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방면에서 정릉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개울 건너에 숭덕국민학교가 있는 곳을 조금 지나 왼쪽으로 국민대 방향, 오른쪽으로 청수장 방향이 갈라집니다. 더 바짝 왼쪽으로는 아리랑고개와 스카이웨이 방향 길이 있어서 네거리 모양으로 되었지만 이것은 근년에 만들어진 네거리이고, 예전에는 아리랑고개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고 좀 올라가서 국민대-청수장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었죠. 국민대도 그때는 없었고, 배밭골 방향이라고 했습니다.

청수장 방향으로 몇백 미터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면 다리가 있고, 다리 건너 오른쪽으로 굽어 가면 몇십 호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시내에 접한 마을을 뚫고 좀 지나가면 앞서의 다리보다 5백 미터 가량 위의 다음 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면 청수장 가는 길로 다시 합쳤죠. 합치는 언저리에 숭덕국민학교 분교가 있었는데, 그 자리가 나중에 청덕초등학교 부지가 된 것 같습니다.

<역사 앞에서>에 나오는 집이 그 마을 가운데 있었습니다. 마을 위쪽으로는 옛날 서울 고관의 별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색창연하고 웅장한 저택도 하나 있었지만, 마을 안에선 제일 번듯한 기와집이었죠. 대지가 130평이었다고 후에 들었는데, 'ㄷ'자로 규모 있는 건물에 널찍한 뒷마당도 있었죠. 아버지가 <조선역사> 인세로 청수장-배밭골 갈림길 마을에 작은 집을 사서 정릉리 생활을 시작했다가 좋은 집이 매물로 나오니까 사서 옮기고, 살던 집에는 빈털터리로 월남한 장인 내외분을 모셨답니다. 47년 가을 생인 형은 앞서 집에서 태어났고, 50년 초 생인 저는 큰 집에서 태어났으니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이겠죠.

마을 쪽으로 빠져나오기 전 청수장길 양쪽으로 과수원과 밭을 구하셨는데, 아버지는 농사일을 좋아하셔도 직장에 다니느라 한계가 있으니 어머니를 농사꾼 만들 속셈이셨나 봅니다. 어머니가 큰 고생 하실 뻔한 것을 마침 친정아버님이 와서 구해주신 셈이겠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농사의 주체가 되셨고, 사위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주셨죠. 우리 살던 큰 집으로 옮겨와 사시면서.

 

1954년 서울로 올라온 것은 어머니가 숙대 교수로 자리를 얻으신 덕분이었는데, 그 때 큰형이 초등 4학년, 작은형이 1학년이었죠. 그 때 어머니가 혜화동-명륜동 쪽으로 자리 잡는 결정을 하시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첫째, 어머니의 이전 서울 생활에 경성제대-서울대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낯익은 동네였고, 아버지의 가까운 동료분들이 그 근처에 몰려 살고 계셨습니다.

둘째, 숙대까지 전차로 출퇴근하기가 괜찮은 위치였습니다.

셋째, 정릉리의 외할아버지 댁과 왕래가 편한 방향이었습니다.

넷째, '명문' 혜화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혜화학교 얘기를 좀 하죠. 1962년 제가 경기중학 들어갈 때, 420명의 신입생 중 30명 이상을 합격시킨 명문 초등학교가 대여섯 개 있었습니다. 덕수, 혜화를 필두로 수송, 재동, 남산 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혜화학교 졸업이 1300명 가량이었는데, 남학생의 10% 가까이가 (재수생 포함해) 경기 들어갔다면, 소위 '5대 공립-5대 사립'에는 절반 너머 들어갔겠죠? 나중에 생각하니 대단한 명문이었던 셈입니다.

이 명문의 텃세 때문에 우리 집이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한 집의 두 형제를 한꺼번에 전학받아줄 수 없다는 바람에 큰형만 혜화에 다니게 되었죠. 그래서 어머니는 명륜동 보성학교 부근의 문간방 하나를 세내어 큰형과 동생만 데리고 사시고, 작은형은 숭덕국민학교로 전학해 저와 함께 외할아버지 댁에서 지내게 된 겁니다. 2년 후 제가 학교 들어가러 혜화동에 합류하고도 작은형은 아마 1년 더 정릉에서 지낸 뒤 전학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큰형이 중학교 들어가 자리를 비워준 덕분인지.

 

이제 정릉리 생활 얘기로 들어가죠. 당시의 정릉리는 시골이었습니다. 마을을 벗어나면 온통 농지 뿐이었고, 그 가운데로 (배밭골 골짜기와 청수장 골짜기를 가르는) 산자락이 삐죽이 흘러내려와 있었죠. 논으로 메뚜기와(구워 먹으려고) 개구리(마을에 매 키우는 아저씨가 있어서 개구리 잡아가면 돈을 줬다고 하는데 내 손으로 개구리 팔아먹은 기억은 없어요.) 잡으러 다니고 산자락으로 기어올라 버섯 찾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들판으로 산으로 싸돌아다니기보다는 과수원에 놀러 나가는 일이 훨씬 더 많았죠. 철 따라 먹을 것이 여러 가지 있었으니까요. 복숭아밭이었는데, 울타리삼아 심어놓은 앵두 소출도 많았고, 과수원집 둘레로는 참외, 가지 등 채마밭이 있었습니다. 행길 건너 개울가의 밭에는 옥수수를 심어서 한 철은 밥 생각 안 날 정도로 옥수수를 많이 쪄 먹곤 했습니다.

같이 놀던 아이들 기억은 또렷하게 남은 것이 없습니다. 과수원과 집 안에 놀 공간이 넉넉하기 때문에 다른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적은 편이었고, 마을 어른들이 우리 집을 특별한 집으로 여겨서 아이들에게도 저랑 노는 데는 각별히 주의를 주지 않았나 나중에 생각났습니다. 어쩌다 메뚜리 잡으러 나갈 때, 외할머니가 두목급 아이들에게 단단히 단도리를 하시던 생각도 납니다. 한 번 조금 까져서 들어가니까 외할아버지까지 나서서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은 일도 생각나고요.

형제간에 떨어져 나와 있으면서도 작은형과 별로 가까이 지낸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늦게 깨는 편이라는 평판을 늘 가지고 살았거니와, 고등학교, 아니, 대학교 다닐 때까지도 또래들에 비해 어리버리했습니다. 대학 진학할 때도 문과 체질이 못 되니 이과 지망하라는 권유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죠. 그런데 작은형은 어렸을 때부터 참 까졌어요. 어쩌다 저랑 놀아줄 때 이야기를 지어내서 해주면 저는 입을 헤~ 벌리고 넋을 잃었죠.

그 때 작은형은 저처럼 어리버리한 동생을 두었다는 사실이 좀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이산가족이 되어 있는 처절한 현실이 형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하는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하는데, 저는 그저 먹을 게 뭐 있나, 인생에 한 가지 관심사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시절의 저는 작은형에게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죠. 그게 인이 박여서 지금 별 꼴을 다 봐도 "신선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지.

정릉리 시절 제가 잘한다고 이름 날린 짓은 우는 것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도 우렁차고 씩씩하게 울부짖는 게 아니라 한 번 시작하면 지칠 줄 모르고 오래 끄는 재주. 외가 식구들, 그 시절 얘기를 수십 년 지나 할 일이 있어도 머리부터 절레절레 흔들곤 했죠. 뭔가 주어진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불편한 점을 꼭 집어 표현하지 못한 데서 마음속에 어두운 단층 같은 게 생겼던 것 같습니다. 이 어두움은 오래 갔죠. 나이 마흔이 되어 교수직을 그만둘 때도 그 단층이 어떤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이 단층은 오리 또래의 꽤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단층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유럽 체류 동안 만들어졌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가까이 지내던 그곳 친구들이 한 번 심각한 표정으로 "네 마음속에 뭔가 검은 분노(black anger)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아주 합리적인 성격인데도 어떤 종류의 자극에는 마음을 전혀 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답답할 때가 있다." 충고를 해주는 데서 저 자신을 전면적으로 돌아보게 된 겁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어요. 당시에는 달걀이 대단히 귀한 음식이었는데, 외가집 뒷마당에 닭장이 있어서 며칠에 하나씩은 차례가 돌아왔죠. 그런데 어느 날 오늘 달걀이 있는데 어떻게 해줄까 묻기에 삶아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밥상에 앉아 보니 후라이를 해놓은 것 아니겠어요? 그거 갖고 몇 마디 투정을 하다가 어른들의 무책임에 너무나 분노해서 한 판 울음판을 거하게 펼친 거죠. 고런 꼬투리 하나로 온 집안을 불편하게 만든 짓을 그 후에 두고두고 반성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거겠지만, 정말 그 시절 사람들 아동심리학에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다 보니까 너무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일도 좀 하다가 나중에 덧붙일 것 없나 한

 번 다시 훑어보죠.



Posted by 문천

 

 

 

  글쓴이 : 문천   날짜 : 09-09-25 13:31   조회 : 59    

 

 

 

친조모님은 저 나기 여러 해 전에 돌아가셨고 친조부님은 우리 집이 부산으로 피난간 직후, 역시 제가 돐 되기 전에 돌아가셔서 아무 기억이 없죠. 더구나 그분들 사시던, 아버지가 자라나신 동네에 제가 처음 가본 것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였으니... 우리 형제들에겐 외조부모님이 곧 할아버지, 할머니였죠.

다섯 살 때 서울 올라온 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늘 가까이 계시다가 70년과 73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부턴 할머니, 할아버지로 쓰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마 1897년생? 그리고 할머니는 그보다 한두 살 많으셨으니 천수를 누리신 셈입니다. 그리고 1954년 이후 우리가 보는 동안 안온한 생활을 보내셨기 때문에 그분들, 특히 할아버지가 어떤 풍운을 뚫고 살아오신 분인지, 돌아가신 후에 외삼촌께 듣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저희가 가까이 모시고 지내기 전 그분들의 이력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할아버지 고향은 아산 신창. 6대조가 판서를 지낸(정조 때의 益자 運자 어른) 연안 이씨 집안이 큰소리 치는 동네여서 외증조할아버지께서 어머니 태어나실 무렵에 면장을 하고 계셨다더군요. 할머니 고향은 거기서 공주 유구로 막 넘어가 오른쪽에 있는 탑골마을(탑곡리)인데, 농지도 별로 없는 빈촌에서 한산 이씨 집안이 쿤소리 치고 지냈답니다.

차남인 할아버지는 소시쩍부터 배짱이 좋고 활동적인 성격이었던가 봅니다. 물려받을 농지도 없어 보이니까 보통학교 마치고 무작정 상경, 공업학교에도 다녀보고 뭣도 해보고, 하다가 제일 신나던 일이 전차 차장 하신 거라고. 당시엔 전차 차장도 칼 차고 근무했다며 화려한 경력으로 회고하곤 하신 일을 외삼촌께 얼마 전에도 다시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셨는지는 지금 기억이 안 나는데, 서울 생활 4~5년 후에 돌아가 결혼도 하시고, 농촌 개량사업에 얼마동안 몰두하셨다네요. 그 지역에선 처음으로 양계장도 해 보시고. 그러다가 만세사건에 걸렸는데, 죄질이 꽤 나빴나 봅니다. 게다가 면장 아들이 만세질 했다 해서 특별히 주목을 받는 바람에 유구 마곡사에 가서 1년 가량 숨어 지냈다고요. 어머니가 1920년 음력 9월 생이시니, 마곡사 피신 시절에 잉태되신 모양입니다.

1년이 지나도 바람이 지나가지 않으니까 마곡사 주지 스님이 장기 도피를 하려면 집에서 가까운 여기는 위험하고, 금강산의 믿을 만한 스님께 편지를 써줄 테니 거기 가 있으라고 권하셨답니다. 그래서 모험심 많은 25세 명문가 출신 청년의 북행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금강산 가는 길에 황해도 재령인가에서 주저앉아 버리셨답니다. 서양인이 경영하는 금광에 노가다로 잠깐 들어갔다가 금세 십장으로 발탁되는 바람에 거기서 1년 가량 지내셨다고. 마곡사에서 지내보고 절 생활에 아마 신물이 나셨겠죠. 게다가 서양인의 사업체니까 일제의 취체도 면할 수 있고. 금광에서는 허우대 좋고 머리 잘 돌아가는 청년이 나타나니까 요긴한 일꾼으로 찍었겠죠.

그러다가 일제 통치가 갈수록 빡빡해지면서 외국인 사업체에도 취체가 들어오니까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나 다시 금강산으로. 그래서 금강산 어느 절에서 불목한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답니다. 아무래도 성불할 체질이 아니셨던 모양입니다.

절에서 지내면서 가까운 곳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산판에 용돈 벌러 노가다를 뛰었는데, 거기서 또 산판 주인의 눈에 든 거예요. 그래서 절에서 나오고 산판 십장 노릇에서 시작해 몇 해 후엔 주인과 파트너가 되었다는군요. 맨몸으로 시작해 산판의 공동소유자가 되기까지 무슨 재주를 피우신 건지 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만, 도덕군자로 사시지만은 않았으리란 게 분명한 일이겠죠?

결국 자기 산판들을 함흥 동쪽의 산악지대에 가지게 되었답니다. 외삼촌 말씀으로, 기차역 하나가 할아버지 산판의 전용 역이나 마찬가지였다고. 그 지역에서 유력한 재력가로 자리 잡으신 거죠.

그러다가 또 한 차례 도약의 계기를 맞으신 것이 만보산 사건. 함흥 부근 천내리란 곳에 시멘트공장을 비롯해 중화학 공업단지가 만들어지면서 당시엔 드물던 공업도시가 생겨났는데, 그곳의 큰 점포들이 대개 화교 소유였답니다. 만보산 사건으로 불안해진 화교들이 그곳을 떠나고 싶은데 점포를 넘겨받을 인물로 할아버지를 지목해서, 일약 천내리 최대의 거상으로 등장하게 된 겁니다. 재력도 있고 신의도 있는 인물로 보였기 때문에 지목받게 되신 거겠지만, 거래 상대의 약점을 빌미로 큰 횡재를 하신 거라고 누가 손가락질 하더라도 별로 변명할 말씀은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자~알 나가셨겠죠. 신수 훤한 30대 청년이 지역 재계의 거물로 떠올랐으니. 거기다 노는 것도 보통 넘게 좋아하는 분이고. 고향에서 처자 불러올 생각이 드셨겠습니까? 그래서 할머니가 열 살 된 어머니를 데리고 통보도 없이 처들어오셨답니다. 뜻밖에 나타난 할머니를 보고 할아버지가 황당해(그리고 당황해?) 하시던 장면을 어렸을 때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아무튼 할머니는 도착하자마자 모든 열쇠를 장악하고 경제권을 틀어쥐셨답니다.

할아버지가 창업 체질이라면 할머니는 수성 체질이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점포는 할머니 손아귀에 들어갔지만 산판까지는 손이 미치지 않으니 할아버지가 숨쉴 공간은 남아 있었던 듯. 목재나 숯을 화차로 보냈다가 대금을 떼인 일이 더러 있었다는데, 그게 할아버지 비자금 통로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저는 아직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은 할아버지가 원산에 출장 가시는데 할머니가 어머니를 딸려 보냈답니다. 도시 구경도 좀 시켜주란 핑계였지만, 감시원 역할을 맡긴 거겠죠.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고 서슴없이 기생집에 놀러 가셨다는데, 어머니는 그 일이 참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황홀할 정도로 고운 여자가 어머니한테 기막히도록 다정하게 대해 주시더라고요. 아마 할아버지를 단순한 손님 이상으로 여기던 여인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할아버지의 여성관계에 대한 할머니의 경계심을 보여준 나중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제가 초딩 때니까 두 분이 환갑 지나셨을 때일텐데, 우리 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하시고 상에는 모처럼 불고기가 푸짐하게 올라와 있었죠. 할아버지가 맛있게 잡수시는 것을 할머니가 애들한테 좀 양보하시라고 눈치를 드리는데도 계속 잘 잡수시니까 핀잔을 주셨죠. "저냥반은 남의 살이라면 사죽을 못 쓰셔~" 그 말씀에 할아버지가 긴장해서 "그 무슨! 애들 앞에서 못하는 말씀이 없구려! 흠흠~" 하시던 까닭을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죠. 그러다 철든 뒤에 왠지 그 말이 생각났을 때는 "아항~ 그런 뜻이었구나!" 하며 제풀에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적다가 보니까 제 기억 속의 모순 하나가 떠오르네요. 할머니가 함경도로 처들어간 것이 만보산 사건 이후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외삼촌은 1930년생이거든요? 만보산 이전에 함경도 가셨던 건지 나중에 외삼촌께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랬던 것 같네요. 어머니가 원산 기생집 구경하신 게 열 살도 안 됐을 때였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해방 후에 두 분은 서울로 오셨고,(거기 계셨으면 악질 반동분자로 담박 걸리셨겠죠?) 딸 내외에게 얹혀 지내시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탈탈 털고 오셨나봅니다. 그 때 연세가 50 전후셨을 텐데, 그때부터는 경제활동을 않고 아버지가 정릉리에 장만한 과수원을 돌보며 지내셨죠. 1965년경 덕송리 배밭으로 옮기실 때까지 정릉리 계시며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노릇을 해주셨

습니다.

 

 

 

Posted by 문천
 

 

 

  글쓴이 : 문천   날짜 : 09-09-24 15:37   조회 : 104    

 

 

지난 주 오랫만에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중구 보수동에 있는 처조카 집에서 이틀밤 잤죠. 가던 날 송도에 저녁 먹으러 가며 생각하니, 부산에서도 부산역보다 남쪽으로 가본 것이 정말 모처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돐 전에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다섯 살 때까지 동대신동에서 살던 시절 생각이 났습니다. 서대신동은 보수동 바로 옆 동네죠.

 

어머니 얘기로 이 방 도배질을 시작했는데, 이제 요양원에 모셔 놓으니까 자주 가 뵙지 않아서 사업에 지장이 있군요. 부산 다녀오면서 유년시절이 생각난 김에 이제 어머니 얘기보다 제 얘기로 때워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보다 보통 십여 세 이상 젊은 분들과 근래 어울려 놀다 보니, 저 자신에 대해서보다도 제가 살던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는지 보여드리고 싶은 생각입니다. 같은 시기라도 다른 세대로 살면 꽤 다르게 보였을 세상을 함께 되돌아볼 수 있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가 하나의 자서전에 이르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될 만한 조건도 꽤 갖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편향성을 가질 만한 특별한 동기가 없죠. 역사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내가 살아온 시대를 다음 세대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는, 원론적인 동기만이 있을 뿐이죠. 자기미화 등 편향성도 웬만한 사람들보다 덜한 편일 겁니다. 제 삶이 특별히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성공에 대한 집착이 저만큼 약한 사람이 우리 또래에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첫 꼭지는 무난하겠다고 생각해서 엄두를 냈습니다. 기억나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생각나는 대로 써 나가다가 언제 중단할지 모릅니다. 너무 챙피해서. 하지만 다섯 살때까지는 챙피하고 뭐고 할 만큼 생각나는 게 없어요.

 

여러분은 다섯 살때 일 생각나는 게 얼마만큼 있나요? 저보단 많을 겁니다. 어렸을 때는 부산 시절 일도 이것 저것 기억을 꽤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몇 개 장면이 떠올라도 그 앞뒤가 꽉꽉 막힙니다. 이렇게 적을 계기를 가졌더라면 기억을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여러분도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면 인생 뒷쪽에 가서 보람 느낄 일이 많을 겁니다.

 

50년 12월에 부산으로 가던 길은 생후 10개월이던 제 기억에 물론 없는 거지만, 아버지 일기에 나와 있죠. 10개월 후 아버지 돌아가실 때의 일도 제겐 전혀 기억이 없고요. 지금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부산의 일은 세 개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는 길에서 놀고 있다가 (우리 집 앞의 골목을 나가면 밋밋한 비탈길이 있고, 비탈길을 백여 미터 내려가면 큰 길과 비스듬히 합치던 것 같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를 보고 좋아하던 장면. 학교에서 (아버지 돌아가신 후 동아대학과 무학여고에 출강하기 시작하셨죠.) 퇴근하는 길이셨다는 사실은 더 철든 후에 짐작할 수 있게 되었을 겁니다.

 

또 하나는 자라가 없어져 애통해 하던 장면. 어느 때인가 얼마 동안인가 집에서 자라를 키운 적이 있어요. 눈만 뜨면 그 놈 들여다보고 지내던 것 같은데, 어느 날 없어졌고, 제가 한눈파는 사이에 없어진 것 같아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후에 생각해 보니 당시에 애완동물 키울 형편도 아니었고, 약으로 쓰려고 사다 놓은 김에 며칠이라도 애들이 데리고 놀게 했던 게 아니었을지. 그런데 애들이 너무 마음을 붙이니까 그거 잡아먹었다는 얘기를 못해주고 실종 처리 했던 게 아닌가 싶더군요.

 

그리고 드디어 동대신동을 떠나던 장면. 아마 생전 처음 택시를(당시에는 '하이야'라 했죠. 'hire'에서 나온 말이었던 듯.) 탄 것 같은데, 사람도 가뜩 타고 짐도 가뜩 실어서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조마조마했죠. 기차를 타고 왔을 텐데 그 생각은 안 나고 하이야 생각만 납니다. 도와준 분들이 어느어느 분이었는지도 흐릿한데, 아마 고종사촌 기돈이 형(충남대 사학과 교수를 퇴직하고 몇 해 전 돌아가신 정기돈 교수)이 함께 왔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이사란 게 참 볼 만한 행사였죠. 잔뜩 싸맨 짐 위에 바가지까지 매달아놓는 풍속은 전통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 1960년대까지 계속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큰 짐은 리야카(rear car? 손수레)로 역에 보내 화물로 부쳤겠지만, 운임 절약하느라고 사람이 이고 지고 갈 만한 짐은 최대한 가지고 다녔습니다.

 

아, 한 장면 또 생각난다! 유치원 갔던 일! 당시에 유치원 가는 건 대단한 호강이었지만 홀어머니가 일 나가시니 어떻게든 보내봤나 봅니다. 그런데 영 적응이 안 되던 생각이 나요. 이틀인가 다녀보고 그만뒀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초등학교 들어간 뒤에도 학교에 따라왔던 외할머니가 "얘는 어떻게 된 애가 일어서라면 앉고, 앉으라면 일어서고, 손 들라면 내리고, 내리라면 들고, 꼭 한 박자씩 틀리더라." 하고 돌아가실 때까지(제가 대학생 때) 놀려먹으셨는데, 제가 조직활동에는 애초에 적성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또 한 장면! 어느 날 집에서 놀고 있는데, 얼굴 시커먼 노인이 서슴없이 들어서는 거예요. 등에는 큼직한 자루 하나 걸치고. 왜 그리 무서웠는지! 아마 부들부들 한참 떨고 있다가 얼마 후엔지 형 하나가 들어오면서 "외할아버지!" 하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던 것 같습니다. 외조부모님은 함께 피난 오셨다가 먼저 환도(피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걸 그땐 그렇게 말했죠.)하셨는데, 오랫만에 다니러 오신 것을, 너무 어려 기억이 없던 저는 몰라뵌 거죠. 애 잡아가는 자루인 줄 알고 놀랐던 자루에는 땅콩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기호식품을 원도 한도 없이 먹어본 것은 유년기를 통해 유일한 기억이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벌써 나왔군요. 서울 와서는 정릉리에서 이분들 슬하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 생활 기억에 앞서 두 분 이야기를 다음 회에선 먼저 하고 싶네요.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