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壯士의 뜻

기사입력 오후 2:38:21

壯士의 뜻

"바람이 소소하니 역수 물 찬데(風蕭蕭兮易水寒), 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리(壯士一去兮不復還)." 중국 문학사를 통해 가장 비장한 구절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이 대목은 형가(荊軻)가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의 부탁으로 진(秦) 시황(始皇)을 암살하러 떠날 때 지음(知音)의 벗 고점리(高漸離)와 작별하며 부른 노래다.

형가가 진나라 궁정에서 시황을 배알하는 척하다가 척살(刺殺)에 간발의 차로 실패한 뒤 시황은 형가의 주변 인물을 모두 죽였다. 다만 고점리만은 그 절세의 연주 솜씨를 아껴 두 눈을 뽑고 살려뒀다. 고점리는 기회를 엿보다가 시황의 앞에서 연주할 때 악기 속에 넣어두었던 납덩어리를 꺼내 시황을 때려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죽었다.

형가는 원래 연나라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태자 단의 부탁에 목숨을 걸게 된 것은 전광(田光)이라는 친구 때문이었다. 연나라 원로 명사인 전광은 저자바닥에서 놀고 뒹구는 유랑인 형가의 고매한 인격을 알아보고 망년지교(忘年之交)로써 후히 대접했다.

노골화하는 진나라의 정복 사업 앞에서 연나라는 화친이냐, 적대냐,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태자 단은 화친을 통해 나라를 길게 보전할 수 없으며, 시황의 암살만이 천하를 안정시키고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전광에게 일을 맡기려 했으나 전광은 노쇠함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형가를 추천했다.

태자는 전광을 배웅하며 일이 누설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전광은 태연히 웃으며 응락했지만 형가를 만나 태자의 뜻을 받들어주도록 부탁한 다음 이렇게 일렀다. "일을 행함에 상대로 하여금 의심케 한 것은 협객의 도리가 아니다. 태자를 만나거든 내가 이미 죽었으니 누설을 염려하지 말라고 전해 주오." 그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광의 죽음은 선비의 결벽증이 아니었다. 그는 태자의 뜻이 천하와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 여겼고, 손수 받들지 못하는 대신 자기 목숨을 던져 형가와 태자를 맺어준 것이다. 남은 두 사람이 숱한 갈등을 넘기고 결행에 이른 것은 전광의 살신성인(殺身成仁) 덕분이었다.

구속될 처지의 국가안전기획부 간부가 새 부장의 정치적 라이벌에게 기밀문건을 넘겨준 일을 놓고 여러 모로 한탄이 나온다. 권력기관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보다 정권과 사익(私益)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그것이 의구심만이 아니었던가.

▲ '비전 2030'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까지도 이 사람을 아끼고 그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삶을 사랑한 사람인지 이해하기 때문이다. 자기 삶만이 아니라 이웃의 삶까지 아낄 만큼 지극한 사랑이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데도 그의 삶 사랑, 사람 사랑을 증언한 조영래의 덕분이 크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정의보다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닐지. ⓒ프레시안

  이 이야기 속에는 세 사람의 죽음이 그려져 있다. 형가의 죽음은 후세에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죽음의 하나다. 고점리의 죽음도 적지 않은 여운을 남겼다. 이에 비해 전광의 죽음은 사마천의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 문학과 예술의 큰 각광을 받지 않아 왔다.

그런데 <사기> '자객 열전'에 실린 이 이야기를 거듭거듭 읽을수록 나는 전광의 죽음에서 더욱더 깊은 뜻을 새기게 된다. 형가와 고점리의 죽음이 추상적 가치를 향한 죽음으로서 낭만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전광의 죽음은 한 도덕적 인간의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게 된 것이다.

사마천의 붓끝에 나타난 태자 단의 모습은 대단히 용렬한 인물이다. 그가 진왕(시황으로 즉위하기 이전)을 암살하려 한 것은 자기 자존심과 욕심 때문이었지, 천하를 위하는 뜻이 아니었다. (위 글에서는 짧게 쓰기 위해 이 점을 깊이 따지지 않았다.) 전광에게 극진한 예를 올린 것도 그를 이용하기 위해서였을 뿐, 선비로서 그의 인격을 존중할 줄 몰랐기 때문에 비밀을 누설하지 말아 달라는, 수준 이하의 부탁을 한 것이었다. 이것은 전광에게 목숨보다 더 귀중한 명예를 짓밟는 모욕이었다.

그러나 전광은 이 모욕을 당하기 전에 이미 응락을 해놓은 몸이었다. 그가 응락을 한 것은 진왕을 암살하는 일이 형가의 뜻에도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형가는 천하를 주유하는 몸, 연나라에 충성을 바칠 책임이 없는 신분이었다. 형가가 태자 단의 지원을 받아 진왕 암살에 나서게 하는 자신의 뜻이 차질 없이 이뤄지도록 자기 목숨을 쐐기로 삼음으로써 전광은 명예를 되찾고자 했다.

전광이 죽은 뒤 형가가 태자 단을 찾아간 장면을 사마천은 이렇게 그렸다.

"형가가 마침내 태자를 찾아가 전광의 죽음을 알리고 전광이 남긴 말을 전하자 태자는 두 번 절하고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며 한참 있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전 선생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주의를 드린 것은 큰 일을 이루기 위해 마음을 쓴 것이었는데, 이제 그분이 죽음으로써 누설이 없을 것을 분명히 한 것이 어찌 내 뜻이었겠습니까?"

사마천은 담담히 적을 뿐이다. 그러나 태자 단에 대한 그의 경멸은 행간에 가득하다. 거사에 이르기까지 태자의 행동은 철저히 소인배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형가를 상경으로 올려 상사(上舍)에 머물게 하고 태자가 날마다 문안하며 태뢰구(太牢具)와 진기한 음식을 접대하고 수시수레, 말, 아름다운 여인 등을 바쳐 형가가 바라는 것을 채워줌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법도에 어긋날 정도의 극진한 환대를 하면서도 태자가 형가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 사실을 사마천은 여러 모로 짚어 보인다. 형가는 진왕에게 접근하기 위해 번오기(樊於期)의 목이 필요하다고 했으나(번오기는 진나라 장군으로 연나라에 망명해 태자 단에게 의탁하고 있던 인물이다.) 태자는 난색을 표한다. 형가가 직접 번오기를 찾아가 진왕을 죽이기 위해 당신 목이 필요하다고 하자 번오기는 반색을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에도 형가가 거사를 함께 할 벗을 기다리며 출발을 늦추자 태자는 난폭하고 용렬한 인물을 조수로 추천하며 출발을 재촉했다.

태자 단은 형가가 일을 함께 꾀할 인물이 못되는 소인배였다. 그럼에도 형가가 그를 뿌리치지 못한 것은 전광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전광은 왜 그 두 사람을 묶어놓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졌을까? 태자 단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목숨을 끊을 때 전광에게 태자 단에 대한 감정이 있었다면 경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국시대 말기의 선비는 승복하지 않는 자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 것이 풍조였다.

형가는 천하를 위해 진왕을 제거할 뜻을 가진 인물이었고, 전광은 그 뜻을 이해하고 공감한 것이 아니었을까? 태자 단의 부탁을 받았을 때 전광이 형가를 추천한 것도 태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가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뜻을 이뤄 가는 과정에서 태자의 더럽고 치사스런 꼴을 보더라도 형가가 물러서지 않도록 자기 목숨으로 쐐기를 박아놓은 것이 아니었을까? 사마천은 그렇게 밝혀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풍긴다.

형가가 간발의 차로 암살에 실패하고 역수 가에서 그를 전송한 고점리도 진 시황의 통일 후에 홀몸으로 암살을 시도하다가 죽은 사실을 적은 다음 사마천은 이렇게 논했다. "그 뜻을 세움이 분명하고 그 뜻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짐을 어찌 망령된 일이라 하겠는가!"

훗날 태자 단이 진나라에 잡혀 죽은 일은 '연 세가(燕 世家)'에 극히 간략하게 적혀있다. 제후의 태자이기 때문에 제후가의 기록에 실은 것이지, 그를 넘어 그 개인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진 것은 형가와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 용렬한 행동 때문일 뿐이다.

노 대통령 서거를 놓고 "죽음의 평등" 이야기가 이쪽저쪽에서 나온다. 오른쪽에서 대우 남 사장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왼쪽에서는 용산 참사 희생자와 불평등 구조에 목숨 바쳐 항의한 분들 이야기가 나온다. 왜 많은 사람들이 전직 대통령의 죽음만 미화하고 그 의미를 과장하느냐는 불만이다.

노 대통령의 죽음에만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분들의 죽음에도 그 못지않은 의미가 있다고 드러내 보여주는 데 애를 쓴다면 귀담아 듣겠다. 그러나 "남 사장을 죽음에 몰아넣은 자에게 무슨 국민장이 가당하냐?"든가, "자기 자신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는 죽음을 순수한 피해자의 죽음보다 더 애통해 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마치 죽은 분들의 평등권을 당연한 것처럼 내세우는 공박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삶에도 가치가 큰 삶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삶이 있는 것처럼 죽음에도 가치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삶에 대해서든 죽음에 대해서든 가치의 인식은 개인의 주관에 달린 것이다. 큰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인식하는 대상은 사회적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된다.

유다의 죽음에서 예수의 죽음 못지않은 큰 가치와 깊은 의미를 찾는 예술 작품도 나올 수 있다. 그런 작품이 공감을 얻는 것은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 죽음의 평등을 기계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죽는 본인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것도, 죽음이 곧 존재의 종말이라는 가정 위에서만 성립되는 말이다.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모든 죽음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죽음을 존재의 종말로 보지 않는 사람은 자기 죽음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만 보고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오른쪽 분들에게야 하나마나한 말씀이겠지만, 인간적 가치를 중시한다는 왼쪽 분들에게는 정말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죽음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재단하지 말아 달라고. 다른 것은 몰라도 죽음에 대해서만은 사람들의 주관을 존중해 달라고. 죽음의 가치마저 이념으로 획일화한다는 것은 너무 지독한 전체주의 방식이다.

목숨으로 항의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애쓴 분이 있었다. 그런 세상을 거의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해서 목숨으로 항의하려는 사람들을 말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런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분은 자기 목숨을 끊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순수한 피해자의 죽음보다 그런 죽음이 더 애통하다. 내게는.

하나의 죽음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낸 것은 역사상 드문 일이다. 그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내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아직도 그 밑바닥까지 알지 못한다.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그 개인을 위한 눈물이라기보다 이 사회를 위한 눈물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할 뿐이다. 내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어찌 다른 사람들의 눈물에 담긴 의미를 재단하겠는가.

슬퍼하는 자는 슬퍼하게 하라.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