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그 직전에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인공 비난 성명이었다. 이 성명은 내용의 옳고 그름에 앞서 난폭하고 저열한 표현으로 당시 군정 당국자들의 몰지각을 드러내 보여준 ‘망언’이었다.


한 달 후 <매일신보>의 정간과 제호 변경도 아놀드의 망언 게재 거부에 직접적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인공에 대한 적대감은 언론 자유까지 침해할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이 적대감을 커밍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1945년 가을 미군 정책 형성의 배경과 근거는 강력한 좌익의 존재에 있었다. 군정 아래 몇 주일이 지나도 좌익은 약화되기는커녕 더욱 번성하는 것으로 보였다. 9월 중에는 인공이 하나의 사소한 문제로 보였다. 그 보수적 반대파를 미군이 북돋워주기만 하면 쉽게 해소될 문제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군정이 지방으로 펼쳐져 나가면서 보고를 올리기 시작하자 인공 영향력의 범위가 군정 당국자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 하지는 나중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임무의 하나는 함참과 국무부의 지시나 지원 없이 이 공산정부를 파괴하는 것이었소.” (B Cum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p 193-194, 번역판 254쪽)


<위키리크스>의 폭로 문건을 통해 대다수 미국 관리들이 국제관계에 얼마나 극심한 일방주의 태도로 임해 왔는지 밝혀지고 있다.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는 미국의 뿌리 깊은 전통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이것이 일방주의 외교노선으로 형태를 빚어가면서 냉전체제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식 자본주의 이외의 모든 것을 공산주의로 몰아붙이는 관점이 여기에서 나왔다.


한국에는 미군에 앞서 일방주의의 선구자가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였다. 일제는 1920년대 이후 식민지 항일운동가들에게 거의 예외 없이 ‘좌익’의 딱지를 붙였다. 많은 항일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포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사회주의 이념을 활용한다는 입장일 뿐, 사회주의 이념에 얽매이는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사회주의자’로 부를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일제가 이들을 ‘좌익’이라 부른 것은 민족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좌익’으로 보던 사람들은 미군에게도 대개 ‘좌익’으로 보였다. 식민통치의 협력자 집단이 미군정에도 협력자가 된 것과 짝을 이루는 현상이었다. 너무 넓은 범위를 ‘공산주의자’로 부르던 당시 상황을 커밍스는 이렇게 언급했다.


이런 꼬리표에는 진짜 문제가 있다. 공산주의자를 자칭한 이강국이나 현준혁 같은 사람들도 (넓은 의미의) 좌파 내지 (공산주의) 동조자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다수 인공 지도자들이 마찬가지다. 1945년 9월 인공에 대한 극단적 공산주의 비평에도 설익은 수준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해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차라리 김규식 같은 박식한 인물이 그와 맞서고 있던 ‘공산주의자’들보다 유물론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위 책 p 85, 번역판 127쪽)


이강국은 나중에 또 등장하겠지만, 9월에 암살당한 현준혁(1906~1945)에 대해 한 마디. 해방 후 조선공산당 평안남도 지방위원회를 이끌던 현준혁을 찰스 암스트롱은 오기섭과 함께 “가장 뛰어난 이북출신 국내파 공산주의자 두 명”으로 꼽았다. (<북조선 탄생> 147쪽) 그러나 실제 그의 경력을 보면 대구사범 재직 중 독서회 사건으로 1930년대 초 6년간 복역했고, 그 후에는 협동조합 운동에 종사한 것으로 보아 사상적으로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격 배후에 관해 백의사-김일성 세력의 이설이 있을 뿐 아니라 저격시점까지도 <네이버백과>와 <위키백과> 사이에 차이가 있다.)


식민지시대의 항일운동가 중 일부 투철한 종교인 외에는 거의 모두가 사회주의 이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깃발이 있었다면 포섭될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계급혁명을 신봉하는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몇 되지 않았다. 이것을 일제는 모두 ‘좌익’이라 불렀고, 미군정은 그 뒤를 따랐다.


서울에는 미군이 ‘보수적 민주주의자’로 보는, 일제 ‘협력자 집단’과 대략 겹치는 사람들이 지방에 비해 많이 모여 있었다. 교육과 재산 수준이 높은 계층이 서울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시대의 ‘특권층’이 지방에는 극히 적었고, 따라서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를 결합한 당시 한국인의 ‘민심’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지방의 인민위원회 활동은 이 민심의 표출이었고, 그것을 중앙에서 수렴할 수 있는 것이 인공이었다.


아놀드 망언 이후 군정 당국자들이 인공을 점점 더 조심스럽게 대하게 된 것은 이런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파괴하려 들기보다 ‘공화국’이라는 호칭을 거두고 국가나 정부 아닌 정당의 형태를 취할 것을 권유했다. 인공 당국자들은 자기네가 임의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며 11월 20-22일의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 미뤘다. 그래서 군정청은 대표자대회에 헌병을 동원해 우익 청년단체의 습격을 막아주고 아놀드 군정장관이 참석하기까지 했다.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는 인공 명칭 변경 또는 해체 문제에 관한 결의서를 11월 30일 발표했다.


조선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는 중앙인민위원회가 보고하여 토의에 부친 朝鮮人民共和國 국호 변경 又는 해체의 문제 及 군정과의 관계에 관하여 左와 如히 결의한다.

1)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 전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성립되었고 지지되고 있다. 그것은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 인민과 함께 존재할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변경이나 해체는 조선 인민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확언한다.

2)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의 남북을 통일한 단체이므로 남북에 진주한 미소 양국이 공동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믿는다. 그렇거늘 소련으로부터 여하한 통지도 없음에 불구하고 38도 이남에만 권력을 가진 미국군정이 단독으로 해체를 요구할 때 이것을 그대로 수락하는 것은 조선 인민 스스로가 조선을 남북으로 분열시키고 대립시키는 중대한 과오이며 치명적 자기모독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수락할 수 없다.

3) 대회에 모인 대표들은 각지 인민으로부터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 육성하기 위한 建案과 토의의 임무만을 받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별개 문제인 본 문제는 언급할 하등의 권한이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전국인민대회의 민주주의적 투표에 의하여서만 결정될 성질인 것이다.

4) 미국 군정은 조선민족의 완전 독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조선에 존재한다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전국인민위원회는 조선 민족의 완전 독립을 그 시종일관한 사명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는 본격적으로 일치하며 사실에 있어 각 인민위원회는 처음부터 미국 군정에 협력하는 것을 자기의 업무로 알고 이에 협력 실행하여 왔다. 또 우리를 잘 이해하는 미군 장관들이 우리와 완전히 일치하여 원만하게 모든 문제를 진척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이에 대한 滿腔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5) 그러나 일부 모략분자의 농간으로 인하여 우리를 이해할 총명을 잃어버린 미군 장관이 우리의 적극적 협력을 거부한 사실(全北 慶北의 일부 지방)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실로 국호 변경 又는 해체 문제로 우리는 군정에 대립한다고 모략한 반역자의 이간에 인한다는 것을 재삼 지적하며 군정당국의 현명한 재인식을 切望한다.

6)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까지 미군정의 가장 친한 벗이라는 것을 공언하고 모든 모략을 배제하고서 조선 인민에 이익되는 정책의 실시를 위하여 군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군정으로 하여금 유종의 미를 맺게 할 것을 대회의 이름으로써 다시금 확약하는 바이다.

중앙신문 1945년 12월 01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4~6항에서 인공의 입장을 밝힌 것은 그렇다 치고, 인공 해체 또는 명칭 변경 거부의 이유를 밝힌 1~3항 내용은 억지스럽고 치사스럽게 느껴진다.


1) 9월 6일에 몇 명이 어떤 식으로 모여서 인공 설립을 결정했기에 “조선 전 인민의 총의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인공의 “변경이나 해체가 조선 인민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확언”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정권에 대한 도발을 온 국민에 대한 도발처럼 뒤집어씌우는 후세 정권의 행태보다도 더하다.


2) “미소 양국이 공동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믿는” 까닭이 무엇인가? 모든 연합국(실제로는 미-영-소 3국)이 함께 의논한다면 몰라도, 두 점령국이 별개의 협의체를 구성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각각의 점령군은 자기 구역을 관할할 뿐이다. 미군의 관할 방법에 불만이 있으면 미군에게 항의하든 투쟁하든 할 일이지, 소련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다.


3) 해체나 명칭 변경이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됐지, 왜 이것을 ‘전국인민대회’에 미루나? 수십 명이 부랴부랴 모여서 만든 조직의 해체나 명칭 변경을 7백여 명이 체계적으로 모여서도 결정할 수 없다면, 국민투표라도 해야 된단 말인가? 인공 당국자들은 대표자대회에 미루고, 대표자대회는 존재하지도 않는 ‘전국인민대회’에 미루다니, 군정 당국자들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나도 그들이 뒤통수 까였다고 열받은 데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인민공화국’ 명칭에 대한 집착은 대립의 격화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공 설립 당시에 여운형 측은 ‘조선민주공화국’, 또는 ‘조선공화국’이란 이름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회의장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이란 말을 넣도록 몰고 갔다. 원래는 정치적 편향성이 없는 말이기 때문에 여운형 측도 극단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지만, 공산혁명과 관련해 널리 쓰이고 있던 이 말을 넣은 것은 용의자로 보려는 미군에게 나 범인이라고 우기고 나선 꼴이다. ‘인민’이란 이름이 인공에 대한 미군의 적대감을 키워주었기 때문에 중도파의 입지가 줄어들고 극좌파가 인공과 좌익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1월 20~22일 대표자대회 시점에서 인공은 ‘공화국’의 이름을 접어놓더라도 민심을 수렴하는 기능에 별 지장이 없었다고 나는 본다. 지난 100일 동안 민심을 기반으로 형성된 지방 자치조직을 뒷받침해 온 역할을 계속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공화국’ 간판이 없다 해서 ‘인민’들이 민심을 수렴해 달라고 군정청에 매달리겠는가?


극좌파가 ‘공화국’ 간판의 유지를 필요로 한 것은 임정과의 대결을 위해서였다. 중도파는 임정과의 협력을 원했다. 임정이 귀국을 앞두고 발표한 정강정책에는 중도파가 원하는 만큼 사회주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었고, 임정의 인적 구성도 극우로 쏠린 것이 아니었다. 김구의 반공 성향을 문제삼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이승만에 비하면 극우파로 의심 받을 여지가 훨씬 적었다.


임정의 지명도가 높고 국민의 여망이 컸기 때문에 임정이 국내에 있었다면 민심 수렴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임정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동안 그 역할을 인공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정이 환국한 이제 임정과 인공이 힘을 합쳐 그 역할을 더 잘해 나가기를 많은 사람들이 원했다. 그러나 인공을 장악한 극좌파는 임정과의 합작을 가로막기 위해 임정에 대항하는 ‘공화국’ 간판에 집착했다.


극좌파의 이런 의도는 9월 14일 인공 부서 결정에서부터 드러나 있던 것이었다.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교부장 김규식, 군사부장 김원봉... 임정 최고지도자들을 허헌 국무총리 밑에 부장(장관)급으로 배치한 것은 무례한 정도를 넘어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중도파의 반대를 묵살한 이 결정에 대한 항의로 여운형은 일시 직무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건준을 함께 하던 안재홍에 비해 여운형은 임정에 대한 기대가 적었지만, 임정을 경쟁의 상대로 여겼지, 타도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임정과 건준-인공의 협력-합작을 바란다는 점에서 여운형은 안재홍과 같은 중도파였다. 그런데 극좌파가 장악한 인공은 독선적 노선에 빠져 극우파 결집의 빌미를 만들어주며 ‘적대적 공생관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