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7. 12:52
 

어제는 일이 많은 데다 먼 곳에 다녀올 일도 있어 아내 혼자 어머니를 뵙고 왔다. 밤에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뵙고 온 얘기를 꺼내면서부터 싱글벙글이다. 며느리를 알아보시더라는 것이다.

이상하게 며느리를 못 알아보신다. 몇 달 전 기운과 정신이 푹 떨어지시기 전에도 아내가 "어머님, 저 누군지 아시겠어요?" 하면 능청스럽게 "알~지" 대답하시는데, 누군지 똑바로 말씀해 달라고 조르면 "제~자" 하시곤 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나이 있는 여성 방문객은 으레 제자려니 하시는가 보다. (30년 가까이 이대 국문과에 재직하셨고, 이제 정년퇴직 하신 지 20년이 넘었다.) 그러고 나올 때마다 아내는 "저는 알아보시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뭐하러 오겠어요? 이제 안 올래요." 짐짓 앙탈이다. 그러다가 모처럼 알아봐 주셨다고 저렇게 좋아한다.

작년 초여름 쓰러지시기 전에도 벌써 몇 해째 기억력 감퇴가 심하셨다. 그중에도 며느리 못 알아보시는 일이 두드러졌다. 3년 전인가? 계시는 절에 찾아갈 때, 점심시간에 겨우 대어 갈 형편이라, 미리 전화 드려 큰절(갑사) 입구의 단골 식당(수정식당)으로 내려와 계시도록 청했다. 조금 여유를 두고 도착해 보니 안 와 계셔서, 암자(대자암)로 전화해 보니 우리랑 약속은 까맣게 잊으시고 이제 공양하러 가실 참이란다.

기다리시라고 말씀드리고 그 날은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모시러 올라갔다. 모시고 내려와 식당 가까이 왔을 때 산책하며 기다리던 아내와 마주쳐 차 밖에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 후 아내는 식당으로 걸어 돌아가고 나는 차를 주차장으로 몰고 들어가려는데, 어머니께서 물으신다. "저 아주머니 인상이 참 좋구나. 너 아는 분이냐?" 기가 막히지만 대답할 수밖에. "네, 좀 아는 분이예요."

셋째 아들(나)을 알아보기는 잘 알아보신다. 거의 인사불성으로 정신이 몽롱하실 때도 간병인이 "이 분 누구세요?" 하면 응대를 못하시다가 "아드님이예요?" 하면 한 시름 놓았다는 표정이 되어 끄덕끄덕하신다. 그런데 알아는 보시면서도 크게 반가운 기색은 아니시다. 어려서부터 형제들 중에 고지식한 편이었던 내가 영 재미없는 녀석으로 도장찍혀 버린 것일까?

쓰러지실 때까지도 기회만 있으면 내 어릴 적 일이라고 싫증도 안 내고 되풀이하시던 얘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내가 말 배우는 것이 늦어 걱정을 좀 했는데, 어느 날 혼자 웅얼웅얼하고 있어서 가만 들으니 구구단을 외우고 있더라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수학적인 머리만 있고 언어적인 머리는 없는, 되게 재미없는 녀석이라고 믿어 오신 증거 같다. 또 하나, 초등학교 때 운동장에서 선생님 세 분이 함께 오시는 데 마주치자 그 자리에 서서 머리를 세 차례 꾸벅거리더라고. 가정방문 오신 선생님께 들었다며 내 머리가 허얘질 때까지 그 얘기를 입에 달고 지내신 것은 내 고지식함을 사랑하신 뜻도 물론 있겠지만, 융통성 없는 녀석이라고 딱해 하는 마음도 있으셨을 것 같다.

융통성 없는 성미 때문에 어머니를 필요 이상 걱정 끼치고 괴롭혀 드린 일이 많다. 이 글을 쓰면서 미국의 형에게도 메일에 담아 보냈더니 답장에 이렇게 썼다. "I think the history between you and Mother is playing out nicely now.  Bless you two." (형 쓰는 메일 서비스에는 한글 서포트가 안 되나보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그 분이 힘 있으실 때는 제일 악착스럽게 대들던 내가 힘 떨어지신 뒤로는 이렇게 착실하게 당번을 서게 되다니. 역시 나는 고지식한 놈인가보다. 생긴 대로 놀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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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