어앉아 있으면서 행여 마을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일으키지 않도록 어리숙한 체하신 이야기가 있다. 당시 여성으로서 0.0001%의 고학력자가 세상을 순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리숙한 체하는 노력을 부단히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몸에 배어, 요양원에서도 인간관계의 긴장감을 피하려는 노력이 무의식중에 나타나시는 것 같다. 내가 도착한 것을 보고 곁에 있던 원장님이 "이 분 누구세요?" 하면 "내 아들이구만." 하시지만 이어 "몇째 아드님이세요?" 여쭈면 "잘 모르겠어요. 야! 너 몇째냐?" 천연덕스럽게 나오시는 것이다.

차에 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오는데 현관 앞에 있던 이사장님이 커피 한 잔 하자고 청하신다. 생각 밖으로 얘기가 길어져서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분이 말씀하고 나는 듣는 식인데, 말씀 내용은 요양원 사업을 이렇게 잘하려고 애쓴다는 홍보지만, 무리한 자기과시가 별로 없이 합리적인 이야기여서 맞장구쳐 드리며 앉아 있기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미국의 형이 9월 하순에 어머니 뵈러 올 계획을 원장님께 인사 전화 드린 김에 얘기를 해놓아서 이사장님도 알고 있었다.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눈 김에 혹시 싶어서 그 얘기를 꺼냈다. 이천 시내 호텔에 묵으면서 어머니 뵈러 들어오려 하는데, 식사 때마다 오락가락하기가 힘드니 여기서 직원들과 같이 식사를 할 수는 없겠냐고. 그러자 펄쩍 뛰면서 그런 상황에 뭐 호텔에 묵으실 필요가 있냐, 2,3일 같으면 자기 집에서라도 지내시게 해드리겠다고.

한 건 올려놓은 흐뭇한 기분으로 더욱더 열심히 맞장구를 쳐드리며 앉아 있다 보니 이사장님의 원래 사업 분야가 종이 장사였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고종사촌 영규 형님 생각이 떠올랐다. 연배도 비슷하고 재산 규모로 보아 사업 규모도 비슷한 차원이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사촌형님도 그 분야 사업을 하신 분이 있는데..." 얘기를 꺼냈더니 누구냐 묻고, 이름을 댔더니 깜짝 놀라신다. 사업 하던 시절에 아주 가깝게 지낸 사이라며, 이런저런 집안 사정까지 다 짚어서 이야기를 하신다. 그러고는 지금까지와도 다르게 나를 남 아닌 사람으로 대하시는 기색이 역력하다.

집에 돌아와 영규 형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 모신 곳이 어떠냐고 묻다가 그곳 이사장님이 형님 아는 분이더라 했더니 어리둥절하다가 이름을 대 드리니 역시 깜짝 놀라며 반가워한다. 그분이 하는 요양원이라면 잘할 것을 믿을 수 있다, 외숙모님도 뵙고 그 친구도 보러 빨리 한 번 가봐야겠다고 덧붙인다.

그거 참... 영규 형님 가까운 분이 하시는 데로 모시게 된 것도 공교로운 일이지만, 그런 사정이 이렇게 바로 밝혀지게 된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전에 비해 남의 얘기 들어주는 능력은 확실히 늘어났다. 이사장님이 편안하고 재미있는 얘기상대로 여겨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영규 형님이 언제고 어머니 뵈러 왔다가 그분과 얼굴을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모르고 지낼 수도 있는 일 아니었겠나. 아무튼 이사장님이 어머니를 남 아닌 분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어머니 생활에 이것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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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