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 후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경교장에서는 의례적 일정이 줄어들고 실질적 활동이 늘어났다. 27일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 허헌과의 연이은 회담이 김구의 국내 정치활동의 본격적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비서 장준하는 네 사람의 프로필을 작성해 드리라는 엄항섭의 지시를 26일 저녁때 받았다.


당시 27세 청년이던 장준하(1918~75)는 1941년 일본에 유학, 신학교에 다니던 중 1944년 초 학도병으로 징집되었고, 반년 후 중국 서주 부근에서 탈영, 광복군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OSS(미국 전략첩보대) 훈련을 받고 공작활동을 위한 국내 진입을 준비하고 있다가 종전이 되자 김구의 비서로 함께 귀국했다.


장준하는 1941년 초까지 국내에, 그리고 1943년 말까지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임정 요인들보다 국내 사정과 민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후의 <사상계> 활동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뛰어난 저널리스트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네 사람의 프로필 작성을 부탁받았을 것이다. 김구가 네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라서가 아니라 장준하의 도움을 통해 보다 객관적이고 안정된 시각을 얻고자 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장준하가 작성한 프로필을 보면 역시 김구가 필요로 하는 객관적이고도 적절한 시각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져 보인다. 따라서 장준하 개인의 시각보다 그 시점에서 김구가 국내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 프로필에 더 크게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경수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209-213쪽)


<송진우> 거구장신의 인.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강한 민족주의자. 명분-전통을 존중하고 굽히지 않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집결한 인물 중의 하나로 실무 수장격. (...)

고하(송진우)는 인공 수립 다음날인 9월 7일 그에 대결키 위하여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국민대회수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그 위원장이 된다. 이 자리에서 고하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하루속히 겨레의 총의를 결집시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며 맞아들여 이 정부가 직접 활동을 개시하는 날까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대기하기로 합시다.” (...) 9월 16일 천도교 강당에서 한민당이 결성되어 고하는 그 위원장에 취임하는데 그 이전에 한민당 발기인 명의로 ‘인민공화국 타도와 임시정부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여운형> 이미 우리가 학생 시절부터, 그리고 중국에서 입국한 이래 가장 많은 정보를 들어온 인물. 학생-체육인에게 인기가 높으며 풍채 좋고 말 잘하고 활동적인 사람으로 널리 알려짐. 그의 정치 노선은 사회주의 좌파 경향일 뿐 공산주의자는 아닌 것으로 분석되나 극렬 공산주의자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해방되기 훨씬 전에 일본에게 정권을 이양하라고 투쟁을 벌인 일도 있다. (...) 김성수의 말을 빌리면 “밥상은 몽양이 차려놓고 그걸 먹는 사람은 공산주의라”라는 말이 정설.

그의 대 임정 태도는 다음의 11월 8일자 신문 담화에 그대로 나타남. “나의 선배로서도 환영해야겠지만 혁명 전선의 서배로서 나는 공손한 마음으로 (김구) 선생의 귀국을 고대하고 있다. 선생이 귀국하여 조선을 보시는 눈과 민중의 소리를 듣는 귀가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공정하실 줄 믿는 마음에서다.”


<안재홍> 사회주의 우파 경향의 인물. 일반 지식층과 언론계에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다. 경교장에 인사차 왔을 때 본 인상은 걸음걸이가 우리의 전통적 선비 걸음이고 큰 키에 체구는 가는 편의 신사. 건준의 부위원장으로 있었지만 여운형과는 의견차가 컸다. 특히 건준의 실권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장악되어 있는 데 대한 불만으로 (...) 대 임정 태도는 11월 9일자 신문에 발표한 그의 성명에 나타난다.

“쌍수를 들어 김구 선생 일행의 환국을 환영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영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김구 선생에게 기대하는 바 간절하다. 혹 세평에는 중국 임시정부가 민족 파쇼적 경향을 갖지 않았나 하고 말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나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김구 선생은 나이가 많으시나 열렬한 민족주의자이시다. 동지 제씨의 의견을 경청하여 만사를 결정하고 독단으로 가는 길을 피하는 분이라고 들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조선에 오시어도 결코 과오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의 이 같은 대 임정 태도는 그후 11월 15일자 신문 보도에서 좀 더 명확한 친 임정 태도로 바뀐다. “3천만 대중이 민족 통일 강화와 정식 정부 확립을 갈망하는 이즈음 임시정부 중진 제씨가 당당하게 광복 국가의 새 수도가 될 서울에 들어오게 된 것은 분명히 세기적인 감격이라 하겠다.” 앞서의 성명에서와 같은 ‘민족적 파쇼’니 ‘독단으로 가는 길을 피하는’ 등의 경고적인 어투가 일언반구 없는 기대와 환영 일변도이다.


<허헌> 건준의 확대위원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인물. 사회주의 좌파 경향의 변호사 출신으로 날카롭고 강한 의기의 소유자라는 중평. 부위원장 당선으로 안재홍은 저절로 물러나고 여운형과 좋은 콤비가 되었지만 그 역시 공산주의자들에게 포위된 상태. 9월 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의 ‘인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 조직 법안’을 통과시키고 그 법에 의한 ‘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킴. 그들이 발표한 조각은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1월 7일 이승만이 정식으로 그 주석 취임을 거부하고 미군정에서도 이를 정당이나 사회단체로 인정할 수 있으나 정부 표방은 불가라 하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이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구분이다. 이 구분의 기준은 형식적으로는 ‘공산당’을 표방하느냐 여부에 있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마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좌익과 극좌의 구분과 비슷했을 것 같다.


김구가 임시정부를 지켜온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양상의 하나가 좌익과의 투쟁이었다. 중국의 국민당 정권에 의지하는 상황에도 원인의 일부가 있었겠지만, 실제 독립운동의 흐름에서 사회주의가 민족주의와 경쟁하는 측면이 있었다. 민족혁명의 동력만으로 식민지배 극복이 어렵다는 인식 위에서는 계급혁명이 자연스럽게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즉 우익의 의미가 국내와 국외 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국외에서는 민족주의가 곧 ‘항일’이었다. 그런데 국내에는 ‘친일 민족주의’의 설 자리가 있었다. 조관자의 논문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소수)가 보여주는 것처럼 민족주의 자체가 본질적으로 ‘항일’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었고, 일본 식민지배가 현실적 힘을 가진 국내 상황에서는 ‘민족의 힘’과 ‘민족의 영광’을 추구하는 민족주의가 식민지배와 타협하는 길이 있었다.


그래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라는 말도 널리 쓰이게 된 것인데, 여운형, 안재홍, 허헌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사회주의 원리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넷 중 송진우 하나가 ‘타협적 민족주의자’인 셈인데, 이것은 우리의 ‘친일파’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보다 중립적 표현으로는 ‘협력자 collaborator’라 할 수 있다. 원론적 의미에서는 민족주의자로 볼 여지가 있어도 현실적으로는 민족주의자로 보기 힘들 만큼 왜곡된 형태였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가 이론의 여지없는 진정한 민족주의자였고, 그들은 대개 사회주의자로도 인식된 사람들이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계 인사로 비타협적 태도를 지킨 사람들만이 사회주의와 관계없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다.)


장준하의 프로필에서 여운형을 ‘사회주의 좌파’로, 안재홍을 ‘사회주의 우파’로 구분했다. 당시 국내의 사회주의자라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겸비한 사람인데, 어느 쪽을 기조로 삼느냐에 따라 좌파와 우파를 구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김구 등 임정 주류의 ‘사회주의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넓혀지기 바라는 장준하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김구 등 임정의 민족주의자들은 1930년대 국내에서 민족주의 일부가 민족개량주의와 자치운동 등 식민지배에 협력적 태도로 항일운동을 저해하고 나아가 1940년대 들어서는 전쟁 노력에까지 참여한 사정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민족주의의 정통을 지켜온 그들에게 민족주의의 문호 정리가 해방 후의 첫 번째 임무였다. 입으로만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과거의 식민지배 협력자들을 배제하든가, 적어도 철저히 순화시켜서 ‘민족주의’의 깃발을 깨끗하게 지켜야 했다. 소위 좌익 또는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진정한 동지들을 찾아야 했다. 김구 자신이 국내에 있었다면 ‘사회주의 우파’가 되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장준하의 예리한 관찰에도 임정 중심의 편의주의적 태도가 다소 묻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네 사람이 임정을 대하는 태도의 분석에 비중을 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안재홍의 프로필 속에서는 그 분석이 흑백론에 그치고 깊이를 갖추지 못하는 감이 있다.


안재홍의 11월 9일과 15일 성명이 인용되어 있는데, 9일 성명에는 임정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본인dms 세간의 그런 비평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명언했지만, 그런 비평에 유의할 점이 있다고 여겨서 언급한 것이다. 요즘 말로 ‘비판적 지지’에 가까운 그의 임정 ‘영입보강론’이 반영된 것이다.


15일 성명에서 그런 비평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엿새 사이에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니라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임정의 환국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앞세워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놓고 “경고적인 어투가 일언반구 없는 기대와 환영 일변도”라는 데 방점을 찍는다는 것은 얼마나 열렬히 환영하느냐 하는 한 가지 기준에만 매달려 실질적 의미를 놓치는 피상적 관점으로 보인다.


이 한 가지 기준으로 보면 한민당이 임정 민족주의자들에게 가장 믿음직한 동지요, 우군이었다. 게다가 한민당은 미군정과의 관계, 경찰력, 자금 등 임정 인사들이 국내 활동을 위해 필요로 하는 조건들을 쥐고 있었다. “불량분자 배제를 먼저 하나 나중에 하나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편의주의적 자세에 강한 유혹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Posted by 문천

 

청년단체의 움직임 두 가지가 눈에 띈다. 그 하나는 11월 15일에 결성된 독립촉성청년연합회 19단체 대표 60여명이 25일 1시에 국민당 회의실에서 합동위원회를 열어 독립촉성중앙위원회로 명칭을 고치고 독립 장애물 제거에 합동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는 것이다. 19개 단체는 아래와 같다.


조선청년동맹단결본부, 상록회, 유학생동맹, 조선청년회, 조선청년건의단, 조선군인동맹, 건설청년동맹, 정의청년회, 무궁회, 만주동지회, 자유청년동맹, 동북청년회, 남화조선인청년연맹, 조선청년동지회, 고려청년당, 양호단, 애국동지회, 국민당청년부, 북선청년회.


이 모임의 대표위원 60명은 며칠 후 김구 주석을 방문하고 주석의 열렬한 훈시에 대하여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여서 신민주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청년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5년 11월 30일)


회의를 국민당 당사에서 열었다는 것으로 보아 국민당 안재홍 위원장의 노선에 동조하는 범위의 단체들인 것 같다. ‘독립촉성’이란 이름도 안재홍의 영향을 보여준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가 이승만의 조직 확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이름은 안재홍이 제안한 것이었다. 건준의 ‘건국준비’도 안재홍이 제안한 것이었다. 임정이 건국의 주체가 되기 바라면서도 보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안재홍은 건준과 독촉의 결성을 모두 지지하면서도 그 역할이 기능적 수준에 머물기 바랐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이름을 제안한 것이다.


설명이 없어도 27일 안재홍이 김구를 만났을 때 이 모임 대표들과의 만남을 주선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안재홍은 임정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확인해주고 싶었고, 또한 자기 노선에 동조하는 범위를 과시하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25일에 또 하나 청년단체 연명의 임정 지지 성명서가 나왔다. 22개 단체 중 독립촉성중앙위원회 19개 단체와 겹치는 것은 양호단과 국민당청년부 둘이다. 그밖에 ‘전국청년건의단’과 ‘조선청년건의단’, ‘자유청년동맹무궁회’와 ‘무궁회’도 같은 것이었을 것 같다.


조선건국청년회, 리청천장군동기급후배장교, 전국청년동지회, 국풍회, 양호단, 학도별동대, 광복청년회, 철권단, 한국청년단, 흥국청년회, 백악청년동맹, 조선청년회, 국민당청년부, 유학생동맹총본부, 전국청년건의단, 고려청년단, 자유청년동맹무궁회, 불교청년당, 중국유학생회, 정진청년회, 의열단, 전조선순국학생동맹.


도합 37개 내지 39개 단체가 같은 날 이름을 내걸고 있었으니, 그중에 명확한 실체를 가진 것이 몇 개나 되었을지 의문스럽다. 후자 22개 단체 중 ‘국풍회’, ‘철권단’ 등 호전적 느낌의 이름들이 더 많이 눈에 띄고, ‘리청천장군동기급후배장교’란 것이 어떤 단체였을지 궁금하다.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조직을 만들고 광복군 이청천(지청천) 장군을 간판으로 내건다? 초급장교 때 탈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청천의 길을 받들 만한 일본 육사 동기와 후배들이 누가 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친일파로 몰릴 위치에 있던 일본 육사 출신들이 간판이야 무엇이든 뭉쳐서 이름을 내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22개 단체 성명서는 임정 지지 못지않게 인공 배척에 중점을 둔 내용이었다. 그 일부를 인용한다.


“우리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 유일의 정통정부이다. 27년간 민족해방을 위하여 혈투를 계속하여 왔으며 국제무대상 우리 민족의 유일한 대변자로 사실상 승인정부로써 활약하여 온 사실은 누구나 부인치 못할 것이다. 其間 국내의 혼란을 이용하여 국호를 참칭한 자 있으나 그것은 대한임시정부의 건국사상 위대한 공적과 오랫동안 이 정부에 歸依支待하여 온 국민적 충의심을 이용하여 이 정부요인의 명의를 임의도용하여 狐假虎威격으로 일시적 국민을 기만한 데 불과하다. (...)

李承晩 박사가 그들 참칭국의 주석이 아니심을 성명하였고 또한 우리가 현실적으로 우리 임시정부를 국내에 맞이한 오늘, 임시정부는 우리 국민의 유일한 정통정부이다. 우리는 민족적 양심에 비추어 우리 임시정부에 수립하는 일체의 조직을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자유신문 1945년 11월 25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같은 22개 단체가 23일에도 전단으로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 있다. (똑같은 순서로 이름이 배열되어 있는데, ‘자유청년동맹’과 ‘무궁회’ 사이가 떨어져 있다. 이 둘이 별개의 단체라면 23개 단체다.) 20~22일의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를 취재한 ‘악덕기자’들을 경고한 것이다.


惡德기자에게 경고함

吾等이 사기적인 소위 인민공화국을 배격하고 우리 혁명열사들의 혈투로써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만을 유일의 우리 정통정부로서 지지하여 하루 바삐 귀국하기를 고대한다는 것은 이미 성명한 바다. 그런데 자칭 인민공화국은 소위 인민대표회의라는 것을 소집하고 인민공화국을 적법화하려 하며 민심을 더욱 현혹케 하려 한다.

吾等은 이 간악한 태도를 匡正하고 소위 대표자들의 숙청을 期하는 의미에서 지난 20일, 21일, 22일, 3일에 亘하여 그들의 회합을 방해하고 만일 不成하면 폭력으로서라도 그것을 저지하려 하였었다. 그런데 불행히 吾等의 계획은 MP의 제지로 성공치 못하고 원한을 후일에 남겼거니와 일부 악덕기자와 신문사는 吾等의 행동을 폭력단이니 모 정당으로부터 금전에 매수되었느니 하여 우리의 의거를 매도하고 자칭 인민대표회의를 3천만 민중의 총의에서 나온 회합이라 한 것은 신문기자의 정의를 옹호하는 양심을 잃어 버렸을 뿐 아니라 인민공화국에 매수된 추악한 행동이 틀림없다.

吾等은 신문기자 중에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주구로써 皇道主義를 선전하고 총독부관리들의 公私忠犬이던 자로써 소위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자가 있음을 숙지한다. 汝等이 前非를 회개한다는 의미에서 인민공화국을 지지한다면 贖等의 죄악은 일층 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汝等은 속죄의 의미로서 공정한 필봉을 들어야 할 것이다. 不然이면 정의의 快刀가 너희를 분쇄할 것이다.

打倒人民共和國

大韓民國臨時政府萬歲

檀紀 4278년 11월 23일

大韓民國臨時政府支持 朝鮮靑年團體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임정의 절대 지지와 인공의 극한적 배척은 출범하던 9월 초순부터 한민당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같은 주장의 22개(또는 23개) 단체 성명서는 한민당의 사주에 의한 것일 개연성이 있다. ‘독촉’ 이름의 19개 단체가 당당히 김구와 접견한 반면 22개 단체가 성명서 한 장 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도 주도세력이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암중 공작’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2개 단체 중에는 ‘국민당청년부’ 등 명의를 도용당한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인공의 노선에는 많은 사람들이 용납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안재홍은 임정의 권위에 도전하는 의미를 가진 ‘공화국’이란 이름 자체에 반발해서 자신이 산파역을 맡았던 건준을 떠났다. 여운형은 안재홍처럼 임정을 중시하지 않았지만, 인공의 조직과 부서 결정을 반대한 것은 역시 임정의 상대적 우위를 인정한 뜻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허헌을 앞세운 박헌영 세력은 인공을 임정과 대항하는 위치에 올려놓기 위해 온갖 무리한 짓을 다했다.


인공 노선에 대해서는 좌익 내에서도 광범한 비판이 있었다.


장안파공산당은 정권 획득이라는 결정적 투쟁을 극소수의 전위만으로 결행하는 ‘극좌적’ 경향에 빠져, 9월 6일의 인민대표회의에서 민족 대중의 총의를 완전히 무시한 종파적 구성을 했다고 재건파공산당을 비판하고, 인민대표회의와 인민공화국 수립을 전후하여 미족문제 해결에서 범한 극좌적 경향을 급속히 청산하여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북한의 공산당은 1945년 10월 13일 채택한 ‘정치노선과 조직 확대 강화에 관한 결정서’에서, “앞으로 수립되어야 할 정권은 친일 반동분자를 제외한 모든 계층을 망라한 정권”이어야 하고, “통일된 유일한 인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조서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우리의 과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라고 천명하여 사실상 서울에 있는 기존의 인민공화국을 부정하였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26쪽)


많은 비판을 모았음에도 인공에는 큰 정치적 가치가 잠재해 있었다. 그 상부조직은 박헌영 일파의 ‘극좌’노선에 휘말려 생산적 기능을 잃고 있었지만, 지방 하부조직인 인민위원회는 인민의 독립 의지를 수렴하는 역할을 키워가고 있었다. 미군정 당국자 중에도 이 가치를 직시한 사람들이 있었다.


(군정사령관의 노동 고문) 미첨은 미군이 인민공화국을 승인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하지는 인공을 “소련군이 북한에 세운 공산주의 인민위원회 정부의 남한 지부”라 불렀고, 서울의 소련영사관을 통해 조종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미첨은 여운형을 자유주의자로 보았지만 하지는 “철저히 의식화된 코민테른 공산주의자”로 보았다. (...) 하지는 한국인들이 군정 하에서 참으로 “너무 많은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남한에서 반동 세력이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 장군이 부정하지 않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우리가 한국을 떠난 뒤에도 살아남을 만한 민주주의 개혁이 자리 잡았다고 그가 주장하지도 않는다.” 하는 것이 미첨의 반응이었다. 그는 이어 철저한 토지개혁과 경찰의 혁파, 정부로부터 ‘극우파’의 추방과 공정한 선거 과정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이 모든 것이 조속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공산주의 이외의 선택이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B Cum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p 440, 김자동 번역판 538쪽에는 스튜어트 미첨의 이름이 ‘미캠’으로 되어 있다.)


안재홍은 전심전력을 쏟던 건준 사업을 인공 때문에 포기했으니 인공과 가장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인공을 비판하면서도 인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인공이 노선을 수정해 건국 대열에 동참할 것을 계속해서 촉구했다.


11월 23일 22개 단체 성명서에서 ‘악덕기자’들을 친일파로 몰아붙인 것은 9월 8일 한민당 발기인 성명서에서 건준-인공 인사들을 친일파로 매도한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아무 근거가 없는 맹목적 비난이라는 점이 두 성명서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증거고 나발이고”의 뿌리다. 인공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다.


11월 26일 인민위원회 도 대표 몇 사람이 경교장을 방문했으나 김구는 만나지 못했다. 그 기사에서 “개인의 자격”이란 말이 마음에 걸린다. 임정 요인들의 귀국이 ‘개인 자격’이라고 하지와 이승만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는데, 이제 그들을 찾아온 사람들의 ‘개인 자격’을 강조하고 있으니, 안 좋은 것일수록 배우기 쉬운 모양이다.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 참가하였던 위원 가운데 서울, 경기, 충북, 충남, 전북, 경남, 함남, 황해 등 각도 대표는 개인의 자격으로 26일 오전 11시 金九의 宿舍를 방문하고 그 일행의 환국을 환영하는 동시에 여러 가지로 의견을 바꾸려 하였는데 이때 金九는 외출하고 없어 金奎植, 柳東說, 嚴恒燮과 회견하였다.

그리하여 대표들로부터 “선생 일행의 귀국을 충심으로 환영하는 동시에 선생들의 苦鬪에 경의를 표한다. 현하 긴급한 문제는 우리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통일하는 데 있다. 민족통일을 확립함에는 우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할 것을 원칙적으로 해야 된다. 그리고 통일정부는 반드시 전국 각지의 인민대중의 요망을 토대로 출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특히 이 자리에서 38도 이북의 실정 보고는 요인 측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하였고 각 대표의 성의에 감사하는 동시에 장차 국내실정 조사에 있어서 지방 인민대표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자고 약속을 한 다음 극히 원만한 가운데 회담은 끝났다. 그리고 이날 방문한 대표는 다음과 같다.

서울 徐重錫 金光洙 / 京畿 朴衡秉 / 忠北 張埈 / 忠南 權寧珉 / 全北 崔鴻烈 / 慶南 尹一 / 咸南 黃鴻霆 / 黃海 宋彦弼

서울신문 1945년 11월 2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임정 요인들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 “38도 이북의 실정”뿐이었겠는가? 이남의 지방 실정도 이 사람들보다 더 잘 전해줄 다른 조직이 없었다. 박헌영 일파가 주무르고 있던 인공 중앙이라면 몰라도, 진정한 정치적 가치를 갖고 있던 지방조직 대표자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온 것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Posted by 문천

 

오후 1시에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의 기자회견이 있었고, 거의 같은 시간에 군정청을 예방한 김구가 군정청 출입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임정의 공식 대변인인 엄항섭의 회견 내용은 임정이 귀국 전에 준비해 온 공식 입장을 정식으로 밝힌 것인데, 김구 주석의 기자회견은 우발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그 시점에서 그의 소감을 얼마간 드러낸 것이다.


엄항섭은 임정 법통성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9월 13일 발표한 14개조 당면정책에서도 나타났던 자세다. 그런데 김구의 회견 내용 중에는 그 자세와 맞지 않는 점들이 있다. 엄항섭과 김구의 회견을 보도한 기사를 비교해 본다.


임시정부 선전부장 嚴恒燮은 24일 오후 1시 기자단과 회견하고 대략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여 임시정부의 환국 후 활동방향을 표명하였다.

(문) 임시정부는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였는데

(답) 군정청과의 관계도 있어서 공식적으로는 개인 자격이나 인민에 대한 태도는 좀 다를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임시정부라는 것은 3·1운동 때에 전 인민의 피로 생긴 것이다.

(문) 금후 조선에 완전한 독립정권이 수립될 터인데 임시정부가 발전적 해체할 의견은 없는가?

(답)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안하는 것은 인민의 결정할 바이다. 그러나 해체를 강제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문) 임시정부는 중국과 프랑스가 승인을 하였다는데

(답) 국제법상으로는 미비하나 사실상 국제간의 교섭대상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니 이것을 우리는 사실상 승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문)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것은 언제인가?

(답) 우리는 3·1운동과 동시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대미전을 개시하자 동년 12월 12일에 우리는 과거의 선전포고를 재확인한 것이다.

(문) 중경에 있는 大韓獨立黨은 임시정부의 유일한 여당이라고 하는데

(답) 大韓獨立黨과 임시정부와의 관계는 깊다. 金九씨도 당원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부가 전부 당원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문) 大韓獨立黨은 정당으로서 귀국할 예정인가?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쯤 되나?

(답) 본국 내에도 정당이 많다는 말은 들었는데 외국에서 또 다시 정당을 가져 오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 延安에는 獨立同盟이라는 것이 있다는데 이제까지 밀접한 연락을 가지고 있는가?

(답) 대체로 좋은 상태에서 연락과 협조가 되어 있다. 국가를 독립하자는 동일한 목적에 노력하였으므로 의견이 상위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延安에서도 환국의 도정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하루라도 속히 故土에서 상봉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문) 국내에는 인민공화국이 정부같이 되어 있는데 이와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나?

(답) 그것은 나에게 물을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가르쳐주기 바란다. 내가 보기에는 국내에는 우선 미국 군정이 존재해 있고 북방에는 소련의 군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은 3천만 동포가 굳게 결속함이 급선무다. 나는 신문에 나타나는 정도의 지식밖에는 모를 정당이 많다는 것은 이미 들었으나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따라서 대면도 아직 다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것은 지난 9월 13일에 발표한 14개조의 당면정책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것을 원칙으로 하여 행동하게 될 것이다.

(문) 李承晩 박사가 귀국한 후 정계의 움직임은 여전히 복잡하여서 上海로부터 金九 선생을 비롯한 여러분의 귀국에 인민은 대단 기대하였는데?

(답) 어떻게 해야 할는지 얼떨떨할 뿐이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여론을 존중하고 또 여론을 통하여 우리의 뜻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나는 아직 당도 모르고 사람도 모른다. 지금은 다만 환희에 포위되어 있을 뿐이다. 3천만동포를 일시에 만날 수도 없는 일이니까 차차 방책이 서질 것이다.

(문) 光復軍은 언제 귀국하나?

(답) 시기가 상조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있는 日軍의 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것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규합하여 조직과 훈련을 하고 있다. 따라서 총사령부도 중경에 있다. 총세는 약 1만이 된다.

중앙신문 1945년 11월 2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金九, 同副主席 金奎植 이하 요인 4명과 隨員 등 15명은 23일에 귀국하였거니와 고국의 第1夜를 보낸 일행은 24일 역시 허다한 來客으로 바빴다.

入京 제2일인 24일 오전 중에는 정식으로 미주둔군 최고지휘관과 미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을 각각 방문하는 등 多忙한 일정으로 오전과 오후를 보내었는데 특히 오후 1시반에는 군정청 출입기자단을 인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試한 바 당분간 현하정세를 신중히 관망할 것으로 보이고 있다.

(문) 3천만 동포가 한가지로 선생과 요인 일행의 귀국을 학수고대했으나 着京하시는 시간을 몰라 비행장에까지 출영도 못해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입경 第1夜를 보내시고 다망하신 제2일을 맞이하셨는데 소감을 말씀해 주시면

(답) 피차에 시간의 여유가 없는 것은 유감으로 생각할 뿐이다.

(문) 그간 국내정세는 자못 다단한 중에도 시급한 것은 정치의 통일전선을 획득하는 것인데 주석 선생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는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아나 그 통일전선 결성에 대한 포부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오늘은 시간관계로 말을 못하겠다. 李박사 역시 그에 대한 방침이 계실 줄 알지만 나에게 李박사 이상의 수완이 있다고는 신빙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나는 제군이 아는 바와 같이 국내와 연락이 없었고 국내사정에 어두운 만큼 현실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모두 30년간 해외에 나가 있었던 만큼 현하정세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오늘은 다만 국사를 위해서 노력해 오는 신문기자 제군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이 시간을 만들었을 뿐이다.

(문) 통일전선에 있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문제는

(답) 통일전선을 결성하는데 있어 불량한 분자가 섞이는 것을 누가 원하랴.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일이 있을 줄 안다. 爲先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

(문) 그러나 악질분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통일 후의 배제는 혼란하지 않은가?

(답) 하여간 정세를 모르니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문제인 만큼 경솔히 말할 수는 없겠다. 전민족에게 관한 것인 만큼 신중히 해야만 하겠다.

(문) 국내정세를 어떻게 정확히 파악하시렵니까?

(답) 눈과 귀가 있으니까 이 두가지 기관을 통하면 될 것이다.

(문) 정계의 요인은 언제 어떻게 만나 보시려는지요?

(답) 그렇게 급히 할 것은 없다.

(문) 맥아더장군과는 어떠한 연락이 있었나요?

(답) 현하 조선에 군정이 있는 이상 완전한 우리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고 말하였다. 다만 우리의 일행이 온 만큼 해외임시정부도 입국한 것이요, 이것을 외국에서 인정한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문) 인민공화국과 군정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그것은 말하지 않겠다.

(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해서는

(답) 그 역시 말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니까.

자유신문 1945년 11월 25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김구의 회견 내용 중 두 군데에 밑줄을 쳤다. 김포공항에 비행기가 닿기 전까지 김구가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생각과 다른 것이다.


“국내와 연락이 없었고 국내사정에 어둡다”고 했다. 국내에 있지 않았으니 국내사정 인식에 한계가 물론 있었겠지만, 국내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은 해왔다. 미군 OSS부대와 협조해 광복군 병력을 국내에 진입시키는 노력을 해방 당일까지 하고 있었다. 9월 13일 발표한 14개조 임정 당면정책은 이를 결정하기에 충분한 파악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석 김구가 도착 이튿날 임정의 상황 파악에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겸손이나 신중 차원의 이야기일 수 없다. 임정의 기능과 역할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이야기였다.


불량분자 배제를 먼저 하나 나중에 하나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임정, 특히 김구의 도덕적 권위는 ‘항일정신’에 있었다. 친일파 제재는 해방 당시 한국인의 가장 큰 합의점이었지만, 그 범위와 방법을 결정해 나가는 데 많은 현실적 문제를 앞두고 있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임정과 김구의 도덕적 권위였고, 그것이 김구에게는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친일파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넓게 잡고 그 제재를 극단적으로 가혹하게 하는 것도, 반대로 너무 좁게 잡고 너무 관대하게 처리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길이었고, 어느 정도로 하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 정답이 없는 문제였다. 합리적인 범위에서 적당한 기준을 임정과 김구가 정해주는 것이 국민적 합의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런 일은 우선 엄격한 태도를 보이다가 서서히 적정선까지 풀어주는 것이 상식이다. 권위의 존재를 일단 분명히 한 다음 권위의 실현 과정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김구는 도착하자마자 그 권위를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연말 이후의 극단적 반탁운동을 김구의 정치적 자살행위로 보는 이들이 있는데, 나는 그의 정치적 자살이 귀국 직후부터 시작된 사실을 이 대목에서 읽는다. 친일파 처단은 좌익의 구호가 되는데, 임정과 김구가 친일파 문제에 ‘합리적 범위에서’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면 좌익이 그 구호를 써먹을 여지가 없었다. 김구는 친일파 문제를 너무 쉽게 풀어줌으로써 임정의 정치적 자산을 잃어버리고 좌우 대립의 극단화를 유발하고 말았다.


친일파 처단을 건국 후로 미룬다는 것은 이승만의 지론이었다. 그 지론에 따라 건국 후에 반민특위를 만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안다. 그런 결과가 나올 조건은 건국 전에 형성된 것이었다. 그런 조건이 형성되어 갈 상황에 김구는 귀국 이튿날 동의한 것이다.


김구가 도착한 날 저녁 이승만과 만났을 때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승만이 주로 떠들고 김구가 듣고 있었으리라는 사실과 함께 몇 가지 내용은 짐작이 간다. 좌익의 의도가 나쁘고 힘이 세니 이제 일본 대신 좌익을 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 그러니 미군과 대결하면 안 되고, 자기가 미군과의 좋은 사이를 주선해줄 수 있다는 권유. 그리고 좌익과의 대결을 앞둔 상황에서 친일파 처단을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의견.


김구는 뛰어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30여 년만의 귀국이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당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의 목소리가 그 귀에 매우 크게 들렸던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