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당시 이승만은 미국 국무성에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의 귀국에도 국무성은 비협조적인 태도였지만, 맥아더 등 군부 인사들의 호의로 쉽게 귀국할 수 있었다. 중국을 거쳐서 올지, 마닐라나 도쿄를 거쳐서 올지, 이승만 본인이 원하는 대로 골라서 들어올 만큼 편한 입장이었다.


이승만의 미국인 지지자가 공화당과 군부의 극우파에 분포해 있었던 것은 1945년 4~6월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둘러싸고 이승만이 반공-반소주의 입장을 선명히 내세운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을 소련의 세력권에 양도했다고 하는 ‘얄타 밀약설’을 주장하며, 그 증거까지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Los Angeles Examiner>지 1945년 5월 21일자에 보도되었다.


워싱턴 구미위원부는 현재 상항에 머물러 있는 이승만 씨의 훈령에 의하여 아래와 같은 각서를 발표하였다.

1. 영국과 북미합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뒤까지 조선을 러시아의 세력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을 러시아와 동의하였다.

2. 더 나아가서 일본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미합중국과 영국은 조선에 어떠한 서약이든지 하지 않을 것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되었다.

여기 대하여 이승만의 말은 만주나 내몽고에 대하여 얄타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되 이 조선 문제에 대한 것만은 정확한 사실인 것을 확신한다. 이 비밀의 출처는 어떠한 비밀정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262-263쪽에서 재인용)


이승만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증거’는 5월 8일자 <Chicago Tribune>지 기사였고, 그 기사는 자신이 5월 7일에 발표한 ‘얄타 밀약설’을 보도한 것이었다. 전형적인 언론조작이었다. 국무성이 그를 위험시하고 극우파가 그를 옹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승만이 ‘반공’이나 ‘반소’의 신념을 애초부터 갖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 1933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일도 있었고, 1945년 3월 28일까지도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과거 한-러 우호관계를 들먹이며 한국 독립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일 후 ‘얄타 밀약설’을 들고 나온 것은 정략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OSS 부사령관으로 있던 프레스턴 굿펠로우가 이런 책략을 권했으리라고 짐작된다. 파시즘과의 전쟁이 끝나 가는 상황에서 신생 정보조직인 OSS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추구하고 있던 상황에 입각한 짐작이다. 이승만이 ‘비밀정탐’이라 말한 것도 굿펠로우를 믿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9월 14일 건준과 인공을 장악한 박헌영 일파가 이승만을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할 때, 아마 그들은 이승만이 몇 달 전 반공-반소 전선의 소총수로 나선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을 그저 정치적 주견 없는 기회주의자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경 임정에 대항하는 자리에 올려주기만 하면 신이 나서 자기네 박자에 맞춰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책략에 있어서 자기네보다 한참 고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10월 16일 이승만의 귀국으로부터 12월 17일 공산당 비난 방송연설까지 두 달 동안 공산당과 이승만 사이의 관계는 한 판의 게임처럼 보인다. 인공 주석 추대라는 한 수를 받아 놓은 상태에서 귀국한 이승만의 첫 수는 10월 21일의 방송 연설이었다.


李承晩은 21日 오후 7時 20分부터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방송을 하였다.

“오늘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함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과거 한인 공산당에 대하여 공산주의를 둘로 나누어 말하고 싶다. 공산주의가 경제방향에서 노동대중에 복리를 주자는 것과 둘째는 공산주의를 수립하기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으로 격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한인만이 아니라 중국과 구라파의 각 해방된 나라에도 있는 일이다.

각 지방에 당파를 확장하여 민간의 재산을 강탈하는 輩가 있다. 이러한 급격한 분자가 선두에 나서서 농민이 추수를 못하게 하고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 이것은 방임하면 앞으로 국제적으로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치협력하여 화평과 안녕의 길을 함께 나아 갈 것을 희망하며 원컨대 이때는 우리들이 사정이나 사욕을 버리고 국체를 회복하여 국토를 찾자는 일점에 대동단결치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6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좋은 공산당’과 ‘나쁜 공산당’을 구분해 놓고, 자기 말 잘 들으면 좋은 공산당으로 인정해서 같이 놀아주겠다는 것이다. “농민이 추수를 못하게 하고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일으키는” 것은 한민당의 공산당 비방을 미군정이 받아들이고 있던 기준이었다. 미군정에 대한 영향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던 이승만이 이를 지렛대로 좌익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볼 수는 없을지 탐색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을 인공 주석으로 추대하려던 박헌영 일파의 시도가 번지수를 전혀 잘못 짚은 것으로 흔히 보는데, 내게는 아주 엉뚱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시도에는 상당한 합리적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승만이 ‘봉사’는 모르고 ‘군림’만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초년의 행적에서부터 드러나 온 것이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71세에 귀국한 그가 남을 앞세워놓고 그를 도와 착실히 일하는 역할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으리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박헌영은 그를 거래가 가능한 상대로 보았을 것이다.


이승만은 명성만 있을 뿐, ‘지도력 없는 지도자’였다. 미국에서 그가 확보한 추종자들은 이해관계가 깊이 얽매인 사람들뿐이었다. 국내에도 기독교인과 미국 유학자 등 역시 ‘패거리’가 통하는 사람들만이 그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광범위한 정치적 지도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이승만이 손쉽게 정치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길은 특정 정치세력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명성과 교섭 능력을 높이 사서 그를 추대한다는 것은 현실정치의 책략을 중시하는 정치세력이라야 가능한 것이었다. 중도파는 그런 책략을 중시할 수 없다. 이승만이 손을 잡을 만한 상대는 어차피 극좌파 아니면 극우파였다.


이승만이 결국 극우파와 손잡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가장 뚜렷한 원인은 이미 만들어놓은 미국 극우파와의 유대관계였다. 그러나 그만큼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 중요한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국내의 극좌파가 극우파만큼 그에게 절박하게 매달릴 입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박헌영 일파는 인공과 공산당을 발판으로 인민위원회, 전평, 전농 등 자생적 진보운동을 수렴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승만과 결탁하더라도 그에게 큰 권력을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친일파 처단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극우파는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줬고, 이승만은 그것을 받아먹은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