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9. 13:45

저녁 드신 후 주 여사가 틈을 내 어머니 흥을 돋궈 드리러 곁에 왔다. "선생님, 아까 함께 부른 노래를 아드님 앞에서 또 부릅시다." (일전에 주 여사가 지나가며 손을 흔들자 어머니가 마주 손을 흔드시기에 짐짓 "어머니, 저 분 누구세요?" 했더니 점잖게 "저 사람? 학생이야." 대답하신 일이 있는데, 그 후 주 여사는 어머니를 "선생님"으로도 부른다.) 어머니는 노래 얘기가 내 앞에서 나오면 뭔가 저지른 아이가 선생님 앞에서 시치미 떼는 것처럼 딴전을 피우려는 경향을 보이신다. 그런데 주 여사가 <아리랑>을 앞서 부르며 재촉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거기 끌려서 입을 우물우물하다가 드디어 노랫소리를 흘려내기 시작하신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노래는 노래다.

주 여사가 "아까처럼 큰 소리로 부르시지 않고... 아드님이랑은 큰 소리로 같이 부르세요." 인계해 주고 간 뒤에 내가 "어머니, 어머니 노래를 들어서 너무 기뻐요. 저랑도 불러주세요." 엉구럭을 떨고 <푸른 하늘 은하수>를 나직이 시작하니까 순간 별 꼴 다 보겠다는 표정을 얼굴에 떠올리시다가 한두 소절 지나가는 동안 풀리더니 웅얼웅얼 따라 부르기 시작하신다.

다른 레퍼토리 얘기는 들은 바 없고, 웅얼웅얼 시작하신 것을 더 키워드리고 싶어서 <아리랑>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내 입만 쳐다보실 뿐, 따라 할 기색을 안 보이신다. 그런데 내가 노래를 끝내니 정색을 하고 물으시는 것이 아닌가? "어째 너는 노래까지 그렇게 잘하냐?"

"어머니, 제가 원래 노래를 잘 하잖아요. 모르셨어요?" 했더니 눈을 치켜뜨고 고개를 외로 꼬신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전엔 노래를 참 못 불렀죠?" 하니까 석연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마구 끄덕이신다. 그럼 그렇지, 내가 내 아들을 몰랐을 수가 있나, 하는 눈치로. 아무튼 나라는 아들놈은 말보다 구구셈을 먼저 배우고 노래를 비롯한 정서면은 형편없이 빈약한 채 따지기나 좋아하는 재미없는 녀석으로 찍혀도 단단히 찍혀 있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확인하고 있다.

표정이 다양해지고 활발해지셨다. 어제오늘 사이엔 특히 기막혀 하거나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이 강렬하게 나타난다. 말씀하시는 데도 직설적으로 하지 않고 은근히 꼬는 먹물 티가 수시로 살아난다. 연시 첫 입을 무신 뒤에 너무 달아서 못 드시겠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안 먹을 까닭까지야 없지~" 하는 식이다.

점심 때 내가 들어섰을 때 마침 간병인들이 모두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 여사가 나를 가리키며 "누가 오셨네요. 누군지 아시겠어요?" 하니 나를 힐끗 쳐다보시고는 별 일 아니란 듯이 "나 아는 사람이야." 하신다. "좋아하는 분이세요?" 재차 물으니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시들하게 대답하신다. 주 여사가 다시 "이 분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시는 분 아녜요?" 하니 너무 엄중한 질문이라 확인이 필요하다는 듯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의 그 표정! 실망스러운 놀라움에서 피식, 어이없는 실소로 이어지는 (고개를 다시 저 쪽으로 돌리시는 동안) 그 확연한 표정의 굴곡을 두 눈으로 보고도 아들 노릇 하겠다고 점심 저녁으로 쫓아다니는 내가 참 속없는 놈이란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남는다.

모시고 있을 때 나를 쳐다보시는 표정이 몇 개의 모드로 뚜렷이 갈라진다. 의식이 크게 회복되시기 전에 많이 그러셨던 것처럼 다소 굳은 표정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실 때는 내 얼굴을 통해 다른 존재(김 서방일지?)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기시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푸짐하게 띠고 눈에도 웃음을 담아 쳐다보시는데, 생각이 이 쪽 저 쪽으로 활발하게 움직이시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입을 떼어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요즘 회복에 따라 늘어나는 모드는 무심한 눈길이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지나쳐 다니시는데, 나도 학생의 하나로 인식하시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럴 때 말씀을 걸면 반응도 활발하시고 나와의 관계를 비롯해 상황 인식도 현실에 쉽게 접근하신다.

오늘 적다 보니 주 여사의 언행에 기록이 집중되는 감이 있는데, 지금 병실에서 그분의 역할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양 출신의 장 여사와 흑룡강성 출신의 강 여사는 주 여사(55세)보다 두어 살씩 연상이지만, 주 여사가 전입고참일 뿐 아니라 성격과 능력에서도 앞장서는 위치인 것 같다. 새로 온 두 분도 며칠 사이에 근무 자세의 안정감이 크게 늘었다.

김, 박 두 분 여사님이 떠난 후 방 환경이 더 좋아진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어제 저녁 내가 서울 간 동안 아내가 혼자 병원에 갔다가 주 여사에게 들은 얘기를 나중에 해줘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 여사가 뭐랄까, 보스 기질이 있는 이라서 병실 관리 기준을 다소 독단적으로 해 온 모양이다. 일도 잘하고 말도 잘하니 책임을 계속 맡기고는 있으면서도 청결 기준 등 여러 문제에 병원 당국의 불만이 쌓여 온 결과가 이 번 이동에 이어진 것이라고. 두 분 떠난 후 주 여사가 주동이 되어 빨래, 청소, 목욕 등 적당적당히 해오던 일을 한 차례 바짝 해놓았다고 하는데, 방의 냄새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있다.

주 여사의 인품과 능력에 대해서는 나도 떠난 두 분보다 한두 수 위라고 평가해 왔지만, 아내의 신뢰는 더 확고하다. 연변 말로 "해박하다"는 것이다. 경우가 바르다는 뜻과 일이 되게 할 줄 안다는 뜻을 합친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말일까? 새로 온 두 분은 비교적 기질이 약한 분들 같은데, 며칠 안 되는 동안 안정된 근무 자세를 이끌어낸 것도 주 여사의 역량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 여사의 말을 아내가 공감하며 인용한 것이 있다. "우리가 밥값은 해야 되잖아요?" 중환자실 근무자가 일반병실 근무자보다 십여만원씩 더 받으니 그만큼 일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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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