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 고등학생인 큰형이 바둑을 집에 도입한 뒤 얼마동안 3형제가 틈만 나면 매달려 살면서 모두 3급 안쪽까지 올라왔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는 1급으로 두기 시작해서 '물바둑' 소리는 듣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공식' 대국이라 할 만한 대회바둑을 처음 둔 것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박사과정 다니며 시간강사 뛰고 있을 때였다.

당시 고대 통계학과 교수로 있던 작은형이 과학기술단체총연맹 바둑대회에 나갈 통계학회 팀을 조직하면서 자기도 선수로 나가야 할 형편인데, 자신이 없으니까 자기보다 좀 쎈 나를 스카우트했다. 이기는 판마다 수당을 주겠다며 통계학회 회원으로 등록까지 해줬다. 첫 공식 바둑대회에 용병으로 데뷔하게 된 것이었다.

매회 세 명 선수가 뛰어 3판양승인데, 통계학회에 질 줄 모르는 선수가 있었다. 고대 통계학과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김장한 선수였다. 그리고 통계청 소속으로 나랑 비슷한 수준 선수가 하나 있었다.

준결승까지 세 판인가 네 판인가 김장한 선수와 내가 모두 이겨서 결승에 올라갔는데, 결승까지 용병이 뛰기는 좀 뭣해서 내가 빠지고 형이 뛰었다. 형은 졌지만 다른 두 선수가 이겨 통계학회 우승. 형은 수당을 건네주며 "그렇게 판마다 다 이기면 어떡하냐? 돈에 눈깔이 뒤집혔구나." 투덜댔지만 우승 때문에 기분이 썩 좋았다. 아직 직장이 없던 내게 용돈 좀 보태주고 싶은 마음을 그런 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듬해 계명대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는데, 신입교수 오리엔테이션에서 뜻밖의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김장한 교수였다. 그 후 수담을 나눠 보니 내가 선으로 들어가도 벅찬 확실한 고수였다. 그리고 함께 부임한 또 한 분 물리학과 김규택 교수도 나랑 비슷한 수준. 그리고 한 학기 후 김장한 교수와 같은 과에 부임한 김용곤 교수가 나보다 약간 셌다. 한 해 동안 짱짱한 1급 네 명이 같은 학교에 모인 것이었다.

그 이듬해 대구MBC에서였던가, 대구-경북 직장인 바둑대회를 창설했다. 십여 개 팀이 참가해 토너먼트로 4연승하면 우승이었던 것 같다. 선수들이 막 집합한 계명대를 강팀으로 예상한 사람이 계명대 선수들밖엔 없었는데, 거의 3판3승으로 결승에 올라갔다. 붙박이 주장인 김장한 교수 외에는 번갈아 쉬며 뛰었는데, 누가 뛰나 별 거침이 없었다.

강력한 우승후보 대구시청과 다크호스 계명대가 결승에서 붙었는데, 우리 팀에선 김규택 선수가 쉬고 내가 2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내 상대가 장고파여서 다른 두 판이 1 대 1로 먼저 끝났다. 마무리에 접어든 내 판이 대회 결승국이 된 것이었다.

상대방은 매우 신중한 기풍의 선수였다. 힘은 그리 쎄지 않은 느낌을 초반부터 받았다. 그래서 나도 신중한 자세로 대응하면서 약간의 우위를 노리는 전략으로 나갔는데, 조그만 실수 하나로 우위를 놓쳤다. 다른 선수들 판이 끝났을 때 아직 끝내기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차 실수 없이 마무리를 진행해 한 집짜리 끝내기만 남았을 때 두어 집 모자란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모두들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으니 상대방이 형세판단을 잘못해 불필요한 모험을 걸 희망도 없었다. 작은 차이에 던지기도 뭣해서 묵묵히 패배의 수순을 밟아가고 있는데 상대방에서 뜻밖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한 집 선수 끝내기를 했는데, 상대방이 다른 곳의 자기 선수 끝내기를 먼저 들어왔다. 내가 받은 다음 선수 당한 곳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안 받은 곳을 내가 응징하면 네 집을 손해본 다음 역시 손을 뺄 수 없는 곳이었다. 네 집을 공짜로 갖다바치는 실수였다. 역전이 분명했다.

이 횡재를 앞에 놓고 잠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장면에서 내가 던져야 폼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대회 상품이 너무 컸다. 우승팀 주전선수 세 명에게 아마5단 단위가 상품이었다. 준우승팀은 주장만 5단 단위를 준다고 했다. 김장한 선수야 준우승이라도 5단이 보장되고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김용곤 선수가 나를 용서할까? 이런 생각이 오가는 중에 초읽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응징에 들어갔다.

씁쓸한 승리였다. 그 후 혼자 앉았다가 그 장면이 생각나면 그럴 때 어떤 식으로 승리를 사양하는 것이 멋진 길이었을까 달콤한 상상에 빠지곤 했다. 실수를 확인하고 바로 상대에게 고개숙여 패배를 인정해야 했을까? 묵묵히 앉아 있다가 초읽기를 넘겨버리는 것이 우리 편에 대한 예의였을까? "실수도 실력"이란 말도 있지만, 그것은 프로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바꾸기 힘들다.

아무튼 1회 대회 우승 후 이 대회는 계명대 팀의 즐거운 놀이터가 되었다. 해마다 나가던 중에 준결승에서 한 번, 결승에서 한 번 외에는 져본 기억이 없다. 얼마 후 경북대 팀도 전자공학과의 박종식 교수와 경제학과의 이정우 교수를 주축으로 강팀을 이뤄 계명대 팀에 강력한 도전자의 하나로 등장하면서 대학팀 사이의 경쟁도 각별한 재미가 있었다.

10년 가까이 같이 놀다가 내가 계명대를 떠날 때 팀 동료들의 한결같은 첫 반응은 이런 것이었다. "이제 후보 선수를 어디서 구해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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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지적되어 왔지만, 대다수 연구자가 동의하는 것은 앞 회에서 이야기한 인클로저 현상이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라는 점이다. 중세체제에서 벗어난다는, 산업화의 기본 의미에도 적합하다는 점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근 5백년에 걸쳐 진행된 인클로저 현상은 영국 사회에 많은 갈등과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대한 보상이 19세기 대영제국의 패권이었다고 흔히 얘기한다. 나는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긴 시간에 걸쳐 후발국들보다 완만한 전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여러 종류 선택의 기회를 누림으로써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영국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인클로저 현상의 진행에는 영국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별로 작용하지 않았다. 영국 내부의 조건에 따라 진로가 결정되었다. 길이 분명히 보이지 않을 때는 속도를 늦출 수도 있었고, 두 갈래 이상의 길이 보일 때는 정치사회적 조건에 따라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

후발국들은 다른 사정이었다. 선발 산업국과의 경쟁 상황에 몰려 산업화를 모색하게 된 후발국들은 경쟁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경쟁을 빨리 따라잡기 위해 내부 조건을 억눌러 가며 억지로 산업화 정책을 추진해야만 하는 상황을 많이 겪었다. 영국에 바로 뒤이어 산업화를 수행한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혁명(1789) 이전의 프랑스 정치사회 체제를 '앙샹 레짐'이라 부른다. 이 앙샹 레짐은 매우 안정성이 높은 체제로서 한 세기 이상 유지되어 온 것이었다. 정치체제와 사회체제가 강력하게 결합된 것이어서 정치나 사회 어느 한 방면에서 변화의 필요가 제기되어도 두 방면의 변화가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안정성이 높았던 것이었다.

이 체제는 태양왕 루이 14세(1643~1715) 초년에 구축된 것이었다. 17세기 초반은 영국과 프랑스 모두 국력 성장을 중심으로 변화가 많은 시기였고 왕권과 귀족세력 사이의 갈등이 증폭된 시기였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잉글랜드 내전(1641-1651)을 통해 왕권이 몰락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프롱드'(Fronde)라 불리는 1648~53년의 항쟁 사태를 진압함으로써 왕권이 안정되었다.

루이 14세는 앞서 리슐리외가 궤도에 올려놓은 중상주의 정책을 굳건히 밀고 나감으로써 앙샹 레짐의 경제적-재정적 기반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 재력으로 당시 유럽에서 독보적인 40만 상비군을 조직했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결합은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가져왔고, 귀족세력은 왕권에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1695년의 인두세와 1710년의 십일조는 귀족층의 전통적 권익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었지만 아무 저항이 없었다.

체제가 안정된 만큼 프랑스는 변화에 소극적이었다. 인클로저처럼 뚜렷한 농촌 분화 현상이 프랑스에는 없었다. 1710년의 도시 인구 비율이 10%였던 것이 1789년 15%에 이른 정도였다. 1770년 영국의 석탄 생산량이 6백만 톤이었는데 프랑스는 70만 톤이었다.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책이 제조업 발전을 전연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처럼 큰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1740년대부터 프랑스에는 변화의 필요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의 주체가 없었다. 집중된 권력을 쥐고 있던 국왕은 앙샹 레짐에 집착했다. 왕권에 대항할 실력을 가진 두 집단, 귀족층과 상업 브루주아지는 영국에서처럼 연대감을 쌓지 못하고 서로 견제했다. 효율성을 잃은 채 견고성만을 지키고 있는 앙샹 레짐의 배경 위에서 개혁의 욕구는 계몽사상이라는 형태로 펼쳐졌다.

나는 프랑스혁명을 개관할 능력이 없다. 영국과의 경쟁의 압박이라는 한 가지 측면을 밝히고자 할 뿐이다. 앙샹 레짐 기간 내내 프랑스는 영국과 긴장상태에 있었다. 1740년대 이후 재정 문제의 가장 큰 원인도 영국과의 전쟁에 있었고, 미국 독립전쟁 개입으로 결정적 파탄에 이르렀다.

18세기의 프랑스 경제는 괜찮았다. 1730년대 이후 공업생산량이 연 평균 2% 가까이 성장해서, 1700년에서 1790년 사이 영국의 성장율 190%보다 더 큰 260%에 달했다. 한 세대 뒤진 산업화를 추격해 가는 기세였다. 서인도제도 등 식민지를 발판으로 한 무역활동도 크게 자라나 1780년대에는 수출이 국민총소득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었다. 내부 조건만으로는 무너지기 힘든 경제지표였다.

그러나 1756~63년의 7년전쟁으로 많은 식민지를 빼앗기는 등 영국과의 경쟁에서 뚜렷해지는 열세가 앙샹 레짐의 위기를 재촉했다. 18세기 두 나라의 경쟁은 냉전시대 미-소의 대결과 어떤 면에서 비슷한 양상이었다. 견고한 체제의 프랑스가 내부 유동성이 큰 영국과의 장기간 대결에서 힘을 탕진하고 무너진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1776년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보인 믿음은 두 나라의 경쟁 양상을 참고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정신없이 진행되던 18세기 말까지도 독일 지역은 중세적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거의 완전한 중세 상태였다.

10세기에 세워진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 나폴레옹의 침공 앞에 무너질 때까지 독일 지역의 종주국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신성로마제국이지만, 오랫동안 그 실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였다. 합스부르크 가는 15세기 중엽 이후 계속 신성로마황제로 선출되었고, 독일 지역만이 아니라 17세기까지 스페인, 나폴리, 네델란드 등지까지 통치권을 가졌던 유럽 최고의 권력가문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위세가 당당하던 시절 독일은 수십 개의(때로는 수백 개의) 조그만 정치조직으로 쪼개져 있었다. 그 군주들이 신성로마황제의 제후였다. 황제는 현상 유지를 위해 제후들의 안보를 책임졌다. 그래서 군주들은 자기 나라 안에서 견제 없는 권력을 행사했고, 다른 나라와 경쟁할 일도 없었다. 중세적 질서를 벗어날 필요가 없었던 이유다.

18세기 들어 프랑스의 국력이 자라나 오스트리아의 힘을 견제하게 되면서 독일 지역에서도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도전이 나타났다. 가장 강한 도전자가 프러시아였다. 18세기를 지나는 동안 프러시아는 몇 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독일 지역에서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큰 영토국가로 자라났다. 그러나 18세기 중 프러시아의 성장은 아직 중세적 질서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은 영지를 가져 더 큰 영주가 되고 싶은 욕심일 뿐이었다. 정치를 질적으로 바꿀 생각도 없고 독일 민족을 일으키려는 뜻도 없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뒤이어 나폴레옹의 패권이 동방으로 뻗쳐오면서 독일 지역이 갑자기 근대에 노출되었다. 반세기 후 동아시아 지역이 겪게 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오랜 종주국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군에게 저항과 굴욕을 몇 차례 거듭하다가 결국 신성로마제국을 포기하고 축소된 오스트리아제국으로 주저앉은 것은 중국의 경험과 흡사하다. 독일 지역의 제일 뒷쪽에 있던 새 실력자 프러시아가 약간의 시련 끝에 새로운 상황에 앞장서서 적응한 것은 일본의 경험과 비슷하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압력이 꾸준히 계속된 것과 달리 나폴레옹의 압력은 20년만에 사라지고 독일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대표하는 반세기 동안의 복고시대에 들어섰다. 그러나 20년에 걸친 충격은 독일 지역에 깊고 큰 파장을 남겨 독일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갔다.

서유럽의 여러 기술, 사상과 제도가 19세기 초의 독일에 몰려 들어왔다. 서양문명의 여러 요소들이 20세기 초의 우리나라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선망하는 측면이 엇갈리기는 했지만, 변화의 방향이 차츰 조정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 진취성을 보인 프러시아가 결국 오스트리아를 제치고 근대국민국가 독일의 새 역사를 열어가는 주역이 되었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으로 대표되는 구체제가 무너진 후 1866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결전을 거쳐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 중 독일제국이 선포되기까지 65년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에 벌어진 일보다 1866년 이후의 일이 사람들의 주목을 더 받는 것은 '독일'이라는 행위의 주체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1866년 이전의 일 중에서도 프러시아의 행적이 관심의 초점이 된다.

그러나 새 '독일제국'이 프러시아의 단순한 확장은 아니었다. 프러시아는 독일제국의 일부분이 되었을 뿐이고, 독일제국의 성격은 1871년까지의 형성과정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나라들이 망했다. 어떻게 망했는지, 그리고 망한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살피는 데서 문명 전환의 의미에 관해 배울 것이 많다. 이 글에서 그 과정을 세밀히 살피지 못하지만 1848-49년의 상황 한 장면을 예시한다.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은 독일 지역으로 큰 파장을 일으켜 보냈다. 그 파장이 크게 증폭된 것은 반동체제 아래 잠복해 있던 개혁의 열망이 갑자기 촉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메테르니히가 퇴진하고 많은 나라에서 개혁파가 정권을 맡았으며, 통일국가의 헌법 기초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잠복해 있을 때는 한 목소리 같던 개혁파가 막상 칼자루를 쥐자 분화 현상이 나타났다. 모든 국면에서 온건파와 과격파의 대립이 일어나는 가운데 지지 기반도 약화되어 1년이 지나자 더 이상 상황을 끌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온건 개혁파가 모색한 돌파구가 프러시아의 실력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의 연방의회가 세습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통일연방국 헌법을 만들고 프러시아 왕이 황제에 오를 것을 청했다. 이것을 프러시아 왕이 거절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49년에 황제 자리를 거절한 것은 전제적 황제권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2년후 빌헬름 1세가 장악한 황제권도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그보다 더 전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차이는 때가 무르익었다는 것이었다. 1849년에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의 선택이 분명하지 않았다. 1871년에는 숙적 프랑스에 대한 복수의 기쁨에 들떠 민주적 절차까지도 경시하는 분위기였다. 1850년대에 집중적으로 진행된 산업화의 성과를 가지고 국제 경쟁에 당당히 뛰어드는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에는 프러시아의 독일제국 형성을 선망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제국에 합류한 작은 나라들은 언어와 문화를 프러시아와 공유하는 나라들이었고, 1871년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두루 검토한 끝에 프러시아 중심의 독일제국을 유력한 방안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다. 조선 망국이 가진 세 가지 의미 중 그들에게 문제된 것은 왕조의 중단 뿐이었다. 프러시아인은 그들에게 이민족이 아니었으며, 문명 전환은 국가체제와 관계 없이 모두가 함께 서서히 겪어온 것이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독일 민족이 정치적 분열 상태에 있다가 근대국민국가로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 겹쳐졌기 때문에 독일의 근대화는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강한 힘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발전을 빠르게 해줬다. 그러나 1871년 이전부터 독일제국이 시원시원하게 제거해 온 장애물 중에는 민주적 가치도 있었고 문화적 가치도 있었다. 20세기 들어 독일인이 밖으로는 무분별한 전쟁을 일으키고 안으로는 극도로 비인간적 상황을 펼치게 되는 것은 19세기 후반의 빛나는 추진력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 아닐지.


Posted by 문천
2010. 1. 9. 14:01
 


오늘은 아내와 둘이서 갔다. 아내는 한 달만에 가는 것이고, 나는 그 사이에 세 번째다. 아내가 한 달에 세 번 쉬는데, 그 중 한 번을 시어머님께 바치는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어머니가 요양원에서 편안하신 것을 확인하니까 이렇게 여유가 생겼다. 시내의 병원에 계실 때는 특별히 조심스러우실 때가 아니라도 일 끝나고 병원 들르는 것을 당연한 일과로 여겼었는데.

아내를 먼저 올려보내고 나는 아래층에서 볼일 본 다음 10분 후에 올라갔다. 아내와 함께 복도 가 테이블에 앉아 계시다가 다가오는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오늘은 좀 시큰둥하시다. 뭔가 심사가 복잡하신 것 같다.

아니나다를까, 몇 마디 나눈 뒤 얼굴을 찌푸리며 밑도 끝도 없는 말씀을 하신다. "야, 기협아, 난 참 마음이 슬프다."

"네, 어머니? 뭐가 슬프세요?"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지어야 말씀이 잘 나오실 것 같다.

"이제 살 날이 길지 않은 것 같아서..."

"네, 어머니, 그 말씀 들으니 저도 마음이 슬프네요." 일단 맞장구는 쳐 놓고 이게 무슨 가닥인지 눈치를 살핀다. 같이 지내던 분이 돌아가신 분이 계셨나? 무슨 이상한 꿈이라도 꾸셨나?

한참 말씀이 더 없으셔서 내가 반격에 나섰다. "어머니, 슬프긴 하지만... 사람 산다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예요? 그래도 어머니가 그걸 똑바로 바라보실 수 있다는 게 저는 다행스럽고 고마워요. 언젠가 떠나시리라는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신다면 어머니도 얼마나 더 힘들고 저희들도 얼마나 더 괴롭겠어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묵묵하시다가 분위기를 일신하듯 노래가락 화법으로 다시 넘어가신다.

이런 대목에서 노래가락 화법의 의미가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사고력은 원활하시고, 몸은 부자유스러운데 생각에는 거침이 없으시다. 혼자 누워 한바탕 생각에 잠기셨다가 누가 와서 말을 걸거나 식사하러 움직이려면 잠겨 있던 생각을 벗어나고 잊어버리시지만 여운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짙고 옅은 여러 층위의 생각들이 마음속에 겹쳐져 움직일 것이다. 복층적 심리상태는 일반인에게도 어느 정도 나타나는 것이지만 어머니 같은 상태에서 그 층이 특히 더 두터울 것 같다.

누군가 특정한 상대를 응대할 때, 마음속의 여러 층위 생각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노래가락의 힘에 의지하시는 것 같다. 또,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여러 사람을 응대하실 때는 어느 상대에게도 적당히 통할 수 있는 융통성을 역시 노래가락의 힘에서 얻으시는 것 같다. 치밀하게 따져서 화법을 선택하시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르치는 일을 오래 한 습관이 거의 본능처럼 그런 힘을 가진 화법을 끌어내는 것이 아닐까싶다.

생각해보면 퇴직 후 다년간 수필 쓰신 필법에도 이 노래가락 화법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특정한 개인의 특정한 경험과 생각을 서술하면서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내 입장에 집착하지 않는 관조의 자세 덕분이었다. 경험과 생각의 주체인 자아를 객체화시킴으로써 독자와 사이에 벽을 허물고 함께 나누실 수 있었던 것이다. 퇴직 때까지 자식들과 제자들을 가르쳐 온 습관과 퇴직 후의 집중적 수행이 겹쳐져 관조의 자세가 이뤄지신 것이리라. 수행하실 때 염불선을 좋아하신 흐름이 지금의 노래가락 화법에 이르신 것 같다.


노래가락 화법으로 넘어가신 뒤에는 짖궂은 장난기가 평소보다 많으셨다. 특히 나를 욕하는 재미가 쏠쏠하셨다. 몇 마디 오고가다가 내가 드린 무슨 말씀에 대꾸가 불쑥 "그렇다, 이 쌍놈아~"로 나오셨다. 지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드린 말씀에 욕 먹을 아무 빌미도 없었는데 제풀에 욕이 나오셨다. 두어 차례 "쌍놈" 소리 들은 뒤에 정색하고 "어머니, 저를 욕하시는 게 재미있죠?" 하면 "그래, 이 쌍놈아~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이 너 욕하는 거다, 이 쌍놈아~ 그 재미에 나는 산다, 이 쌍놈아~" 흥에 겨워 저절로 증폭되는 것이었다.

2년간 계시던 병원을 떠나 반년 전 이곳으로 옮기신 후 늘 마음이 편안해 보이시거니와, 나를 "쌍놈"으로 몰아붙이실 때는 정말 더할 수 없이 마음이 편하고 흥겨우시다. 나 꾸짖는 재미는 병원에서부터 붙이신 것이다. 병원에서 내가 한바탕 호통을 듣고 나온 뒤에 간병인 한 분이 "아드님이 그렇게 잘하시는데 왜 꾸짖으세요?" 여쭈니까 흐뭇하게 웃으면서 "그눔이 나한텐 꿈쩍 못한단 말이야." 하시더라는 얘기를 전해듣기도 했다.

그때는 꽤 다양하던 욕설 내용이 지금은 노래가락 "쌍놈"으로 정형화되었다. 병원에서는 간병인, 간호사들에게도 "쌍년" 소리를 많이 하셨고, 더러 진짜 분노의 마음을 담은 것도 있었다. 이곳에 와서 얼마간 욕설이 계속되다가 두 달 가량 지나면서 욕을 끊으셨다. 그러고서 조금씩 다시 시작해 요즘은 꽤 도로 즐기시게 되었는데, 분노의 마음이 전혀 안 담긴, 순전한 애교성 욕설이다. "쌍놈" 타령 들으러 모여든 간병인 몇 분이 오늘 아침 목욕시켜 드리면서 "쌍년" 소리 많이 들었다고 서로 자랑하듯 한다.

아침의 욕설 사태 고발이 이어지고 있는 동안 어머니는 "무슨 얘기 하는 거야? 나랑은 상관 없어." 하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떼고 아무 말 없으시다. 자아를 객체화하는 관조의 자세가 정말 경지에 오르셨다. 그러다가 치료사 김 선생이 끼어들어 요즘 자세 바꾸실 때나 치료해 드릴 때는 괜찮으신데 목욕 때는 조금 힘들어 하시는 것 같다고 얘기하자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러나 입은 아직 떼지 않으신다. 욕설 사태에 대한 책임 문제가 아직 지나가지 않았으니까. 다 알아들으면서 저렇게 시치미를 떼시다니, 정~말 교활하시다.


한 시간 반 가량 모시고 앉았다가 피곤하다고 하셔서 눕혀 드렸다. 오랫동안 앉아 계셔서 자세가 불편하셨을 뿐인 듯, 누워서도 정신은 초롱초롱하시다. 반야심경 암송에는 아무 거침이 없으셨고, 금강경 몇 꼭지 읽는 데는 평소처럼 눈으로 읽다가 머릿속에서 외우다가 오락가락하신다. 그런데 외우시는 대목에서는 통상적인 독경 방식을 벗어나 노래가락 화법을 적용시키려는 경향이 전보다 더 뚜렷이 나타난다.

독경이 끝났을 때 외출에서 돌아온 원장님이 들어왔다. 12월호와 1월호에 실린 내 글을 틈날 때마다 읽어드리면 좋아하신다고 얘기하니까 어머니가 내게 눈을 돌리고 "그 글을 네가 쓴 거냐?" 물으신다.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네가 뭘 안다고 글을 써!" 불호령이 떨어질 각오를 하고 있는데, "그러냐? 잘 썼다. 고맙다." 하는 부드러운 말씀.

잠시 후 "그래 <불광>에 계속해서 글을 쓸 거냐?" 물으시기에 "네, 어머니께서 안 써 주시는데 저라도 써야지요. '꿩 대신 닭'이라고 하잖아요?" 했더니 고개를 바로 하고 한참 허공을 바라보다가 말씀하신다. "그래, 거기 쓰는 건 좋은 일이다. 잘 쓰거라."

다른 어느 일에 대해서보다 구체적인 관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일이다. <불광>에 글 쓰기가 그분에게 오랫동안 매우 중요한 일이었던 사실을 비춰 보여주는 관심이다. 그리고 내가 어머니 글 쓰기를 이을 만한 마음가짐이 되었다고 판단해 주시는 것 같다. 그 동안 아버지 일을 이어서 한 것은 이것 저것 꽤 있었지만, 이제 어머니 일도 잇는 것이 있다니, 이런 일 생각하면 내가 효자 중에도 특종 효자 같은 기분이 든다.

원장님과 이사장님이 내 <불광> 글 쓰기를 반가워하는 데는 또 다른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이 요양원은 시설이나 서비스나 매우 훌륭한데, 그 사실이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것이 내가 보기에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런 글에서 이곳의 좋은 점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것이 반가울 것이다.

나도 어머니가 편안하고 쾌적한 생활조건을 누리시는 이곳의 좋은 점을 더 많이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좋은 조건 제공하는 데 보답하고 싶기도 하고, 어머니가 함께 지내시기 좋은 도반들께서 이곳을 고려할 기회가 더 많아지기 바라는 실제적 동기도 있다. 그러니 내 글에 더러 <세종 너싱홈> 홍보물 같은 냄새가 나더라도 독자들께서 혜량해주시기 바란다.


(이 글은 <월간 불광> 2월호에 기고할 글의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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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