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까지 수십 년 동안 조선은 일본의 절대적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사정이 갑자기 달라졌다.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이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으나 일본의 영향력을 대체할 만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고, 한국인 자신의 노력이 한국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할 여지가 식민지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해방공간에서 한국의 진로가 결정되어 나가는 데는 미국과 소련의 작용, 그리고 한국인들의 행위가 주된 변수로 인식되어 왔다. 이 인식에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일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오랫동안 절대적 영향력을 가졌던 일본의 존재가 주변적 요소로라도 작용을 계속했을 듯한데, 지금까지 한국인의 인식에서는 너무 무시되어 온 감이 있다.


일본 정부는 1945년 9월부터 1952년 4월까지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사령부(GHQ)의 통제 아래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GHQ가 일본 정부 역할을 맡고 있었다. GHQ의 역할과 그에 뒷받침된 일본의 변화에 대한 고찰은 냉전적 사고에 제약받아 오다가 냉전 해소 후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런 작업의 성과인 1999년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와 2000년 허버트 빅스의 <히로히토 평전>(오현숙 옮김, 삼인 펴냄)을 보며, 우리 해방공간의 고찰에도 같은 시기 일본의 사정을 감안할 여지가 꽤 많다는 생각을 한다.


일차적으로 GHQ의 일본 정책이 한국 미군정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GHQ는 원래 미국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연합국을 대리하는 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기관으로 기능했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일본의 필요를 총족시키는 ‘일본 정부’의 역할도 겸한 것이었다. GHQ의 정책 결정이란 기본적으로 일본의 필요와 미국의 이익을 맞추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남한을 점령한 미육군 24군단은 GHQ의 예하부대였다. 그리고 24군단 하지 사령관은 맥아더와의 관계를 연합군이 아닌 미군 지휘계통 내의 상하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남한에서 정책과 조치에 대한 하지의 지시 요청에 일률적으로 “귀관의 판단을 믿고 맡긴다.”며 일임했지만, 하지는 맥아더의 의중에 맞추는 것을 언제나 판단의 첫째 기준으로 삼았다. GHQ와 남한 군정청의 관계는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사이의 관계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GHQ가 일본 정부를 그대로 두고 ‘지령’으로 통제하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한 반면 남한 점령군은 직접 군정을 시행했다. 정병준은 <한국전쟁>(돌베개 펴냄) 134쪽에서 “군정 실시가 당연시되었던 일본에는 기존의 통치조직을 활용하는 간접통치 방식이 적용된 반면, 준 우호국민으로 간주한다던 남한에만 철두철미한 군정이 실시된 정확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고 의문을 표했다.


편의에 따른 결정으로밖에 생각할 길이 없다. 일본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끌고 가느냐 하는 것이 맥아더에게 중요한 문제였고, 한국의 진로는 훨씬 부차적인 문제였다. 미육군 군정학교는 1944년 6월부터 1945년 10월까지 총 1,650명의 장교를 훈련시켰는데, 훈련생들은 7개월 반에 걸쳐 일본어와 지역 사정을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그러나 일본 진주 후 군정 불실시 방침이 결정되자 필요 없게 된 많은 요원들이 남한 군정 요원으로 배치되었다. 군정학교의 성과를 무위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한의 군정 실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정병준 위 책 135-137쪽)


기존의 조치를 정당화하려는 동기는 관료주의화된 조직에서 흔히 나타난다. 군정학교 성과의 활용 정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례를 빅스는 일본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지적한다.


펠러스는 일본인 전쟁 지도자 약 40명을 개인적으로 신문했다. 이중 여러 명이 나중에 핵심 A급 전범으로 고발되었다. 신문은 주로 도쿄의 스가모 구치소에서 1945년 9월 22일부터 1946년 3월 6일까지 5개월 넘게, 통역 두 명을 두고 이루어졌다. 펠러스의 활동은 주요 전범 용의자들 모두가 GHQ의 특별한 관심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고, 그들은 천황이 기소를 면하도록 협심하여 각본을 짜게 되었다. 검찰관들이 이들을 재판할 때 사용할 증거를 수집하고 있을 때, 펠러스는 무심결에 용의자들을 도운 셈이었다. 검찰관들은 곧 기소된 전쟁 지도자들이 하나같이 사실상 똑같은 내용을 진술하는 것을 알았다. 곧 천황이 전쟁을 끝내려고 몸소 영단을 내리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야말로 (검찰관들은 몰랐으나) 대일 선전 활동의 효과를 실증해 보이려는 펠러스의 목적과 일치했다. (빅스 위 책 645쪽)


펠러스 준장은 맥아더의 참모로서 종전 직전에 전단 살포를 통한 심리전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전범 신문의 기회를 가진 그는 심리전의 효과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유도하려 애썼다. 그 의도를 알아챈 전범들은 이에 편승해 천황의 무죄를 주장하는 증언을 엮어냈다. 심리전의 목적대로 항복을 원하는 민심이 일어났고, 천황이 이 민심에 입각해 전쟁을 끝내는 ‘성단(聖斷)’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범들은 일본제국의 최후의 보루로 천황을 보호하고 싶었고, 펠러스의 도움으로 엮어낸 증언을 통해 그 뜻을 이뤘다.


GHQ의 일본 통치는 군국주의 근절을 최고의 목표로 한 것이었다. ‘평화헌법’은 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과거 청산’ 작업은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했다. 전범 재판은 엉망이 되었고, 군국주의의 알맹이 중의 알맹이 천황제와 히로히토는 자리를 지켰다. 제국주의의 본산 일본에서 과거와의 타협은 주변부인 한국에서 식민지 통치체제의 존속을 위한 배경이 되었다.


다우어가 본 GHQ 통치의 기본 속성은 남한 군정에서도 똑같이 나타난 것이었다. (다우어 위 책 21쪽)


1930년대 초부터 1952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군부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정신이 아무리 고상했을지라도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휘하 사령부는 새로이 손에 넣은 영토를 신식민지 군주 같은 태도로 지배했고, 어떠한 도전이나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행태는 예전에 천황과 그 휘하 관리들이 보이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미 점령군은 위계질서의 화신이었다. 이 위계질서는 단지 패전국 일본에 대해서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백인이 지배한다는 원칙과 더불어 계급으로 세분된 그들 조직 내부에도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점령의 가장 악질적인 유산은 일본 제국주의의 최대 희생자인 아시아 인들의 존재가 패전한 일본 땅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는 데 있다. 중국인, 조선인, 인도네시아 인, 필리핀 인들은 종전 후 일본에서 제대로 된 역할도, 제대로 된 영향력도 갖지 못한 채 그저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다. 제국 육해군을 패퇴시키는 데 아시아 인들이 수행한 역할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한 미국의 그늘 아래 감추어져 버렸다. 아시아 인들에게 돌아갈 영광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식민지화와 전쟁을 통해 그들에게 저질러진 갖가지 범죄들은 더더욱 쉽사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5월에 독일이 항복할 때 미국은 자신을 연합국 중 하나로 여겼다. 혼자 힘으로 얻은 승리가 아님을 인정했다. 그러나 8월 일본의 항복은 다른 연합국에게 공로를 나눠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44개월에 걸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군사력을 꺾은 것이 미군이었고, 최후의 항복을 받아낸 것도 미국 원자탄이라고 맥아더와 휘하 장병들, 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이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승자의 아량도 승자의 오만도 미국만의 것이었다. 다른 연합국들은 미국의 실력과 공로를 존중하고 그 주역을 거들어주는 한도 내에서 의례적 대접을 받을 조연일 뿐이었다. 이 태도가 일본에서 통했다. 일본처럼 강한 적에게도 통하는 태도가 한국처럼 약한 나라에서 통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국 사정을 세심하게 살필 필요도 느끼지 않고 군정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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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청 정치 고문 윌리엄 랭던은 11월 20일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맥아서 사령부와 주한 군정청 사이에 한국을 국제 관리에 맡기는 신탁통치보다 미국의 직접 영향력을 지키고 키우기 바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온 것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480-481쪽에서 재인용)


(1) 사령관은 김구로 하여금 군정 내에 몇몇 정치 그룹을 대표하는 회의(council)를 조직하게 해서 조선의 정부 형태를 연구-준비하게 하며, 정무위원회(Governing Commission)를 조직하라고 지시한다. 군정은 이 위원회에 시설과 조언, 활동자금을 제공한다.

(2) 정무위원회는 군정(현재 전한국의 조직으로 급속히 수립되고 있음)과 통합한다.

(3) 정무위원회는 과도정부로 군정을 승계하며, 사령관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미국인 감독관과 고문들에 대한 임명권과 거부권을 보유한다.

(4) 정무위원회는 국가의 수반을 선거한다. [주] 위 계획에 앞서 소련 측에 통보해야만 하며, 회의(council)는 정무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지명한 소련 지역 내 인사들이 서울에 오게 해 정무위원회를 강화할 수 있도록 소련 측을 초청해야 한다. 그러나 소련 측의 참여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계획은 38도 이남의 한국에서만 실행되어야 한다.


미국의 대외정책 분위기는 다변주의(국제주의)에서 일방주의(국가주의)로 옮겨가고 있었다. 다변주의 원리에 입각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이 ‘랭던 제안’은 분명한 일방주의 기조를 보여준다. (4)항의 [주]에서 소련 측에 “통보”한다고 한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원칙적으로 한국의 국가 건설 방침은 점령군의 소관이 아니라 연합국 회의에서 결정할 일이었다. 포츠담회담에서 일본 항복 후의 사태 처리를 위해 3국의 외상회담을 열기로 결정했었고, 이에 따라 12월 16일 모스크바 3상회담이 열릴 참이었다. 설령 어느 정도 준비사항을 점령군이 결정한다 하더라도 두 나라 점령군이 ‘협의’할 일이지, 한 쪽에서 결정해 다른 쪽에 ‘통보’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랭던 제안은 과도정부 수립 방법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소련에 통보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미군 점령지역 안에서 실행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실질적 ‘분단 건국’의 기본 방침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1)항에서 “김구로 하여금”이라 하여 임정 아닌 김구 개인을 명시한 뜻이 무엇일까. 미군정은 군정청 외의 한국 내 정부조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혀 왔다. 그러나 임정 환국이 박두한 이 시점에서 미군정이 원하는 과도정부 수립에 임정을 활용하고는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임정의 조직이 과도정부의 조직으로 연결되는 것은 바라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도 이승만의 냄새를 맡는 것은 내가 그를 너무 용하게 보는 탓일까? 임정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에는 모순되는 면이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명망을 임정에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임정 활동을 지속하지 못한 데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래서 임정의 권위는 떨치되 임정의 실력이 살아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며칠 후 김구가 입국해 처음 만난 사람이 이승만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이승만이 군정청과 임정 사이의 관계에 어느 정도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군정청은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일체 비밀로 했기 때문에 그들이 경교장에 들어가 앉을 때까지 기자들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었던 것은 군정 당국자들과 이승만 뿐, 아마 한민당 요인들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이 시점까지 이승만보다 임정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므로 알았다면 바로 뛰어왔을 것이다.


이승만은 1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중경 임시정부의 환국 문제로 소란한 모양이나 하지 중장에게 반드시 연락이 있을 터이고 나도 알게 될 터이므로 책임 있는 발표가 있을 때까지 환영 소동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獨立促成中央協議會는 착착 진행되어 가는 중으로 지방적으로(例하면 慶南과 富平) 지방조직이 점차 결성되어 감으로 觀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소위 신탁통치 문제는 점차로 식어가는 모양으로 조선에 대하여 신탁통치 운운은 아마 꼬리를 감추는 것 같다. 38도 문제도 조만간 해결될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소 양국의 진주군사령관 사이의 협의가 진행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관계국 정부 사이에 해결책이 진행되든지 좌우간 협의를 진행시켜 해결을 하려고 그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때에 우리는 더욱 힘을 합치고 일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 부탁할 것은 儒敎, 佛敎 등의 종교단체가 활발히 움직이는데 기독교들만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알 수 없다. 3·1운동 당시보다도 더 활발한 움직임이 있기를 바란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0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환영 소동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라고 그가 말했고, 군정청은 환영 소동이 없도록 조치를 취했다. 23일 김구가 상해에서 비행기를 타기까지 이승만이 미군정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얼마나 과시했는지 모르지만, 도착 후 경교장에 들어앉아 이승만의 방문을 맞을 때까지 누구도 자기 도착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승만의 도움 없이는 아무 일도 해나가기 어렵겠다는 인상을 받지 않았을까.


랭던 제안이 나오기 전날 이승만은 “신탁통치 운운은 아마 꼬리를 감추는 것 같다.”며 연합국 회담보다 점령군의 역할을 더 기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형식적으로는 소련군도 포함하는 점령군이지만, 실제로 그가 역할을 기대한 것은 물론 미군이었다. 10월 중순 귀국 길에 도쿄에서 맥아더, 하지, 애치슨과 만났을 때부터 일방주의 노선은 설정되어 있었고, 이 노선이 랭던 제안으로 표출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이승만의 역할은 이 담화문으로도 짐작되는 것이다.


미국의 임정 불인정은 전쟁 중부터 계속되어 온 방침이었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소련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1942년 4월 헐 미 국무장관은 루즈벨트 미 대통령에게 제출한 각서에서 임시정부를 승인할 겨우, 소련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국의 여타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181쪽)


1945년 11월 시점에서 일방주의 정책노선을 제안하는 미군정 입장에서는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는 이유였다. 당시의 임정이 1942년 이래 어느 정도 좌우합작을 이루어 좌익을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군정 당국자들의 마음에 다소 걸렸을 수 있지만, 진주 이래 접해 온 한민당 인사들의 보장으로 그런 의혹은 충분히 불식되었을 것이다. 귀국 자체는 개인 자격으로 하더라도, 과도정부 수립 과정에서 임정 조직을 일부 활용하는 것은 미군정 입장에서 꺼릴 필요가 없는 방안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랭던의 전문에 임정 아닌 김구 개인이 명시된 것은 첫 단계에 만들 회의체로 이승만이 주도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0월 중순 맥아더와 함께 하지를 만난 이래 군정 당국자들의 이승만 존중은 극진한 것이었다. 12월 중순 모스크바 3상회담 전까지 독촉을 통해 이 회의체를 만들려는 이승만의 노력은 군정청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신탁통치의 대안으로 자치조직을 서둘러 만들려는 군정 당국자들의 욕심과 김구를 제치고 주역을 맡으려는 이승만의 의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Posted by 문천

 

全南 羅州郡 榮山浦邑과 旺谷面 細牧面 소재지 4만5,000두락과 벼 28만 9,000석과 讓渡地代 45만8,500원을 東拓에서 반환해 달라는 소위 宮三面사건이 요즈음 군정청에 호소되었는데 그 내용은 구한국시대로 돌아가 서력 1887년 이 곳에 심한 한재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로 면민은 유리걸식의 비운을 면치 못하는 참경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暴吏들은 세금을 성화같이 재촉하였으나 낼 길이 막연한 주민은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을 기화로 한 모리배들은 세금을 대납해 준다고 감언이설로 주민을 속이고 이 토지를 전부 탈취하고 말았다가 문제가 다대함을 보자 이것을 동척에다 내어 주고 만 것이다. 이래 60년간에 끊임없이 이곳 주민은 반환운동을 하여 적지 않은 희생을 당하고 일본인들의 압박으로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으나 이에 굽히지 않고 宮3面 農民會에서는 羅在基와 盧文錫이 상경하여 군정당국에 이 사실을 폭로코 일반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있다는 바 금후 이 사건의 전개는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19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7책, 창작과비평사 펴냄)의 배경인 ‘궁삼면 농민운동’은 식민지 농업정책의 폭압성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의 하나다. 식민지 후기의 삼엄한 통치체제 아래서도 농민의 조직적 저항이 끈질기게 계속된 것은 일본 식민정책의 폭압성이 농업 부문에 가장 집약되었기 때문이었고,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 원리 도입에 대한 넓은 공감대가 이뤄진 이유도 무엇보다 농업 분야의 부조리 상황에 있었다.


궁삼면 지역 토지문제의 뿌리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직후인 1887년에 있었다. 소민(小民) 보호라는 유교국가 기능이 파탄지경에 이른 때였고, 일본으로의 쌀 대량 수출이 시작되며 농지의 경제적 가치가 새로운 차원에서 부각되고 있을 때였다. 크고 작은 권력자들이 농지 집적에 광분하고, 이를 억제해야 할 왕권이 오히려 농지 쟁탈전에 앞장서고 있었다.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 통치권을 획득하기 전에 조선의 농지 소유구조는 이미 극심한 집중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확보한 일본은 구한말의 농지 소유 집중구조를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더욱 심화시켰다. 앞서(11월 11일) 동양척식에 관계해 언급한 것처럼 동양척식은 1920년대까지 전국 농지의 3분의 1을 끌어 모으며 집중구조의 심화에 앞장섰다. 이에 따라 농가 호수에서 자작농 비율은 1914년 35.2%, 1919년 39.3%에서 1929년 18.0%, 1945년 13.8%로 떨어졌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48쪽)


명목상의 소유관계보다 더 심각한 집중 현상이 소유권 개념의 변화에 있었다. ‘소작’이란 이름은 그대로라도 그 실질적 의미가 바뀌었다. 왕조시대의 지주-소작인 관계에는 공동체 내의 공생관계란 의미가 남아있었다. 절대화된 소유권 앞에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되었고, 노동력 과잉의 농촌 현실 앞에서 소작인은 실제로 ‘농노’의 처지에 떨어졌다.


유교국가건 무슨 국가건 국가의 기본 기능은 대다수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더라도 안정된 생활조건을 보장해 주는 데 있다. 박애나 인권에 입각해서에 앞서 국가 유지를 위해 필요한 기능이다. 말기의 조선 왕조가 인구의 대다수를 곤경에 빠트리는 농지 소유 집중 현상을 막지 못한 것은 국가 유지를 포기한 셈이다. 그리고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 것은 식민정책의 기조가 식민지 사회의 발전을 도외시하고 일방적 착취만을 행하는 ‘종속주의’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식민정책의 동화주의, 자주주의와 종속주의의 차이에 관해서는 서중석 위 책 36-37쪽 참조)


일본 식민통치의 종속주의적 속성은 농업정책 중에서도 쌀 생산과 관련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조선 쌀의 일본 공급은 식민지시대 이전부터 한일간 경제관계의 중심축으로 떠올라 있었다. 식민지시대 말기까지 쌀은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가치에서 중심적 위치를 지켰다. 따라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착취정책은 쌀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쌀에 관련된 식민정책을 주제로 한 많은 연구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지만, 쌀 생산 지역에서 농지 소유 집중 현상이 특히 심했던 것은 여러 착취정책의 효과가 누적된 결과로 이해된다. 1929년의 전국 소작농 비율이 45.6%였음에 비해 1928년 삼남지방의 소작 및 자소작농 비율은 84%에 달했으며, 전북의 평야지대에서는 1~2%의 지주가 94~97%의 소작농과 자소작농을 지배했다고 한다. (서중석 위 책 48쪽)


동양척식의 주도 하에 도입된 ‘근대적’ 농장 체제는 쌀 생산에 주로 적용되었다. 노동원가를 최소화하는 ‘합리적’ 경영으로 쌀 반출을 최대화하는 체제였다. 1921년생으로 김제 동진농장에서 일한 최재순은 농장 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광활에 생긴 게 ‘동진농업주식회사’라고 일제 때 아주 모범적인 농장이 있었어요. 모범적이라고 하는 것이 순전히 국가 입장에서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고, 입주한 농민들에게는 착취기관이나 다름없었어요. 또 이 동진농장의 권리가 얼마나 센지 이웃한 농장에서 물길을 빼가기라도 하면 총을 쏴버려요. 당시 동진은 섬진제를 수원지로 해서 수백지로 물길을 끌어서 농사짓는 데 전용했어요.

농장 직원들은 모두 러일전쟁 후 제대한 사람들이었고 지배인으로 후쿠이라는 육군대좌가 왔는데, 농장을 만들기 위해서 보냈던 거죠. 그러니 모든 경영과 운영방식이 군대식이었어요. 나중에는 농업박사가 지배인으로 와서 운영했어요. 그래도 어쨌거나 제대 군인들이 사무실 관리자나 직원들이다 보니까 군대처럼 구획을 딱딱 나누었어요. 전체 아홉 개 부락으로 나누고, 그걸 아홉 ‘답구’(畓區)라고 했어요. 말하자면 1답구가 1부락이었던 거죠. 거기에 약 70명 정도가 살았어요. 그리고 논을 2정보씩 주고 농사를 짓게 했죠. 집도 많이 짓는 게 아니라 논에 가깝게 6가구씩만 딱 지어 살게 했어요. (<8-15의 기억> 213-214쪽)


왕조 말기에 이미 국가체제 유지가 어려운 수준에 와 있던 농민 억압구조가 식민지시대에 더욱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 ‘근대적’ 무력 덕분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동진과 같은 ‘모범적’ 농장에서는 최소한의 인력을 최소한의 임금으로 고용함으로써 최대한의 쌀을 반출했고, 그 능률성은 일반 지주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소작요율이 8할에 육박하게 되었다는 것은 쌀 생산의 원가 중 노동력의 비중이 2할 주준으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전통시대에 5할을 넘던 노동력의 원가 비중이 이렇게 줄어든 데는 근대기술의 활용으로 인한 비료 값, 수리(水利) 비용 등 다른 원가 요인의 증가도 약간의 몫을 했겠지만, 압도적인 몫은 노동력의 착취 강화에 있었다. 종래의 소작농은 미약하나마 농업 경영의 주체로서 역할을 지키고 있었는데, 식민지시대 농장 체제 하에서는 단순한 착취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이 농민보다 공장 노동자에게 대중적 기반을 둔 것은 근대적 착취 체제가 농촌보다 공장에서 먼저 발달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공장보다 농촌에서 근대적 착취 체제가 더 널리 자리 잡았다. 그 때문에 식민지 후기를 통해 민중 저항이 농촌에서 더 활발했던 것이고, 해방 시점에서도 토지 소유제도의 개혁이 무엇보다 절실한 변혁의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