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7. 13:06
 

그저께 사진첩을 어머니 곁에 갖다두었다. 큰형이 지난 봄 뵈러 올 때 만들어 온 것이다. 형네 가족 사진 절반쯤, 그리고 나머지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찍은 가족사진부터 시작해 자식들과 찍은 사진, 어머니 독사진 등으로 모두 20여 장을 보시기 좋도록 확대해서 묶은 것이다. 병원 옮기실 때 사진 살펴보실 정신도 없을 정도로 의식이 혼미하셨기 때문에 집에 갖다두었었는데, 간병인들이 사진이라도 보시면 좋겠다고 일깨워주어서 갖다놓은 것이다.

그 날은 사진첩을 갖다놓고 금방 일어서야 할 형편이었다. 그리고 어제저녁에 가니 여사님들이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어머니께서 온 날 사진만 들여다보고 계세요." 한다. 보니, 침대 꼭대기쪽 벽에 붙여놓았던 사물함을 얼굴 곁에까지 당겨내어 놓고 그 위에 사진첩을 세워놓았는데, 어머니는 고개를 옆으로 하고 누워 하염없이 2년 전 가족사진을 들여다보고 계시다. 내가 사진첩 위로 얼굴을 보이며 인사드리자 힐끗 눈길을 돌려 쳐다보시고는 1초도 안되어 사진으로 눈길을 되돌리신다.

사진첩 뒤에 앉아서 이것 저것 사진을 바꿔서 보여드리니 열심히 쳐다보시다가 손을 내미신다. 사진첩을 들어 손에 쥐시도록 잡아드렸더니 사진을 넘기려고 손을 움직이려 애를 쓰신다. 사진 하나하나에 따라 생각이 옮겨 다니시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한참 사진을 보시다가 노근하신지 눈을 뜬 채로 잠이 드셨다.

오늘 아침 큰형 메일에서 읽은 옛날 얘기에서 사진 들여다보시던 어머니 모습을 다시 떠올린다.

 "내가 경기중학 입학시험을 친 1957년, 전쟁 후의 혼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면 그 학교에 합격할 만한 수준인지도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너 정도 실력이면 아마 될 거야.' 해주신 말씀 외에는 자신감을 가질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다. 발표날, 학교 담에 붙이는 방을 보러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설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붙어도 기쁠 것이고, 떨어져도 기쁠 것이다. 네가 붙으면 우리 가족에게 당연히 기쁜 일이 될 것이고, 떨어진다면 너보다 실력 있는 학생이 네 또래에 5백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너만 해도 충분히 똑똑하고 실력 있는 학생인데, 더 훌륭한 학생이 5백 명이나 있다면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냐?' 당시의 각박한 상황에서 그런 관점을 떠올릴 수 있었던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었겠니? 그 때 어머니에게 품은 존경심을 그 이후 잃어버린 일이 없었다."

 경기중학.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어머니께 큰 위로와 격려를 드린 존재였다. 청상으로 혼자 되신 분께 아들들 저고리에 붙은 그 마름모 명찰이 얼마나 큰 마법의 힘을 드렸을까? 그 명찰이 나온 사진도 하나 사진첩에 끼워 드려야겠다.

정말 대단한 집착이셨다. 그러나 큰형의 회고에 보이는 것처럼 그 집착을 뛰어넘어 관조하는 자세를 가지시려는 극기의 노력이 그 집착과 짝을 이뤘다. 작은형은 경기중학에 떨어졌는데, 그 때 연줄을 통해 학교로 찾아가 답안지까지 확인한 뒤에야 불합격에 승복하신 극성에서 그 집착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내 중학 진학 때는 극기의 측면을 뚜렷하게 보이셨다.

1962년에는 초등학교에서 어느 정도 하면 어느 학교에 갈 만할지 웬만큼 예측이 가능할 때였는데, 근근히 경기중학을 바라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게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군사정부에서 체력시험을 큰 비중으로 넣게 한 조치였다. 나는 체력시험에 영 젬병이었다. 게다가 학과시험도 공동출제로 해 변별력이 떨어질 전망이었으므로 엄청난 타격이었다.

체력시험을 포함하면 예상 커틀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바라볼 상황에서 어머니는 빨리 결단을 내리셨다. 모험을 하기보다 집 가까운 보성중학에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큰형의 회고와 일맥상통하는 일이었다. 아들을 경기 보냈으면 하는 강한 바램을 가지고 계시면서, 그 바램이 아들에게 좌절의 경험을 너무 일찍 가져다줄 위험 앞에서는 아예 접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욕망을 극복하려는 강박을 보며 어머니가 성악설을 신봉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식들이 자기 능력만이 아니라 품성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가지도록 꾸준히 북돋워 주신 것을 생각하면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시절에 너무나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고 개인적으로도 큰 불행을 당하신 시대적 조건이 어머니의 의식을 짓누른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원래의 낙천적 성선설이 거듭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억눌리셨지만, 자식들만은 성선설의 밝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중학교 진학을 놓고 그처럼 극심한 희비가 엇갈린 사실 자체가 그 시대의 참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장 우리 어머니부터, 아버지를 잃은 불행이 아니었다면 자식들의 진학에 그토록 절박하게 매달리지 않으셨을 것이 분명하다. 전국 학동들을 한 줄에 세우던 그 시절에 비하면 우리 사회에 여유가 많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대학 입시에 참혹한 경쟁의 양상이 여전한 것이 안타깝다.

내친 김에 진학 얘기를 마무리하자면, 나는 경기중학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지원 직전에 입시 요강이 바뀌어 체력시험에 약간의 기본점수를 주도록 하는 호재를 보고 용기를 낸 결과였다. 나중에는 내가 형편없는 불효자 노릇을 많이 하게 되지만, 당시에는 이 합격 때문에 내가 효자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중년의 방황을 넘어 효자 착각으로 돌아온 이제, 어머니의 의식을 짓누르던 괴물들을 이 사회에서 몰아내도록 힘쓰는 것이 어머니 위해드리는 일이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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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7. 13:03
 

큰형에게 일기를 계속 메일로 보내주고 있다. 그것을 보며 형도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모양이다. 오늘 받은 메일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어머니가 어느 시점에서 그때까지처럼 점잖은 시늉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신 일은 내가 모르는 일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어떤 마음이셨는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나는 그런 식의 선언을 할 것 같지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지, 누구에게(특히 자식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할 것 같지 않다.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그리고 자기 결점을 인정하셨지만, 어머니는 향상을 위한 노력을 그만두신 일이 없었다. 사실에 있어서 만년에는 생활 전체를 그 목적에 바치셨다.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차치하고, 그 치열하신 노력 자체가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둘째도 못 따라가지. 너는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어머니는 화가 많이 나실 때 다른 이들보다 당신 약점을 쉽게 드러내시는 편이다. 타고나신(또는 습관이나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성품은 약하신 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런 약점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더할 수 없이 강하신 분으로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의 일생은 하나의 성공이라고 나는 본다.
그 시점에서 어머니가 유럽에 가신 이유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학술적인 필요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막내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할 때 왜 서둘러 귀국하지 않으셨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가 다른 시각을 내놓는 것을 보니 더 잘 설명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D 박사와의 재혼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신 일이 있다. 가정이 있는 분이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였던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나는 반대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그것으로 얘기는 끝났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 기존의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반대했던 것일까? 정확하게 어떤 이유였는지조차 지금 내 기억에는 흐릿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분명히 생각되는 것은 내가 그분의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에까지도 가혹한 제약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도덕적이건, 아니건.
어머니의 선언이란 것이 내게 대한 구속감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전적으로 내 책임이란 말이 아니다. 그건 과대망상이겠지.  그 당시에 내가 어머니께 좀 더 도움이 되는 인간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누워계신 분을 놓고 아들들은 이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그것도 주변에선 효자로 꼽아주는 아들놈들이. 그리고 그 중 한 놈은 그분이 들으면 난처해 하실 수도 있는 얘기를 이렇게 기록으로 정리까지 하고 있다. 무서운 세상이다.
큰형과 나는 생각을 함께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다. 인간은 무엇보다 노력에 의해 평가된다는 점. 약점을 감추기보다 끌어안음으로써 사랑이 이뤄진다는 생각. 우리는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결함이 없으신 분이라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랑스러운 것이니, 다른 이들의 어버이 자랑과 비교해서 더하고 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서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는 자랑도 아니다.
이런 생각에서 내가 형보다 더 과격한 면도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아버지의 직접 기억을 형은 꽤 가졌고 나는 전혀 가지지 못한 데서 오는 차이일 것도 같다. 추상화된 존재로만 아버지를 느끼며 자라나 내 인생의 고민을 가지게 된 후에야 그분의 실제 모습을 마음속에 키우게 된 곡절 속에서 '현실 속의 인간'에 대한 강한 집착을 키우게 된 것이 아닐지.
간호사나 간병인들은 내가 어떤 착잡한 마음을 뱃속에 담고 어머니를 바라보는지 알 길이 없다. 매일 찾아와 편안하시기 비는 나를 깨끗한 마음의 효자로만 본다. 효자라니. 지난 십여 년간 나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볼 때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그러나 3년 전 귀국해 약해지신 그분 모습을 보고 출국을 포기한 이래의 내 자세를 돌아보면 차츰 어색한 느낌이 줄어든다. 전통적 의미의 선량한 효자는 아니지만 너무나 복잡해진 현대 세계가 만들어낸 '신종' 효자일지 모르겠다.
오늘은 무거운 생각에 많이 잠겨 있었다. 작년 가을 기력이 아직 괜찮으실 때 어머니의 유머감각을 보여준 일 하나를 기분전환 삼아 떠올려 본다. 식사를 도와드리려고 곁에 서 있는 내 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으신다.
"너도 식사 했냐?"
"아직 안 했습니다, 어머님."
"그런데 왜 그렇게 배가 부르냐?"
양옆의 환자분들이 킥킥 웃는다. 면구스럽기도 해서 능청을 떨었다.
"어머니, 이 배가 효자배란 거예요. 어머니께서 잘 드시면 제가 안 먹어도 저절로 불러진답니다."
알았다는 듯이 식사로 주의를 되돌리시던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한 마디 툭 던지신다.
"효자배? 내 보기엔 꼭 똥배 같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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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7. 13:01
 

어제는 아내가 두 번 출근하는 날이었다. 아내는 많은 조선족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식당에서 '주방시다' 일을 한다. 12시간 근무에 월 3일 휴식으로 2년간 해 오다가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면서 계속할 수 없게 되었는데, 마침 6시간 일하는 자리가 가까운 데 있어서 옮겨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그런데 전에 일하던 닭갈비집의 후임자가 한 달 동안 중국 다녀올 일이 있고, 그 집에서 파출부 새로 부르기보다 일에 익은 아내가 도와주기를 원해서 "돈에 눈이 뒤집혔구먼" 하는 내 비아냥에도 아랑곳없이 형편 되는 대로 그 집에도 다녔다. 주말이 바쁜 집이라 토요일은 지금 다니는 추어탕집을 쉬며 하루종일 하고, 금-일요일은 저녁때만 갔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데, 어제는 워낙 강추위라 내가 차로 모셔드렸다. 저녁 출근 시켜주고 그 길에 병원에 가리라 하고 나서는데, 온 세상이 눈이다. 조심조심 차를 몰아 후곡단지에 아내를 내려놓은 뒤, 그쪽까지 간 김에 일산시장의 중국상점에 들렀다가 병원으로 갔다. 현대식 빌딩 8층의 병실에서 밖에 뭐가 오는지 어두운 밤에 알아볼 수도 없지만, 그럴싸하게 느껴서 그런지 다른 날보다 아늑하고 호젓한 느낌이었다.

통 말씀이 없고 주의를 잘 돌리려 하지 않으신다. 오늘따라 통 말씀이 없으셨다고 여사님들도 보고한다. 그러나 표정이 어느 날 못지 않게 편안하신 것을 보면 신체 조건이 나빠서 그러신 것 같지 않다. 뭔가 깊고 긴 생각에 빠져 계신 것 같다. 이따금 입가의 웃음이 깊어지곤 한다. 간혹 울상으로 찡그려지기도 하지만, 웃음이 더 많으시다. 무슨 생각에 잠기신 것일까, 곁에 앉아 나도 생각에 잠긴다.

그분의 평생에서 편안하고 즐거운 때가 언제였을까? 아버지와 함께 하신 7년? 즐겁기는 하셨겠지만 그리 편안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1942년 경성제대 강의실에서 만난 두 분이 1944년 충청도 봉양에서 피난살이 분위기로 살림을 시작하셔서부터 1951년 부산의 피난살이 중에 아버지가 세상 떠나시기까지, 그 기억이 즐거움만으로 떠오르지는 않으실 것 같다.

그 시절 두 분 생활의 상당 부분이 <역사 앞에서>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 일기를 어머니께서 내게 넘겨주신 것이 1987년 말의 일이었다. 5년 후 책으로 내기에 이르렀지만, 그 시점에서 내게 넘겨주신 까닭, 아니 그 시점까지 혼자 꿍쳐두고 계셨던 까닭을 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어머니 말씀은 반공 독재 상황에서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봐 혼자 지켜오셨다는 것이다. 그 전 해에 퇴직하셨고, 그 해에 군사정권의 종식을 보았으니 말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아들들 대가리가 굵을 만큼 굵은 뒤까지 혼자 지키고 계셨다는 것은 그런 이유만으로 석연하지 않다.

너무나 아깝게 떠나보낸 분의 내밀한 기억에 대한 독점욕도 은근히 작용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돌아가신 분을 완벽한 인격자로 받들고 당신께서 그분을 알뜰하게 모셨다는 '신화'를 지키기 위해, 굴곡이 없을 수 없는 일상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을 수도 있다. 어느 쪽도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7년간의 결혼생활이 어머니에게 즐거움 못지 않게 괴로움의 기억이기도 하리라는 것은 일기를 혼자 지켜 오신 36년의 세월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진학시킨 후 어느 날 어머니께서 자식들을 모아놓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내가 너희를 혼자 키우느라 내 본성을 감추고 20년간 지내 왔다. 이제 너희가 다 컸으니 나는 이제 점잖고 엄숙한 시늉을 그만두고 편안하게 살련다. 행여 지금까지와 다른 내 모습을 본다 해서 놀라지 말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본색을 드러내는 것뿐일 테니."

그리고는 이태 뒤 학교를 휴직하고 일본에서 1년, 유럽에서 1년 지내셨다. 그 때가 어머니께 최고로 편안하고 즐거운 시기가 아니었을지. 이메일은 물론, 국제전화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엽서로 모니터링이 되면 얼마나 되었겠는가? 어머니의 일생 가운데 내게 가장 큰 공백으로 남아있는 시기다. 공백으로 남아있으니 즐거운 시기였을 수도 있다고 희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어머니의 그 시기와 연상되어 떠오르는 한 친구분의 존재다. 김초열 여사님. 이화여전 시절 친구인 김 여사님은 어릴 때 우리 눈에 어머니와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발랄한 분이셨다. 그 부군께서 당시 주 모로코 대사로 계셔서 어머니가 유럽 가는 길에 그곳부터 들러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지셨던 일은 당시에도 엽서로 알려주셨다. 후에 생각하면, 모로코 체류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는 노하우를 김 여사님께 많이 전수받으셨을 것 같다.

본성과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행복의 조건일까? 어머니는 그런 생각에 많이 매달리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뿐만 아니라 결혼생활 7년 동안에도 본성과 본색을 억눌러야 한다는 피해의식을 가지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자식들을 성년까지 키워내셨다 해서 본성과 본색을 되찾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후 긴 세월 동안 절감하셨을 것 같다. 퇴직하면서 이제 학문과 교육을 돌아보지도 않겠다고 선언하실 때도 본성과 본색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않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절 생활 하시면서도 탐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셨고, 수필 쓰시면서도 교육의 의미를 손에서 놓지 못하셨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희미해진 의식으로 병상에 누워 계시는 것이 평생 누리지 못하신 호강일 수도 있다. 무슨 생각에 잠기시는 것인지 속속들이 살펴볼 길은 없다. 그러나 아쉬움이 많으셨던 평생을 어떤 식으로든 반추하실 수 있다는 것은 그 아쉬움을 풀지는 못하더라도 그로 인한 아픔을 다독일 수 있는 기회려니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에 잠기실 만한 건강 조건을 유지하시는 것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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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