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모순덩어리 이스라엘

기사입력 2009-02-09 오전 11:09:28

근로자와 戰士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큰 정당이 있다. 리쿠드당과 노동당이다.

몇 해 전 라빈의 노동당 정권은 "땅을 주고 평화를 얻는(Land for Peace)" 평화 정책의 길을 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최초의 대 아랍 유화 정책으로, 중동 평화를 바라는 세계인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었으나 이스라엘 내에서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라빈의 암살과 작년 총선의 노동당 패배로 이어졌다.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리쿠드당의 네타냐후 정권은 노골적으로 노동당의 평화 공존 정책을 뒤집어놓고 있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영토로 예정되어 있는 서안 지구에 '정착촌'이라는 이름의 식민 활동을 강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아랍인 구역에 이스라엘인 아파트단지를 짓는 등 도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두 정당의 대 아랍 정책 차이는 뿌리 깊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건국 준비 과정에서 지도자들은 유태인의 민족성을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반호>의 아이작,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처럼 나약하고 음흉한 전통적 유태인상을 깨뜨리려는 노력에 두 정당의 연원이 있다.

하나의 방향은 유태인이 훌륭한 '근로자'가 되는 것이었다. 유럽 유태인 사회는 뛰어난 예술가, 학자, 법조인, 사업가를 배출했다. 그러나 유태인이 훌륭한 농부와 직공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땀의 소중함을 새로운 세대에 일깨워주는 근로시오니즘 운동에서 출발한 노동당은 같은 근로자인 아랍인에 대한 도발을 최소화하려는 전통을 가져 왔다.

한편, 리쿠드당은 또 하나의 방향, '전사(戰士)'의 모습을 추구하는 노력에서 유래한다. 영화 <엑소더스>에도 소개된 테러 조직 하가나와 이르군이 리쿠드당의 선구다. 투쟁시오니즘 운동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건국이 유태인이 유럽인으로서 아랍인을 정복하러 가는 길이며, 거기에는 도덕성보다 힘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1910년대 이래 시오니즘의 양대 줄기가 된 두 노선 가운데 처음에는 진보적 유태인들의 지지를 받은 근로 노선이 우세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나치 박해를 피해 난민들이 밀려들면서 차츰 투쟁 노선이 득세했다.

이스라엘인은 근로자로서도, 전사로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오니즘의 두 계열이 모두 결실을 맺은 셈이다. 그러나 아랍인과의 관계에서 두 계열은 아직도 치열한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 가자 지구 동부, 이스라엘 접경 지대인 알-투파 마을은 이스라엘군의 거듭된 공격으로 마을 전체가 철저히 파괴됐다. 파괴된 집에 사람은 없고 팔레스타인 깃발만 홀로 나부낀다. 70년 전 유대인 게토의 참상을 떠올리는 이 풍경이 바로 시오니즘의 만행으로 빚어진 것이라니, 역사의 비참한 아이러니다. 피해자였던 유대인이 가해자가 되었다 해서 보상의 행복을 얻는 것인가? 힘을 숭상하는 근대 정신이 인간을 어떻게 비참한 존재로 만드는지,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의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프레시안

  1997년 봄 이 글을 쓸 당시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던 큰 변화를 아직 내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산권 붕괴에 따른 동유럽 출신 유대인의 대규모 이주를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유대인의 단일민족국가로 흔히 인식하지만, 사실은 크게 다르다. 팔레스타인인을 비롯한 비 유대인 인구를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니다. '유대인' 자체가 하나의 민족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는 것이다.

민족은 혈통보다 언어와 문화로 규정되는 존재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의 유대인은 유대교 및 그와 관련된 문화를 지키고 있었지만, 거주 지역에 따라 그 종교와 문화에도 큰 편차가 있었고, 쓰는 언어도 달랐다. 유대인의 정체성은 동아시아 문명을 공유하는 여러 민족들의 집합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유럽 각국에 민족주의가 일어나자 마이너리티의 입장에 몰린 여러 나라 유대인들이 새로운 유대감을 키워 근대 시오니즘을 일으켰다.

선진국 유대인 사회의 엘리트 계층은 소속한 나라에의 동화를 바라며 시오니즘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 말 시오니즘의 폭발적 발전은 선진국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격화되는 데 대한 반작용이었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전형적인 계기였다.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의 국가'를 세울 땅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에게 얻고자 했다. 영국은 아프리카의 동남쪽 한 귀퉁이 우간다 부근을 검토했다. 원주민과 갈등을 적게 일으킬 만한 곳을 고르려 한 것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으로 터키 제국이 와해되자 영국은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을 내놓았다. 아랍 세계를 적극적으로 경영할 필요가 떠오른 단계에서 유대인을 식민 집단으로 활용할 구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주선에 따른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 이주는 식민국가 국민들의 식민지 이주 틀 속에 들어 있는 현상이었다. 영국 시민이 주축이 된 유대인 집단이 식민 당국의 후원 하에 식민지에 정착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탄압과 학살을 배경으로 이스라엘의 건국 여건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영국이 아랍 세계 경영에 앞장설 힘을 잃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후원국 역할을 영국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 미국이었다.

20세기 초반 동안 극심한 반유대주의를 피해 유럽을 벗어난 유대인들이 제일 많이 향한 곳이 미국과 팔레스타인이었다. 팔레스타인보다도 더 많은 유대인이 미국에 자리 잡고 미국 사회에 (인구 비율에 비해 대단히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서 미국의 이스라엘 후원 정책을 뒷받침해 주었다. 지금 미국의 유대인 중에는 종족주의를 벗어나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지만, 네오콘 그룹 속의 유대인 인맥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스라엘과의 특수 관계에 집착하는 전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은 그림을 1997년에 나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5년 동안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동구권, 특히 러시아로부터 이주하여 이스라엘 인구의 10% 이상을 점하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고르바초프 정권이 국경을 개방하자 많은 러시아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1990년 초까지 약 20만 명의 소련 출신 유대인을 받아들인 뒤 미국이 더 이상의 이민을 막으면서(이스라엘의 로비 결과로 알려진 조치다.) 이민 물결이 이스라엘로 쏠리게 됐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유대인의 이주를 환영하는 정도가 아니라 줄곧 독려해 왔다. '유대인'의 자격은 2대 조상, 즉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네 사람 중 하나만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해 주는 너그러운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 증가 정책은 1990년대 초반에 사상 최대의 성공을 거뒀다. 5년 동안 약 70만 명의 이민이 구소련으로부터 넘어왔다. 그런데 이 성공에는 예상외로 큰 부작용이 따라왔다.

이스라엘의 공용어는 히브리어아랍어다. 모든 유대인은 (노인들과 아랍권 출신의 소수 유대인을 제외하고) 이스라엘에 오면 히브리어를 쓰게 되어 있다. 문화가 다른 여러 나라 출신 유대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기 위해 히브리어 정책은 매우 중시되어 왔다.

그런데 수많은 이민이 구소련에서 쏟아져 들어와 자기네끼리 '러시아타운'을 이루게 되자 러시아어가 제3의 비공식 공용어가 되었다. 미국의 이민 정책 변경이 아니었다면 아마 대부분 미국으로 향했을 그들은 단기간에 거대한 이익집단을 만들었다. 국가 의식은 강하면서 민족의식은 약한 집단이다. 이 집단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이스라엘에의 문화적 동화를 거부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1990년대 후반 동안 러시아어 신문과 방송이 속속 생겨났다. 그들의 정당도 생겨나 의회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가지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이 정당들은 퇴조했지만, 그 배경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독자 정당보다 극우파 정당을 통해 자기네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러시아계 이민 집단은 이스라엘이 더 많은 땅을 가지기를 바라고, 따라서 아랍권과의 대결 격화를 원한다. 서안 지구와 골란 고원 등 점령 지역의 정착민 가운데는 그들의 비중이 대단히 높다. 이츠하크 라빈이 추진했던 "땅 대신 평화" 정책을 그들은 매국 정책으로 본다. 라빈의 정책을 지지하던 에후드 바라크 현 국방장관이 가자 공격에 앞장선 것은 임박한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고 관측되고 있다. 어떤 양보도 일체 용납 못하는 극단적 강경파 유권자가 지난 15년 사이에 10% 넘게 늘어나 있기 때문이다.

인구 730만 명의 이스라엘보다 더 복잡한 인구 구조를 가진 나라가 이 세상에 별로 없다. 20년 전에도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국가가 되기에 지나치게 복잡한 구조의 나라였다. 지금은 그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이 더 복잡하게 되어 있다. 아랍권과의 갈등 이전에 내부 모순을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지경까지 이스라엘을 데려다준 것이 미국의 힘이다. 오바마의 미국이 진정한 변화를 위해 처리해야 할 뚜렷한 과제의 하나가 이스라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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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자

기사입력 2009-02-04 오전 8:44:09

기병대와 대통령 부인

1928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허버트 후버는 미국의 장래를 한껏 밝게 내다보고 있었다. "지금 미국은 역사상 어느 나라보다도 빈곤의 완전한 정복을 가까이 바라보고 있다"고 그는 유세에서 말하곤 했다. 대공황은 그의 취임 7개월 후에 터졌다.

후버의 재임중 미국인의 총소득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수출입은 3분의 1 이하가 됐다. 공식적인 실업률은 25%를 기록했지만 실질실업률은 40% 이상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후버는 낙관론을 버리지 않아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믿었고, 근본적인 실패를 고집스럽게 부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했다.

후버의 고답적인 태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 '연금 부대'의 격퇴다. 1932년 대통령선거전을 앞둔 여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병사 2만여 명이 워싱턴에 몰려들었다. 1945년부터 지급받기로 예정돼 있는 연금을 앞당겨 달라고 청원하며 대로상에 캠프를 친 그들을 연금 부대(Bonus Army)라 한다. 후버는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쫓아냈는데 과잉 작전으로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얼마 후 새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연금 부대가 다시 찾아왔을 때 루스벨트는 부인 엘리너를 그 캠프로 보냈다. 엘리너는 시위자들에게 커피를 권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마음을 달래줬다. "후버는 기병대를 보내줬고 루스벨트는 마누라를 보내줬다"는 것이 두 대통령의 차이로 국민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대공황을 이겨낸 루스벨트의 '뉴딜'이 후버의 정책과 달랐던 것은 빈민 구제에 역점을 두고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꾀한 점이다. 빈민 구제를 좌경화로 여기고 제도 개혁을 체제 전복으로 생각했던 후버와 달리 위기의 심도를 투철하게 인식한 것이다. '노변정담(Fireside Chat)'의 라디오방송으로 국민의 마음에 다가가려 애쓴 것도 같은 인식에서였다.

1920년 부통령에 출마해 낙선한 후 소아마비로 정계를 은퇴했다가 휠체어에 몸을 싣고 돌아온 루스벨트의 모습에서 미국인들은 시련 극복의 상징을 보았다. 김대중 당선자의 지팡이 역시 세 차례 도전에 실패한 경력과 함께 지금의 위기상황에 어울리는 지도자상을 그려주고 있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노변정담을 방불케 하는 '국민과의 대화'를 보여주고 있으니 대공황을 극복한 루스벨트에 못지않은 위기극복의 업적을 기대하게 된다. (1998년 1월)

▲ 1998년 1월, 외환 위기 직후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선 시민들. 실효성 없는 '쇼'일 뿐이란 냉소적 시각도 있었지만, 고통 분담의 정신이 당시 사회에 어떻게 살아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모아진 금 자체보다 이에 참여하는 자세가 위기 극복의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일반 시민들은 국가와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집권자가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이 마음을 가로막는다면 그런 집권자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은 존재다. @연합뉴스

  대규모 토목공사를 '경제 살리기' 방안으로 내놓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살리고자 하는 경제가 국가 사회의 경제 아닌 건설 대기업의 경제라면.

그러나 이것을 '뉴딜'에 갖다 대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실례천만이다. 뉴딜 정책 중에 대규모 토목공사의 비중이 작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토목공사라고 다 같은 토목공사인가. 1930년대 미국과 21세기 한국의 대형 토목공사 사이에 인건비의 비중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누구나 대충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뉴딜의 토목공사는 시설을 만드는 것보다 빈민들에게 정부의 돈을 '퍼주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부가 푼 자금의 큰 부분이 서민들의 요긴한 지출로 직결되었기 때문에 일부 자금을 흡수한 기업가들은 이 지출에 부응하는 생산 활동에 투자하게 되었다.

지금의 토목공사는 서민의 지출 능력을 키워주는 효과가 미미하다. 정부 자금의 대부분을 흡수할 대기업에게는 그 돈을 국내 생산 활동에 투입할 동기가 늘어나지 않는다. 해외 투자가 더 수지맞겠다고 대기업들이 판단하면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정부 자금이 결국 국가경제를 외면하는 길로 흘러나갈 것이다.

위기에 처한 개인의 대응 자세는 위기를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근본적 위기라면 인생관을 바꿔야 한다. 일시적 위기로 인식한다면 당분간 하고 싶은 일 참고 하기 싫은 일 하며 지내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근본적 위기란 것을 아예 인식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위기든 요령만 잘 피우면 넘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서양 사회를 풍미한 테일러리즘은 세상의 어떤 문제에든지 기술적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 능률 지상주의였다. 개인의 요령 지상주의와 같이 가치관의 반성을 마비시키는 풍조였다.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 부른 20세기의 극단성이 가치관의 경직 현상에서 나온 것이라면, 인간 지성의 오만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회진화론과 테일러리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대공황을 맞은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대표적인 테일러리스트 정치가였다. 사실 그를 '정치가'로 분류하는 것도 망설이는 이들이 있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하딩과 쿨리지 행정부에서 통상부 장관을 지냈지만 공직 선거는 1927년의 대통령선거가 처음이었고, 대통령으로서도 정치가보다 행정가로서의 면모만 보였다는 것이다.

후버가 연금부대에 기병대를 보내고 루스벨트가 엘리너를 보낸 차이가 어디에 있었는가? 단순한 요령의 차이가 아니다. 후버는 닥쳐 있는 위기 인식의 주체로서 서민들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고 루스벨트는 인정한 것이다. 위기 극복은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니 백성들은 앉아서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나 하라고 후버는 윽박지른 반면 루스벨트는 정부와 국민이 함께 고통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장래를 함께 그려나가자고 청한 것이다.

루스벨트가 역사상 위대한 정치가의 하나로 꼽히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구조를 개편한다는 거대한 정치적 과제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일장공성 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란 시구가 있거니와 루스벨트의 성공 뒤에도 가려진 '백골고(百骨枯)'가 있었다. 대공황 이전의 긴 호황기 속에 자라나 미국 경제를 주름잡고 있던 '도둑 귀족(robber barons)'들의 위세가 크게 물러선 것이다. 후버 시대까지 미국의 주인 행세를 하던 대기업가 집단이 순순히 뒷전으로 물러난 것은 위기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자기네 책임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IMF 위기 때는 이 사회에 겉으로나마 자숙하는 분위기가 깔렸었다. 권력을 쥔 자들도 돈을 가진 자들도 모두 위기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위기를 눈가림하며 자기 몫만 생각하는 자들이 이 나라를 주름잡고 있다.

한 회사,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도 계획이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예상할 만한 범위의 호황과 불황을 놓고, 상황에 따라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가 3000이니, 7-4-7이니 일방적인 희망사항만 멋대로 떠벌여놓고 결과에 책임지기는커녕 실패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금 하고 있는 얘기는 무슨 근거로 믿어달라는 건가? 승리와 패배만 생각하고 성공과 실패를 생각할 줄 모르는 자는 한 국가는커녕 한 회사, 한 가정의 책임도 맡을 수 없다.

10년 전보다 지금의 위기가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밖으로부터의 충격이 더 커서가 아니라 위기에 대응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가 흐트러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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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파국'을 기다리는 전략

기사입력 2009-01-29 오전 8:35:44

한반도의 엔트로피

"엔트로피는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이다. '엔트로피'는 통상적인 말로 정확히 바꾸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굳이 갖다댄다면 '평형'이나 '안정' 비슷한 것이다. 열역학 원리로 사회 현상을 설명하려 하는 사회열역학에서는 인간 사회의 자연적 변천이 특권의 해소와 계급의 소멸을 향해 간다는 비유로 엔트로피의 법칙을 제시하기도 한다.

쉬운 말로 "물은 아래로 흐른다"고 하는 것도 엔트로피 법칙의 한 표현이다. 중력의 작용을 받는 물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여지를 가지고 있다면 평형성이 부족한 상태다. 흐르고 흘러 바다나 호수에 들어가든, 웅덩이에 고이든, 더 낮은 곳을 찾을 수 없을 때 엔트로피는 최대가 된다. 말하자면 물의 흐름은 엔트로피를 늘려 가는 과정이다.

'평형'이니 '안정'이니 하면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실인즉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은 곧 죽음의 방향이다. 사람을 비롯해 생물체가 살아있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비교적 낮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더 늘어날 여지가 없는 상태가 바로 '죽음'이다.

평형과 안정이 없는 사회는 사람들을 괴롭게 만든다. 그래서 평형과 안정을 늘리려고 많은 사람들이 애쓴다. 그러나 평형과 안정이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사회의 역동성이 사라져 버린다. 공산권 붕괴 과정에서도 드러난 일이다.

우리 사회는 엔트로피 수준이 꽤 낮은 편이다. 남한 사회만 봐도 그런데, 북한까지 넣어 민족 전체를 본다면 평형과 안정을 늘려갈 여지가 엄청나게 많다. 물에 비유하자면 높은 폭포를 앞둔 강물과 같다. 앞으로 당분간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큰 변화를 겪어갈 장래가 눈앞에 닥쳐있다.

지금까지의 냉전체제는 물이 낭떠러지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댐이었다. 이 댐이 무너지며 폭포의 위력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정주영 씨의 소떼가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도, '총풍'을 빌미로 북한 측이 남한 정치권을 갖고 노는 듯한 모습도, 이 폭포의 낙차가 큰 데 말미암은 일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억지로 막아온 흐름이기 때문에 한번 터지면 큰 파괴력을 보일 수밖에 없다. 급격하고 심대한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도 가져다주고 고통도 가져다줄 것이다. 이 폭포의 잠재적 에너지가 터빈을 돌려 생산적인 용도에 쓰일지, 아니면 배를 뒤집어버리고 말지, 사회 전체의 큰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북 관계의 전개는 좁은 이해관계를 떠나 대국적 자세로 임해야 할 과제다.

▲ 마오쩌둥이 죽었다느니, 김일성의 건강이 어떻다느니, 심심하면 한 번씩 헛소문을 열심히 돌리는 것이 냉전시대 반공 풍속의 한 양상이었다. 2008년에 그 풍속이 되살아난 것은 냉전 회귀를 바라는 일부 세력의 염원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정일과 만나겠다는 미국 대통령의 등장으로 이 염원은 좌절되고 말겠지만,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한민족의 과제를 외면하는 지금 상황이 국가와 민족 사이에 끼인 이 사회의 장래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지.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1998년 말 위 글을 쓸 때는 냉전체제가 한반도에서도 걷혀지고 있다는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전망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때까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이듬해부터 정체 상태에 빠졌다. 후퇴는 하지 않았지만, 진척이 더뎠다.

정체상태를 가져온 일차적 원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긴장 강화 정책에 있었다. '악의 축'이란 이름 아래 부시를 앞세운 네오콘의 국지적 긴장 강화 획책에 한반도가 걸려든 것이었다. 갈등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고착·심화시킴으로써 군사대국으로서 미국의 역할을 극대화하는 것이 네오콘 전략의 기조였다.

갈등을 지키고 키우는 데도 지렛대가 필요하다. 분쟁 지역에 미국의 긴장 강화 정책에 동조하는 앞잡이가 없으면 정책의 효과에 한계가 있고 오히려 역효과가 클 수 있다. 이슬람권 쪽에서는 파키스탄과 이스라엘이 그 역할을 맡았고, 북한과 관련해서는 누구보다 남한에게 그 역할이 기대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햇볕 정책은 부시의 긴장 강화 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이즈미의 일본 정부가 그래서 앞잡이 노릇 대신 해주느라고 나름대로 수고했지만, 한국 정부가 해줄 수 있는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 동안 남 북관계 발전이 빠르지 못했던 것은 아쉬운 일이라도, 부시 일당의 의도를 놓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선방'한 셈이다. '악의 축' 얘기를 할 때 부시에겐 분명히 북한을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한국과 중국이 앞장서서 그 의도를 가로막은 것이다.

햇볕 정책을 견지하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부시에게 불만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는 이 불만을 여러 방식으로 드러냈다. 한국의 수구파는 이 불만에 고무받아 자파 단결을 촉구하는 전형적 레토릭으로 미국과의 '혈맹' 관계를 활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미 간의 혈맹 관계는 한국인에게 부끄러운 과거일 뿐이며, 한국 수구파와 미국 네오콘 사이에 그 그림자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명박의 열렬한 부시 사랑이 이 그림자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지만, 부시가 백악관을 떠난 이제 누가 이에 응답해줄 것인지.

폴 크루그먼이 <미래를 말하다>(The conscience of a Liberal, 예상한 외 옮김, 현대경제연구원 펴냄)에서 '자유주의자의 양심'을 들먹이며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도덕성을 비판했거니와, 평화를 등지는 네오콘의 대결 정책은 신자유주의의 연장선 위에 펼쳐진 것이었다. 대결 아닌 통합의 메시지를 내세운 오바마의 등장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퇴진과 함께 네오콘 대결 정책의 청산예고하고 있다.

이제 남북 관계는 혈맹의 그림자에서마저 벗어나 한반도가 처해 있는 상황에 맞춰, 그리고 그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펼쳐질 기회를 맞고 있다. 이 기회에 임하는 북한 주민들의 자세에 관해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하고, 또한 관여할 일도 아니다. 남한 주민들의 태세를 보며 정치의 질곡을 안타깝게 생각할 뿐이다. 이명박 정부의 단절·대립 자세는 어느 여론 조사를 보아도 대다수 국민의 반대를 받고 있는데도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10년 전 급격한 남북 관계 변화의 전망을 폭포에 비유하면서, 폭포 대신 그런 대로 헤쳐 나갈 만한 급류로 그 낙차를 소화할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안 부시와 네오콘 때문에 낙차를 많이 줄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물러선 이제 지금부터라도 엔트로피의 급격한 증가에 대비하는 자세를 갖춰야 할 텐데 이명박 정부는 "기다리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라며 직무유기 전략으로 버티고 있다.

엔트로피의 비유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남북 관계의 변화가 한국 사회에 엄청나게 큰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내다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부시와 오바마의 교체가 이 변화에 획기적인 고비가 되리라는 것도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그런 판국에서 택하는 '기다리는 전략'이란 파국을 기다리는 전략일 수밖에 없다. 오바마가 명언한 북한 지도자와의 대화 용의를 놓고 "선거 때 무슨 소린들 못 하겠냐?"고 하는 것은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해야 할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고 해야 할지.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에서 경제는 멋대로 말아먹어도 좋다고 했다. 그 짓 하라고 뽑아준 거라 우기면 할 말 없다. 하지만 남북 관계만은 정략적 득실 때문에 망치는 일이 없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적었다(164쪽).

남북 관계 파탄은 경제 파탄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손실을 이 나라 이 민족에게 가져올 것이다. '경제 살리기'에 현혹돼 찍어준 사람들은 많아도 '남북 관계 죽이기'를 하라고 찍어준 사람은 몇 명 안 된다고 믿는다. 남북 관계, 정말 그런 식으로 틀어막아도 되는지는 국민들에게 다시 물어보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